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22)화 (22/128)

3년 전 운석이 떨어졌을 때 롬 군도는 이미 해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때 첫 이주민이 생겼고 2년 전 바하무트가 바다에서 올라오면서부터는 점차 대륙으로 넘어오는 수가 늘었다.

그들이라고 살던 집을 버리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푸대접 받는 방랑 민족이 되기엔 소금과 말이 기른 사수의 긍지는 지나치게 높았다.

베로니카는 긍지를 지니기엔 어린 형제를 보며 물었다.

“신께서는 이방의 아이는 돌보지 않으실까요?”

“돌보시겠지. 약자에게 자비의 눈을 뜨시는 분이니까.”

“그럼 같이 들어가면 안 돼요?”

리온은 무표정한 시선을 내려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침에 신전을 떠나오고서는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는 것 같았다.

“통행증이 나올지도 아직 확실하지 않아.”

“위병의 반응을 봤어요. 거의 당신의 광신도처럼 보이던걸요. 허가가 나지 않으면 몰래라도 문을 열어줄 만큼요.”

낙관적인 확신에 리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비틀린 입술이 웃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미안하지만 일이 언제나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는 않아. 이미 요란한 동행이 있을 때는 더더욱.”

그게 무슨 뜻이냐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때 작은 철문이 시끄럽게 울더니 백마 탄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베로니카는 하려던 말도 잊은 채 이목이 쏠린 성문 쪽을 돌아봤다.

나온 사람은 총 여섯으로, 흰색 플레이트 아머를 걸친 기사 한 명에 크루세이더 복장1)을 한 교황의 근위병 다섯이었다.

군중을 훑어보던 기사는 오래지 않아 우뚝 솟은 리온을 발견하고 따각따각 다가왔다. 말은 투레질을 하며 밤별이 앞에 멈추었다. 대치하는 듯한 구도였다.

“베르크 경. 성하의 명으로 교황청까지 모시겠습니다. 곧장 말에 타 제 뒤를 따르십시오.”

기사의 절도 있는 동작은 근엄하고 엄숙했다. 그러나 딱딱한 음성은 어딘가 긴장한 구석이 엿보였다.

“오랜만에 보는군. 루이스의 견습이었으니 5년 만인가?”

그를 물끄러미 보던 리온이 팔짱을 풀며 입을 뗐다. 기사는 당황한 사람처럼 잠시 말이 없다가,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대답했다.

“…저를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4년 전에 서임을 받았으니 이제는 견습이 아닙니다.”

“아하.”

무심하게 감탄한 리온이 베로니카를 태운 후 뒤이어 말에 올랐다. 기사의 시선이 잠시간 그가 안듯이 감싼 여자에게 머물렀다.

“뭐 더 전할 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그저… 동행을 확인한 것뿐입니다. 바로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기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베로니카를 살핀 후 따각따각 말을 몰아 대열의 가장 앞에 섰다.

대열은 빠르게 갖추어졌다. 나올 때와 비슷했지만 흰 무리의 중앙에 흑마가 껴 있다는 점이 달랐다. 모신다기보다 연행한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배치였다.

피난민들은 갑자기 등장한 병사들에게 두려움과 원망의 시선을 섞어 보냈다. 개중엔 물론 교황의 손님을 향한 호기심도 공존했다. 아마 리온과 베로니카가 들어가고 나면 꽤나 창의적인 소문(예컨대 교황의 숨겨진 자식이라든가 하는)들이 들판을 휘돌 것이다.

베로니카는 긴장한 채 옆에 선 근위병들을 곁눈질했다. 얼굴을 바이저로 가린 그들은 같은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꼿꼿했다. 그 각 맞춘 태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

이것이야말로 기존에 알고 있던 신성 기사단의 모습이건만. 그동안 리온에게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는 늘 느긋하고 여유로웠으니까.

아니, 그 얼굴 또한 가면이었을까.

코펠 소리가 떨어지자 말들이 동시에 발을 굴렀다. 베로니카는 ‘요란한 동행’이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던 기사의 눈빛을 떠올렸다. 사고가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도 전에 말들이 휙휙 새까만 아치로 뛰어들었다. 하얗게 번뜩이는 별세계로 튀어나왔을 때 이미 머리는 희게 표백되어 있었다.

어두웠다가 확 밝아지며 마차 열 대가 한꺼번에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대로가 펼쳐졌다. 내달리는 말 위에 탄 베로니카는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한 채 풍요와 번영의 도시를 받아들였다.

새하얀 비둘기들이 푸드득 햇살 속으로 날아올랐다.

대륙이 타락해도 카르트는 성스럽다고 했던가. 단순히 성도의 영원한 평화를 뜻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넘볼 수 없이 고귀한 도시다. 베이른의 중산층보다 카르트의 거지가 더 눈 호강을 하며 살 만큼.

햇살이 흘러내린 하얀 도로. 빨갛고 노란 과일이 바지런히 비치된 가게. 번듯한 건물 위로는 성전의 종탑이 우뚝 솟았고 갈림길마다 벌거벗은 천사의 분수대 따위가 놓여 있었다.

길과 길을 잇는 작은 다리는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치형의 다리 아래를 지날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자라처럼 고개를 수그렸다. 기사들도 그냥 지나는 판에 키 작은 그녀가 부딪힐 리 만무한데도.

밤별이는 거침없이 땅을 박찼다. 이제 쉴 때가 왔음을 아는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달렸다.

