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사자 같은 목소리다. 리온은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전서구를 보낸 다음 날 아셀도르프도 침공을 당했습니다. 바로 떠났으니 일찍 도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셀도르프가 신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어느 길로 왔느냐를 이야기하는 거다.”
‘신의 품에 안겼다.’
그것은 종교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괴멸을 뜻하는 표현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그렇게 됐던가.
리온은 도시의 비극에 묵념하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교황은 혀를 끌끌 차 보였다.
“일주일이라니. 광야를 넘은 게로군. 규율을 몇 가지나 어겼는지 이제 열 손가락으론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이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걸음을 리온은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버린 이들이 죽었다. 어깨를 누르는 죄야말로 이제 두 손으론 세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Pater, peccavi in caelum et coram te. iam non sum dignus vocari filius tuus.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리온은 교황에게 충성하겠다는 서약을 깨고 전장을 이탈했다.
원래 기사란 어둠을 밝히라는 명령에 서슴없이 제 생명을 태워야 하는 법이다. 판단해선 안 된다.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러나 리온은 사고했고, 제 판단으로 움직였다. 그렇다고 그 여정에서 기사로서 약자를 수호한 것도 아니다. 파문이든 사형이든 그는 순순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오직 한 가지 사명만 끝내고 나면.
“그럼에도 아버지의 두 번째 아들은 성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모든 일은 ‘그것’을 죽인 후다. 구하지 못한 목숨보다 더 많은 목숨을 구한 후에.
“돌아온 탕아처럼 잔치를 열어 주기 바라느냐?”
“소 대신 바하무트를 잡는 잔치를 원합니다.”
바닥에 끌리며 스스스 뱀 같은 소리를 내던 옷자락이 리온의 바로 앞에서 멎었다. 교황이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여자가 블라센에서 번식하는 그것들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늘어난 바하무트들은 수가 충분해지면 카르트를 덮칠 겁니다.”
리온은 고개를 들어 백발의 정정한 노인을 올려다보았다. 차차 거칠어지는 노인의 호흡은 늙은 사자의 떨림과도 같았다.
언제든 치고 올라올 적을 생각하며 매일같이 두려움에 떠는 왕이여.
“블라센? 왕관 산맥에 그것들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거냐?”
“확실합니다. 아셀도르프의 일도 미리 감지했던 여자입니다. 오늘부터라도 당장 산을 수색해야 합니다.”
“베이른으로 파견되었던 절반이 돌아오기 전까진 신성 기사단을 카르트 밖으로 내보낼 수 없다.”
교황은 곧바로 방어적인 태세를 취했다.
인접한 산맥인데도 제 군대를 보내려 하지 않는다. 이 땅에는 황제의 군대도 주둔해 있는데도.
“카르트는 영원한 평화를 약속받았습니다.”
“그래. 그 말대로지. 수가 늘어나 도시를 덮쳐도 카르트는 무너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도록 여자를 보내 주셨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제법 건방지게 들리는 말에 교황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리온은 지금 감히 동화자를 신이 보낸 사도라 말한 셈이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사도를 못 알아보고 있노라고.
“그래서 바하무트의 딸에게 숨을 불어넣었느냐? 성력의 치유가 금지된 것은 쾌락과 육욕을 멀리하기 위함이다.”
“필요에 의한 일이었습니다.”
“필요. 필요라.”
애초에 교황은 ‘최초의 바하무트’조차 믿지 않았다. 하나가 전체와도 같다니. 그 얼마나 편리한 발상인가.
하나 여자의 필요는 조금 다른 문제다. 바하무트를 감지하는 힘이라든가 몸에 둘렀다는 기이한 대기. 리온의 보고가 모두 사실이라면 무척이나 탐나는 힘이다.
교황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필요시에 제단에도 바치겠느냐?”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므로 리온은 가만히 고개를 내렸다. 새까만 바닥이 보였다. 검은색. 모든 빛을 흡수하는, 그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밤의 얼굴.
눈처럼 하얀 목덜미 위에서 흔들리던 검은 머리칼을 떠올린다.
여자의 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죽는다. 그가 구하지 않았더라도 죽었을 테고 구했어도 당장 내일을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러니 끝으로 가는 과정까지도 바치면 그뿐이다. 바치면.
“블라센에 데려갈 기사들을 허락하실 겁니까?”
“지휘관으로 갈 수는 없다. 용병으로 참여하는 불명예도 괜찮다면 보내 주겠다.”
용병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흰 갑주를 벗고 회색 강철을 입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이름은 교적에서 지워지고 티란에서의 일을 아는 모든 기사가 그를 기피할 것이다.
그뿐인가. 여자는 바하무트의 힘을 파헤친다는 명목하에 온갖 고문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성도는 그런 곳이다. 자비롭게 포장된 그들의 신은 인간일 적 전장의 신이었다. 장검을 향한 신의 눈은 감겨 있다. 그는 어떤 이에게는 지독히도 무참한 신이다.
“내가 당신을 위해 대신 울어 줄까요?”
