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26)화 (26/128)

리온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말로 오스카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러곤 곧장 진득한 액체를 씻어 내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촛불 하나 켜 놓지 않은 공간은 어두웠다. 검을 풀어 벽에 세워 둔 리온은 옷을 벗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수도를 틀어 냈다.

맨몸으로 와닿는 지하수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마 묵기로 한 시내의 여관에 간다면 늦은 시각에도 따뜻한 욕조를 올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리온은 오늘 그곳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가지 마요.”

“거짓말쟁이. 언제는 내가 반드시 필요하다더니.”

여자는 벌써 여러 번 작정한 사람처럼 그의 가장 여린 신경을 자극했다. 열심히 쌓아 올린 세계를 깨부수고 내면에서 떨고 있는 소년을 들여다봤다.

적어도 가지 말라는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처음 만난 날 밤에도 그녀는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듣는 날 속에서 무언가 뚝 끊어질 거란 걸.

신경 줄을 닮은 그것은 광야에서 내내 갈리고 약해지다 끝끝내 줄에 흔들흔들 매달려 있던 잔상을 떨어뜨렸다.

떠나가는 모친의 뒷모습. 옷자락을 붙잡는 어린 소년. 흐릿한 시야로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여자가 멀어져 간다.

벌써 20년도 더 전에 사라진 잔상이 떨어지며 둥근 파문을 그렸다.

가지 마. 가지 마요. 제발 나를 버리고 떠나지 마.

따라가려던 작은 몸은 강한 힘에 뒤로 당겨진다. 돌아보니 보이는 것은 낯설고 차가운 얼굴의 남자.

수건을 잡으려던 손이 실수로 포도주를 닦던 손수건을 잡고 멈칫했다. 여자가 병 주고 약 주듯 옷을 문질러 주던 하얀 천이다. 리온은 그것을 든 채 가만히 바라봤다. 내면의 심연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천의 감촉을 느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손이 충동처럼 느릿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물 흐르는 소리는 한층 커졌다. 리온은 딱딱하고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며 목을 뒤로 젖혔다. 도드라진 울대가 일렁이고 근육이 팽팽히 긴장했다.

그는 제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성에 한창 흥미를 가지는 10대 후반에도 하지 않았던 짓이다. 쌓이고 쌓이다가 밤에 풀릴 때조차도 그의 꿈에는 대상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지금 바깥에 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새까만 어둠과 경계 하나를 두고 존재한다.

심연에 잠긴 굵직한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헐적인 헉헉거림이 울릴 때마다 힘줄과 핏줄이 선정적으로 섰다. 욕실 안에는 한동안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절박한 호흡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낮은 신음과 함께 결국 원죄의 흔적이 튀었다. 벽에. 거울에. 그리고 십자가처럼 벽에 세워 둔 신검 위에도.

죄악감. 그, 짓눌리는 듯한 배덕감.

비릿한 색욕의 냄새를 맡으며 리온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나른하게 늘어뜨린 손끝에서 천이 툭 떨어졌다. 주르륵, 하고 물방울이 벽을 미끄러졌다.

***

씻고 나온 리온은 무거운 안락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턱을 괴고 지루한 얼굴로 앉은 그를 보고 침대에 누운 베로니카가 키득거렸다.

“진짜 거기서 잘 거예요?”

“드디어 네가 얼마나 이기적인 소리를 했는지 알겠어?”

“아니요. 책이라도 읽어 달라고 하려던 참인데요.”

옆으로 웅크리고 누운 그녀는 자꾸만 웃음이 새서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 올렸다.

다음에 같이 갈 거라는 확답만 받았을 뿐인데도 기분이 들뜨고 삽시간에 무서운 소음들이 멀어져 갔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리온은 광야에서처럼 옆에 누울 생각은 없는 눈치였다. 하지만 오늘 밤을 같이 보내 줄 것이다. 그에게도 그녀가 조금은 중요한 사람이라는 뜻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오늘은. 오늘만큼은.

“아, 옛날얘기 말고도 해 줄 수 있는 거 있긴 해요.”

