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일상이 시작되었다.
여은은 새벽에 일어나 집 지하에 만든 트레이닝 공간에서 러닝 머신으로 가볍게 땀을 내고 샤워했다. 살짝 미열이 느껴지긴 하지만 컨디션은 좋았다. 긴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고 양 갈래로 땋는다.
가발을 쓰기에 머리숱이 너무 많기에 가발 망 안에 머리를 탄탄히 넣기 위해서 그냥 묶는 방법은 안 되기 때문이다. 땋은 머리를 엑스자로 엮어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가발 망을 썼다. 단발머리 가발을 쓰기 전에 화장한다.
오늘따라 창백한 피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피부 화장을 싫어했기에 선크림과 가볍게 파우더만 바르고 눈화장을 시작했다. 눈 시작부터 눈꼬리 위까지 검정 아이라이너로 길게 그리고 다시 끝부분을 두껍게 마무리하고 검은 섀도를 조금 큰 붓에 묻혀 눈두덩이에 문질렀다.
그리고 다시 조금 작은 붓으로 눈의 음영을 표현하고 아이라인 쪽으로 좀 더 진하게 발랐다. 물론 모두 검은색이었다. 순식간에 거울 속에는 순하지만 고집스러운 눈매가 사라지고 저승사자도 울고 갈 만큼 음산한 여자가 서 있었다. 붉은 립스틱 솔로 입술보다 조금 더 크게 라인을 그리고 립스틱을 발랐다. 가운을 벗고 큰 가슴을 가릴 압박붕대를 맸다.
“아!”
며칠 사이에 커진 유두가 눌리자 찌르는 듯 아프다.
“제기랄!”
이를 악물고 가슴을 동여매자 어째서인지 평소와 다르게 아릿하고 저릿한 가슴의 통증에 붕대를 매는 손이 덜덜 떨렸다. 눌리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전에 같이 꽉 조여 맬 수가 없었다. 붕대에 고정된 유두에서 화끈하게 열감이 느껴졌다.
“아니야. 며칠 동안 계속 자극받아서 그런 거야. 곧 괜찮아져.”
임신에 대한 두려움을 애써 무시하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마치 주문을 걸듯이.
여은은 옷장을 열어 목 주위에 크고 화려한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얇은 옷감이 왼 팔뚝의 흉터를 스치자 신경이 없는 그곳이 미친 듯이 가려워 살을 뜯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떨어지던 뜨거운 입술이 감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없던 일로 하고 싶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지난 일주일은 너무 깊은 자국을 남겼다.
“내일이면 잊힐 거야. 괜찮아.”
가발을 쓰고 검은 슈트를 입으며 여은은 자신에게 끝없이 주문을 걸었다. 침실이 있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니 이윤우와 하준수가 보인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그들의 원래 출근 시간은 아침 식사를 마친 8시 30분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동시에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들을 지나쳐 주방으로 갔다.
“무슨 일이야. 너무 이르잖아.”
“죄송합니다.”
정확히 8일이었다. 언제 오겠다는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다녀오겠다는 말만 남긴 채 떠난 보스는 오늘 새벽 1시에 공항에서 다시 전화했다. 깜깜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벗지 않은 그녀는 어쩐지 조금 살이 빠진 듯 턱선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보스, 저희가 얼마나 걱정을…! 윽!”
다혈질인 성격을 드러내며 곁에선 하준수가 입을 뗄 때였다. 발을 올려 복부를 밀어 버리는 여은에 의해 그는 뒤로 나자빠졌다.
“시끄러워. 언제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설명 따위를 했지?”
“죄송합니다!”
더욱 날이 선 날카로운 눈빛에 하준수는 바싹 얼어 몸을 일으켰다. 사실, 작은 발이 주는 타격감은 전혀 없었으나 그 행위는 어느 순간이고 서열을 재확인시켰다.
“다시는 그런 일 없어. 별일 없었지?”
“어머! 안녕하세요. 사장님.”
주방으로 들어서자 집안일을 하는 오산댁이 밝게 웃으며 여은을 맞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일하던 60대 초반의 후덕한 인상의 여인으로 여은에게 유일하게 잔소리하는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여사님.”
식탁에는 아침을 간단히 먹고 싶어 하는 그녀를 위해 갓 구운 빵과 베이컨, 달걀 프라이와 취향에 따라 먹을 수가 있도록 준비된 버터와 잼이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며 제 자리에 앉은 여은은 신문부터 펼쳤다.
“어휴! 식사하시면서 신문을 보지 말라니까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제가 이 실장님에게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아무리 자매가 함께 갔다고 하지만 이 무서운 세상에 처녀 둘이서 그렇게 무작정 여행이라니! 위험하다고요.”
오직 오산댁만 할 수 있는 잔소리가 시작되자, 새벽에 공항에서 오는 내내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이윤우와 하준수는 뒷짐을 진 채 기대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일 때문에 가신 거예요? 린이는 왜 데리고 가셨어요? 얼마나 피곤했는지 아주, 세상모르게 자더라고요. 이제 졸전 작품 마무리하느라 그 애가 얼마나 바쁜데! 다음 주면 기말고사라고요. 참, 걔도 그렇지 언니가 따라가자고 하니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고! 내려오면 잔소리 좀 해야겠어요.”
“일은 아닌데, 린이를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지요.”
“제가 있잖아요. 어디 가시면 제가 와서 자면 되죠. 다음부터는 위험한 곳에 린이 데리고 가지 마세요. 걔는 사장님과 달라요.”
“아니, 여사님! 저희 사장님도 위험한 곳에 가시면 안 됩니다!”
오직 유일하게 여은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오산댁의 진여린 사랑은 유난했지만 오늘의 말은 수위를 많이 넘는다고 생각을 했던지 하준수가 옆에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장님만큼 여린 아가씨를 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러세요?”
여은과 여린을 딱 자르듯 분리해서 말하는 오산댁의 말이 무척이나 오묘했던지 평소에는 과묵한 이윤우도 거들었다. 두 수행원은 혹여나 보스의 마음이 상한 것은 않은지 눈치를 봤다.
“누가 보면 여사님이 정말 우리 린이 엄마인 줄 알겠어요.”
