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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1)화 (31/128)

파견대는 눈이 쌓인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갈수록 경사가 심해져서 이제는 모두가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걸었다.

“전서조가 죽은 지 엿새째입니다. 전령으로 보냈던 기사도 돌아오지 않는 게 아무래도 기미가 수상합니다. 이쯤에서 귀환하는 것이 현명한 결정 같습니다.”

부관이 낮게 속삭이자 지휘관 로버트는 흘금 뒤를 돌아보았다. 백 명이 넘는 새하얀 기사들 사이에서 검은 망토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고결한 양들을 노리는 검은 늑대처럼.

리온 베르크.

성도의 존귀한 귀족 자제들을 한겨울에 블라센에 내몬 장본인.

로버트는 낮게 코웃음 쳤다.

“산에 숨어든 바하무트는 죄 숨통을 끊어 놓고 가야 같은 고생을 할 일이 없지 않겠나? 겨울이 깊어지고 있네. 얼굴 있는 괴물이니 뭐니 해서 다시 벽 밖으로 나오는 건 사양이야.”

바하무트 둥지는 무슨. 전부 망상에 불과하다. 괴물은 카르트를 건너뛰고 북부로 올라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성벽 밖에 모인 피난민들을 사냥하긴 했지만 하필 험난한 블라센에 자리 잡을 이유는 만무했다.

여태껏 마주친 바하무트도 갑자기 나타나 마차를 습격한 열 마리가 전부였다. 공교롭게도 전서조가 들었던 마차라 곤란하게 됐지만 그것이 산에 바하무트가 가득하다는 증명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문제는 불시의 습격 때 죽어 버린 세 명의 성기사였다. 모두가 좋은 집안의 자제들이다. 아무 수확 없이 사람만 죽어 버리면 이번 파견의 총책임을 맡은 로버트만 곤란해진다. 그래서 그는 리온의 주장, 그러니까 더 많은 수의 군대를 데리고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눈에 띄는 혁혁한 공을 세워야 한다. 리온이 처리한 열 마리보다 더 대단한, 더 큰. 누가 봐도 감탄할 만한 사냥감을. 더는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리온에게 밀리면 어린 종자들마저 그를 비웃을 것이었다.

로버트는 리온과 같은 해에 서임을 받은 기사로, 그 빌어먹을 빨간 뒤통수만 바라보는 만년 2등이기도 했다. 리온보다 위에 선 것은 처음이었다.

진작에 이랬어야 했는데.

신의 성력을 받은 선택받은 민족은 대부분 혈통이 오래된 귀족 가문이다. 파란 피를 가진 자들에겐 대다수 성력이 흐른다고 보는 게 옳았고, 그렇기에 가문을 이을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 중에는 명예로운 성기사가 많이 나왔다. 신성 기사단 자체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그런데 저런 평민 사생아 따위가 끼어들어 부단장 자리를 꿰차다니. 거기에 신검의 선택을 받다니.

지금에야 원래 그 자리를 거머쥐어야 했던 비텔스바흐 백작 가에 그 자리가 돌아갔지만. 로버트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인사였다고 회고했다. 이게 다 루에가와의 종교 전쟁에서 리온이 세웠던 공 탓이다. 당시엔 기사단 내에서도 리온을 추종하는 자가 많았다. 모조리 티란에서 죽어 버렸지만.

“어차피 식량 문제도 없지 않은가? 앞으로 사흘 정도 더 가 보고 다시 의논하도록 하지.”

로버트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물론 산짐승이 유독 자주 보이긴 합니다만….”

부관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험준한 봉우리를 올려다보았다.

원래 겨울이 깊어진 이 시기에는 산짐승들이 굴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파견대는 식량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산에서 내려오는 동물을 자주 맞닥뜨렸다.

“동물들이 산을 떠나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재난이 닥치기 전처럼 느껴져서 말입니다….”

로버트는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때마침 창공에서 날카로운 맹금류의 울음소리가 들린 까닭이었다. 매 한 마리가 그들 위를 빙글빙글 선회했다. 양 떼 무리에서 채갈 가장 약한 새끼를 찾듯이.

로버트는 비웃었다.

“아니. 화산이라도 폭발할 거였다면 창공을 나는 새도 지금쯤 꽁지깃이 빠져라 도망치고 있었겠지. 도망은커녕 우리를 먹잇감 삼아 내려보고 있질 않나. 거슬릴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는군그래.”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로버트의 입가에서도 웃음기는 점점 사라져 갔다.

늘어나고 있었다. 빙빙 도는 새의 수가.

하나, 셋, 다섯.

잔치라도 열린 듯 새들이 모여들었다. 파견대는 불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리온이 대열을 벗어나 로버트에게 다가온 것도 그때였다. ‘프로 카르트(카르트를 위하여)’, 라고 예의를 먼저 지킨 리온이 이어 말했다.

“당장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곧 ‘그것들’이 올 겁니다.”

흠잡을 데 없는 예의. 그러나 어조는 차라리 명령에 가깝다. 로버트는 눈을 부라렸다.

“지금 감히 지휘관에게 명령하는 건가?”

