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4/14)

12.

쏴아.

쏟아지는 샤워기의 세찬 물줄기에 하얀 비누 거품이 사라지자 남자의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 어려서부터 유도와 공수도, 주짓수 등을 다양하게 수련한 몸은 짜임새 있는 자잘한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법 넓은 공간인 샤워 부스가 꽉 찰 만큼 남자의 몸은 컸다. 잘록한 허리와 상대적으로 작은 엉덩이 때문에 슈트를 입으면 날렵한 인상을 주는 터라 도복을 입거나 탈의하면 드러나는 본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겁을 먹거나 감탄했다.

짧은 머리에 거품을 낸 후 샤워기에 머리를 들이대자 거품들이 두꺼운 가슴의 도드라진 대흉근을 지나 배꼽 위까지 반으로 갈라져 요철을 이루는 복근을 타고 무성한 음모 아래 두툼한 고환에 모여 떨어졌다. 일부 다른 거품들은 말같이 잘 짜인 튼튼한 허벅지와 종아리를 핥듯 지나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남자의 몸은 마치 그 자체가 흉기같이 단단했으나 동시에 아름다웠다. 잔뜩 거품 낸 얼굴을 들어 올려 강한 수압의 샤워기 아래에 얼굴을 들이민다. 머리의 거품을 씻어내는 손가락은 유려하고 길었다. 대충 미끈한 거품기가 사라지자 높은 눈썹 산에 깊은 눈과 반듯한 이마와 연결된 뾰족한 콧날이 드러났다. 류태주는 얼굴의 물기를 대충 걷어내고 미리 준비한 쉐이빙 보울에 담은 크림을 브러시에 묻혀 입가와 턱에 충분히 발랐다.

“프러포즈할 건데 예쁘게 보여야지.”

내 방법을 과연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낮은 허밍이 울린다. 날카로운 칼날이 스치자 밤새 거뭇하게 자란 수염이 크림과 함께 깎여 나가서 매끈한 피부가 드러난다. 귀밑머리 아래를 정리하자 어젯밤 제 뺨을 쓰다듬던 작은 손이 떠오르는 동시에 물기에 젖은 긴 기둥에 피가 몰렸다.

“저런, 저런.”

제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짐승 같은 해면체에 혀를 차면서도 말투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감정이 담뿍 들어가 있었다.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이렇게 즐거운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처음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소녀, 집착을 느낀 상대를 홍콩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도 사실은 이 집착이 그리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쉽게 가질 수 있고 제 장난감 방에 넣어 두면 사그라지는 흥미처럼 그렇게 시들어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여은은 아니었다. 가져도, 가져도 모자랐고 그의 흥미를 돋웠다. 그녀는 늘 그의 뒤통수를 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를 버거워하면서도 감당하려 애쓰는 노력이 눈물이 날 만큼 가상하다. 류태주는 다른 날보다 신경 써서 면도했다. 그녀가 홀린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좋았다. 살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외모가 귀찮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진여은의 시선은 색다른 즐거움을 주었다. 말끔해진 얼굴을 거울로 확인한 그는 다시 거품을 한번 씻어내고 욕실을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딱딱한 인사 외에는 하지 않는 김문태가 인사말에 사족을 붙인다. 기분 좋은 허밍이 욕실 밖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좋지. 좋은 날이잖아. 우리 히메가 좋아할 걸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

웃음기를 띤 류태주의 말에 김문태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검은 마녀의 힐에 밟히지나 않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밟힐 거라고 예상하는 그의 말투는 제법 확신에 차 있었다.

“화내는 모습도 예쁘지.”

류태주는 여전히 미소를 띠며 제 수행원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아래를 가린 수건을 치워내고 준비된 옷을 하나씩 입었다. 김문태는 샤워 후인데도 불구하고 아랫배에 딱 달라붙는 사내의 굵은 기둥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을 눈치챈 태주는 씩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히메를 생각했더니 말이야. 아주 욕심 많은 녀석이라 아무리 빼도 진정이 안 돼.”

아마도 어제 여자를 재우고 와서 진탕 손장난을 쳤나 보다. 그래도 저 짐승이 혼몽한 임산부를 그 자리에서 취하지 않는 도덕성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의사에게서 이제 안정기에 들어서서 성관계가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번득이던 눈빛을 보고 김문태는 저 인간이 오늘 밤, 당장 여자를 겁탈하는 것은 아닐지 의심했다.

잔뜩 몸을 부풀린 아래를 보고서야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렇게 제 몸의 욕구를 무시할 수 있는 부분도 류태주를 더욱 짐승으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내는 모습이 예쁘지만 역시 무섭기도 하다고. 나도 자릴 보고 누워야지.”

“아, 아.”

그래도 보통 사람으로의 감각은 있나 본지, 검은 마녀가 무섭다는 주인의 말에 그는 짧게 동의했다.

“여자는?”

속옷을 입어 흉물스러운 물건을 감추고 짙은 회색 바지와 와이셔츠를 입자 짐승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모두가 아는 RUU의 도련님이자 해운 회사의 엘리트 전무의 모습이 나타났다. 과연 이 인간의 아이를 밴 검은 마녀는 양면의 날 같은 사내의 어떤 모습을 더 마음에 들어 할까를 생각하며 안쪽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보였다.

“모두 실토한 모습을 찍었습니다.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USB를 보며 입술을 올린 류태주는 느른한 태도로 커프스단추를 채웠다.

“내 신부가 판단하겠지.”

“프러포즈에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시는군요.”

“그럼. 다리에 매달려서라도 애원해야지.”

슈트 재킷을 걸치며 짐짓 심각하게 말하지만, 입가에는 장난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어젯밤 제 여자를 10년간 돌봐주던 도우미에게 보여줬던 포악한 살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나저나 그 여자 말입니다. 오산댁.”

“고성수의 아내, 김미도 말이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과대망상증 환자라니! 지금도 진여린은 자기 딸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무시무시하다는 듯 김문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의별 미친놈들이 판을 치는 조직 생활에서도 그런 치밀한 정신병자는 처음이었다. 자기 딸을 내놓으라고 거품을 물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진여린을 온전히 갖기 위해 진경백과 작당해서 진팔양 부부는 물론이고 제 남편인 고성수까지 제거하다니! 정말 꿈에 볼까 무섭습니다. 물론 먼저 제의한 쪽은 진경백이긴 하지만 그도 김미도가 자기 남편까지 죽일 줄은 몰랐죠.”

커프스단추를 마무리하던 류태주는 의외로 인간적인 면을 보이는 전 야쿠자 조직원에게 한쪽 눈썹을 올려 보였다.

“고성수의 음료수에 치사량의 환각제를 탔지. 김미도는 새로운 딸과의 사이에 남편도 방해꾼이 된다고 판단한 거야. 물론 그 환각제 성분은 매수당한 검시관에게 영원히 묻히게 됐지. 그 일을 한 것은 오산 그룹의 오 회장이고 말이야. 여러모로 잘됐지. 오진성을 좀 더 손봐 주고 싶었거든.”

“오진성이라면 RUU의 입김으로 계약을 눈앞에서 취소당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일로 일으킨 폭력 사건으로 집안에서 거의 내쫓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김문태의 질문에 그는 짧게 코웃음 쳤다.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밝히고 고백하는 순간을 빼앗아간 분풀이는 그걸로 한참 모자라지. 아예 폐인 정도는 만들어야 우리 히메가 만족하지 않겠어? 어릴 적 집안 모임에서 그놈이 괴롭힌 적도 있다던데.”

세상 그 무엇에도 관심 없던 주제에 뒤끝 하나는 찐한 상사였다. 더구나 그가 찍은 여자는 김문태가 보아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지독한 여자였다.

“여러모로 타이밍이 좋았습니다. 전무님께서 진경백에게 작업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마약에 쩔어 죽든지, 도박판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겁니다.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진경백이 없어진다면 김미도의 다음 표적은 분명히 진여은 씨가 되었을 겁니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마치 예고편같이 그 미친 여자는 여은에게 낙태를 권하며 의사 면허도 없는 인간을 소개해 주려고 했다.

“충격이 클 것 같은데, 좀 더 유한 방법을 쓰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제 수행원의 충고에 류태주는 코웃음을 치며 조끼를 입었다. 두툼한 저 가슴과 강조된 날렵한 허리선은 남자도 부러운 몸매였다.

“우리 히메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훌륭한 성향을 갖췄지.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약하고 관대해.”

김문태가 동의하지 못하다는 듯 눈썹을 올려도 류태주는 아랑곳없이 슈트 소매로 와이셔츠를 빼며 옷을 정리했다.

“진여린은 김미도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고 벌써 거리를 두고 있었어. 우리 히메를 봐. 그 여자가 어떤 짓을 하건 의심하는 법이 없어. 왜라고 생각해?”

이쪽 세계에 살짝이라도 발을 들인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은 듣게 되는 소문이 바로 조직의 유일무이한 여자 보스 검은 마녀일 것이다. 손속이 잔인하고 일말의 자비는 바랄 수도 없이 냉정한 여자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있는 이들에게 보이는 책임감과 애정에 사실은 무척 놀랐던 참이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의 단점을 인정할 수가 없는 거지. 그것을 완전히 깨부숴 주겠어.”

