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정적이 귓가를 강타했다. 말이 들려오긴 했지만 뇌까지 닿지를 않았다. 이런 일은 벤자민이 가족을 두고 그녀에게 왔다고 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깨져선 안 되는 살얼음으로 몸이 덮인 것처럼 베로니카는 굳어 버렸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목구멍을 쥐어짜 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설명해 줘?”
“아니. 이게 이해가 되고 말고 할 문제에요? 그런 짓을 자기 아들한테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신을 닮은 얼굴이 그렇게 갖고 싶으면 자기 눈에다 하면 될 텐데요.”
리온은 점점 분노하는 베로니카를 물끄러미 보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미 사랑에 눈먼 여자였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겠지. 그 여자는 어떻게든 친부의 관심을 사고 싶었을 뿐이야. 명망 높은 성기사도 신과 가까워진 자식은 챙기리라 생각한 거지.”
베로니카는 숨을 멈췄다. 지나간 대화가 급습하듯 뇌리를 찔렀다.
“…성기사들도 여자 취향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몰랐어? 원래 카르트 사생아의 절반은 사제 아버지를 뒀어.”
“역겨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카르트의 사생아는 사실 본인 얘기 아니에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어대던 남자의 낯 위로 평생 지겹도록 본 신상이 겹쳐졌다.
감은 오른쪽 눈. 성화나 조각상에서 신은 언제나 장검을 향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리온의 흉터 또한, 같은 위치에 있었다. 작정하고 그은 자상처럼 길고 정갈하게.
베로니카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쉰 목소리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됐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최종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어. 실제로 아버지는 관심을 보였으니까. 물론 자식이 아니라 성력에 흥미를 보이고 나를 데려갔지만.”
리온은 덤덤히 말했다. 어제 읽은 이야기책의 실망스러운 결말을 이야기하는 투였다.
“…이해가 안 가요.”
“누구나 그래.”
“아니, 그분 말고 당신이요.”
리온은 침묵했다. 그가 왜냐고 묻지 않아서, 베로니카는 입술을 깨물며 주저하다가 따지듯 말을 이었다.
“나이도 알려 주지 않으면서 그런 얘기는 쉽게 하는 게 이상해요. 그렇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아무 일도 아닐 리가 없다. 그렇게 취급할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을 주어야 마땅한 어머니가 상처를 줬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꼭 슬픔이 아니더라도 굳이 감정을 잘라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감정에는 이유가 있어요. 그렇게 잘라 내면 당장은 편하지만. 나중에는 둘 중 하나가 된다고 했어요. 슬픔에 지나치게 무뎌져서 인간이 아니게 되거나, 언젠가 없앤 줄 알았던 슬픔이 밀려와 쓸려가 버리거나.”
“혹은 모든 일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지.”
리온이 한 가지 경우의 수를 덧붙였다. 베로니카는 눈살을 찌푸렸다.
“의미가 없어진다고요?”
“그래. 원래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은 무의미해지기 마련이야. 우스운 사실은 그때는 생모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나이에 맞지도 않는 고통을 참고 견뎠는데 이제는 날 낳아 준 여자의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난다는 거지.”
리온은 무표정한 시선을 신상에게 돌렸다.
“일곱 살 때부터 교황청에 끌려와 페이지로 기사들의 시중을 들었어. 열셋에는 견습이 되어 굴렀지. 열아홉에 교황 앞에 무릎 꿇을 때는 진실로 내가 신의 자식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군. 자른 게 아니라 이미 잘려 나갔어. 제단 앞에서 무릎 꿇고 충성을 서약하는 그 순간에 이미 내겐 가족도 가문도 없었어.”
그렇게 말하는 리온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너무나 덤덤해서 남의 이야기조차 못 되는 것 같았다. 손이 썩어 들어가자 팔 전체를 도려낸 사람을 보는 듯했다. 심장까지 곪지 않도록. 그 상처가 더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왜 네가 울려고 해?”
그 순간 리온이 묘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를 보는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마주한 사람 같았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안 울어요. 그냥 버릇처럼 고이기만 하는 거예요.”
리온은 믿지 않는 눈으로 그녀의 눈꼬리에 고인 물기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장담한 대로 결코 흐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안으로 흡수되듯 사라져버렸다.
“아주 어릴 때는 더 잘 울었던 것 같아요. 자주, 소리 내서. 바닥에 누워서 마구 몸부림치고 발길질을 하기도 하는 못된 아이였죠. 그러면 어머니는 야단을 치기도 하고 화를 낼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난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어요. 아마 무섭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하지만 베로니카는 어머니가 아프시면서부터는 울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아버지가 소리 내어 우는 베로니카에게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일부러 울지 마라, 어깨를 붙든 아버지가 말했다.
“왜 참게 됐지?”
“글쎄요. 여름에는 우는 매미만 아이들에게 잡히니까요.”
그래서 수컷 매미만이 마음껏 떠들어 댄다. 암컷들이 입을 꾹 다문 채 몸을 숨긴 사이에.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내가 삼킨 눈물이 몸속 어딘가에 쌓이는 것 같다고. 쌓이고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날 눈높이까지 차오르면 그때부턴 평생 우는 수밖에 없을 거라고.”
당신이 잘라 내고 잘라 내고 잘라 낸 슬픔에 파묻히면 그때부턴 평생 숨을 참아야 하는 것처럼.
“그럴듯하네.”
“정말요?”
“아니.”
