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5)화 (15/128)

“오만한 인간이 잘못했으니 회개하면 다 끝난다는 식이지. 장정들을 징집해야 할 때 감추고 기도나 하고 있으니 티란이 그 꼴이 날 수밖에 없잖아?”

남자들은 킬킬거리며 교회를 조롱했다. 리온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릇에 스튜를 떠다 베로니카의 앞에 놔줄 뿐이었다.

“티란이 그 꼴이 나다니요? 역시 점령당한 거예요?”

“슬프게도 그렇습니다. 가장 강력한 전선이 뚫리고 바하무트의 북상이 본격화되었지요. 그래도 제가 알기로 농성을 벌이며 버티는 도시가 여럿입니다.”

남쪽이 모두 넘어가진 않았다는 소리다. 지원이 없는 한 시간 문제겠지만.

“우리는 역사를 살고 있소. 인류가 살아남는다면 아마 이번 침공은 역사상 가장 큰 전쟁으로 책에 기록될 거요. 재밌는 일 아니오? 서로 물고 뜯던 정복 전쟁이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공동의 적을 위해 모두 하나가 되었소.”

루에가 사람들은 평민도 정세에 훤한 듯이 보였다.

리온을 만나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제 처지가 떠오르자 베로니카는 문득 소름이 끼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자 옆자리 청년은 그녀가 추위를 탄다고 생각했는지 속을 덥힐 술을 따라 주었다. 침묵을 지키던 리온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아내는 술을 모릅니다.”

“이런, 독실한 분들입니까? 광야에 들어오셨으니 신앙심은 없는 줄 알았는데요.”

“신앙심과 술은 별개더라고요. 저는 그냥 술을 즐기지 않아요.”

베로니카도 리온에게 동조했다. 하지만 청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루에가에서는 손님께 반드시 술을 대접해야 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성의에 보답한다 생각하시고 한 잔만 드시지요. 독한 술도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거절하기도 애매했다. 베로니카가 그럼 한 잔만 마시겠다고 대답하려던 찰나 리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문화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가족분까지 마실 수도 있으니 아내 몫까지 제가 대신 마시겠습니다.”

리온의 입꼬리는 능청스러웠지만 동시에 칼날처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아래 깔린 예리함에 침묵이 흐르길 잠시, 이내 청년이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아, 하하, 이런, 제가 잘못했습니다. 카이젠미어에 올 때마다 실수한다니까요. 이 땅은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나라인걸요.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두셨으니 질투하시는 것도 합당한 일입니다.”

리온은 반박하는 대신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할당된 술잔을 들이켰다. 베로니카만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질투라고? 이 사람이? 첫 만남에 목에 칼을 들이댔던 남자가?

“…루에가는 일부다처제인가요?”

“아니요. 정확히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폐지된 지 백 년째지요. 루에가는 인간의 생물학적인 측면을 존중합니다. 한 명의 인간이 평생 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안정된 일일지 모르나 사실은 본능을 억누르는 일이지요. 뭐, 종교의 영향력이 강한 카이젠미어에서 결혼 서약을 소중히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 말에 금세 두 잔을 끝내 버린 리온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평생의 수절을 서약한 그로서는 저런 말이 더더욱 우습게 들리는지도 몰랐다.

그때 다른 쪽에 앉은 남자들이 징집과 전쟁, 국지성 전투에 대해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의 관심도 이내 그쪽으로 쏠렸다.

리온은 서부의 상황에 귀 기울이다가도 이따금씩 스튜를 먹는 베로니카를 살폈다. 그녀는 따뜻하고 풍요로운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인지 모르겠어요. 정말 맛있어요.”

“부인께서 기뻐하시니 저희의 영광입니다.”

루에가 사람들은 친절했다. 급하게 도망 나온 부부에게 짐마차를 비워 줄 정도로.

그렇게 이상하리만치 정다운 밤이 깊어 갔다.

***

역시, 뭘 넣었군.

