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내일 갈 거야. 떠날 준비해 둬.”
여은은 수화기를 놓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일까지가 가임기였다. 욕심 같아서는 내일까지도 남자의 튼실한 정자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과유불급.”
이미 너무 지나치다. 본격적으로 집착을 표현하기 시작한 남자가 너무 무섭다. 아니, 정말 무서운 것은 그것을 너무나 기꺼워하는 자신이다. 조금 더 있다가는 정말 류태주가 원하는 대로 그의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매달릴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의지하고 싶어질까 두려웠다.
“하루빨리 여길 떠나야 해.”
여은은 불안한 마음을 반영하듯 연신 작은 입술을 씹어댔다.
“아얏!”
입술에서 쇠 맛이 났다. 남자에게 빨리고 씹혀 부은 입술을 저까지 씹어대니 견뎌내지 못한 약한 피부가 결국 찢어져 피가 났다. 여은은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상처 난 곳은 아주 작았으나 계속해서 피가 맺혔다.
“제기랄!”
여은은 괜히 신경질이 나서 욕설을 뱉으며 티슈를 뽑아 입술에 대었다. 거울에 화가 난 눈매의 여자가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뭘 잘했다고 화를 내는 거야.”
스스로를 질책하는 여자는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목적은 달성했다. 가임기 동안 엄청나게 좋은 유전자를 갖춘 남자의 정자를 마음껏 받아서 후련한 마음으로 기뻐하며 귀국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나 하나도 후련하지 않았다.
오히려 몰랐던 감정과 처음 접한 감각에 마음은 혼란스럽고 무겁다. 이 무거운 마음은 전부 류태주에게 휘둘렸기 때문이다. 전부 류태주 때문이다!
“나쁜 놈!”
분노의 방향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은은 그를 욕하며 애써 자신의 마음에 자리를 잡은 이상한 뿌리를 뽑으려 애썼다.
“이건 전부 이곳이 홍콩이라서 그런 거야. 떠나면 돼.”
그렇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검은 슈트를 입고 표정을 감추고 살면 다 잊힐 일이다. 그리고 혼자 둔 동생도 걱정이 되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여린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동생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평생을 보아 온 보호자의 예리한 감은 속일 수 없었다. 동생을 위해서나 저를 위해서 어서 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류태주를 위한 일임도 안다.
그같이 완벽한 남자의 곁에 조폭 핏줄을 이어받은 조폭 보스 출신의 여자라니! 당장 그의 집안에서 어떤 반대를 할지 불 보듯 뻔했다. 만약 자신이 보통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일찍 조실부모한 데다 최종 학력이 고졸인 조건의 여자를 어느 부모가 좋아하겠는가? 그의 곁에는 아마도 집안에서 맺어 준 여자가 어울릴 것이다. 이렇게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제 온몸을 던지는 여자가 아니라 타고난 우아함을 갖춘 그런 여자가 말이다.
“제기랄! 제기랄!”
류태주를 떠날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를 꺼내 들었던 여은은 그의 곁에 있을 다른 여자를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맹렬한 질투로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여자랑 그렇게 뒹굴 거잖아.”
여은의 머릿속에서 류태주는 이미 다른 여자랑 결혼한 상태였다. 상상 속의 그 여자는 자신과는 다르게 키도 키고 시원시원하게 생긴 서구적인 마스크라 류태주와 그림같이 잘 어울렸다. 잘생긴 그 얼굴로 사랑을 속삭이고 두꺼운 혀로 다른 여자의 혀를 빨며 커다란 손으로 다른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그 큰 성기로 다른 여자의…!
“아악!”
여은은 배란기 특유의 호르몬 변화로 쉽게 우울해지는 감정을 인지하지 못했다. 여태껏 배란기를 느낄 만큼 여유 있는 생활을 해본 적이 없던 것이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피가 나는 입술을 티슈로 마구 문질러댔다.
근본 없는 신경질의 정점을 찍은 그 순간, 방문이 열리며 류태주가 등장했다. 그는 옷장에 걸린 가운이란 가운은 다 내팽개쳐진 바닥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류태주는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갈색 눈동자와 마주치자 다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히….”
“그따위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옷이 없잖아, 옷이! 매일 이게 뭐야! 빨주노초파남보, 가운 장사라도 하는 거예요?”
류태주는 어이없는 자신의 투정에도 화를 내거나 황당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몹시 즐거워 보였다. 그것이 너무나 기쁘면서도 화가 났다.