그래도 누구보다 믿는 사람의 범주에 넣은 오산댁이었기에 여은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여은의 시선이 돌아갔다.
“내, 내가 무슨…. 나 같은 게 어떻게 린이의 엄마가….”
붉어진 그 얼굴은 마치 큰 칭찬이라도 받은 듯 웃음기로 입가를 씰룩이며 애써 감정을 누르는 듯해 보였다.
“아이. 얼굴이 왜 이리 화끈거리는지. 갱년기라 그런가.”
“여사님, 여사님 연세가 몇인데 갱년기예요? 으하하!”
평소에도 여린의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리는 오산댁이었지만 오늘처럼 표정의 변화가 다양하게 심한 것은 처음이었다. 눈치 없는 하준수가 큰소리로 나이를 지적하며 웃다가 여은과 눈이 마주치자 차려 자세로 얼어붙은 채 자세를 바로 했다.
여은의 눈이 60대의 나이 같지 않은 오산댁의 피부에 닿았다. 지금도 저렇게 빠글빠글하게 볶아 놓은 듯한 파마머리만 아니라면 50대라고 해도 믿을 얼굴이다. 자신의 시선이 불편해 보이는 오산댁을 보며 여은은 별말 없이 8일간 훌쩍 집을 나간 자매들에 대한 걱정이라고 생각하고 화제를 돌렸다.
세상 누구도 믿지 않지만, 자신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신뢰는 강철보다 강한 그녀였다. 여린과의 비교보다 자신 앞에서 저토록 동생의 걱정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불쾌했던 아침의 기분을 눌러 준다.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가까운 데 다녀왔어요. 여사님, 아무 말 없이 다녀와서 죄송해요. 이 실장, 하 실장, 아침 먹었어?”
무심하게 말하지만, 일찍 나선 자신들의 끼니를 걱정해 주는 보스의 말에 둘은 눈을 빛냈다.
“못 먹었습니다!”
하준수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호호호! 마침 크루아상을 넉넉하게 구웠으니 실장님들 드실 베이컨과 달걀만 더 구우면 돼요. 어서 앉으세요.”
다시 평정심을 찾은 오산댁의 톤 높은 웃음소리가 주방에 울렸다. 이윤우와 하준수는 한결 누그러진 보스의 표정을 살피며 자신들이 먹을 빵을 챙겨 거실 탁자로 향했다. 감히 보스와 겸상은 안 된다는 엄격한 교육의 산물이었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여은은 이윤우를 불러세웠다. 그러고는 식탁에 앉으라고 턱짓했다.
“가, 감사합니다!”
누구보다 엄격한 보스가 허락한 겸상에 감격한 하준수가 냉큼 대답하며 맞은편에 앉았다가 고운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보고 얼른 끄트머리로 옮긴다. 하준수는 자기 분량의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솥뚜껑 같은 두 손을 다소곳이 무릎 위에 얹고 기다렸다. 그러나 시선만은 보스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끄트머리의 그 옆에는 당연히 이윤우가 앉았다.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우아하게 움직이더니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 베이컨과 달걀 프라이를 작게 자른다. 그리고 반으로 갈라진 크루아상에 아주 약간의 버터를 바른 후, 베이컨과 달걀을 넣는다. 험한 일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어 보이는 고운 손이지만 그 손가락 하나로 무수히 많은 적을 없애고 진도 파를 유지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이들을 처리한 것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진여은을 여자라고 얕잡아 보고 우습게 여기며 뒤에서 깝죽대지만, 결코 앞에 나서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가시적으로는 사나운 개처럼 곁을 지키는 이 덩치들이 그녀를 지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진여은과 눈이라도 한번 마주쳐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진여은은 타고난 카리스마의 여제였고 자신의 영역에 조금이라도 눈을 돌리는 이들을 철저히 응징했다.
여자라서 혹은 어리기 때문에 기대하는 자비는 저 곱고 우아한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겨 버리고 늘 신고 다니는 날카로운 킬 힐로 잘게 지르밟아 버린다. 진팔양을 따르던 수하들은 장례식장에서 보여준 진여은의 자해로 똑똑히 깨닫고 자각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바쳐서 자신의 것을 단 하나라도 빼앗기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커다란 방패가 되리라는 것을!
“린이는 일어날 때까지 그냥 두세요.”
자신이 류태주와 있는 동안, 호텔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열심히 삽질하느라 피곤했을 것이다.
“예. 아무래도 여독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두었어요. 지난주에는 무단으로 수업도 빠졌으니 조금 있다 깨워야죠. 졸전 작품 평가가 코앞이라….”
진여린의 학교 시간표까지 완벽하게 꿰고 있는 오산댁이었다. 그것에 관해 정작 여린은 싫어하는 내색이었지만 바쁜 외부 활동으로 동생에게 신경 쓸 수 없었던 여은은 그런 부분에서 오산댁에게 더욱 고마웠다. 그리고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는 누구보다 완벽한 비서 역할까지 하던 그녀였기에 여은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은 안 피곤하세요? 오늘 같은 날은 좀 쉬시지. 능력 없는 아랫것들 때문에 사장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에그! 내 속이야!”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빵을 먹는 서늘한 분위기의 여자에게 동정의 시선을 보낼 수 있는 사람도 그녀가 유일했다. 여린에게 집중된 잔소리를 의식했는지 오산댁의 다음 타깃은 진여은이었다. 엄한 화살이 수행원들에게 향하자 넓은 식탁의 끄트머리에서 쭈그려 있는 덩치들은 그저 제 주인의 눈치를 보기에 바쁘다.
“이름만 사장이야, 이름만. 사장이 어떻게 직원보다 더 열심히 일하냐고요! 8일이 뭐야! 휴가를 가려면 한 달은 유럽에서 칵테일이나 마시다 오고 해야지.”
“홍콩도 좋았어요.”
“홍콩!”
드디어 보스의 입에서 나온 8일간의 행선지가 나오자 수행원들의 눈이 반짝였다.
“별들이이이이 소근대에느으으으응…. 우리 사장님 홍콩에서 별 좀 보셨나 모르겠네.”
