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4)화 (4/128)

남자는 부정하는 대신 차가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왜 바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처음부터 그 사람일 수밖에 없었는데. 불타는 도시에 제 발로 찾아올 자는.

“…묵시록의 붉은 기사. 리온 베르크. 당신 맞죠?”

성기사 리온 베르크뿐이다.

그의 유명세를 말할 때 혹자는 ‘바하무트조차 붉은 기사를 안다’고 한다.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으로 신성 기사단에 입단한 자.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신의 사자’라는 칭호를 수여 받은 불세출의 기사.

하지만 그는 창창한 미래를 놔두고 남부의 티란 전선에서 제멋대로 전장을 이탈했다. 그런 그가 어째서 베이른에, 왜 자신을 구했단 말인가.

“쉽게 맞히니까 재미가 없네.”

혹자는 그가 피에 미쳤다 하였고 또 누군가는 타락해 신을 배반했다 했다. 어느 쪽이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베로니카는 굳은 입술로 질문했다.

“나한테 뭘 원해요?”

“글쎄.”

명백한 경계도 아랑곳 않고 그가 그녀의 등 뒤를 손으로 짚으며 상체를 기울였다. 새까만 동공이 숨 막힐 정도로 뚫어지게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해 온다.

검은 튜닉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붉은 머리. 그와 어우러지는 날카로운 흉터.

베로니카는 식은땀이 들어찬 손바닥을 꼭 말아 쥐었다. 눈알이 투명한 창문이 된 기분이었다. 저를 들여다보는 남자가 모든 생각을 읽어 내고. 간밤의 아찔한 감각은 그 앞에서 낱낱이 분해된다. 해부당하는 곤충처럼.

“숨 쉬어.”

그때, 코끝까지 다가왔던 남자가 나지막이 속삭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제야 호흡을 참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은 베로니카는 얼굴을 붉히며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하, 하는 새된 소리가 언뜻 야릇하게 들리는 건 어제의 일 때문일 거다.

리온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태평하게 몸을 바로 세우며 다른 손으로 그녀가 내려놓았던 술잔을 집어 들었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젖은 입술 사이로 넘어간다. 애초에 제 것이었다는 듯 뻔뻔스럽게.

그의 입술이 닿은 곳이 제가 입을 댔던 곳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때였다.

“바하무트가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아?”

난데없는 질문이 리온에게서 흘러나왔다. 베로니카가 멍하니 고개를 가로젓자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분열이야.”

분열?

“도시 하나를 삼키면 도시 하나만큼. 국가 하나를 삼키면 국가 하나만큼. 인간의 뇌를 먹은 수만큼 분열하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원생동물 같은 강렬한 번식법에 놀라, 베로니카는 제 상황도 잊은 채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그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늘어나도?”

“승산은 있어. 아무리 늘어나 봤자 한 마리를 죽이면 그것이 낳은 새끼들은 줄줄이 죽어 버리거든. 자식도, 그 자식의 자식도. 마치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말이야.”

술잔의 끄트머리를 매만지던 기다란 손가락은 한 바퀴를 빙 두른 뒤 손잡이로 향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한 가지 가설에 도달하더군.”

베로니카는 숨을 죽였다. 천천히 시선을 든 리온은 더는 웃고 있지 않았다. 이유 없이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은 남대륙 전체를 뒤덮은 괴물 새끼들이 사실은, 처음에는 단 한 마리 아니었을까 하는.”

충격적인 가정에 보지 못한 과거가 눈앞에 펼쳐진다.

3년 전 바다에 떨어진 운석. 그것을 가르고 태어난 단 한 마리의 바하무트. 그것은 인간의 뇌를 먹으며 제 가족을 불려 나갔다. 수는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좋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전력이 될 테니까. 그렇게 낳고, 낳고, 또 낳았으니.

“그 최초의 바하무트만 죽이면 온 대륙의 재앙은 끝나는 거 아닌가.”

나직하고 고요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베로니카는 전율하듯 몸을 떨었다. 줄줄이 연결된 실의 맨 위를 자르는 상상을 한다.

리온이 나무 잔을 기울인 건 그 순간이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듯한 바닥의 곤충 사체 위로. 아니, 정확히는 사체에 새까맣게 몰려든 개미 떼 위로.

후드득, 독한 술이 쏟아지는 동안 베로니카는 그것을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샛노란 대홍수에 까만 개미들이 휩쓸려 나간다. 발버둥 쳐 보지만, 소용은 없다.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얘기를 내게 해 주는 이유가 뭐죠?”

“알아들었을 텐데.”

리온이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교회 앞의 여인 하나가 신음하며 말하더군. ‘얼굴 있는 바하무트가 저 여자와 눈을 맞췄다’고.”

베로니카는 동화되기 직전에 마주쳤던 부인을 떠올렸다. 그리고 돌아봤을 때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있던 괴물도. 세상의 멸망을 보여 주던 붉은 눈도.

호흡이 가빠졌다. 이제야 알겠다. 이자가 원하는 게 뭔지.

“단지 가정일 뿐이지만 너는 최초의 괴물에게 동화되었어. 너는 그것과 연결된 유일한 길이야.”

그는 그녀가 추적을 도와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의 가정이 맞다는 전제하에 하나만 죽여도 대륙 전체의 바하무트가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내가 협조하기 싫다면요?”