“명령이 아니라 권고입니다. 고작 백 명으론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떠나지 않으면 다 같이 블라센에 매장됩니다.”

“내가 바보인 줄 아나? 엿 먹일 속셈이라면 집어치워. 무슨 말을 해도 겁먹어서 도망치진 않아.”

“경은 공기의 떨림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 확실히 느껴지는군. 떨고 있는 게 자네였나? 확실히 평민이 감당하기엔 어려운 임무였겠지. 좋아, 원한다면 먼저 내려가도 괜찮네. 동화자나 바쳐서 합류한 용병에겐 어차피 지킬 명예도 없잖나?”

엿새간 무반응이던 리온의 눈에 처음으로 희미한 불꽃이 일었다.

그래, 그 표정이야. 로버트는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굴욕과 치욕과 모멸. 그간 제 몫으로 부당하게 할당되었던, 원래 리온의 것이어야 했던 감정들이다.

그때 저 멀리, 비탈의 건너편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들은 동시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 비탈은 성도와 더 가까운 곳으로, 그들이 산을 오르며 지나온 길이기도 했다.

후방 지원이라고? 어째서?

왠지 모를 한기가 그들을 뒤덮은 순간, 적요 속에 파수를 맡은 기사가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적습!!!”

“검을 뽑아라!!!”

그것은 화살과도 같았다. 쏟아지는 바하무트의 화살.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목 없는 인간들이 쿵, 쿵 굉음을 터뜨리며 눈밭에 착지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바하무트는 생김새 때문에 마치 자살하는 인간처럼 보였다.

그리고 몸을 사리지 않는 탓에 높은 데서 떨어진 충격으로 팔다리가 마구 부러지고 휘어지거나 허리가 꺾이기도 했다.

그 모습이 그들을 더욱 기괴해 보이게 만들었다. 인간의 두 배는 되는 덩치. 비쩍 말라 뼈가 도드라진 신체와 얼굴이 없는 대신 목에 달린 수백 개의 이빨들.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교황이 리온에게 허락한 파견대는 실전 경험은 부족한 젊은이들이었지만 어린 시절까지 합치면 모두가 10년 이상 훈련한 전사들이었다.

전장의 경험이 있는 훌륭한 야전관만 있다면 버틸 수 있었다. 문제는 유서 깊은 가문의 로버트에겐 단 한 번도 카르트 밖으로 나간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무슨…. 빌어먹을. 어디 숨어 있다 갑자기….”

“지금이라도 산을 내려가야 합니다.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말에 타서 전투를 지휘하십시오.”

리온이 충고했지만 그것은 도리어 로버트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자신은 충고가 필요한 애송이가 아니다. 아, 어쩌면 이것은 신이 내리신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가 리온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할 천우신조의 기회.

로버트는 이를 딱 부딪혔다.

“리온 베르크.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 두는데 이 파견대의 지휘관은 네가 아니야. 이 이상 더 나서면 월권의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너처럼 불길한 눈깔을 가진 괴물들을 내가 다 쓸어버린 후에 말이지.”

짓씹듯 위협을 내뱉은 로버트는 바로 앞의 눈밭에 박힌 채 팔다리를 휘젓는 바하무트에게 보란 듯이 검을 찔러 넣었다. 시뻘건 피가 치솟으며 새하얀 눈이 물들었다. 로버트는 핏물이 흐르는 장검을 높이 쳐들고 고함쳤다.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마라! 후퇴란 없다! 도망치는 자는 내 손으로 베겠다! 재생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찌르고 베어라! 뼈 가죽밖에 없는 마귀를 영원히 굶주린 심연의 지옥으로 돌려보내라!!!”

지휘관의 호령에 기사들은 함성으로 보답했다. 기세는 가히 신의 군대라 할 법했으나 리온은 감탄 대신 서늘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위에서 무작위로 떨어지는 적과 용맹함만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적의 숫자를 가늠해야 한다. 유리한 위치와 퇴로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전투 전반을 살펴야 할 로버트는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무작정 싸움에 뛰어든 상태였다.

곤란하게 되었다. 전장에서 두 명의 지휘관은 혼선을 일으킬 뿐이니.

리온은 일단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그는 전장을 여러 번 누볐고 우두머리가 아무리 미련하게 굴더라도 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혼란은 모두를 무너뜨린다.

한 번, 두 번, 칼날이 번득일 때마다 뜨거운 핏물이 튀었다. 리온은 어느 순간부터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다 얼마 전에 비슷하게 움직이는 칼날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춤추듯이 검을 휘두르던 여자.

재능은 확실히 보였다. 더 어렸을 때, 더 빨리 검을 접했으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검 자루에서 맞닿았던 작은 온기를 떠올렸다. 불과 며칠 전 일인데도 백만 년쯤 지난 기억처럼 여겨졌다. 희미한, 잊어버려야 할….

서걱,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하무트를 절반으로 베어 넘긴 순간, 내리꽂히는 시선이 희미한 피 안개 너머로 느껴졌다. 리온은 후드득 떨어지는 핏물을 고스란히 맞으며 고개를 들었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고고히 선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는 인간의 형태.

그러나 바하무트에겐 본디 머리가 없다.

“…찾았다.”

최초의 바하무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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