마지막으로 시계를 차는 남자의 얼굴은 그야말로 사악했다.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세요.”

“나 말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주지시켜야지.”

“방금 사람을 믿지 못하는 훌륭한 성향을 갖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보통 그냥 사람이 아니잖아.”

게다가 아이 아빠인걸. 그것도 모르냐는 한심한 눈빛을 받으며 김문태는 제 주인이 검은 마녀의 매서운 눈초리 아래에서 분명히 울며 매달릴 거라고 점쳤다.

“그분께서 너무 심하게 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당장 말을 바꾸는 수행원의 말을 들으며 류태주는 방을 나섰다.

□ ◆ □ 윤이아

주주 총회에 함께 참석하겠다는 동생의 고집을 말리지 못한 여은은 결국 세단에 나란히 앉았다.

“사고가 있기 한 달 전, 숙부가 집으로 왔을 때 나도 있었어. 똑똑히 기억이 나. 진도 금융을 달라고 한 거.”

찔끔찔끔 돈을 타가던 진경백이 뻔뻔스럽게 진도 금융을 달라고 한 자리에 진여린도 있었다.

“흥! 말도 안 되지. 감히 진도 금융을? 아버지의 명의였지만 실질적 경영인은 어머니였어. 시장 하나하나를 돌며 영업을 다녔었다고.”

진도 금융은 부모님의 애정과 열정이 담긴 회사였다.

“뻔뻔해도 유분수지. 받은 업소도 다 말아먹은 주제에 진도 금융을!”

화를 억누르는 언니를 보며 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기억나. 자정이었어. 그날, 부모님 오시면 간다고 여사님이 퇴근을 안 하고 있었거든. 울면서 나를 깨우는데 나는 무슨 일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그날 엄마, 아빠는 부부 동반 모임이었잖아. 엄마가 그 모임 아줌마들은 명품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아빠의 체면을 위해 가방을 샀다고 투덜거리셨어.”

결국 그 가방은 피범벅이 된 채 어머니의 유품이 되었다.

“고성수, 35세. 시영 냉동 회사 3개월 차 냉동 탑차 기사. 전과 없음. 조직에 들어간 적도 없는 평범한 남자. 빚도, 도박도 한 적 없는 정말 평범한 소시민.”

여은은 부모님을 떠올리며 침울해진 동생을 한번 보고 앞을 주시했다. 고성수를 조사하다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울분을 나타내듯 가녀린 턱선이 떨렸다.

“정말 이상한 건 뭔지 알아? 이상하리만큼 깨끗하단 말이야. 하다못해 남겨진 가족도, 하다못해 키우던 개새끼 한 마리 없었어.”

“누가 그 사람의 흔적을 지웠다는 거야? 그래서 더 알아내지 못한 거야?”

“그날 고성수는 6시에 퇴근했어. 그런데 퇴근한 사람이 왜 밤늦은 시간에 트럭을 끌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 도로를 질주했는지는 아무도 몰라. 게다가 그 냉동 탑차에는 내일 배송할 물건까지 가득 실려있어 경찰은 회사 물건을 빼돌리려다 과속으로 사고를 냈다고 종결했지. 당시 과실 여부가 명백한 CCTV와 차량 블랙박스에 냉동 회사 사장이 파손된 차량과 사망자에 대한 보험에 거품을 물고 노발대발하는 통에 그런 의문점은 아무도 제시하지 않았어. 그리고 얼마 후 회사는 없어졌지.”

“나는 어렸고.”

“나도 어렸어. 겨우 스무 살짜리가 뭘 알겠어. 진경백은 진도 금융과 진도 파까지 먹으려고 눈이 벌겋지. 너 하나 지키는 것도 나는 버거웠어.”

“하지만 언니는 다 지켰어. 정말 고마워. 정말 고생했어. 언니.”

여린은 언니의 왼팔을 가슴에 안았다.

“너도 고생 많았어. 여사님도 고생했고. 여사님께는 정말 고마운 게 많아. 덕분에 네가 이렇게 잘 자라 줬잖아.”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런데 여사님 말이야.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조금 이상한 말을 해서 나는 싫었던 적도 있었어. 그때는 사춘기라 더 예민하게 군 것도 있었지만.”

“네가?”

“응. 나한테 엄마라고 불러 보라고 해서 내가 화냈던 적도 있어.”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여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언니는 그때 조직이랑 은행 때문에 얼마나 바빴는데, 내가 그런 투정을 부려. 여사님이 혼자되기 전에 아이를 잃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어.”

여린은 제 팔을 안고 몸을 기댄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우리를 정말 딸처럼 돌봐줬지. 별일 없었으면 좋겠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오산댁의 아파트로 보낸 사람에게는 아직 소식이 없었다.

“별일 없을 거야, 언니. 걱정하지 말고. 오늘 몸조심해야 해?”

“응.”

차에서 내리자 여린은 다른 수행원들과 함께 다른 입구로 들어갔다. 사장으로서 앉을 자리가 달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기습에 대비해서 함께 있는 자리는 최대한 피하기로 한 것이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미리 나온 진도 금융 점장의 인사를 받고 준비된 좌석으로 향했다.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된 무대를 향해 극장식으로 된 좌석은 미리 온 사람들로 대부분 차 있었다. 물리적 충돌이 예상되었던지 가장 앞자리에는 경찰관들이 입회하고 있었다.

그 곁에서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명운 그룹 최 회장과 진경백을 본 여은은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공권력도 믿지 않았다. 어차피 진도 금융을 나눠 먹기 위해 시나리오를 짜뒀으리라. 이사 해임 등의 딴지를 거는 수작을 부릴 때는 바로 실력 행사로 들어갈 것이다. 여은이 들어서자 공기가 바뀜을 눈치챈 진경백이 뒤를 돌아보았다. 승리를 점치는 듯한 비열한 눈빛과 마주치자 저절로 뾰족한 턱이 들렸다.

‘절대로 빼앗기지 않아. 그리고 반드시 당신을 도운 배후를 찾아낼 거야.’

여은을 발견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머리를 기대어 귓속말을 시작했다. 그녀는 오만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천천히 걸어갔다. 오랜만에 신은 하이힐이라 임신으로 부은 발의 불편함을 참으며 푹신한 카펫을 천천히 밟았다. 그때 칼날같이 뾰족한 킬 힐이 멈춰 섰다.

“누구?”

창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모두 닫힌 암막 커튼을 일부러 걷은 듯 환한 빛을 등진 남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은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류태주.”

푸른 셔츠에 짙은 감색의 넥타이를 매고 어두운 회색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남자는 마치 슈트를 입기 위해 태어난 듯 완벽했다. 길게 뻗는 두 정강이를 지나 팽팽하게 땅기는 허벅지, 날렵한 허리선과 각을 이루는 어깨, 하지만 여은은 알고 있었다.

저 남자는 벗었을 때 더 거구로 보인다는 것을. 아름다운 선을 이루는 뺨이 어떤 촉감인지, 운동으로 다져진 두꺼운 목과 연결된 가슴의 근육이 얼마나 단단한지, 날렵한 라인을 그리는 저 복근이 얼마나 잔잔히 쪼개어졌는지를. 팽팽하게 땅기는 허벅지에 갈라진 근육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어젯밤도 자신을 찾아온 남자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장님?”

좌석으로 안내받던 여은이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자 앞서가던 점장이 소심하게 콧잔등의 안경을 위로 올렸다.

창가에 기대서 있던 남자가 서서히 걸어왔다. 바지에 두 손을 찌르고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은 남자는 장난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여은은 꿈에서 가려졌던 얼굴이 선연히 떠오르자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마치 가느다란 뒷굽 아래가 유리로 만들어진 듯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남자의 근사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뭐가 궁금하지?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거? 아니면…, 어젯밤에도 그 전 밤에도 만나서 사랑해 준 거?”

‘사랑’이라는 단어에 여은은 흠칫 몸을 떨었다. 떨어진 심장은 이미 제구실은 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제멋대로 나대는 심장과 함께 뇌도 움직여 쓸데없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해. 진여은”

“나도 처음이었어.”

“정말 음란하다니까.”

다정하지만 짓궂은 속삭임, 심장을 울리는 웃음소리, 뜨거운 입술, 위로가 되었던 넓은 가슴이 떠오르자 폐까지 뚝 떨어진 듯 호흡하기가 힘들었다. 어제도 저 커다란 손이 감쌌던 배가 갑자기 옥죄며 돌처럼 딱딱해져 여은은 마음속으로 아이를 달래며 겨우 숨을 토했다. 그러나 검은 마녀의 가면을 쓴 얼어붙은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류태주만이 검게 칠한 눈 안의 갈색 눈동자가 변하는 순간순간을 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여은은 버릇대로 얼굴을 보지 않았다. 턱은 들되 눈을 내리깔고 남자의 동그란 슈트 단추를 노려보았다.

