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3)화 (13/128)

티란이 뚫렸다고?

아냐, 진정해. 가정이야. 추측의 문법이잖아.

쿵쾅거리는 심장을 필사적으로 달래 보았지만 머리 한구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여관 주인의 목소리가 되풀이되었다.

“아셀도르프의 하수도는 땅속 깊이 남쪽으로 이어져 아셀강 하류에 맞닿아 있소. 저 바하무트들은 동쪽의 베이른에서 온 걸 텐데 어떻게 하수도로 들어왔단 거요?”

동쪽이 아니라 남쪽에서 왔다. 바다가 아니라 육지를 통해서 올라왔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 말대로면 대륙을 절반이나 잃고도 베이른이나 아셀도르프에서 아무것도 몰랐다는 건데. 겨울이라 도시 간 왕래가 끊겼다는 점을 감안해도 편지를 전하는 새들이 있다고요.”

“그랬겠지. 실제로도 귀족이나 부호들은 미리 알고 빠져나갔을 거고.”

“뭐라고요?”

베로니카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자 리온은 입가에 싸늘한 호선을 그렸다.

“한번 떠올려 봐. 바하무트의 침공 전에 정말 도시를 빠져나가는 자들이 없었는지.”

그런 일은 없다고 반박하려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잔상들이 있었다.

도시 외곽에선 보기 힘든 고급 마차의 행렬. 며칠이고 베이른을 빠져나가던 짐마차들와 그 뒤꽁무니를 좇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혹시 그게 버리고 가는 거였던가? 어제 그들이 그러했듯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치던 뒷모습이었던가?

충격에 빠진 사이 리온은 남은 불씨를 발로 비틀어 밟았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말했다.

“어제 죽인 놈에게선 성력이 흘러나오더군. 성력을 지닌 인간을 먹었다는 것 외에는 납득할 논리가 없어.”

여린 피부에 소름이 돋아났다. 베로니카도 잘 알고 있었다. 성력을 지닌 사제들은 성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티란에 주둔해 있다.

정말로 티란이 뚫린 걸까. 남부에 2년간 묶여 있던 바하무트들이 가공할 속도로 치고 올라오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 속도는 전율할 만큼 빨랐다.

남부의 곡창 지대에서 가을 수확물을 보내온 지 세 달밖에 되지 않았다. 채 삼 개월도 되지 않아 대륙의 절반을 주파했다는 말이 된다. 하필 북부 도시 간 이동과 교류가 끊긴 시점에. 장거리 이동선만 겨우 다니는 겨울에.

베이른이 항구 도시로 발전한 이유는 남쪽에 가로로 자리한 데르호른 산맥 때문이었다. 험준하고 가파른 산맥은 베이른부터 아셀도르프까지 뻗어 있으니 확실히 남쪽의 습격으로부터 가장 늦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 같았다면 계속해서 불가능하다고 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먹혔다고 끝이 아니라, 먹는 대로 증식하는 게 문제다. 그렇다면 그 말도 안 되는 속도도 이해가 된다. 심지어 무지막지한 괴물의 일부는 티란의 성기사까지 삼켰을 가능성이 있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며 모든 게 분명해졌다. 어제 리온이 탈출을 감행한 이유. 섬뜩하게 가라앉았던 표정의 의미.

애초에 거기서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던 거다.

열 발자국 멀리 있던 바하무트가 눈 한번 깜빡했더니 코앞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웃고 있는 기분이었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충격에 땅만 보고 있는데 시야에 길쭉한 다리가 들어왔다.

굵은 선을 따라 고개를 들자 역광을 받은 리온이 손을 내밀었다. 베로니카는 앉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어요.”

자신감은 좋았다. 성급하게 움직이다 다친 발로 땅을 짚어 버렸지만.

휘청이는 순간 단단한 팔이 확 뻗어 와 허리를 지탱했다. 머리 위로 심드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안아서 일으켜 주는 편이 좋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그런 게 아니라.”

억울하다는 듯 눈을 들던 베로니카는 태평스러운 얼굴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원망이 담긴 눈길로 노려보다가 운을 뗐다.

“엄청 헷갈리는 거 알아요?”

“뭐가?”

“첫날에는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굴었으면서 그다음부턴 나한테 잘해 주잖아요. 막 약도 주고 발목도 차갑게 해 주고. 추워 죽겠는데 망토도 넘겨주고.”

며칠간 눌렀던 말들은 한번 물꼬가 트이자 어물어물 쏟아져 내렸다. 방금 들은 충격적인 소식이 설움을 더했다. 베로니카는 꼭 나쁜 장난에 속아 넘어간 어린애처럼 따져 말했다.

“한기가 들어오지 않게 안아 준 것도. 당신보단 나를 위해서였던 거 알고 있어요.”

“왜? 나도 추운 밤에 불덩이 안고 자는 거 같아서 좋았는데.”

“아, 진짜로. 자꾸 그렇게 가볍게 넘기지 말고요.”

베로니카가 눈썹을 찌푸리며 성을 냈다. 반응이 즉각 터지는 게 재밌는지 리온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얼굴마저도 잘생겨 짜증이 났다. 무책임하게 다정한 인간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겁이 났다.

“뭘 원해서 그러는 거예요?”

베로니카는 물러서며 물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생물은 흥미를 끄는 법이다. 언제나. 늘 그렇듯이.

거리를 벌리는 것보다 리온이 그녀의 손목을 당겨 다시금 밀착시키는 게 더 빨랐다. 얼결에 바짝 붙어 선 베로니카는 움찔 굳어 버렸다. 높이 들어 올려진 손을 펴지도 구부리지도 못한 채.

