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8)화 (18/128)

“원래는 정말 머리가 있었어요? 20년 전에는?”

베로니카는 떨리는 음성으로 질문했다. 옆에 선 리온은 햇빛이 흘러내린 신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얀 숨을 뱉고 있었다. 가파르게 고개를 꺾은 옆태가 그림처럼 선명했다.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몇 살인데요?”

“적어도 20년 전에 광야에 들어올 나이는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날 어린애로 볼 나이는 되잖아요.”

그러고 보면 정말 몇 살일까. 스물다섯? 서른?

외모만 보아서는 가늠이 잘 안 갔다. 베로니카는 내심 리온의 정확한 나이가 궁금했다.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정말 열 살 조카로 볼 정도인지.

“어린애 취급이 억울해?”

“네.”

“왜?”

“당신이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으니까요.”

신상에서 눈을 떼지 않던 리온이 처음으로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봤다. 비슷한 색의 눈이 맞물리며 깊이 뒤얽혔다.

“왜?”

“모르겠어요. 그냥.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베로니카의 말은 아이의 변덕처럼 논리는 없되 솔직했다. 침묵이 흐르길 잠시, 리온은 이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그거 신기하네. 나도 그렇거든.”

“뭐가요?”

“네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너 자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리온은 신전의 성화를 배경으로 서 있어서 그런지 천사를 흉내 내는 마귀 같기도 했다. 베로니카는 순간 홀린 듯이 그가 짓는 서늘하고도 근사한 미소를 올려다보았다. 입술만 웃고 있을 뿐 눈은 웃지 않지만. 그래도 그를 이루는 붉은 색채는 눈이 아릴 정도로 아름답다.

나 좀 봐 달라는 듯한 강렬한 날갯짓이 솔직해서 칙칙한 검정과 달리 절대로 외롭지 않아 보여.

이렇게 여자들의 갈망을 녹여서 빚어낸 듯한 생김새를 보고 있노라면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인간이 과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고. 자각하지 못한 새 그간 보았던 리온 베르크가 신실한 기사라는 판단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당신 사실 엄청난 난봉꾼이죠?”

“뭐?”

“그 정도면 카르트의 사생아는 사실 본인 얘기 아니에요?”

농담이긴 했다. 그러나 리온은 예상한 것보다 더 재밌어했다. 이제 부드러운 입술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눈매마저 소년 같은 유쾌함을 담고 있었다.

“아, 내가 사생아가 있냐고?”

고개를 끄덕이자 리온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피식거렸다.

“난 여자를 안을 생각이 없어.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지.”

“사랑에 빠져도요?”

“사랑에 빠져도.”

일단 사랑에 빠지는 멍청한 짓부터 안 하겠지만, 하고 리온은 덧붙였다.

비웃음이다. 그의 비틀린 입매에 남은 잔상은 명백히 비웃음이었다. 리온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신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윤곽 뚜렷한 옆얼굴에는 절대로 일어날 일 없는 사건에 대한 강한 확신과 절대자에게 바치는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그 무엇도 신께 헌납된 일생에 끼어들 수는 없으리라.

알고 있었는데. 귀의한 기사에게는 당연한 일일진대 왜인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만이 치밀어 올랐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앞에 가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옷자락을 잡아당겨 주목을 갈취했다. 찌릿거리는 발목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쑥 따져 물었다.

“어떻게 장담해요?”

“…….”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냐고요. 영원한 사랑도 빠지는 데는 찰나인걸요.”

그녀가 알기로 사랑은 불합리한 감정이다. 결코 미리 대비할 수 없는 불의의 사고다. 벼락처럼 떨어진 후에는 사람을 폭풍처럼 쓸어 가기에 사랑에 빠진 친구들은 나쁜 사람을 만나도 쉬이 헤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베로니카는 스무 살 아가씨답게 낭만적인 이야기를 사랑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고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비극에 열광했다. 그러니까 신의 광휘가 만든 그늘 속에 죽어 버린 눈동자 따위는 싫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저버릴 사랑에 빠지기도 한대요. 절망의 심연에 가라앉다가 영혼의 창으로 손 내미는 구원자를 만나기도 하고요.”

문을 등지고 선 리온의 그림자는 베로니카를 덮고도 길게 늘어졌다. 그는 역광 속에서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물에 걸려 발버둥 치는 물고기를 보듯이. 베로니카는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듯한 그 표정을 견디지 못하고 마지막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렇게 단정 지어 둘 거 없다고 생각해요. 인생은 기니까요.”

입을 꼭 다물고도 겁 없는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벌써 여러 번째인 것 같다. 그들은 유독 이렇게 서로를 들여다보는 경향이 있었다.

“모든 것을 다 태우는 불같은 사랑도 식는 데는 찰나고, 그렇기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눈을 마주하고도 인생의 사랑을 못 본 척 흘려보내기도 해.”

