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6)화 (6/128)

그는 바쁘고 지친 가게 주인에게 금화 하나를 던져 주고 혼잡한 가게를 빠져나갔다.

눈을 가늘게 뜬 베로니카는 그를 따라가면서도 어찌 되는 건지 감이 안 와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무기까지 사 주다니. 부하보다는 동료로서 데리고 다니려는 건가. 내가 공격하고 도망칠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는 건가.

사실 최악까지 상상했었다. 무력으론 턱도 없는 상대니까.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그러나 남자의 태도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말을 타고 내릴 때 팔을 뻗어 도와줄 만큼. 며칠 내내 침낭을 양보할 만큼.

리온이 무기점에서 산 물건들을 말에 싣는 동안 베로니카는 얼떨결에 제 것이 된 검을 손으로 쓸었다.

항상 갖고 싶었다. 제 몸 하나쯤은 지킬 무기를. 이런 식으로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벤자민이 줬던 단검과 같은 장인의 제품을 고른 건 반쯤은 반항심에서였다.

처음에 검을 쥐여 준 건 그들일지라도 휘두르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 맞은 허수아비가 해를 봤을 때처럼 조금은 기운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기나긴 여정은 무기점 옆에 있는 여관에서 끝이 났다. 허름한 입구에 다다르자 심부름꾼 하나가 피곤한 얼굴을 하고 발을 끌며 걸어 나왔다.

“죄송하지만 남은 방이 없습니다. 며칠 전부터 피난민들이 잔뜩 몰려서요.”

“오늘 하룻밤이면 충분해. 고용인들의 방도 상관없어.”

부정적인 대답에도 리온은 태연히 가죽 주머니를 건넸다. 사환은 안을 열어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 가장 위층에 있는 낡은 방도 괜찮으시다면 당장 청소해서 내드릴 수는 있습니다. 침대도 애초에 두 명이 자게끔 만들어진 거고. 저희 여관이 다 찼을 정도면 아마 다른 데는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갑자기 넙죽 바뀐 태도에 리온이 말없이 고삐를 넘겼다. 심부름꾼은 마음이 바뀔까 걱정되는지 허둥지둥 짐을 내리더니 다른 점원에게 손짓해 뭐라고 속삭였다. 어마어마한 돈을 건네준 모양이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신나서 눈알을 굴리는 청년들을 보며 시민들이 아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확신했다. 작금의 재난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당장 도시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 돈을 벌어 성벽을 증축하는 게 아니라.

아마 베이른의 정확한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단지 바다에서 올라온 바하무트의 습격, 그 정도. 운 좋게 근처 부락에서 도망 나온 피난민들이 말을 전했겠지.

평생 나고 자란 터전을 버리기엔 부족하다. 바깥의 위협이란 코앞에 닥칠 때까지도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안 좋은 물질이 땅에서 나온다고 해도 괜찮다고 눌러사는 사람들처럼. 피난도 멀리서 말할 때나 쉽지 막상 자신에게 닥치면 하루아침에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안내를 따라 여관에 들어섰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식당을 가로질러 벽난로 옆의 계단을 올랐다. 하나 남았다는 방은 나무판자가 삐거덕거리는 4층, 작고 허름한 맨 끝방이었다.

“짐을 풀고 쉬고 계시면 바로 목욕물과 새 시트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헉헉거리던 사환이 짐을 바닥에 두고 물러갔다.

둘러본 방은 단출했다. 욕실 하나, 벽난로 하나 그리고 널따란 침대 하나.

“혹시나 해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데요.”

둘러보던 베로니카가 쭈뼛쭈뼛 입술을 뗐다.

“한 침대에서 같이 자야 하는 건 아니죠?”

그 말에 짐을 풀던 리온이 베로니카를 돌아봤다. 성력은 그녀의 정신을 유지시키는 데만도 급급했기 때문에 흰 목덜미에는 여전히 상흔이 선연했다. 자상은 그대로 두면 꽤 오래 갈 거다. 그의 오른쪽 눈처럼.

그것을 물끄러미 보던 리온이 감탄하듯 반문했다.

“아, 설마 너도 침대에서 자려고?”

“…….”

“참고로 난 며칠째 잠을 못 자서 피곤해 죽겠거든.”

리온이 목덜미를 주무르며 가까이 다가서자 베로니카는 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해도 귀 끝이 붉다.

곤란한데.

리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렇게 눈에 띄게 의식할 때마다 가학성이 인다. 더 괴롭히고 손대고 싶어진다. 겨울의 붉은 매화를 꺾듯이.

“근데 사제가 그렇게 여자랑 입을 맞춰도 돼요?”

마침내 빼꼼 고개 든 그녀가 반격하듯 물었다. 리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 생각한 거지만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넌 열 살 조카랑 입 맞췄다고 신께 회개해?”

“내가 어린애라는 거에요?”

“어른은 아니지.”

“대륙법으로 스물은 성인이에요.”

베로니카는 곧장 발끈해서 내뱉었다.

“입 맞출 때 당신도 반응했으면서.”

알려나 모르겠다. 어린애라는 말에 발끈하는 건 어린애들뿐이라는 걸.

리온은 그녀가 차마 그의 신체적 변화를 정확히 묘사하지 못하는 데 웃었다. 그날의 기억이 생각보다 구체적인 모양이다.

“아, 그거야 네가 제법 내 취향이긴 하니까.”

리온은 닿을 거리에 있는 목의 상처를 자세히 보려고 손을 가져다 댔다. 얼굴을 감싸 돌리자 움찔 놀란다. 고개를 숙여 자상을 확인했다. 그렇게 깊지는 않다. 얼굴을 돌린 그대로 베로니카가 작게 중얼거렸다.

