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박 마담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예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사장을 맞이했다. 언젠가부터 킬 힐을 벗고 단화를 신기 시작한 사장은 마음에서도 킬 힐의 칼날 같은 날카로움을 걷어낸 듯 부드러운 인상을 주었다.
위로 치켜올린 아이라인이나 섬뜩한 검은 아이섀도의 눈화장은 여전하지만 조금 넉넉해진 슈트 때문일까? 어떤 부분이 바뀌었는지 정확히 찾아낼 수는 없지만 비굴함에 절어 전방위로 움직이는 그녀의 예민한 촉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사장이 요즘 꽤 기분이 좋다는걸!
“응? 오소희가 나갔어요?”
장부를 들추며 숫자를 보는 눈은 매섭지만, 말투는 심드렁했다. 종업원 하나의 거취 문제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 여자를 기억하는 것은 단지 한 가지 때문이었다.
“류태주가 아쉬워하겠어.”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어낸 속마음에 아차! 하는 생각도 하기 전에 박 마담이 눈을 깜박이며 웃었다.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하는 위치이긴 하지만 늘 이렇게 과한 애교를 보이는 그녀가 부담스러운 여은은 살짝 몸을 뒤로 빼며 무심한 표정으로 장부에 시선을 두었다.
“뭘요?”
“류태주 씨가 지명까지 했었는데, 글쎄 함께 온 손님과 눈이 맞았지 뭐예요.”
“지명?”
뒤의 말은 다 잘라 먹고 당장에 미간을 찌푸리는 사장에게 박 마담은 간사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러게요. 걔가 마음에 들었는지 지명까지 했는데 진경백 그 인간과 눈이 맞을 줄이야!”
“누구? 진경백?”
순간 와락 구겨진 사장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진경백과의 관계를 떠올린 박 마담의 얼굴에 난처함이 서렸다. 이 업계에서 오래된 인간이라면 진경백의 악명은 유명했다.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덤벼들지만 손대는 족족 망하는 마이너스의 손. 게다가 자기 뒤를 봐주던 형이 죽자 생질들을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제 업소에 넣으려고 했다는 소문의 인간쓰레기였다. 실제로 그 소유의 업소는 성매매가 주업인 악덕 포주였다.
“진경백이 여길 왔었다고? 류태주와 함께?”
여은은 진도 금융의 지분을 대거 확보한 숙부가 거들먹거리며 올 거라고 예상했으나 의외로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이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류태주라니? 여은은 그의 곁에서 화사하게 웃던 화려한 외모의 여자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매일 집으로 배달되는 꽃다발을 떠올렸다. 누가 보냈는지도 모를 이름 없는 꽃다발은 어제도 대문밖에 초라하게 버려졌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진경백과 눈이 맞았다? 류태주를 두고? 왜?”
잠깐이지만 유리 안의 여자가 류태주를 얼마나 눈으로 핥아대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먹고 싶어 탐욕스러운 눈길을 질척하게 날리던 그 여자가 왜, 진경백이란 말인가?
“그…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날 류태주 씨가 먼저 나가고 두 사람이 함께 나가는 모양이 2차를 가는 것 같긴 했죠. 그러고 며칠부터는 무단결근을 하더니 연락 두절이에요.”
“당겨 쓴 가불은 없나요?”
“없어요. 제가 가불은 절대로 해주지 않는답니다. 이 바닥 년들 성향은 제가 제일 잘 알죠. 특히 걔는 주급도 아니고 일당으로 달라고 해서 그렇게 주고 있었어요. 돈이 그렇게나 필요한 애가 여기를 뜬다는 건 한몫 단단히 잡았다는 건데. 설마, 진경백?”
박 마담도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물론 50대 초반의 나이치고 진경백이 빠지는 인물은 아니지만, 눈에 띄게 흑심을 품고 있던 류태주와 차이가 너무 크지 않는가!
“하기야 자기가 류태주 씨 같은 도련님을 어떻게 잡겠어요? 걔도 현실을 깨달은 거죠. 호호홍!”
박 마담은 서늘하게 노려보는 눈빛에 급히 입을 닫았다.
“류태주와 진경백….”
“자야지, 자꾸 이렇게 일어나면 안 돼.”
