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돌아섰다. 당장 뛰쳐나가려다가 우스운 꼴이라는 생각에 억지로 몸을 굳혔다.
아니야. 진정해. 갇혔을 리가 없어. 이렇게 겁먹어서 뛰쳐나가면 그때야말로 우스갯거리가 될 거야.
그녀는 무려 리온 베르크의 손님이었다. 사제들의 말이 옳았다.
그는 교황과의 알현이 끝나면 곧장 그녀를 찾으러 돌아올 것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를 얘기하고 뭔가 착오가 있었다며 잠자리를 옮겨 줄 것이다. 리온은 상식적인 인간이니 벽에 곰팡이가 슬고 벌레가 나오는 한이 있어도 여관방이 낫다는 데 동의하리라.
심호흡을 한 베로니카는 안정을 찾기 위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문이 하나 더 있어 열어 보니 아름답게 꾸며진 욕실이었다. 갈아입을 수녀복도 여러 벌 걸려 있었다. 눈을 두는 모든 곳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런데 왜 자꾸 누가 죽은 집에 들어온 양 거부감이 드는 걸까.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때, 벽에서 이상한 타격음이 들린 것 같았다. 쾅, 하고, 저쪽 벽 너머에서 뭔가 부딪혀 오는 듯한 소리가.
멍하니 있던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소리 죽여 벽에 다가갔다. 귀를 붙였다. 그리고….
쿵!
벽을 울리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떼어 냈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며 액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해골산으로 가는 십자가 진 사내와 그의 얼굴을 닦아 주는 여자가 그려진 그림이다. 그들이 떨고 있다.
쿵! 쿵! 쿵!
벽 너머에서 새된 비명이 들렸다. 베로니카는 귀를 틀어막고 뒷걸음질 치다가 참지 못하고 방을 나가려 했다.
절걱절걱, 문고리는 잠긴 듯 돌아가지 않았다.
***
“이번 수색의 목적은 바하무트의 흔적을 찾는 일입니다. 안 그래도 최근 정찰 나갔다가 실종된 기사가 몇 명 있었습니다. 그들의 정찰 구역을 중심으로 돌아보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철저히 훈련받은 성기사답다.
리온은 5년 전, 동료 기사의 옆에 붙어 있던 열여덟 살짜리 풋내기를 떠올렸다. 존경한다고 했던가. 자신을 보고 기사가 되었다고 했던가.
반짝이던 눈빛 외에는 기억나는 것이 없다. 이제는 사라진, 꿈을 보던 눈동자.
“소개부터 하지 그래.”
“사라진 기사는 총 넷으로 로엔그린 경과 메디치 경 그리고.”
“아니, 네 소개를 하라고.”
말을 끊어 내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리온은 재촉하지 않고 계단의 구부러진 빨간 카펫을 밟았다.
“오스카 베르크입니다.”
베르크. 알 만하군.
“날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는 이유는?”
“성하께 경의 수행을 지시받았습니다.”
“아아, 사고 안 치게 감시하라고?”
“성도 안에서만입니다. 수색에는 따라가지 않습니다.”
“꽤 총애를 받나 보군. 성하께서 위험한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실 만큼.”
“모시는 분의 뜻에 대해서까지는 감히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충성하는 자입니다.”
강해진 어조에는 대화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랄 게 깃들어 있었다. 리온은 그 강렬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저벅저벅 내려가던 발걸음이 교황청의 지하 4층에 도달했을 때 마침내 적절한 단어를 찾아냈다.
반감.
서약을 깨뜨린 자를 향한 반감이다.
리온은 피식 웃고는 걸음을 이어 갔다. 베르크라는 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는 어디서나 인정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성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날부터 리온이 신에게 보였던 집착처럼.
아버지를 배신한 형제를 경멸하고 평생토록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쓴다.
나약한 인간은 무엇에든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모양이다. 그것이 꿈이든, 가족이든, 돈과 명예든 간에.
거침없는 발걸음은 여자가 있을 4층의 끝방에서 정지했다. 죄지은 고위 사제들이 지내는 끝방은 검은 복도에 있는 것치곤 제법 형편이 좋았다.
이교도와 범죄자를 정화하는 검은 복도는 감옥이 아니라 지옥의 단편이다. 팔라딘이 될 소년들도 종종 보내져 회개의 시간을 보내기에 리온도 오스카도 새삼스럽게 굴지는 않았다. 타인의 소리에 귀 기울일수록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들은 일찍이 귀를 틀어막는 법을 학습했다.
절걱. 도착한 문에 열쇠를 밀어 넣자 경첩이 흐느끼며 틈이 열렸다.
방 안은 고요했다. 둥글게 튀어나온 이불만 빼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리온이 그쪽으로 향하자 따라 들어온 오스카가 방문을 닫았다.
리온은 딱딱한 침대에 걸터앉아 미세하게 떨리는 이불에 손을 뻗었다. 숨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닿기 직전 선수 치듯 이불이 홱 젖혀졌다.
섬광처럼 번득이는 붉은 눈.
바하무트 같은. 아니, 바하무트다운 눈이다.
벼려진 검이 슥 튀어나와 리온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이불까지 그어 버려 하얀 깃털이 흩날렸다. 리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반면 오히려 검을 내지른 베로니카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안도와 반가움. 그리고 원망. 모두를 읽어 낸 리온이 흔들리는 검날을 잡자 베로니카는 기겁하며 손을 놓았다.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아, 잡지 마요. 위험해요.”
