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충분했다. 사람들은 한동안 너나 할 것 없이 멍청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팔을 잡던 억센 힘마저 풀어지며 웅성거림이 일었다.
“하수도라고? 저 말이 진짜야?”
“설마. 저렇게 커다란데 하수도를 통해서 어떻게….”
“그야 올라올 때만 부수면 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내가 아까 뭐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
좌중을 조용케 만든 건 잠자코 있던 주인장의 묵직한 목소리였다. 그가 성큼성큼 아내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아셀도르프의 하수도는 땅속 깊이 남쪽으로 이어져 아셀강 하류에 맞닿아 있소. 저 바하무트들은 동쪽의 베이른에서 온 걸 텐데 어떻게 하수도로 들어왔단 거요?”
뜻밖의 말에 베로니카는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도 그것들이 베이른에서 왔으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수도가 남부와 닿아 있다니. 따지듯 묻는 시선들에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잘 모르니까. 하수도에서 올라왔으리란 것도 본능에 가까운 직감일 뿐이니까.
“확실치도 않은 일로 맨몸으로 떠날 수는 없소. 도리어 이 상황에 나가는 게 미친 짓이지. 증축이 덜 된 부분이 있다고 했으니 아마 거기가 조금 뚫린 걸 거요.”
베로니카는 수염에 묻히지 않은 확고한 얼굴과 그에게 기대선 여주인의 어깨에서 그들의 답변을 읽었다. 다른 사람들도 반응은 비슷했다. 바깥이 어떨지도 모르는데 안전한 건물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이걸로 할 만큼은 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각자 원하는 대로 하기로 해요.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사실 하수도 운운하며 나가자 말한 건 제안이자 술수였다. 나갈 틈이 필요했다. 팔을 잡은 남자가 힘을 풀고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데 쏠릴 틈.
베로니카는 빈틈을 파고들어 지체 없이 빗장을 풀었다. 나무의 마찰음이 들리자마자 문을 발로 걷어차 활짝 열었다. 그 후는 모두 찰나였다.
뒤에서 들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과 양손에 집어 든 검과 짐의 감촉. 피를 뒤집어쓴 리온이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고, 닫히지 않도록 단단히 문을 잡는다.
베로니카는 그대로 절뚝절뚝 여관을 달려 나왔다.
언제 마구간에서 꺼내왔는지 바로 앞에는 늠름한 흑색 군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리온은 그곳에 베로니카가 가져온 짐을 싣고 가뿐하게 뛰어올랐다. 당연하게 뻗어진 팔이 그녀를 앞자리에 태웠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제 발로 움직이는데도 멱살이 잡힌 채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앞발을 구른 말이 땅을 박차기 전, 고개 돌린 베로니카는 닫히는 문틈을 보았다. 겁먹은 사람들은 문밖으로까지 쫓아 나오지는 않았다. 아침에 평화로운 대화를 나눴던 여주인의 얼굴이 닫히는 어둠 사이로 사라졌다. 밖의 피바다를 보고 시퍼렇게 질린, 그야말로 완연한 공포에 사로잡힌 낯.
거기에는 이미 걱정도 염려도 남아 있지 않다.
갈기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며 말이 땅을 박찼다.
뜨끈한 액체가 얼굴로 쏟아지며 비릿한 현실감이 번졌다.
베로니카는 정면으로 시선을 두고서야 리온이 검을 휘둘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한 손에 고삐를, 다른 한 손에 장검을 쥐고 앞과 옆에서 달려드는 바하무트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내고 있었다. 검이 두른 광휘가 눈부셨다.
가히 신의 사자다. 신의 심판이다.
전율하는 사이 세차게 지면을 걷어찬 말은 순식간에 중앙로를 관통하며 내달렸다. 속도 때문에 눈에 띄어서인지 앞뒤 할 것 없이 바하무트들이 들러붙었다. 꼭 살 파먹는 개미굴에 떨어진 포유류가 된 기분이었다. 가장 끔찍한 구간은 널따란 광장이었다.
중앙의 분수대 주위로 머리 없는 시체가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데 모여 있었나 의문하다 아침에 들었던 이야기가 번뜩 뇌리를 스쳤다. 베이른에서 속속들이 도착 중이라던 피난민들. 그들이 광장에 모인다는 소식.
뒤돌아보려는데 리온이 경고했다.
“떨어지면 안 주워 가.”
숨을 들이켜며 급하게 자세를 바로 했다. 빠르게 흐르는 풍경이 현기를 일으켰다. 그만해. 그만 생각해. 베이른의 사람들은 잊어. 지금은 나만 생각해. 나는 살 거야. 나는 괜찮을 거야. 이대로 도시를 빠져나가면….
“벽이 아니라 빌어먹을 무덤을 쌓았군.”
점점 가까워지는 높다란 성벽을 보며 리온이 비웃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벽이 도망을 어렵게 만드는 창살이 되었다. 베로니카는 몸서리쳤다. 왜 개구리는 물이 끓어오를 때 도망가지 못할까. 왜 내장이 다 익어 버릴 때까지 뜨겁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까.
