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지?”
리온이 입을 뗀 건 그때였다. 그 질문에 베로니카는 대신전에서 리온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그 잊지 못할 얼굴. 한없이 차갑고 공허하던 심연을.
“왜 화를 내냐고요? 그야 내가 당신의 가면 사이를 엿봤으니까요.”
“가면?”
“가식이든 겉모습이든 그걸 뭐라고 불러도 좋아요.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뭔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가면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들키기 두려워한다는 사실도요.”
침대에 떨어진 깃털을 주워 든 리온은 그녀의 말에 대해 생각하듯 잠시 말이 없었다. 화르륵 세차게 타오르는 벽난로만이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메워 주었다. 초조해진 베로니카가 다시 입을 뗐을 때였다.
“내가 정해진 선을 넘었어요? 그래서 혹시 두려워진 거라면.”
“아니.”
리온이 말을 끊으며 하얀 깃털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허공을 헤매던 날개의 파편이 발치에 착지했을 때, 고개 든 잘생긴 낯에는 아무 표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화났던 적 없어. 그런 말은 상식적으로 고마운 쪽에 가깝지. 아무도 날 위해 울어 주겠다고 한 적은 없었으니까.”
천천히 일어선 리온은 침대맡에 가까이 다가와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술병을 집어 들었다.
고마웠다고. 베로니카는 멍하니 그 말을 곱씹었다. 그에게도 처음인 게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동시에 기쁘기도 했다. 발자국 하나쯤은 남긴 것 같아서.
라벨을 보는 그를 보며 베로니카가 질문했다.
“그럼 날 왜 여기다 맡겨놨는데요?”
“교황청의 판단상 이만큼 보안이 철저한 장소도 없어서.”
“날 위해서라는 거에요? 하지만 당신은 여기 묵지 않잖아요.”
“난 내일부터 당장 블라센을 뒤질 거야. 그 수색에 너는 못 데려가.”
그 말투는 통보라 불러도 좋을 만치 단호했다.
동행은 무슨, 그에게 그녀는 일정을 의논할 어른조차 못 되는 모양이었다. 그 광야를 거치고도. 그녀가 그에게 이만큼 마음을 연 뒤에도.
베로니카는 저녁까지 애타게 기다린 시간을 생각하자 왠지 서러워졌다. 따질 말들을 생각할 때였다. 리온이 생각났다는 듯 나직이 덧붙였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할 일은 하고 가야겠지.”
말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그가 포도주를 내려놓고 그녀의 턱 끝을 잡아 올렸다.
해야 할 일. 아아.
신처럼 내려다보는 남자의 그림자에 묻히자 하려던 말이 모두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베로니카는 그제야 그가 늦게나마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눈치챘다.
여기서 꺼내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폭주를 최대한 미루기 위해서다. 그는 당장 내일 도시를 나가야 하니까. 그동안을 위해서.
“하지만 지금까지로 미루어 폭주랑 환상은 항상 함께 오는 것 같았는걸요. 내가 환상을 보지 못해도 괜찮아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글쎄. 일단은 위의 지시가 그래.”
리온은 남 얘기를 하듯 대답했다. 허리를 숙이기엔 너무 낮다고 여겼는지 그가 그녀의 바로 옆에 걸터앉았다. 커다란 상체가 침대 맞은편의 벽난로를 가리자 베로니카는 그림자 속에서 멍하니 눈을 감았다.
그동안은 안 그랬는데 오랜만에 비참하단 생각이 들었다. 생을 누군가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 지시 같은 말을 들어도 거부조차 할 수 없다는 것.
가볍게 입술이 부딪히며 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단단한 손이 뺨을 지탱하다 목덜미로 미끄러지자 베로니카는 상처가 있었던 자리를 집요하게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상처를 줬고, 낫도록 기다렸으며, 이전과 같이 멀쩡해지자 미련 없이 떠나려고 한다.
금세 혼자가 되는 거다. 새하얀 바다 위에, 앙상한 팔로 영혼이 흩어지지 않게끔 감싸 안은 채로.
“…가지 마요.”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베로니카는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내뱉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눈을 맞추었다.
“가지 마.”
“…….”
“거짓말쟁이. 언제는 내가 반드시 필요하다더니.”
리온은 고개를 기울인 그대로 꼼짝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하필 침대맡의 벽에서 쿵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베로니카는 놀라며 옷자락을 한층 세게 말아쥐었다. 옷을 살짝 당긴 그녀는 어리광 부리듯 리온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오늘만이라도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스스로 계산한 행동이라기보다 거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악몽을 꿀 때마다 그에게 파고든 날들의 결과물이다.
광야는 그들에게 과연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어떤 학자들은 광야에서는 시간조차 기이하게 흐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선 몇 년이나 몇십 년쯤 같은 세월이 반복되고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그들은 어쩌면 수십 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함께 보내고 온 걸지도 몰랐다. 추위에 옹송그리고 서로의 온기에 의지한 채.
신 이외에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무심코 마주 안으려던 리온은 가느다란 어깨 위에서 멈칫하고 제 손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없다. 움켜 봤자 펴 보면 갈라진 세계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덧없이 흘러내릴 운명이다.
“밤새 있어 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런 부탁은 애초에… 아니,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리온은 빈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얼굴을 붉히는 그녀에게 시선을 내렸다.