“전자요. 여기에 RUU가 왜 온 거죠? 여기는 진도 금융 주주 총회랍니다. 류태주 씨.”

저 표정이었다. 류태주는 열다섯 살 이후로 그 어떤 존재도 눈에 들어오지 않게 한 여자의 새침한 자태에 입가를 느른히 풀었다.

“아, 아. 차명으로 매수한 지분이 있어서.”

심드렁하게 중얼거리는 남자의 말에 여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차명?”

갈색 눈동자가 신중하게 움직여 보란 듯이 웃고 있는 진경백에게 닿았다.

“이쪽 세계에서는 흔한 것 아닌가?”

류태주의 말에 자극받은 여은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불법적인 거래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말에 그녀는 차라리 이 순간이 꿈이길 바랐다.

“사장님 곧 시작할 시간입니다.”

조바심이 느껴지는 점장의 목소리는 안타깝게도 이것이 현실임을 이야기해 주었다.

“같이 가지.”

당연하다는 듯이 긴 팔을 뻗어 제 한쪽 어깨를 감싸는 단단한 손에 당장 몸이 굳었다. 노려보며 팔을 치우려는 그녀에게 류태주가 살짝 허리를 숙였다.

“구석구석 RUU와 진도 파 조직원들이 지키고 섰잖아? 여기서 내 손을 쳐내면 당장 쇠 파이프를 꺼낼걸?”

거부하는 몸짓을 하는 즉시 전쟁이라는 협박에 여은은 얼어붙었다.

“여기저기 호기심 어린 눈빛이 오고 있어. 다들 우리 관계를 궁금해하고 있군. 뭔가 있다는 듯 행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악당.”

그녀의 말에 기분 좋은 듯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맞아. 하지만 어쩌지? 수많은 조건을 들이댄 진여은에게 합격을 받아 버렸는데.”

역시 눈치채고 있었다.

“무슨 수작이야, 당신?”

“내 것을 찾으러 왔지. 긴장 풀어.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 아이에게 좋지 않아.”

“가증스럽게.”

기세 좋게 말을 뱉었지만 찾으러 왔다는 ‘내 것’에 온 신경이 가버린 여은은 본능적으로 제 배를 만졌다. 다행히도 아이는 괜찮다는 듯 톡톡 발로 차며 신호를 보내왔다. 심장은 떨어진 듯 두근거리고 온몸의 피가 빠진 듯 긴장되었지만, 신기하게도 배는 뭉치지 않았다. 아이는 이미 남자의 목소리에 익숙한 듯했다. 근 6개월간 찾아온 이 남자를 꿈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우습기만 하다.

“류태주와 진여은?”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던 거야?”

“설마.”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익숙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타인에 의한 적은 없었다. 여은은 눈에 힘을 주며 뾰족한 힐을 한 발자국씩 움직였다. 남자의 손이 닿은 어깨가 타는 듯 뜨겁다.

“어깨는 놓으시지.”

“단발머리도 섹시해. 당장 덮치고 싶을 만큼.”

자신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무도한 말만 지껄이는 남자를 보며 여은은 이를 으득 갈았다.

“사실은 선물을 준비했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흥! 차명으로 우리 지분을 사들였다면 분명히 진경백의 뒷배가 당신이란 말이잖아. 그따위 말장난은 집어치우고 꺼져.”

“반말도 섹시해. 마치 섹스할 때 같잖아.”

더는 남자의 말을 들어 줄 수 없었던 여은은 류태주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의 이름이 표시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진경백은 연신 불안한 눈빛으로 두 사람의 심상찮은 기류를 지켜보다 핸드폰을 꺼냈다. 급히 류태주로 알고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문자의 답도 물론 없었다. 서로를 알고 있는 듯한 저 둘의 태도가 이상하지만 별일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다시 핸드폰을 옷 안에 넣었다.

처음, RUU와 접촉한 것은 도박 빚에 쫓겨 마지막 담보였던 주점이 넘어갈 때였다. 자신을 김문태라고 소개한 남자는 진도 금융의 지분 매도를 요구했다. 당시에 헐값에 불과했던 돈의 열 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처음에는 형님만 없으면 당연히 저에게 올 줄 알았으나 생각보다 독한 진여은은 잘 해냈다.

그리고 퍼즐처럼 나누어진 지분 중에서 조카들 아이의 몫까지 있어야지만 완벽하게 소유하게 되도록 한 죽은 형의 교활한 술수를 깨달은 진경백은 차라리 목돈이 되는 편을 택했다. 그러자 류태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도 금융의 지분을 모아 주십시오. 직계가 가질 수 있는 최고치까지 매수 부탁드립니다.”

미끈한 얼굴 아래 지배자의 권위와 제왕적 리더십, 압도하는 포식자적인 잔악함을 두루 갖춘 사내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집안 또한 타고난 암흑세계의 강자다웠다. 그의 외가가 말로만 듣던 야쿠자였다. 야쿠자라니!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은 차라리 박살 내 없애 버리는 것이 나았다. 조카에게 빼앗지 못할 바에야 더 큰 세력을 가진 이가 차지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자까지 줬고, 말이지!’

오소희는 자기 업소에서 보지 못할 최상급이었다. 류태주와 어울려 다니다 받아먹는 떡고물에 취해 진도 금융의 지분을 모으는 류태주의 저의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부자들의 수집벽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지분을 가진 명운 파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구걸하듯 지분을 가져다 바쳤다.

차명이기는 하나 일단 제 명의로 되어 있으니 이런 긴급 주주 총회 소집도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류태주도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자신은 류태주에게 모든 지분을 팔지 않았다.

“그럼 긴급 주주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발언하실 분은….”

“이사들을 다시 선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급한 태도로 사회자의 말을 끊은 진경백이 말을 하자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신임 이사진들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거부하겠습니다.”

진경백의 들뜬 목소리를 가볍게 누른 것은 다름 아닌 진여은이었다. 두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잘 모르시나 본데 이사의 해임안을 결의할 수 있는 사람은 33% 이상의 지분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기서는 사장인 저밖에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으하하! 잘 모르나 본데. 내 지분이 그 33%야.”

느긋하던 여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럴 리가.”

“내가 분명히 사 모은 것은 30%지 하지만 원래 가지고 있는 지분도 있었다고. 크하하!”

의기양양한 진경백의 말이 이어지자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그럼, 진여은 사장과 같은 지분 아니야?”

“공동 대표로 가는 건가?”

그런 사람들의 말소리는 여은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진경백을 노려보던 시선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짙은 와인빛의 넥타이를 맨 남자에게 닿았다. 류태주는 당장 레이저라도 쏠 듯 노려보는 여은의 시선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천천히 일어섰다.

“진경백 씨의 발언은 잘못되었으니 정정해 드리지요.”

“엇! 류태주….”

자신을 도와줄 줄 알았던 류태주의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진경백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몸을 일으킨 류태주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여은에게 눈꼬리를 살짝 접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RUU의 류태주입니다.”

다시 한번 장내가 술렁였다. RUU의 류태주. 딱히 조직이나 직함을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명함인 인물이었다. 야쿠자의 외손자, RUU의 유일한 후계자로 최근 8년간 조직을 불리면서도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이 오히려 해운 사업에 박차를 가한 남자였다. 최근 홍콩에 RUU 해운의 지사를 만든 이유도 조직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자자한 그가 뜬금없이 지역의 작은 금융 회사의 주주 총회 자리에 앉아 있으니 이상할 만했다.

“세상에! 저 남자가 RUU의 류태주! 저 남자였구나!”

단지 참석해서 보기만 하겠다고 언니와 약속했기에 사람들과 떨어진 벽 쪽에 앉아 있던 진여린은 홍콩에서 만난 남자의 정체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동시에 기억해냈다. 늘 언니 뒤를 쫓아다니지 않으면 부모님과 함께 있었기에 RUU의 류태주라고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것을 똑똑히 들은 기억이 났다.

“이 사탕, 언니에게 꼭 전해 줘.”

한번은 사탕이 하나뿐이라 자신이 홀랑 먹어 버렸고, 그다음 해에 주었던 초콜릿 사탕도 전해 주지 않았다. 어린 자신이 봐도 잘생긴 저 오빠에게 언니를 빼앗기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본 것 같더니.”

“류태주를 알아?”

여린은 어느새 제 옆으로 온 최지승을 보고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사람의 접근이라면 철저히 마크했겠으나 명운 그룹의 최지승은 진도 파에게 있어 프리패스 같은 존재였다.

“어릴 때 집안 모임에 왔었잖아요.”

“그걸 기억해?”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여린을 보며 최지승은 빙긋 웃었다.

“재미있게 돌아가네. 언니랑 무슨 관계?”

“보면 알겠죠.”

“흐음….”

자매간의 대단한 사랑을 아는 최지승은 죽어도 저 입으로 진여은에 관한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쉽게 포기했다.

“진경백 님께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여기서 바로잡는 점을 용서하십시오. 이것은 섣부른 판단으로 일이 더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진도 금융의 지분을 모으도록 부탁드린 것은 다름 아닌 저입니다.”

