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아가씨와 성기사 (2)화 (2/128)

리온은 왼팔에는 기절한 여자를, 오른손에는 장검을 쥔 채 걷기 시작했다.

쓸쓸하고 광막한 도시에 우뚝 서서 움직이는 형체는 리온 하나뿐이었다. 지글지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검은 발이 저벅저벅 잔해를 짓밟았다.

도시는 죽었다.

생존자는 있겠지만 그들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졌다.

집, 가족, 친구, 하다못해 기르던 개와 매일 밤 쓰던 일기까지 활활 타서 부질없는 재가 되었다.

기다란 다리는 부서진 교회의 첨탑과 반 토막 난 바하무트들 사이를 느릿하게 가로질렀다.

찾는 것이 있어 왔으나 또다시 늦었다. 이미 떠났다. 다만 ‘그것’에게 동화된 듯한 인간을 찾았다는 게 유일한 희망이다.

“하… 으.”

리온은 기절하고도 바르작대는 여자를 흘끗 내려다봤다.

사실 안 쓰러졌으면 이상할 외견이었다. 작은 몸집부터 연약해 보이는 목선까지.

시선이 머무는 젖힌 목은 희고 가늘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한 손으로도 꺾을 수 있을 정도다.

이대로 두고 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괴물에게 먹혀서가 아니라 성기사의 칼날에 심장을 도륙당하여.

남쪽 바다에 운석이 떨어진 건 3년 전. 그리고 운석이 떨어진 바다에서 괴물이 기어오르기 시작한 것은 고작 2년 전의 일이다.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그것들을 성전 속 괴물의 이름을 따 ‘바하무트’라 명명했다.

바하무트는 잔혹했다. 그들은 인간을 먹었고, 지극히 희귀한 확률로 동화자를 탄생시켰다. 동화된 인간은 바하무트와 정신이 연결되는 대신 금세 미쳐서 죽어 버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교회는 붉은 눈의 동화자를 배척했다. 신성 기사단이 여자를 발견했다면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숨통을 끊었을 것이다. 잘만 이용하면 이 재앙을 끝낼지도 모르는 인간을.

리온의 예상으로 여자는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뒤쫓던 ‘최초의’ 바하무트에게 동화된 자였다.

“오랜만입니다.”

그때, 딱딱한 목소리가 끼어드는 바람에 물처럼 흐르던 상념이 끊어졌다.

검은 잔해 사이를 거침없이 걷던 리온은 우뚝 멈춰 섰다.

바람이 불었다. 도시를 태운 불꽃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갑주들의 행렬이 칼같이 늘어서 있었다. 무수한 십자가 깃발과 상자를 뒤집어쓴 듯한 성전의 투구. 기다란 창대와 네모난 방패.

교회의 신성 기사단이다. 리온이 입꼬리를 당겼다.

“일찍도 오는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리는 홀로 다니는 당신처럼 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신성 기사단의 부단장, 필립 폰 비텔스바흐가 차갑게 대답했다. 베이른 정도 되는 도시이니 부단장을 보낸 모양이다. 겁에 질린 교황은 절대로 단장은 보내 주지 않겠지만.

필립의 자색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혐오가 일렁였다. 은발의 기사는 율법을 중시하는 강건한 성품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그가 기사단을 떠난 리온을 용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바하무트 사냥꾼. 묵시록의 붉은 기사. 현재의 리온을 부르는 말은 많지만 전부 세속적인 명칭에 불과하다.

교회의 기사단이라면 누구나 과거의 그를, 신의 사자라고까지 불리던 리온을 기억했다. 필립은 그를 존경했고, 동경했으며, 믿고 따랐다.

하나 검은 갑주를 두른 남자는 도저히 이전에 촉망받던 성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잿더미 사이에 선 모습이 섬뜩하리만치 스산하여 도시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리온이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가자 스릉, 하며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리온은 제게 향한 십여 개의 칼끝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날 세우지 마. 내 덕분에 발 뻗기 편해졌잖아.”

“당신 덕분에?”

필립이 단번에 미간을 구겼다.

“당신이 물러나서 제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스스로의 십자가도 짊어지지 못한 자는 제 상대가 되지 못합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이 도시 얘긴데.”

리온이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고는 덧붙였다.

“내가 다 쓸어 놓은 덕에 도시에 편하게 입성하지 않았나?”

필립은 눈썹을 치켜떴다. 말마따나 도시 변두리인데도 사방은 쑥대밭이었다. 거리 곳곳에 죽은 바하무트의 사체가 나뒹굴었다.

리온 혼자서 저지른 짓이었다. 신의 힘을 제멋대로 빌려다가.

그 사실이 더더욱 치미는 분노를 일으켰다. 그의 재능과 능력이 증오스러웠다.