여은은 갑자기 간밤의 꿈의 한 자락이 떠올라 미간을 찌푸렸다. 언젠가부터 등장한 얼굴 없는 남자는 어젯밤에도 나타났다. 며칠간 수면 부족으로 피곤했던 몸이 개운해진 이유였다. 꿈에 타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은 늘 같았기에 얼굴 없는 남자의 등장이 색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남자는 꿈에서조차 자신을 재웠다. 자기 싫다며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자신을 품에 안고 다독여 주던 손길에 정말 여은은 꿈에서 잠을 잤다. 류태주를 생각하는데 왜 꿈이 생각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여자 다시 오면 받아 주지 말아요.”
여은은 자신을 바라보던 승리에 찬 도전적인 눈빛을 떠올리며 장부를 탁, 소리 내 덮었다. 그때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여은은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나갔다가 들어온 이윤우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스쳤다.
“보스, 진경백이 왔습니다. 아마도 사장님이 오신 걸 알고 온 듯합니다.”
장례식장에서 겨우 열다섯 살인 여린을 끌고 가려 했던 주제에 숙부는 뻔뻔한 낯짝으로 진도 금융으로 찾아와 돈을 요구했었다. 진경백의 얼굴조차 보기 싫었던 여은은 그때마다 수하들을 시켜 흠씬 패주었다. 설마 숙부인 자신에게 손을 댈 거라고 생각은 못 했었는지 그는 이를 갈며 간 이후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미친개에게 약발이 떨어졌나 보군.”
‘아가, 이건 너를 지키기 위해서야. 내가 험한 말을 하거나, 나쁜 것을 볼 때면 너는 안정한 방에 들어가 있으렴.’
여은은 배 속의 아이에게 마음속으로 이야기하며 마음의 방을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방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귀여운 분홍색 문이 열리더니 그 안으로 아이가 들어갔다.
“너는 엄마니까.”
드문드문 끊어졌던 꿈의 한마디가 떠올라 여은을 전율케 했다.
‘그래, 나는 엄마니까.’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배 속부터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가슴 안쪽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 ◆ □ 윤이아
김문태는 골목 어귀에 주차하며 백미러로 제 상관을 살폈다.
“2층에 불이 꺼졌다고 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슈트 안주머니를 뒤적이던 손길이 멈칫하자 김문태는 제 담배를 꺼냈다.
“아니. 끊는 중이야.”
하루 한 갑을 피우던 골초의 금연 선언에 김문태는 눈썹을 올렸다.
“담배 냄새를 싫어하더라고. 임부에게 좋지 않으니 이 기회에 끊어야지.”
“아, 아. 그렇죠.”
생각보다 변덕이 심한 제 상사의 말을 그리 귀담아듣지 않았다. 하지만 진여은에 대한 집착을 아는 그는 어쩌면 정말 금연에 성공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그는 담배를 거둬들였다.
“그런데 정말 괜찮습니까? 창문은 열려 있는 것 같습니다만, 너무 위험한 것 아닙니까?”
“안타깝지만 우리 히메가 몽유병이 있어서 말이지.”
“몽유병이요?”
홍콩에서 함께하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평생 몰랐을 일이었다.
“지독하기로 소문난 검은 마녀가 몽유병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눈물 나게 약한 여자야.”
김문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제 상사의 말에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검은 마녀에 대한 소문은 괴기스러울 만큼 살벌했다. 먼저 공격하지는 않지만 제 것을 넘보는 이에겐 조금의 자비도 없이 박살을 내는 여자였다. 아무리 제 수하였던 이라도 돈으로 장난치다 걸리면 검은 슈트 아래로 보이는 칼 같은 그 킬 힐을 가차 없이 휘둘렀다.
확인되지 않는 소문으로는 흡혈을 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끔찍한 말도 떠돌았다. 진여은에 대해 알면 알수록 끔찍함이 쌓이는 데 반해 세상 모든 여자가 탐내는 이 잘생긴 상사는 마치 품 안의 꽃처럼 애틋하게만 보니 환장할 노릇이다.