“별 많이 봤죠. 마침 우기인데도 날이 맑더라고요.”
“콜록!”
“험험!”
오산댁의 농후한 성적인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 여은이 아무렇지 않게 응수하자 끄트머리에서 기침 소리가 요란히 들렸다. 아직 손도 안 댄 빵이 목에 걸린 것처럼 쿨럭거리는 자기 수행원들을 건조하게 쳐다보던 여은이 시선을 돌리자 이윤우와 하준수는 급히 컵을 들고 물을 들이켰다.
자신의 농담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여은이 익숙한 오산댁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잘 길이 든 사냥개 같은 남자 둘 앞에 갓 구운 베이컨과 달걀이 담긴 접시를 주며 너그럽게 웃었다.
“이러니 정말 개 같네요. 호호호! 실장님들을 왜 진 사장의 개들이라고 하는지 알겠어요. 호호홋!”
하이 톤의 웃음소리에 여은의 눈이 들고 있던 빵에서 남자들에게 향했다. 진여은의 개들로 불리는 그들은 늘 듣는 말이었으나 보스 앞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진여은 앞에서 그런 막말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으나 거침없는 오산댁의 입담에 이윤우와 하준수의 간은 콩알만 해졌다. 그들에게 보스는 늘 종잡을 수 없이 어렵고 두려운 존재였다. 그들에게 어떤 위해를 끼치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미련없는 자기희생이 기본 내장된 존재였기 때문이다. 보스가 사라진 그 8일이 단지 머리를 식히러 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거짓말이었다. 여은의 눈치를 살피느라 식탁 위에 둔 음식에 손도 못 대고 있다. 붉은 입술의 한쪽 끝이 올라갔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인간처럼 둘은 멍하니 그 입술 끝만 바라보았다.
“먹어. 사냥을 따라다니려면 든든히 먹어야지.”
너희를 내 개로 인정한다는 말이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인 듯 충직한 두 남자는 빵에 손을 대었다. ‘사냥’이라는 말처럼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8일간의 공백에 빈틈이 있는지 살피는 진여은은 바빴다.
□ ◆ □ 윤이아
“끄아아악!”
서류철을 안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던 여자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처절한 비명이 들린 곳은 사장실이라고 적힌 묵직한 문 안쪽이었다. 문을 지키고 선 남자들은 일상이 시작된 일과처럼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두렵지만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동그란 눈이 문을 지키고 선 남자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어깨가 솟구쳤다.
가만히 있어도 사람 하나는 죽일 듯한 살벌한 눈도 눈이었지만 귀 아래에서 목으로 길게 그인 흉터와 슈트 안에 받쳐 입은 화려한 티셔츠 위로 번쩍이는 금목걸이가 누가 봐도 ‘나 조폭이요.’ 하고 말하고 있었다.
“난, 몰라. 여기 진짜 조폭 집단인가 봐.”
겁 없이 혼자 사장실이 있는 5층에 올라온 것을 보면 신입 직원이었다. 진도 금융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당연히 일반인들이었다. 나름 직원 복지가 좋은 이곳은 퇴사율이 적기로 유명하기도 했는데 누구나 처음 입사하면 진도 금융의 사장이 조폭이라는 것에 기함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무런 위해가 없고 오히려 진상 고객들에게서 보호해 주니 딱히 겁내지 않았다.
그것을 반증하듯 어느 날부터 신입 직원을 일부러 5층으로 보내는 신입 환영회를 시작했는데 그것을 보고받은 사장이 딱히 별소리하지 않아서 조직원들도 그것을 하나의 행사처럼 받아들였다. 후다닥 사라지는 여자를 지켜보던 남자 하나가 하품했다. 안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개새끼들! 얼마나 해 먹었대?”
“큰 거 다섯 장 정도?”
남자는 동료의 대답에 입을 삐죽댔다.
“보스 열 좀 받겠네. 그런 주제에 보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지껄이다니. 엎드려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앞쪽에서 울먹이며 비는 소리가 났다.
“진 사장, 아니. 사장님!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한 번만! 도, 돈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제 옆의 동업자가 하이힐 뒷굽에 찍힌 눈에서 나오는 피를 보며 사색이 되어 엎드려 빌었다. 의자에 뒤로 기대어 앉은 채 다리를 들어 수하가 뒷굽에 묻은 피를 닦는 것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여자는 한쪽 입술을 올리고 비릿하게 웃었다.
“역시 김 사장님은 말이 통할 줄 알았다니까요.”
“핫! 네에! 네에! 꼭 갚겠습니다!”
“그럼요. 남의 돈 해 먹고 어디 다리 뻗고 잠이라도 잘 수 있나요? 그쵸? 그게 가족도 살리는 길이고.”
가족이라는 말에 남자의 얼굴이 더욱 사색이 되었다.
“아드님이 공부를 아주, 잘하시네. 미국에서 유학이라…. 좋지. 집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공부만 하면. 그 학교가 그렇게 프린스턴 대학에 많이 보낸다면서요? 뉴저지에 있다고?”
김 사장은 아들의 학교까지 알고 있는 지독한 여자를 보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열심히 일하셔야죠. 수재 아드님, 비행기 삯이라도 보내주려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제 동업자를 부축해서 나온 김 사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너무 우습게 봤어. 여자라고 얕잡아 봤더니…!”
한쪽 눈을 잃어도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힘겨운 걸음으로 빌딩을 나왔다.
“이게 몇 번째야?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지자 남자들의 숙어진 허리가 더욱 깊이 내려왔다.
“언제까지 내가 직접 장부를 대조해서 들여다봐야 하느냐고! 장식으로 달고 다닐 거면 그따위 대가리는 집에 두고 나와!”
“면목이 없습니다.”
“짜증 나!”
서류를 바닥에 전부 내던진 진여은은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성이 풀리지 않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계속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보스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던 하준수는 제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근래 미열이 있는 것 같다며 저녁마다 하던 유도 대련도 쉬던 참이라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횡령 사건의 배경은 모두 보스가 여자라 만만해 보이는 이유라니 아무리 8년 동안 반복된 경험이라고 해도 지겨울 만했다. 하준수는 충분히 보스의 짜증을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가장 쉽게 푸는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권했다. 보여주기식이긴 하지만 명운의 회의에 참석할 때는 꼭 한 번씩 입에 물었기도 했으니 말이다.
