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27)화 (27/128)

뎅, 뎅, 뎅.

아, 또 이 종소리네. 아까도 울렸는데.

베로니카는 눈을 감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 소리는 아까 분명, 리온과 눈이 마주쳤을 때도 울렸더랬다. 그는 종이 12시마다 울린다고 말했고, 베로니카는 시간에 상관없이 검을 더 휘두르다 흘린 땀이 찝찝해서 한 번 더 씻었다.

그 후에는? 잠깐만.

베로니카는 번쩍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자 머리가 한차례 어질했다. 잠드는지도 모르고 침대에 눕자마자 혼절했다. 주위는 어제와 같았고 여전히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침대 옆의 의자는 텅 비어 있었다. 가 버렸다. 종소리는 자정이 아니라 정오를 알리는 소리였다.

현실 분간이 안 되어 잠깐 멀거니 앉아 있는데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려 퍼뜩 놀랐다. 베로니카는 대답 대신 곧바로 검을 움켜쥐어 당겼다. 그때 열쇠가 절걱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렸다.

저벅저벅.

베로니카는 걸어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고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제 봤던 앳된 기사였다. 갈색 곱슬머리에 짙은 녹안. 무심하게 안을 훑어보는 기사의 손에는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식사를 거부할 경우 처벌이 내려질 겁니다. 억지로라도 먹는 편이 좋습니다.”

이해 못할 소리를 한 남자가 뚜벅뚜벅 들어와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둥근 은 뚜껑을 치우자 검은 빵에 식은 당근 수프가 나왔다.

“…아침으로 나온 건가요? 거부한 게 아니라 지금 일어난 거예요.”

“관리인들은 그런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문 앞에 식사가 그대로 놓여 있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그 말을 하려고 온 건가요?”

서둘러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뻗친 머리칼을 손으로 빗어 내리며 물었다. 대충 만져만 봤는데도 얼마나 엉망인지 알 만했다. 감은 채로 말리지 않고 잤더니 야밤에 산이라도 뛰다 온 몰골이 됐다.

“베르크 경의 개인적인 부탁과 성하의 허가 하에 호위를 맡게 됐습니다.”

“가둬 놓은 사람에게도 호위가 필요한 줄은 몰랐는데요.”

베로니카가 맹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호위가 아니라 감시 아니냐는 의미다. 쟁반을 내려놓고 다시 문가로 가서 선 남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 인형 같은 얼굴을 유심히 보던 베로니카는 결국 한숨을 쉬고 침대 옆 의자를 끌어다 탁자 앞에 앉았다.

식은 당근 수프는 밍밍했고 검은 빵은 딱딱했다. 팔과 어깨를 비롯해 등까지도 근육이 배겨서 아팠다. 하지만 이제는 몸이 힘들거나 맛이 없다는 사실은 깨작거릴 이유가 되지 못했다. 목표가 있었고 돌아올 동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하무트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질 테다. 구원받기보다 누군가를 구원해 줄 수 있을 정도로.

베이른이 막 불타고 나서와는 달랐다. 그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혼자도 아니다.

리온은 갔지만 그녀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 말을 하기 위해 그는 하룻밤을 이곳에서 보내고 간 걸 거다. 제겐 동료가 있다.

베로니카는 불평 없이 수프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은 뒤 고양이나 지나다닐 좁은 문 구멍으로 접시를 내놓았다. 씻고 난 후에는 씩씩하게 어제 배운 동작도 복습했다. 사람의 기억이란 몸도 마음도 형편없어서 반복해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다 망각해 버린다. 잔인하게 굴었던 리온과의 첫 만남을 금세 잊어버리고 만 것처럼.

지금쯤은 블라센에 있겠지.

휙 호선을 그린 검 끝이 환상 속 번식을 떠올리며 잠깐 흔들렸다. 초점이 비껴간 찰나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보던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베로니카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왜요? 자세가 틀렸나요?”

“…….”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싫다는 의사를 온몸으로 내뿜는 사람이었다.

베로니카는 어깨를 으쓱하고 계속하려다 문득 기사가 허리에 찬 검집에 시선을 붙들렸다.

정식 기사. 7살 무렵부터 검을 수련한 팔라딘.

리온은 며칠쯤 블라센에 나가 있을 테고. 베로니카에겐 이렇게 안에서 배웠던 동작이나 반복하는 선택지 밖에는 없다. 팔 근육이야 확실히 붙겠지만….

“그러고 보니 며칠이고 도와주실 분인데 인사를 안 했네요.”

검을 내린 베로니카는 친근하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베로니카 슈바르츠발트에요.”

리온과도 하지 않은 통성명을 한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다. 불쑥 내밀어진 손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마지못해 이름만 뱉었다.

“오스카 베르크입니다.”

베르크.

카이젠미어에서 아버지를 인정받지 못한 아이에게 붙이는 성.

찰나 멈칫했던 베로니카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미소 지으며 머쓱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본론을 꺼냈다.

“혹시 그냥 서 있기 심심하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서 말인데 절 조금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가 한 대답에 상관없이 넉살 좋게 물었다.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도 무시 못 한다고 리온과 같이 다니면서 이런 것만 늘었다.