“하긴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고 조직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아직 일반인이었던 진여은이 어떻게 진도 파의 거친 사내들을 무릎 꿇렸는지 알고 있었다. 깨진 병으로 제 팔뚝을 찍어 내리는 짓은 제아무리 야쿠자라고 해도 쉽게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을 겨우 스무 살짜리 여자가 했다는 것은 원래 본성이 지독한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김문태는 입바른 말로 제 상사에게 동조해 주었다.
“경계경보는 차단해 두었으나 조심하십시오.”
밤이면 자매만이 남는 주택의 경계 수위는 높았다. 특히나 작은 산책로와 연결된 뒤뜰은 살벌한 철조망까지 쳐놓은 데다 높은 담 위엔 센서까지 달아 놓아 작은 요새를 방불케 했다. 그곳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당당히 선언한 상사의 말에 김문태는 경비업체를 해킹해야 했다. 신호등 조작과 함께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저 성격은 지금도 존경하는 오야붕을 닮은 터였지만 그것이 악명을 떨치는 검은 마녀만을 향한 것에 그는 쓴 입맛을 다셨다.
“응. 한 시간 후에 대기해.”
차 문을 열던 류태주는 그리도 오매불망인 여자에게 더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느냐고 눈으로 묻는 비서에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아직 임신 초기라 위험하다잖아. 더 있다가는 정말 덮쳐 버릴 것 같아서 말이지.”
문을 닫는 동시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제 상사는 보안 카메라가 없는 산책로 쪽으로 가서 날렵한 동작으로 철조망을 뛰어넘을 것이다. 186cm의 키에 80kg의 건장한 체격이었지만 유도와 공수도, 주짓수에 능한 남자는 사냥감을 쫓아가는 맹수와 같이 유연하고 재빨랐다.
“진짜 악당.”
벌써 여자의 창을 넘고 있을 제 상사를 떠올리며 김문태는 중얼거렸다. 핏줄이야 어떻든 부유한 본가와 외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도련님은 타고난 악당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가 사랑하는 여자의 약점인 몽유병을 이용해서 제 욕심을 채우는 것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을 리가 없다. 그러나 부족함 없이 자라 온 저 사내가 과연 제 마음이 사랑인 것은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검은 마녀가 불쌍해지는 순간이군.”
“내가 정말 악당일지도….”
가볍게 창을 넘은 류태주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멍한 눈으로 방 안을 서성이는 여자를 향해 진득한 미소를 보냈다. 진여은의 몽유병을 알고서 안타깝다고 말했으나 사실, 그는 여은의 그 병이야말로 제가 파고들 수 있는 부분임을 알고 쾌재를 불렀었다.
“그래서 당신이 조폭 핏줄을 싫어하는 것이겠지만.”
모든 것을 이용해서 여자를 소유할 작정인 그에게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이 병이야말로 진정 기꺼운 것이었다.
“오늘은 왜 방을 서성이는 거야? 힘든 일이라도 있었어?”
홍콩에서 돌아온 그가 바로 찾은 사람은 정신과 의사였다. 몽유병은 호르몬의 변화나 스트레스로 인하여 일어나는 수면 장애였다. 진여은은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헤쳐 나가야 할 현실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어디에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서 앓았을 것이다.
그녀의 울타리 안에 있는 여동생은 지켜야 할 존재였지 의지처는 되지 못했다. 주로 앉아 있다가 다시 기절하듯 뒤로 넘어가던 패턴과는 다르게 멍한 눈으로 서성이는 그녀를 보자 류태주는 낮에 들은 보고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진경백이 왔어요.”
멍하게 중얼거리는 그 작은 입에서 나온 이름에 류태주는 사악하게 웃었다. 여동생을 제외하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핏줄인 여자의 숙부였다. 다시 없을 그 인간쓰레기를 자극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진도를 먹겠다고 했어요. 진도 금융을 장악하고 그다음은 진도 파를 자신이 가지겠다고.”
“진도 파는 그 인간에게 줘도 되잖아? 당신은 조폭을 싫어하잖아.”
자신도 거부할 만큼. 뾰족하게 올라오는 심술을 누르며 그는 진여은의 진심을 유도했다. 비열하다고 해도 상관없다. 상상외로 단단한 그 벽을 허물기엔 차라리 이런 무의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안 돼요.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야. 진도 금융을 우리 린이에게 줘야 해.”
