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6)화 (16/128)

마차를 몰던 남자 한 명만이 도망쳤다. 일행이 모두 죽고 잡힐 것 같자 마차와 연결된 고리를 끊어 낸 것 같았다.

짐마차의 천막을 열어젖힌 리온은 죽은 남자와 그 앞에서 벌벌 떠는 베로니카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차 바닥에 있는 털 망토를 주워 옷깃이 늘어진 그녀에게 둘러 주었을 뿐이다.

“뽑지 마요.”

리온이 남자의 얼굴에 꽂힌 단검을 회수하려던 때였다. 입을 다물고 있던 베로니카가 쉰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대로 둬요. 그 물건은 이제 필요 없어요.”

목소리는 단호했고 윤기 없던 빨간 눈은 초점을 찾고 번득였다. 그는 말없이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옆자리에 앉았다. 무릎을 세운 기다란 다리와 그 위에 걸친 팔 너머로 아직 어두운 밤이 장막처럼 엿보였다.

“당신은 처음부터 그 사람들이 상인이 아닌 걸 알고 있었죠?”

“응.”

“어떻게요?”

“향신료를 나르는 짐마차는 바닥이 이따위로 얼기설기 짜여있지 않아. 그리고 상인들은 보통 용병을 호위로 고용하기 마련이지. 직접 무기를 드는 게 아니라.”

낯선 자를 두려워하지 않던 태도도 그들 자신이 피난민을 약탈하는 강도였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니 수상한 점이 보였다. 베로니카는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목소리가 눌린 듯 먹먹하게 울렸다.

“세상이 이 지경이라서 저런 사람들이 나타난 걸까요?”

“아니. 사람은 바뀌지 않아.”

“어떤 세상이 오든지?”

“마찬가지야. 나쁜 놈은 나쁜 짓을 하고 착한 놈은 착한 짓을 하지.”

“하지만 당신은 바하무트가 올라온 덕분에 이단 심판관에서 전쟁 영웅이 됐잖아요.”

불쑥 내뱉은 베로니카는 문득 실수를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들은 살인마라는 말이 뇌리에 깊이 박힌 모양이다.

리온은 고개를 마차 벽에 젖히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변하지 않았어. 나쁜 놈은 어떤 시대가 와도 나쁜 짓을 하지.”

베로니카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리온은 시선을 느끼고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멀리 해가 뜨고 있는지 흔들리는 붉은 머리칼이 아까보다 선명하게 시야에 담겼다.

“계속 궁금했는데, 투구는 왜 안 써요?”

“바하무트가 머리를 노리니까.”

“알아요. 그러니까 노리는 부분을 뭐 하러 노출하는데요?”

“첫째, 빨리 죽고 싶어서. 둘째, 머리가 눌리는 감각이 거슬려서.”

장난 같은 대답을 못마땅하게 듣던 베로니카는 마지막 말에는 눈을 크게 떴다.

“셋째. 그래야 그것들이 나한테 달려들 테니까.”

뇌를 노리니까 머리를 노출한다.

“셋 중에 답이 있으니 골라 보든가.”

그 의미를 깨닫자마자 소름이 돋아났다.

자살행위다. 도망가는 타인을 지키고자 불 앞에서 제 몸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다.

바하무트 앞에서 있는 힘껏 도망친 그녀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였다. 벌 앞에 꿀을 묻히고 선 심정은 어떠한가. 무섭지 않은가. 숨고 싶지 않은가. 아니, 그는 그녀와 달리 그것을 죽일 힘이 있으니 괜찮은지도 모른다.

베로니카의 시선이 문득 앞에 있는 시체로 떨어졌다. 부릅뜬 눈. 평생 잊지 못할 감각.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안 된다고 하면 안 물어보게?”

“아니요. 청개구리 기질이 있어서 더 집요하고 강박적으로 물어보긴 할 건데.”

거침없이 말을 잇자 리온이 재밌다는 듯 흘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점점 본래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옆집 할머니는 항상 베로니카가 조금은 건방지고, 약간은 팔랑거리는 계집애라고 말하곤 했다.