“그런 면은 여전하군요. 그렇게 모든 일을 가볍고 무신경하게 넘기는 태도는.”

이윽고 필립의 시선은 리온이 안고 있는 여자에게 내려갔다. 사실 아까부터 궁금했었다. 누구길래 단순한 부상자를 리온 베르크가 손수 데리고 나오는 건지.

리온이 팔 하나로 안아 들 수 있을 만큼 마르고 가느다란 여자였다. 입고 있는 리넨 옷은 한눈에 봐도 낡아 빠졌고 새까만 단발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나 특이한 분위기만큼은 묘하게 시선을 잡아채 인정할 만했다.

“그건 그렇고, 그 여자는 뭡니까?”

“보시다시피 평범한 여자.”

말장난 같은 대답에 필립이 인상을 찡그렸을 때였다. 리온의 입가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가셨다.

“어차피 상관없지 않나? 불쌍한 아들이 여자와 구르든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든. 이제 와 신께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 테지.”

순간 필립의 얇은 입술이 벌어졌다. 충격으로 귀를 의심했다. 저 말에 담긴 함의가 성애가 맞는가. 신께 귀의한 자가 뻔뻔하게 여자를 원한다고 말하는 건가.

혐오와 경멸. 온갖 감정이 스쳤다.

성기사는 근본적으로 신의 사제다. 이제는 아니라곤 하나 한때 사제였던 자가 더러운 애욕을 드러내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당신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아니, 됐습니다. 무엇을 기대하고 불렀던 건지. 보내 줄 테니 곧장 도시를 떠나십시오. 다시는 말 섞고 싶지 않습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성도의 재판장이 아니기만 기도할 뿐입니다.”

리온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피식 웃고 몸을 돌렸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질러선 안 될 죄를 범한 죄인처럼 쳐다보면서도 그를 해치고 여자를 구하려는 시도는 아무도 하지 않는다. 강제로 데려가는 거라곤 생각 안 하나?

그것은 리온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제 편의로 세상을 바라볼 뿐.

말이 매인 곳으로 성큼성큼 걷던 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리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틀며 말했다.

“아, 필립. 그리고 내 십자가 말인데.”

리온이 오른손으로 장검을 곧게 들어 보였다. 칼날에 온통 피를 머금은 기다란 검신은 기다렸다는 듯 아래로 붉은 흔적을 떨구었다.

“그때도 지금도 아직 잘 짊어지고 있어.”

손잡이 위에 수직으로 달린 크로스 가드(Cross Guard) 탓에 검은 마치 그 자체로 거꾸로 된 십자가처럼 보였다.

얼핏 보면 명백한 신성 모독이다. 신이 검에 있다고 말하는, 역십자를 성기사에게 들이미는 이단의 행위.

그러나 필립은 알고 있었다. 역십자는 사도의 십자가라는 걸.

순교한 사도 하나가 자신은 감히 신과 같은 형벌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거꾸로 된 십자가에 매달리겠다 간청한 일화는 사제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건지.”

필립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늘어진 눈은 검디검은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순백의 기사단 뒤로 검은 잿가루가 흩날린다.

서늘한 겨울이었다.

***

뜨겁다. 눈알이 뜨겁고 입 안이 바짝 마른다.

베로니카는 홧홧한 머리로 생각했다. 타죽는 인간의 심정을 알 것 같다고.

이 정도 고통이라면 성도에서 화형당한 이교도들은 합당한 죗값을 치렀다고 할 만했다. 목구멍은 아프게 화끈거리고 심장은 불이 붙은 듯 활활 타올랐다.

가위에 눌릴 때처럼 미지의 공포가 목을 죄었다. 베로니카는 어둠 속에서 헤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이고 비명을 내질렀다.

죽을 것 같아. 살려 줘. 제발. 누가 나를 어떻게든….

“그래. 알겠으니까 눈 떠.”

버둥거리는 팔다리가 확 짓눌리며 차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누군가 상체로 그녀를 꽉 누른 채 고개를 가까이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모두 죽었는데. 아버지도, 이웃 할머니도, 하물며 벤자민조차도.

베로니카는 의문을 느끼며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시야가 흐렸다가, 점차 맑아졌다가, 초점이 지척에서 내려다보는 검붉은 시선을 잡아챘다.

남자다. 처음 보는, 아니. 나를 구했던 남자.

놀랍게도 엄청난 끌림과 욕망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이런 느낌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치 잃어버렸던 영혼의 일부를 만난 기분. 그리고,

“…목이, 목이 말라요.”

심장이 죄이도록 아팠다. 가느다란 눈꼬리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혈관을 가로지르는 불길을 느끼면서 베로니카는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물을 주세요. 목이 타는 것 같아….”