“그렇군. 진도 금융을 그렇게나 필사적으로 지킨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군.”
그녀의 생존 욕구는 오로지 하나뿐인 제 피붙이를 향한 희생의 결과였다. 그 헌신의 화살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솟아오른 어두운 질투를 감추며 여리디여린 어깨를 끌어당겼다. 태주는 꿈속으로 여길 이 행동에도 몸을 굳히는 여자의 딱딱한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긴장을 풀어야지. 아이에게 좋지 않아.”
그 한마디에 눈이 녹듯 사라지는 긴장감에 류태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절대로 안 받아들이면서 제 아이는 이렇듯 쉽게 그녀의 울타리 안으로 넣어 버린다.
“무서워요. 다시 찾아오면 어떡하죠?”
정말 두려운 듯 부르르 떠는 작은 몸을 부드럽게 보듬어 안으며 향긋한 정수리에 입술을 대었다. 이렇듯 생각하는 자체만으로도 몸을 떨면서 기재된 보고서에는 그녀가 얼마나 당당하게 제 숙부를 내쫓았는지 기술되어 있었다. 토씨 하나도 빼지 말라고 당부한 그 보고서에는 ‘망할’, ‘개 패듯 맞아야!’, ‘더러운 면상’ 등등의 자극적인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모두 제 숙부를 향해 이 작고 예쁜 입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 망할 숙부가 RUU를 등에 업었어요. 망할 개자식 류태주.”
그는 욕설과 함께 제 이름이 거론되자 나지막이 웃었다.
“RUU가 싫은 거야, 아니면 류태주가 싫은 거야?”
“둘 다. 류태주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진경백의 뒤를 봐주지 않을 거예요. 다른 목적이 있겠지.”
확실히 그녀는 저에게 먹음직스러운 여자를 던져 주자 덥석 미끼를 문, 제 숙부보다 똑똑했다.
“오소희. 그 여자 싫어.”
난데없이 나온 여자의 이름에 류태주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자신을 유혹하며 가당찮게 진여은에게 이를 세우는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진경백에게 던져 주었다. 신분 상승에 대한 야망으로 똘똘 뭉친 여자는 류태주가 다리를 놓아준 서른 살 나이 차의 남자에게 기꺼이 제 다리를 벌렸다.
아무리 끼를 부려도 요지부동인 류태주보다 사장 직함을 가진 미혼의 늙은 남자를 함락하기가 더 쉽다고 본 것이다. 거기엔 그가 진여은의 숙부라고 밝힌 것도 한몫을 차지했다. 감히 오소희가 진여은에게 경쟁심을 품은 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류태주의 눈에 그녀의 그림자도 밟지 못할 여자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여은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모를 일이다.
“왜?”
“그 인간에게 달라붙어 있어요. 정말 싫어.”
자신에게 이를 갈면서도 무의식적인 소유욕을 드러내는 여자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심장이 간질거리는 동시에 저미듯 아픈 고통은 어쩐 일인지?
“심장이 아픈 것 같아.”
사실은 더 아래 좆이 더 아프지만. 그가 짐짓 아픈 듯 중얼거리자 마치 위로하듯 가슴에 닿은 뺨을 비비적거린다. 검은 마녀로 알려진 여자는 사실, 이렇게 꿈에서 만난 사내의 고통에도 반응할 만큼 마음이 약한 존재다.
“당신의 보호를 받으려면 이렇게 약해져야 하는 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동생이나 겨우 올챙이 모양의 이 생명체처럼?”
정말 그렇다면, 그녀를 위해 태산같이 쌓아 온 이 커리어가 그야말로 무용지물인 셈이다.
“내 아이야.”
고집스러움이 느껴지는 중얼거림에 류태주는 한숨지었다.
