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21)화 (21/128)

“베이른도 충분히 번화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기죽은 것도 사실이다. 흰 암석 장벽은 베이른이나 아셀도르프의 투박한 모래벽과는 급이 달랐고 곳곳에 위병들이 든든하게 서 있었다. 딱 하나 걸리는 것은 도시 바깥에 점점이 흩어진 야영의 흔적이었다.

“왜 도시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 머무는 걸까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출입 절차에 시간이 오래 소요되는 건지….”

베로니카가 모닥불을 쬐는 아이의 땟국물 어린 얼굴을 보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베로니카는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가 들어 올리려는 손을 붙잡으며 뒤로 숨겼다. 낯선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 걱정되는 눈치였다. 낙원을 앞에 둔 사람들 같지 않은 경계에 베로니카는 의아해졌다.

정면을 보던 리온이 싸늘한 음성을 뱉은 건 그때였다.

“아니, 못 들어가는 거겠지.”

그 말의 의미를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벽에 다다를수록, 아니, 사람들이 몰린 성문 앞으로 다가갈수록 상황은 명백해졌다.

고동색의 단단한 성문은 안에서부터 굳게 잠겨 있었다.

“카르트는 안전상의 이유로 일시적 봉쇄 상태입니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곧 개방될 것이니 침착하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잿빛 갑옷을 입은 위병들은 고저 없는 음성으로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모여든 사람은 각기 다른 말을 하는데 대답은 한가지였다.

“봉쇄라니. 그럼 여기까지 와서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위병의 말을 들은 베로니카가 아연하게 묻자 리온은 말에서 뛰어내려 고삐를 잡고 끌었다. 푸르릉거리는 말을 데리고 규칙 없이 모인 사람들 틈을 헤집자 따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봉쇄? 허, 그래. 너희들 엊그저께까지도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 귀족 나리가 와도 통행증 없이는 못 들어간다고. 근데 아까 이른 새벽에 말이야. 짐마차 수십 대가 들어가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야. 도둑처럼 시커먼 새벽에, 응? 왜 굳이 사람들이 세상 모르게 잠든 밤중에 이동해야 했을까?”

“상인들의 경우 가져온 품목을 검사받으면 통행증이 발급됩니다. 큰 문을 열 시 도시에 소란이 일 수 있기에 상대적으로 조용한 밤 시각에….”

“그러니까 빈손은 안 되고, 뭐라도 갖고 있어야 들어간다. 이거군그래.”

말을 끊은 사내는 실성한 듯 실실 웃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장난해? 이대로 바하무트가 들이닥쳐서 다 죽으면 어떡할 거야? 너희들이 책임질 거야? 바하무트 한 마리도 본 적 없는 애송이가. 지키긴 뭘 지킨다고.”

흥분한 사내는 덤비기라도 할 기세로 위병에게 삿대질을 해 댔다. 술을 마셨는지 혈관이 터진 시뻘건 눈은 그가 이미 통제 불가 지경이라는 걸 보여 주는 듯했다. 사위는 시끄러웠다. 아셀도르프에 머물 때와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광야를 통과한 게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정세를 많은 사람이 인지하고 있다. 도시를 통과해 카르트에 왔더라면 어떤 소요나 혼란에 휘말렸을지 모른다.

“너희들은 그거 상대 못 해. 끽해 봐야 문 걸어 잠그고 들어가서 위에서 포탄이나 쏘아 대겠지. 성도는 무슨 얼어 죽을 성도? 사람을 짐짝보다 못하게 취급하는 곳이 신의 집이냐? 내가 있던 세르도르프에서는….”

결국 점점 표정이 싸늘해지던 위병이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턱 소리 나게 사내의 어깨에 손을 올린 누군가가 그를 확 뒤로 떠밀었다. 어어 하며 밀린 남자가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씨근거렸다.

“이건 또 뭐야? 뭐 하는 미친 새끼가!”

“상인.”

고개 든 사내가 체격 차이에 멈칫한 사이 리온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뒤로했다. 그리고 그대로 위병에게 뚜벅뚜벅 걸어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질린 채 뒤에 따라붙은 베로니카만이 그것이 신성 기사단의 인장이 찍힌 반지라는 걸 눈치챘다.

“이걸 판매하고 싶은데 통행증이 나오는 데는 얼마나 걸립니까?”

리온은 태평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경계와 황당이 반쯤 섞인 시선을 내린 위병은 잠시 후 표정이 백팔십도 바뀐 채로 휙 리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다시 반지. 다시 흉터.

못 볼 것을 본 얼굴이기도 했고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것을 본 얼굴이기도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리온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확인했다. 신검 아포칼립시스다. 검에 깊은 관심이 있는 자라면 그것의 생김새를 모를 수 없었다. 신이 내린 두 자루의 명검이 각각 성 기사단의 현 단장과 전 부단장에게 있다는 사실도.

카르트에서 신성 기사단의 위상은 귀족이나 황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성하께 돌려 드려야 할 물건이기도 하고, 꼭 들어가야 하니 잘 부탁합니다.”

리온 베르크, 카르트가 사랑했던 기사가 미소 지었다.

***

“부단장이? 믿을 만한 소식이냐?”

