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2/14)

10.

“임신 5주….”

두 수행원은 창백한 보스의 얼굴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5주라면 분명히 홍콩에 다녀온 그때가 분명했다. 도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전혀 감도 잡을 수 없는 두 사람은 절대 말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한 보스를 보며 속으로 가슴만 쳐댔다. 그중에서도 하준수는 저의 업어치기로 유산의 위험을 겪게 된 데에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의식 없이 피를 흘리는 보스와 그 옆에서 우는 진여린을 보며 모든 신호를 무시할 결심으로 가장 가까운 대학 병원 응급실로 미친 듯이 차를 몰았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자동차가 가는 모든 신호등의 신호가 가는 족족 초록 불로 바뀌었다.

마치 홍해 바다가 갈라지듯이 늦은 시간에도 많은 차량으로 들끓는 번화가를 단 한 번도 서는 일 없이 무사히 병원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야 입원 수속이 된다고 전달받은 지 5분도 되지 않아 돈다발을 안겨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VIP 병실을 배정받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상당히 이상한 일들투성이였지만 보스의 몸을 상하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고개를 들지 못하는 하준수는 그에 대한 일을 함구했다. 어찌 보면 하준수보다 더 다혈질인 보스가 당장이라도 링거 바늘을 뽑고 배후를 알아보라고 소리칠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린이는?”

금방 눈을 뜨고 의사의 방문을 받은 여은은 금방 닥친 충격에도 불구하고 제 피붙이를 챙겼다.

“병실을 배정받고 집으로 모셨습니다. 학교를 빠지면 보스가 걱정하실 거라고 하니, 순순히 가셨어요. 대신 오늘 밤은 병원에서 주무실 거랍니다.”

정확히는 보스가 화내실 거라는 말이었지만 이윤우는 태연히 말을 순화해서 전달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아직 경황이 없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여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와 수행원들의 대화를 멍한 얼굴로 듣고 있는 의사를 보았다. 담당 의사는 190cm가 육박하는 험상궂은 두 사내와 VIP 병실로 새벽에 들어온 미모의 환자 사이의 짧은 대화를 듣고 누구도 아이 아버지가 아님을 금방 파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새벽에 자신을 깨운 병원 이사장의 전화를 떠올리며 이 여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열심히 머리를 돌렸다.

원래 이 병실은 어느 재벌 회장 사모님의 건강 검진을 위해 8개월 전부터 예약되어 있던 방이었다. 지정 간호사만 출입할 수 있을 만큼 외부의 노출이 철저히 차단되는 VIP 병실 중에서도 주방까지 갖춘 이곳은 특급 호텔을 방불케 하는 만큼 비쌌지만 이미 3년 치 입원 대기가 끝난 상황이었다.

이사장 사모의 절친이라 특별히 수월하게 병실을 예약했다며 감사 선물로 이사장실로 줄줄이 들어오던 선물을 똑똑히 기억하는 의사였다. 차후에 일어날 모든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의 파워를 가진 것이 확실한 이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서 온몸이 쑤실 정도였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경력 10년 차의 프로답게 보이기 위해 근엄하게 입에 힘을 주고 주저앉은 안경을 추어올렸다.

“네. 임신 5주입니다. 당시 기록을 보니 유도를 하셨다고요? 무척 위험하셨습니다. 자칫하면 유산할 뻔하셨어요. 임신 초기에는 유산의 위험이 크니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현재 난황 모양도 아주 좋고, 아이 심장 소리도 건강합니다. 천운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의사는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링거가 꽂혀 있지 않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손에 쥔 여자와 두 손을 공손히 앞에 모으고 침울한 얼굴을 한 두 남자를 보며 어색하게 코끝을 긁적였다. 아무리 봐도 임신을 반기는 표정이 아닌지라 축하의 말을 다시 주워 담아야 하나를 고민했다.

“요즘 산모, 아니 환자분께서 무리하신 모양인지 수면 상태와 영양 상태가 그리 좋은 수치가 아닙니다. 며칠 병원에서 몸조리하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저희 성모 해성 대학 병원 VIP 병실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고 알려질 만큼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하.”

“누구야? 누가 VIP 병실을 신청했어?”

순한 눈매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을 노려보는 시선은 그지없이 매섭다. 순간 오싹하는 살기를 느낀 의사는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포식자를 알아본 초식 동물의 생존 본능이었다.

“죄송합니다. 보스. 원무과에서 이곳이라고 통보받아 아무 생각 없이….”

그랬다. 아무리 1인실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병실이 없으면 환자들은 선택할 수 없다. 원래 병원에서 지정해 주는 대로 우선 병실을 배정받는 것이다.

“혹시 수술은 언제 할 수 있나요?”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따가운 시선에 의사는 두서없이 시선을 돌렸다.

“아, 죄, 죄송하지만 환자분. 저의 병원은 낙태 수술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환자분 상태가 좋지 못하니 수술은 일단 몸을 조금 회복하시고 생각해 보심이….”

숫제 식은땀까지 흘리던 의사는 결국 말을 끝까지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병실을 나가 버렸다. 의사가 방을 나가자 무거운 침묵이 병실을 감쌌다.

“보스, 외람되지만 여쭤봐야겠습니다. 아이는….”

이윤우가 막 입을 떼자 여은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침대에 풀썩 누웠다.

“조금 있다가. 나 좀 누워 있을게. 오늘 올라와야 하는 서류들 있지? 사무실 가서 가져와.”

이윤우뿐만 아니라 하준수도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둘은 서로를 눈짓하며 방에서 나갔다. 눈을 감은 여은의 안색이 너무나 창백했기 때문이다.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여은은 살며시 눈을 뜨고 멍하니 강이 보이는 창을 바라보았다. 가장 중심부에 있는 대학 병원의 VIP 병실은 상당한 고층으로 시야를 가리지 않고 시원한 강과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가 훤히 보였다. 오랜만의 맑은 하늘에 비친 파란 강을 보고 있으려니 홍콩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홍콩을 다녀오는 동안 부재중이던 일 처리를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한가하게 하늘을 바라볼 시간조차 없었다. 아니, 여은은 지난 8년간 하늘조차 바라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살아왔었다. 그랬기에 홍콩에서의 무위도식하던 생활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조직에서 벗어난 평범한 생활이 편안했고 즐거웠다. 무엇을 해도 기꺼워하는 다정한 눈빛과 넓은 가슴, 제 흉터를 핥아 주던 따스함, 그 모든 것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그 결과가 제 배 속에 있었다.

“아가. 미안해. 네가 미운 게 아니야. 그 남자는 안 돼. 그 남자만은 안 돼. 그러니까….”

미안해. 창 쪽으로 돌린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미쳤나 봐. 왜 눈물이.”

홍콩에서부터 눈물샘이 터져 버렸는지 한번 흘리기 시작한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이것이 전부 그 남자 때문이다. 류태주! 그런데 그 인간은 벌써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기나 하다니! 이번에 새로 온 종업원이 벌써 단골을 만든 데다 2차로 벌이가 상당하다는 박 마담의 말이 떠오르자 왜인지 억울하고 분한 감정에 여은은 시트를 뒤집어쓰고 엉엉 울었다.

“어머! 산모님! 그렇게 울면 아이에게 좋지 않아요.”

여은은 갑자기 들린 여자 목소리에 놀라서 시트를 걷었다. 눈만 빼꼼히 내밀어 목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척, 보기에도 노련해 보이는 간호사가 링거병 등이 든 트레이를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보호자들은 다 어딜 가셨나 봐요. 안녕하세요. 담당 간호사 이민영입니다. VIP 병실은 지정 간호사를 둘 수 있는데 지정하지 않으셔서 제가 담당하게 되었어요. 어디 불편하세요? 임신 초기에는 호르몬이 불균형하니까 감정 기복도 큰 시기라 눈물이 많아지기도 하죠. 하지만 너무 울면 자궁 수축이 올 수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다른 것은 불편하지 않으세요?”

곁에 떡대 같은 수행원들이 있으면 당장 태도가 달라지겠지만 자신에게 편안히 응대하는 여자의 수다스러운 응대가 나쁘지 않은 여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산이시죠? 그럼 심리 상태가 더 널뛰죠. 임신하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임신 5주 정도면 입덧이 시작될 수도 있어요. 감기 기운처럼 으슬으슬 추울 수도 있으니 에어컨 온도는 살짝 올렸어요. 가슴이 아려 올 수 있고, 아랫배가 시큰대는 아픔이 있을 수도 있으니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간호사는 링거병을 바꿔 끼며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여은은 간호사가 말했던 증상들이 벌써 몇 주간 겪어 온 것을 떠올리며 착잡한 심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앉고 싶으세요? 여기 리모컨으로 작동하세요.”