“그 아이 지켜 줄게.”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그 말이 연약하게 느껴졌을까? 류태주는 제 품에서 꼼지락거리며 들어 올린 두 손이 얼굴에 닿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리러고는 마치 그 말을 칭찬하듯 혹은 격려라도 하는 듯 두 손으로 잡은 얼굴을 아래로 당겨 입을 맞추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부드럽게 안쪽 점막을 스치듯 떨어진 가벼운 입맞춤에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남자의 이성이 와르르 흘러내린다. 어린 시절 얼굴 위로는 쳐다보지도 않아 그를 애태우던 새침데기 소녀는 자신의 정체를 알자마자 치를 떨며 내치더니 이렇게 정신이 없는 혼몽한 상황에서도 마음에 드는 조건을 걸어야만 제 몸을 허락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떤 비굴한 포지션을 취하더라도 반드시 가지고 싶은 것을.
“그 여자는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진경백이 그 어린 여자의 야망을 모를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우습게도 그것을 간단히 짓밟아 당장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빚을 지워 자신의 성매매 업소에 집어넣었다. 듣자 하니 아직도 자기에게 생긴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는 진경백에게 매일 달려들어 맞고 있다고 했다. 곧 진경백의 몰락과 함께 해방될 테지만 그 정도라면 이 판을 뜨고 싶을 만큼 충분한 징벌이 될 것이다.
“사실 아이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피임 시술했다는 어설픈 거짓말에 마음껏 방사했던 자신은 파렴치한 인간이 틀림없다.
“하긴 설사 피임했더라도 임신이 될 만큼 상당한 양의 정액을 당신 구멍에 싸질렀지만 말이야.”
노골적인 자신의 말에 작은 어깨가 파드득 떨리더니 입술이 거두어진다. 그는 촉촉한 점막의 따뜻함을 놓칠세라 다시 재빠르게 혀로 그 안을 휘저었다. 현재 비렘 수면 단계인 여은은 반사 행동을 전혀 하지 못했으므로 그저 제 입 안을 휘젓는 살덩어리에 휘둘려질 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낳은 아이는 보고 싶어. 궁금해.”
혀를 감는 행동에도 반응은 없었지만 싫어하는 기색이 없자 그는 더욱 제 무게를 실어 입술을 탐했다. 자꾸만 아래로 실리는 무게에 여은이 비틀거리자 류태주는 망설임 없이 작은 몸을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그는 제 몸에 비벼지는 부드러운 가슴이 뭉개지는 감촉을 즐기며 작은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어서 안정기가 왔으면 좋겠어.”
그는 여은이 진료 후 당연하다는 듯 들어가서 의사에게 아이의 아버지로 들을 권리를 당당히 요구했다. 물론 의사에게 입막음으로 한 짓은 불법적인 협박과 달콤한 현금이었다. 아직은 유산의 위험이 크다는 의사에 말에 가장 먼저 든 걱정은 몽유병이었다.
자기 울타리 안의 인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꽉 찬 제 여자는 병마저 은밀히 앓았다. 아마 진단받은 과로 또한 비렘 수면으로 인한 누적된 피로 때문일 것이다. 임신을 알았으니 유도 대련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본인도 모르는 몽유병이 문제였다.
“푹 자야지.”
침대에 눕히자 멍한 눈동자에도 선명한 거부가 서린다.
“자고 싶지 않아요.”
마치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여자가 귀엽기 그지없다. 그는 이럴 때 여자를 재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도 만족시켜 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키스해 줄게.”
처음의 망설임은 간데없이 여자는 입을 벌렸다. 그 안의 작은 혀는 벌써 그 안으로 들어올 뜨거운 살덩어리를 맞을 준비를 하듯 아랫니에 살짝 대어진 상태였다. 입술이 닿자 여은의 눈이 감겼다. 깊이 혀뿌리를 당겨 빨아당기자 앓은 듯 신음 속에 달콤함이 가득하다. 가슴을 만져달라는 듯 비벼대는 감촉에 안달이 나는 건 바로 자신이다.
“욕심쟁이 히메. 아직은 안 돼. 나중에 실컷 빨아 줄 테니까. 어서 새끼나 안전히 키우자고.”
막무가내로 여자를 헤집고 싶은 욕망을 참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이제 막 섹스의 단맛을 알아 버린 참이었다. 10대부터 마음에 품은 여자를 겨우 손에 넣게 되었는데 겨우 일주일 맛을 보고 다시 금욕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그로서는 매달려 오는 여체에 미칠 지경이었다.