“히….”
그는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여은의 기세에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가운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자그마한 몸을 달랑 들어 올렸다.
“무엇이 당신 마음을 이렇게 들쑤셔 놓았지?”
이런 다정함이 다른 여자에게 간다고 생각하니 터지는 분통에 발을 동동 구르고 싶다.
“그렇군. 내가 너무 무심했어. 당신과 섹스에 몰두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군. 이곳이 매우 답답했겠어. 내일은 밖에서 식사할까?”
류태주의 말에 여은은 눈을 반짝였다. 70평이 넘는 스위트룸이 답답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원래 성격이 앉아서 소일거리를 좋아했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풋내기 여자 보스로 바뀐 진도 파를 노리는 위험이 많아, 집 밖으로 나가는 취미는 없었다. 그렇지만 류태주의 오해는 무척이나 반가운 것이었으므로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여동생에게 내일 간다고 무작정 전화했으나 어떻게 나갈지 고민해야 할 참에 그가 힌트를 준 것이다. 혹시나 이상한 남자를 만난다면 먹일 강력한 수면제까지 미리 한국에서 챙겨 왔던 그녀였다. 물론 류태주와의 데이트에 앞서 가방 안쪽에 넣어 왔다.
섹스할 때 조금 강압적이고 폭주하는 인간이어서 그렇지 평소는 다정하고 정중한 성격의 류태주였다. 처음에는 약속 날짜가 되었으니 간다고 하면 단기간 섹스 파트너로서 깨끗이 보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제 보였던 기이한 집착을 떠올리니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사실은 입이 떨어지지 않은 터였다.
최악의 경우, 류태주에게 약을 쓸 생각을 하고 있었던 여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외출이라니! 이건 그냥 사라질 수 있는 멍석을 깔아 주는 것이 아닌가! 그녀도 류태주에게 약까지는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 한 번씩 외출할 것을. 미안해.”
류태주는 즐거운 빛을 띠며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를 보며 뺨에 키스했다. 기분 좋게 키스를 받던 여은은 그의 입술이 예민한 귓불과 귀 뒤쪽을 따라 목으로 내려가자 살짝 일어나기 시작한 남자의 가운 허리끈 아래를 보았다. 내일 막상 이 남자와 헤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아쉬워졌다.
‘아직도 가임기인데 아침에 한 번 더 해?’
그렇게 생각하니 허벅지 안쪽이 간질거린다. 이제는 흥분의 신호가 어떻게 시작하는지 너무나 잘 알 만큼 섹스에 익숙해진 여은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모으고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정자를 한 번 더 받아 볼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어제 몇 시간이고 지속했던 정사를 떠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류태주는 작은 입술이 모인 여자의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기대 어린 시선을 보냈다가 고개를 젓자 이내 실망한 눈빛을 갈무리했다.
“배고파요.”
“당신이 어제 먹고 싶다고 했던 호박죽이야. 조금 식은 것 같은데 데워 줄까?”
거실로 나가며 그가 당연하다는 듯 손을 잡자 어색해서 손을 빼려 커다란 손안에서 꼼지락거렸다. 혀를 빨고 더한 짓을 하지만 이렇게 손을 잡는 것은 뭔가 간지러운 느낌이라 적응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예 잡은 손의 방향을 돌려 깍지를 껴버리는 그에게 잡혀 결국은 포기했다.
“아니요. 뜨거운 것보다 약간 식은 게 좋아요. 주문하는 음식은 호텔에서 조리하는 거죠? 용케 호박죽이 있었네요.”
한국 식당에서 요리사를 불러 와, 어렵게 구한 늙은 호박으로 그녀가 먹고 싶은 스타일대로 옥수수와 땅콩을 넣도록 까다롭게 주문한 말은 쏙 빼놓은 류태주는 그저 빙긋 웃었다. 이 예쁘고 작은 입에 들어가는데 무엇을 아끼겠는가!
여은은 어제 자신들이 몇 시간이고 몸을 섞은 카우치가 있던 장소에 다른 스타일의 소파가 들어온 것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맞은편의 망할 작은 거울을 보자 수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던 남자가 떠올라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러다 문득 그가 자신을 이름으로 몇 번인가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 워낙 정신이 없을 때 들어서 그가 ‘예은’으로 불렀는지 ‘여은’으로 불렀는지 모호했다.