“아니! RUU가?”

“RUU가 왜?”

류태주의 말에 놀란 것은 명운의 최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장내의 소란을 정리한 류태주는 말을 이어 갔다.

“이것은 RUU와 관련이 없음을 먼저 밝힙니다. 진도 금융은 제가 개인적인 용도로 모았고, 차명이라고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진경백 님은 중간에서 다리만 놓으셨을 뿐, 모든 입금은 제 이름, 제 명의로 했습니다. 단지, 그 이름이 일본 계좌라 혼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 그런….”

당황한 진경백이 벌떡 일어나 류태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한 남자의 목소리는 느긋했고 표정에서도 자신을 속이려 했다는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다. 그제야 진경백은 뭔가 일이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저는 제 아이에게 모든 지분을 넘길 것이며, 그 아이는….”

류태주는 양쪽 입꼬리를 모두 올리며 분명한 어조로 마무리했다.

“진여은 씨의 배 속에 있습니다.”

“아니!”

“뭐라고?”

진경백의 술수를 어느 정도 눈치챘고 그를 부추겨 진도 금융의 지분을 더 쪼개려 계획했던 최 회장도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하하! 세상에. 류태주의 아이라고?”

이곳에서 웃는 인간은 최지승 하나뿐이었다. 진여린 또한 류태주의 폭탄 발언에 놀라 멍해졌던 시선을 다시 바로잡아 다급히 언니를 찾았다. 다행히 진여은은 큰 동요 없이 류태주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나를 속였어! 어떻게…!”

분통을 터트리며 자리를 떠나려는 진경백의 팔을 다가온 사내들이 잡았다.

“뭐, 뭐야! 이거 놔!”

“어떻게, 라고 하셨죠?”

류태주는 스크린 앞에 미리 준비하고 서 있는 김문태를 향해 턱짓하고 서서히 부드러운 카펫을 밟아 나갔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히메. 결혼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변명을 받아 줄 텐가?”

“무슨 수작이야?”

제 앞에 선 류태주를 노려보며 진여은이 이를 악물었다. 이미 몸은 홍콩에서 질릴 만큼 나누었고 무의식이라고 하지만 꿈에서 마음을 모두 보여준 사내였다. 여은의 흔들리는 마음을 모두 안다는 듯 그는 눈썹을 측은하게 내리며 눈꼬리를 접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도 탄식도 아닌 오묘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여은은 알 만한 사람들 앞에서 이런 낯부끄러운 짓을 하는 남자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았다.

“사랑해. 진여은. 나와 결혼해 줬으면 좋겠어. 열다섯 살에 당신을 본 이후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

“그게 무슨….”

천하의 진여은도 낯뜨거움에 더는 들을 수 없어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화가 나기도 하고 기가 막히지만 무조건 싫지만은 않던 가슴은 충격적인 다음 말로 차갑게 얼어붙었다.

“우선 결혼 선물을 봐주지 않겠어? 당신 부모님을 죽인 범인과 사라진 배후들.”

“류태주! 아!”

몸을 벌떡 일으키던 여은은 갑자기 당긴 배에 허리를 숙였다.

“저런, 히메. 아직 놀라면 안 돼.”

그는 능숙하게 여은의 허리를 잡아 제 팔에 감고 몸을 기대게 했다.

“이거….”

놓으라고 하려고 했던 여은은 화면 가득 나온 익숙한 인영에 몸을 굳혔다.

“여사님?”

여린 또한 스크린에 나타난 여자의 모습에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떴다. 줄곧 여유 있던 태도로 관망하던 최지승 또한 숨죽인 채 스크린에 클로즈업된 여자의 떨리는 입술을 주시했다. 맞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부은 얼굴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애써 정리한 티가 역력했지만, 여자의 눈빛은 차분했다.

“여사님께 무슨 짓을 한 거야?”

“쉿! 들어 봐. 찾고 있었잖아. 고성수의 와이프.”

여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는 것을 보며 류태주는 그녀를 마치 인형처럼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여은은 화면 안에 잡힌 오산댁의 얼굴을 보고 받은 충격으로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누, 누구라고?”

여은은 제 정수리와 뺨에 닿는 남자의 숨결도, 제 등을 단단히 감싸는 단단한 가슴도 느낄 새도 없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대답은 화면 안의 오산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이름은 김미도입니다. 나이는 52세. 고성수의 아내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김미도라고 밝힌 여자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듯 건조하기만 했다.

“아니야. 여사님 이름은 김소영…. 나이도 60세….”

“그건 예전에 술집 주방에서 일했을 때 알게 된 여자가 무연고로 죽자 그 여자의 신분증을 가지고 신분 세탁했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여은의 귓가에 태주는 조용히 말해 주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검은 슈트 아래 티 나지 않게 숨어 있는 볼록한 배를 쓰다듬었다. 여은은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충격으로 뭉쳤던 배가 풀리는 것을 느끼자 그냥 두었다. 화면 속, 여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처음에 나는 진경백의 사주를 받아 그 집을 감시하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아니야! 나는 몰라! 처음 보는 여자야!”

진경백이 외쳤지만 그 말을 듣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심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진경백이 어떻게 증거들을 그토록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는지, 그것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여린은 언니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고성수의 아내가 제집에 있었다는 사실에 오싹하는 소름이 돋아 두 팔로 제 몸을 안았다.

“괜찮아?”

자신을 살피는 최지승의 말에 여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최지승은 여린을 보다가 이내 자신의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최 회장은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으로 연신 땀을 닦고 있었다. 화면의 여자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처음에는 진팔양에 대한 정보만 주다가 나는 진여린이 낳자마자 죽었던 딸아이같이 느껴졌습니다. 진여린의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진경백과 모의해서 진팔양 부부를 죽게 했습니다. 하지만 린아! 나는…!”

거기서 화면은 끊어졌다. 장내가 다시 크게 술렁였다.

“아니야! 거짓말! 거짓말이야! 누구야! 누가…! 윽!”

큰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벗어나려는 진경백은 단단히 사람들에게 잡혔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를 잡은 것이 RUU의 사람이 아니라 경찰관이라는 사실이었다.

“진경백, 당신을 8년 전 진팔양 부부 살인 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물리적 충돌을 예상해서 입회한 경찰은 사실, 미리 제보를 받아 위장한 형사들이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진여은! 너지! 네가 진도 금융을 빼앗길 것 같으니까 류태주와 짜고 나를…! 으아악!”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는 진경백을 두고 사람들이 혀를 찼다.

“역시나! 역시였어. 금수만도 못한 놈! 제 형이 얼마나 저를 돌봐줬는데.”

“그러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에잇! 핏줄이 어디 달리 핏줄인가? 은혜도 모르는 놈!”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은 끌려 나가는 진경백의 추태를 지켜보며 하나같이 욕을 했다. 일부는 큰소리로 욕을 했지만 몇몇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긴급 주주 총회는 이제 안건이 없으니 마치도록 하지.”

갑자기 생긴 일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진도 금융의 점장과 사회자에게 류태주가 말했다. 그는 제 허벅지 위에 앉아 꺼진 화면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여자의 몸을 껴안았다. 아이를 가졌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작고 가벼울 수 있을까? 금방이라도 새털같이 날아갈 것만 같아 류태주는 가슴이 불안함과 함께 시큰거림을 느꼈다. 역시 이런 감정을 주는 것은 이 여자밖에 없다.

“역시 우리 히메는 강하다니까. 사실은 엄청나게 화를 내거나 펑펑 울 거라고 생각했거든.”

화면만 응시한 채 미동도 없는 여은에게 속삭일 때 카펫을 밟고 오는 베이지색 펌프스 구두코가 보였다.

“언니.”

진여린의 작은 속삭임에 고개를 들어 드러난 여은의 얼굴을 본 태주는 깜짝 놀랐다. 진여은은 소리도 없이 울고 있었다. 조금의 움직임조차 없이 그저 눈에서 나오는 물을 흘려보낼 뿐인 듯 의지를 상실한 눈물은 아이라인과 검은 섀도와 섞여 검은 물이 되어 흰 얼굴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니. 언니.”

여린은 류태주의 다리에 앉아 있는 채 망연한 표정으로 우는 언니를 가슴에 안았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물이 번져 갔다.

“언니. 괜찮아. 범인을 찾았잖아. 그 사람, 그 사람이 나쁜 거야. 언니가 상처받으면 안 돼.”

그제야 어깨를 떠는 여은을 보며 류태주는 자신의 오판을 깨달았다. 부모님이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후에 그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잡은 김미도를 밀어내면 그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존재의 배신에 대한 상실감이나 아픔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단지 그 드높은 자존심만 깨부순다면 자신에게 마음을 열어 주리라 생각했던 제 생각이 너무나 짧았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류태주는 완전히 무너진 여자를 안아 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안일했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책망으로 그는 제 품 안에 있는 여자를 만질 수조차 없었다.

“류태주 씨. 고마워요. 부모님의 원수를 제대로 알게 해주셔서요. 언니는 데리고 갈게요.”