여은은 간호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손안에 든 리모컨으로 침대 머리를 올려 등을 기댔다.

“다리를 살짝 올려 있으시면 허리가 편안해서 배에 힘이 덜 가실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 아래도 살짝 각도를 올리자 훨씬 편안해졌다.

“산모분이 늦게까지 주무셔서 식사 시간을 놓치셨어요. 지금 식사를 드릴 테니까 드세요.”

간호사가 식사까지 챙겨 주는 것이 이상했지만 VIP 병실의 전담이니 그런가 보다 했다. 입맛이 없었는데 마침 식탁에 올라온 것은 고소한 향에 저절로 침이 고이는 전복죽이었다. 식사 시간보다 훨씬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금방 끓인 듯 따뜻한 그것은 조금 많은 양에도 불구하고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병원 음식이 맛있을 줄이야! 너무 맛있는데요?”

그릇을 가져가며 이 간호사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산모님이 배가 고프셔서 그래요. 그래도 이사장님께서 VIP 병실을 신경 쓰기는 하시죠.”

그제야 여은은 병실을 둘러보며 쾌적한 실내 공기와 특별히 신경 쓴 티가 나는 가습기와 곳곳에 꽂힌 향이 강하지 않은 생화와 여러 화분에 심어진 식물에 눈길을 보냈다.

“그렇군요. 돈이 좋긴 하네요.”

확실히 배가 부르고 꽃과 식물을 보니 날카롭던 신경이 누그러짐을 느꼈다. 이 간호사는 지시받은 대로 여은이 잠든 사이에 배달받은 꽃을 놓아두고 전달받은 가습기를 설치한 이야기는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음식 또한 일일이 고급 음식점의 포장 용기를 버리고 다시 식기에 더는 수고가 있었지만 받은 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리고 벌써 일주일 치의 병실비를 완납했다는 것도 그녀로서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이 간호사는 이른 시간에 출근한 이사장이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던 젊은 남자와 이 여자와의 상관관계를 잠시 생각하며 눈빛을 흐렸다. 얼핏 봐도 장신의 남자는 마치 슈트를 입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근사한 실루엣의 소유자였다. 그런 남자가 듬뿍 돈을 쓰는 여자의 면면을 살피며, 그녀는 그린 듯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숙련된 말투로 주의 사항을 나열했다.

“어지러우실 수 있으니 답답하시더라도 바깥 산책은 참아 주세요. 병실이 워낙 넓으니 이곳만 배회하셔도 충분한 운동이 될 거예요. 저는 잠시 후에 점심을 가지고 오도록 할게요. 적은 양이라도 자주 드셔야 하거든요.”

여은이 살짝 졸기 시작하자 이 간호사는 침대의 다리를 내려 주고 침대 머리의 각도를 더 낮추어 주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본 간호사는 트레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프로다운 노련한 솜씨로 약병 등을 정리한 그녀는 차트를 들고 복도로 갔다. 가는 중간중간 동료들과 눈인사를 한 그녀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상구로 갈 때까지도 자신을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그녀는 계단의 중간에 나와 핸드폰을 꺼냈다. 자신의 전화기가 아닌 그 핸드폰은 발신 전용으로 입력된 번호는 단 하나였다. 핸드폰을 노려보는 여자의 얼굴은 영업용으로 사용하는 상냥한 미소는 오간 데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흥! 또 어디서 돈 많은 남자 하나 잡아서 팔자 고치려는 여자의 시중이나 들고 말이야! 짜증 나! 가진 거라고는 반반한 얼굴 하나밖에 없는 주제에. 사람을 종처럼 부려 먹네! 재수 없게 저런 여자나 걸리고 나도 참!”

하루 병실비가 수백을 호가하는 VIP 병실이었다. 전속 간호사가 어느 유명 그룹 회장의 눈에 들어 후처 자리에 들어간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다못해 상류층의 남자와 눈이라도 한번 맞춰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이민영이 VIP 병실의 전담을 따내기 위해 재수 없는 선배에게까지 알랑거리며 노력했는데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자신보다 별로 나아 보이지 않는 여자의 외모에 더 분통이 터졌다. 이사장이 깍듯이 인사하던 남자의 근사한 뒷모습이 떠오르자 더 꽤 많이 입금된 돈마저 푼돈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그런 남자의 애까지 임신했대? 쳇!”

이민영은 연신 투덜거리다 손에 쥔 핸드폰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 전화를 받을 남자가 분명히 아이의 아버지리라. 매일 식사 후에 보고를 하라고 했지만 이렇듯 정성을 들이는 여자를 보러 한번은 올 것이다. 그러면 매일 소통하던 자신의 얼굴을 보며 다른 기류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열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남자 아니던가!

“영웅호색이라잖아?”

이민영은 입가에 금방 미소를 장착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식사하시고 많이 안정되셨어요. 꽃은 별로 안 좋아하시는지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으셨어요….”

매수한 간호사의 전화를 받은 김문태는 콧소리가 잔뜩 들어가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통화를 종료했다.

“많이 안정되신 모양입니다.”

그는 간호사가 전한 주관적인 의견은 모두 잘라낸 채 제 상사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상류층 남자 하나를 잡아 보겠다는 야망이 느껴지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그는 제 상사가 왜 자신에게 제 여자의 상태에 대한 보고를 듣게 했는지 이해했다. 태어나기를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난 류태주는 자신이 가는 모든 길에 벌어질 짜증스러운 상황을 이미 다 아는 것이다.

“음.”

류태주 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제 앞에 서 있는 김문태에게 서류를 받아 들었다.

“혹시 전담 간호사를 바꿀 생각은 없으십니까?”

제가 받아도 불편한 통화였다. 끈적하게 감기는 여자의 목소리는 싸구려 유곽의 기생보다 천박했다. 과묵하지만 거침없이 솔직한 표현의 소유자인 김문태의 반응에 류태주는 알 만하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다.

“사람이 가장 열의를 보일 때가 언제인지 알아? 바로 올라가지 못할 나무를 쳐다볼 때야. 그 열의로 우리 히메를 열심히 케어해 준다면 더 바랄 것 없지. 적어도 다른 데 매수되는 일 없이 돈값을 할 테니 놔둬. 나중에 아마 호되게 당할걸? 진여은이 결코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지.”

8년간 그의 아래에 있으면서도 사람에 대한 적나라한 본성에 대해 조금의 자비도 없는 제 상사의 독설은 아직도 오싹할 때가 많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앗아 간 여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말하는 류태주를 보며 과연 같은 동류라 끌리는가? 하는 순수한 의문을 가졌다.

팔락이며 서류가 넘어가는 소리가 넓은 사무실에 울린다. 김문태는 험한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듯 반듯하고 유려한 손가락이 넘기는 서류를 보며 알았다고 응수했다.

“이것이 이번에 진경백을 통해 매수한 진도 금융 지분인가?”

“네. 전체 보유분의 25%입니다. 그런데 진경백이 차명으로 일부를 빼돌리려 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진여은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의 하나였다. 바로 그녀가 그렇게나 집착하는 진도 금융의 지분으로 장난치는 것. 아예 사람의 허리 위로 시선도 주지 않는 그녀의 눈을 끌기 위한 미끼로 숙부란 위치에 있는 진경백을 이용했다.

수천의 수수료를 얹어 진경백으로 하여금 진도 금융의 지분을 매수하게 했다. 표면상으로는 진경백이 진도 금융을 먹기 위해 수를 쓰는 것으로 보일 터였다. 형이 죽자 유일한 생질들을 자신이 운영하는 더러운 업소에 끌어들이려 했다는 것부터 처리할 이유는 충분했으나 거기에 기름까지 붓고 있었다.

“진경백은 어떤 인간이지? 사생활은 어때?”

근 8년간 류태주를 보필하며 진씨 집안에 대해서는 훤히 꿰고 있는 김문태였다. 류태주가 RUU를 움직이고 싶어 하자 시미즈 요시다는 외손자에게 스미도카이에 있던 재일교포 출신인 그를 붙여 주었다.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 류태주처럼 그 또한 알고 있는 사항이라도 묻지 않으면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류태주의 주문이 떨어지자 마치 버튼이 눌러진 로봇처럼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고아 출신인 진팔양과 진경백 형제는 어려서 서로 다른 보육원에서 떨어져 지냈습니다. 진팔양이 명운 파에 들어가 차근차근 중간 보스로 성장하는 동안 진경백은 그야말로 여자들 등쳐 먹는 질 나쁜 양아치였죠. 명운의 최 회장에게 인정받아 진도 파를 꾸리자 진팔양은 동생을 챙깁니다. 하지만 막돼먹은 성격으로 조직 생활을 견디지 못하죠. 결국 먹고살 수 있도록 알짜배기 주점 몇 개를 떼어 줬는데 그것마저 도박 등으로 날리고, 지금 남은 게 세 개 정도입니다. 매출은 꾸준히 내림세로 형편없습니다. 지금은 불법 성매매 업소로 변종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 거기에 자기 조카들을 넣으려고 했다?”