“뭔지 안 물어보고 그냥 옛날얘기 해 주고 싶은데.”

“가기 전에 검 잡는 방법 가르쳐 주면 안 돼요?”

베로니카는 벌떡 이불을 걷고 일어나 옆에 뒀던 검을 검집째로 들어 보였다. 리온은 여전히 감흥 없는 얼굴로 앉아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또 근력 얘기 할 거죠? 안 그래도 시킨 대로 잘 들고 다니고 있어요. 근데 시간이 많지도 않은데 완력이 생기기만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빼서 잡아 봐.”

“…네?”

“빼서 잡아 보라고.”

리온이 턱을 괴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베로니카는 놀람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가르쳐 줄 거에요?”

“싫으면 말고.”

얼떨떨하게 있던 베로니카는 이내 기쁨으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리온은 그 얼굴을 뚫어지게 눈에 담았다.

해사하게 피어나는 웃음은 붉은 작약과도 같았다. 진심으로 웃을 때 그녀는 인상이 완전히 뒤바뀐다. 눈꼬리는 순하게 쳐지고 붉은 입술 끝은 올라가는 동시에 동공에는 매혹적인 윤기가 서린다.

생각이 바뀔까 걱정한 베로니카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발검했다. 검 자루를 양손으로 쥐어 올리자 며칠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처음보다 잘 다뤘다. 리온은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의 자세를 살폈다.

“제대로 잡은 거예요? 괜찮아요?”

“네가 귀족 가문의 태생이었다면 칭찬할 만해.”

“잘하는 거네요?”

“아니. 시장의 칼잡이들이 비웃기 딱 좋다는 소린데.”

베로니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리온이 구부려진 허리며 지나치게 앞으로 나간 팔꿈치를 당겨 주며 말했다.

“네가 보여 주기식 귀족이 아니라 정말 검에 목숨이 달린 인간이라면, 먼저 파지법이란 게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부터 머리에 박아놔.”

“정해져 있지 않다고요?”

“검을 잡는 자세는 고정된 게 아니라 계속 바뀌어야 해. 어떻게 휘두르냐에 따라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변하는 거지.”

흐르는 물.

베로니카는 금세 이해했다. 여러 동작이 이어져야만 춤이 완성되는 것처럼 검술 또한 점이 아니라 선이리라.

“그러면 하룻밤 새 배우기엔 어렵겠네요?”

“하룻밤 새 배울 생각을 했다는 게 더 놀랍군. 걱정할 거 없어. 그래도 앞날을 쓰느냐 뒷날을 쓰느냐 같은 기본은 존재하니까. 춤도 마찬가지 아닌가?”

“앞날이 어디고 뒷날이 어딘데요?”

어이없을 정도로 기초적인 질문에 리온이 뭐라고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회의적인 어조로 그가 감탄했다.

“아, 그것부터 알려 줘야 해?”

“대충 느낌은 와요. 근데 배울 때 정확히 배워야 해서 물어보는 거죠.”

베로니카는 제법 뻔뻔하게 대꾸했다. 리온이 무표정하게 질문했다.

“대충 오는 느낌으론 앞날이 어딘데?”

“검 위쪽… 아래… 위?”

눈치를 봐 가며 답을 바꾸자 리온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흘끔 올려다본 베로니카는 불거진 턱선을 보고 비죽거렸다.

“웃지 마요.”

“안 웃어.”

“웃음 참고 있잖아요. 장담하는데 당신이 바일라 스텝을 배우려고 하면 나보다 훨씬, 훨씬 더 서툴걸요.”

“그게 뭔데?”

“안 알려 줘요.”

약 올리듯 이죽거리는 사이 리온이 검 윗부분을 손으로 잡았다. 베로니카는 기겁했다.

“왜 자꾸 칼날을 만져요? 그러다 진짜 다쳐요!”

“여기가 검의 앞날. 뒷날은 네 손 가까이에 있는 아래쪽.”

