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9)화 (19/128)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선을 넘어 북부로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길로 전장을 이탈했다. 귀환 명령을 거부하고 무턱대고 ‘그것’을 쫓았다. 가는 도시마다 핏빛이었다. 제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기 전까지는 티란으로도 카르트로도 돌아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랬었다.

“…괜찮은 거 맞아요? 설마 진짜 아파요?”

환영에 빼앗긴 정신을 여자가 현실로 잡아당겼다. 작고 따뜻한 손길이 이마에 닿자 의식이 또렷해지며 지워졌던 소리가 들려왔다.

리온은 시선을 내렸다. 여자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하필 그의 생모처럼 춤을 춘다는 여자는 머리색 또한 같았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도 있던 베이른의 교회 앞에서 멈춰 선 것도 그런 이유겠지.

“이제야 내 말 알아듣는 거죠?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있었는데. 열이 엄청 나요.”

“멀쩡해.”

“멀쩡한 게 아닌 거 같은데. 언제부터 이랬어요? 어쩐지 아까 식사할 때부터 안색이,”

툭, 몸을 미끄러뜨려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예상대로 여자가 말을 멈췄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에 간지럽게 와닿자 미친 듯 날뛰는 성력이 가라앉는 듯이 느껴졌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져.”

리온은 경직된 어깨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렇게 반응이 좋으니 자꾸만 괴롭히고 싶어지는 거다. 동요하고. 눈물이 맺히고. 맥박이 쿵쿵 뛰다가 김이 오를 듯 발갛게 달아오르고.

아마 그가 견습 기사 시절에 또래로 그녀를 만났더라면 울 때까지 골리고 또 골렸을 거다. 그러다 막상 눈물을 보고 나면 머쓱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손 내밀었겠지.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아, 그래. 알지 못한 편이 낫다.

“고양이 같아요.”

“고양이?”

“순 멋대로 행동하고 성격도 나쁜데 막상 다가오면 밀어낼 수가 없다는 게.”

“살다 살다 고양이 같다는 말은 처음 듣네.”

“칭찬이에요.”

머뭇거리던 여자가 덧붙였다.

“고양이 좋아하거든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리온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어릴 때 집 앞까지 찾아오던 길고양이가 있었어요. 얼룩무늬에 코에 검은 점이 있는 귀여운 애였는데. 책임질 자신이 없어서 가끔 밥만 줬어요. 근데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까 집에 들어와 있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애초에 그 제멋대로인 친구를 막을 수는 없었단 걸.”

“고양이 이름은 붙여 줬고?”

“당연하죠.”

“그럼 네 잘못이야. 이름이 불린 순간부터 걘 자기가 집고양인 줄 알았을걸.”

이번에 입을 다문 건 그녀 쪽이었다. 추운지 간헐적으로 떠는 작은 몸에 팔을 두르자 그새 익숙해졌는지 저항 없이 감겨 왔다. 호의를 호의로 받는 순진한 여자는 알지 못한다.

하나의 바하무트를 죽이면 그것이 낳은 개체는 줄줄이 죽어 버린다. 그리고 동화자는, 어떤 의미에서 바하무트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바하무트가 죽는 순간 그녀의 생명도 끊어질 것이다.

꽃송이째 떨어지는 동백꽃처럼. 활짝 펴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로.

여자에게선 눈 녹는 냄새가 났다. 리온은 흰 눈밭에 떨어진 붉은 꽃을 한 잎씩 갈기갈기 찢는 잔혹한 상상을 했다.

***

날이 밝아 올 무렵, 베로니카는 두 번째 환상을 봤다. 언뜻 꿈과도 비슷했지만 꿈은 아니었다. 아셀도르프도, 원망하는 사람들의 얼굴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그저 눈 덮인 산을 올랐다. 구름이 내려다 보일 높이까지 오르자 산등성이에 자리한 검은 틈이 하나 보였다. 그녀는 그 틈으로 들어가 미로처럼 얽힌 동굴을 지나다녔다. 어찌나 어둡고 어지럽던지 그 지리한 기억 속에서 똑바로 본 건 벽에 송이송이 박혀있던 손가락 같은 버섯 정도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어느 순간 발아래가 절벽처럼 푹 꺼지더니 시야에 깊게 파인 빈 굴이 들어찼다. 구덩이에는 구더기처럼 꼬물거리는 흰 존재들이 보였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 같은 것.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며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넷이 된다.

베로니카는 깊이 고개를 숙여 그나마 가까이 있는 형체를 살펴보았다. 다리를 벌린 인간의 사타구니 사이로 두 개의 다리가 비죽 튀어나오더니 이윽고 몸뚱이와 목이 이어져 흘러나왔다. 울컥울컥. 망아지의 탄생보다 조금 더 역거운 무언가.

아, 그것은 머리 없는 바하무트의 번식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베로니카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끌어안고 발버둥 쳤다. 또 악몽을 꿨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있던 리온이 자연스레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할 리 없었다. 스며 오는 체취가 달았다.

수치도 모르고 파고들어 입을 맞췄다. 쭉 뻗은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앉아 목을 감고 매달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필사적이었다.

이 끔찍한 고통과 폭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거야.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빠져들었다. 그의 거친 숨소리가 좋았고, 신성한 신전에서 신의 아들을 탐한다는 배덕감이 전류처럼 혈관을 타고 흘렀다. 아, 진실로 마귀에게 영혼이 동화되고 만 것일까.