“뭐야?”
진여은의 서늘한 눈이 내민 길쭉하고 하얀 흡연 제품에서 하준수의 얼굴로 향했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정리하는 조직원들을 보고 있던 이윤우는 한 번씩 엉뚱한 짓을 저지르는 하준수에게서 눈을 뗐던 자신을 탓하며 이미 불쾌함이 가득한 보스의 음성에 혀를 찼다.
“요즘 스트레스가 쌓이신 모양입니다, 보스. 한 대 태우시면 후련할지도…, 윽!”
허리를 숙여 담배를 권하던 하준수는 배에 직격으로 떨어지는 날카로운 킬 힐에 아랫배를 잡았다. 무시무시한 뒷굽이 아슬아슬하게 좆이 있는 바로 위를 찍었다. 그는 급격히 줄어든 제 해면체를 두 손으로 보호하듯 감싸듯 쥐며 무릎을 꿇었다.
“바보 새끼. 담배 냄새 싫어하는 거 몰라? 여기나 저기나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어!”
여은은 무릎 꿇은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수하에게 잔뜩 미간을 찌푸려 보이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그녀는 아랫배를 살짝 찌르는 듯한 고통에 몸의 중심이 흔들렸다.
“보스!”
워낙 높은 킬 힐이라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면 볼썽사납게 넘어진다. 여은은 급히 의자의 팔걸이를 잡아 중심을 잡으며 달려오는 이윤우에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발도 붓고 컨디션이 엉망이다.
“보스, 안색이 안 좋으신데 오늘은 일찍 퇴근하심이….”
“겨우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웠다고 당장 5억이 날아갔는데 내가 너희를 어떻게 믿겠어! 오늘 예정대로 업소 돌 거니까. 그렇게 알아.”
반박할 수 없는 추궁에 할 말이 없어진 이윤우는 허리를 숙였다. 조금 눈만 돌리면 돈을 해 먹는 도둑놈들이라 방심할 수 없었다. 검은 마녀의 소문은 조직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졌지만 다들 마음속으로 얕잡아 보는 것이 있어서 사소한 트러블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항상 느긋하고 오만한 표정으로 상대하던 진여은이었다. 하준수가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불안할 만큼 그녀는 지금 한 치의 여유도 없어 보였다.
“야, 빨리 일어나. 가자.”
이윤우는 아직도 제 아래를 쥐고 엎드려 있는 하준수의 어깨를 툭 치며 벌써 문 앞까지 가 있는 보스를 쫓아갔다.
□ ◆ □ 윤이아
오소희는 얼굴 가득 애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술을 따랐다. 남자들이 죽고 못 사는 간살스러운 눈웃음으로 벌써 단골도 만들고 2차도 가서 손에 쥔 돈이 제법 되었다.
‘역시 첫날 자존심을 죽인 건 잘한 일이었어!’
첫날부터 사장에게 지적당한 옷차림에 고집부리다 해고당할 뻔한 아찔한 기억을 떠올리며 오소희는 마음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게실에서 제법 친해진 여자들과 말을 섞어 보니 그렇게 자존심을 세우다가 해고당한 여자들이 제법 된다고 했다.
고급스러운 매장 분위기에 딱 맞는 수준 높은 손님들은 마치 살이 오른 물고기가 잔뜩 들어 있는 양식장 같았다. 거기다 높은 시급까지 더하여 단 며칠만 일했는 데도 벌써 다른 업소에서의 한 달 벌이를 넘었다. 게다가 이 남자!
오소희는 두 번째 보는 근사한 미남자를 보며 군침을 흘렸다. 류태주는 딱 봐도 거물급이었다. 특별한 지명이 없었기에 오소희는 단골도 마다하고 이 방을 지원했다. 보너스가 될 2차가 예정되어 있는 단골이었지만 그 돈을 포기하고서라도 이 남자를 선택한 오소희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가 없었다.
“또 오셨네요. 혼자 오시면서 이런 세트를 주문하시는 일은 잘 없는데….”
자신이 따라 준 술잔을 잡을 생각도 없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남자의 완벽한 옆모습을 마음껏 감상하며 오소희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함께하는 술자리도 아닌 이 세트 가격은 1천만 원! 해운 쪽에서 일한다는 남자의 개인 정보를 떠올리자 입술 끝이 저절로 올라간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이 남자만 잡는다면 제 인생은 확 펴질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든 이 기회에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겠다는 결심을 굳히며 남자의 곁으로 바싹 붙어 앉았다. 접촉을 싫어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눈치를 봤는데 지금은 딱히 싫어하는 내색이 없자, 그녀의 자신감이 더욱 치솟았다.
“생각할 것이 많으신가요? 얼굴에 근심이 있으시네요.”
“…그래 보이나? 하긴.”
그저 의례적인 응대였는데 남자의 대답이 돌아오자 오소희의 눈이 반짝였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바람맞았거든.”
‘보고 싶은’, ‘바람’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뉘앙스는 분명히 여자를 뜻하는 것이라 오소희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맹렬한 질투가 끓어올랐다.
“어머! 태주 씨 같은 분을 바람맞히다니 어떤 분이실까?”
류태주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명명하는 여자를 한번 보고는 다시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소희는 자신에게 향했던 서늘한 시선에 살짝 돋은 소름을 무시하고 미소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표정을 관리했다.
“제가 한번 모신 손님들 성함을 다 기억해요.”
“머리 좋군.”
“제가 이래 봬도 학교 다닐 때는 꽤 성적이 좋았어요.”
별 뜻 없이 응수한 말에도 불구하고 반색하며 종알대는 여자의 존재는 처음부터 인지하지도 않았다. 그의 눈은 맞은편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천장까지 이어진 긴 문의 위쪽은 유리로 되어 커다란 꽃이 그려진 벽면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미관을 자랑했으나 그것은 이곳이 오픈된 공간임을 자각하라는 의미였다.