그는 제 품 안에서 여자를 앗아 가는 순간에도 잡지 못했다. 진여은에 비해서 한없이 약하게만 보였던 동생, 진여린은 생각보다 강단 있고 강한 여자였다. 끝까지 행패를 부리는 진경백을 제압하기 위해 나갔던 이윤우와 하준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저씨. 언니 좀 들어 주세요.”

진여린은 곁에 최지승이 있음에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철저히 그녀만의 울타리를 쳐놓은 사람이었다. 이윤우가 겨우 서 있는 여은을 안아 들자 류태주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손을 들어 제지하는 진여린 때문에 그는 더 다가갈 수 없었다.

“거기까지요. 다음은 언니가 괜찮아지면 하세요. 단, 언니가 보고 싶어 한다면요.”

류태주는 사라지는 진여은을 그저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 ◆ □ 윤이아

차라락 걷어지는 커튼과 함께 쏟아지는 햇살이 기분 좋았다. 여은은 한쪽 팔을 올려 빛으로 인해 부신 한쪽 눈을 가리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언니, 잘 잤어? 더 자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 딸기 배고프니까 밥 먹으려면 일어나야 해.”

어느새 또 태명을 바꾼 동생의 말에 여은은 피식 웃었다.

“오늘은 햇살이 좋구나.”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져 오자 진눈깨비나 눈이 오는 날이 이어져 이런 햇살을 받는 것이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여린은 한결 편안해진 언니의 얼굴을 보며 마음 깊이 안심했다. 원래 임신으로 조직의 일은 서서히 정리하고 있던 여은은 부모님을 죽게 한 배후가 밝혀지자 내정했던 이에게 일을 맡기고 지금은 진도 금융의 업무만 보고 있었다.

“푹 잤어? 컨디션은 어때?”

여상하게 물어봤지만, 여린은 혹여나 언니가 감추는 뭔가가 있는 것은 아닌지 속속들이 찾고 있었다. 김소영이라는 이름으로 오산댁으로 감쪽같이 자매를 속인 김미도의 정체를 알고 난 후, 깊은 충격을 받은 여은은 한동안 심하게 앓았다.

아이까지 가진 몸이라 따로 약을 쓸 수도 없어 동생인 여린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악에 받쳐 살아왔지만,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할 만큼 진여은은 마음이 보드라운 심성의 소유자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어디에도 의지하지 못하고 오롯이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언니는 진즉부터 무너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병까지….’

류태주로부터 여은이 몽유병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미듯 아팠다. 언니라는 큰 산 같은 존재가 있어, 아프면 아프다고 찡얼대고 마음껏 울고, 언제든 의지할 수 있었던 자신과는 달랐다. 밤에 가끔 자는 모습을 살펴 주라는 류태주의 말에 반신반의했던 여린은 한밤중에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언니를 발견하고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앉아 한 남자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럴 때면 안아 주고 등을 쓰다듬어 보세요. 그러면 다시 잠이 들 겁니다.”

류태주의 말대로 그렇게 잠들기를 몇 주, 조직의 사람들과 연관된 일이 없어지자 여은의 몽유병은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오늘 네 이름은 딸기인가 봐. 네가 딸기가 먹고 싶다며 발을 찰 때부터 알아봤지.”

하루, 하루 부풀어 오르는 배를 쓰다듬으며 웃는 여은의 모습은 완연한 어머니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여린은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보며 곱게 눈을 휘었다. 아이는 외롭고 힘든 진여은에게 완벽한 구원이었다.

“7개월 정도면 이제 성별을 가르쳐 줄 때가 되지 않았나? 병원이 왜 그리 빡빡해?”

여은은 동생의 애정 어린 투덜거림에 웃었다.

“무척이나 예쁜 아이일 거야.”

간밤의 꿈에 나타난 나비를 떠올리며 여은은 다시 제 배를 쓰다듬었다.

“또 왔네.”

창가에서 커튼을 정리하던 여린은 오늘도 어김없이 도착한 꽃바구니를 든 배달 기사를 보며 한숨 쉬었다. 매일 아침의 꽃 배달은 7개월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밤 창가를 보며 서 있는 류태주의 모습은 최근 들어 보이는 옵션이었다. 사실 그가 언제부터 저렇게 서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이제는 알 만한 조직의 사람들이 다 모인 주주 총회에서 프러포즈를 했다는 것을 말해 주듯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구애하고 있었다. 모든 면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진여린은 형부로서 류태주에게 좋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해결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사고에 대한 배후를 밝히고 태어날 아이에게 벌써 지분 양도 계약서를 작성하여 진도 금융의 경영권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던 홍콩에서 진여은이 첫눈에 반한 상대가 아닌가! 여린은 언니가 ‘2초의 기적’ 운운하며 임신을 위해 남자를 사냥하는 사실을 포장했지만, 사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루프톱 테라스에서 걸어오는 남자를 보던 언니의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설렘, 두근거림, 기대, 그리고 희망. 그것은 자신을 숨기고 차가운 가면을 쓰고 살아야 했던 진여은의 민낯이었다. 여린은 류태주가 숨어 있던 진여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준수 아저씨에게 버리라고 말하고 올….”

7개월째 밖에 버려지는 꽃다발과 꽃바구니에 그것을 주우러 오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였다. 오늘도 눈길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버려질 꽃들에 긴 한숨을 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여린을 잡은 것은 바로 진여은이었다.

“꽃…. 가져와.”

“응?”

여은은 잘못 들었나 제 귀를 의심하는 동생에게 설핏 웃어 보이며 몸을 일으켰다.

“가져와. 보고 싶어. 한겨울이 되니 식물 같은 게 보고 싶네.”

“어…. 알았어. 언니 서늘할지도 모르니까 카디건 입고 내려와. 알았지?”

마치 제가 보호자라도 된다는 듯 옷차림까지 잔소리하며 방문을 여는 동생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다. 꽃을 받음으로써 변화되는 류태주와의 관계를 아마도 짐작하는 것이리라. 여린의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오늘은 펑펑 눈이 오네. 내일 아침은 눈이 제법 쌓이겠어.”

이른 저녁을 먹고 모과차를 마시던 여은은 동생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일은 아저씨들과 눈사람이나 만들까? 아니다. 눈사람은 벌써 저기에 있네.”

들으라는 듯 말하며 자신의 눈치를 슬쩍 보는 동생에게 시선을 한번 보낸 여은은 벽시계를 보았다. 시계의 작은 침이 1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동생이 일부러 열어 놓은 것이 분명한 커튼 밖으로 굵은 눈송이가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것을 보며 탁자에 컵을 내려놓았다.

“잠시 밖에 나갔다가 올게.”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여은을 향해 여린이 당장 반색했다.

“코트는 입고 나가야지. 잠시만.”

여린은 거실 입구에 서 있는 의류 관리기에서 코트를 꺼내서 파자마에 카디건을 걸친 여은에게 입혀 주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갈게.”

절대로 방해하지 않겠다는 동생의 말에 여은은 피식 웃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은은 재빨리 2층 계단을 밟는 여린을 한번 보고 우산을 꺼내 들었다. 여은은 수면 양말을 신은 발을 굽이 없는 부츠 안에 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우산을 펴기 전에 올려다본 하늘은 내리는 커다란 눈송이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없어 그리 춥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우산을 펴들었다. 대문을 열자 가로등 아래에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보였다.

아직 모든 것을 용서하지 못했다. 진경백을 들쑤셔 자신을 수세로 몰아넣은 것도 분했지만 오산댁의 배신은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녀는 진여은에게 어머니의 유산이었고 지켜야 하는 유지였다. 저에게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제 수하조차 믿지 않았던 여은이 동생 다음으로 믿고 의지했던 이였다. 적어도 그는 조그만 언질이라도 줬어야 했다. 빌어먹을 그 꿈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꿈!

여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를 찾아 헤맸다. 현실에서는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어둠이 찾아오면 여은은 늘 류태주를 부르며 어두운 허공을 더듬었다. 그러나 늘 찾기도 전에 안아 주던 따뜻한 품도, 커다란 손도 없었다. 그것이 깨어나는 아침에 그녀를 더욱 절망하게 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똑같은 밤이었다. 류태주를 부르며 허공을 더듬던 그녀는 저를 안고 우는 여린의 품에서 눈을 떴다. 왜인지 자신은 제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언니는 몽유병이 있었어. 류태주 씨가 밤에 자는 언니의 방을 꼭 들여다보라고 했어. 이렇게 안아 주면 다시 잘 거라고 말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언니.”

그제야 여은은 홍콩에서부터 그가 늘 자신을 다독여 온 것을 알았다. 오산댁의 영상을 보며 받은 충격은 제 깨어진 자존심이 아니라 그 비정함에 자신도 저렇게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였음을 알았다.

그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 몽유병을 끝까지 모른 척하며 그저 안아 주고 다독여 준 그에게 그것이 그만의 사랑의 방식임을 인정했다.