“어떤 동작이든 조언이든. 뭐든 좋아요. 검을 배우고 싶어요.”

“…….”

“선생 노릇이 싫으시면 그냥 애랑 논다고 생각하시고 상대가 되어 주셔도 좋아요. 어제 막 잡는 법을 배운 수준이지만.”

별생각 없이 말을 잇던 베로니카는 오스카의 낯이 일변하는 것을 보고 흠칫 입을 다물었다. 오스카의 고저 없던 목소리가 낮아진 건 그때였다.

“어제면, 그분이 검을 가르쳐 주셨다는 말입니까? 당신에게?”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 리온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베로니카는 덜컥 불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거짓말이었다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으므로 조심스레 대답했다.

“말했다시피 겨우 잡는 법만요.”

“하지만 당신은 여자인 데다 신도도 아니지 않습니까.”

“여자라는 사실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저도 신도예요.”

“당신은 신도가 아닙니다. 믿음 있는 자가 어떻게 동화자가 될 수 있습니까?”

베로니카는 말문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마귀에게 믿음을 팔았으니 정신이 동화된 겁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정신이 잠식되지 않습니다.”

오스카의 멸시하는 눈은 베로니카의 붉은 눈동자에 똑바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저런 눈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길가의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교회에선 그렇게 믿는 건가요?”

“틀렸습니까? 베르크 경만 아니었다면 당신은 바로 이단 심문을 받았을 겁니다. 당신이 믿는 자였다면 바하무트는 죽음을 선사할망정 제 자식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그럴듯한 논리였다. 실제로 베로니카도 광야를 달리는 중 생각해 본 적 있는 의문이다.

지극히 낮은 확률로 탄생하는 동화자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무엇이 달라서 죽임을 당하지 않았나. 왜 바하무트는 그녀를 죽이는 대신 제 자식으로 삼았는가.

실제로 베로니카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 못한다. 교회에서 말하는 심연의 지옥과 창공의 낙원 또한 감탄사나 누군가를 저주할 때만 사용할 뿐. 그녀의 몸에는 성력이 흐르지도 않을뿐더러 무수한 신의 기적도 역사 속 이야기에 불과하니.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단 심문관보다 바하무트가 더 정확한 감별 능력을 가졌나 보군요. 바하무트를 하나 데려다 교황청의 심문관으로 삼아도 되겠어요.”

이 적대감은 불합리하다. 오스카는 리온이 검을 가르쳐 줬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것뿐이다.

그녀는 그의 손이 어느새 검 자루에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교황청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모독을 시작한 건 당신이에요.”

칼날처럼 예리한 정적이 감돌았다. 서로를 팽팽하게 노려보다가 베로니카가 먼저 물러섰다.

아, 심연의 지옥이여. 저 사람에게 말 건 일은 명백히 제 실수였다.

흙바닥에 신성 기사단을 멋지게 그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백마 탄 기사님을 상상한 그림을 다 지워 버리고 싶어졌다.

꽉 막힌 집단이다.

여자인 건 또 뭐 어때서?

따지지 못한 말이 뒤늦게 생각나 이를 악다물고 검만 내리그었다. 방이 장검을 휘두를 만큼 충분히 넓다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연습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밥을 먹고, 또 휘두르다 씻었다.

배운 것은 단 두 동작뿐이었지만 충분했다. 춤은 같은 기본기를 일주일 내내 반복하더라도 실력이 늘었다. 검도 다르지 않을 거라 믿었다.

오스카는 그녀가 온종일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문가에 꼼짝도 않고 서서 지켜보았다. 지루하고 몸이 비틀릴 만도 한데 독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후로 한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베로니카의 손가락이 까진 다음날도. 또 크로스가드 너머로 손가락이 미끄러져 날에 베였던 그다음 날도.

그때까지도 리온은 블라센 산맥의 정찰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셋째 날 오후, 리온 대신 그녀를 찾아온 이는 예상치 못한 불청객이었다.

***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베로니카는 갸웃하며 팔을 내렸다.

점심 식사를 내보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올 사람은 이미 와 있었다. 예상 못한 건 오스카도 마찬가지인지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문을 돌아보았다. 그때 밖에서 늙은 사제의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문을 여십시오. 교황 성하와 메클렌부르크 단장님의 방문입니다.”

거물들의 이름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두 사람 다 딱딱히 굳어 버렸다.

교황? 아니, 기사 메클렌부르크라고?

같은 인간처럼 와닿지 않는 교황도 그러했지만 베로니카는 두 번째 인물에 더 집중했다.

신성 기사단의 단장 알브레히트 메클렌부르크는 그야말로 이야기 속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침대맡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큰 아이는 없다.

거인과 싸워 화이트랜드의 공주를 구출한 이야기부터 하늘을 나는 물고기 엘로어를 잡았던 일화까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몰라도 열다섯에 기사가 되어 쉰이 넘도록 건재한 인물은 전설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베로니카는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오스카가 딱딱히 각이 서서 문을 열 때까지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대귀족을 맞이할 예절을 몰라 우왕좌왕하면서.

이 만남이 일을 어떻게 비틀어 놓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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