“위험한 건 잡혔다고 바로 내주는 네 쪽이야.”
리온은 검날을 침대 아래로 미끄러뜨리곤 눈길을 옆으로 돌렸다.
“내 호위까지 맡는 줄은 몰랐는데.”
따라 시선을 돌린 베로니카는 어느새 침대에 바짝 다가선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짙은 갈색 고수머리의 기사는 앳된 얼굴인데도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얼음을 실은 표정과 반쯤 빼 든 검 탓일 테다.
“아까부터 여쭙고 싶었습니다만 왜 동화자가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겁니까?”
절컥, 뽑혔던 검을 밀어 넣으며 오스카가 물었다. 베로니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아까의 투구 쓴 기사, 성벽 밖으로 마중 나왔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내가 줬으니까.”
“베르크 경.”
“그 호칭을 쓰면 기분이 이상하지 않나? 난 그래서 일부러 안 부르고 있는데.”
빙글거리던 리온이 이어서 말했다.
“나가서 기다려.”
짧지만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리온의 입매는 느른하게 올라가 있었지만 동시에 피 묻은 사냥감을 사수하는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오스카는 그 방어적인 태도에 다소 놀랐다. 그가 알고, 또 전해 들은 리온은 신 이외의 모든 존재에 무관심했다. 동화자에게 검 좀 뽑았다고 이를 드러낼 인물이 아니었다.
“오해를 일으켰다면 죄송해요. 문도 잠긴 상태고 밖에서 안 좋은 소리도 들려서 위험한 사람들인 줄 알았어요.”
베로니카도 사과하며 끼어들었다. 오스카는 회색 수녀복을 입은 그녀를 의심스레 훑어내렸다. 리온의 반도 안 되는 여자는 위험은커녕 평범해 보였다. 머리색과 맞지 않는 붉은 눈 한 쌍만 빼면.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위험 요소를 찾아내지 못한 그가 마침내 마지못한 대답을 내놓았다.
오스카는 절도 있는 인사 후 규칙적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뒤돌아 문을 닫을 때 짙은 녹안에 담긴 마지막 풍경은 침대에 떨어져 앉은 두 남녀였다. 그들은 서로만을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존재 따위 이미 새까맣게 잊어버린 눈을 하고.
닫히는 문틈이 두 사람을 비춰 주다가 꿈결같이 지워 버렸다. 삐그덕, 쾅, 하고 따뜻한 노란 불이 덮였다.
***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먼저 입을 연 건 베로니카였다.
방 안에는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고, 사람 냄새가 부족하던 방은 리온이 왔다는 사실만으로 꽉 찬 듯이 느껴졌다.
“이것저것 하느라. 알다시피 아셀도르프에 두고 온 게 많아서.”
그렇게 말하는 리온의 머리는 덜 말라서 착 가라앉아 있었다. 마구 흐트러진 평소와 달리 축 처진 머리칼은 왜인지 그를 앳된 소년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는 무심코 리온 같은 친구와 자랐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오만하고 뻔뻔하고 짓궂은 남자애. 장난기 심한 그를 여자애들은 겉으론 싫어했겠지만,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을 거다. 오히려 남몰래 좋아했겠지.
“갑옷을 새로 사고 저녁까지 먹고 왔거든. 넌? 교황청의 대접은 어땠지?”
“고기파이를 먹었어요. 후식으로는, 아. 벌집이 나왔고요.”
“벌집이라. 호화롭기 짝이 없군. 집을 도난당한 벌들만 불쌍하게 됐어. 나 때는 교황청의 식사가 검소하기로 유명했는데 말이야.”
“늙은이 같아요.”
베로니카의 서슴없는 평가에 리온이 키들거렸다. 광야를 막 빠져나왔을 때의 어색함은 온데간데없고 그는 평소처럼 느슨하고 태연했다.
오면서 지나쳤을 고문실이나 열쇠까지 꽂아 가며 들어온 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결국 먼저 운을 떼야 하는 건 이쪽이었다.
“안 올 줄 알았어요.”
“왜?”
“대신전에서의 일로 나한테 화가 났다고 생각했거든요.”
침대를 짚은 리온의 입가에서 미소가 슬슬 사라졌다. 베로니카는 그 예리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새벽부터 계속 어색하다고 느꼈어요. 따지자면 괴롭힌 것도 아니고 소리 지른 것도 아니지만. 그냥.”
처음엔 순진하게 기다렸다. 하지만 반나절을 갇혀 있다 마주한 첫 손님이 문 구멍으로 들어온 저녁 식사였을 때, 어쩌면 이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도 맞추지 않던 모습이 뇌리에 깊이 박혀서. 피를 나눈 가족도 철저히 무관심해질 수 있는데 남은 오죽할까.
‘요란한 동행’, 불확실한 통행 허가, 다 아는 듯 지켜보던 기사의 표정과 잠긴 문고리.
베로니카는 바보가 아니었다. 눈치 보며 자란 아이는 눈치 빠른 어른이 된다. 그가 동화자를 교황청에 팔았다는 생각을 안 한다면 그거야말로 순진한 애송이였다.
슬프진 않았다. 정말로. 슬프지 않았다. 그저 외롭고 추워서 이불을 덮어쓰고 웅크렸을 뿐이다. 그녀는 다시금 잿더미가 된 베이른의 앞에 홀로 서 있었다. 그 설원에서 추위에 벌벌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