대충 주점으로 알고 있던 곳이 성매매 업소라니! 김문태는 점점 더 굳어 가는 보스의 표정을 보면서 말을 이어 갔다.

“결혼은 세 번 했으나 모두 진경백의 폭력 행사에 이혼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특정한 여자 없이 잠자리만 하는데 잠자리에서 여자를 때려 고소당한 건수가 상당합니다.”

“때려? 여자의 어디를 때릴 데가 있다고. 쓰레기.”

지난 8년간 여자의 흔적이라고는 존재도 확인할 수 없는 진여은이라는 여자의 그림자뿐이었다. 자신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어떻게 내쳤는지 모두 본 김문태는 갑자기 페미니스트라도 된 듯한 제 상사의 반응에 동조하지 않고 들고 있던 자료 하나를 책상 위에 두었다.

“전에 알아보라고 하신 명운에서의 회의 내용입니다.”

말없이 서류를 보던 류태주는 중반쯤 읽자 잔뜩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회의 내용에서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찾은 것이다.

“하하하! 그랬군! 지분이라…. 진도 금융을 지키려면 아이가 필요한 거였군!”

진여은이 남자 사냥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류태주는 자신을 살피던 시선, 은근히 캐묻던 이상한 질문들을 조합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대머리, 시력, 주변의 여자, 성병….”

티 내고 싶지 않았겠지만 처음 보는 남자의 조부와 외조부의 머리숱에 눈빛을 반짝이는 여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너는 여자가 아이를 가질 때 남자의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 같아?”

김문태는 난데없이 떨어진 상사의 질문에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평생 살면서 여자 입장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야쿠자 출신에다 이후에는 RUU 해운의 전무라는 직함을 가진 남자의 비서로 일했지만, 실제 RUU 조직의 2인자였다.

그가 상대하는 여자들은 모두 난다 긴다 하는 미인이었지만 누구도 임신을 바라지는 않았다. RUU 조직에서 배신자에게 잔인하기로 소문이 자자하며 수행하는 명령에 있어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기계 같은 남자는 성실히 뇌를 돌렸다.

“여자들은 남자의 돈과 권력에 다리를 벌리죠.”

미국 유학을 했다는 말에 반색하며 시력을 묻던 진여은의 반짝이던 눈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그녀의 관심사는 남자의 돈과 권력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프레지던트 스위트룸과 유명 디자이너의 드레스를 가져온 쇼퍼를 볼 때 살짝 가라앉던 분위기만 떠올려도 그랬다.

“그 외에는?”

최근에 가장 만남이 잦은 여자를 떠올리던 김문태는 자못 심각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외모까지 갖췄다면 금상첨화겠죠. 대부분 취향이 존재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결혼하려면 아무래도 집안을 보겠지요?”

외모만은 합격점을 받은 것은 분명했다. 자신이 과시하던 재력에는 질린 표정을 짓다가도 얼굴만 들이대면 금방 풀리고는 했으니까.

“집안이라….”

그는 둘러싸인 수많은 남자가 아니라 여행지까지 와서 찾아야 했던 조건들을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알았을 때 피가 전부 빠져나간 듯 창백하게 변하던 표정을 떠올리며 눈빛을 빛냈다.

“조폭이 아니어야 했군.”

그랬다. 진여은에 대해 조금만 깊이 생각했어도 나오는 답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옭맨 조직이라는 집단을 살기 위해 이용하면서도 제 부모를 죽였는지도 모를 그들을 뿌리 깊이 증오할 것이다. 꽤 넓게 조사한 이력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걸. 그러다 완전히 꼬리가 잘린 듯 없어진 증거들에 그 의심은 더 깊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명운의 최 회장이 제 아들을 들이밀자 미련 없이 떠난 것이겠지. 진도 금융의 지분을 가져 줄 제 핏줄을 잉태하기 위해서!

류태주의 중얼거림을 정확하게 들은 김문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RUU의 보스로 알려진 류태주는 한량인 제 선대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은 인간이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손에 쥔 이들은 세상이 무료한 법이었다. 그런 그가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 RUU를 맡았다.

처음에 존경에 마지않는 오야붕 시미즈 요시다가 친히 내린 명령에 그의 유일한 외손자의 아래에 들어갔지만, 류태주는 그에게 유학파 출신의 얌전한 도련님이었다. 더구나 RUU 파는 조직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이름뿐인 건달에 불과했다.

책만 읽던 도련님의 심심풀이 놀이에 잠시 어울려 주며 몇 년 안식년 삼아 쉴 것을 예상했으나 그것은 그의 제대로 된 착오였다. 천재적인 머리만큼이나 사람을 부리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그는 제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악명 높은 RUU의 수장이 되는 데 성공했다.

류태주의 장점 중 가장 괄목할 만한 점은 시야가 넓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이다. 그는 사냥감을 절대로 한꺼번에 덮치지 않았다. 구석까지 몰아붙여 물을 뜯을 때는 확실하게 급소만을 취했다. 그는 배부른 포식자였다. 제 사냥감을 늘 넉넉하게 아래에 베푸니 피에 굶주린 짐승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인정 넘치는 포식자도 절대 용서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바로 자기 것을 건드리거나 탐내는 존재였다.

“진경백에게 여자를 붙여야겠어.”

잠시 생각에 잠겼던 류태주는 좋은 생각이 난 듯 보던 서류를 집어 던졌다.

“누구를….”

류태주의 한마디로 이미 머릿속으로 수많은 명단을 떠올린 김문태였다. 그러나 제 주인은 이미 생각해 둔 여자가 있는 듯했다.

“‘花’에 예약을 해. 진경백과 함께.”

김문태는 진경백과 함께 한꺼번에 청소할 누군가가 있음을 깨닫고 들고 있던 태블릿에 메모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수행원이 질문을 길게 빼자 류태주의 눈이 향했다. 처음에 그저 순한 도련님의 눈인 줄 알았던 저 눈동자가 얼마나 차갑게 변할 수 있는지 경험한 그는 더 이상 류태주의 외모에 속지 않았다. 그는 그야말로 양쪽 집안의 난폭하고 냉혹한 핏줄의 결정체로 태어난 진성 조폭이었다.

“진여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전무님의 아이가 확실한데 왜 찾아가지 않으십니까? 아이까지 생긴 것을 알면 오야붕도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여자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류태주를 걱정하는 시미즈 요시다의 명령으로 혹시나 남자를 만나는지 알아보고 보고한 이가 바로 김문태였다. 오야붕의 명령으로 그 외손자의 아래에 들어갔지만, 그 순간부터 자신의 주인은 류태주였으므로 그는 시미즈 요시다의 명령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류태주는 웃으며 진여은의 존재만 빼고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고 했기에 시미즈 요시다는 오매불망 기다리는 외손자의 여자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배 속에 새끼를 가진 암컷이 얼마나 난폭한 줄 알아? 까딱 잘못하다간 제 새끼까지 죽여 버리고 말지. 나도 물어뜯기기 싫고 말이야.”

그러고는 정말 즐겁다는 듯 웃었다.

“수컷으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뜯어먹을 먹이는 물고 와야지 면이 서지 않겠어? 씨만 뿌렸다고 다가 아니야.”

충성스럽기는 하지만 죽이고 깨부수는 것만 알지 포섭과 타협을 전혀 모르는 제 수행원을 향해 아직 뭘 모른다며 혀를 차던 류태주는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일어났다. 얼굴에 드물게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고성수의 아내를 찾았습니다.”

수년간 전화 통화로만 연락하던 그 사람은 RUU 조직에서 류태주의 명령으로 수상한 교통사고로 비명에 간 어떤 부부를 치어 죽인 트럭 운전기사를 조사하던 이였다. 전직 형사답게 그는 수년간의 행적과 인과 관계를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두꺼운 서류를 들고 있었다. 첫 장을 넘기던 류태주는 형형한 눈빛을 빛냈다.

“히메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어.”

□ ◆ □ 윤이아

잔잔한 클래식, 천장에 설치된 전혀 소음이 없는 공기청정기와 에어컨에 의해 쾌적하게 유지되는 공기,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건조함이 없는 가습기, 매일 바뀌는 아름다운 꽃, 시간마다 바뀌는 하늘과 강의 풍경.

창문 밖의 자동차 소음과 매연, 작열하는 더위가 거짓인 것처럼 이 병실은 마치 그 어떤 휴양지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유지되고 있었다.

“양정 구역은 요즘 어때?”