“태주 씨는 왜 제 이름을 자주 부르지 않아요? 이런 시간에는 당신이나 닭살이 돋는 히메라고 부르면서, 세… 섹스할 때만 이름을 부르잖아요.”
류태주는 귀까지 붉어진 여은의 얼굴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보지를 빨 때와 같이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그간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데도 아직 손을 잡는 것도 어색해하는 여은이었다. 조금 전에도 부풀어 오르는 제 아래를 보며 입술을 모으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지금이라도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면 금방 열락에 젖어 버리는 예민한 몸이다. 젖꼭지만 빨아도 절정에 오를 만큼 그녀의 성감은 급속도로 열렸다. 그런데도 망설이고 한 발 다가온 듯싶으면 두 발 물러서 있다.
히스테릭한 반응도 마치 10대인 그녀가 연상될 만큼 무척 귀여웠으므로 외출을 제안했지만 류태주에게 진여은의 존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같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 작은 머리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당신의 이름을 아껴 두고 싶어서 그래, 히메. 너무 소중하니까.”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식사나 하세요.”
태주는 당황하는 얼굴로 화를 내는 여은을 향해 화통하게 웃어 보이며 의자를 당겨 주었다. 그러고는 수많은 의자를 두고 굳이 옆에 앉았다.
“오늘은 숟가락 들 힘이 있어요.”
먹여 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했지만, 그는 무시하며 그릇을 덮은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여은의 앞에 있는 숟가락을 들었다.
“오후에 쇼퍼를 부를게. 내일 입을 옷을 골라 봐.”
여은은 죽이 뜨겁지 않은지 숟가락을 저어 확인하는 남자의 동작을 보며 침을 삼켰다. 오후까지 남은 시간은 무척 넉넉했다. 그사이에 무엇을 하겠다는지 의도가 너무나 확실해서 여은은 아까부터 메말랐던 입 안을 축이기 위해 물을 마셨다.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의 이곳저곳에 열기가 돋는다. 노란 호박죽을 담은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부는 저 입술에 빨릴 젖꼭지가 아리고 가렵다. 허리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더니 곧 허벅지 사이가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여은은 그가 먹여 주는 호박죽을 먹으며 입과 함께 아래를 오물거렸다.
□ ◆ □ 윤이아
진여은은 화려한 레스토랑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다. 자신을 들어 올린 채 마주 보는 자세와 엎드리게 해서 뒤에서 쑤셔대는 체위로 상당히 여러 번 절정을 느끼게 한 남자가 부른 사람은 일반 백화점이 아니라 고급 부티크만 담당하는 쇼퍼였다.
유명 브랜드의 드레스를 사이즈에 맞게 가져온 그녀는 가운 차림의 그들을 보며 연신 얼굴을 붉혀 여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정확하게는 류태주를 본 것이지만 말이다. 가격표도 없는 드레스와 신발, 거기에 맞는 보석들을 고른 그녀는 다음 날 마사지와 메이크업, 머리까지 해주러 온 여자들에 둘러싸여 완벽하게 변신했다.
거기다 전에 본 기사가 운전하는 리무진을 타고 홍콩 여행이 처음인 진여은도 들어 봄 직한 유명 레스토랑 앞에 선 것이다. 미슐랭 별 세 개를 받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외관만 봐도 드레스 코드가 엄격해 보였다.
목과 팔 전체를 가리는 진줏빛의 화려한 드레스와 멋진 턱시도 차림의 류태주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여은은 실내로 들어서자 그들의 옷이 전혀 과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장 파티에 참석해도 될 만큼 차려입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자 여은은 버릇처럼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류태주는 그런 진여은을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눈을 휘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나를 황홀하게 하지만 당신을 쳐다보는 남자들의 눈을 다 뽑아 버리고 싶군.”
보석 핀으로 고정해 틀어 올린 머리로 갸름한 얼굴을 전부 드러낸 여은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찬탄과 경외가 다시금 드러났다. 화장으로 순한 눈매를 더욱 크게 강조하고 핑크빛 뺨과 은은한 빛깔의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그녀의 사이즈와 함께 드레스의 주문 사항에 노출이 없는 것을 강조한 덕에 목부터 발목까지 완벽하게 가려졌지만, 몸매를 드러내는 타이트한 드레스는 풍만한 가슴과 한 줌이 될까 말까 한 아찔한 허리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어 류태주는 차 안에서 덮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상당히 고생해야 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을 한눈에 반하게 했던 새침한 표정으로 턱을 들고 오만하게 주위를 한번 둘러보는 모습은 다시 한번 그의 심장을 움켜쥔다.