“의사의 입에서 안정기라는 말이 떨어지면 이 나풀거리는 잠옷 따위 없을 줄 알아. 당장에 다리를 벌리고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백보지를 혀로 쑤셔 줄 테니까 각오하라고. 작은 공알이 터질 때까지 씹어 줄 거야. 그 분홍색 속살이 삐져나와 아래위로 펑펑 물을 쏟을 때까지 빨아 줄게.”
□ ◆ □ 윤이아
여은은 멍한 표정으로 우유를 컵에 따르고 있었다.
“언니!”
우유를 담은 유리병을 잡은 손이 제지당하자 여은은 깜짝 놀라 동생을 한번 보고 우유로 흥건한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아침부터 그렇게 멍해? 요즘은 푹 자는 것 같아 다행으로 생각했더니 아닌 거야?”
늘 신경이 곤두서 있는 원인이 수면 부족 때문이 아닐까 여린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신 이후 의외로 푹 자고 일어난 얼굴이라 신기하게 여기던 차였다. 특히 어제는 의사로부터 안정기에 들어섰다는 반가운 말까지 들어 한결 마음을 놓았는데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는 듯한 언니의 표정을 보니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아니야. 오랜만에 쉬는 일요일이라 그런지 멍하네.”
“오랜만은! 내 기억에는 처음이라고. 언니, 정말 너무 무리하며 살았어. 어떻게 사람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어?”
“그래요. 사장님, 정말 무리하셨어요. 그런데 춥지는 않아요?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는데.”
출근이 없는 아침이라 여은은 잠자리에서 일어난 그대로 아래에 내려왔다. 두 수행원도 오늘은 오지 말라고 해서 집에는 여자 셋뿐이라 풀어 헤친 머리에 흐트러진 파자마 차림이었다. 일교차가 커지는 계절이 오자마자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는 오산댁 덕분에 집은 벌써 난방이 돌아갔다. 임신으로 체온이 올라간 여은은 더울 정도였지만 잔소리하기가 싫은 그녀는 그냥 제 방 창문을 여는 것으로 더위를 식히는 방법을 택했다.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냄새예요? 호박죽 같은데?”
“맞아요! 시장 갔는데 늙은 호박이 있어서 속을 팠어요. 사장님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옥수수랑 땅콩을 잔뜩 넣어서 끓였으니 기대하세요.”
홍콩에서도 자신의 주문대로 올라왔던 호박죽은 어머니가 잘해 주던 스타일이었다. 그것을 기억하는 오산댁에게 여은은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우리 사장님 긴 머리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이렇게 예쁜데 가려야 한다니, 쯧쯧쯧!”
여은이 일어나기 전에 출근해서 퇴근하기 전에 퇴근하는 오산댁은 여은의 민낯을 볼 일이 없었다. 휴일도 없이 출근했던 그녀가 임신으로 일을 서서히 줄이기 시작한 것은 진즉부터 계획한 일이었다. 이렇게 조금씩 출근을 줄여 가다가 7개월부터 출산 후까지는 재택근무로 전환할 참이다.
지분을 위험 수위까지 매수한 진경백은 업소로 찾아온 이후 지나치게 조용했고, 구역을 넘보는 다른 조직도 큰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신경을 갉작이는 것이 있다면 제 구역에서 출몰하는 RUU의 존재였다. 대부분 상대 조직을 손봐 주고 사라졌기에 진도 파 내에서 묘한 연대 의식까지 생기는 작금이었다.
“어머, 사장님, 가슴팍에 붉은 자국이 뭐죠?”
여은이 흘린 우유를 닦던 오산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파자마 상의로 드러난 부분을 가리켰다.
“붉은 자국?”
여은은 고개를 숙여 제 가슴팍을 확인했다.
“어? 벌레가 물었나? 잠시만….”
안정기로 들어선 계절은 깊어 가는 가을이 시작되는 10월이었다. 아직도 모기는 있을 수 있는 시기인지라 큰 거울이 있는 거실로 가는 여은을 여상히 보며 여린과 오산댁은 끓이는 호박죽에 열중했다.
여은은 주방에서 하하 호호 웃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뒤로하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걸린 거울로 깊이 파인 파자마 목깃을 끌어 내렸다.