좋은 술과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밀폐된 공간에서는 늘 은밀한 시간이 만들어졌다. 특히나 지정한 손님과는 2차까지 이루어지는 깊은 관계가 많았기에 간혹 음란한 행각을 벌이는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늘 관리하는 가드들이 험상궂은 얼굴로 복도를 지나가곤 했다.
유리문으로 사람들이 지나가기만 해도 대부분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손님들은 자세를 바로 했다. 종업원이 그런 행위를 했다가는 바로 해고 사항이 되었기에 유리문을 늘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류태주는 그런 사항과 전혀 반대로 밖을 보고 있지만 말이다.
맨발로 드레스를 찢은 채 달아난 자신의 히메는 미리 준비하고 있었을 여동생과 홍콩을 떠났다. 전용기로 미리 공항에 도착한 류태주는 멀리서 선글라스를 껴도 알 수 있을 만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선연한 여자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제 홍콩 호텔로 보내온 택배 박스에는 그가 사준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등의 액세서리와 찢어진 드레스가 엉망으로 구겨진 채 들어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이 분명한 그녀의 성격을 봤을 때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 택배 박스를 본 어제까지 그는 매일 밤, 진여은의 집 앞에 서서 한 시간 정도 머무르다 가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카지노 관리자가 횡령으로 한쪽 눈을 잃었습니다. 하이힐 뒷굽으로 찍는 건 검은 마녀의 특기죠. 방금 움직였습니다. 영업장을 도는 모양입니다.>
류태주는 진도 파에 심어 놓은 수하의 보고를 떠올리며 담배를 꺼냈다. 문의 유리로 여러 사내들이 바쁘게 입구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그의 입매가 살짝 위로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막 켜지기 시작하는 이른 시간이지만 고급 호텔을 옆에 끼고 있는 대로변인지라 거리엔 행인이 많았다. 조용하던 주점 입구가 순간, 술렁이더니 입구부터 험악한 인상의 덩치가 큰 남자들이 가지런히 정렬하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혹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옆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 인도를 장악한 검은 세단의 뒷문이 열리자 붉은 밑창의 날렵한 하이힐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수많은 인간을 골로 보낸 저 뒷굽은 칼과 같이 잘 벼려져 살아 있는 흉기였다. 자신들의 보스가 저 흉기를 휘두르며 고통에 겨운 인간의 얼굴을 얼마나 무표정한 눈으로 즐기는지 아는 사내들의 표정은 모두 하나같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궁금한지 지나가는 몇몇 사람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기웃거렸지만 190cm에 육박하는 사내들의 사이에 묻힌 인영의 머리카락 하나 보기 쉽지 않았다.
“조폭인가 봐.”
“설마. 여자 같은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남자들의 험악한 눈빛과 마주치자 모두 힉!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날카로운 뒷굽을 천천히 움직이자 귀 옆의 짧은 단발과 화려한 귀걸이가 찰랑인다. 허리를 숙인 어깨들을 보는 검은 섀도로 덮인 갈색 눈동자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조폭’ 그랬다. 자신의 지금 모습이자, 위치다. 조폭의 딸로 태어났고 자랐다. 살기 위해,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진여은의 서늘한 시선이 충성스럽기 그지없는 사내들 사이를 지나가며 속으로 비웃었다.
그녀는 이들을 믿지 않았다. 지금은 이렇게 허리를 숙이고 있지만, 그것은 오직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속성은 힘이었다. 언제라도 자신들을 지배할 더 큰 힘에 허리를 숙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어쩌면 부모님을 죽인 조력자가 이들 틈에 있을 수도 있다.
지난 8년간 갖은 수를 써서 찾으려 했지만 결국 부모님의 차를 덮친 트럭 기사의 배후는 알 수 없었다. 마치 꼬리를 자르듯 깔끔한 뒤처리는 결코 작은 세력이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다. 진여은은 결국 부모님을 죽인 배후 찾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정은 피눈물을 흘릴 만큼 원통한 것이었으나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존재가 있었다. 사랑스러운 여동생의 행복한 일상을 보는 것이 진여은에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진도 금융의 완전한 지분을 가져야 했는데!
“제기랄!”
여은은 요즘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감에 입술을 짓씹으며 뒷굽을 밟은 땅을 힘껏 박찼다. 그 바람에 부은 발바닥에 찡한 통증이 올라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허리를 숙인 사내들을 무심히 바라보는 그녀의 미간은 계속해서 찡그려진 상태였다.
평소 일관된 싸늘한 무표정에서 벗어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얼굴에 사내들이 허리를 더욱 숙였다. 진여은은 사무실로 향하며 오늘 몇 번이나 확인한 날짜를 떠올렸다. 늘 정확하던 28일 주기의 생리가 없는지 일주일째였다.
어쩌면 임신이 안 되었을 수도 있다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 보았지만, 일부러 가임기를 따지며 남자의 과한 정욕을 다 받아들인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모든 조건을 차치하고서라도 조폭만은 아니었어야 했다! RUU라니!
자유롭게 남자를 선택하기 위해 위장하느라 자신의 수하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갔던 것이 잘못이었다. 이윤우에게라도 연락해서 류태주라는 인간에 대해 알아보라고 조사를 시켰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윤우에게 연락하는 즉시 파악된 자신의 위치에 당장에 득달같이 달려들 다른 조직과 저를 노리는 숙부가 불 보듯 훤했기에 자신의 후회가 쓸데없음을 잘 안다.
RUU의 류태주는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었다. 번듯한 인물에 넘치는 재력, 아이비리그를 장악한 뛰어난 두뇌를 가지다 못해 심심풀이로 조직까지 운영하는 인간이었다. 자신을 보며 재미있다는 눈빛이 떠오르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언제부터 자신을 주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 인간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재수 없이 히메나 이름을 ‘…은’ 따위로 애매하게 부르며 속으로 희희낙락했을 남자를 떠올리자 머리에 다시 열이 차올랐다. 자신을 가지고 놀다니 용서할 수 없다.
류태주가 떠오르자 분노로 부르르 떨던 여은은 다시 늦어지는 생리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병원에 가서 확인하는 즉시 수술해 버릴 것이다. 그토록 고르고 고른 남자가 조폭이라니! 진여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지그시 누르고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깊은 눈매가 검은 아이섀도로 더욱 음울해 보이는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잔뜩 얼어붙은 박 마담이 쩔쩔매는 표정으로 장부를 대령했다.
