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남부의 성기사들이 지키는 지역 말이오. 덕분에 2년간 육로는 안전하지 않았소. 이번 베이른 일이야 항구 도시니 바닷길의 문제고.”
주인장은 진지하게 말하며 큼직한 손으로 오트밀이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리온은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과연 베이른은 정말로 바다로부터 습격을 받았는가.
‘그것’을 앞지르기 위해 배를 탄 건 오히려 리온 쪽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늦었다. 바닷길에서 바하무트를 마주친 적도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말간 오트밀에서는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한참 간 그것을 바라보다 막 숟가락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저도 같은 걸로 하나 주세요.”
빈 의자가 드르륵 끌리더니 옆자리에 여자가 앉았다. 일어나자마자 씻고 내려왔는지 귀 뒤로 깔끔하게 넘긴 단발이 젖어 있었다. 흑발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눈을 가리려고 시선을 내리깔았으나 주인장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었다. 애초에 동화자가 멀쩡히 돌아다닐 거란 발상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같은 거면 술도?”
리온의 술잔을 보고 되묻는 주인장의 말에 베로니카는 기막힌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빵을 더 담아 오겠다고 안쪽 주방으로 들어간 사이 그녀가 어색하게 내뱉었다.
“사실은 중독자예요? 교회에선 술 마시지 말라고들 하던데.”
“취하지 말라고 했지 마시지 말라고는 안 해.”
“사이비.”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리온이 가볍게 피식거렸다.
여유를 가장했어도 그들 사이로는 밀도 높은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베로니카는 어젯밤의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고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어제, 그녀는 그에게 구원을 구걸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입술을 벅벅 문질러 씻은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간밤의 은밀한 시간도 씻겨 나갈 것만 같아서.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붉은 기는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색유리를 닦은 듯 선명해졌다. 그는 그녀를 도왔고, 이제는 부정할 수 없다. 하루살이가 인간이기 위해서는 제 신에게 의지해야만 한다.
“약 발랐네.”
그때,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바람에 눈이 번쩍 뜨였다. 베로니카는 차마 옆을 돌아보지도 못한 채 정면만 바라봤다. 목덜미에 시선이 느껴졌다.
왜인지 부끄러웠다. 단지 상처를 보이는 것뿐인데. 목은 그렇게 민망한 부위도 아닌데. 이상하게 저 시선 앞에만 서면 발가벗은 기분이 든다. 원래 남자에게 이 정도로 면역이 없었나 싶을 정도였다.
실상 베로니카는 이성 친구가 적잖이 있는 편이었는데도, 리온은 또래와는 어딘가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조금 더, 어른 같은.
“아직 묻어 있어.”
시선을 비껴 내린 리온이 툭, 탁자에 올려진 손끝을 건드렸다.
베로니카는 약을 닦을 생각도 못 한 채 굳어서 하얀 가루가 묻은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옆에는 핏줄이 도드라진 남자의 손이 놓여 있었다.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머릿수건을 두른 중년의 여자가 오트밀과 빵이 놓인 접시를 놓아주며 환기하지만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한창 좋을 때지.”
달칵, 소리가 나며 식기가 놓였다. 여인은 베로니카의 얼굴을 보고는 온후하게 웃었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미소와 다 안다는 투에 베로니카는 화들짝 놀라서 손사래 쳤다.
“그런 거 아니에요!”
“으음, 그런 거 아니면, 부모가 반대해서 야반도주한 친지 간인가?”
“비슷하긴 한데.”
리온이 쟁반에서 냅킨을 슬쩍 집으며 빙글거렸다. 베로니카는 어이가 없어져서 그를 노려봤다. 비슷하다고? 밤중에 납치했다는 점이?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농담한 남자는 이제 약이 묻은 손끝을 닦아 주고 있었다. 무심한 다정함에 손끝이 저릿했다.
아, 또다. 또 기분이 이상해진다. 어제 그가 약을 바르라고 말했을 때처럼. 아침에 침대 위의 옷을 발견했을 때처럼. 사람 헷갈리게, 하나만 하지.
“아이고. 그럼 걱정하실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멀리는 가지 마. 우리 딸도 아가씨 또래인데 시집가서 카르트에 살고 있거든. 보고 싶어 죽겠어.”
능청스레 농담을 받은 여인은 선반에 놓인 초상화를 눈짓했다. 검은 단발에 하얀 얼굴의 여자가 붉게 만발한 꽃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베로니카와 비슷한 인상이다. 왜 여인이 처음부터 따뜻한 시선으로 봤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식 생각이 난 것이리라.
부모님이라는 말 한마디에 베로니카는 울컥 뜨거운 덩어리가 치미는 걸 느꼈다. 왜지. 별 얘기도 아니잖아. 그냥. 아무것도 아닌데. 참아야 하는데.
실제로도 참아 냈다. 하나 붉어진 눈시울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따뜻한 호선을 그리던 여인의 입이 문득 당황으로 벌어졌다.
“어머. 아가씨,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그냥. 저도 오랫동안 부모님을 뵙지 못했거든요.”
베로니카는 우물쭈물 변명을 주워섬겼다. 여기서의 부모란 어머니를 말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타 부모와는 달랐다. 애틋함보다는 차라리 무심함. 어머니가 돌아가신 열 살 무렵부터는 계속해서.
그는 애정을 갈구하는 아이를 부담스러워했고 죽은 아내를 떠오르게 하는 얼굴을 보기 힘들어했다. 아버지가 바깥으로만 나돌수록 어린 베로니카는 더더욱 관심과 애정에 목말라했다.
