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어.”
풀썩, 베로니카는 제 앞에 떨어진 검은 로브를 응시했다.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기만 하자 침낭을 말에 올리던 리온이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입혀 줘?”
대답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옷을 집어 든 건 눈앞의 남자라면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일단 참자. 살아야 뭐든 해 볼 수 있어.
모자가 달린 검은 로브는 남자의 것인지 엄청나게 커서 발끝까지 질질 끌렸다. 옷을 입고서야 얼어 죽을 듯 추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발이 차가웠다.
어정쩡하게 서 있자 리온이 지나가는 투로 질문했다.
“말을 타 본 적은?”
“…없어요.”
“검을 쥐어 본 경험.”
“그것도 없어요.”
“도망갈 생각은?”
물 흐르듯 이어지던 대답이 뚝 멎었다. 어이없어 쏘아보자 리온이 재밌다는 듯 시선을 되받았다. 오만하게 뻗은 눈매 안에서 심연 같은 동공이 그녀를 빨아들였다.
성큼 다가온 남자가 손을 뻗었을 때 눈을 꽉 감은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때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목덜미가 아직 따끔거렸다.
그러나 닥친 감각은 예상외로 훨씬 부드러웠다. 머리에 묵직한 옷감의 무게를 느끼며 슬며시 눈을 뜨자 좁아진 시야로 무표정한 낯이 보였다. 그는 얼굴에 찬 바람이 닿지 않도록 후드를 깊이 눌러 씌워 주었다. 그게 다였다.
멍한 것도 잠시, 이윽고 그가 허리를 덜렁 안아 드는 바람에 높은 비명을 터뜨렸다. 리온은 소리를 싹 무시한 채 그녀를 흑색 군마에 올려 앉혔다. 높아진 눈높이에 급하게 갈기를 부여잡자 그가 뒤에 훌쩍 올라타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딱딱한 갑옷의 감촉은 절로 몸을 굳게 했다.
설원에 웅크린 도시는 자라지 못하고 타죽은 어린 짐승과도 흡사했다. 원래는 일출로 유명했던 극동의 도시. 그 새파란 땅의 우울한 흔적.
따각거리며 가볍게 한 바퀴를 돈 말은 이윽고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고향을 등진 순간 베로니카는 직감했다.
***
한평생을 베이른에서만 지냈다. 그건 다시 말해 반나절만 말을 몰아도 모르는 풍경이 나온다는 뜻이다.
도시 바깥의 평야에는 눈 쌓인 농장과 나지막한 집들이 산재해 있었고, 그 너머에는 흰옷을 차려입은 키 큰 전나무 숲이 보였다. 리온이 고삐를 당긴 건 숲에 접어들기 직전, 마지막 농장에서였다.
“잠깐 쉬었다 갈 거야.”
그가 그녀를 먼저 땅에 내려 주며 말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질 뻔한 베로니카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숲을 흘끗 보고는 암적색 집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계세요?”
쾅쾅 문을 두드리는 주먹에는 제삼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서려 있었다. 갈기를 꽉 움켜쥐고 오느라 부르튼 손이 욱신거렸다.
“차라리 안 계신 편이 나을걸.”
“…무슨 뜻이에요?”
우물물을 퍼 올려 말에게 먹이던 리온이 대답 대신 집의 뒤편을 응시했다. 베로니카는 의심과 호기심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엎어진 인간이, 아니 한때 인간이었을 고깃덩이가 머리 없이 누워 있었다. 그제야 커다란 발자국이 찍힌 눈바닥이 보이며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바하무트. 바하무트다. 그들이 이곳을 지나쳤다.
“그나마 인간은 형편이 나아. 도망도 못 가 보고 죽은 짐승보다는.”
뻣뻣이 굳은 그녀를 지나친 리온이 집 뒤쪽의 마구간으로 다가섰다. 갈가리 찢겨 내장이 흘러내린 말을 보고 베로니카는 입을 틀어막고 욕지기를 삼켰다. 공포로 몸부림쳤는지 뒷발 쪽의 벽은 거의 부서져 있다시피 했다. 그곳에서 여물을 먹이는 리온의 무신경함이 놀라웠다.
저 말은 입맛이 날까. 동족이 죽어 있는데?
말은 동물 중에서도 머리가 좋은 편이라고 들었다. 그중에 가장 특출난 건 기억력이라고.
저런 남자를 따라다니는 생물의 기억은 아마 바하무트로 가득 채워져 있을 거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자 검은 로브 아래로 자신 또한 커다란 발자국을 밟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발목을 붙잡히기라도 한 듯 굳어 있길 잠시, 잠기지 않은 빈집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다. 베로니카는 곧장 리온을 따라 들어갔다.
“뭘 하려고요?”
“보면 몰라?”
리온은 부엌과 찬장을 뒤져 치즈 세 덩이와 감자 스물두 개, 포도주 한 병을 찾아냈다. 포도주를 보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마개를 따서 병째 마시는 남자를 그녀는 야만인 보듯 쳐다봤다.
“남의 음식이잖아요.”
“내 거라고 한 적 없는데.”
식탁에 방탕하게 걸터앉은 리온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그가 혀로 입술에 묻은 술을 훑으며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말했다.
“목 안 말라? 가서 물이나 마시고 와.”
“필요 없어요.”
벌써 두 번째였다. 이미 아침에 육포를 거부한 전적이 있는 것이다. 갸웃거리던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올리자 소매가 스르르 내려가며 가느다란 팔이 드러났다.
“엄청 말랐네.”
“이 정도는 정상이에요.”
“춤이라도 췄어?”