“문제 일으키는 종업원은 없나요?”
‘花’의 매출은 진도가 소유한 그 어떤 업소보다 월등했기에 진여은도 이곳만큼은 신경 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약에 문제가 있었더라면 곧바로 보고가 올라왔었겠지만 으레 하는 형식처럼 질문했다.
“문제야 뭐, 워낙 여자들만 있는 곳이다 보니 질투로 인한 싸움이죠.”
돈과 관련된 큰일이 아니면 보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내들과는 달리 박 마담은 진여은을 무서워하면서도 종알종알 말을 잘했다.
“질투?”
그래도 여태껏 듣지 못했던 말이라 진여은이 되묻자 박 마담은 사장의 관심이 무서우면서도 기쁜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새로 온 아이가 유독 성격이 눈에 띄네요. 온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단골도 만들고, 눈치를 봐서는 2차도 제법 따내는 것 같구요.”
진여은은 여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농후한 말은 귀에 담지 않고 어서 결론을 말하라고 장부를 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스폰서가 필요한지 돈 냄새 나는 손님만 콕 집어 접대하려고 해서 얄미워서 지켜보고 있어요. 오늘도 지명 손님이 있으면서도 다른 방에 들어가려고 원래 배정된 종업원과 싸웠지 뭐예요. 하긴 나라도 류태주 님, 정도라면….”
사소한 종업원 간의 트러블은 관리자인 네 일이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장부를 뒤적이던 진여은은 오늘 예약 명단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천만 원짜리 거베라 세트로 쓰인 예약자의 이름은 류태주였다.
“류태주?”
“예! 일전에 이선재 님과 동행으로 함께 오셨었는데 오늘은 혼자 왔어요.”
사장의 관심이 반가운지 설명하는 박 마담의 얼굴이 밝아졌다.
“일전이라면….”
“예! 그때도 사장님께서 방문하신 날이죠. 알고 보니 RUU 해운의 실질 경영자라네요!”
이제야 생각났다! 이선재 옆에 있던 장신의 사내. 원래, 사람의 허리 위를 잘 보지 않는 것은 어릴 적부터의 버릇이다. 홍콩에서는 부득이한 경우였기에 남자의 얼굴을 먼저 살핀 것은 순전히 자신의 그 바보 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인간을 찾기 위해서였다.
류태주가 벌써 가까이 접근해 왔음을 깨달은 진여은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날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지, 하!”
확실하다. 그 인간은 저를 알고 이미 제 주위를 얼쩡대고 있었다. 그것도 모른 채 속절없이 그의 외모에 홀린 것을 생각하니 뒤통수를 맞은 듯 불쾌했다. 근 일주일간 지내면서 자신에게는 영양가 없는 정보만 수없이 건넨 남자에 대한 괘씸함에 다시 열이 차올랐다.
“어느 방이야?”
여은은 보던 장부도 덮어 버리고 복도를 나왔다. 사장이 업소에 와서 장부 외에 다른 데 신경 쓰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뒤따르는 이윤우와 하준수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여은은 앞서 걸으며 슈트 바지에 손을 넣었다.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졌기 때문이다. 하이힐이 푹신한 카펫을 밟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는 수십 가지의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접근한 이유가 뭘까?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홍콩에서의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을까? 류태주의 정체에 분노하면서도 그녀의 차가운 이성은 육체적으로 유혹한 것은 자신이 먼저라고 인지했다. 그리고 자신은 이름과 나이를 속이고 거짓말로 접근했으며 동의 없이 임신을 목적으로 잠자리를 했다.
‘하지만 당신 정체를 알았더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테지!’
이미 제 정체를 알고 있으면서도 속은 척한 것은 분명한 농락이다. 그러고 보란 듯이 제 업소에 나타난 남자를 보러 가는 진여은의 마음은 분노와 이해할 수 없는 그리움이 함께했다. 웃으면 휘어지며 살짝 잡히는 눈꼬리의 주름이나 키스할 때 살짝 감은 눈의 속눈썹이 살짝 떨리던 잔상을 하이힐로 짓밟으며 박 마담이 말한 방의 문 앞에 섰다.
고개는 복도를 걷던 정면을 향한 채로 눈만 옆으로 돌렸다. 보통 업소에서 일하는 가드들의 어깨 정도부터 시작하는 문의 유리는 12cm 힐을 신었음에도 코끝에 왔다. 눈동자만 움직여 안의 남자만 보려 했던 여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류태주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유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뭔가 여자와 즐거운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여자는 한번 본 기억이 있었다. 전에 방문했을 때 옷 때문에 해고 이야기까지 나왔던 종업원이었다.
여자는 화려한 이미지의 미인이었다. 박 마담의 말대로라면 지명까지 마다하고 원래 배정된 종업원과 싸워서까지 이 방의 자리를 얻어낸 여자는 남자를 향해 노골적인 유혹의 시선을 보내며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남자가 올라간 입꼬리로 뭐라고 말하자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말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웃으며 풍만한 가슴을 남자의 몸쪽으로 밀어붙였다.
눈에서 당장 불이라도 나올 듯 갈색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그 와중에도 짙은 남색 쓰리 슈트 차림의 근사한 류태주의 미모가 인식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진여은은 유혹이 명백한 여자의 제스처를 받아들이는 류태주의 태도에 발걸음을 돌렸다.
화가 났지만, 저 방으로 들어갈 그 어떤 명분도 자신에게는 없었다. 자신을 농락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거짓말로 접근한 여자를 마다하지 않고 꿀꺽 먹어 버린 죄밖에 없었다. 속이 미친 듯이 요동치고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을 질투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진여은이었다. 그날은 엉망진창이었다. 계속해서 아슬아슬 위험하게 찰랑이던 물컵은 류태주라는 한 방울로 수위를 넘어 버렸다. 이후로 방문한 영업장마다 히스테리를 폭발하던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로 하준수에게 유도 대련을 신청했다. 기분이 너무 엉망이라 동생과 대련하면 화풀이가 될 것 같아서였다.