아마 춤에 푹 빠진 건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그때만큼은 사람들이 그녀만 바라봤으니까. 사랑했으니까. 덕분에 베로니카는 특히 다정함에 약했다. 조금의 다정함에도 목숨을 걸었다. 어릴 적 친구는 그것이 애정 결핍이라고 했다.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걸었지만 여인은 오히려 그런 태도가 더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세상에 이유 없는 눈물이 어디 있나. 그거 참으려고 하잖아? 그럼 마음에 병 생겨요. 당장 티가 안 난다고 상처가 안 난 게 아니야. 나중에는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를 할 때도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니까?”
염려하는 눈빛은 친절하고 자애로웠다. 베로니카는 문득 만나 본 적도 없는 그림 속의 여자가 부러워졌다.
“이럴 때 남편이 내 편이 되어 줘야 돼요.”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듣고서도 마음이 쓰였던지 여인은 리온에게까지 한마디를 했다. 그는 그러겠다는 거짓말을 태연히도 내뱉었다. 여인은 겨울 제철의 노란 과일을 몇 개나 챙겨 쥐여 주었다. 베로니카는 귀엽고 동그란 과일을 만지작거리다가 옆에 불쑥 내밀었다.
마음을 푼 건 아니다. 풀 수도 없고 풀어서도 안 된다. 주의해서 의심하겠지만 적어도 어제는. 나를 도와줬으니까.
“이거, 같이 먹어요.”
느슨하게 기대앉은 리온은 일찍이 그릇을 비우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몸이 저절로 긴장했다. 어제 일로 비웃거나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그는 별말 없이 순순히 과일을 받아 들었다.
스치듯 닿았다 떨어지는 온기에 베로니카는 숨을 죽였다.
눈. 감옥처럼 작은 창문 밖으론 눈이 솜솜이 떨어져 쌓였다.
***
리온은 묵던 여관에서 건육이며 훈제 고기, 각종 곡식을 사들였다. 돈을 전혀 아끼지 않은 건 물질은 곧 가치를 잃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게 금이든, 은이든, 백광의 다이아몬드라 해도.
당장 몇 주만 지나도 북부인들은 금괴와 음식을 바꾸려 들지 않을 것이다.
리온은 추워지는 바람을 느끼며 주인장에게서 얻은 담배를 물었다. 주인장은 신문물처럼 소개하며 팔아넘겼지만 남부에서 지내다 온 리온에게는 별로 놀라운 물건도 아니었다.
연기를 피워 올리며 고개를 젖히자 나지막한 건물들 위로 높게 증축되고 있는 성벽이 보였다.
소용없는 짓거리들을 하는군.
쌓이는 희망을 감상하기도 잠시, 덜컹, 하며 여관 문이 빼꼼히 열렸다. 한 겹밖에 입지 않은 베로니카가 추위에 어깨를 옹송그리고 그의 옆에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게, 안에서 들었는데. 중앙 광장에 피난민들이 모이고 있대요.”
눈치를 살피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내뱉는다. 리온은 젖은 머리와 떨리는 어깨에 시선을 고정한 채 되물었다.
“그래서?”
“다녀와 볼까 해요. 혹시 아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도 들을 수 있고.”
여자의 눈가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와 희망이 부풀고 있었다.
리온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뭔가를 부탁할 수 있을 정도로 잘해 줬던가. 단지 가시를 잔뜩 세운 여자가 거슬렸을 뿐이다. 막상 경계가 쉽게 흔들리니 한심스러웠다.
길게 타오른 담배를 버리자 쌓인 눈이 동그랗게 녹았다. 리온은 그것을 짓밟으며 몸을 틀었다.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봐.”
그림자가 드리우자 여자의 호흡이 가빠지는 게 육안으로도 보였다. 흰 입김. 더욱 움츠러드는 어깨. 그럼에도 꼿꼿한 시선.
그는 제게 뻗어오는 당당한 시선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여자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다. 조건만 지키면 웬만해선 죽이지 않을 거라는 것도.
그러나 그런 여자도 다음 일은 예상 밖이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파르르 떨던 어깨 위로 늑대 털이 박힌 검은색 기사 망토가 둘러진 것이다.
여자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망토를 여며 주자 동요하는 눈길은 리온의 무심한 얼굴 위를 떠돌다가 끈질기게 주시하는 시선에 붙들렸다. 서로를 보는 두 사람 사이로 하얀 숨이 흩어져 녹아들었다. 리온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문제는 내가 네 뭘 믿고 보내 주냐는 거지. 거기서 아는 사람을 만나서 도망갈지 누가 알고?”
그는 그녀가 잠꼬대하던 이름을 떠올렸다.
벤자민이었던가. 어쩌면 경계를 푼 게 아니라 순진한 척 연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베로니카는 도망이라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윽고 전신을 덮는 망토를 내려다보며 덤덤히 부정했다.
“도망 안 가요.”
“미안한데 별로 믿음이 안 가서.”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나 봐요.”
“그래서 신을 믿잖아.”
말장난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베로니카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그렇게 정 못 믿겠으면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녀는 스스로 뱉어 놓고도 흠칫 놀랐다.
무슨 사이라고 그가 그녀의 지인들을 만나러 같이 가 주겠는가.
두꺼운 망토가 판단력까지 덮은 게 확실했다. 피난민이 모여 있는 혼잡한 광장에 가는 건 성가신 일이다. 베로니카는 옆에 서서 친구들을 소개받는 리온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서둘러 덧붙일 때였다.
“아니, 방금 그건 그냥 한 말….”
돌연 소름 끼치는 여자의 비명이 맥을 끊어 내며 거리를 관통했다. 베로니카는 놀라서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차라리 이어졌더라면 자연스러웠을 소리는 갑작스레 뚝 끊어졌다. 표현 그대로 죽은 듯이.
리온이 그녀를 제 뒤로 당긴 것과 골목 어귀로부터 목 없는 여자가 내팽개쳐진 건 거의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