“도망치지 않는 거.”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말했다시피 전황은 암울하고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놔줄 생각이 없어. 도중에 광야를 거치든 지옥으로 향하든, ‘그것’을 잡아 죽이기까지는 절대로.”

리온이 느릿느릿 말하며 애매하게 열린 손바닥 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 색정적인 감촉에 베로니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뜨겁게 뭉치는 듯도 하고, 근질거리다가, 끝끝내 열감이 오른다.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선 반드시 네가 필요해.”

심장이 세차게 출렁거렸다. 물이 가득 든 잔처럼 아슬아슬하다.

“아직도 싫어?”

낮은 음성에 애매하게 말려 있던 하얀 손가락이 꽉 조여졌다. 원해지는 감각은 손발이 저릴 정도로 짜릿했다. 안 그래도 더는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뒤에 두고 온 사람들이 마음에 밟혀서라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건, 이런 말은 반칙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침묵이 얼마나 고였을까. 리온이 그가 잡고 있던 손목으로 시선을 내린 건 그때였다.

“맥박 터지겠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그를 강하게 뿌리쳤다. 춤이라도 추냐고 물었던 첫날처럼 순순히 놔주는 태도에 더 약이 올랐다. 베로니카는 짓씹듯 내뱉었다.

“…차라리 계속 강압적으로 굴지. 치사해요.”

치사하다. 신께 전부를 바쳤으면서. 이름도 물어보지 않을 거면서.

숨 막히는 기대가 목을 조른다. 그 족쇄에는 사람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쇠공이 달려있다.

차라리 첫날처럼 목에 칼을 들이댔더라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울 자신이 있었다. 싫다고 반항하고 제 발로 다른 기사단에 찾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또다시 위협하는 대신 따뜻한 망토를 둘러 주고 의견을 물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건 태양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반칙이다. 그런 말을 듣고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나는, 내 가치는, 가끔은 남에 의해 정해진다.

“말에 오르는 거나 도와줘요. 발목이 아파요.”

뒷걸음질 치다가 휙 몸을 돌려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는 밤별이가 보였다. 절뚝거리며 걷던 베로니카는 잠시 후 어깨 너머를 돌아보며 퉁명스레 말했다.

“뭐해요? 얼른 광야를 지나야 카르트도 구하죠.”

왜일까. 이런 순간에 어릴 적 들었던 앉은뱅이 이야기가 떠오르는 건.

성전에서 그랬다. 태어나 한 번도 걸은 적 없는 앉은뱅이를 사도가 신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워 보였다고.

하지만 사도시여, 당신이 걷게 한 그 앉은뱅이 말이에요.

기적의 대가로 다른 신을 섬길 수 없게 됐겠죠? 그렇다면 그는 다리를 얻고 자유를 박탈당한 건 아니었을까요?

***

필요하다고 했다.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다. 동료 같은 대접이라면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닐지도 몰라.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보면서 베로니카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면으로 시선을 내리자 하얗게 눈 쌓인 광야가 보였다. 정말이지 이 땅엔 아무것도 없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눈의 바다 외에는.

서벅서벅하는 발굽 소리. 하얀 입김. 그리고 온기.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일정은 비슷했다. 허허벌판 속을 두 사람과 한 마리 말이 종단했다.

말을 달리고. 밥을 먹고. 또 달리다가. 야영할 장소를 찾고. 바람막이도 없는 추위 속에서 서로의 곁에 눕고.

리온은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다. 다행히 폭주나 환상은 아직까지 없었지만 대신에 베로니카는 밤마다 버리고 온 아셀도르프의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언제나 도망치고 있었는데, 그녀가 지나가면 거리의 사람들은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 창백한 얼굴. 윤기 없는 수십 쌍의 눈. 이전에는 그토록 갈구했던 시선이 꿈에서는 견딜 수 없이 무서웠다.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예컨대 주점으로 들어가 탁자 밑으로 숨으면 의자에 앉은 사람이 허리를 숙여 커다랗게 뜬 눈을 갖다 대는 식이었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직후에는 본능처럼 가까이 있는 리온에게 파고들었다.

무섭다고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에게 안긴다니. 예전에는 상상도 못 할 행동이다. 하지만 관계에도 역치가 있는 것인지 입을 맞추고 나니 안기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여겨졌다.

베로니카는 그저 자신을 가려 줄 누군가를 원했다. 죄책감 앞에서 감싸 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았다.

단둘뿐인 광야에서 그에게 의지했고 온기를 갈구했다. 아주아주 무력해진 기분으로.

어느 순간 정말로 세상에 단둘이 남은 착각이 들었다 해도, 그건 결코 과장이 아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는 그 껍질만큼은 분명히 단단했다.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기대도 표면에 금 하나 가지 않을 만큼. 베로니카는 그것이 지독히도 부러웠다. 그처럼 되고 싶었다.

강해질 방법을 고뇌하다가 잠이 들었고 그러다 깨어나면 또 하루가 반복되었다.

아침 점심은 건식 위주의 가벼운 식사를 하고 저녁은 헛간에서 가져온 지푸라기나 나무를 장작 삼아 음식을 조리했다. 사과나 당근, 곡식 따위는 말에게 먹였다. 제법 많이 준다고 줬는데도 말은 조금씩 말라 갔다.

마침내 까마득한 광야의 풍경에 익숙해질 때 즈음으로 기억한다. 광야 한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을 맞닥뜨린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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