리온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무심히 판단했다.

여자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식사를 하고 나니 피로가 쏟아진 모양이다. 혹시나 싶어 코에 손을 갖다 대자 안정된 호흡이 느껴졌다. 약이 든 건 스튜가 아니라 술 쪽이었다.

그가 둔중한 피로를 느낄 정도다. 여자가 먹었다면 정신을 잃었을 거다. 무엇을 원하는지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떡할까. 여기서 식량만 챙겨서 뜰까. 아니면 정보를 더 뜯어내 볼까.”

잠든 이에게 의논이라도 하듯 물으며 여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꼬았다. 토끼털처럼 가볍고 매끄러운 흑발은 손안에 들어왔다가 물처럼 미끄러졌다. 머리를 만져 주는 느낌이 좋은지 여자는 조금 더 파고들었다. 코끝을 스치는 부드러운 살 내음에 집중했을 때였다.

부스럭, 마차 밖에서 수상한 소리가 났다.

모두가 잠든 시각, 그들의 마차는 야영지 맨 가장자리에 있다. 리온은 판단을 내리자마자 검을 챙기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발소리를 죽였지만 인간의 기척은 그뿐만이 아니다. 스치는 옷자락 소리. 공기가 흔들리는 소리. 리온은 잠시 귀 기울이다가 짐마차의 천막을 걷고 나섰다. 그러곤 기다렸다는 듯 목에 와닿는 차가운 도끼날에 제자리에 멈춰 섰다.

“용케 그걸 마시고도 일어나 돌아다니는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말했다. 아까 힘겨루기 하던 사내였다. 리온은 시선을 내리깔며 농담처럼 대답했다.

“그걸 마셨으니 비우려고 일어난 건데. 설마 루에가에서는 손님이 화장실 갈 때마다 허락받아야 하는 문화가 있나?”

“사람에 따라 다르지. 개중 열한 명이 덤벼도 질 거라고 확신하는 놈은 열한 명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의 말에 화답하듯 사방에서 횃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리온은 천천히 포위하는 불과 사람들을 훑었다. 마차를 둥글게 둘러싼 이들에게서 무기가 벌겋게 번득였다.

“왜 말이 없지? 감히 루에가 앞에서 죽음과 약탈을 입에 올리던 배짱은 어디 갔나?”

빈정거리던 남자는 무표정하게 둘러보던 리온이 똑바로 응시해 오자 찰나 멈칫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응당 쓰러졌어야 할 양을 먹고도 누그러지지 않는 형형한 기세는 질리는 구석이 있었다.

“뭘 원하지?”

“뭐라고?”

“따뜻한 식사에 씻을 물까지 대접받았으니 들어 보고 넘겨줄까 하는데.”

잠시 멍하니 있던 사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들었나? 원하는 걸 말하면 넘겨주시겠다는군.”

비웃음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발을 구르는 시끄러운 조롱에도 리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가 깨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는 것 같은데 아쉽게 됐다는 생각도.

“계집과 아까 보여 주지 않았던 검을 넘겨. 그리고 우리 발을 핥으면서 목숨을 구걸해 봐. 혹시 아나? 마음에 들면 살려 보내 줄지.”

뻔하디뻔한 요구에 리온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지만 여자는 안 돼. 하지만 검은 보여 줄 수 있겠군.”

도끼 든 남자는 리온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리가 잘려 나간 인간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멍하니 제 허리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팍, 하고 사방에 핏물이 터지자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왁자지껄하게 웃고 있던 동료들의 한가운데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철퍽 소리가 나며 피와 시체가 떨어지자 좌중은 찬물을 부은 듯 고요해졌다. 리온은 날을 휘둘러 피를 털어낸 뒤 아직 사태를 이해하지 못한 자들을 죽 둘러보았다. 충고를 가장한 경고는 횃불만큼 선명했다.

“말했을 텐데. 나머지는 무기가 없는 순서로 처리할 거라고.”