“이게 뭐지?”
마치 사람이 빨아당긴 울혈 같은 붉은 자국이 목 아래에 하나 찍혀 있었다. 빨아당긴 자국이라고 아는 것은 홍콩에서의 밤을 보낸 경험 때문이었다. 그 당시 개처럼 제 온몸을 빨고 핥아대는 남자가 남긴 흔적으로 몸이 남아나질 않았던 것을 기억하는 여은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꿈이었는데?”
아마도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탓인지 여은은 밤마다 음란한 꿈에 시달렸다. 원래 꿈을 꾸면 얼굴만 가려졌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자의 존재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꿈이었지만 임신 주 수를 따지는 웃기는 존재였다. 더 만져 주기를 애원하면 언제나 안정기 운운하더니 정말 어제 의사의 안정기 선언을 기다렸다는 듯이 제 옷을 홀랑 벗겨내어 갖은 음란한 짓을 펼쳤다.
다정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을 이끌지만, 그것은 침대 밖에서의 일이었다. 침대만 올라가면 다정하던 키스도 짐승처럼 바뀌던 남자는 어제 진짜 야수가 따로 없을 만큼 거친 숨소리를 흩뿌리며 제 다리 사이를 탐했다. 다급한 손길, 끈적한 혀 놀림, 울어도 봐주지 않는 집요함, 그러면서 동시에 달래는 다정한 목소리. 그런 방식의 스타일을 알고 있다.
“바보. 남자라고는 단 한 명밖에 모르잖아.”
꿈은 무의식을 반영하지만 제 경험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본 남자가 그 인간 하나뿐이니 그런 음란한 꿈도 경험한 스타일로 나오는 것이다.
“신기하네. 그렇게 난잡한 꿈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는 데도 피곤하지 않으니.”
거실을 한번 둘러보고, 혼자임을 확인한 여은은 파자마 상의를 당겨 임신으로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보았다.
“으…! 징그러워.”
매일 보는 가슴이지만 흰 가슴을 뒤덮은 푸른 유선과 포도알처럼 부풀어 오른 유두가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은은 짙은 색으로 변한 젖꼭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임신으로 커진 거겠지.”
원래 가슴을 붕대로 싸매면서 한 번도 거슬린 적이 없던 부분이었다. 남자와 밤을 보낼 때도 무척 작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일주일간 살이 헐 정도로 시달린 젖가슴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커지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마치 어젯밤의 진득한 애무가 사실이었던 것처럼 부풀어 오른 젖꼭지가 의심스럽다.
“아래에서 흘리는 물이 마치 꿀 같아. 먹어 보겠어?”
그 짓만 아는 천치처럼 남자는 쩝쩝대는 난잡한 소리를 흘려대며 혀를 놀렸다. 오간 대화는 드문드문 떠올랐지만, 남자가 주던 쾌감만은 정확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남자가 핥던 뜨거운 혀끝이 떠오르자 허리가 짜르르 떨렸다.
저도 모르게 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거울로 보며 여은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얼굴, 저 표정을 알고 있다. 바로 홍콩에서 류태주와 함께할 때 내일의 걱정을 모르고 살던 여자의 얼굴이었다.
“아…!”
상기된 제 얼굴에 당황해 있던 여은은 퐁퐁하며 배 속에서 울리는 작은 물방울 같은 느낌에 살짝 오른 배를 감쌌다. 출근이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모체의 편안함이 아이에게도 전해졌는지 다른 날보다 물방울의 느낌이 더욱 강하게 전해져 왔다.
“아가….”
여은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배 속에서 대답하듯 톡톡 터지는 물방울이 느껴진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뭐야. 언니, 하나뿐인 내 조카랑 둘만 노는 거야? 우리 개똥이랑 나도 놀고 싶다고.”
심장 소리가 약한다는 의사의 말에 걱정된 여린은 어디서 들었는지 태명을 막 지어 부르면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다며 아이를 개똥이라 불렀다.
“호박죽이 다 되었어요. 어서 오세요. 어머, 우리 사장님은 임신이 체질인가? 임신하더니 왜 이리 예뻐졌대요? 얼굴이 아주 활짝 피셨어.”