리온은 그녀의 외침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보통 멀리 있는 적을 길게 벨 때는 앞날을 쓰고 근접전을 할 때는 뒷날을 쓰지. 위치를 보면 당연한 얘기지만 왠지 여기까지 설명해야 할 것 같군.”

거기까지 말한 리온이 손을 떼자 베로니카는 그의 손이 멀쩡한지부터 눈으로 확인했다. 피는커녕 작은 자상 하나 안 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가까스로 어깨에 힘이 풀어졌다. 그가 그녀의 손가락 위치를 조절하느라 맞닿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게 멀리 벨 때.”

작은 손가락들이 벌어지며 가드를 감싸듯이 쥐게 되었다. 뒤에 선 리온은 그녀의 손을 덮어 쥔 그대로 검을 올려서 느리게 허공을 베어 냈다. 손동작과 감각을 기억해야 하는데 자꾸만 등과 손에 닿는 온기에 정신이 팔렸다.

“혼자서 해 봐.”

이윽고 리온이 손을 떼어 내고 요구했다.

베로니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손을 펴 자세를 지웠다가 다시 잡아 말끔하게 허공을 갈랐다. 리온의 표정이 의외라는 듯 미묘해졌다.

몇 번이고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리온이 손을 들어 멈추더니 그녀의 손가락 위치를 하나씩 바꿔 주기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이 칼날의 면에 올라갔다. 그대로 검을 들어 올리면 칼의 면으로 얼굴이 가려질 신기한 자세였다. 귓가에는 각인처럼 또렷한 음성이 박혀 들었다.

“이게 가까이 벨 때.”

확실히 앞날과 뒷날을 쓸 때의 자세가 판이했다. 베로니카는 눈과 손을 이용해 암기했다. 눈을 반짝이며 두 자세를 번갈아 연습했다. 정통 검술이 다르긴 다른지 아무렇게나 휘두를 때와는 달리 검이 힘을 덜 들이고도 올곧게 뻗어 나갔다.

“잘하죠? 이 정도면 재능도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숨이 벅찰 때쯤 빼꼼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칭찬해 달라는 뜻이다. 리온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감탄했다.

“원래 몸 쓰는 일을 해서 그런가 역시 일반인이 상대할 바가 못 되네.”

앞날 베기와 뒷날 베기를 반복하는 적이라니. 전장에서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군, 까지 이어지는 말은 정말이지 감탄조라 더 약이 올랐다. 베로니카가 눈을 가늘게 뜨며 팔을 내리자 리온이 덧붙였다.

“하지만 실전에서 파지법 같은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어. 바하무트가 나타나면 이딴 건 다 잊어버리고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도 좋아. 심장만 관통시켜. 충분히 빠르고 정확하지 않으면 네가 죽어. 그것들은 팔다리 정도는 몇 번이고 재생해 내.”

“심장이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아는데요?”

“어디 있을 것 같은데?”

“붉은 눈이요? 그럼 바보처럼 약점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꼴이잖아요.”

“인간은 다른가?”

리온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기억해 둬. 아무리 덩치 큰 거인도 머리가 반토막 난 채 돌아다니진 못해.”

“모순이네요. 그걸 아는 사람이 투구도 안 쓰고 다닌다니.”

잠깐의 대화 후 연습이 이어졌다. 춤을 배워 본 그녀는 잘 알았다. 때로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해야 하는 훈련이 있다는 걸.

어떤 상황에서든 자연스럽게, 반사적으로 튀어 나갈 수 있도록.

어느새 땀방울이 흐르고 팔이 떨어질 것처럼 무거워졌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베로니카는 춤추듯이 움직였다.

낮인지 밤인지 가늠할 수 없는 방. 타닥거리는 벽난로와 바람을 가르는 검의 노래.

기억은 때때로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적어 내린다.

마침내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을 때 리온은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정체 모를 전율이 척추를 타고 찌르르 전신을 훑어내렸다. 왜인지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뎅, 뎅, 뎅 하고 울렸다. 지하에만 눅눅히 퍼지는 불길한 소리는 고문관과 병사들의 교대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다. 리온은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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