그는 잔인한 포식자, 사냥꾼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가 쳐놓은 덫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이 남자가 꼭 필요하다. 발걸음을 옮기자 제법 쌓이기 시작한 눈밭에 발자국이 찍혔다. 어느새 제 마음 밭에 류태주는 발자국을 새긴 것이다.

매일 9시가 되면 집 앞에 서 있는 남자의 넓은 어깨 위로 제법 많은 눈이 쌓여 있었다. 바람은 없어도 영하의 날씨였다. 얼어붙은 남자의 날카로운 코가 살짝 붉었다. 대문 소리에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남자는 커다란 우산을 씌워 주는 여자에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숨통이 트인 듯 깊은 한숨을 내쉬는 남자의 입으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깊은 눈매에 서렸던 야생성은 간데없이 눈썹을 내린 남자의 얼굴은 더없이 양순해 보였다. 마치 주인에게 길든 짐승처럼.

“담배라도 피우지 그랬어요.”

기다리는 시간이 무료하지 않았냐는 여자의 반문을 받으며 류태주는 코트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서 저에게 다가온 여자의 뺨에 손을 대었다. 자기 것이라는 듯 당당했으나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다정스럽다.

뺨에 닿는 굵은 손가락에서는 옅은 스킨 향만 났다. 7개월 전 홍콩에서 맡았던 그 향기였다. 여은의 입매가 부드럽게 풀렸다.

“담배 끊은 지 좀 되었어.”

홍콩의 호텔에서 그가 흡연하는 모습을 봤던 여은은 고개를 들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질문을 느낀 태주는 낙담이 섞인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빠잖아.”

손 시리겠다. 하고 중얼거리며 우산을 가져가 잡는 남자를 한동안 올려다본 여은은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쉬며 두 팔을 뒤로 뻗어 그의 뺨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할 말은 많지만 우선….”

입술이 마주쳤다. 처음 와닿은 느낌은 겨울 냄새를 머금은 차가운 감촉, 그다음은 온기가 전염된 듯 따뜻한 점막이 서로 부딪쳤다. 곧 닫힌 대문 밖에서 혼자 나뒹구는 우산은 김문태의 손에 의해 접어졌다.

“오야붕께서 좋아하시겠군.”

누구도 길들이지 못한 아름다운 짐승은 작은 여자에게 철저히 조련되어 우리 속으로 들어갔다.

□ ◆ □ 윤이아

쿵!

벽으로 밀어붙여진 남자의 등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눈에 젖은 코트는 어디에 벗어 던졌는지도 모른다. 방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헐벗은 남녀는 허락된 시간이 다한 듯 절박하게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흐음. 하아!”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는 듯 방향을 바뀔 때마다 가쁜 숨을 토하며 여은은 열렬히 제 입 안을 점령한 뜨거운 살덩어리를 마주 감았다.

“달아. 달아서 미칠 것 같아. 히메.”

“내가 흣! 미친 것이, 하아! 틀림없어. 그따위 호칭이 그리웠다니. 하앙!”

짧게 토해내는 숨을 뱉을 때마다 끊어서 말하던 여은은 당하게 빨아당기는 혀뿌리에 짙은 신음을 내질렀다.

“나야말로. 10년 이상을 기다린 것보다 당신을 만질 수 없는 이 한 달이 형벌 같았어. 아니, 형벌이었지.”

입 안의 점막 하나하나를 핥아대며 거칠게 으르렁대지만 벌어진 파자마 상의를 아래로 끌어 내리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비록 그 단추들은 죄다 뜯어냈지만 말이다.

“당신을 아프게 한 죄는 평생을 다해 갚을 거야. 제발 갚게 해줘. 여은.”

“조용히 해요. 입 다물고 가슴이나 빨아 줘. 당신이 눈 맞고 서 있는 것을 봤을 때부터 이 모양이었다고.”

검은 포도송이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젖꼭지를 내미는 여자의 음란한 자태에 류태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띠를 풀어 속옷과 함께 바지를 내렸다. 속옷의 밴드에 튕긴 긴 기둥이 허공을 가르다 아랫배에 닿자 벌써 구멍에서 흐른 쿠퍼액이 공중에 튀었다. 얼마나 흘렸는지 바닥에 떨어진 속옷의 앞부분의 색깔은 물기로 젖어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내 좆은 당신 방을 올려다볼 때부터 이런 상태였어.”

“짐승.”

“내 발정기는 당신이야.”

여은은 순종을 맹세하듯 부드러운 입술로 목을 타고 내려가 가슴을 더듬는 입술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발정기는 평생이겠네. 하지만 나는 짐승이 좋아.”

그녀의 말에 대답하듯 그는 정말 목구멍에서 으르렁 소리를 내며 젖을 갈취했다. 부드럽게 양쪽 젖가슴을 쥐면서 번갈아 가며 젖꼭지를 빨아들이는 감각에 허리가 녹아드는 것 같았다. 허벅지로 흐르는 애액의 질펀한 느낌에 여은은 다리를 벌렸다.

“나도 견딜 수 없었어.”

성감이 차오르면 사라지는 이성에 그녀는 늘 말을 놓았다.

“꼭지란 꼭지는 다 가려워. 여기, 여기 당겨 줘. 그때처럼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빨아 줘.”

부른 배를 당당히 내밀며 벌어진 다리 사이의 발기한 클리토리스로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뱀같이 유연한 혀가 각각의 젖꼭지를 재빨리 핥고 아래로 향했다. 목적지가 분명한 와중에도 중간 정착지인 부른 배에 인사를 잊지 않는다. 사랑스럽다는 듯 임신 선이 뻗어 있는 하얀 배에 뺨을 갖다 대자 아이가 환영하듯 물결치며 인사했다.

“안녕. 아가. 지금부터는 엄마와 아빠의 즐거운 시간이니 쉬고 있자.”

호칭으로 묶어지는 강력한 유대감, 허무하게 끝나지 않는 유기적인 관계의 실존, 그리고 무엇보다 강하게 사로잡는 서로에 대한 열망은 그들을 무한한 엑스터시로 이끌었다.

“새침하고 거만한 모습도 아름답지만….”

가장 부른 배의 선단을 먹어 치우듯 과장되게 입을 벌린 그를 향해 여은은 낮게 웃었다. 나체의 모습으로 발기할 수 있는 모든 부분을 세운 두 남녀가 벌이는 음탕한 광경에서 들리는 천진한 웃음소리가 이질적이면서도 이곳이 두 사람만의 낙원임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렇게 배부른 진여은이 아름다울 줄이야, 정말 놀라워.”

여은은 잠자리에서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류태주를 잘 알았다. 혼몽한 중에는 자장가 삼아 들어 줄 만했지만 지금 원하는 일을 자꾸 미루는 저 입이 얄미워, 그녀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당신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어.”

부푼 배의 아랫부분에 자잘한 입맞춤을 뿌리며 내려오던 류태주는 도전적으로 말하는 진여은의 손길에 시선을 주었다. 그것은 마치 훈련이 잘된 개처럼 주인의 손길만 바라보는 충직한 눈길이라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짐승의 눈길을 홀리는 작은 손은 천천히 가슴을 쓰다듬다가 완만한 허리로 내려가 손바닥을 쫙 뻗어 사타구니를 훑고 양쪽 검지로 살짝 갈라진 음순을 활짝 벌렸다.

“아…!”

류태주의 탄성을 자아낸 속살은 마치 꿀을 잔뜩 흘리는 꽃의 수술같이 어서 자신을 먹어 달라며 수컷을 유혹했다. 호르몬의 변화로 한 달 전보다 조금 더 색이 짙어진 그곳은 완전히 익은 과육처럼 단내가 진동했다.

서서히 몸을 낮춰 가던 태주는 완전히 두 무릎을 바닥에 대고 신에게 경배하듯 꿇어앉아 작고 포동포동한 두 엉덩이를 잡고 얼굴을 그 다리 사이에 완전히 묻었다.

“흑!”

뜨겁고 축축한 살덩어리가 완전히 발기한 돌기를 감싸고 빨아당기는 아찔한 감각에 순간 휘청거렸던 몸을 바로잡은 여은은 악착같이 음순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더 원했다. 더 강렬한 관능과 쾌락을 원했다.

마치 단 사탕이라도 먹는 듯 젖은 물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제 아래를 미친 듯이 빨아대는 류태주를 내려다보며 여은은 진정한 지배자로서의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동시에 왜 사람들이 그렇게 힘을 바라며 상대를 꿇리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지배는 폭력이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과 보속이었다. 그것을 세상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나는 사랑을 원해.”

헐떡이며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가운데서도 여은은 똑바른 발음으로 분명히 요구했다. 그녀의 말에 다리 사이에서 잠시 입을 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반듯한 이마 위로 단정히 올렸던 머리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고, 그 날렵한 코와 아름다운 입술과 남자다운 곡선을 그리는 턱은 온통 음란한 체액투성이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러워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다시 젖은 구멍으로 물이 토해진다.

