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4)화 (14/128)

“봤어요?”

종종거리며 다가간 베로니카가 리온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기, 사람들이에요. 큰 마차가 여러 대나 있는 것 같아요. 귀족일까요?”

점심을 먹느라 쉬다가 발견한 행렬이었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광야에 들어올 미친 생각을 한 게 우리뿐만이 아니라니!

베로니카는 광막한 눈밭에서 무려 사흘 만에 목격한 사람들에 흥분했다. 그러나 리온은 시야 끝에 훤히 드러난 무리를 보고도 침착했다.

“글쎄, 가 보면 알게 되겠지. 어차피 같은 방향이라 속도만 높이면 마주치게 돼 있어.”

그가 발목이 불편한 그녀를 올려 준 뒤 다시 말에 올랐다. 이후의 여정은 그의 말대로였다.

마차까지 딸린 무리보다야 당연히 이쪽이 빨랐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고도 쉬지 않고 달리자 불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들의 인영이 점점 가까워졌다. 몇이나 되지? 일곱? 열?

긴장과 기대로 심박이 빨라졌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보다 먼저 아셀도르프를 탈출한 이들인지도 모른다.

“어이, 거기서 멈추쇼. 더 가까이 오지 말고.”

우렁우렁한 외침이 들리자 리온이 고삐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상대도 다가오는 커다란 군마를 기다렸던 눈치였다. 밤별이가 앞발을 구르는 사이 베로니카는 갈기를 꽉 붙들고 야영지를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대형 짐마차가 여섯 대. 수레는 두 대. 사람은 다부진 남자로만 십여 명이다. 마차의 옆면에는 바다 위에 뜬 석양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서부의 통치자 루에가의 국기였다.

무수한 중소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는 총 다섯 개의 대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북단의 화이트랜드, 서쪽의 루에가, 남쪽의 체사니아와 탄비아, 마지막으로 대륙의 심장부에서부터 동북부까지 뻗은 카이젠미어.

카이젠미어에서 더 동쪽으로 가면 바다 한가운데에 롬 군도가 있고 대해 너머에도 최초의 땅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인접한 국가만 치면 이러했다. 그리고 그 중 태양을 신으로 섬기는 나라는 루에가뿐이었다. 여기저기 드리운 이교도의 표식에 베로니카는 절로 힐끔 리온의 눈치를 살폈다.

“어디서 오는 거요? 먼저 정체를 밝히시오.”

“아셀도르프에서 탈출한 치안대원입니다. 아내와 함께 카르트로 가고 있습니다.”

말이 진정하자 리온이 먼저 내리며 태연히 대꾸했다.

의논 되지 않은 거짓말에 베로니카는 움찔했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리온이 신분을 숨길 생각이라면 결혼은 가장 적절한 위장책이었고 무엇보다 아내라는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던 탓이다.

“아셀도르프? 거기가 어디지?”

“카이젠미어에 있는 도시 이름이야. 이 근방이지.”

커다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남자들은 리온과 베로니카를 쳐다보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쑥덕거림도 잠시, 마침내 대장 격으로 보이는 우락부락한 사내가 일어서더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반갑소. 우리는 루에가에서 떠나온 피난민들이오. 마찬가지로 카르트를 향해 가고 있소.”

“그럴 것 같았습니다. 가는 길도 같은데 동행하는 건 어떻습니까? 짐은 많고 지킬 사람은 적어 보이는데. 잘 아시다시피 광야를 빠져나가면 검을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질 겁니다.”

리온은 특유의 능구렁이 같은 태도로 합류를 요청했다. 마치 남 좋은 일을 해 주듯 뻔뻔한 투였지만 이상하게 밉지 않게 들리는 것이 그의 재능이기도 했다. 상대 남자도 똑같이 느꼈는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도 강도를 걱정할 정도로 약하진 않소만.”

“이 상황에 무기 하나 들지 않는 부하들을 두고도 말입니까?”

리온은 고개를 슬쩍 기울여 일행을 훑고는 덧붙였다.

“내가 약탈자였다면 당신을 먼저 죽이고 우왕좌왕하는 자들을 무기가 없는 순서대로 처리할 겁니다. 아, 물론 강도의 입장에서 가정하는 것이니 오해는 마시고.”

위협으로 들릴 수 있는 발언에 남자의 표정이 급속히 굳어졌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리온은 갑옷을 입지 않았어도 전사의 체격이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는 데 실패한 뒤쪽의 서너 명은 내려놓은 무기를 집어 들었다.

몇 도 정도는 뚝 떨어지는 공기에 베로니카는 사람의 기분이 온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따위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마저 다음 순간에는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챙, 하고 별안간 날카로운 소리가 터지더니 금속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대장 같은 남자가 등 뒤의 도끼를 뽑아 내리친 것과 리온이 군마에 걸려 있던 장검을 뽑아 막아 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니, 오히려 리온이 더 빨랐다. 왼손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허리에 있는 놈을 뽑을 줄 알았는데. 우리에게 보여 주기는 아까운 물건인가 보군.”

“가보 비슷한 거라서.”

리온이 나직이 대답했다. 세게 밀어내자 날이 긁히는 새된 소리와 함께 우람한 상대가 한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베로니카는 여타 아가씨처럼 입을 막는 대신 두 사람의 대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람의 머리보다 큰 도끼날을 받아 낸 것이 베로니카의 검이었기 때문이다.

무기점에서 산 대량 생산용 장검. 주니까 받긴 했어도 여태껏 잊고 지냈다. 쓸모없는 선물처럼 말에만 실어 두었다. 그리고 지금, 어느 검보다도 사납게 번득이며 밤을 베어 내는 날이 속삭였다.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강하다. 강해질 수 있다.