에어컨에 비할 수 없는 차가운 음성에 주방에서 사과를 깎던 오산댁과 그 곁에서 그릇을 꺼내며 일을 돕던 여린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걱정스럽게 흔들리는 여린의 눈빛을 본 오산댁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돌아보지 말라고 입 모양으로 말하며 과도를 놓고 어깨를 다정하게 쓸었다.

“이상하게 요즘, 지근 파 녀석들이 조용합니다.”

“조용해?”

서류를 살펴보고 이윤우에게 건네주는 여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보고하는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는 화장을 지우고 병원 침대에 앉은 보스의 모습에도 전혀 사라지지 않은 카리스마에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원래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기 좋아하는 녀석들입니다. 보스. 신경 쓸 것 없습니다.”

하준수가 거들어 끼어들다가 노려보는 갈색 눈동자에 어깨를 찔끔 떨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잘못 걸려들면 구역을 하나씩 접수하는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이죠.”

보고하던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눈치가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듯싶었다.

“계속 말해. 그래서?”

“소문에 RUU가 지근 파를 손봤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남자는 당장에 일그러지는 보스의 얼굴에 머리를 숙였다.

“양정 구역에서 술을 마시던 우리 쪽 아이들이 당하는 걸 RUU 조직의 몇몇이 도와줬다가 오히려 RUU와 지근 간의 싸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했던 아이가 하는 말을 제 밑의 녀석이 직접 들었으니 그냥 소문은 아닐 겁니다.”

“소문이 아닐 거라? 지금 그게 할 말이야?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할 거 아니야? 우리 구역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가만히 있어? 도와줘? 그걸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고!”

“죄송합니다.”

“언니!”

당장이라도 서류를 집어 던질 기세인 여은을 보다 못한 여린이 결국은 침대로 다가왔다.

“당분간 안정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이게 그렇게 급한 서류예요? 그런 보고가 당장 급한 보고냐고요!”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서슬이 퍼런 진여린의 호통에 보고를 한 남자와 더불어 진여은의 두 수행원도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보스께서 당장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린아.”

“시끄러워! 언니는 환자라고!”

웬만해서는 큰소리도 내지 않던 사람이 불같이 화를 내니 언니인 진여은도 할 말이 없었던지 입을 다물었다. 검은 슈트를 입은 남자는 보스와 빼닮은 갈색 눈동자가 저를 향하자 움찔하고 어깨를 떨었다. 자매는 평균 신장에 무척이나 여리여리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으나 호령하는 기개는 전 보스인 진팔양을 빼다 박았다. 그래서 전 보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더욱 자매에게 꼼짝을 못 했다.

“퇴원하는 날까지 보고는 안 돼요! 서류도 점심 식사 이후 두 시간만 허락하겠어요!”

손을 허리에 얹은 채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는 여린의 모습에 남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놀란 모습으로 입만 뻐끔댔다. 늘 얼음같이 차가운 보스와는 달리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로 사람들을 맞이하는 진여린은 진도 파에서 조직원들에게 사랑스러운 국민 여동생으로 통해있었기에 그 억울함은 더욱 컸다. 자신들은 그저 보스의 말에 100%의 충성도를 보여주는 것밖에 없었노라고 변명을 하고 싶지만, 팔짱을 낀 채 서늘한 시선을 보내는 보스 때문에 감히 입을 뗄 수도 없다.

“오호호호! 우리 박 부장님도 아가씨 서슬에는 못 당하시죠. 여기 와서 차 한잔하고 가세요. 대신 사장님 쪽으로는 시선도 두지 마시고요.”

오산댁이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응접실에 차를 두자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남자에게 진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 그럼 저는 차를 마시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디가 불편한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다른 조직의 기습에 당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걱정에 모골이 송연했었다. 그런데 보스의 입원 소식은 극소수의 중간 관리자 이상만 아는 극비리였고 그 이유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막상 와서 본 모습은 어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라 솔직히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다.

“과로야. 며칠 쉬면 나을 테니. 별말 하지 마.”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보고하러 왔던 수하가 오산댁이 챙겨 준 차만 후다닥 마시고 나가자 말을 참고 있던 여린이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남자를 배웅하러 두 수행원도 나간 참이라 병실에는 여린 외에 오산댁만이 남아 있었다.

“언니.”

여린은 사과를 찍은 포크를 그냥 들고 있는 언니의 손을 잡았다. 할 말이 가득한 그 표정에 살짝 미소를 보냈다.

“큰 결심하고 가진 아이잖아. 왜….”

결국 수술하기로 마음먹은 언니의 결정에 계속 냉가슴을 앓던 여린이 힘겹게 입을 뗐다.

“알고 보니 가장 조건이 안 맞는 남자였어. 낳을 수 없어.”

칼같이 냉정한 여은의 말에 여린의 눈이 커졌다.

“그 남자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거야? 그래서 홍콩에서 그렇게 도망치듯 나온 거야? 누군데? 어떤 사람인데 그래? 병 있대? 언니에게 나쁘게 했어?”

여은은 동생의 걱정스러운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려 붉게 물드는 하늘과 한가로운 강을 바라보았다. 류태주와 뜨거운 첫 키스를 나눈 석양의 그 하늘이 떠오르자 다시 심장이 저미듯 아파 왔다.

고통과 함께 떠오른 선명한 남자의 얼굴에 미간을 찌푸리며 결국은 들고 있던 포크를 놨다. 천주교 재단이라 수술할 수 없다고 하던 의사는 말을 바꾸어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지금 수술하게 되면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그 말을 함께 들은 여린이 더욱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어떤 유전병보다 더 심한 악조건이야. 낳을 수 없어.”

퇴원하면 다른 병원도 가볼 참이었다. 여은은 매일 바뀌는 생화를 노려보며 여린에게 잡힌 손을 뺐다. 시선을 돌린 언니의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분노에 여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조폭이구나. 그 남자. 아는 조직이야?”

꼼꼼하게 따지는 조건의 조항 하나하나를 아는 여린이었다.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엘리트, 근 일주일간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머물 수 있는 재력, 수려한 그 외모를 함께 있는 자리에서 확인한 그녀였다. 여은의 심장을 단숨에 차갑게 만든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여은은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아는 동생을 잠시 말없이 응시했다.

“그 남자, 나를 알고 있었어. 처음부터 말이야. 알고 접근한 거야.”

청천벽력 같은 말에 충격을 받은 동생의 표정을 보고 여은은 세워진 침대를 눕혔다.

“서류 보고 신경 썼더니 피곤하다. 좀 잘게.”

“그래요. 사장님, 지금이라도 좀 쉬세요. 임신 때문이 아니더라도 사장님은 늘 너무 무리해서 일해서 탈이라니까. 이 기회에 푹 쉬세요. 병원은 제가 알아볼게요.”

사과를 더 먹을 것 같지 않자, 여은의 무릎에 놓인 접시를 가져가며 오산댁이 혀를 찼다.

“여사님!”

냉정한 오산댁의 말에 여린이 소리쳤다.

“제가 젊을 때야 수술이 불법이라 몸 상하는 일도 다반사였지만 요즘은 아니에요. 의사가 하는 말이야 원래 최악의 상황을 먼저 말하는 거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깔끔하게 뒤처리하는 최 의원이 아직 하는지 모르겠네.”

아직 낙태 수술이 불법이었을 시절에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오산댁의 말을 듣는 자매의 눈에 동시에 의구심이 서렸다. 그러고 보니 젊은 시절에 남편이 죽고 평생 혼자 살고 있다는 오산댁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남편이 유산으로 남겼다는 꽤 좋은 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그녀는 소일거리 삼아 진여은의 집을 관리하고 있었다. 평생 아이를 낳아 본 적 없어서 자매가 마치 딸 같다고 평소에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했다.

“그래도 생명을 어떻게…!”

“언니의 인생도 생각해야지, 린아. 평생 발목 잡힐 아이라면 처음부터 정리하는 것이 나아.”

거의 10년 동안 함께 살면서 처음 듣는 냉정한 오산댁의 목소리에 여린은 할 말을 잃은 듯 망연한 표정으로 커다란 눈만 깜박였다.

“사장님만 생각하세요. 사장님이 가장 중요하니까.”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말을 했을까? 진여은은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라는 오산댁의 다독임에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고마워요. 여사님. 나 정말 좀 잘게요.”

“그래요. 저는 잠시 후에 집으로 갈게요. 청소해야 해서. 린이도 요즘 졸전 때문에 작업이 밀렸을 텐데. 함께 가자.”

