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단, 별로, 안 무겁네요. 책에서 보면 막, 휘청거리고, 그러던데.”
해가 뜬 뒤부터 배고픈 고양이처럼 굴던 베로니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장검을 끌어 내린 참이었다.
묵직한 무기를 가벼운 척 들어 올리며 관심을 끌자 남은 식량을 확인하던 리온이 흘긋 보고는 대꾸했다.
“잘됐네. 계속 들고 다녀.”
“네?”
“지금부터 떨어뜨리지 말고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 밥 먹을 때나 씻을 때나. 자기 전까지 계속.”
베로니카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다가 리온이 등을 돌리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라가 물었다.
“그게 다예요?”
“뭘 바라는데?”
“뭔가, 휘두르는 법이라든가. 기본자세라든가. 급하면 어딜 찌르라든가.”
그럴듯한 말을 듣던 리온이 피식 웃었다.
“넌 그거 못 휘둘러.”
“왜요? 별로 안 무겁다니까요?”
따지듯 내뱉자 리온이 귀찮다는 듯 그녀를 돌아봤다. 나무 칼로 전쟁놀이하는 어린애를 보는 눈빛이었다. 기대로 밤잠까지 설친 베로니카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검을 잡아 빼곤 동백꽃이 새겨진 묵직한 검집을 땅에 내던졌다.
스르릉, 검날이 아린 소리를 내며 하얗게 번뜩였다. 새 검답게 날카롭게 벼려진 날을 보자 긴장으로 팔에 힘이 들어갔다.
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쥐자 균형 잡힌 아까와 달리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렸다. 기다란 검신이 조금은 버겁게 느껴졌다.
베로니카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어디서 본 대로 허공을 겨누었다. 그럴듯했다. 볼썽사납게 떨리는 검 끝만 빼면.
“들고 다녀.”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리온이 짤막하게 진단을 내렸다. 베로니카는 시무룩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곧장 어깨를 늘어뜨리던 것도 잠시, 생각을 고쳐먹고 다시 팔을 높이 쳐든 건 그때였다.
리온은 막지 않았고 베로니카는 기이하고 강렬한 충동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미는 것을 느꼈다. 위에서 아래로, 검이 내려가는 순간 붉은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정적으로 고여 있던 공기가 찢겨 나갔다.
말 그대로였다. 파공음과 함께 대기가 찢어져 일렁였다. 거칠게 일어난 돌풍이 옷자락과 머리칼을 펄럭이고 눈가루를 휘날렸다.
우스꽝스럽게도 이 소요에 가장 놀란 사람은 베로니카였다. 그녀는 미끄러질 뻔한 검을 고쳐 쥐고 얼떨떨하게 서 있다가 허공으로 떠올랐던 눈이 후드득 떨어진 뒤에야 고개를 홱 돌렸다.
“봤어요? 방금? 봤어요?”
“아직 시력 걱정할 나이는 아니니까 그렇게 되물을 거 없어.”
“방금 그건… 그러니까.”
“용감하게 단검 빼 들었을 때부터 아는 거 아니었나?”
“그땐 정신도 없었고 그런 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어요. 하지만 세상에.”
베로니카는 알 수 없는 힘에 대한 흥분으로 다시금 검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리 시도해도 붕붕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묘하게 지쳐서 금세 숨이 차올랐다.
“왜 안 되는 거죠?”
“글쎄. 난 동화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는데.”
“어제 가르쳐 준다면서요. 좀 진지하게 대답해 주면 안 돼요?”
리온은 이제 식량 주머니에서 꺼낸 마지막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은 뒤 병을 가죽에 던져 넣으며 말했다.
“지금 단계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야.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해결책이라도 듣고 싶어?”
“네.”
“체력을 더 단련해.”
힘이 빠지리만치 단순 명료한 충고였다.
베로니카는 반박할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포기하고 결국 후들거리는 팔로 검을 갈무리했다. 자연스럽게 말에 검집을 올리려다 리온에게 제지당한 건 그다음 일이었다. 베로니카는 황당한 낯을 들었다.
“설마 들고 다니라는 건 아니죠? 그건 휘두르기 전 얘기잖아요. 지금은 팔이 떨어질 것 같다고요.”
“그거 몹시 슬픈 일이네. 근데 내가 공감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남의 고통은 잘 못 느껴.”
터무니없는 소리에 입을 딱 벌렸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베로니카는 빙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한번 노려보았을 뿐 검을 내려놓으려 하지는 않았다. 지기는 싫었다.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욕구다.
춤을 처음 배웠을 때가 생각난다.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열 번 중 한 번은 죽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검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원래는 춤을 췄어요.”
“그럴 것 같았어.”
베로니카는 시선을 들어 놀라지도 않는 얼굴을 살폈다.
“왜요? 빼빼 말라서요?”
“아니. 안 먹는 것치곤 근육이 붙어 있어서.”
뜻밖의 말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춤이라도 추냐던 첫날의 질문이 떠올랐다. 그런 뜻인 줄은 몰랐다.
“근육… 아, 하긴. 그래서 몸 쓰는 거 자신 있는 편이긴 해요. 사람 말하는데 왜 웃어요?”
“몸을 잘 써서 그런가 발목도 잘 삔단 말이야.”
“누가 자신 있댔지 잘 쓴대요? 몸 잘 쓰는 사람 중에서는 못 쓰는 편이란 말이에요.”
