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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29)화 (29/128)

검은 어둠 속에서 빨간 촛불이 세차게 일렁였다. 점이다가 엄지만 하다가 한 뼘만큼 커지며 선명해진다.

“…아.”

옆으로 누운 베로니카는 불에 손을 뻗다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뜨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신나게 놀다가 풀리는 실타래의 끝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영영 내리지 않는 고열에 전신이 겨울 풀잎처럼 버석하게 말라 버렸다.

왜, 성력도 없는데 진작에 미쳐서 죽어 버리지 않은 걸까.

빙글빙글 어지러운 바닥이 벽처럼 느껴졌다. 검은 돌벽으로 이루어진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검은 복도의 고문관들은 베로니카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폭력적으로 몰아치는 대기를 감당할 수 있는 자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성기사 하나가 그녀를 작은 감옥에 처넣고 문을 닫아걸었다.

잔인한 고문은 없었다. 다만 동화는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정신을 놓을 때마다 보이는 환상은 주로 인간을 먹는 것. 괴물을 낳는 것.

뒷골목의 음식물에서 태어나는 하얀 구더기처럼 바하무트가 꼬물거리며 일어난다.

베로니카는 차라리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이 갈증과 목마름을 견디다 못한 뇌가 터져 죽어 버리기를.

그러나 그녀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심장이 타들어 가듯이 아픈데도. 어째서인지 끝나지 않는 고통에 잠겨.

“일어나. 단장님께서 보기 원하신다.”

다시 정신이 든 건 누군가 팔을 홱 잡아당겨 일으켰을 때였다. 벽의 고리에 십자가처럼 양손이 걸리자 베로니카는 힘없이 늘어져도 쓰러질 수 없었다.

단장이라고…? 메클렌부르크를 말하는 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게 진짜였군.”

뚜벅뚜벅 묵직하게 독방에 들어선 남자가 게슴츠레한 베로니카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때와 다름없는 철혈의 얼굴이 빛에 드러나자 베로니카는 눈살을 찌푸리고 턱을 높이 쳐들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까지 세게 악물었다. 이번에 또 손을 대면 깨물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리온과 비슷하지만 살면서 농담 한번 안 해 봤을 것처럼 딱딱한 얼굴. 리온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웃지 않는 얼굴이 되는 걸까?

그들이 부자 관계라는 확증도 없는데 생각은 두서없이 이어졌다.

메클렌부르크가 입을 뗀 건 그때였다.

“주기적으로 환상을 본다고 들었다.”

“…….”

“이 방에 들어온 이후로 본 것들이 알고 싶다.”

요구는 간결했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침묵했다. 일단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만한 환상도 보지 못한 데다 그가 제게 했던 짓을 생각하자 특유의 반항심이 일었다.

“말하기 싫은 건가?”

“…….”

“현명하지 못하군. 피할 수 없는 일을 미루는 것은 나태한 자들의 관습이지.”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지자 메클렌부르크는 그녀를 일으켰던 기사에게 눈짓했다. 지극히 우아하고도 귀족적인, 도시의 거지 아이에게 한 푼을 베푸는 대귀족의 얼굴이었다.

명령을 받은 기사는 정자세로 서 있다가 곧장 성큼성큼 다가왔다. 베로니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음 순간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센 타격음과 함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가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려도 못할 수가 없었다. 홱 돌아간 머리가 먹먹해지며 깨질 듯 어지러웠다.

“목격한 환상을 말씀드려라. 미친 척해 봐야 통하지 않는다. 이교도를 조금만 심문해 봐도 알지. 눈빛에 초점이 있는 놈들은 항상 머리를 굴려.”

그녀를 때린 기사가 비웃듯이 위협했다. 투구 속으로 보이는 눈이 시퍼런 칼날 같았다.

맞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또 때릴 것이다. 베로니카는 아픔보다도 기억으로 몸을 떨었다. 처음 지하에 내려왔을 때 들었던 무수한 참회의 소리.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손이 닳도록 빌던 사람들과 애원. 비명. 신음.

입 안에서는 피 맛이 나고 뺨은 얼얼했다. 힘 조절을 했어도 건틀릿은 여린 살을 긁고 지나가 피를 맺었다. 생리적 눈물이 고인 베로니카는 마침내 무거운 입술을 뗐다.

“나한테 정말로 뭘 원해요? 환상을 말하면 풀어 줄 건가요? 그것도 아니잖아요. 리온은 이곳이 안전해서 날 여기 두었다고 했어요. 이런 대우를 받으라고 한 건 결코 아니에요. 그가 돌아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물론 베로니카도 기본 위계 정도는 알았다. 그가 그녀를 위해 교황이나 기사단장에게 분노하진 않으리란 사실도.

하지만 그녀의 눈은 자신을 때렸던 남자에게 똑바로 향해 있었다. 실제로 그는 리온의 이름이 나오자 들어 올렸던 손을 미묘하게 굳혔다. 그때였다.

“스스로 했던 예언을 기억하고 있나?”

메클렌부르크가 한 발자국 나서며 질문했다. 그리고 베로니카가 대답하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작은 검을 바하무트에게 빼앗기고 카르트는 무너지리라.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고 얼굴 잃은 신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으리라. 그것이 네가 감히 신의 제사장 앞에서 내뱉은 예언이었다.”

