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30)화 (30/128)

툭, 앞으로 가죽 주머니가 떨어졌다.

“물입니다.”

물. 목이 마르다. 갈증은 오래됐다.

넋을 놓았던 베로니카는 뜻이 머릿속에 와닿자마자 허겁지겁 허리를 세우고 손을 뻗었다. 찬물이 입을 적시고 목구멍을 흐르자 머리가 점차 맑아졌다.

앞에 선 남자는 오스카 베르크였다.

“…리온은요?”

목을 축이자마자 곧바로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오스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찾아온 건, 단장님께서 목숨은 붙여 놓으라고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거참 친절하네요. 씩씩해지면 또 찾아와서 괴롭히려는 목적이래요?”

베로니카는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오스카는 부어오른 얼굴과 며칠 사이에 안쓰럽게 마른 팔다리를 쳐다보다가 불쑥 대답했다.

“블라센에 가셨으니 당분간은 못 오실 겁니다.”

목을 끝까지 젖히고 가죽 주머니를 흔들던 베로니카가 그대로 멈췄다. 뚝, 물주머니의 구멍에서 마지막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블라센 산맥에 갔다고요? 언제요? 설마 리온을 찾으러요?”

자세를 바로 세우고 급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오스카는 원하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앞으로 식사 때마다 찾아올 겁니다. 그때 간밤에 본 환상을 저에게 보고하십시오.”

“아니, 그보다 더 전에요. 메클렌부르크가 왜 블라센에 갔어요?”

“호칭을 똑바로 하십시오. 당신에겐 메클렌부르크 ‘님’입니다.”

오스카는 짜증을 누르며 호칭을 고쳐 주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그의 태도가 처음과는 미세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베로니카가 검을 연습할 때, 문 앞에 우뚝 서서 새벽부터 밤까지 숨소리 한 번 안 내던 사람이다. 그가 그녀가 굳이 알 필요 없는 단장의 블라센 행을 언급했다. 실수가 아니다. 어쩌면, 갇힌 그녀에게 일말의 동정을 품기 시작한 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당장 그 오만한 기사단장만 해도 그랬다.

“네. 메클렌부르크 ‘님’이요. 말은 차갑게 했어도 리온을 걱정해서 떠난 거죠? 예언이 신경 쓰여서 직접 나간 걸까요?”

“착각하지 마십시오. 예언이 시발점이긴 해도 단순히 베르크 경 때문만은 아닙니다. 때마침 카르트의 수호를 대신할 부단장님께서 돌아오셨고, 신검이 바하무트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발상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검은 상징물일 뿐이잖아요.”

“헤네시스나 아포칼립시스는 그냥 검이 아닙니다. 장벽에 쌓인 성력을 먹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베르크 경이 티란에서 저지른 과오 또한….”

흥분해서 거기까지 말하던 젊은 기사는 이번 건은 말실수라고 생각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서둘러 결론을 내버렸다.

“어찌 되었든 단장님은 일의 경중을 아시는 분입니다. 베르크 경 하나 때문에 휘하를 소집하시진 않으셨을 겁니다.”

그분의 아들일지라도요?

떠보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다른 기사들이라고 베로니카 같은 추측을 안 해봤겠는가. 그런데도 추문 하나 돌지 않았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그녀의 생각이 틀렸거나, 아니면 기사단장이 혈육이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리온을 차갑게 대했거나.

베로니카는 고민 끝에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오셨다는 부단장님은 어떤 분인가요?”

“비텔스바흐 경은 율법의 수호자라고 알려진 분입니다. 그분의 엄중함에 비하면 단장님은 차라리 규율에 융통성 있으신 편이라고 하면 이해가 좀 될 겁니다.”

무른 쪽이라고? 그 메클렌부르크가?

베로니카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처음에는 오스카만큼 차가워 보이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이어 메클렌부르크가 나타나 그 인상을 깨부숴주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그게 아직도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이라 할 수 있나?

베로니카는 헛웃음을 짓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당신은 가장 유연한 사람이 되겠군요.”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날 동정하죠?”

모욕이라 생각하고 눈썹을 세웠던 오스카는 끝끝내 부정하지는 못했다. 베로니카는 비 갠 뒤의 숲 같은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당신은 지금의 상황에 어느 정도 불합리한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까지 해 주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고통받는단 사실이 마음에 걸려서.”

처음 만났을 때 오스카는 약한 믿음이 동화를 부른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교황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녀는 태어나기도 전의 일로 고통받고 있노라고. 베로니카는 그 자리에 오스카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그 증거로 오스카는 베로니카의 시선을 먼저 회피했다. 눈이 마주치면 읽히기 때문이다. 내면에 일어난 작은 파문을. 변화를. 하지만 때로는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 돌은 깊이깊이 추락해 가슴 밑바닥에 자리 잡을 테니까.