“…성기사들도 여자 취향을 구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몰랐어? 원래 카르트 사생아의 절반은 사제 아버지를 뒀어.”

“역겨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더럽고 천박하다. 리온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 더럽고 천박한 출신이 아비의 성력을 타고나면 또다시 사제가 된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역겨운 피의 세습인 셈이다.

딱지 진 상처를 차가운 건틀릿을 낀 손으로 쓸 때마다 낭창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새삼 꽤 작은 얼굴이었다. 턱부터 한쪽 뺨, 귀 뒤까지 한 손에 잡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이마부터 입술까지 눈으로 훑다가 팔을 내렸다. 말마따나 입도 맞추지 않았는데 반응하는 건 곤란했다.

“자기 전에 잊지 말고 약이나 발라.”

“줄 거예요?”

“안 굶고 제대로 식사하면.”

베로니카의 눈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의심과 경계는 다시 말해 그를 잔뜩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 똑똑, 하는 바깥의 소리가 팽팽한 긴장을 끊었다.

“목욕물을 가져왔습니다.”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기를 잠시, 리온이 먼저 성큼성큼 문에 다가섰다. 문고리를 잡는데 등 뒤로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갈아입을 옷부터 좀 빌려주세요.”

어쩌면 호감을 사는 편이 다루기 수월할지도 모른다. 사랑에 빠진 여자들은 맹목적이므로.

***

달칵, 베로니카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리온은 나갔는지 이미 방에 없었다.

대신 탁자에는 향 좋은 양고기스튜와 말린 과일을 넣고 구운 동글동글한 빵이 차려져 있었다. 고민하다가 음식을 입에 욱여넣듯이 먹고 침대 끄트머리에 누웠다.

뭐, 어떡할 거야. 먼저 차지한 사람이 임자잖아. 따로 잘 데도 없는걸.

물론 도망도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반항의 열기가 한차례 식은 머리는 이내 지켜보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신분증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다. 여길 나가면 당장 오늘 잘 곳도 없다.

“더부룩해….”

배에 손을 얹고 몸을 웅크렸다. 속도 안 좋은데, 괜히 밥을 많이 먹어서. 왜 먹었을까.

이제 정말 혼자였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산다. 창밖에는 노숙하는 피난민의 소음이 요란했다. 그녀 자신의 처지도 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습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니 사람들 생각에 둘러싸인다는 게.

이네트나 로시 같은 친구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시는 어떻게 되었는지. 살아남은 시민들은 어디로 피난을 갈지.

어차피 이젠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쓸 줄도 모르는 장검을 침대 옆에 세워 두고 음각된 동백꽃 가지를 훑어 내렸다.

노을이 검 위로 드리운다. 새빨간 안광은 지는 해처럼 검집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것을 물끄러미 노려보다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대로였다. 빨간 눈.

풀썩, 이불을 덮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악착같이 눈물을 참자 추위로 이빨이 딱딱 맞부딪혔다. 왜 이렇게 춥지. 방금 따뜻한 물에 씻었는데. 두툼한 이불 밑에 숨었는데.

누가 좀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면 덜 떨 수도 있을 것 같아.

해가 질수록 공기가 파랗게 일렁였다. 흐릿한 시야로 동백의 꽃말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눈을 감았다. 잘은 몰라도 대충 굳센 의지가 담긴 뜻일 거다. 동백은 차갑고 매서운 겨울에 피는 꽃이니까.

의식이 까만 물에 잠겨 흐릿해졌다.

그녀는 지금 절벽 위에 서 있다. 둥그런 달이 보이는 아득한 벼랑 끝이다. 아래로는 눈부신 인간의 도시가 시야 닿는 데까지 뻗어 있다.

뾰족한 첨탑. 네모난 집. 창문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은 밤하늘에 뜬 별처럼 총총하다.

그러나 관심은 화려한 도시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녀는 이내 발치의 하얀 갑옷을 내려다봤다. 한 남자가 다리가 뜯겼음에도 기어서 도망치고 있었다.

눈에 스미는 피에서는 황홀한 냄새가 났다. 흰 갑옷을 입은 인간들은 언제나 그랬다. 그들이 가진 특별한 뇌는 더욱 강한 개체를 낳게 했다.

남자는 죽은 어미의 가슴을 헤집는 아이처럼 기어갔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절벽이다. 마침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고개를 디민 남자가 절망에 차 뒤돌아봤다.

오지 마. 오지 마. 눈물범벅이 된 얼굴이 볼썽사납게 애원한다.

희열을 느끼며 어깨를 잡아 올렸다. 머리통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와직.

“우욱…!”

눈을 번쩍 떴다. 베로니카는 어둠 속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일어나 헛구역질을 했다. 헉헉거림 사이로 두근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시끄러웠다.

이러다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이 아프게 욱신거리다 급기야는 쾅쾅 고막을 때렸다. 방금 본 악몽과 현실이 구분이 안 가 혼란스러웠다.

사람이 죽었다. 아니, 사람을 죽였다. 이건 뭐지? 그 남자는 누구지? 방금 뭘 본 거지?

생각을 하려고 애썼지만 잠이 깰수록 의식은 몽롱해지고 본능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날 밤에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갈증이다. 백일 밤낮으로 물만 마셔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목마름이다.

침대를 짚으려다가 딱딱한 팔뚝을 만지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크게 뜬 눈에 옆자리에 자고 있는 리온 베르크가 박혔다. 두근. 두근. 두근. 새빨간 눈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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