그러나 식은땀을 흘리는 베로니카를 보고도 남자는 그저 무표정했다. 서늘한 눈매는 죽어 가는 동물을 보는 사냥꾼처럼 그녀를 관찰했다.

“물을….”

“물? 정말 물을 마시고 싶어?”

남자가 잘 생각해 보라는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베로니카는 생각했다.

나는 물을 마시고 싶은 걸까.

응. 입 안이 버석거리고 목구멍이 화끈거리는걸. 이 느낌이 갈증이 아니면 무어란 말이야?

그때 눈앞에 핏빛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쓰러지기 직전에 거리에서 봤던 시체 토막들이 한여름의 섬광처럼 떠올랐다 스러졌다.

뻣뻣하게 경직되어 하늘로 뻗어 있던 팔. 반대로 땅을 가리키는 손등과 가냘픈 손가락.

역겨워야 마땅했으나 역겹지 않았다. 징그럽지 않았다. 오히려….

“먹고 싶어?”

“응…. 그러니까 이거 놔, 놔줘요. 부탁이야. 제발.”

베로니카가 고개를 저으며 연약한 발버둥을 치자 몸을 짓누르던 남자가 턱을 잡아 붙들었다.

악력이 거칠었다. 아팠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목이 마르다. 배가 고프다. 인간의 뇌수가 마시고 싶다.

남자를 떨쳐 내려 갖은 애를 썼다. 어서 갈증을 해소해야 했다.

스스로도 미쳐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인지와 행동은 별개였다. 당장 피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놓고 꺼지라고!”

베로니카는 마침내 악을 썼다. 자신이 그렇게 큰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태어나서 처음 알았다. 깊은 곳에서부터 튀어나온 비명은 날카롭고 강렬했다.

베로니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기에 비슷한 빛깔의 시선은 그대로 질척하게 얽혀들었다.

또다시 쿵쾅쿵쾅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또 그때처럼, 기절하기 직전처럼 맥박이 요동친다. 기침을 잘못하면 심장이 통째로 툭 튀어나와 버릴 것만 같은 커다란 지진이다.

미쳐 날뛰는 공기의 흐름이 끈적한 피부로 선연하게 느껴졌다. 남자가 입매를 비틀어 웃고는 낮게 중얼거렸다.

“너 장난이 아니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낮게 중얼거린 그가 몸서리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곤 고개를 숙였다. 차가운 체온이 살갗을 스친다.

“놓아줘요, 제발. 아무도 안 죽일게요. 그냥, 아주 잠깐만.”

베로니카의 두서없는 흐느낌이 뚝 멎었다. 눈이 커졌다.

옷자락을 잔뜩 구기던 작은 손에서 힘이 풀렸다. 온 신경이 겹쳐진 입술로 향했다.

턱을 비틀어 입을 연 그가 서늘한 혀를 그녀의 안에 밀어 넣어 이어질 말을 게걸스레 삼켰다.

입맞춤보다 더 놀라운 건 갈증이 해소되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다랗게 뜨였던 눈이 서서히 감겼다.

한여름에 차가운 냇가에 발을 담근 것처럼 흐린 감정이 맑아졌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파리는 하얗게 타올랐다 푸르게 사그라든다.

베로니카는 형용 못 할 괴이한 쾌락 속에 몸을 담갔다. 성수라도 되는 듯 혀를 내밀어 남자의 타액을 받아 마시려고 노력했다. 서투른 동작에 남자가 잠깐 입을 떼고 욕설을 지껄였다.

“더, 더 주세요.”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 애원하자 남자가 가라앉은 시선으로 뚫어지게 내려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너 몇 살이야?”

몇 살이냐고?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지.

겨울에 태어난 베로니카는 어제부로 성년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스물이요.”

남자가 나지막한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가지 마. 다시 그 시원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줘.

다급해진 베로니카는 다디단 감각을 좇아 팔을 감았다. 그리고 어설프게 남자를 흉내 내어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남자는 밀어내려는 듯 그녀의 뺨을 잡았다가, 그녀가 혀를 밀어 넣자 낮은 신음을 흘리며 그것을 거칠게 빨았다.

밤이었다. 어두웠고, 어딘지 모를 곳이었으며, 몸에서는 막 태어난 생명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바하무트는 가혹하다. 그들은 인간을 먹고, 지극히 희귀한 확률로 동화자를 탄생시킨다. 동화된 인간은 가공할 힘을 지니지만 정신이 오염되어 오래지 않아 죽어 버린다.

베로니카가 유일한 생존자로 남은 것은 리온 베르크가 신의 축복을 받은 기사였기 때문이다.

성력이 깃든 숨과 타액이 그녀를 구원했다. 사라진 신 대신 신이 되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