문이 열리고 닫혔다. 베로니카는 또다시 홀로 남겨졌으나 희망은 불씨처럼 남았다.

***

아픔은 사람에게 교훈을 남긴다. 그럼 폭력은?

흔적. 검은 벌레에게 새까맣게 살점을 파먹힌 흔적뿐.

베로니카는 움츠린 손을 얼른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왜인지 어둠에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아무리 남들보다 담대한 성격을 지녔대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단련한 남자에게 목이 졸린다거나 뺨을 얻어맞는 일방적인 폭력이 익숙할 리가 없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흔적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심장은 작은 발소리만 들어도 쿵쾅거리며 질주했고, 상대의 정체를 확인할 때까지는 구석에 웅크린 채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극도의 스트레스는 신체마저 일그러뜨렸다. 불이 꺼진 방안에서 동화와 불안이 극심해질 때면 베로니카는 꽉 쥔 주먹을 펴지 못해 애를 먹어야 했다.

나약한 인간. 비틀린 근육 하나 통제하지 못하는 무력한 인간.

강해지고 싶었는데. 이깟 상태로 뭘 하겠다고.

오스카는 이후로 정말 끼니때만 찾아왔다. 며칠 새 살이 내린 그녀를 다시 살찌워 놓으려는 듯 풍요로운 식사가 하루에 세 번 이어졌다. 베로니카는 억지로 음식을 욱여넣고 오스카에게 제가 본 환상을 말할 때마다 스스로 가축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묘사도 유쾌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바하무트가 다리를 벌리고 새로운 괴물을 낳는 모습. 인간과 달리 다리부터 삐져나오는 괴기한 출산. 월동을 준비하는 동물처럼 시체를 나르는 규칙까지.

“시체 속에서 아는 얼굴을 봤어요.”

이야기 도중에 베로니카는 그렇게 말했다. 오스카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누구 말입니까?”

“카르트에 들어오기 직전에 본 아이요.”

예상하던 답이 아니었는지 오스카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베로니카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갈색 피부에 잿빛 머리를 지닌 아이였어요. 아마 롬 군도에서 온 이방인이겠죠. 작은 체구에 팔 하나를 잃은 모습이 애처로워서 기억에 남았는데, 그런데 그 아이가 얼어붙은 시체 산의 중앙에 놓여 있더라고요.”

오스카는 침묵했다. 베로니카는 벽 너머에 있을 블라센 산을 응시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광야에서 루에가의 강도를 만난 적도 있는데, 그중에 도망친 한 명이 나한테 먹혔어요. 아니,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나와 연결된 바하무트지만. 알고 있지만….”

“진정하십시오. 당신이 말하는 이들은 전부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죽어도 마땅하다는 건가요?”

베로니카는 목이 멘 채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 따위는 없었다. 고개를 들자 허공에 시선을 둔 옆얼굴이 보였다. 어느 순간부터 오스카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 들었다.

“하긴, 당신은 안전한 카르트의 시민이니까요. 이 땅에는 겨울을 날 양식과 봄의 종자가 충분하겠죠. 경작할 땅을 가진 인간이 집 없는 피난민을 이해할 리 없어요.”

카르트는 영원한 낙원의 땅이다.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왜인지 그 사실이 의심스럽기 시작했다. 예언이 신경 쓰여서는 아니었다. 그저, 피난민이 모조리 잡혀갔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건 장벽 바깥까지 바하무트가 밀어닥쳤다는 뜻이었다.

***

그날 밤은 평소보다 고통이 덜했다. 왜일까. 날이 갈수록 환상은 뚜렷해지고 동화는 견딜 만해진다. 어째서? 성력도 없는데 어떻게?

남들과 무엇이 달라서 미쳐 죽지 않는 걸까.

설마 이대로 바하무트가 돼버리는 건 아니겠지.

수많은 의문 끝에 눈을 떴을 땐 또다시 환상 속이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이번에는 어두운 골짜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높은 산 꼭대기에서 무언가를 번갈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상이 무엇인지 눈치챈 베로니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왼쪽의 평지대에 한 무리. 오른쪽 비탈에 또 한 무리의 기사들.

틀림없었다. 눈부시게 흰 갑옷을 입은 남자들은 신성 기사단이었다.

베로니카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알았다. 왼쪽은 메클렌부르크가 이끄는 결함 없는 기사들이었고 오른쪽은 리온이 포함된 파견대였다. 리온은 용병들이나 입는 회색 갑옷에 검은 털 망토를 걸치고 있어 눈에 띄었다.

내려다보는 바하무트는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쪽을 삼킬 것인가.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아무리 봐도 리온 쪽 기사들이 더 수가 적었고 상대하기 쉬워 보였다. 바하무트가 오른쪽으로 발길을 돌린 순간이었다.

지켜만 보던 베로니카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른쪽은 안 돼. 리온은 안 돼. 그만해. 가지 마!

그 순간, 바하무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메클렌부르크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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