텅!
바닥에 매트만 깔린 넓은 유도실에 거구가 내리꽂히자 굉장한 소리가 울렸다. 전방회전낙법의 깔끔한 자세를 보인 하준수는 검지로 코를 한번 쓸며 빙그레 웃었다.
“이제 준비 운동은 끝나셨죠? 진짜 시작합니다아?”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진여은을 며칠간 지켜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던 하준수였다. 선천적으로 스포츠맨의 뇌를 타고난 그는 속에 쌓아 둔다든지 고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제법 빠른 눈치를 가진 이윤우에 비해 보스로서 진여은은 하준수에게 굉장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늘 똑같은 일상을 보내는 칼 같은 시간관념, 어떠한 여흥도 유희도 즐기지 않는 철저한 자기 관리, 상대의 비리를 캐내는 날카로운 통찰력, 사업에 대한 뛰어난 직관력, 그러면서도 진도 금융 외에는 사업 확장을 하지 않는 의뭉스러운 행보,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으로는 절대 알 수 없었으며 가벼운 농담도 즐기지 않는 그야말로 검은 마녀라는 별명이 찰떡같이 맞는 자신의 상사가 요즘 이상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녀온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온 그날 이후로 한숨을 쉬거나 미간을 찡그린 채 입술을 씹는 일이 잦았다. 보스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그녀는 불안해 보였다.
“땀을 흘리면서 운동하는 그것만큼 속이 시원해지는 게 없죠! 자아! 들어오세요! 보스의 스트레스, 불안, 다 날려 드릴게요!”
“불안?”
여은은 무릎을 살짝 굽힌 방어 자세를 취하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한 하준수는 보이는 대로 말하는 인간이었기에 자신이 불안이 드러났다는 것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명운 최 회장이 자기 아들 최지승과 결혼 운운했던 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그따위 무시해 버리자고요! 자아! 들어오세요!”
진여은은 한동안 잊었던 명운 그룹의 최 회장이 떠오르자 다시 짜증이 올라옴을 느꼈다. 요즘 온통 류태주의 일로 정신을 빼앗긴 탓에 그쪽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류태주만큼이나 재수 없는 최지승의 면상을 떠올리게 한 하준수에게 살기를 담아 노려보았다.
“너, 오늘 죽었어, 하준수!”
콰당!
기습적으로 다리를 걸어 업어치기를 한 진여은의 기술에 걸린 하준수는 다시 엄청난 소리를 내며 내리꽂혔다.
“좋아요! 완벽했어요!”
하준수는 군더더기 없는 보스의 기술에 탄복하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연거푸 내리꽂히는 동안 그의 전투의지가 만랩으로 상승했다.
텅!
한팔업어치기 기술에 당한 여은은 곧바로 일어나 다시 준비 자세를 취했다. 유도는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도 후련하지만 이렇게 완벽한 기술에 넘어져 등으로 전해져 오는 진동이 기분을 좋게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혹사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다.
하준수는 체급이 달라 상대하기 버겁지만 오랜 선수 경력으로 다져진 감각으로 대련자에게 맞춰 줄 줄 알았다. 단순무식하지만 유도 기술만큼은 상당한 실력자였다. 여은은 제대로 각을 잡고 달려드는 하준수의 기술에 연거푸 넘어지면서 꼬였던 속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제대로 걸려든 업어치기 한판에 여은은 뭔가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악!”
바닥에 떨어지자 후련한 통증이 있어야 할 등이 아닌 골반과 허리를 타고 배를 칼로 저미는 날카로운 감각에 여은은 비명을 질렀다.
“보스!”
진여은의 반응이 심상찮음을 단번에 알아본 하준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으… 배가 아파…!”
“언니?”
원래 유도에 관심이 없던 여린은 옆방에서 러닝 머신을 뛰다가 언니의 날카로운 비명에 놀라서 뛰어왔다.
“앗! 보스 피가!”
하준수는 흰 유도복에 서서히 번져 가는 붉은 피에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피! 언니!”
당황스러운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칼로 저미는 듯한 고통에 저절로 배를 감싸 안은 여은은 식은땀만 흘리며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구, 구급차를…!”
“부르는 시간 동안 빨리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아가씨! 차 키를 준비해 주세요! 차는 대문 앞에 있어요!”
마침 차고에 넣지 않고 차를 대문 앞에 주차했기 때문이다. 여린은 울먹이며 언니를 둘러업은 하준수를 따라 현관으로 뛰어갔다. 다급한 손길이 대문을 열었다.
“언니! 언니! 정신 차려! 언니!”
문을 다시 닫을 여력도 없이 여린은 혹여나 여은이 정신을 잃을까 걱정되어 소리쳤다.
“피가 더 많이 나! 어떡해!”
여린은 업힌 언니의 흰 유도복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에 사색이 되어 울었다. 거의 의식이 없는 여은을 보듬기 위해 여린이 먼저 차를 탔다. 늦은 시간, 골목을 울리던 울음소리는 곧 요란한 굉음을 내며 출발하는 차와 함께 사라졌다.
일과의 마침표처럼 여은의 집 앞에서 있던 류태주는 담배를 꺼내려다 핏자국이 선명한 여은의 모습에 핸드폰을 들었다.
“39너 668* 차량 따라가. 신호등 조작해.”
웬만해서는 표정의 변화가 없는 류태주도 이번 일만은 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항상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데 선수란 말이야.”
류태주는 수하가 조작한 신호등의 도움으로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진여은의 차를 확인하며 느긋한 표정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어차피 그녀의 차량은 수하들이 따라붙어 있다.
“완벽한 것 같으면서도 늘 빈틈투성이.”
류태주는 혀를 차며 밖으로 열린 대문을 밀어 닫았다. 자석으로 붙으며 철컹! 하고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를 확인하고 다시 차로 향했다. 지금 운전하는 수행원 하나만 둔 진여은은 공격당하면 100% 위험 상황이다.
오늘도 호신용으로 신고 다닌 것이 분명한 킬 힐로 남자 하나의 눈을 아작 내지 않았던가? 아무리 횡령이라는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원한을 남기는 그런 처벌은 위험천만이다.