낮고도 또렷하게 이어지는 말은 그녀의 말과 정확히 상반되었다. 흔들리는 베로니카의 눈을 보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손에 쥔 걸 저버리는 것보단 그편이 낫기 때문이야. 저마다 사는 방식은 달라. 그걸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라고 보는데.”

어른 취급. 베로니카가 지금의 상황에 적절한 표현을 겨우 끌어 올렸을 때, 그녀는 이미 그의 옷깃을 놓고 물러서 있었다. 그는 그녀를 비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을 뿐. 그런데도 비웃음당하고 면박당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뭐라고 덧붙인들 어린애처럼 구는 꼴이 된다.

리온의 말이 논리적으론 맞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자꾸 따지고 싶어지는지 베로니카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이해 못 하는 게 비단 이것뿐일까. 그가 자신을 좋아하길 원하는 이유부터 알 수가 없는데.

잠시간의 불편한 침묵 후 리온은 저녁을 가져올 테니 근처 기둥에 앉아 있으라고 말했다. 베로니카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든 검은 오늘 처음으로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냈다.

***

신전을 나선 리온은 지친 말의 등에서 식량을 끌어 내렸다. 그러곤 지나가는 시선처럼 고요한 광야를 잠시 넘겨다보았다.

뚜렷한 위화감. 광야는 사막과는 다르다. 불모의 땅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선 풀 한 포기, 씨앗 하나 움틀 수 없다. 물 한줄기도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창공을 나는 새조차 광야를 기피하며 그 어떤 생명체도 이곳에 터전을 꾸리지 못한다.

원래는 기름진 땅이었다고 한다. 신이 이 땅의 생명력을 티끌까지 끌어모아 인간에게 선사하기 전까지는.

그것은 엄청난 힘이었다. 씨앗이 싹트는 힘. 벌레가 숨 쉴 구멍. 비가 스며들 틈. 모두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비단 현재의 생명뿐만이 아니었다. 생명력이란 베어 내지 않으면 얼마나 자라날지 모르는 나무의 가능성까지도 포함한다. 신은 땅의 미래까지도 인간에게 주었다.

선택받은 민족은 그 생명력을 성력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성력은 핏줄을 통해 이어졌다. 인간이 만물을 다스릴 권위와 명분을 얻은 건 이때부터였다. 대지의 생물은 신의 대리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광야 자체가 신의 이적을 증명하는 성물이었다.

신께 감사하는 마음에서 세운 것이 광야 끄트머리의 이 대신전. 아직도 여름이면 성년이 된 청년들이 대륙 각국에서 등짐을 싸 들고 순례를 온다.

여기까지가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 그리고 리온이 아는 바는 그 이상이다.

예컨대 성력을 가진 자가 광야에 오랜 시간 머무르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원래 제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겠다는 건가.”

그가 텅 빈 손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뇌까렸다.

성력이 요동치며 날뛰는 느낌이 선연했다. 빠져나가고자 발버둥을 치며 전신을 휘돌았다. 근 일주일간 그러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몸을 저미는 고통을 무시한 채 달려왔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달했다. 느긋하게 받아 줄 수 있는 여자의 발언에 진지해진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갈려 나갈 대로 갈려 나간 정신은 예리한 칼날과도 같았다. 피곤했다. 성력의 폭주가 티란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리온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두 사람은 해 진 신전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통통한 소시지를 바싹 굽고 거기서 나온 기름에 계란을 튀겨 먹었다.

이름 모르는 녹색 채소도 구웠는데 리온은 별말이 없는 반면 베로니카는 쓰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좋든 나쁘든 약탈자들의 식재료와 조리 기구는 그들의 식탁을 이전보다 풍요롭게 만들고 있었다.

불을 유지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실내 깊숙이 들어오자 추위는 많이 가셨다. 오랜만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댔을 때였다.

꼼지락거리며 다가온 베로니카가 망토 한쪽을 들어 보였다. 리온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달빛에 젖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안색이 안 좋아요.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망토를 빼앗은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서요.”

리온은 무슨 소린지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의식이 둔했다. 제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왔다는 건가.

빤히 보기만 하자 여자가 주춤거리며 망토를 내리더니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 귀엽게도 묻지도 않을 변명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은 내가 추운 것도 있어요. 온기가 있다가 없어지니까 더 견디기 힘들어요.”

조잘거림이 귓가에서 흩어진다. 리온은 뭐라고 말하는 입술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의 옆에 펼쳐진 어둠을 넘겨다보았다.

텅 비어 있어야 할 신전에는 피 흘리는 사람들이 한가득 서 있었다. 사실은 아까부터, 신전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그들이 보였다. 핏물이 흐르는 흰 갑주, 머리 없는 시체들. 한계에 이른 몸이 보여 주는 환영이다.

수백에 이르는 티란의 전우들이 ‘그것’을 상대하다 전멸했다. 일명 타벨라 전투라 불리는 비극에서 살아 돌아온 인간은 리온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동료들을 짓밟고 살아남았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폭주한 리온이 그들의 성력까지 모두 삼켜서 날뛰었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