그 와중에 여린의 학교생활까지 챙기는 오산댁이었다. 여은은 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잠은 자도 자도 쏟아졌다. 임신 5주라는 진단이 내려지자 단지 입맛이 없기만 했던 몸은 마치 그제야 인지하듯 입덧을 시작했다. 비린내가 나서 물 한 모금 삼키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나마 링거를 꽂고 있으니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손이 자연스럽게 배를 감싼다. 전혀 티도 나지 않지만, 자신을 모체에 온몸으로 전하는 작은 존재였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옆을 서성이는 여린을 낮은 목소리로 채근하던 오산댁까지 병실을 나가자 혼자 남은 방은 적막함이 가득했다.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뜬 여은은 더욱 짙어진 붉은 강의 수면을 바라보았다.

“아가 정말 미안해.”

배를 쓰다듬는 손길은 쓸쓸하면서도 다정했다.

□ ◆ □ 윤이아

일주일의 꿀같이 달았던 휴식 시간은 눈 깜짝할 새 끝났다. 입덧으로 먹는 것은 부실했지만 그간 짜증을 유발했던 편두통과 온몸을 내리누르던 근육통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여은은 상쾌한 기분을 느낄 만큼 좋은 컨디션이었다. 원인은 과로와 스트레스였다. 홍콩에서 류태주와 매일 나눈 난잡한 섹스로 피곤한 몸 상태로 하루도 쉬지 않고 무리한 스케줄을 감행한 결과였다.

충격적인 사실로 인한 스트레스에 관한 일은 떠올리기도 싫었기에 그녀는 마음속의 창고를 하나 만들어 그것을 처박았다. 언젠가는 꺼내서 봐야 할 일이겠지만 지금은 보기 싫었다. 그 창고 방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준 인간이 말한 대로 시간이 지나면 부디 지금보다 이성적으로 볼 수 있길 바랐다.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부디 예쁜 아기 낳으시길 바라요. 산모님.”

손등에 꽂혔던 바늘을 뽑고 링거병을 정리하던 이 간호사는 예의 그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건넸다. 여은은 건조한 눈으로 그녀를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바로 출근하겠다고 말한 터라 침대가 있는 병실과 연결된 응접실에는 두 수행원이 제 물건을 가져오느라 분주하다.

“오늘 아침에 꽃이 배달되었는데 아깝네요. 혹시 댁으로 가져가시겠어요?”

이사장의 배려라는 화려한 생화가 침대 옆, 응접실, 창문 앞 할 것 없이 일주일간 매일 바뀌며 병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호텔을 방불케 하는 고급스러운 가구와 더불어 삭막한 병실을 화사하게 만들어 준 1등 공신이었다.

그것에 무심한 시선을 한번 준 진여은은 피식 웃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짙은 비웃음이었기에 이 간호사의 고개가 갸웃하며 기울어졌다. 여은은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간호사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버려요. 아니면 매일 보고하는 그 인간에게 다시 보내든지.”

“어, 어머나…. 그 무슨…!”

아직도 자신의 비밀스러운 일을 들켰다는 자각을 하지 못한 간호사는 더듬거리며 진의를 살피듯 환자복 입은 여자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여자의 찌르는 듯한 갈색 눈동자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훔쳐보던 그 눈동자는 곧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무감한 시선에 사로잡혀 똑바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 늘 느긋하고 노련하던 간호사의 위선적인 가면에 금이 갔다.

“나가면 그 인간에게 똑똑히 전해요. 병원비는 나를 농락한 위자료로 생각하겠다고. 그리고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고 영원히 꺼지라고요.”

“어…. 산모님…. 저는 그분이 누군지 모릅….”

자신이 매 식사 후 전화하는 것을 이미 모두 눈치채고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병원비 수납과 매일 바뀌는 꽃도 알고 있는 진여은을 향해 간호사는 마지막 보루라는 듯 입을 열었다가 곧 다물고 말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순한 눈매를 접으며 늘 창밖을 보던 여자는 저에게 전화기를 준 사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와 더불어 자신에게 보이는 명백한 비웃음에는 이 호화로운 병실을 잡아 호의호식하는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이미 다 꿰고 있음을 보여줬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리면 보너스가 줄어요? 받을 잔금이 남았나? 그 인간이 이런 일을 시키면서 돈을 아끼지는 않았을 텐데? 모자라면 내가 더 줘요? 내가 부자 남자에게 다리 벌려 아이로 돈을 구걸할 만큼 없는 사람은 아니거든.”

마치 비상구에서 투덜거린 것을 죄다 들은 듯한 말에 이민영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어…. 저는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다고 우겨 보고 싶은 고집에 다급히 눈에 힘을 주어 보지만,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맑은 갈색 눈동자에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저 평범해 보였던 순한 눈매는 뇌까지 얼어붙을 듯 차가웠지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은 그냥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다리가 떨리는 공포감을 주는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큼 뇌쇄적이다.

이제야 이민영은 이제껏 초라한 환자복을 입고 창밖만 멍하니 응시하던 여자가 제 모습을 감추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자신과 저를 사주한 남자를 속이기 위한 것임을 깨달았다.

언제부터 알았을까? 설마, 처음부터? 불안한 눈동자가 두서없이 화려한 병실 안을 오갔다. 제 속내가 완전히 까발려진 여자가 입술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차가운 그 눈동자가 조금은 한심한 듯 위아래로 한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의상이라도 수고했다는 말은 해주죠. 내 돈은 아니지만. 아, 그리고 아이라도 낳아서 팔자 고치고 싶다면 피임 시술했다고 접근해 봐요. 여자 말을 전부 믿어 버리는 얼간이거든. 그 남자.”

서늘한 표정에 떠오른 비웃음은 그야말로 이 게임의 승자가 누구인지 말해 주듯 오만하고 거만했다. 하지만 그런 표정조차 여자의 후광이 되어 빛났다. 그제야 이민영은 평범한 여자에게서는 볼 수 없는 위엄과 동시에 무척이나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러자 동시에 지금도 응접실을 바쁘게 오가는 험상궂은 사내들이 의식되었다.

자신에게는 늘 존댓말을 써주었지만 척 봐도 연상이 분명한 저 사람들에게 그녀는 늘 하대하고 명령했다. 잿밥에 눈이 어두워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짧은 머리, 검은 슈트가 꽉 조이는 덩치, 살벌한 눈빛, 누가 봐도 조폭임을! 그 사람들이 늘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녀는 설마?

“보스, 여린 아가씨가 오고 계신답니다. 택시를 타려는 것을 여사님이 사무실에 전화해서 경재 형님이 모셔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민영은 제 귀를 울리는 단어에 휘청거렸다. 보스!

“어? 간호사님? 왜 그러세요?”

진여린이 병원으로 온다는 말을 전하러 침대 쪽으로 온 하준수는 자신을 보고 기함하며 부들부들 떠는 간호사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글쎄? 왜 그러실까? 아, 마지막 선물을 드려야지. 치맛단 아래쪽에 붙은 핀은 이제 빼셔도 돼요. 어서 나가 보세요. 전화해야죠.”

치맛단에 붙은 핀이라니? 연거푸 얻어맞은 듯 정신이 없던 이민영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비틀거리는 꼬락서니가 마치 물속을 허우적대듯 꼴불견이었으나 무시무시한 맹수를 앞두고 도망가는 심정인 그녀로서는 남의 시선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육중한 VIP 병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서둘러 제 치맛단부터 살핀 여자는 무척이나 작은 실핀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침에 걸쇠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어 피부를 찌르지 않도록 만들어진 그것은 누가 봐도 그저 옷을 고정하는 보통 핀이었다. 언제 이것을 제 옷에 달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민영은 날 듯 병원 복도를 뛰어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급히 전화를 꺼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여자 이상하다고요!”

이민영은 여태껏 유지해 오던 나긋나긋하고 교태 어린 목소리를 버리고 마구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조폭 아니에요, 그 여자? 남자들이 여자를 보스라고 불렀다고요.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전화하는 것까지 알고 있었어요! 게다가 내 옷에 이상한 핀을 붙이고 있었다고요. 이게 뭐죠?”

“어떻게 생겼습니까?”

원래 알겠습니다. 이외에는 거의 대답이 없던 전화기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나왔다. 여자는 매달리는 심정으로 전화기를 두 손으로 꼭 잡았다.

“옷핀같이 생겼어요. 나에게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다고요! 그 여자 조폭이죠? 무서워요. 혹시 저 밤길 조심해야 하나요? 막 납치되고 그런 거 아닐까요?”

“걸쇠 부분에 동그란 자석같이 생긴 것이 있습니까?”

호들갑스럽게 울먹이기까지 하는 여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굵은 목소리는 무척이나 냉정했다. 여자는 서운함을 느끼며 손의 핀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눈에 걸쇠 부분의 동그란 것이 눈에 띄었다.

“이, 있어요! 이게 뭐죠?”

