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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3)화 (33/128)

제발, 제발 그만하게 해 주십시오. 성하. 부디. 제 목을 바쳐 창대에 꽂으라 하셔도 따르고 싸우다 죽으라 하셔도 따르겠으나 더는 못하겠습니다. 이외에는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녀가 죽으리란 확신이 섰을 때, 오스카는 교황 앞에 무릎 꿇고 애걸했다. 살인이었다. 죄악이었다. 여기서 더하면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시선을 감히 맞추지 못한 오스카는 교황의 하관만을 응시했다. 그리고 입가에 찬찬히 그려지는 호를 보았다. 아마 그때 황제가 뵙기를 청한다는 전언이 오지 않았더라면 교황은 결코 여자에게 연민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오스카에게 실망했노라 말했다. 발을 딛고 선 바닥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부정은 정체성을 흔들어 놓았다. 오스카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교황이 자리를 뜨자마자 수녀를 불러들여 그녀를 씻기고 치료하게 했다. 살아남기를 진심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검은 돌바닥은 환자에게 너무 춥고 딱딱했다.

투구를 벗은 오스카가 낮게 한숨을 쉬며 땀을 닦을 때였다. 신음하던 베로니카가 흐릿한 눈을 떴다. 그는 멍하니 굳어 있다가 투구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텅그덩하며 메아리쳤다.

오스카는 황급히 무릎을 구부리고 앉았다.

“정신이 듭니까? 제가 누군지 알아보겠습니까?”

“…봤어요.”

“…뭘 말입니까?”

“다 봤어요. 양지로 나온 바하무트 떼도, 리온도…. 그리고 메클렌부르크 경까지도.”

베로니카는 둔해진 혓바닥을 움직였다. 오스카는 불길한 직감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가느다란 목소리는 끊어질 듯 계속해서 이어졌다.

“리온이 산을 내려가고 있을 때 지반이 무너졌어요. 무사한지 모르겠어요. 무사하다면 곧 카르트에 돌아올 거에요. 리온은, 적어도 리온은 그럴 거예요.”

“…….”

“하지만 메클렌부르크 경은 죽었어요.”

오스카는 숨을 멈췄다. 베로니카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서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산이 온통 뒤덮였어요. 남쪽에서 올라온 바하무트들이 분열을 미루고 미루다가 블라센 산맥에 들러 자식을 낳고 북쪽으로 향해요. 처음부터 그런 양은 감당할 수 없었어요. 빼앗기리란 작은 검도 리온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어요. 메클렌부르크 경의 검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거에요. 그는 가지 말았어야 했어요. 그는.”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횡설수설 이어지던 말을 듣던 오스카가 손을 들어 끊어 냈다. 그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금 검을 빼앗겼다고 했습니까? 헤네시스를요?”

“확실해요. 직접 봤어요. 바하무트가 그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어요. 검은색 손잡이에 금으로 된 사자 머리가 새겨진 검이요.”

베로니카는 더 자세히 말하려다가 숨이 차서 호흡을 골랐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프고 바닥에 닿은 몸은 마치 송곳 침대에 누운 듯 고통스러웠다. 베로니카가 등가죽이 불타는 듯한 통증에 신음하자 오스카는 어쩔 줄 모르고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그가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걸까 생각했다. 왜 그렇게 죄책감이 가득한 눈으로.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래도 리온은 살았을 거예요. 살아서 카르트로 돌아오고 있을 거예요. 안전하게 올 수 있도록 마중 나갈 사람들을 보내면.”

“베르크 경은 돌아왔습니다.”

베로니카는 멈칫 굳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돌아왔다고요?”

“예. 당신은 사흘 내리 기절해 있었고 그사이 베르크 경은 파견대와 함께 귀환했습니다.”

“그럼 여기도 왔었나요?”

“…….”

꺼질 듯 작은 물음에 오스카는 대답을 주저했다. 베로니카가 반쯤 뜬 눈을 멍하니 들어 올리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허리춤에 찼던 가죽 주머니를 풀었다. 그리고 입가로 물을 흘려보내 주었다.

“아직 여기엔 오지 않으셨습니다.”

베로니카는 아기 새처럼 물을 받아마셨다. 그러나 물을 삼키기 위해 들었던 고개도 오래지 않아 힘없이 떨구어졌다.

리온이 돌아왔다. 그리고 아직 들르지 않았다.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부상이라도 입은 걸까.

“오래도록 굶었으니 부드러운 음식부터 입에 대야 할 겁니다. 바로 식사를 가져올 테니 벽에 기대어 앉아 있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오스카는 말끝을 흐렸다. 베로니카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도와줄 듯 엉거주춤 손을 뻗은 남자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곱슬한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새 둥지처럼 엉망이었고 어두운 시야 속인데도 핏기가 가신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손을 내린 오스카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처음으로 제 나이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

“등의 상처는 전부 제 탓입니다. 제가 당신이 잠들어 있는 사이 채찍을 휘둘렀습니다.”