성기사의 맹세란 참으로 우습다.
신을 따르고 교황의 선에 복종하되 무구한 약자를 수호하라.
하지만 교황의 선이 약자를 죽이라고 말한다면?
여자는 그가 본 어떤 인간보다도 무구했다. 도망친 사람을 위해 악몽을 꾸고 제 목을 그었던 남자를 위해 눈물을 흘리겠다고 말할 만큼.
그리고 죄를 대속할 제물은 언제나 가장 무결한 짐승이다.
“fac ut vis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리온은 나직이 대답했다.
살아남아 바하무트의 머리에 검을 꽂을 수 있다면. 지금은 그것으로 족했다.
인간의 명예나 인정은 필요 없다. 리온은 저 자신을 신께 바친 자였으므로.
“아들이 돌아왔으니 잔치를 열어야겠구나.”
교황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방탕한 아들을 잃었다 다시 맞은 아버지처럼 말을 맺었다.
“quia hic filius meus mortuus erat et revixit, perierat et inventus est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으니.)”
***
끼익, 끼익, 등잔이 불길하게 흔들리며 흐느꼈다.
“저기, 정말로 이 길이 맞나요?”
검은 그림자가 스민 붉은 카펫 위. 베로니카는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질문을 꺼냈다.
앞서가던 사제들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검은 사제복 때문인지 하얀 얼굴들은 허공에 둥둥 뜬 인상을 주었다. 악몽 속 아셀도르프 사람들이 생각나 베로니카는 없는 용기를 쥐어짜야 했다.
“그러니까, 이 좋은 건물에서 방이 지하에만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잘… 안 믿겨서요.”
한기가 고인 듯한 계단 아래에서는 찬 바람이 불어와 벽의 등불을 뒤흔들었다.
리온이 대성전에 들어간 뒤 교황청에 안내받은 그녀는 벌써 세 번이나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거의 다 왔습니다. 머무실 방은 바로 아래층에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계속 걸으십시오.”
이런 분위기에 염려하지 말라고요? 그게 무슨 믿음의 시험대 같은 소리에요.
베로니카는 침침한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잠시간 망설였다. 아마 희미한 비명만 들리지 않았어도 이런 질문은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씻고 침대에 누울 수 있다는 기대는 사라지고 본능적인 불안이 스멀스멀 치밀었다.
“리온… 아니, 베르크 경은 언제 오죠?”
결국 어색하게 리온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낯선 장소에서 의지할 사람은 그뿐이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교황 성하를 알현하고 계십니다. 그간의 보고가 끝나면 곧장 찾아오실 겁니다.”
이번 대답은 느닷없이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자 해골처럼 비쩍 마른 남자가 눈만 형형하게 번뜩이며 퇴로를 가로막았다.
어쩔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더 캐묻는 대신 입술을 잘근 깨물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허리에 맨 검만 구원처럼 움켜쥔 채.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부디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무지하고 못 배운 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생각이 소리에 먹혀 사라졌다. 걸음을 뗄수록 애원은 커지고 절박해졌다. 잘못을 비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음과 비명 소리에 동요하는 사람은 베로니카 한 명밖에 없었다.
촛대가 규칙적으로 매달린 검은 복도에 방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아니, 그걸 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감옥이다. 앞에는 얼굴을 가린 병사들과 회색 누더기를 걸친 고문관이 서 있었다. 그가 고문관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손에 들린 채찍 때문이었다.
뚝. 뚝. 여러 갈래로 된 채찍에서 핏물이 떨어져 바닥에 고였다. 베로니카는 긴장으로 피가 통하지 않는 손끝을 세게 말아쥐었다. 교황청의 지하 4층 고통의 비명과 표정 없는 사제들.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이곳은 범죄자를 가두는 감옥이다.
“지내실 거처입니다. 앞으로 이 방에서 지내시게 될 겁니다. 급히 마련하느라 대단치는 못해도 필요한 물건은 모두 갖춰져 있습니다.”
베로니카는 녹슨 경첩이 우는 소리에 숨을 삼켰다.
사제 하나가 문을 밀어젖히자 방에서 노란 불빛이 흘러나왔다. 검고 축축한 복도에 서 있어서인지 불빛은 더 강렬하게 발치를 적셨다.
귀족의 방. 그것이 첫인상이었다. 목수의 딸로 평생을 산 베로니카로서는 이렇게 화려한 방은 평생 처음 봤다. 깃털 침대와 깨끗한 거울이 달린 화장대, 활활 불이 타오르는 벽난로와 나이테가 아름다운 고동색 탁자 등 있어야 할 것은 다 있었다. 단 하나, 바깥을 볼 창문만 제외하고.
“지내시는 동안에는 식사 때에 맞춰 음식을 가져다드릴 겁니다.”
어깨 너머로 설명이 덧붙었다. 베로니카는 홀린 것처럼 걸음을 내디뎠다. 감옥을 예상했는데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완전히 들어온 순간,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쿵.
그것은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와도 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