“…도청 장치입니다. 하아…! 알겠습니다. 오늘 그분 기분은…. 아니, 알겠습니다.”

도청 장치라는 것에 온몸에 소름이 돋은 이민영은 그 와중에도 착실히 여자의 상태를 궁금해하는 남자가 믿을 수 없었다.

“기분이라고요? 그 여자 기분이요? 이것을 언제 내 옷을 달았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그 여자의 표정은 한결같았다고요! 알겠어요? 한결같이 좋았어요. 도대체 그 여자 정체가 뭐죠? 아무래도 위험한 상황 같으니 보호해 주세요. 무서워 죽겠다고요!”

어떻게든 통화를 넘어 직접 남자와의 만남을 욕심내는 여자는 제 살을 깎듯 닥친 공포를 십분 이용했다.

“그런 조항은 계약 사항에 없습니다. 정말 무섭다면 진여은 씨에 대해 입을 다무시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청 장치에 대해서는 보스께 보고하겠습니다. 돈은 모두 일시금으로 전에 입금해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화기는 VIP 병실 앞 쓰레기통에 버리시면 됩니다. 그럼.”

“잠…!”

이민영은 제가 이제껏 간살을 떨던 남자가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끊어지기 전에 수화기 너머로 유쾌한 웃음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척이나 흡족한 웃음소리는 진여은이 자신을 보던 시선과 함께 제대로 헛물을 켠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진여린이 병실에 도착한 것은 피같이 붉은 립스틱과 세트같이 붉은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글 때였다. 이미 화장을 마치고 트레이드마크인 칼 같은 단발머리 가발을 쓰고 있던 그녀는 시근덕거리는 동생을 흘깃 본 후 검은 슈트 상의를 입었다.

“학교는?”

집에 가면 볼 텐데 굳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뻔히 알면서도 여은은 일부러 딱딱하게 물었다.

“지금 학교가 문제야? 언니 지금 병원에 갈 거지? 거짓말할 생각하지 마. 어제 여사님과 통화하는 것 다 들었어.”

여린이 알면 펄펄 뛸 것을 알면서도 부주의하게 주방에서 제게 전화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철저하지 못하고 앞뒤를 재지 않는 오산댁의 그런 점을 높이 사는 터라 진여은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녀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낳을 수 없어.”

“언니! 같이 가서 진료부터 제대로 받자.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대.”

“그 아이가 어떤 핏줄인지 몰라서 그런 거야! 지금도…!”

친절한 미소를 짓지만, 자신을 업신여기는 눈빛을 보내는 간호사에게 도청 장치를 붙였다. 아니나 다를까, 제 병실을 나가서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여자의 교태 어린 목소리는 놀랍지도 않았다. 류태주를 상당한 재력가쯤으로 아는지 보고하는 말 속에는 그의 아이를 배서 호사를 누리는 자신에 대한 질투와 어떻게든 관심을 끌고 싶어 하는 추잡스러운 머릿속 생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래서 하준수를 족쳤더니 역시나 VIP 병실도 수납이 이미 끝나 있었고 병원으로 오는 동안 한 번도 신호에 걸리지 않은 기적도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류태주가 한 일임을 진여은은 보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가 누구야, 언니? 응? 지금도라니? 병원에 왔어? 내 눈엔 그 남자 괜찮아 보였어, 언니.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모든 조건이 완벽했잖아. 공부도 엄청나게 많이 했고….”

“흥! 지금이야 제 핏줄을 신경을 쓴답시고 건들거리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 같아? 이 바닥 생리를 네가 몰라서 그래. 이 아이를 볼모 삼아 얼마나 치졸한 짓거리를 할지도 모른다고. 그 씨는 싹을 잘라 버리는 게 나아. 게다가 그 잘난 얼굴도 재앙이야. 그 짧은 시간에 간호사를 홀려 놨더라고. 우스워서 정말!”

짜증 나! 여은은 중얼거리며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 얼굴이 잘못인 거다. 그 인간이 그렇게까지 잘생기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이성적인 뇌로 다른 남자와 비교라도 했을 텐데. 마치 마취 주사를 맞은 동물처럼 뇌가 남자의 페로몬에 푹 절어 그냥 휩쓸려 가버리고 말았다.

류태주에게 들려준 것이 분명한 여자의 간드러진 콧소리가 떠오르자 저절로 주먹에 힘이 쥐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화를 내는 포인트를 짚어내지 못하고 그저 화를 쏟아내는 데 전력을 다했다.

“간호사를 홀려? 무슨 말이야?”

“도청기를 달았지. 그 인간에게 보고하고 있더라고.”

“도청기? 간호사에게? 왜?”

“눈치가 이상해서. 지나치게 친절한 태도, 그러면서 동시에 나를 보는 차가운 시선. 이상하잖아? 이상하지 않아도 달아 놓을 생각이었어. 사람을 어떻게 믿어? 뒤에서 어떤 짓을 할지 알고. 역시 뒤에서 어떤 짓을 했지만 말이야.”

“언니….”

안다. 언니도 겨우 스무 살이 된 어린 나이에 열다섯 살 된 자신을 데리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원래도 새침데기에 자신을 잘 보여주지 않았던 언니는 부모님을 죽게 만든 배후조차 알아내지 못하자 주위의 모든 사람을 의심했고 믿지 못했다. 그것이 몸담은 조직을 혐오하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임을 잘 아는 진여린은 늘 가시를 세우고 살아야 하는 언니의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고마웠다.

그런 언니 때문에 자신이 이만큼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도 단지 조폭 출신의 남자이기에 수술을 결심한 것은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그사이 살이 더 빠진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어깨를 다독인다. 여린은 정작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언니임을 떠올리자 다시금 가슴이 찌르는 듯 아파 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우리는 그냥 비행기를 타고 잘 지내고 온 거라고. 그리고 여사님이 소개한 병원이니 믿을 수 있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린아.”

“언니는 이상해.”

달랠 만큼 달랬다고 생각한 여은이 슈트를 정리하기 위해 거울 쪽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동생이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다시 시선이 돌려졌다.

“정말 언니는 아무도 믿지 않아. 준수 아저씨와 윤우 아저씨도 언니를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된 사람들이지만 진심으로 믿지 않아. 언니가 믿는 것은 나와 여사님밖에 없어. 그게 이상해. 어째서 여사님은 그렇게 믿는 거지? 여사님이 우리 집에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르잖아.”

“린아.”

“나도 여사님이 고마워. 하지만 정말 언니를 위한다면 이번 일은 말려야 한다고 생각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만약에 엄마가 계셨더라도 같은 말을 했을 거야. 네 인생이 더 중요하다고.”

“아니야!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그렇지 않아. 얼마나 강한 분이었는지 언니도 알잖아. 혼자 키우는 게 어때서? 남자 직업이 안 좋으면 어때서? 엄마라면 함께 키우자고 했을 거야! 언니 아이니까! 여사님은 언니를 위하는 척하지만, 평생 언니가 간직할 상처는 무시했어!”

여은은 오산댁에게 날을 세우는 동생에게 미간을 찌푸렸다.

“여사님을 의심하는 건 엄마를 부정하는 거야. 여사님은 엄마가 거둔 사람이라고.”

오산댁은 아버지와 함께 비명에 간 어머니의 유일한 흔적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거의 1년 전 집에 들인 사람이었다. 싹싹하고 애살이 넘치는 성격으로 시키기도 전에 일을 척척 찾아서 하던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집안일만 맡기던 어머니는 사소한 바깥일과 가끔 자매를 맡기기도 했다. 사람에 대해 까다롭기가 하늘을 찌르던 진여은도 받아들일 정도였으니 그녀가 보인 진정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인정할 만했다.

“하지만 남이야. 너무 믿지 말라고 언니.”

이름처럼 외모 또한 여리기만 해보이는 진여린은 의외로 강단이 있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 앞에서 일을 진두지휘하는 언니에 가려져 있지만, 그녀의 고집 또한 진여은 못지않게 대단했다.

“진여린….”

“보스! 큰일 났습니다.”

자매의 눈에서 살벌한 냉기가 흐르는 구도는 거의 볼 수 없는 그림이라 급히 문을 열고 들어선 하준수가 멈칫하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일이야?”

하준수는 서로를 냉랭하게 쏘아보던 시선이 동시에 자신을 향하자 더욱 바싹 굳었다.

“명운 최 회장과 최 전무가 왔습니다.”

“뭐?”

냉랭하기만 하던 눈에 살기까지 돌자 그는 난감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진여린의 표정 또한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원에 도착해서야 우리에게 연락했습니다. 며칠 전 회의에 빠진 것에 대한 걱정으로 온 문병이라고 하는데….”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명운 그룹이 궤도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조직은 정리해 가고 있었다. 최 회장은 기회주의적이고 담력은 약했지만,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들이 누리는 재화가 더는 불법적인 일을 해서는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최 회장은 중간 보스들에게 면을 세워 주는 식으로 제법 규모가 있는 사업을 맡겼다.