“사랑해. 진여은. 영원히 당신만 사랑할 거야.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내 심장을 뜯어서라도 당신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여은은 음순을 벌렸던 손을 거두고 그의 이마로 내려온 머리를 위로 쓸어 주었다. 그는 그 손길만으로도 느끼는지 배에 달라붙은 굵은 기둥에서 물을 싸댔다.

“나는 매일 의심하고 매일 확인할 거야. 그 심장…, 매일 자랄 수 있도록 부탁해.”

“기꺼이.”

여은은 작은 발을 그의 허벅지 위로 올려 방치된 채 울고 있는 긴 기둥을 문질렀다.

“윽! 당신은 정말 악녀야.”

살짝 찡그린 류태주의 얼굴을 보는 여은의 얼굴에 만족이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말이 일단은 합격을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진여은은 방심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단지 아이를 갖기 위한 목적만으로 누구와도 잘 수 있는 여자인 것이다.

“당신은 악당이잖아.”

그 조합이 마음에 든다는 듯 다시 한번 낮게 웃은 여자는 허리를 숙여 남자의 목에 팔을 감았다.

“침대로 가요. 당신 것, 나도 빨고 싶어.”

홍콩에서 잠시도 걸어 다니지 않았던 것처럼 여은은 태주에게 안겨 침대로 갔다. 그리고 그를 눕히고 거꾸로 엎드려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펄떡일 듯 꺼덕거리는 검붉은 해면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빈말이라도 절대 괜찮게 생겼다고 말하지 못할 만큼 흉측하게 크고 핏줄이 불거진 해면체는 주먹만 한 삿갓 부분의 구멍을 뻐끔대며 물을 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눈을 맞으며 자신에게 약하게 보이려 눈썹을 측은하게 내린 남자의 모습과 겹쳐 보이자 충분히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앙! 안 돼! 아!”

그러나 쥐고 있던 고삐는 언제나 도중에 놓치기 마련인 법. 아래를 빨고 혀로 구멍을 마음껏 쑤시고 물을 흡입하는 남자에게 홀려 자신은 몇 번 그것을 입에 대어 보지도 못하고 방향만 빙글 돌려져 아래를 꿰이고 말았다.

여은은 그간 꿈속이라고 생각했던 그때 자신도 모르게 개발당한 여러 스팟을 동시에 자극받는 극상의 쾌감에 사로잡혀 울며 소리쳤다. 태주는 앞으로 쓰러져 배가 눌리지 않도록 양손을 깍지 낀 상태로 아래에서 허리를 들썩였다.

“으아앙! 앙대! 아! 또 나온단 말이야!”

얼마나 극대화된 성감인지 여은은 7개월 만에 하는 삽입에 힘겨워하면서도 그 자체만으로도 느껴 버려 아래로 맑은 물을 흘려보냈다. 태주가 어찌나 강한 힘으로 아래에서 허리를 튕기는지 그 반동으로 기둥을 물고 쑥 빠지고 들어갈 때마다 결합한 부분에서 철퍽이며 난잡한 물이 튀었다. 아래는 여은이 몇 번이나 사정한 물과 정액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착하지. 한 번만 더 느끼자.”

류태주는 다정하게 달래며 다시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위에서 부른 배와 풍만한 젖이 덜렁이는 모습이 참으로 음란해서 더 커질 것 같지 않던 기둥은 몸짓을 더욱 부풀렸다. 여은은 제 안에서 더욱 커지는 성기에 기함하며 고개를 저었다. 공중에 나부끼는 눈물과 긴 머리카락이 정말이지 어린 시절 동화에서 봤던 긴 머리 히메같이 아름다웠다.

“하아앙! 싫어! 그만!”

울며 거부해 보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자극당한 스팟에 감전된 듯 전기가 허리를 짜르르 울렸다. 태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려꽂히는 구멍 안의 위쪽 내벽이 굵은 귀두에 긁히도록 했다.

“하앙! 악!”

다시 깊이 자극받은 스팟에 허벅지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태주는 느른히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내가 마무리하도록 할게.”

자신이 몇 번이나 절정에 우는 동안 그는 첫 사정 이후 아직 사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여은은 몸을 굳혔다.

“태주 씨. 나 힘들어.”

“곧 끝나.”

거짓말! 이라고 외치려던 입술을 막혀서 여은은 곧 침대에 옆으로 눕혀졌다. 분명히 임산부에게 허용되는 자세를 공부했다고밖에 볼 수 없는 그 체위는 부른 배가 편안하도록 옆으로 누운 후 측위였다. 여은은 태주가 안겨 준 베개에 몸을 기대고 한쪽 다리가 들어 올려진 채 아래를 점령당했다. 뒤에서 목을 핥고 가슴을 쥐며 움직이던 그는 몸을 일으켜 아예 종아리를 제 어깨에 걸고 허리를 털어댔다. 몸을 세울 때는 훤히 드러난 밀부로 자신들의 결합부를 감상하고 몸을 숙일 때는 입술과 가슴을 빨면서 그녀를 즐겼다.

“하응! 그만, 아! 이 나쁜 놈! 하앙!”

울며 욕했지만, 그가 제 교성에 고통이 있는지 면밀히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같이 날뛰면서도 깊은 삽입은 피하며 자신의 스팟만 노리며 자지러지는 얼굴을 홀린 듯이 보고 있는 것이다.

자궁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깊은 삽입은 피하니 절륜함을 자랑하는 이 짐승의 사정이 더 늦어지는 것이다.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여은은 팔을 뻗어 그의 단단한 엉덩이를 깊이 끌어당기는 동시에 아래에 힘을 꽉 주어 그의 기둥을 잘라먹을 듯 죄었다.

“윽!”

아니나 다를까, 류태주의 입에서 깊은 탄성이 터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몸을 숙여 옆으로 누운 채로 흔들리는 젖꼭지를 입에 물고 몸을 세웠다.

“아! 안 돼! 앙!”

이로 씹는 동시에 강하게 당겨지자 아래의 자극과 함께 또 다른 절정의 폭풍 속으로 여은은 휩쓸려 가버렸다.

“하앙!”

느끼는 와중에 내벽으로 밀려드는 짙은 정액이 뱉어지자 허리를 타고 올라가 뇌를 녹이는 강렬한 절정감에 여은은 길게 소리 지르며 울부짖었다.

“아, 아. 히메. 여은. 정말 사랑해.”

태주는 흐느끼는 여은의 몸을 바로 눕혀 체중이 실리지 않게 상체를 띄워 깊이 키스했다. 아래는 여전히 연결된 채였다.

“짐승. 오랜만인데 이렇게 심하게 하다니! 흐음….”

투덜거리다가 여은은 맞춰 오는 진득한 입맞춤에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사정으로 살짝 줄어든 성기를 몇 번 움직이다가 정말 다시 커질 것 같은 느낌에 태주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허리를 뒤로 물렸다.

“흐읏!”

긴 기둥이 역으로 훑는 감각에 여은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다시 빨아들이듯 조여 오는 감각을 즐기며 그는 완전히 몸을 뺐다. 그의 크기만큼 커졌던 구멍이 파르르 떨더니 다시 제 크기로 서서히 줄어드는 것을 보며 태주는 입맛을 다셨다. 다시 차오르는 갈증을 억지로 삼키며 그는 완전히 침대에 널브러진 여체를 안아 욕실로 갔다.

여은은 씻고 난 나른한 감각에 취해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커다란 몸과 더불어 이런 일은 해본 것 같지도 않은 남자는 의외로 날렵한 동작으로 자신을 씻기고 체액으로 더러워진 시트를 능숙하게 갈았다.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여은.”

다정하게 배를 쓸어 주며 잔잔한 키스를 관자놀이와 뺨에 받는 느낌이 좋아 여은은 여운을 느끼듯 눈을 감았다.

“아직 전부 용서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고맙다고 말하겠어요.”

진여은이 인정할 만큼 류태주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했다. 그는 검찰에까지 압력을 가해 진경백과 김미도의 여죄를 밝혀냈고 그들이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가족 모임까지 하며 절친하게 지냈던 명운의 최 회장과 대명, 오신의 암묵적 침묵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거기에 오신 그룹의 오 회장은 당시 고성수의 인적 사항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고 냉동 회사의 사장이 다른 업체로 전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기까지 해 공범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었다. 진팔양의 죽음에 대해 최 회장의 참여도는 거의 없었으나 그렇다고 감정적인 앙금까지 지워 주지는 못했다.

“명운은 어떻게 해줄까?”

그녀의 말만 떨어진다면 언제든 쳐낼 준비되어 있다는 듯 류태주는 물었다.

“진도는 이제 명운과 끝장이에요. 더는 함께할 수 없죠. 먼저 명운 해운의 자금부터 끊어내야겠죠. 그들은 이제 자신들을 위해 세탁해 줄 다른 업체를 찾아야 할 거예요.”

“좋아. 현명한 판단이야.”

그는 여은의 긴 머리를 한쪽으로 정리해 주며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진경백과 김미도는 둘 다 직접 살인이 아니라 최고형까지는 어려울 것 같아. 괜찮겠어?”