기이한 말장난을 주고받던 남자가 문득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얼굴을 감싸고 눈물이 흘렀어야 할 자리를 어루만졌다. 눈꼬리에서 볼과 턱까지. 눈꺼풀을 내리자 어둠 속에서 소리가 짙어졌다.
아주 작은 소음마저 사라진 자리에 두 숨결이 파고들어 난잡하게 섞였다.
다시 눈을 떴다. 그때 마주한 리온의 얼굴을 뭐라고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니, 묘사하지 않겠다. 묘사할 수 없다. 이건 아무래도 ‘진짜’ 리온 베르크의 얼굴이니까.
베로니카는 그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망막에 새겼다. 가면이 깨지고 드러난 민낯을. 까마득한 심연을.
“내가 당신을 위해 대신 울어 줄까요?”
밑바닥 없는 우물처럼 아슬아슬한 위협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미처 도망치기도 전에 거칠게 호흡을 빼앗았다. 겹쳐 온 입술은 가벼이 품은 동정을 허기진 짐승처럼 게걸스럽게 빨아먹었다. 폭풍처럼 쓸어 간 직후엔 입술을 물었다 뗐다 하며 난폭하고 다정하게 장난을 쳤다.
일련의 행위가 몹시도 열기를 띠어서 베로니카는 해야 해서 하는 의무적인 행위라는 사실도 잊었다. 이것은 단지 숨과 타액을 주고받는 행위다. 신이 인간을 빚어낼 때처럼. 그저.
“흘리면 안 되지.”
방만하게 벌어진 입술 끝으로 타액이 흘러내리자 리온이 엄지로 턱을 훑어 올리며 속삭였다. 눈물을 닦아 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다른 인간이었다. 웃음기를 걷어 내자 남자의 얼굴은 지독히도 건조하고 차가웠다.
억세다시피 한 손가락이 타액의 궤적을 따라 올라가 열린 입에 그것을 다시 처넣었다. 그녀가 순순히 입을 벌리자 멈칫했던 손은 한순간 이성을 잃은 듯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릇한 손길이 혀를 문지르고 치열을 훑다가 점막까지 어루만졌다.
베로니카는 석류처럼 속을 활짝 내보인 채로 코앞에 있는 남자를 받아들였다. 광안이 선명하게 번뜩였다. 그것은 뱃속 깊이 있는 무언가에 불을 지르고, 타오르도록 내버려 두다가 숨 쉴 수 없어질 즈음 목구멍을 타고 소리로 끄집어냈다.
날카로운 교성이 허공에 흩어진 순간, 리온의 새까만 동공에도 빛이 돌아왔다.
빛으로 부시던 눈이 점멸하다가, 천천히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마침내 손이 떨어져 나갔다.
거세고 불규칙적인 숨소리.
베로니카가 전처럼 엉겨 붙지 못한 건 흥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다만 순간적으로 남자의 낯에 비친 경멸의 빛이 너무도 뚜렷해서. 그래서.
“Pepigi foedus cum oculis meis ut ne cogitarem quidem de virgine.”
리온이 그녀의 입술에 대고 성전의 구절을 속삭였다. 그 음성은 지독히 낮았고 배우지 않은 일반 시민들은 결코 알아듣지 못할 만큼 유려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베로니카는 성어를 알았다.
처음 춤에 관심을 가졌을 때 교회로 질질 끌려가 매일같이 성전을 읽고 쓰고 외우는 행위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물에서 끌어 올려진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내 눈과 계약하였나니 어찌 여인에게 눈길을 보낼까.’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발끝에서부터 기어올랐다. 돌이켜 보건대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고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정한 밤의 끝을 말하듯 하얗게 쏟아지는 아침이 밝았다.
***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신전을 떠났다. 리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가면이다. 틈을 놓친 사이에 언제 민낯을 보였냐는 듯 다시 태연한 가면이 씌워졌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점은 이제 그녀와 눈도 맞추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광야는 벗어났어. 어제도 말했듯이 성도에는 점심 즈음에 도착할 거야.”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띄엄띄엄 나무와 밭 따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길도 생겼다. 몇 년 만에 듣는 듯한 새소리에 다시 문명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겨우 일주일 남짓한 기간 둘만 있었을 뿐인데 아주 먼 곳을 떠돌다 온 듯 낯선 기분이 들었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블라센 산맥은 만년설이 덮여 마치 하얀 왕관을 쓴 얼굴처럼 보였다.
저 드높은 산을 올려다보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리라. 검고 흰 산맥 어딘가에 바하무트가 도사리고 있단 걸.
파란 하늘 아래로 지평선을 꽉 메운 카르트는 높은 언덕에 오르자 그 거대한 장관을 탁 트이게 드러내 보였다. 시야의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그야말로 인간의 문명을 대변하는 성도가 휘황찬란하게 뻗어 있었다. 등 뒤에서 리온이 질문했다.
“네가 환상에서 본 도시가 맞아?”
“아마도요. 하지만 그땐 이쪽이 아니라 저 뒤의 산에서 내려다봤던 것 같아요.”
말이 비탈을 내려가자 열이 오르듯 흥분과 긴장이 높아졌다. 온 방향에서 벌레처럼 꾸물꾸물 기어 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수도다. 카르트에 왔다. 곱슬머리에 검은색 피부를 가진 남부 민족부터 회색 머리에 구릿빛 피부를 지닌 롬인까지 다양한 인파를 보자 마음이 놓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두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피난처를 찾아온 것이다. 따사로운 햇살에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도시는 실제로도 낙원처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