“아예 원한도 품을 수 없도록 처리를 했어야 옳지. 우리 공주님은 마음이 너무 물러서 탈이란 말이야. 그러니 나한테 잡아먹혔지.”
모든 처음을 가져가더니 결국은 제 동정까지 가져가 버렸다. 8년 동안 제가 준비한 것이 무색해질 만큼 너무나 쉽게 다가오더니 제 동정을 홀랑 먹고 도망가 버렸다. 더구나 그 시점이 자신의 이름을 알았을 때라는 것에 그는 살짝 충격을 받은 참이었다.
류태주는 그녀가 제안한 이 게임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스스로 표적을 그리고 사냥감이 되었다. 타고난 포식자인 그는 늘 사냥감을 단숨에 물어뜯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제 목을 늘어뜨려 급소를 내줄 때까지 몰아붙이는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매일 밤 퇴근하는 그녀를 지켜보기 위해 외조부의 약속도, 중요한 계약도 미룬 채 한국에 체류 중이었다. 자신의 모든 생활 방식을 진여은으로 만들어 놓고 정작 본인은 모든 기억을 리셋 시킨 것처럼 평소의 생활을 냉정한 얼굴로 이어 가는 것이 얄미워 ‘花’를 찾았다.
찍어낸 듯 무감한 그 표정을 일그러뜨리려고 일부러 자극했다. 당장 자신을 핥을 준비가 된 여자에게 웃어 보라고 말했더니 연기 지망생이라고 밝힌 여자는 제법 웃는 연기를 잘 해냈다. 검게 칠한 아이섀도 안의 갈색 눈동자에서 불이 붙다 못해 그 예쁜 미간에 세로줄이 세 개나 그였다.
충분히 만족한 그는 만족스러운 연기를 한 여자에게 후한 팁을 주었다. 다시는 그 살덩어리를 제 몸에 붙이지 말라는 차가운 경고를 해주긴 했지만 말이다.
“방금 사장님 아닌가요? 정말 재수 없지 않아요? 돈만 많으면 뭐 해요? 여자로서 매력은 완전히 꽝! 아마도 괴팍한 늙은이로 평생 혼자 살 팔자라니까요. 아세요? 저 여자, 그냥 앉은 자리에서 이 업소랑 은행까지 물려받았잖아요. 그래도 저는 그런 거 하나도 부럽지 않아요.”
그 후에 여자가 한마디만 덧붙이지 않았어도 꽤 좋은 점수를 줄 뻔했겠지만.
“감히, 내 여자를 뒤에서 욕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지.”
‘花’에서 진여은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웃던 류태주는 덩달아 생각난 불쾌한 여자의 말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저 방향이면 해성 병원이가?”
류태주는 수하가 태블릿으로 보내주는 실시간 영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담배를 끄고 자동차에 오른 그는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꺼냈다. 해외 발신으로 뜨는 발신지는 일본이었다. 홍콩에서 일본으로 오지 않은 외손주에 대해 단단히 뿔이 난 외조부의 괄괄한 음성을 예상한 태주는 약한 한숨을 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예. 할아버지. 히메가 화가 났어요. 곧….”
<태몽이야. 이건 분명히 태몽이라고.>
그는 다짜고짜 시작하는 외조부의 두서없는 말에 일본을 가지 못하는 변명을 늘어놓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저녁에 선잠이 들었거든. 그런데 어마어마한 큰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거 아니겠냐! 그래서 내가 꼬리를 꽉 붙들었지! 어떠냐! 분명히 태몽이지? 하하하!>
언제부터 꿈 따위를 믿게 되었는지 4천 명이 넘는 무리를 이끈 야쿠자 간의 싸움에 나쁜 꿈을 꾸었다며 혹여나 칼에 찔릴 것을 대비해서 몸에 부목을 대자는 수하를 그 자리에서 베어 버린 것이 시미즈 요시다였다.
“태몽은 혹시 할아버님 것이 아닙니까? 설마 저에게 이모나 외삼촌이 생기는 것은 아니겠죠?”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 괴팍한 늙은이로 변한 외조부의 말을 심드렁하게 받아넘긴 태주는 곧이어 수화기로 들려오는 욕설에 핸드폰을 귀에서 잠깐 뗐다.
“우리 히메는 그렇게 무계획적이지 않아요. 엄청나게 철저한 여자랍니다. 할아버님.”
홍콩에 오기 전에 피임 시술을 했다는 진여은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분명히 산부인과의 방문 기록이 있으니 말이다. 부모님의 금실이야 지금도 신혼부부를 방불케 하지만 어머니 몸을 신주처럼 떠받치는 아버지가 그렇게 무책임한 짓을 할 리도 없다.
외조부의 말대로 그것이 태몽이라면 지금도 젊은 애인을 곁에 두고 있는 본인이 가장 유력할 것이다. 자신의 말에 흥분한 외조부를 다독인 후 통화를 종료한 류태주는 다시 한번 진여은이 던진 돌멩이에 뒤통수를 제대로 맞아 멍해졌다. 아니, 이것은 돌멩이 수준이 아니라 몇 톤짜리 바위만큼이나 큰 타격이었다.
[해성 병원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고 있습니다. 임신이라고 합니다. 아직 유산의 위험이 커서 입원해야 한다고 합니다.]
“임신?”
병원까지 따라붙은 수하가 전하는 문자에 류태주의 눈이 흔들렸다.
“하하하! 세상에!”
류태주는 유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가 아닌가!
“그러면 홍콩에 정말 남자 사냥을 왔단 말이지? 임신하려고!”
한참을 유쾌하게 웃던 류태주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홍콩에서의 조우는 진정, 우연이었다. 만약에 그때 춤추던 진여은을 보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하자 순간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아찔함을 느꼈다. 다른 놈의 아래 깔린 진여은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리는데 다른 씨로 배부른 모습까지 보게 될 뻔한 것이다.
“그 버릇 단단히 고쳐 주지.”
류태주는 형형히 눈빛을 빛내며 차를 출발시켰다.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수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근에 명운 그룹에서 열린 회의 있지. 거기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아봐.”
무엇이 진여은을 그렇게나 구석으로 내몰았는지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