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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28)화 (28/128)

딱딱 부딪히는 지팡이 소리에 이어 교황과 키가 훤칠하게 큰 중년의 기사가 들어왔다.

베로니카는 서둘러 검을 바닥에 내려놓고 똑바로 섰다. 허리를 굽혀 절해야 하는 걸까?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걸까?

베로니카는 평민 여자다. 이런 예절은 배워 본 적이 없다. 어쩔 줄 몰라 하다 애매하게 고개를 숙였다.

“눈을 들어라.”

뚜벅뚜벅 걸어와 명령한 자는 기사단장이었다. 동굴이 울리는 듯한 저음에 커다랗게 드리운 그림자를 느끼며 베로니카는 긴장한 얼굴을 들었다.

날카롭게 생긴 이목구비는 지금까지 봐 온 어떤 사람보다 차가웠다. 얼음을 깎아 만들었대도 믿을 법했다. 흔히들 기사라고 하면 떠올리는 인상 그대로 묵직하고 강인한 체구. 하지만 베로니카의 신경은 다른 데 팔렸다.

희게 물들기 시작한 머리가 붉었다.

적발. 적발이라고.

“어떻게든 친부의 관심을 사고 싶었을 뿐이야. 명망 높은 성기사도 신과 가까워진 자식은 챙기리라 생각한 거지.”

순간 안에서 뭔가가 달칵 톱니처럼 맞물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지만.

“실제로 아버지는 관심을 보였으니까. 물론 자식이 아니라 성력에 흥미를 보이고 나를 데려갔지만.”

명망 높은 성기사. 쉰이 훨씬 넘은 나이. 드문 머리색.

베로니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업적이 많은 메클렌부르크는 몰라도 리온이 붉은 기사라 불리는 것은 그 머리색이 흔치 않은 특징인 까닭이다.

우연일 리 없다. 잘 보니 뚜렷한 이목구비도 비슷했다.

리온이 간혹 짓곤 하는 잔혹한 표정이 그대로 중년의 얼굴로 뒤바뀌어 있었다.

바늘을 찔러도 들어갈 데 하나 없을 것 같은 기사였다. 베로니카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오스카가 어제오늘 경멸을 내비친 정도라면 기사단장은 경멸의 가치도 없는 벌레를 보듯 그녀를 마주 응시했다.

“확실히, 동화자입니다. 일반 적안과는 다릅니다.”

베로니카가 충격에 빠진 사이 그녀를 무심하게 들여다보던 단장이 입을 뗐다.

교황은 다섯 걸음쯤 거리를 두고 자글자글한 얼굴을 자라처럼 쭉 내빼고 있었다.

“듣기로는 최초의 바하무트에 동화된 자라고 하더구나. 다른 동화자와 다른 점이라도 보이느냐?”

“그런 건 없습니다. 제정신을 유지한다는 점이 독특하긴 해도 그건 단지 성력이 생명력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하는 메클렌부르크의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느스름했다. 그가 나직이 물었다.

“하지만 너무 어려 보이긴 하는군. 몇 살이지?”

“스무 살이요.”

베로니카는 잔뜩 긴장한 채 대답했다. 그러자 교황이 딸각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주름에 덮여 작아진 눈은 검은자만 보여서 무서웠다.

“스무 살이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어미가 아이를 가진 채로 광야에 갔던 게지.”

“…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반문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되물었다.

감히. 교황과 대귀족 앞에서.

베로니카는 재빨리 입을 막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교황이 인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두려움에 떨 거 없다. 이제는 알아도 될 이야기니까. 아이야. 어떤 자들이 동화자가 되는지 알고 있느냐?”

그 질문에 베로니카가 움찔했다. 하필 며칠 전에 오스카와 입씨름했던 주제였다.

덕분에 교회의 의견 정도는 명확히 알고 있었지만. 베로니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교황의 뒤편에 선 오스카를 힐끔 바라보았다.

“…믿음이 부족한 자들 아닌가요?”

“음. 왜 그렇게 생각하지?”

“믿음이 부족하니까 마귀에게 정신이 잠식되는 거라고… 어디선가 들어서요.”

“대단히 모범적인 대답이구나.”

교황이 이번엔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예상보다 유한 반응에도 베로니카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메클렌부르크는 어떤 말도 보태지 않고 베로니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야, 우리는 지난 2년간 여러 동화자를 봐 왔다. 개중에는 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신실한 사제가 있었고, 기도하는 낙으로 살아가는 치매 노파도 있었단다.”

교황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조부처럼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베로니카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믿음과는 무관하고 순전히 운에 따른 동화라는 건가.

그때 교황이 덧붙였다.

“다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공통점이요…? 그게 뭐죠?”

“20년 전, 광야의 신상이 목을 잃었을 때 대신전을 방문했다는 사실이지.”

베로니카의 눈이 커졌다.

바로 얼마 전에 지나친 끝없는 황무지와 거대한 신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부모에게서 들은 적 없느냐?”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런 얘기를 해 주신 적이 없어요.”

“저런, 안타까운 일이구나. 순례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었으련만.”

어쩌면 들은 적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어린 시절의 일이라 기억 못 하는 것뿐. 그리고 아버지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죽은 어머니의 언급 자체를 꺼렸으니까.

“광야의 예언에 대해서는 들어 봤으리라 믿는다. 20년 전, 여름의 순례자들이 대신전에서 목이 사라진 신상을 발견한 유명한 일화지. 그 후로 신탁의 시대는 끝났고 사람들은 신이 죽었다고 말했다.”