예언이라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베로니카는 신께 맹세코 그따위 불길한 소리를 지껄인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카르트가 무너진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곳은 예언이 말한 영원한 낙원의 땅이었고, 예언은 결코 부딪히거나 모순되는 법이 없었다.

“들은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분명 예언이었다. 20년 전에, 예언의 시대를 살았던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지.”

베로니카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메클렌부르크는 그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탐색하듯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신의 검이라 불리는 보물이 두 자루 있다. 헤네시스와 아포칼립시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중 하나의 검은 지금 블라센에 수색을 나가 있다. 그리고 돌아올 시일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지.”

이때까지도 안개를 헤매듯 어지럽던 정신은 마지막 문장에 문득 또렷해졌다.

리온 베르크.

작은 검을 빼앗긴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온은 살아서는 제 검을 바하무트에게 빼앗길 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리온은, 아니 베르크 경은 무사한가요?”

황급히 입을 여는 바람에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맞고도 침착하던 그녀가 평정을 잃자 메클렌부르크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의 환상은 뭐라고 말하던가?”

“환상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어요. 그냥 계속 인간을 먹고… 자식을 낳고…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쓸모 있지 않아요.”

생각만큼 필요치도 않다. 그동안 봤던 장면들도 단순히 운으로 정보가 들어 있었을 뿐이다. 베로니카는 왜인지 무언가 울컥 치밀어 말끝을 흐렸다.

“그들이 데려와 먹던 인간들에게서 성기사의 흔적은 보지 못했나?”

“본 적 없어요. 갑옷 조차도요. 사람들의 시체가 말도 안 되게 많긴 했지만. 그래도 갑옷은 없었어요.”

굳이 말하자면 찢어진 옷가지들은 주로 피난민의 것처럼 보였다. 각양각색의 의복과 상징과 깃발들. 낙원을 찾아 카르트에 온 이방인의 것.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푹 수그린 때였다.

“단장님. 필립 비텔스바흐 경이 베이른으로 갔던 파견대를 이끌고 카르트에 귀환하셨습니다.”

열린 문 앞에 선 기사가 메클렌부르크에게 보고했다.

고향 도시가 언급되자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베이른에도 기사단이 파견됐었던가. 리온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성하를 뵙기 전에 바로 나한테 오라고 전해라. 부단장 이외의 기사들은 푹 쉴 수 있도록 하고.”

부하를 쳐다보지도 않고 명령한 메클렌부르크는 베로니카를 한참 동안 응시하다가 발길을 돌렸다. 더 얻을 정보란 없다고 결론 내린 눈치였다.

정확한 판단이어서 더 비참했다. 베로니카는 커다란 등을 멍하니 보다가 충동적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런 예언을 들었는데도 아무도 보내지 않는 건가요?”

멈칫 걸음이 멈추었다. 베로니카는 상대가 눈도 똑바로 올려다봐선 안 되는 대귀족이란 사실을 잊었다.

“제가 한 말이 정말 예언이라면, 무슨 일이 있기 전에 구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 아니잖아요.”

메클렌부르크가 고개를 돌렸다. 베로니카는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세한 변화를 눈치챘다. 그리고 확신했다. 리온은 메클렌부르크 대공 가의 태생이었다.

“아직 그 녀석을 잘 모르나 보군.”

리온과 똑같은 표정으로 조소한 남자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소식 없이 도망칠 수는 있어도 쉽게 죽지는 않는다. 죽을 일이 생긴다면 동료들을 다 삼켜서라도 돌아오겠지.”

리온이 저지른 불명예에 지독한 수치를 느끼는 목소리였다. 베로니카가 말을 잃은 사이 메클렌부르크가 방을 나갔다. 기사들은 나가기 직전에 벽에 걸린 팔을 풀어 주었다.

***

옆으로 누운 바닥은 방문객 따위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이전과 달라진 건 이제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리온을 걱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선인장, 하고 베로니카는 소리 없이 혀와 입술을 움직여 보았다.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베이른에서 나가본 적 없던 그녀지만 그 남부 사막의 식물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뾰족뾰족 가시가 나는, 부족한 수분만 먹고도 커다랗게 성장하는 초록 생물.

그것을 보면서 한때 베로니카는 인간도 선인장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적은 애정만 받고도 쑥쑥 크도록 적응해 버린다. 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베로니카는 옛날부터 잘해 주는 사람을 좋아했다. 첫사랑은 열 살 때, 그녀에게 네잎클로버를 찾아준 남자애. 그녀보다 키도 작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아이였지만 그때 그녀는 금세 사랑에 빠졌다. 맹목적이었다. 그녀는 누군가 손을 내밀면 품에 안겨드는 사람이었다.

몸이 한 군데도 빠짐없이 감싸이는 감각이 좋다. 채워지지 않는 사람들은 평생 자신을 채우려고 한다. 자신을 좋아했으면 한다는 말, 이유를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활활 타는 불에 눈이 멀어 버리니까. 다른 것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리니까.

리온은 어둠 속에 피어난 그녀의 불꽃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귓가에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내려앉았다. 힘겹게 다시 눈꺼풀을 올리자 흰 갑옷의 다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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