새파랗게 번쩍이는 겨울 강을 넘었고 종이봉투를 안은 여자를 지나쳤다. 개를 산책시키는 노인이며 신문을 가판대에 내놓던 상인은 돌풍처럼 스쳐 가는 병사들을 향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 불붙은 감정은 감탄. 그다음에 피어오른 회색 연기는 묘한 불쾌감이었다. 그 형용 못할 불편함은 노천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화목한 가족을 봤을 때 극에 달했다.

팔이 잘린 채 형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소년이 고기를 포크로 찍어 올리며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그 순간부터 베로니카는 더는 주위를 둘러볼 수 없었다.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상의 불합리함을 쓸데없이 똑바로 봐 버린 기분이 들었다.

안온한 세계와 위험한 세계. 꿈이나 환상과 달리 경계는 명확하다. 그러니 이 풍요로운 땅의 문을 열어 주지 못할 것도 없을진대.

어째서 번영을 홀로 누리려 하는 걸까.

이곳은 카르트 아닌가. 신이 영원한 안식을 약속한 평화의 땅 아닌가.

베로니카가 그런 의문에 빠져 있을 때 말은 어느새 언덕을 올라 지금까지의 대로와는 비교도 안 되게 넓은 광장에 다다랐다.

둥그런 광장은 입구에서부터 좌우로 타원형 회랑이 늘어섰고 중앙에는 높다란 오벨리스크가 위에 십자가를 꽂고 선 형태였다. 정면에는 웅장한 성전이 새하얀 자태를 뽐냈다. 열두 사도가 지붕에 늘어서서 햇살로 눈부신 광장을 내려다봤다. 아마 조각상의 시점에서는 광장과 그들이 올라온 대로가 합쳐져 거대한 열쇠처럼 보일 것이다.

말들은 두 마리씩 광장을 가로질러 성전의 계단 앞에 도열했다.

아이 서넛이 깔깔거리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뎅, 뎅, 뎅 종탑에서 성스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베로니카는 넋이 나간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현실적인 풍경이 지난 몇 주간 겪은 일을 삽시간에 나빴던 악몽 정도로 만들었다.

아니, 혹시 어쩌면 아까 도시를 가로지르다 낙마해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곧 날개 달린 천사가 마중 나와 여기가 하늘 너머라고 선언할지도.

그러나 막상 흰 계단을 내려온 자들은 날개와는 거리가 멀었다. 검은 사제들이 다가오더니 말고삐를 쥐었다.

“밥 많이 먹고 푹 쉬어. 금방 또 만나자.”

헤어지기 전, 베로니카는 밤별이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 속삭였다. 말은 알아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배시시 웃던 베로니카는 자연스레 리온을 따라가려다가 도끼 창을 든 근위병에게 길이 가로막혔다.

“동행분은 교황청으로 모시겠습니다.”

“여기가 교황청이 아닌가요?”

“교황청은 성전 건물 뒤쪽에 있습니다. 베르크 경도 알현이 끝나면 교황청으로 오실 겁니다.”

어투는 정중했다. 훑어내리는 눈길이 묘하게 날카로워서 그렇지.

베로니카는 가로막고 선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어느새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리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그녀의 존재를 잊은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리온? 베르크 경?

어느 쪽이든 간지럽고 우스웠다. 그것이 그와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뭐라고 부르든 간지럽고 우스운 관계.

“이쪽으로 오십시오.”

고함쳐야 할 정도로 멀어진 거리. 키가 크고 창백한 사제 하나가 시야를 가리며 끼어들었다. 베로니카는 어쩔 수 없이 이끄는 대로 발길을 돌렸다.

***

쿵, 소리가 나며 성전 문이 열렸다. 근위병과 기사들은 절걱, 하며 일제히 양옆으로 비켜섰다. 교황은 리온만을 불렀다. 흘긋 계단 밑을 본 리온은 멀어지는 여자를 확인하고 정면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기둥과 아치형 천장. 성스러운 벽화들. 제단으로 나아가는 길은 시선을 빼앗을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변태 같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장식이 빽빽한 성전에서 마땅히 눈 두어야 할 곳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리고 성전을 드나든 지 20년이 넘는 리온은 그런 지혜를 가진 몇 안 되는 신도 중 하나였다.

제단 위의 십자가. 그 외에는 눈의 기쁨을 찾을 곳이 없나니.

리온은 붉은 제단의 앞에 선 교황을 발견했다. 전시였으므로 그는 순례자의 피를 의미하는 빨간 망토에 머리에는 삼중관을,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돌아서 있었다.

리온은 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섰다. 각 맞추어 한쪽 무릎을 꿇자 교황이 느리게 뒤돌았다. 제222대 교황 율리오 5세는 올해 아흔이 된 노인이다. 그러나 그를 옛날이야기나 들려주는 인자한 할아버지로 봐선 곤란하다. 율리오는 성정이 괴팍하고 겁이 많은 노인네에 가까우므로.

리온이 일찍이 비위를 맞추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성문은 결코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신검이 이교도의 손에 있다며 이단 심문관이 파견됐겠지.

아셀도르프에 도착한 저녁, 리온이 여관을 비웠을 때 들른 곳은 전서국이었다. 사실 옷이나 약 따위는 심부름꾼에게 시키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는 베로니카가 씻는 사이 아셀도르프의 전서국에 찾아가 동화자를 찾았다는 서신을 날려 보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전령 새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각주 모음]

1) 크루세이더 복장 : 체인 메일 위에 붉은 십자가가 박힌 하얀 서코트를 걸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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