물론, 광야의 석상은 가장 유명한 예언 중 하나다.

목이 잘려 나간 신상은 누가 봐도 흉조였다. 그뿐인가. 이전까지 대륙의 사건 사고를 예언하던 사제들이 더는 신탁을 듣지 못하게 되었다. 정말로 신은 죽은 것만 같았다.

약해진 신권을 교황은 극단적 종교주의로 다시 확립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이단 심문을 통해서. 공포로 신앙을 되돌렸다.

지난 20년간 얼마나 많은 사교도들이 끌려가 화형을 당했던가.

“바하무트에게 동화된 인간들은 그 신상의 첫 목격자였다. 그해 여름에 광야를 방문했던 순례자들. 나 또한 그곳에 있었고 그 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단다. 내리쬐던 뙤약볕과 무더웠던 샛노란 황무지. 신전에 가득하던 비탄과 기도의 소리가 아직도 눈을 감으면 들리는 듯하구나.”

교황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아마 베로니카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는 부풀기 시작한 배를 이끌고 찾아가 신께 아이의 축복을 빌고자 했으리라.

“자, 아이야. 이제 내가 왜 너를 찾아왔는지 알겠느냐?”

교황은 어질고 너그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듣고도 베로니카는 여전히 그의 방문 목적을 알지 못했다.

망설이다 고개를 저었다. 교황은 친절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것들이 왜 신상의 목격자들을 살려 두는지 알고 싶다. 머리를 열어 보고 생각을 읽어 내고 싶어. 하지만 동화자들은 늘 얼마 못 가 죽어 버렸다. 지껄이는 말을 들을 새도 없이 말이다.”

그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두려움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교황 또한 광야의 목격자다. 제게 찾아올지 모르는 바하무트를 무서워하는 것이다.

거기까지 결론 내렸을 때 교황은 묵묵히 서 있던 기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메클렌부르크는 곧장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쥐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사고가 정지했다.

컥. 거센 악력이 숨구멍을 짓눌렀다. 베로니카는 두 팔을 들어 미친 듯이 손을 긁어내렸다. 떼어 내려고 발버둥 치고 고통스럽게 켁켁거려도 소용없었다.

아파. 싫어. 싫어. 살려 줘.

내뻗은 손끝에 표정이 딱딱히 굳은 오스카가 보였다. 공기가 세차게 일렁이며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는 검 자루에 손을 올리며 뒤로 물러나다가 탁자에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물잔을 돌아보았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리온은 성력이 흐르는 피 같다 하였지만, 피 또한 대량으로 흘러나갈 때는 모를 수 없는 법이다.

메클렌부르크가 그녀에게 깃든 리온의 성력을 거두어들였다. 베로니카는 눈물이 고인 흐린 시야로 냉정한 얼굴들을 하나하나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얼굴이 리온 베르크인 것은 전부 제 목을 조르는 기사 때문이다.

비슷해서. 단지 비슷해서.

아니, 사실은….

깜빡이는 시야가 작아지다가 새까매졌다. 의식은 거기서 끊어졌다.

***

“끅, 윽.”

오스카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인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했다.

아니, 살인이 아니라 교화다. 믿음이 부족한 자를 심판하는 일이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제게 손길을 뻗던 여자의 얼굴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풀썩, 하는 소리가 나더니 여자가 바닥에 넘어졌다.

죽었으리란 예상과 달리 그녀는 바닥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대기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메클렌부르크가 검을 뽑아 들었다.

“성하. 뒤로 물러서십시오.”

교황은 자연스럽게 오스카의 호위 범위 내로 들어왔다. 오스카 또한 발검했다. 그의 시선은 단장의 손에서 시퍼런 검광을 드러낸 신검 헤네시스에 고정되었다.

세간에서는 두 자루의 명검 헤네시스와 아포칼립시스를 신이 들고 있는 두 개의 검이라고 말한다. 신상과 달리 두 검은 쌍둥이처럼 길이가 같지만.

기사단장이 그 귀한 것을 뽑아 들었으니 위험하다는 뜻이다. 역시 단순한 여자가 아니라….

“작은 검을 빼앗길 것이다.”

그 순간 모두의 표정이 달라졌다. 방을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지만 영혼까지 박히듯 또렷했다.

“신의 검을 든 바하무트가 카르트를 무너뜨리고 영광을 앗아 갈 것이다.”

교황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단 세 사람이 듣는 가운데 저주의 말이 이어졌다.

“푸주한은 돼지머리 대신 자식의 머리를 치고 구두장이는 끈에 목을 매어 자살할 것이다. 늙은이는 일찍 죽지 못함을 비탄하고 갓 태어난 아이는 산 제물로 바쳐지며 아이 잃은 어미의 통곡이 아비를 피 흐르는 전장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숨도 쉴 수 없었다. 신탁의 세대에 태어나지 못한 오스카이건만 이것이 예언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종말의 기도와 울부짖음이 신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리니 그는 얼굴을 잃었기 때문이라.”

그 말을 끝으로 여자가 털썩 옆으로 쓰러졌다. 일렁이던 대기가 가라앉으며 침묵이 흘렀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한기가 등줄기를 휘돌았다. 끔찍한 적막이 숨을 쉰 끝에 가장 먼저 소리 낸 건 입을 달싹거리던 교황이었다. 그가 나이를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고문실에 가둬라! 이교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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