“나서지 마라. 그냥 확인한 거다.”

뒤편의 남자들이 하나둘씩 일어서자 도끼 든 남자가 소리쳤다. 그러곤 한참 동안 리온을 노려보다가 도끼를 거둬들였다.

“확실히, 이긴다고 장담은 못 하겠군.”

“장담 못 하는 정도가 아니라 질 겁니다. 열한 명이 다 같이 달려들어도.”

“아니. 열한 명이 다 같이 달려들 테니 지지 않을 거요. 뒤에 있는 부인도 생각을 해야지.”

도끼 남자가 히죽 웃으며 베로니카를 턱짓했다. 그녀를 인질로 잡을 거라는 협박에도 리온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래 살려면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저래 봬도 나보다 더 무서운 여자거든. 그 인간 같지 않은 면에 반했지.”

“올해 들은 중 가장 우스운 농담이었소.”

남자가 도끼를 도로 등에 걸자 리온도 천천히 검을 갈무리했다. 고목 같은 큼지막한 손이 리온에게 악수를 청했다.

“볼룬드요.”

“노아 베르크입니다.”

가명이다. 불우한 성은 굳이 바꾸지 않았지만.

카이젠미어는 국토의 7할이 산지이기 때문에 가문과 출신이 불분명한 아이들은 ‘베르크’(산이라는 뜻)를 성으로 부여받았다.

볼룬드는 눈을 가느스름히 떴다.

“서자요, 고아요?”

“둘 다 아닙니다.”

“허, 여러모로 재밌는 일행이 되겠소. 자리를 내줄 테니 불 가까이 앉으시오. 손이 차갑군그래.”

리온이 악수를 받아들이자 볼룬드는 아까 일은 없었던 양 호쾌한 태도로 어린 소년에게 고삐를 받으라고 명령했다. 경계로 등줄기를 굳히고 있던 베로니카는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려와도 돼, 이제.”

리온이 그녀를 말에서 내리기 위해 팔을 뻗었다. 베로니카는 익숙하게 목을 감아 안겼지만 평소와 달리 이번엔 말에서 내리고도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은 그대로 불가로 저벅저벅 향했다.

“혼자서 걸어갈 수 있어요.”

“또 잘못 디뎌서 휘청거리려고?”

“저 사람들이 나를 얕볼까 봐 그래요, 노아?”

일부러 힘주어 부르자 리온은 목을 울려 웃었다. 그가 고개를 비틀어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니, 네가 걱정돼서 그래.”

시커멓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다정했다. 연기인 걸 아는데도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버릴 만큼.

목덜미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리온은 친근하게 이마를 맞댄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침내 불 앞에 내려 주었을 때 베로니카는 잘 익은 감자처럼 몸에서 김이 오르는 상태였다.

낯선 사람들에게 꾸벅이며 인사해야 하지 않았더라면 얼빠진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이런, 어두운 데서 볼 때보다 훨씬 더 미인이시네. 이리, 불 가까이로 오십시오. 춥습니다.”

“속부터 따뜻하게 데워야지 겉만 익혀서 뭘 해? 건터. 술 좀 더 가져오라고.”

루에가 남자들은 그녀를 허물없이 친절하게 대했다. 무뚝뚝한 자국 남자에게 익숙해 있던 베로니카는 약간 당황했다. 베이른과 정반대 땅에 있는 루에가 사람을 보는 건 처음이었고 그들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말, ‘루에가는 약탈한다’ 정도밖에 몰랐다. 대체 왜 그런 악명을 뒤집어썼는지 이해는 안 가지만.

“저녁은 드셨습니까?”

그때 옆에 앉은 청년 하나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직 안 먹었어요. 실례가 아니라면 저 스튜를 조금 맛보아도 될까요?”

“아니, 이 늦은 시각까지 식사를 안 하셨단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마음껏 드십시오. 저희에겐 카르트까지 두 번은 왕복할 만큼의 식량이 있습니다. 저기 세워진 마차들은 모두 식재료로 채워져 있고, 비어 있는 수레들은 조각내서 불을 피우는 데 필요한 땔감으로 쓰는 중입니다.”

옆자리 청년은 눈썹까지 축 늘어뜨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금발에 달콤해 보이는 푸른 눈을 가진 미남자였는데 호감을 주는 외모와 루에가인 특유의 미끈한 공용어는 긴장을 흩뜨리기에 충분했다.

“정말요? 루에가에서부터 오셨다면서 어떻게 아직도 그렇게 식량이 많아요?”

“사실 저희는 향신료를 파는 상인들입니다. 향신료를 가득 쌓아 돌아다니던 중에 바하무트의 북상 소식을 듣고 이대로 피난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도시마다 들러서 비싼 향신료를 모조리 식재료로 맞바꾸고 있지요.”

“그럼 루에가도 전쟁 중인 건가요?”

베로니카가 긴장하며 묻자 반대편에서 구레나룻을 만지던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순진한 어린아이를 대하듯 씁쓸한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 정보를 통제하는 카이젠미어답구먼. 자잘한 나라들을 빼놓고 따지자면 5개 대국 중 아직 전쟁에 뛰어들지 않은 건 최북단의 화이트랜드뿐이라오.”

딴 세상 같은 전쟁 얘기보다 베로니카는 앞 문장에 더욱 주목했다. 리온을 쳐다보자 그는 무표정하게 침묵을 지켰다.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정보 통제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신이 돌보실 것이니 인간은 고난 앞에서 불안할 필요가 없다. 그게 교회의 주장이라 들었소. 뭐, 반응을 보아하니 실제로 몰랐던 것 같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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