“사돈 남 말 하시네요. 앉아 있는 여자들이 전부 당신만 보는 것 안 보여요? 나랑 있을 때 다른 곳에 눈 돌리면 가만있지 않겠어요.”
소유욕을 드러내는 그를 가볍게 흉내 낸 말이었지만 자신의 대꾸에 지나치게 좋아하는 표정을 짓는 류태주의 얼굴을 본 여은은 괜한 말을 했다 싶은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업무상의 통화에서는 듣는 사람이 얼어 버릴 정도로 차갑고 호텔 방으로 방문한 쇼퍼나 자기 운전기사에게도 딱딱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왜 자기한테만 이렇듯 바보 같은 표정을 짓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제 진심을 전부 보여주는 듯한 태도를 보이니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게 되는 것이다. 류태주에 대한 호감을 확실하게 의식한 여은은 이렇게 된 것을 모두 그의 탓으로 돌리며 안내하는 매니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10cm 높이의 힐을 신은 덕에 류태주의 어깨까지 눈높이가 높아진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발은 불편하지 않아?”
“전혀요. 평소 신고 다니는 것보다 낮은데요, 뭘.”
떡대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162cm의 키는 진여은에게 콤플렉스였다. 그 세계에서 기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이 12cm 이상의 킬 힐이었다. 자신에 대해 이제껏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여은은 눈을 반짝이는 남자의 표정에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평소에는 이라니…, 평소의 당신도 무척이나 궁금하군. 한국에 가서도 만나 줄 건가?”
역시나 작은 약점 하나도 놓치지 않는 치밀한 남자는 당장에 자신을 감아 왔다. 한국에서 만나 줄 것이냐니? 각자의 길로 떠나야 하는 것을 인지하는 듯한 발언이라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글쎄요. 당신 하는 것 봐서?”
“새침데기.”
마치 연인을 대하듯 다정히 응수하는 남자의 새삼스러운 미모에 여은은 슬쩍 눈을 돌렸다. 역시 인사 따위는 생략하고 가는 것이 올바른 판단이다. 류태주가 가지 말라고 잡으며 그때처럼 자신의 여자가 되어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면 시원하게 거절할 자신이 없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슬그머니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여은은 눈동자만 돌려 비상구를 확인했다. 오픈된 테라스는 흡연 장소였고, 출구는 단 하나뿐이었다. 아마도 주방 쪽으로 직원들이 사용하는 출입구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화장실도 한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걸을 때마다 허벅지를 스치는 빳빳한 지폐를 느꼈다.
가방에 든 넉넉한 현금은 류태주를 만난 이후 쓴 일이 없었기에 그대로였다. 드레스에 맞춰 든 클러치라 핸드백을 챙길 수는 없었다. 어차피 여권 등 중요한 것은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기에 여은은 스타킹 안에 택시비만큼의 현금만 넣었다. 매니저가 안내한 자리는 강이 보이는 창가 자리였다. 벌써 메뉴를 예약한 듯 코스 요리인 듯한 여러 가지 나이프가 차려져 있었다.
“여기 들어 본 적 있어요. 적어도 6개월 전에는 예약해야 하는 곳이잖아요? 일주일간 프레지던트 스위트룸에, 고가의 드레스, 액세서리, 처음 타고 왔던 차와는 다른 리무진, 태주 씨, 당신 재벌이에요?”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는지 환히 웃는 모습을 보니 여은은 질문한 제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디어 나에 대해 궁금해진 건가?”
“이렇게나 돈을 펑펑 써대는데 궁금하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닌가요?”
“돈을 쓴 보람이 있군. 나는 성병 이후로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기에 나에게 흥미가 떨어진 줄 알았지.”
“류태주 씨!”
음식을 세팅하는 직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품새가 평소에 눈치 따위는 본 적도 없는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자나 안하무인으로 자란 제멋대로의 도련님. 어느 쪽일까를 저울질하는 동안 부지런히 세팅된 음식은 모두 훌륭했다.