“말해.”

“나한테 검을 사 준 이유가 뭐예요?”

“강도가 들었을 땐 어린애도 식칼을 드는 게 정상이야.”

“그런 말이 아니에요. 내가 궁금한 건 나한테도 가능성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무슨 가능성?”

“바하무트를 죽일 능력이요.”

리온의 권태롭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베로니카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알 건 알아요. 상식이잖아요. 평범한 인간이 바하무트의 가죽을 뚫을 수 없다는 건.”

대포가 아닌 이상 바하무트를 죽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오직 성력을 지닌 성기사 혹은 검기를 두른 일류 검사들 정도나 바하무트를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베로니카는 둘 중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리온은 그녀에게 검을 안겨 주었다.

왜?

“할 수 있어서 검을 받은 거라면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뜻이에요. 나는 강해지고 싶어요.”

때마침 부는 겨울바람이 붉은 머리를 헝클이고 지나쳐 검은 단발을 마구 나부꼈다.

당돌한 하얀 이마와 뺨이 눈부시게 드러났다. 내일이면 녹아 사라질 덧없는 눈처럼.

눈에는 옅은 눈물이 고인 채. 제 두 눈조차 바람에게서 지켜 내지 못한 주제에 깃든 감정만큼은 형형했다.

리온은 베로니카를 꿰뚫을 듯 응시했다.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바하무트는 정체 모를 단단한 대기를 방어 막처럼 한 겹 두르고 있어 일반 검사는 가죽을 베기는커녕 상처입히기도 어려웠다. 인류가 속수무책으로 밀린 이유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동화자였다. 맨 처음 단검을 쥐었을 때 일으킨 대기의 출렁임은 바하무트가 몸에 두른 기운과도 흡사했다. 그렇기에 검기 없이도 방어를 뚫을 수 있으리라 예측했다. 먼저 배우겠다고 나서는 배짱만큼은 의외였지만. 그것도 쇠붙이와는 전혀 연이 없어 보이는 가냘픈 팔뚝을 가지고.

뭘 닮았다 했더니.

여자는 구름 낀 태양 같았다.

평소에는 눈부셔서 볼 수 없는 태양은 흐린 겨울 하늘에서는 어렴풋이나마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매일같이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존재했을 텐데도.

때로는 흐린 하늘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존재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리온은 불현듯 서늘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정체를 안 뒤 저런 식으로 반응한 인간은 없었다.

평생 훈련한 병사조차도 무력하게 구원을 원했다. 이적을 갈망하며 갑옷에 손끝이라도 닿기 위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여자는 달랐다. 유약한 외모로 미루어 대충 얌전한 성격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알이 깨지고 태어난 새는 날개를 포기한 도도새가 아니라 겨울을 견디는 바다 매였다.

조금도 기죽지 않고, 힘든 여정에도 초점이 또렷한 눈을 한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인생이 뒤집히는 사건을 겪고서도 그것을 살의로 승화시켰다는 점이었다.

정신력이 강하거나 단단한 게 아니다.

죽은 인간을 앞에 두고도 곧장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어딘가 결핍되어 있는, 감정의 어느 기관에 하자가 있는 인간이다.

리온 베르크 그 자신처럼.

“밑져야 본전이니 시도해 볼 수는 있겠지.”

역시 여자는 신경을 긁는 데가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그를 닮았다. 결핍된 자아를 스스로 채워보려 애쓰던.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징징대지나 마. 도중에 포기하는 인간은 질색이야.”

밟지 않은 눈처럼 깨끗한 낯이 거슬리는 건 그때문일 것이다. 미래에 핏물로 더럽혀질 모습이 눈에 선해서.

“안 그래요. 나는 생각보다 독하거든요.”