거기서 사업 수완이 좋은 사람은 성장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부진을 면치 못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사업을 확장하고 성공하는 인간은 최 회장을 만만하게 봤으며, 실패하는 인간은 늘 불만을 품고 다녔다. 더구나 탈 조직화하는 과정인지라 여전히 남아 있는 무식하고 거친 성정과 더불어 하극상을 꿈꾸는 인간들은 언제든 제 뒤통수를 칠 기회를 노린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최근 최 회장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하극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때 제 수하였던 이들에게 무력을 쓰길 주저하지 않았다. 병원을 급습하는 이유도 뻔했다. 며칠 전 불참한 회의에 관한 확인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하려는 것이리라. 최명운은 진도 금융이 제2 금융으로 발돋움하자 진여은의 배신을 경계하는 것이다.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나, 영감님이.”

“으하하! 진 사장! 맞아! 내가 죽을 때가 돼 가나 봐. 요즘 들어 자꾸 조바심이 나네! 하핫!”

하준수가 들어오며 닫지 않은 문으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풍채 좋은 노신사와 머리 하나는 훌쩍 더 큰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신가, 진 사장. 어이쿠! 벌써 퇴원인가? 과로라면서 집으로 안 가고 출근하는 건가?”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회장님.”

딱딱한 진여은의 인사에 뒤이어 여린이 인사하자 최 회장의 눈이 커졌다.

“오! 린이 아니냐! 어이쿠! 이쁘다, 이뻐! 대학교 입학한다고 인사하러 왔던 게 엊그제 같은데! 네가 벌써 스물세 살이라지?”

자매를 태어날 때부터 봐왔던 최 회장은 자연스럽게 가족이 부르는 이름으로 여린의 이름을 줄여서 불렀다.

“네. 감사합니다. 회장님도 여전히 멋지시네요.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뒤에 선 최지승에게도 도전적으로 인사는커녕 눈을 치뜬 채 턱을 치켜드는 여은과 달리 여린은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늘 딱딱하고 냉정하게 인사만 하고 끝내는 진여은과 달리 여린의 살가운 인사가 이어지자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제법 부드러워졌다. 그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며 하준수는 제 보스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나가 있어. 금방 가실 거다.”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 수하가 나가자 최 회장은 느긋한 표정으로 병실을 한번 둘러보았다.

“용케도 VIP 병실을 받았구나. 해성 병원 VIP 병실에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던데.”

“운이 좋았어요.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제가 퇴원이라 아쉽네요. 무사한 걸 보셨으니 함께 나가시죠. 저도 출근하는 길이라.”

사적인 자리를 굳이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돌려 말하는 진여은을 보며 최 회장은 오히려 병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간 길게 잡아먹지 않는다. 일단 앉아 보렴. 여은아.”

응접실의 소파에 아예 자리를 잡으며 마치 어릴 적같이 이름만 부르는 최 회장의 태도에 여은의 날카로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도 금융에 관한 이야기야. 마침 린이도 있으니 잘되었구나. 서로의 집안일이 될 수도 있으니 함께 앉자꾸나.”

“아니요. 집안일이 될 수 없습니다. 린아, 너는 바로 학교로 가.”

“가서 앉아. 진여린, 너도 상관있는 일이 될 거니.”

이 자리에서 여린을 보내려는 여은의 말을 막은 것은 최지승이었다. 어릴 적부터 봐왔던 그는 늘 자매에게 편하게 말을 했다. 최지승은 죽일 듯이 노려보는 진여은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여린의 어깨를 밀어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최 회장의 옆에 앉고는 와서 앉으라는 듯 한쪽 손을 들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태도는 정중하게 권하는 듯했지만, 표정은 앉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오만했다. 여은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여린의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인가요? 일 이야기에 린이까지 끼워 넣지 마세요.”

가장 싫은 것이다. 자신이 있는 이 진창에 동생이 발을 들여놓는 것!

둘러 말해 봤자 진여은의 반응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 뻔했다. 지금도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발을 까닥이는 것을 보니 이 자리가 얼마나 불편하고 싫은지 알 만했다. 최 회장은 한때 가장 든든했던 수하였던 진팔양을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진경백이 진도 금융의 지분을 30%로 늘였다.”

“뭐라고요?”

진여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숙부에게 그럴 돈이 있을 리가 없어요. 지금 하는 주점도 거의 폐업 수준이라고요! 그런데 돈이 어디 있어서! 얼마 전만 해도 원로들 만나며 돈을 구걸하러 다닌 거 아닌가요? 누군가 빌려줬나요? 하지만 누가 그렇게 큰돈을…!”

숙부인 진경백은 아버지에게 받은 알짜배기 주점을 다 말아먹기 전에도 수없이 찾아와 돈을 가져갔었다. 돈에 눈먼 쓰레기! 아버지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각자 다른 보육원에서 자랐던 동생에 대해 애틋함이 깊었다. 최선을 다해 원하는 바를 들어주고자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동생이었지만 그가 살아가는 방식까지 포용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해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돈’이었다. 형에게 뭔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숙부는 필요할 때마다 야금야금 가져가는 돈이 감질났는지 아예 대놓고 꾸준히 돈을 먹을 수 있는 진도 금융을 원했다.

“그거야 알 수 없지. 하지만 진경백이 진도 금융에 눈독 들인 건 누구나 알고 있지. 얼마나 달콤해 보이겠냐. 그냥 앉아 있어도 이자가 쏟아지는데. 진경백의 눈에 진도 금융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쯤으로 보이지 않겠냐?”

최 회장의 말에 진여은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쓰레기도 동생이랍시고 챙기던 아버지와는 달린 엄마는 단호했죠. 어림도 없죠. 진도 금융은 엄마가 키운 사업체라고요. 원래 여사장이 있던 자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스무 살짜리 계집애가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죠.”

“이런, 이런! 천하의 진여은이 그런 말을 하다니! 겸손도 지나치면 교만이라고! 네 사업 수완으로 진도 금융을 키울 수 있었지. 하하! 게다가 어쩌면 그놈이야말로 네 부모의 차를 밀어 버린 고성수를 사주한 인간일 수도 있고 말이야.”

슬쩍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는 최 회장의 말에 자매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진짜예요? 숙부님이…!”

부모님 사건에 대해 일부러 알리지 않았던 여은은 충격받은 동생의 반응에 손을 들어 제지했다.

“심증만으로 범인을 잡을 수 있다면 해결 못 할 일이 없을 거예요. 지난 수년간 사고를 내고 죽은 고성수를 조사했지만, 조직에 들어간 전력도, 범죄 경력도, 하다못해 빚도 없었어요. 너무 깨끗했죠. 마치 누가 세탁한 것같이. 알다시피 숙부는 그런 능력이 없어요. 만약에 사주했다면 더 큰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거겠죠.”

그것이 당신이 될 수 있다는 서늘한 시선에 최 회장은 예의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야비한 표정으로 한쪽 입 끝을 올렸다. 검은 마녀라는 별명을 얻으며 제아무리 용을 써보지만, 그에게는 겨우 스물여덟 살의 애송이 계집일 뿐이었다.

“이렇게 하자꾸나. 무슨 수를 썼든 진경백이 진도 금융의 30%를 확보했다. 조금만 더 확보하면 무척이나 위험해. 보통 결의 상황뿐만 아니라 특별 결의 사항을 가진다.”

그래서? 라는 눈빛으로 쏘아보는 진여은을 느른한 표정으로 보던 최 회장은 본론을 꺼냈다.

“여은아, 내가 너를 태어날 때부터 지켜봤지 않니? 반대로 너도 스물여덟 해 동안 나와 우리 지승이를 봤지. 집안, 배경, 모든 것에 우리만큼 잘 맞는 상대가 어디 있겠니? 전에 말한 대로 우리 최 전무와 결혼하자. 가족만큼 든든한 울타리가 어디 있겠어? 3%의 지분은 어차피 네가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당장 어디서 아이가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야말로 황금 거위를 손도 대지 않고 꿀꺽하려는 최 회장의 야비한 수에 반박하려던 진여은은 옆에서 먼저 던진 폭탄 발언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언니, 지금 임신 중이에요. 그런 얕은 수로 언니를 채어갈 수는 없죠. 회장님.”

진여린의 단호한 말에 놀란 사람들의 눈이 일순 커졌다. 자신이 거론되는 말임에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 관조하던 최지승도 이번만큼은 꽤 놀란 듯 살짝 동요한 표정이었다.

“진여린.”