평소에 육식을 즐기지 않던 여은은 입에 들어가자 녹아 버리는 스테이크의 부드러움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류태주의 입가가 더욱 느슨해졌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이 긴 궤적을 남기는 강변을 배경으로 둔 근사한 레스토랑, 맛있는 음식, 그리고 근사한 남자와 나누는 기분 좋은 대화, 여은이 평생을 두고서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좋은 식사라고 생각할 때였다. 가벼운 농담에 즐거운 표정으로 웃던 여은의 웃음은 그들이 앉은 자리로 다가온 남자로 인해 산산이 깨어졌다.
“여어, 이거 누군가? 류태주 아니야?”
남자는 오신 그룹의 후계자로 알려진 오진성이었다. 그를 어려서부터 집안 모임에서 봐왔던 진여은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둘만의 식사 자리에 갑자기 들이댄 것이었으므로 살짝 고개를 돌린 여자의 태도는 무례하지 않은 정도로 불편함을 보이는 행동이었다.
류태주 또한 불청객의 등장에 나빠진 심기를 표정으로 바로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도 제멋대로에 무례하기 짝이 없는 오진성은 그런 두 사람의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홍콩에는 웬일이야? 요새 해운 사업에서 수익을 날리고 있다고 여기저기서 칭찬이 자자해.”
진여은의 귀에 류태주에 대한 새로운 정보로 귀가 쫑긋 세워졌다. 부모님의 장례식에서 수십 년간 모임을 함께했던 오신 그룹이 부모님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수년간 조사해도 배후는 알 수 없었으며 파면 팔수록 배후 세력에는 명운과 대명 등 깊은 아버지와 친분을 유지했던 조직들이 깊숙이 관여되어 있음을 느꼈다.
피도 눈물도, 의리도, 정도 없는 비정한 세계. 그녀가 조폭들을 깊이 증오하는 이유였다. 그중에서도 직접적으로 관련된 오신 그룹의 소식에는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 오진성에 대해서는 눈감아도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읊을 수 있었다.
화려한 혼맥을 통해 조폭의 이미지를 지우고 싶어 하는 부모의 바람과는 달리 오진성은 뼛속까지 물려받은 조폭 유전자로 하루가 허다하게 폭행 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인간쓰레기였다. 그런 인간과 알고 지내는 류태주가 상당히 못마땅했으나 비슷한 나이대와 재벌가라는 배경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보다시피 매우 바쁜 와중이라. 담소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지. 나는 일행이 있어서.”
분명하게 선을 긋는 류태주의 말에도 불구하고 오진성의 무례함은 끝나지 않았다.
“오호라. 데이트 중이구나. 애인? 한국인? 일본인? 아니면 여기 현지인?”
진여은은 근 10년 이상을 봐온 자신을 전혀 몰라보는 오진성의 밥 말아 먹은 눈치를 속으로 비웃었다. 류태주에게 할 말이 많은 듯한 불청객의 난입에 자리를 피할 겸 비상구를 확인할 요량으로 들고 있던 포크를 살며시 내려놓을 때였다. 이어진 오진성의 말에 그녀는 얼음같이 굳어졌다.
“뭐, RUU의 보스가 현지처를 두는 건 당연한가? 요새 RUU가 홍콩에서 대단한 기세라고 하더니 다른 이유가 있었구먼.”
오진성의 말에 여은은 눈앞에서 뭔가가 와장창 깨지는 환영을 본 듯 충격받았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암전된 것같이 깜깜했다. 서 있던 바닥이 조각조각 깨어져 끝이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느낌에 여은은 눈도 깜박일 수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일몰의 강변 풍경이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었다. 여은은 눈동자만 움직여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그는 떠날 생각도 없이 계속해서 지껄이는 상대를 향해 귀찮은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RUU의 황태자!
일본 야쿠자와의 혼인으로 조직을 더욱 탄탄히 다졌다고 했지만, 여은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조직에 그저 이름만 올리고 있었을 뿐인 조부나 부친과 달리 상당한 엘리트로 알려진 그 아들은 직접 조직에 뛰어들어 세를 불렸다.
RUU 해운의 전무 직함을 달고 있지만, 실적인 경영자. 조직의 검은돈을 기업 자금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업의 수익을 조직 운영에 들여 탈 조직화하는 많은 기업에 이단아로 불리는 사내.
아니, 그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진여은은 그토록 혐오하고 피하고자 했던 제1순위의 조폭 집안, 조폭 출신의 남자를 스스로 끌어들였다는 것에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여은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진성의 말을 듣기 전부터 이미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행동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일어선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오히려 너무 강한 충격을 받은 탓인지 표정은 덤덤했고 몸은 기계처럼 자동으로 움직였다.