그러나 비극적인 전개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건 바하무트의 두뇌였다. 그들도 사고를 한다. 벽을 쌓아 막은 걸 알고 인근 강으로 파고든 거다.
바하무트는 얼마나 똑똑할까? 짐승치곤 똑똑한 개나 까마귀? 아니면 인간만큼? 혹은 그 이상?
차츰차츰 커지는 성벽 문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벽이 뚫린 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치안대가 주민들이 도망치게끔 문을 개방한 것이리라.
베로니카는 하얗게 보이는 그 아치형 탈출구에 집중하려 애썼다. 바로 옆에서 죽어 가는 치안대나 주민들을 보지 않기 위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나 그 눈빛은 오래지 않아 경악으로 물들었다.
“문이… 닫히고 있어요.”
삐걱삐걱. 도개교가 올라가고 있다. 느리지만 분명히.
“왜? 다 같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예요? 정신이 나가서 완전히 미쳐 버렸거나….”
외침이 끊어졌다. 리온이 그것을 이었다.
“인간의 짓이 아니거나.”
베로니카는 이를 악다물었다. 해자1)를 넘는 다리가 점점 올라가며 닫혔다.
이대로는 못 넘는다. 그러면 그 후에는? 이런 막다른 곳에 갇히면 아무리 리온 베르크라고 해도 살아나가기 힘들 거다. 아니, 그는 살아도 베로니카까지 지킬 틈은 없어지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베로니카는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녀를 버리고 갈지도 모른다. 한 명만 내려도 속도는 빨라질 테니까.
제정신으로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지만 궁지에 몰린 베로니카는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했다. 차라리 바하무트의 무서움을 아예 몰랐다면 형편은 더 나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렇게 온몸이 벌벌 떨리며 굳지는 않을 텐데.
살고 싶다. 미친 듯이 살고 싶다.
끝이 싫다. 무섭다. 생각을 멈추는 것이. 까만 공허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게.
새삼 스스로가 얼마나 믿음이 없는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진실로 신을 믿는다면 끝이 두려울 리가 없다. 사실은 신 따위 없다고 생각하니까 죽음이 두려운 거다. 고난 앞에 홀로 선 인간에게 남은 건 외로움밖에 없을진대.
“꽉 잡아. 이제부터 있는 힘껏 달릴 거니까.”
그때 리온이 상체를 기울이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안듯이 등을 감싼 온기가 뜨겁게 고였다.
이미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한 문을 밟았다. 말은 머리를 휘두르고 발버둥 치며 미끄러운 오르막을 올랐다. 그리고….
베로니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붕 뜨는 감각에 이어 쿵, 하고 세차게 내려앉았다.
통증을 느끼며 눈을 뜨자 시야가 탁 트이며 설원이 펼쳐졌다.
달린다. 계속해서. 까만 군마는 십수 년간 다리가 묶여 있다 풀려난 노새처럼 난폭하게 날뛰었다.
살았다.
깨닫자마자 뒤를 돌았다. 도시에 비해 과도하게 큰 성벽이 멀어지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두르느라 말도 안 되는 비용이 들었을 해자가 작아진다. 이윽고 쿵, 소리가 나며 문이 끝까지 닫혔다.
“다… 저기 남은 사람들… 다….”
베로니카는 토기를 억누르며 입술을 열었다.
“죽겠죠?”
평화로운 담소를 나눴던 부부를 떠올린다. 베이른에서 왔다는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짓던 여주인. 사정을 짐작하고 피난민들이 모이는 장소를 알려 준 주인장. 그들은 단지 딸뻘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친절과 다정을 베풀었다. 그런데, 나는.
“내 탓이에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첫날 도착해서부터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상한 냄새는 환상이나 환청이 아니니까 말 안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나 때문에 이렇게 됐어요.”
바람 소리에 묻혀 잘 전해지지도 않을 자책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방금 만난 사람들에게 정이 든 건 아니다. 그런 식의 선을 유지하기엔 베로니카는 약아빠진 구석이 있었다. 사람들을 구하지 않느냐 타박해도 금세 포기하고 살길을 도모했다.
위하는 듯한 제안에도 계산을 깔아 두었다. 그녀는 스스로 살 만할 때만 양심과 동정을 품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베로니카는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다가 죽어 갈 사람들을 동정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을 연민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서 그들을 구하겠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마지막에 보았던 공포에 사로잡힌 눈이 악몽처럼 평생 남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 딸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무섭다고 생각하다가 그냥 끝이 나 버렸을까.
“그때 말했더라도 크게 바뀌는 건 없어. 지금의 탈출도 넌 내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야.”
그때 리온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자책감을 잘라 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리온이 명령에 복종하라고 조건을 내건 이유. 이 남자는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로부터 그녀를 면책하고자 한 것이다. 면죄부를 내민 것이다. 모든 죄를 홀로 짊어지고자. 모든 것은 리온의 판단이니까.
얼이 빠진 채로 앞을 응시했다. 덜덜 떨고 있음을 눈치챈 리온은 고삐를 한 손에 모아 쥐며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싫어야 하는데 왜인지 싫지 않았다. 추위 속 유일한 온기를 향한 기이한 안정이 찾아들었다.
[각주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