베로니카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바람에 고였던 눈물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

식재료를 한가득 챙겼다. 으스대던 소리와 달리 마차는 대부분 텅텅 비어 있었다. 베로니카는 아직 말을 탈 줄 몰랐으므로 매여 있던 짐승은 전부 풀어 주었다. 물론 그 전에 모든 말에게 여물을 배불리 먹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다음으론 눈을 끓여 얻은 따뜻한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다. 둘 다 피투성이였으므로 제법 공을 들여 문질렀다. 약탈한 것임이 분명한 여자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강도들의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모직 튜닉과 바지를 챙겨입은 베로니카는 위에 리온의 망토를 둘렀다. 다른 겉옷도 많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시간이 꽤 지체된 상태였으므로 그들은 곧장 출발했다. 당연히 그날은 검에 대해 말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 베로니카는 누가 흔들어 깨운 것도 아닌데 알아서 스르르 눈을 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깨운 무언가가 있기는 했다.

부푸는 희망과 기대, 멋지게 검을 휘둘러 바하무트를 무찌르는 상상 같은 것.

대륙의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자라면서 한 번쯤 듣는 이름들이 있다. 얼음 검 앤더스라든가 남쪽의 철퇴 마누트, 롬 군도의 니르귀와 신의 사자 리온 베르크.

소년들은 쉬이 검사가 될 꿈을 키운다. 아이가 생선을 잡는 필부의 아들이더라도 문제는 없다. 소년은 야망을 가져야 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에서는 언제나 배제되는 인물들이 있다. 벽난로 앞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손위 누이나 헝겊 인형을 들고 놀던 여동생. 똑같이 야망을 품을 줄 알지만 대신에 야망을 가진 남자를 품도록 길러지는 여자아이들.

사실 베로니카가 이교도 니르귀의 목을 벤 리온의 일화를 알고 있다는 자체가 그녀가 검술에 흥미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춤을 추는 그녀는 무엇을 위해 대장간을 그토록 기웃거렸던가.

그녀에게 검은, 남자로 태어났다면 언제고 손대고 말았을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동화로 뒤집힌 인생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좋은 변화였다.

검을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그것도 리온 베르크로부터.

희망의 불씨는 악몽마저 몰아내고 새벽부터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남성적인 체취와 고른 숨소리에 휩싸인 세상은 아직 어두웠지만 베로니카는 몸이 근질거렸다.

“자요?”

“응.”

잠깐의 사이를 두고 머리 위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베로니카는 반색했다.

“언제 깼어요?”

“잔다니까.”

“와, 엄청 부지런하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내 말이 들리긴 하는 거지?”

잠긴 음성에 베로니카는 키득거렸다. 몸을 따라 목소리가 웅웅 울린다.

“원래 이때 일어나요? 모닥불도 꺼지고 온통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요.”

“네가 깨운 거야.”

“아.”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베로니카는 깊이 끌어당겨지는 감각에 멈칫했다. 단단하고 따뜻한 몸이 언제부터 무섭지 않아졌더라.

책에 보면 시간이 흐른다고 표현하던데. 아닌 것 같다. 시간은 고이고 쌓이는 물질이 분명했다.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어도 온종일 붙어 있는 시간의 의미는 깊었다. 베로니카는 더는 처음처럼 리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원래는 남자라는 생물, 그러니까 신체적으로 더 위협적인 존재에게 가지는 공포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세상 모든 여자가 그럴 것이다. 낯선 남자와 단둘이 여행하면서 안전과 평안을 느끼는 여자가 몇이나 될까.

그러나 리온 베르크는 달랐다.

진부하고 순진해 빠진 표현이래도 좋다.

그는 신의 기사였고, 성적인 흥분이 그를 흔들지언정 결코 신념을 부술 수는 없었다.

리온은 그녀에게 필요 이상 손댄 적이 없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타락한 기사는 한 톨의 곡식 앞에서도 신께 감사할 정도로 신실했다.

가볍고 능글맞은 말투가 밖으로 내보이는 가면이라는 사실쯤 눈치챈 지 오래다. 그녀가 필요할 때마다 쓰는 미소와 같았다. 가면 밑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지 모른다.

비슷하다. 닮았다고 생각하자 호기심이 싹텄다.

그를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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