“예. 한 시간 전쯤 교황청의 근위병들이 통행증을 지니고 남문으로 떠났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시내에 들어와 계실 겁니다.”

깨끗한 대머리에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사내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일반인은 주춤 질릴 곰 같은 기세에도 비쩍 마른 수행 기사는 기에 눌리지 않았다. 그는 저래 봬도 하인즈 폰 크라우스가 몹시 기뻐하고 있음을 알았다. 심지어 저 정도면 상당히 온화한 표정이다.

“가야겠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안 됩니다.”

“이봐. 잔소리할 생각일랑 마. 급한 건은 다 해결했다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베르크 경을 지금 만나 뵙는 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고 말씀드리려는 겁니다.”

수행 기사는 침착하게 문을 막아섰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하인즈는 저의를 읽어 내고 곧장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그가 타락했다고 생각하나?”

“그건 아니지만.”

“부단장은 티란에서의 사고로 잠시 방황했을 뿐이다.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도 모르나? 하물며 탕아도 아니고 영웅이 될 인물이다. 시민들은 언제나 영웅을 필요로 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베르크 경을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부단장은 비텔스바흐 경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베이른 전선에 나가 있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하인즈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고귀한 백작 가문의 차남. 율법을 수호하는 필립 폰 비텔스바흐.

확실히, 수도의 세는 완전히 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베이른에 나갔다 해도 발에 차이는 게 그의 사람들이다.

하인즈는 그쪽에 줄을 댄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치를 안 볼 수도 없었다. 비단 기사단 안에서 뿐만이 아니다. 비텔스바흐 백작가는 이번에 황실과 사돈을 맺음으로써 더더욱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반면 리온은 지지 세력이라 부를 만한 전우들이 티란에서 모조리 죽은 형편이다. 그나마 지인이라 부를 존재는 하인즈밖에 남지 않았으니. 평민 출신 기사가 십여 년간 일궈 낸 자리는 바하무트가 올라온 지 단 2년 만에 부서져 가루도 안 남은 셈이었다.

하인즈가 차갑게 혀를 찼다.

“허, 꼴이 딱하게 됐군. 심판의 날에 가장 추악한 얼굴을 하는 짐승은 인간이라더니.”

“예. 저도 이런 이야기는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괜히 엮일 것도 없지 않습니까. 베르크 경은 절대로 대가 없이는 돌아오지 못하십니다. 그것만은 확실합니다. 적어도 거리에서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 와 속죄제로 바치셔야 할 겁니다.”

수행 기사는 단호했다. 틀린 얘기도 아니라고 판단한 하인즈는 끙 소리를 내며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듣고 보니 문득 의문이 드는군. 너도 아는 사실을 부단장이 모를 리가 없는데. 탈영한 기사에 대한 처분은 최소 파문에서 최대 사형이야. 그걸 알면서도 성도에 돌아왔다는 건가? 왜 이제 와 생각이 바뀐 건지 모르겠군.”

“글쎄요,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묵시록의 기사라 칭송받던 이도 신의 날개 아래 숨고 싶어질 만큼.”

수행 기사의 말에 하인즈는 흠, 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왠지 미심쩍었다.

성도에 무언가 큰 파장이 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통행증을 기다리는 동안 베로니카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인파는 대부분 꾀죄죄하고 더러웠다.

겨우 광야에서 한 번 씻은 그녀도 멀쑥하다고 할만한 차림새는 못 되었지만 일부 피난민들은 정말 코를 움켜쥐지 않고는 근처에도 못 갈 지경이었다.

다들 어디서부터 온 걸까. 무리를 훑던 베로니카는 근처에서 팔이 잘려 나간 소년을 발견하고 멈칫 굳었다.

많이 쳐 줘도 예닐곱 살쯤 되었을 아이는 구릿빛 피부가 하얗게 질린 채 똑같이 어린 형의 다리를 붙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옆에는 비쩍 마른 갈색 말과 활이 보였다. 빈 화살통과 피에 푹 젖은 붕대가 그들의 열악한 여정을 짐작하게끔 했다.

“괜히 관심 가지지 마. 불만을 품은 피난민들은 난폭해질 여지가 있어.”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 눈치챈 리온이 옆에 다가와서 경고했다. 베로니카는 인상을 찌푸렸다.

“온갖 어려움을 딛고 왔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 난폭해질 만도 하다고 생각해요. 성도가 일반 시민들에게 열리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이런 상황에선 안 열려. 그리고 만에 하나 황제가 자비를 베푼다 해도 다른 나라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겠지.”

“왜요?”

“카르트가 이런 때에 이교도를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해?”

리온의 차가운 발언에 베로니카는 새삼스레 소년의 이국적인 특징을 뜯어보았다.

회색 머리. 구릿빛 피부. 금색 눈동자. 롬인은 남동부의 롬 군도에서 온 사람들로 일만이 넘는 신을 모신다. 유일신을 섬기는 대륙과는 풍토가 안 맞아서 과거에는 전쟁도 잦았다.

하지만 전부 지나간 역사 아닌가. 지금은 말마따나 공공의 적이 생긴 상황이었다. 이런 때마저 규율에 칼 같은 교회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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