그냥 한 말이었을 거다. 알고 있다. 남부의 무희들을 향한 흔한 선입견이자 여긴 동부이니 해당 되지도 않는 헛소리란 걸.
그런데도 바보처럼 흠칫했다. 날카로운 바늘에 찔린 사람처럼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상관없잖아요. 몇 끼쯤 굶든 말든. 살아 있으면 그만이면서.”
홱 돌아서 집을 나갔다.
뜨거운 물을 삼킨 것처럼 목이 화끈거렸다. 허벅지가 쓸리고 아플 때는 잊었던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짜증스러웠다. 귀를 쫑긋거리며 여물통에서 고개를 드는 말도. 문가에 주저앉아 고개를 묻은 자신도.
잠시 후 식량을 들쳐 멘 리온이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더는 물도 음식도 권하지 않았다.
그대로 다시 출발해 숲길을 통과했다. 벌레와 새가 웅웅대는 숲 속을 지나다가 해가 지자 눈을 걷어 내고 모닥불을 피웠다.
힘들다. 힘들어 죽겠다.
솔직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얼얼한 건 둘째치더라도 뱃가죽이 정말로 등에 달라붙었다.
무기력하게 불 앞에 앉아 있는데 리온이 나뭇가지를 뾰족하고 가느다랗게 다듬더니 아까 얻은 감자와 치즈를 꽂아서 굽기 시작했다. 코끝에 고소한 냄새가 스쳤다. 겨울밤에 노랗게 익어 가는 감자. 지글지글 녹는 치즈의 향기.
침이 꿀꺽 넘어가는데도 자존심에 불만 쳐다봤다. 그때였다.
“다 익었어. 먹어.”
리온이 꼬챙이 하나를 살피더니 불쑥 내밀었다.
훅 들어온 감자가 영롱해서, 베로니카는 믿기지 않는 눈만 끔뻑였다. 리온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싫으면 말고.”
“아 잠깐, 잠깐만요.”
거둬들이려는 손을 다급하게 덥석 잡았다. 거칠고 길쭉한 손을 잡자 크기 차이가 더욱 도드라졌다. 베로니카는 눈도 못 쳐다보고 그 손만 구원처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한 번만 더 권해 주면 안 돼요?”
딱 죽고 싶어지는 침묵이 흘렀다. 맞잡은 손끝까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먹고 싶었다. 배가 고팠다. 눈을 꾹 감고 있길 잠시, 머리 위에서 픽 웃음이 터졌다.
창피로 사과처럼 변한 얼굴을 들자 어린애를 보는 듯한 눈과 마주쳤다. 그녀를 빤히 보던 리온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열심히 준비한 음식이니 한 입만 드셔 주시면 평생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명백히 놀리는 투에 얼굴이 더더욱 새빨개졌다. 꼬치를 넘겨준 리온은 옆에 맑은 물이 담긴 수통도 놓아 주었다.
민망함에 입만 달싹이던 것도 잠시, 눈앞에서 모락모락 김을 올리는 치즈 감자에 베로니카는 금세 신경을 빼앗겼다. 포슬포슬한 감자를 후후 불어 얇게 녹아든 치즈와 함께 베어 물었다.
소박한 음식은 과장 조금 보태서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 제일로 맛있었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면서 입으로 밀어 넣다가 정신 차렸을 때는 이미 다섯 개나 먹은 뒤였다.
식사 후에는 리온이 침낭을 양보하고 나무 둥치에 기대앉았다. 성기사라고 해도 남자와 단둘이 지새는 밤이다 보니 베로니카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기척에 단단히 주의하자고 생각하길 잠시, 새소리에 노곤한 눈을 떴을 땐 어느새 해가 새파랗게 밝아 있었다.
그런 날이 며칠이나 지속되었을까. 다그닥다그닥. 튼튼한 말은 두 명이나 싣고도 지치지 않고 달렸다. 단지 앉아 있을 뿐인데도 이동은 고단했다. 갈기를 꽉 쥔 손이 새빨갛게 부르트고 힘을 잔뜩 준 허벅지는 발발 떨렸다. 베로니카는 머리를 비운 채 그저 버텼다.
“안 먹어요.”
그간 베로니카가 뱉은 말이라곤 이것 하나뿐이었다. 같잖은 반항심이나 앙금이 남아서는 아니다. 그저, 육포 하나를 쑤셔 넣기도 힘들 만큼 입맛이 없었다. 보통 아침과 점심을 거르고 저녁만 먹었다. 마침내 어느 날 오후, 아셀도르프에 도착할 때까지.
아셀도르프는 피난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평범한 도시였다. 높이 증축되고 있는 성벽을 제외하면 별다를 것도 없었다. 문제는 뭐랄까, 냄새였다.
근처에 다다라서부터 속이 울렁거리도록 나는 피 냄새. 마치 발밑에서 수백 개의 얼굴이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감각. 그건 도시 깊숙이 무기점에 들어왔을 무렵에 극에 달했다.
“빨리 골라 주면 고맙겠는데.”
구토감을 억누르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상념을 깨웠다. 퍼뜩 현실로 돌아온 베로니카는 붐비는 무기점 안의 소음을 배경으로 리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가깝다. 자각하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내려 몇 개 안 남은 장검들을 죽 스치듯 훑었다. 겉핥기 같은 시선은 동백꽃 가지가 그려진 검집에서 멈추었다.
위에 달린 동판에는 장인 카멜리아의 대량 생산 제품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말로 사 줄 거예요?”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듯 검을 잡았다. 손에 달라붙는 무게감을 느끼며 의심스럽게 질문하자 리온은 감흥 없이 대답했다.
“갚아,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