뻔뻔한 대답에 리온은 말에 팔을 올린 채 아, 하고 심드렁히 감탄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얼굴로 그녀를 훑었다.
“무희치곤 머리가 짧은데.”
춤추는 여자들은 머리가 치렁치렁한 게 일반이다. 동작에 따라 흔들리는 머릿결까지도 아름다운 선의 일부로 인식되었으니까.
그러나 베로니카는 어릴 적부터 늘 단발을 고수해 왔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버지가 경멸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희들의 긴 머리가 천박한 목적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싫어하셔서요.”
“그래서 잘랐다고?”
“심지어 매번 직접 다듬어 왔는걸요.”
“그거 아쉽네.”
무슨 뜻이냐는 듯 올려다보자 리온이 서슴없이 머리끝에 손장난을 치며 말했다.
“모르나 본데 너 뒤에 삐뚤빼뚤해.”
“…거짓말하지 마요.”
“진짠데.”
정색하자 잘생긴 입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졌다. 베로니카는 감각이 없는 머리카락에서 저릿한 환각을 느꼈다. 물론 정말로 삐뚤빼뚤할 리는 없었다. 깔끔한 뒷머리는 거울 두 개만 있어도 확인 가능했다.
그러니까 아쉽다는 말은 긴 머리를 좋아한다는 뜻에 불과했다. 베로니카는 덩달아 아쉬움을 느끼고 문득 당혹했다.
리온과 있으면 때때로 질 나쁜 용병에게 잘못 걸린 마을 아가씨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제멋대로 마을에 들러서 능글맞은 장난을 거는 남자. 서늘한 미소로 전에 울렸던 기억은 싹 잊게 하는 남자.
이런 종류를 제일 조심해야 한다고 극단의 언니들은 말했다. 남자란 도박과도 같아서, 함부로 믿고 걸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까 베로니카, 손을 털어. 너무 늦기 전에. 깊이 믿기 전에.
“그런 건 됐고 카르트에는 언제쯤 도착해요? 두 사람이나 태워서 그런가 말이 많이 지쳤어요.”
베로니카는 시선을 비끼며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리온은 만지작거리던 머리칼에서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오늘 해지기 전에 대신전에 도착하면 그때부턴 금방이야. 서두르면 내일 정오에는 카르트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어.”
광야를 나간다는 기쁜 소식인데 왜인지 반갑기만 하지는 않았다. 베로니카는 이런 감정이 드는 제가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햇빛이 노랗게 퇴색한 오후, 마침내 대신전이 지평선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년도 더 되었다는 폐허는 정면에 하얀 기둥이 죽 늘어서서 웅장한 인상을 풍겼다. 갈라지고 부서진 건축물인데도 가까이 갈수록 대자연을 맞닥뜨린 듯 기가 죽었다. 말에서 내린 베로니카가 감탄했다.
“지키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어요. 사제든, 기사든.”
“신의 계절인 여름 석 달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드나들지 않는 게 원칙이야.”
허락받지 않고 들어온 자는 영원히 광야를 헤매게 되리라.
탈출한 범죄자들이 광야로 숨어들었다가 백골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변형된 설만 수십 가지에 이른다.
태평한 동행 덕에 잊고 있던 두려움이 슬금슬금 밀려들었다. 베로니카는 검을 든 손을 기도하듯 맞잡고 자그맣게 되뇌었다.
“저 사람이 끌고 들어온 거예요. 저는 아무 죄도 없어요.”
“안까지는 굳이 안 끌고 들어갈 테니까 밖에서 자든지.”
기도에 응답하며 스쳐 지나간 리온은 높은 계단을 성큼 뛰어올라 활짝 열린 청동 문 사이로 들어갔다.
베로니카는 훤칠한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저건 그냥 말로만 하는 소리라고 기도를 덧붙였다.
겨우 하루 검을 들고 다녔다고 팔이 뻐근했다. 얼른 쉬고 싶다는 열망 반, 호기심 반으로 리온을 뒤따랐다. 그러나 문을 넘는 순간 머릿속은 텅 비워지며 이내 들어온 목적 따위는 상관없어졌다.
쏟아지는 풍경은 압도적이었다. 베로니카는 숨도 쉬지 못했다.
숭고한 아름다움. 이외의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천장과 벽의 성화(聖畫)는 부식되어 희미했으나 여전히 화려하고 성대했다. 내심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따위를 상상했던 베로니카는 창문 하나 없는 내부를 신기하게 두리번거렸다.
신전은 오로지 천장에 있는 크고 둥근 구멍에 빛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빛줄기 속에는 장엄한 신의 조각상이 최후의 심판관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10차드(약 30미터)에 달하는 하얀 신상은 세월에 때가 탔어도 그 위압감만큼은 조금도 바래지 않은 모습이었다. 갑옷의 차갑고 단단한 재질이 느껴질 정도로 조각은 세밀했고 그 높이는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지금의 건축 기술과 조각술로도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떠들던 말이 생각났다. 대신전의 건축은 세계적인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정작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었는데….”
우뚝 멈춰 선 베로니카가 중얼거렸다.
신상에는 목이 없었다. 잘려 나간 듯 목만 없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직접 보니 소름이 끼쳤다. 그 유명한 신의 예언이다. 바하무트의 도래를 경고하였다는, 광야의 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