같은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는 기시감이 목을 옥죄어왔다. 갈라진 음성을 뱉은 베로니카는 벤자민을 떠올렸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친구. 대가를 요구하다 머리가 꿰뚫려 죽은 남자.

“싫은 건 없어. 머리가 터져 죽거나 같이 가거나. 그 두 가지 선택지 밖에는.”

아니나 다를까, 그의 대답은 한치의 주저도 없는 강요였다. 베로니카는 의구심을 품었다. 이 자가 정말로 리온 베르크라고?

잔혹한 표정이나 말투는 그를 품위 있는 기사보다는 거친 용병으로 보이게 했다. 리온은 밤보다도 검은색이 더 잘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이 남자를 따라간다면 그 후의 인생은 어떻게 될까?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다는 보장은 있나?

거기까지 생각하다 역함을 느끼고 이를 사리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울렁이는 위가 금방이라도 울컥울컥 신물을 토해 낼 것 같았다. 벤자민이 남긴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큰 게 분명했다.

어떤 불행에는 바닥이 없고, 때로는 전 인류에 닥친 재앙보다도 눈앞의 불행이 더 무서운 법이다.

남자의 차가운 눈빛이 벤자민의 번들거리던 안광과 자꾸만 겹쳐 보였다. 리온과 벤자민은 다른 듯 같았다. 분명 도와 달라고 한 건 이쪽이지만 대가까지 합의한 적은 없다. 죽음을 변제해 주고 삶을 통째로 내놓으라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베로니카의 하얀 얼굴에 서서히 반항적인 이채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에게 정보가 필요하다면 편지든 전서구든 다른 방법도 있는 거였다. 꼭 같이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싫어요.”

베로니카는 또렷이 대꾸했다.

“목숨을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이렇게 떠나기는 싫어요.”

그 순간 두근, 하고 심장이 강렬하게 고동쳤다. 새빨간 눈이 심지를 켜듯 번득이며 공기가 뚜렷하게 출렁였다. 기이한 살의가 깃들자 베로니카는 무의식적으로 침낭 옆에 놓여 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벤자민이 줬던 것. 그때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물건.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채 검을 뽑아 들 틈도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느른하던 남자의 눈빛이 변했으니까.

콱, 머리채가 잡히며 허연 목이 거칠게 뒤로 젖혀진 건 삽시간의 일이었다.

빠르고 우악스러운 제압에 숨이 턱 막히며 아픈 신음이 터져 나왔다. 차르르, 단검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고여 들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목덜미에 닿은 쇠붙이가 살결이 떨리도록 서늘했다. 눈을 치뜨자 리온이 도축할 가축을 보는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방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저음을 뱉으며 남자가 씩 웃었다.

“지옥 불에서 굴러도 살고 싶으면 도와 달라고 하라고.”

몸이 시체처럼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완력이 아니라 폭력의 문제였다. 아무리 베로니카가 별종처럼 자랐대도, 기이한 힘을 손에 넣었대도 순간적으로 압도당할 수밖에 없는 살의.

그 앞에서 작은 몸뚱이는 반사적으로 겁에 질렸다. 20년을 평범하게 살아왔다. 합법적으로 살생을 용서받던 기사를 상대할 수 있을 리 없다.

어느새 눈꼬리에는 구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베로니카는 쉰 목소리로 이를 갈았다.

“…기사도 아니야.”

“…….”

“당신은 약자를 지켜야 하잖아. 이렇게 사람을 납치하고 협박하는 게 아니라.”

억울함과 분노를 꾹꾹 눌러 담아 뇌까렸다.

리온은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뿐이었다. 곧 공포를 각인시키듯 더 가까이 들어온 칼날이 살갗을 짓이겼다.

주륵, 뜨거운 액체가 흐르는 느낌으로 보아 피가 나는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넌 어제부로 약자 같은 게 아니야. 인간을 씹어 먹는 바하무트지.”

리온이 뒷머리를 확 가까이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얼굴이 입을 맞출 듯 가까이에서 비스듬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말해 둬야겠군. 널 괴롭혀서 ‘그것’의 소재지를 알 수만 있다면 나는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팔다리를 자르든 묶어서 끌고 다니든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야.”

낮은 목소리가 폭력적으로 고막을 찔렀다.

진심이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다.

“바라는 건 간단해. 첫째, 지금 이 시간부로 환상이든 환청이든 이상 증세를 겪는 즉시 말할 것. 둘째, 무조건 복종할 것. 도주를 시도하거나 반항할 시에는 죽어. 어때, 이해하기 많이 어렵나?”

여기서 싫다고 했다간 당장 죽는다. 단순한 일이다.

새빨갛게 치미는 분노에 눈시울이 일렁거렸다. 침을 뱉고 싶었지만 입이 바싹 메말라 불가능했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저주했다.

“지옥에나 가요.”

“그래, 까짓거 같이 가지 뭐.”

리온이 저 좋을 대로 해석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 숨 막히도록 잘생긴 미소에도 베로니카는 마주 웃어 보이지 못했다. 아마 그건 검을 떼어 내고 머리채를 놓아줬어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겠지. 이제 도망가 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날개는 꺾였다. 그가 그녀를 구한 그 순간에.

날개가 떨어진 매미는 기어야 하는 땅벌레에 지나지 않는다.

신력 1521년, 천사도 잠든다는 겨울의 가장 긴 밤.

베로니카 슈바르츠발트는 그렇게 스물아홉의 기사에게 예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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