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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11)화 (11/128)

수 시간을 쉬지 않고 북쪽으로 내달렸다. 리온은 갑옷도 망토도 없는 상태로 찬 바람을 감당했다. 마침내 멈춰 선 건 저녁에 버려진 헛간을 발견했을 때였다. 헛간 옆의 마구간은 좀 부서지기는 했어도 다행히 여물이 얼마쯤 남아 있었다.

리온이 헛간을 살피는 사이 베로니카는 흑마의 까만 눈과 마주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미간을 쓸어 보았다. 첫날에는 그토록 무섭게 보였는데. 목숨의 은인이라 그런지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오늘 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조용히 속삭이자 말은 얌전히 눈만 슴벅였다. 겁이 많은 동물이라 들었는데 겁은 모르겠고 순한 것 같다. 이렇게 커다란데 아까 그 여물은 성에도 안 찼겠지.

뭐라도 더 주고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눈을 흩뜨리고 풀을 뜯어서 내밀어 봤다. 무시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큼직한 입을 벌리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덥수룩한 풀을 넘어 손까지 침이 닿을 뻔했다. 재빨리 피하자 씹듯이 입을 오물거리던 말이 풀 찌꺼기를 모조리 토해 냈다. 움찔 물러난 베로니카는 허망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하, 하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때도, 그녀의 입가엔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헛간의 문가에 꼼짝않고 기대선 남자는 의외의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베로니카는 당황하는 대신 나사가 하나 빠진 사람처럼 비죽 웃어 보였다.

“처음엔 크고 사나워 보였는데 이제 보니까 조금 귀여운 것 같기도 해요. 이름이 뭐예요?”

“이름 같은 거 없어.”

“그럼 내가 지어 줘도 돼요?”

“아니.”

“왜요?”

“난 죽어 버릴 동물 이름은 안 불러.”

미간을 쓸어 주던 손길이 멈칫 굳었다. 말은 아무것도 모르고 까만 눈만 반짝이고 있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총총한 눈이다. 베로니카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고개를 말의 이마에 기댔다.

“밤별아. 저런 나쁜 소리는 신경 쓰지 마. 넌 사랑받으면서 오래오래 잘 살 거야.”

말이 반응하듯 귀를 쫑긋거렸다. 봐. 동물들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걸.

위로랍시고 뱉은 말이 실은 스스로 듣고 싶은 말이라는 건 우스운 일이다. 베로니카는 이번엔 아까와 달리 자조적으로 생글거렸다.

미소란 대체로 쓰기 쉬운 가면에 불과하다. 웃으면 사람들은 감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마주 웃어 주니까. 사랑해 주니까. 그래서 더 웃었다. 덕분에 가끔 벤자민처럼 착각에 빠지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한 겹 아래의 우울을 들키는 것보단 그편이 나았다.

리온도 그녀의 웃음에 속아 넘어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듯 계속해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베로니카가 말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속삭일 때까지.

***

나무 헛간은 몹시 작았다. 불 피울 환경은 되지 못했다. 리온은 식량을 뒤져 상대적으로 보존 기간이 짧은 딱딱한 빵과 염소젖에서 짠 우유를 꺼내 내밀었다.

빵과 수통을 받아 안쪽에 자리 잡은 베로니카는 작은 볼을 열심히 부풀렸다 꺼뜨리며 야금야금 잘도 먹었다. 리온이 관찰하자 으레 그렇듯 얼굴을 붉혔지만.

그는 아까 그녀가 지어 보인 해사한 웃음을 떠올렸다. 침침한 안개가 걷히듯 환하게 밝아지는 낯은 역설적으로 그 안에 기이한 결핍을 담고 있었다.

그런 미소는 태어나서 두 번째로 봤다. 그래서 시선을 빼앗겼다. 단지 그뿐이다.

“안 추워요?”

식사를 마치자 베로니카가 털 망토를 가리키며 머뭇머뭇 말했다.

“원하면 돌려줄게요. 이제 자야 하잖아요.”

걸쳐 주자마자 급하게 도시를 빠져나오는 바람에 아직도 그녀가 그의 겉옷을 두르고 있었다. 리온은 망토 너머의 홑겹 옷을 물끄러미 보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돌려줄 필요 없어. 어차피 이 날씨에 얼어 죽지 않으려면 그걸 같이 덮고 붙어 자야 해.”

어느새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쌓이는 기세로 보아 발목이 푹 잠길 정도까지는 내릴 예정이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은 안온한 벽난로 앞이라면 아늑한 유희지만, 여기저기 삭아 군데군데 구멍이 난 헛간에서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세상이 어떻든 겨울은 깊어 간다.

같이 자야 한다는 담담한 선언에 베로니카는 흠칫 굳었다. 그러나 입술을 여러 번 벌렸다 닫았을 뿐 차마 거절을 말하진 못했다. 리온이 온종일 살을 에는 바람을 맞으며 말을 달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가 이내 몸을 일으키더니 헛간에 이리저리 흩어진 지푸라기를 한구석에 모았다.

침대는 거칠거칠한 짚 더미. 이불은 한 사람용 늑대 털 망토.

베로니카는 눈치껏 일어나 찢어진 자루 따위로 벽의 구멍들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바람이 덜 새어 들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는 추위는 여전했다. 문가 쪽 천장 구멍은 막지 못해서 그곳만 자꾸 눈이 쌓였다. 대충의 일을 끝낸 베로니카가 절뚝거리며 짚 더미 위에 앉았을 때였다.