베로니카는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동시에 불붙은 듯 아픈 부상을 인지했다. 마치 넘어졌을 때는 하나도 안 아프다가도 상처를 보면 통증을 느끼는 일과 흡사했다. 환상이 주는 혼란이 극심해서 눈치도 못 채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말없이 오스카를 쳐다보았다. 인간으로서 서로의 눈을 깊숙이 마주 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왜 그랬는데요?”

“교화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내가 동화자라서요?”

“그건 아닐 겁니다.”

“당신 생각이 아니었군요.”

오스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팔라딘에게 의지에 반하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는 딱 한 명뿐이다.

“자기 생각도 아니면서 왜 따랐어요?”

“저로서는 아버지의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르던 개가 아파서 쓴 약을 먹인다 해도 개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느 길이 진실로 올바른지 저도 알 수 없을 뿐입니다.”

“확고한 믿음이네요.”

빈정거리는 투도 그렇다고 감탄조도 아니었다. 베로니카는 벽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리온을 보면서도 그랬지만 당신들의 신념이란 단단해서 더 신기해요. 나는 항상 의심하는 못된 아이였거든요.”

오스카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로니카는 이제야 까칠한 면모 뒤에 숨은 서투른 사회성을 알아보았다. 그는 아마 독실한 신자들 외에는 평범한 친구를 하나도 사귀지 못했으리라.

“사람들은 적의나 분노를 무서워하지만 전 믿음이 무서워요. 한번 생각해 봐요. 뚜렷한 믿음이야말로 무엇이든 태워 버릴 수 있게 만드는 것 같지 않나요? 사랑이든, 양심이든, 가책조차도 자신이 하는 일이 올바르다는 믿음 아래서는 힘을 잃어요.”

신념으로 정당함만 얻는다면 인간은 끔찍한 몰살을 자행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스카는 그녀의 말을 곱씹듯 응답이 없었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두서없이 말을 이어갔다.

“혹시 <빗방울 세상> 이야기 알아요?”

“체사니아의 동화를 말하는 겁니까?”

“네. 하나의 빗방울은 안에 그만한 크기의 세계를 품고 있다는 얘기요. 저는 침대에서 듣는 동화 중에 그 이야기를 제일로 좋아했어요. 빗방울마다 세계가 있다고 듣고 나면, 우리도 어느 땅에 내리는 수억 개의 빗방울 중 하나에 살고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한도 끝도 없이 넓어진다. 우리는 먼지와 같이 작은 존재고,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아무 의미도 없다. 신도 없다. 죽음 이후의 세계도 없다. 순환만이 있다. 빗방울 안에서 무엇을 꿈꾸고 바라고 가졌든 간에 끝에는 모두가 하나로 뭉개진다. 얼핏 허무주의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베로니카가 현재를 즐기도록 하는 상상이기도 했다.

바다가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은 그저 추락을 즐길 따름이다. 적어도 떨어질 때는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리온에게 할 말이 있어요.”

베로니카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나한테 사과하고 싶으면 그 사람을 불러 줘요. 그거면 돼요.”

그에게 메클렌부르크의 마지막을 전해야 한다.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

“그 여자가 동화자였습니까?”

빨간 카펫 위에는 눈부신 햇살이 밀려들었다. 창밖을 보던 리온은 흘끗 옆을 돌아보았다.

필립 폰 비텔스바흐. 성도에서 보는 일은 없길 바란다던 새 부단장이 그곳에 서 있었다. 베이른에서 마주쳤을 때는 짧았던 은발이 어느덧 길어지고 자색 눈동자는 한층 깊어져 있었다.

“누구?”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당신이 잿더미 속에서 안고 나온 여자 말입니다. 성하께 속죄물로 바쳤다고, 교황청 내 소문이 자자합니다.”

리온은 창틀에 기대며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에 닿는 따스한 햇살이 바깥의 날씨를 착각하게 했다. 매서운 겨울인데도. 해는 여전하다.

“당신은 동화자를 발견하는 즉시 죽여야 했습니다. 그것이 자비입니다.”

“그때 죽였다면 블라센에 숨어 있는 존재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

“아직도 ‘최초의 바하무트’를 주장하시는 겁니까? 성하께서 직접 단언하셨으니 그런 건 없습니다. 당신이 굳이 파견대를 요청하는 바람에 스무 명의 귀중한 목숨만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이해 안 가는 건 어째서 단장님까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동참하셨느냐 하는 거지만….”

점점 고조되던 목소리는 스스로 흥분을 깨닫고 멈추었다.

필립은 한숨을 푹 쉬었다. 베이른에서 돌아오자마자 임시 단장직을 떠맡은 그가 아는 거라곤 리온이 귀환했다는 소식과 블라센 산맥에 다수의 바하무트가 둥지를 튼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베이른을 수호하려던 필립은 밀어닥치는 수를 감당하지 못해 성도로 돌아와야 했다. 어제는 최북단의 화이트랜드에서도 바하무트가 발견되었다는 전서조가 날아왔다. 전대륙에 바하무트가 들끓는 셈이었다. 당연히 블라센 산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유독 그곳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고, 한마디 하려던 참이었다.

교황의 집무실에서 보고를 마치고 나온 기사 하나가 그들 앞에서 정지했다.

“프로 카르트. 긴급한 문제로 성하께서 부단장님을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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