그것은 리온이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이었다, 굳어 있던 루에가인들은 정신이 퍼뜩 든 것처럼 험악한 얼굴로 무기를 꼬나쥐었다.

바라던 대로다. 무기를 든 자를 살해하는 것과 비무장 상태의 인간을 죽이는 것은 기사인 리온에게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

다만 그들이 먹인 약이 머리를 둔하게 만든 탓일까. 리온은 소중한 동행이 ‘이동’ 수단에 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

챙, 챙.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컸다. 소름 끼치는 굉음에 눈을 번쩍 뜬 베로니카는 다음 순간엔 다른 이유로 당황했다. 짐마차가 덜컹이며 미끄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있어. 끽 소리라도 내면 죽을 줄 알아.”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누군가 입을 세게 틀어막으며 위에 올라탔다. 그 매끄러운 공용어가 아니었다면 베로니카는 그가 아까 그 친절하던 미청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말투의 괴리는 어마어마했다.

“노아 베르크? 웃기고 있군. 명검 아포칼립시스를 든 붉은 머리라니. 계집, 너와 함께 있던 남자가 리온 베르크인가?”

입이 막혀 있었으므로 베로니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빛만으로 남자는 원하는 대답을 읽어 낸 눈치였다. 하, 하고 미친 듯이 웃다가 갑자기 멈추고 욕설을 중얼거린다.

“이런 씨, 재수가 없으려니까.”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정체가 탄로 난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납치되고 있다. 남자의 태도는 빈말로도 친절하지 못했고 도리어 위협에 가까웠다. 베로니카는 손을 뻗어 곧장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벤자민이 줬던 그 ‘생일’ 선물을 그녀는 혹시를 대비해 바지에 매어 두었다.

“신의 사자라는 새끼가 여자를 끌고 광야에 들어오다니 어이가 없군. 하긴, 원래 살인마 새끼지. 저 새끼 정체는 똑바로 알고 밤마다 빨아 주나? 응? 그 빌어먹을 바하무트가 올라오기 전까지 저 새끼는 성전(聖戰)이다 뭐다 해서 우리를 죄 죽이고 다니던 살인마 새끼였어.”

남자는 저주 같은 모욕을 퍼부어 댔다. 그때 마차 앞쪽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올리버! 뒤에 따라붙었어!”

“시끄러워. 그럼 더 빨리 달리면 되잖아!”

“젠장, 저건 어제 우리가 탐내던 그 군마라고. 어떻게 짐을 달고 저 말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어?”

리온이 쫓아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그녀를 필요로 한다. 쉽게 버리진 않을 것이다. 베로니카가 희망을 느끼고 버둥거리자 올리버라 불린 남자는 화가 난 듯 다친 발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베로니카는 막힌 잇새로 아픈 신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무언가 자극하기라도 한 듯 남자의 눈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설명하다 말았더랬지. 루에가에 결혼이 없는 이유는 말야. 계집 같은 건 아무 데서나 취할 수 있기 때문이야. 보통 한 명의 여자를 구해다 집 안의 남자가 모조리 돌려 갖는 구조지. 아버지가. 형이. 그러고 나면 내 차례가 와.”

베로니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리온이 구하러 오겠지만, 기다리면 늦는다. 또다시 누구에게 구원받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은, 그런 일은.

말을 마친 남자가 튜닉을 잡아 뜯으려 할 때, 있는 힘껏 뻗은 손이 차가운 칼자루에 닿았다. 칼자루를 잡고 뽑아 든 순간, 마차가 세차게 흔들리며 멈추는 바람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푹, 단검이 머리를 꿰뚫었다. 바하무트가 벤자민을 죽일 때처럼. 그러나 이번엔 거꾸로 입을 통해 들어간 검이 뒤통수로 튀어 나갔다. 눈을 부릅뜨고 얼음처럼 뻣뻣이 굳은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이윽고 피가 칼날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베로니카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밖이 아니라 그녀 안에서 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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