수술을 예약한 병원으로 당장 나갈 계획이었던 여은은 동생의 폭탄 발언에 입술을 깨물었다.

“말했지만 나는 언니가 수술하는 거 반대야. 핏줄이나 유전자보다 키우는 환경이 더 중요하다고. 언니가 필요해서 가져 놓고 한 가지 조건이 맞지 않다고 해서 그렇게 없애 버리는 건 아이에게 너무 잔인하잖아. 그리고 들어 보니 지분 확보가 한순간이라도 급한 시기에 언제 결혼하고 언제 아이를 가져? 게다가 언니도 싫잖아.”

진여린은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차갑게 쏘아보았다.

“언니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아요. 최지승 씨.”

도전적으로 노려보는 진여린의 시선에 제법이라는 듯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 사장의 입원은 단순한 과로가 아닌가 봅니다. 아버지. 여러 가지로 한 방 먹었네요. 하하!”

진여은은 오히려 즐거운 듯한 남자의 웃음에 미간을 찡그렸다. 어릴 적부터 봐왔지만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음흉한 인간이었다. 여기서 류태주의 아이와 최지승과의 결혼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냐면 당연히 아이 쪽이었다.

적어도 류태주와는 결혼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두 남자와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여은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배에 손을 갖다 댔다. 떠밀린 선택이긴 했지만 역시 마음이 편했다.

“누, 누구의 아이냐! 아이라니! 허어! 이런!”

평소 진여은의 곁에 남자 그림자라고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수행원들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문을 바라본 최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서부터 얼마나 야무지고 빈틈을 보이지 않는지 세 살에 돌부리에 넘어져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의식해 절대 울지 않던 계집아이였다.

그렇게 자존심 하나로 똘똘 뭉친 진여은이 제가 수족으로 부리는 사내를 침대로 끌어들였을 리 만무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분노가 서린 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문 쪽을 바라본 것을 지켜보고 있던 것이겠지.

“허어!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아니,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은 있다더니. 허 참!”

“이쪽 세계에서 혼전 임신이 어디 흉인가요? 그럼 회장님.”

여은은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는 최 회장과 재미있다는 듯 눈을 빛내는 최지승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서 저희 자매를 예뻐하시고 신경 써 주시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명운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될 보잘것없는 진도 금융도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고요.”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주신 점도 너무 감사합니다. 다행히 생긴 아이로 진도 금융은 안전하게 잘 지킬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럼, 최 전무까지 바쁘실 텐데….”

말투는 부드럽지만, 칼같이 별러진 날 선 눈빛으로 축객령을 명하는 말에 최 회장은 벌겋게 익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흥! 진도 금융의 주주 총회가 5개월 후 아닌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무슨 지분율이 있나? 그래서 내가 힘이 되어 주겠다고 한 거네!”

버럭 화를 내는 최 회장을 향해 여은이 붉은 입술을 활짝 벌려 웃어 보였다.

“회장님, 설마 그런 일로 등지시겠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저희가 그런 관계인가요? 아버지 일을 차치하더라도 이번에 발주한 명운 해운에 들어간 저희 자금을 잊으시면 안 되죠. 아무리 껌값같이 작은 진도 금융이라도 없으면 서운하시잖아요?”

얄밉게도 바른말만 하는 진여은을 못마땅하게 보던 최 회장은 몸을 획 돌렸다.

“다음 주 회의는 빠지지 말고 나오게!”

“살펴 가십시오.”

등을 돌린 최 회장의 뒤에서 진여은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조, 조심히 들어가세요. 회장님.”

한 치도 양보가 없는 두 사람의 기 싸움에 숨죽여 있던 여린이 급하게 일어나 인사했다. 순간 진여은과 팽팽한 접전으로 치솟아 있던 최 회장의 눈썹이 살짝 내려앉으며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병실을 나갔다.

“여유가 되면 집으로 한번 와. 아버지가 진씨 자매들을 무척 좋아하시잖아. 특히 너 린이.”

늘 최 회장 옆에서 의뭉스러운 표정만 짓던 최지승이 입을 열었다. 집안 모임을 하면 비슷한 또래였던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최지승은 늘 혼자였다. 언니 뒤만 쫓아다니던 진여린이 오빠라고 부르며 유일하게 따르던 것을 여은도 알고 있었다. 무뚝뚝한 아들 하나만 둔 최 회장이 자매를 유난히 예뻐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다 지난 일이 아닌가?

그들의 관계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특히 진여은은 최지승이 싫었다. 깊은 눈 아래 스민 비밀스러운 그늘을 품고 있는 인간이었다. 여은의 서늘한 시선이 최지승에서 여린으로 향했다. 한때였지만 막역하게 지내던 것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당황하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것을 불편함으로 해석한 여은은 붉은 입술을 열었다.

“다 어릴 적 이야기죠. 린이가 언제나 어린아이도 아니고. 이제 시집갈 나인데 아무 집이나 그렇게 드나들 수가 있나요? 거기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가감 없이 드러난 경계심에 재미있다는 듯 남자의 입술 끝이 올라간다.

“너무 그렇게 털을 세우고 달려들면 장난치고 싶다고. 조심하는 게 좋지 않겠어? 진여은이 이제 지켜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는데 말이야.”

비아냥대는 말이었지만 왠지 이 작은 생명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의심과 경계가 가득한 갈색 눈이 남자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그쪽이야말로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마시지. 엄한 장난했다가는 그 미끈한 면상에 제대로 한 방 넣어 줄 테니 말이야.”

“하하하!”

은근히 신경을 긁어대는 최지승에게 반말로 대거리했지만,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았다. 만나기만 하면 날을 세우며 싸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위협하는 진여은의 말에 큰 소리로 웃는 것까지 어릴 적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언니….”

자신을 말리듯 팔을 당기는 동생의 반응 또한 똑같았다. 다섯 살 많은 언니를 따라다니며 새침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그것까지 똑같이 따라 하면서 최지승에게만은 친근하게 구는 것도 여은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어릴 적, 정으로 말하는데 말이야. 너희 집안에는 남자가 필요해. 모든 위험에서부터 지켜 줄 그런 방패 말이야.”

“재미있는 말을 하네요. 무척 우스워. 방패? 최 전무님이 그런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

잔뜩 비꼬는 말에도 그는 순순히 응수하며 여유 있는 표정을 잃지 않았다.

“기꺼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아버지 말대로 우리만큼 서로를 잘 아는 사이가 또 어디 있겠어?”

“시커먼 욕심을 선심 쓰듯이 포장하지 마시죠. 역겨우니까. 빨리 가셔야 하지 않나요? 당신의 그 훌륭한 아버지가 기다리시는데.”

“언니.”

중간에서 계속 끼어드는 것은 둘의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지 않도록 위함도 있지만, 이제는 홑몸도 아닌 언니가 더 흥분하지 않도록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역시 여은은 자신의 팔을 당기는 동생의 존재에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런 자매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나중에 보도록 하지. 또 보자.”

“최지승 씨!”

진여은은 제 동생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가는 남자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이미 미꾸라지처럼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언니! 정말 이제 태교에 힘써. 이제 아이를 지켜야지.”

왠지 급히 화제를 돌리는 듯한 동생의 태도가 자못 수상했다.

“또 보자니. 저 인간 최근에 만난 적 있어?”

“아니야. 지금 봤잖아. 그 말이겠지.”

당황하는 동생의 표정이 수상쩍지만, 여은은 곧 의심을 걷어냈다. 자신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바보 같을 정도로 너그러운 그녀였다. 여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최지승의 손이 닿았던 동생의 머리를 매만졌다.

“재수 없이 누굴 감히 만지는 거야. 부정할라. 훠이. 훠이.”

“언니도 참.”

“어?”

애교스러운 미소, 다정한 눈빛을 보내던 동생이 갑자기 자신을 안자 이런 식의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던 여은은 살짝 몸을 굳혔다.

“언니, 축하해. 걱정 많이 했지? 축하 말도 제대로 못 듣고, 미안해.”

“축하….”

여은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임신을 축하받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진도 금융의 지분을 노린 목적이었고 그것은 오로지 자신과 동생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의 정체에 분노한 나머지 아예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면 자신을 알고 접근한 남자와 그 남자에게 홀렸던 자신을 동시에 단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응. 언니. 이제 아기랑 우리랑 세 식구가 되는 거야. 가족이 늘었다고. 너무 기뻐.”

“가족…. 내… 아이….”

시작이야 어떻게 되었던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임신이 안 되길 그렇게나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존재를 기뻐하고 싶었던 제 마음을. 여은은 마치 제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동생의 축하 말에 팔을 들어 가느다란 등을 감쌌다.

“응. 고마워. 내 아이야. 내… 아이.”

여은은 눈을 들어 꽃병에 가득 꽂혀 있는 꽃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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