고개를 든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프게 일어서는 반응이 우스웠다. 복도에서 들리는 소리나 방이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해 그녀가 말하는 동안에도 리온은 맞닿은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몸을 생각했다. 그가 느끼는 강렬한 충동은 빌어먹게 가학적이고 천박했다.
성력의 치유는 숨과 체액에서 나오는 것. 이런 식의 치료가 금지된 이유는 주고받는 행위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하필 리온이 학습한 욕망은 바하무트의 번식욕이었다. 이렇게 닿아 있을 때마다 인간보다 괴물에 가까운 욕구가 치솟았다. 그는 그녀의 목구멍에서 찬가의 선율보다 아름다운 단조의 비명을 뽑아내길 원했고, 억누르고 움켜쥐고 강제로 취하기를 갈망했다. 그녀가 자면서 다른 남자가 아니라 그의 이름을 신음하도록.
완전히 돌았군.
“침대가 좁아서 싫은데.”
마침내 이어지던 말을 끊어 내자 베로니카가 기겁하며 반박했다.
“누가 같이 자자고 했어요? 그냥 옆에 있어 달라고요. 오늘만요.”
“아깐 가지 말라며.”
“그건, 그러니까. 이대로 여기 버려두고 가진 말라는 말이었는데.”
“안 가.”
리온이 그녀의 입술에 묻은 타액을 문질러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다음엔 널 데리고 갈 거야. 그때까지만 여기 머무르고 있어.”
거짓말은 다정했다. 아니, 거짓말이니 다정하기라도 해야지.
“얌전히 사제들 말 들으면서 기다려.”
“아, 어린애처럼 대하지 좀 마요.”
“그럼 뭐로 대해야 하는데?”
베로니카가 입술을 달싹이다 무슨 답변을 생각했는지 얼굴이 이마 끝까지 새빨개졌다. 펄펄 연기가 끓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였다.
“아. 넌 차 끓일 때 화로가 필요 없겠다.”
이마에 손을 갖다 대며 장난치자 베로니카가 홱 떨쳐 내며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리온은 입매를 가린 채 큭큭대다 귀찮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여자가 말한 ‘가면’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지금 이것이, 그의 가면이다. 그리고 육체적 필요 또한 그의 가면이다. 여자를 안고 싶어 하는 것. 그 아무 의미도 깃들어 있지 않은 행위.
리온은 그녀에게 사랑도 헌신도 책임도 느끼지 않았다. 오직 다소간의 연민과 침식하는 듯한 욕망을 느낄 뿐이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무의미했고, 통계상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다. 4억 명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할 한 명의 인간이다. 그사이 그녀가 시들고 멍들고 만신창이가 된다 한들 그의 선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꽃이 짓밟힐 것을 두려워하면 발을 뗄 수조차 없는 법이다.
진실을 알게 된 여자는 슬퍼할 것이다. 울지 못한다던 여자는 마침내 울게 될지도 모른다.
상관없었다. 불이 날 미래를 알아도 물은 줄 수 있다. ‘끝’이 올 때까진 시들지 않도록.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얼굴을 식히던 베로니카는 리온이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포도주병에 손을 뻗자 흘끔 눈만 보였다.
“그거 제 거예요. 식사에 곁들여 먹게끔 나왔던 거예요.”
“어차피 안 마시잖아. 나한테 양보해.”
병뚜껑을 딴 리온의 태연한 말에 베로니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일 블라센에 간다면서요.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가야 정상 아니에요?”
“산 공기가 맑아서 문제없어.”
리온은 농담을 계속했지만 베로니카는 웃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술을 뺏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물론 반사적으로 피한 리온이 더 빨랐지만 반사 신경을 탓하기에는 팔길이부터 차이가 났다.
리온이 왼손의 병을 높이 들자 몇 번 시도하던 베로니카는 문득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위에 홱 올라타서 손을 뻗은 건 그 순간이었다.
마침내 잡혔다. 밀어내기엔 지나치게 자극적인 구도 속에서. 리온은 뒤로 침대를 짚고 고개를 젖혀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오직 권능의 눈만을. 사람을 미혹하는 그 붉은 시선을.
“…아, 오늘 옆에 있어 준다고 하면 돌려줄게요.”
방금까지는 잘도 부끄러워한 주제에 그새 잊어버리고 거침없이 요구해 온다. 밤을 같이 보내도 그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완벽히 믿기 때문이다.
리온은 입매를 당긴 채 대꾸했다.
“내가 왜? 무서우면 아까처럼 이불 덮어쓰고 자.”
여자는 그를 너무 믿었다. 이제 정말 잘라 내야 할 때가 왔음은 명백했다.
“앗,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어요.”
그때, 달콤한 포도주 냄새가 훅 끼치며 새로 입은 흰 튜닉이 축축이 젖어 들었다. 좁은 병목에서 떨어진 액체가 피처럼 진득하고 끈적하게 스며들었다.
“이러고 갈 수도 없고, 새로 옷을 구해다 달라고 하기도 늦은 시각이네요. 여기서 씻고 자고 가는 수밖에 없겠어요.”
벌떡 일어난 베로니카가 사이드 테이블에 곱게 접힌 하얀 손수건을 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리온은 복부와 바지까지 번져 드는 자국을 흘끗 확인하고 실소를 흘렸다.
“이봐. 아무리 봐도 화는 네가 났잖아.”
이런 곳에 온종일 혼자 있던 빚은 갚은 셈이다. 하여간 지지 않는 성격하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