리온도 제정신이 아닌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단단한 살갗은 어젯밤보다도 더 뜨거웠다. 곧은 목이며 넓은 등의 부푼 근육은 만질 때마다 불길이 통과하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실상 간호받아야 할 건 본인인 것 같은데 그는 자꾸만 달래듯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단단하고 육중한 압박감이 부드러운 살결을 뭉개고 일그러뜨렸다. 머리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잊기 전에 말해야 한다. 방금 본 전부를.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베로니카는 헐떡이면서도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환상을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다섯 손가락처럼 생긴 기괴한 버섯. 분지처럼 파인 공동에 쌓인 갓 태어난 바하무트들. 다 말한 뒤에는 힘이 다 빠져 혼절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단단한 품에 안겨서 숨을 색색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걸 본 리온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네가 처음에 본 도시는 카르트야. 다섯 손가락을 닮은 버섯. 그건 블라센에서만 자라는 고산 버섯이야.”

블라센은 성도 카르트를 품은 산맥의 이름이었다. 최초의 바하무트는 카르트에 있는 것이다. 상황이 확실해지자 안도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성도는 아직 무사하다. 하지만 괴물들은 등잔 밑에 숨어 있다.

“…거기에 아예 자리를 잡은 걸까요? 왜? 왜 진작에 카르트를 습격하지 않고?”

베로니카는 스스로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왜 진작에 습격하지 않았느냐고?

그곳이 카르트이기 때문이다. 수천 년간 사제들이 쌓아 올린 성력으로 보호받는 도시기에.

그 무엇도 카르트를 부술 수는 없다.

자신감이 아니라 진실이다. 역사 속에서 한 번도 빗나간 적 없는 신탁이 일찍이 예언하였다. ‘성도의 안식과 평화는 영원하리라. 그 땅에 죄 없는 피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아니하리라’고.

세상이 멸망해도 성도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변치 않을 진리이자 신의 약속이다. 그렇기에 황제는 이미 건물이 가득 찬 도시에 궁전을 욱여넣었다. 교황청보다도 작았지만 적국의 침입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곳만은, 마지막 낙원처럼 바래지 않고 영생할 것이므로.

얼른 도착했으면 좋겠다. 겁에 질릴수록 초조해졌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어 신상을 바라봤다. 뻥 뚫린 천장에서 쏟아진 아침 햇살에 목이 잘린 신상의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사라진 머리는 소름 끼치지만 그것만 제외하고는 베로니카가 익히 아는 생김새였다. 양손에 쥔 두 자루의 검 중 오른쪽은 길고 왼쪽은 짧다.

얼굴이 있었을 땐 단검을 든 왼쪽의 눈만 뜨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애로운 신이 강건한 자에게 눈을 두지 않고 불우한 자의 편을 들어 균형을 맞춘다는 뜻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지긋지긋하게 본 신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바하무트. 두 종족 사이에 자비는 어느 쪽으로 기울까.

“신이 정말로 계실까요?”

뜬금없는 질문에 적막이 흘렀다. 어이가 없어서 대꾸도 안 하는 건가 싶을 때 리온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있다고 하면 믿게?”

“참고 정도는요.”

“있어.”

예상한 답이었는데도 놀랐다. 그 대답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단호한 어조 때문에.

리온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의심도 묻어나지 않았다. 완전한 확신이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밝힌 이목구비에는 피로 위에 덧씌워진 형형한 기운이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험난한 세상을 떠돌다가 아비의 집에 돌아온 탕아 같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리온 베르크는 신의 아들인 것이다.

“신성력이 몸에 흐르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몸에 피가 흐르는 건 어떤 기분인데?”

“아. 피처럼 느낌이랄 게 없어요? 그럼 처음에 신성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다른 사제들이 알려 준 거예요?”

전혀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다 보니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 태어났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날 때부터 구원이 확정된 삶이란 분명 특별하겠지. 자라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했을 테다.

그런 인생이 궁금해지는 건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심리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온 말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실명한 눈이 깨끗이 나았어.”

“…뭐라고요?”

멍하니 되물었다. 리온이 느린 아이를 이해시키듯 다시 한번 설명했다.

“오른쪽 눈. 완전히 멀었었는데 하룻밤 만에 나았다고.”

베로니카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기다란 흉터를 응시했다.

안 그래도 생각하긴 했었다. 시력이 멀쩡하니 눈꺼풀만 스친 걸 텐데 그것치곤 흉터가 진하다고. 칼을 들이댄다고 해도 겁먹고 눈감을 사람은 아닌데 참 이상하다고.

그런데 실명했었다니. 실명한 눈이 나아서 성력을 지녔음을 알았다니.

더 놀라운 건 제 얘길 하는 일이 없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제부터 그는 묘하게 불안정해 보였다. 어쩌면 퐁글퐁글 치솟는 의문들에 전부 대답해 줄지도 모른다.

베로니카는 말이 끊이지 않도록 숨죽인 질문을 던졌다.

“어쩌다가 다친 건데요?”

종교 전쟁, 마물과의 전투, 상상할 수 없이 혹독한 팔라딘의 수련.

순식간에 여러 경우의 수가 스쳐 지나갔지만 리온이 대수롭지 않게 내뱉은 이야기는 셋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어릴 때 어머니라는 여자가 식칼로 눈을 그었어. 내가 신의 얼굴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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