“뭐, 뭐 해요?”

쭉 뻗은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리온이 그녀의 종아리를 잡고 신발을 벗겼다. 타인에게 맨발을 보이는 수치심에 화들짝 놀라 발을 빼려고 했지만 그는 다리를 쥔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부러지진 않은 것 같고.”

“놔요. 그렇게 안 아프, 아!”

새파랗게 부어오른 멍은 손이 닿자마자 기습적으로 욱신거렸다. 한 손에 절반이 잡히는 가냘픈 다리가 버둥거렸다. 리온은 그녀의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무표정하게 발목을 살피다가 물었다.

“언제 다쳤어?”

“아까 짐 들고 계단 내려오다가 접질렸어요.”

신음하며 말하자 다리를 잡은 손에 힘이 풀어졌다. 리온은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빵을 담았던 헝겊 주머니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뭘 하려는가 싶어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가 오래지 않아 동그랗게 부푼 주머니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아픈 발목 위에 그것을 얹었다.

“아.”

“부목이 필요한 부상은 아니야. 그래도 최대한 움직이지 마.”

눈을 담아 왔는지 천이 차가웠다. 베로니카는 제 앞에 허리를 수그리고 앉은 남자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리온은 꿇어앉았는데도 짚 더미 위에 앉은 그녀보다 컸다. 그런 남자가 작은 발목을 신중하게 찜질하는 모습이 낯설게 보였다.

이윽고 발목의 붓기 위로 시원함이 번져 들자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요.”

리온이 흘긋 고개를 들자 푸른 달빛 사이로 눈길이 맞부딪혔다.

“누가 이렇게 해 주는 거 처음이에요. 덜렁거려서 자주 넘어졌는데 대부분은 참고 넘기거나 혼자서 처리했거든요.”

덤덤한 말에 리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음을 조각해놓은 듯 시린 눈에 눈발 같은 광휘가 스쳤다. 지극히 찰나였지만 아득히 깊은 심연이 심장처럼 맥동했다.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볼 것이라 했던가.

정적에 잠긴 헛간에는 한동안 눈 떨어지는 소리만 사락사락 들렸다. 리온은 말없이 시선을 내려 헝겊 주머니를 떼어 냈다. 베로니카가 머뭇거리며 망토를 벗자 리온은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어색함을 느낄 새도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자 근육이 박힌 단단한 다리와 여리고 가느다란 다리가 한데 얽혀들었다. 망토의 길이가 리온의 키에 못 미쳐서 온전한 따뜻함을 누리는 것도,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은 것도 베로니카뿐이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마른침을 삼키기가 민망해졌다.

밖이 추워서 그런지 맞닿은 온기가 더 따뜻하게 와닿았다. 파고들고자 하는 충동에 베로니카는 당황했다.

이상하다. 오늘은 맨정신인데. 어제처럼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고.

“아,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생각난 척 그의 가슴팍에 대고 중얼거렸다.

“오늘도 중간에 깨면 어떡해요?”

그가 재생시켜 준 뇌가 얼마쯤 버티는지는 불분명하다. 실제로 어제까지는 멀쩡했으니까. 그러나 단 한 번의 경우로 쉽사리 규칙을 정할 수는 없다.

“깰 일 없을걸.”

“어떻게 장담해요?”

“미리 하고 잘 거니까.”

호흡이 뚝 멎었다.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퍼뜩 고개를 젖혀 올렸다. 넘실거리는 은청색 달빛 너머, 모로 누운 리온의 잘빠진 입꼬리가 비틀렸다.

“어제 같은 일은 사양이거든.”

강제 추행이래도 부정할 수 없는 기억이 떠오르자 베로니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아니, 어제 그건 그러려고 한 게 아니거든요.”

“그렇겠지. 의도한 거면 범죄 아니야?”

“범죄로 따지자면 당신이 날 납치한 게 먼저죠. 아무튼 또 그렇게 되면 이번엔 깨우고 인사도 하고 정중히 할게요.”

진지한 약속이 우스웠는지 남자가 실소를 터뜨렸다. 낮은 웃음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친해진 게 아니다. 몇 번의 배려로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마음이 풀렸을 뿐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가까워서. 마음의 준비도 없이 보기엔 양심 없이 잘생긴 얼굴이라서.

머리가 뜨거운 물로 채워진 듯 어지러웠다. 웃음기를 지운 리온이 얼굴을 감싸 올린 건 그 순간이었다. 베로니카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하나, 둘, 셋… 아마 속으로 열은 셌을 거다. 그런데도 서늘한 입술은 닿아오지 않았다. 이렇다 할 말도 없었다. 이어지는 침묵에 당황해서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 리온은 기습적으로 입술을 삼켜 왔다. 새빨간 눈이 뜨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듯, 어제의 복수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읏.”

세 번째나 되니 키스는 자연스러웠다. 지체 없이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혀는 매끈하게 숨과 타액을 전달하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애초에 리온의 목적은 거기까지였을 거다. 그러나 베로니카는 달랐다. 정확히는 달큼한 숨을 맛본 그 순간부터, 그녀는 달라졌다.

종잇장 하나의 거리를 두고 입술이 떨어졌다가 숨결만 남기고 다시 엉겨 붙었다. 흡사 불길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의식이 날아가고 생각이 사라졌다. 제정신인 상태의 베로니카가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리온은 몸을 다소 경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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