“그렇죠, 여사님?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구나. 언니, 정말 예뻐졌어.”
“별말을 다 해. 아무래도 진드기가 있는 것 같으니 이불을 바꿔야겠어요.”
다시 주방으로 가서 식탁에 앉으며 여은이 말했다. 이불을 바꾼 지 3일째였지만 오산댁은 별 말없이 수긍했다.
“참, 언니. 긴급 주주 총회가 열린다니 무슨 말이야? 요즘 분위기가 이상해서 윤우 아저씨에게 물어봤어.”
알게 되면 걱정할 것이 뻔했기에 동생에는 숨길 생각이었다. 여은은 마냥 순둥이처럼 보이지만 예민한 촉을 가지고 있는 동생을 간과한 자신의 실수에 혀를 찼다.
“린아.”
“거짓말하지 마. 언니. 나도 알아보는 수가 있으니까. 한번 말할 때 사실대로 말해 줘.”
여린의 생각대로 대충 둘러댈 생각이었던 여은은 잠시 망설였다. 그랬다. 주주 총회까지 열리는 마당에 여린이 알지 못하게 하는 수는 없었다. 더구나 동생은 진도 금융의 최종 소유주가 될 존재였다. 언제까지고 방관자로 세워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여은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진경백이 지분을 30%를 확보했대.”
더는 숙부라는 호칭을 붙이기도 싫은 여은은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30%라니…. 그거 위험하잖아. 만약에 3%만 더 매수한다면….”
“불가능해. 3%는 내가 가지고 있고. 나머지 3%는 배 속 아이의 것이야.”
“숙부가 언니 임신 사실을 알아?”
물어 놓고 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보다 뒷거래가 활발한 이쪽 세계였다. 그런 정보 따위는 조금 돈만 쓰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인간은 내 몸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할 거야. 걱정하지 마.”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제 형과 형수도 죽인 사람인데!”
“린아.”
쨍그랑!
짐작만 하는 사실이 있었으나 여린은 아주 확신하는 듯했다. 갑자기 주방에서 들린 요란한 소리에 여은의 시선이 돌아갔다. 주방에서는 오산댁이 평소와 다르게 몹시 당황한 얼굴로 깨진 그릇과 엉망으로 쏟아진 호박죽을 수습하고 있었다.
“여사님, 괜찮으세요?”
“으응…. 네, 네. 어이쿠 내가 왜 이러지. 손이 미끄러져서.”
“다쳐요. 여사님.”
여린은 얼른 가다가 당황한 오산댁을 밀어내고 고무장갑을 꼈다. 그녀는 잘게 손을 떠는 오산댁을 한번 힐끗 보고 흩어진 뜨거운 호박죽을 모아 싱크대에 버렸다.
“여사님. 비닐 좀 가져다주세요. 깨진 접시는 따로 버려야 하니.”
“그, 그래.”
주방 옆의 팬트리로 향하는 그녀를 한번 보고는 여린은 속삭이듯 말을 이어 갔다. 그 모습이 마치 오산댁을 경계하는 것 같은 모습이라 여은은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부모님을 해칠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숙부만큼 정확한 이유가 성립하는 인간은 또 없잖아. 단지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이 없을 뿐. 나도 귀가 있어, 언니. 그리고 바보도 아니고. 숙부가 긴급 주주 총회를 여는 것에 동의한 이유도 그 때문 아니야?”
오산댁을 경계하는 여린의 태도가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을 의심하던 자신의 모습 같아서 여은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 주길 바랐지만, 동생도 결국은 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돈을 위해 살며 자신의 이익에 반하면 언제든 뒤에서 칼을 겨눌 수 있는 이 세계에 치를 떨면서도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처럼 말이다.
“맞아. 진경백은 유산으로 받은 10%의 지분 외에 더 사들일 돈이 없어. 주주 총회를 하면 누가 그 인간에게 돈을 댔는지 알 수 있겠지. 그러면 그를 도운 인간도 좁혀질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내겠어.”
팬트리 입구에서 비닐을 가지고 오던 오산댁은 자매의 말을 들으며 더 다가오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그녀의 눈이 불안한 듯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