어깨를 쓰다듬는 류태주의 말에 여은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안 괜찮죠. 어떻게 괜찮을 수 있어요? 배신은 배신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죠. 교도소에서 편안하게 있을 것을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린다고요.”

생각만 해도 분한 듯 이를 으득 갈던 여은은 잠깐의 새도 참지 못하고 제 몸을 지분거리는 남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당신, 정말 RUU 조직까지 맡고 있어요?”

호기심과 함께 조금의 기대와 동시에 느껴지는 경계심에 그는 웃으며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듯 아직도 열기가 가지시지 않은 보드라운 뺨에 제 뺨을 비볐다.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내가 RUU 파를 움직이는 이유는 고성수에 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서였어. 외조부님이야 내가 이쪽으로 진출해서 당신의 조직까지 건사하길 바라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나랑 적성이 안 맞는 길이야.”

여은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정보들에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날 위해서 RUU 파를 맡았다는 거예요? 정보를 얻으려면 조직을 굴려야 하니까?”

‘게다가 뭐,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살면서 이렇게 우스운 말을 처음 들은 것 같아, 여은은 실제로 헛웃음을 흘렸다. 류태주야말로 왕자님처럼 달콤한 외모를 뒤집어쓴 악당 중의 악당이요, 그 시커먼 속이 얼마나 까만지 알 수 없을 만큼 음흉한 인간이 아닌가?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카리스마는 절대로 노력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태생부터 타고난 어둠의 제왕적 기질을 타고난 인간이었다.

“이선재를 따라 명운의 최 회장 집에서 열린 모임에 갔다가 새침데기 어린 소녀를 보고 반해 버렸지. 그런데 그 소녀는 허리 위로는 보려고 하지도 않지, 졸졸 따라다니던 그 여동생은 전해 달라는 사탕이나 초콜릿을 홀라당 자기가 먹어 버리지. 둘 다 아주 철벽이라 내가 어린 나이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상상하지도 못할 거야.”

“그때가 언제였는데요?”

“열다섯 살이었나?”

“내가 열 살 때잖아요! 변태!”

말을 듣자마자 질겁하며 몸을 떼려는 여은의 어깨와 허리에 팔을 칭칭 감은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변태라고 오해받을지언정 이제는 그녀의 자존심을 건들 생각이 전혀 없는 그는 장례식장에서 자해하는 그녀를 보았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철저히 진여은을 위한 종으로 살기 위해 다시 태어난 참이었다.

“다섯 살 차이가 어때서 그래? 당신이 속인 나이는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홍콩에서 이예은과는 무려 열 살 차이였다고.”

“다 컸을 때랑 어릴 때랑 같아요? 열 살짜리 계집아이에게 반하는 중학생이 어디 있어요?”

“예쁜데 나이가 어디 있어! 눈이 부신데 어떻게 안 반할 수가 있겠어?”

변태로 몰리는 것이 정말 억울한지 정색하며 화를 내는 류태주를 보며 여은은 나중에 팔불출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조건에 팔불출, 주책바가지도 넣을걸 잘못했어, 정말.”

입을 비죽이며 하는 혼잣말을 들은 류태주가 여은을 뒤로 밀어 침대에 눕혔다. 그녀는 갑자기 바뀐 자세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구의 남자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새로운 파자마까지 입혀 줬지만, 류태주는 아래에 속옷만 입은 반라의 상태였다. 설마 다시 그런 분위기가 되는 것은 아닐지 당황하고 있는데 그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당신의 그 조건 말인데.”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말을 이어 갔다.

“외모, 시력, 대머리, 여자관계, 집안 병력과 성병. 또 뭐지?”

어느새 홍콩에서 자신이 제시한 조건을 거의 다 알아맞힌 남자에게 여은은 눈꼬리를 접어 보였다.

“엘리트일 것, 혹시나 아이가 아버지에 관해 묻는다면 좀 멋지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아이는 엄마 머리를 닮는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밥통이라면 똑똑한 아이는 기대할 수 없으니까.”

“역시나 철두철미한 여자라니까. 그러면 나는 모든 조건에 딱 맞은 그야말로 진여은의 완벽한 남자가 아닌가? 내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어 주는 거지?”

그제야 여은은 그가 프러포즈에 대한 답을 종용함을 깨달았다. 그녀는 살며시 옆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야 설령 대머리 유전자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가 끼워 주는 반지를 받을 테지만 그냥 순순히 대답하기는 왠지 억울했다. 그래서 여은은 그녀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그가 가진 가장 악조건을 말했다.

“가장 큰 조건에서 걸려서 안 돼요. 바로 조폭이면 안 될 것.”

여은은 활짝 웃으며 손가락을 올려 그의 날카로운 콧날을 눌렀다.

“어때요? 이건 당신도 어쩔 수 없죠? 나 때문에 고성수를 추적하느라 조직에 몸담은 건 가상하지만 조건에서 아주 큰 결격 사유가 된다고요.”

류태주의 난감한 표정을 기대하며 한껏 놀리는 재미에 빠졌던 여은은 크게 웃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야. 나야! 나야말로 진여은에게 가장 완벽한 남자라고. 교도소에 있는 그 인간들의 목을 당신에게 바치고 나는 조직에서 완전히 빠지겠어. 대신 RUU 그룹으로 명운과 대명, 오신의 인간들에게 제대로 복수해 주지.”

류태주의 시원스러운 말에 여은은 그저 멍할 수밖에 없었다. RUU 조직은 그가 말하는 만큼 간단하게 남에게 인계될 만큼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엄청난 자본을 가진 그것에 우두머리를 잘못 세우면 자칫하다가는 내분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엄청난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조직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역시 명운과 대명, 오신의 인간들에게 복수해 주겠다는 말은 그녀의 마음을 녹일 대로 녹이는 조건이다.

‘아! 어떻게 이 남자 정말 너무 마음에 드네!’

그래도 예전의 새침한 성격은 버릴 수 없었던 여은은 애써 상기된 표정을 감추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책임감이 없는 것 아닌가요? 그래도 조직원에 대한 의리가 있지.”

“의리? 하하하!”

그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보드라운 뺨에 연거푸 키스했다.

“왜 이래요! 저리 가요.”

여은이 귀찮다는 듯 휘두르는 팔을 피해 그는 뺨과 머리와 입술을 가리지 않고 키스했다. 결국 백기를 든 건 체력이 다한 그녀였다.

“정말 귀여워. 이쪽 세계에 아직도 그런 게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 그래도 조직에서 벌어들이는 이익이 얼마나 될 건데. 그걸 정말 포기하겠다고요?”

“돈?”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류태주를 보고서야 여은은 그가 타고난 도련님이란 것을 상기하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RUU 파는 내가 맡았다기보다 아버지와의 의리로 내 말을 들어준 것뿐이니까. 표면적으로 류진규의 아들이 뭔가를 하고 있으니 그렇게 소문이 났을 뿐이야. 아버지는 조직에 이름만 올렸을 뿐이지 사석에서는 술친구나 다름이 없어. 나는 대신 그들의 사업 확장을 조금 도와줬을 뿐이지.”

여은은 그가 단순하게 말하고 있지만 조금 도와줬다던 사업이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조직을 통틀어도 가질 수 없는 수익을 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알겠지?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완벽한 남자인지.”

그녀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류태주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는 이름조차 몰랐을 그때 요트장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그녀에게 완벽했다. 자신을 위해 전혀 다른 세상인 조직에 들어가고 노력해서 얻은 결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버리며 제 복수를 위해서라면 일말의 자비도 보여주지 않는 잔인함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 완벽해요. 류태주 씨. 당신과 결혼해 주겠어요. 하지만 명심해요.”

그는 환하게 웃으며 키스했다. 여은은 깊이 휘감는 진득한 키스에 헐떡이며 마주 혀를 감았다. 달콤한 감각이 다시 다리 사이에서 짜릿한 열기를 내뿜었다.

“알아. 매일 의심하고 매일 확인하기. 매일, 매 순간 확인시켜 주겠어.”

여은은 혀뿌리를 얽어 강하게 빨아당기는 달콤함에 젖어 낮은 신음을 뱉었다. 그러다가 파자마 단추를 여는 동시에 바지 속으로 들어오는 손길에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또…, 흐음… 또 하게요?”

“응. 안 돼?”

그녀가 거부하면 당장이라도 상처받을 것처럼 눈썹을 내리는 모습에 저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은은 거부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남자가 싫지 않았다. 자극에 약한 귀에 혀를 넣어 빨자 당장에 앓는 소리가 난다.

“조금…. 조금만….”

“응…. 조금만.”

지금은 길든 짐승처럼 양순하지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남자다. 여은은 절대로 사랑한다는 말은 해주지 않겠다며 자존심을 세웠다. 그러나 그런 계산도 곧 그들의 닿는 감각에 깨끗이 지워지고 말았다.

방은 곧 삐걱대는 침대 소리와 함께 약한 신음과 울먹이는 교성으로 가득 찼다. 긴 길을 걸어갈 두 사람을 응원하듯이 함박눈은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마침>•ܫ•윤이아 직작 공금 갠소 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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