“친한 사이신 것 같은데 대화 나누세요. 식사 중에 죄송하지만 저는 화장실에 잠시….”
“오! 한국인이로군! 역시 류태주야. 어디를 가나 미인이 끊이지 않는다니까. 그래도 야쿠자 외조부는 일본인 손자며느리를 바라지 않나?”
끝까지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오진성을 뒤로하고 여은은 천천히 걸어 나갔다. 뒤에서 류태주가 자신에게 뭔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휘익! 대단한 미인인데? 저, 거만하고 오만한 표정이라니, 성깔도 대단하겠어! 가만, 누군가를 닮은 것 같은데, 누구지?”
“그따위 쓸모없는 눈깔은 그때 파버릴걸.”
“어디선 본 것 같은데 누구지? 응?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여자 앞이라 점잖을 떨고 싶은 것인지 평소 같지 않게 이를 드러내지 않는 류태주의 모습에 깝죽거리며 나대던 오진성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는 음성에 몸을 굳혔다. RUU 류태주를 시작으로 대명 그룹의 자식들이 줄줄이 미국으로 유학 가자 경쟁적으로 오신 그룹의 비슷한 나이 또래 아이들도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중의 한 명이 오진성이었다.
공부라면 이골이 났던 오진성은 억지로 보내진 미국 유학의 불만을 만만한 상대였던 이선재와 김진호에게 풀었는데 사소한 일로 트집 잡아 돈을 뜯는 등 양아치 짓을 하고 다녔다. 그들의 친구였던 류태주에게 몇 번 들은 경고를 흘려들었다가 곤죽이 되도록 맞고서야 오진성의 괴롭힘은 없어졌다.
당시, 류태주에게 맨주먹으로 맞아 전치 3주로 병원에 입원까지 했었으나 그런 일은 10대의 치기 어린 일로 까맣게 잊은 오진성이었다. 오히려 그는 미국으로 날아온 류태주 어머니의 사과를 들은 것으로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그는 류태주에게 죽도록 맞았다는 것보다 소문의 야쿠자 딸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는 것을 더 크게 각인한 것이다.
“그때 차라리 척추 신경이라도 좀 밟아 줬으면 네 부친에게 지금쯤 고맙다는 말을 듣지 않았을까, 싶어.”
“야, 류태주!”
“그랬더라면 오신 그룹의 이번 홍콩에서의 신규 항만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을 테니 말이야.”
오진성은 자신이 지금 홍콩에 있는 이유이자 목적인 계약 사항을 알고 있는 류태주의 말에 경직됐다. 그의 두서없는 시선이 예의 싸늘한 표정의 류태주와 맞은편의 빈자리를 향했다. 그리고 여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본 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으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홍콩 공사에 RUU의 입김이 절대적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야,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나는 그저 반가워서….”
“끌어내.”
류태주가 귀찮다는 듯 말하자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들이 일어나, 오진성의 팔을 각각 잡았다. 오진성은 손님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사실은 류태주의 수하들이란 것을 깨닫고 마구 발버둥 쳤다.
“이! 류태주 깡패 새…!”
오진성의 난동은 입 안에 둘둘 뭉쳐진 냅킨이 끼워져 간단히 제압되었다. 멀리 앉아 있던 손님들이 무슨 일인지 호기심 어린 시선을 주었으나 커다란 유리가 가로막힌, 인테리어가 호화로운 레스토랑은 높은 천장으로 인해 소리가 울리는 편이었다. 조금은 시끄러운 내부와 재빠른 류태주의 수하들의 기민함으로 작은 소동은 아예 없던 것처럼 처리되었다.
뒤에 앉아 있던 수행원, 김문태가 류태주에게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여자분은 어떻게 할까요? 전무님.”
전무님이라는 호칭을 붙이지만, 여러모로 회사원으로 생각하기에는 과한 액션이다.
“하아…! 화장실에 가봐.”
담배를 꺼내 들며 류태주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단정하는 행동에 김문태는 다시 허리를 숙이고 여자가 들어가 화장실로 향했다. 그의 뒤로 세 명이 뒤따른 남자들은 여자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꺅!”
지극히 정중한 말투였지만 여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여성만의 공간에 무단으로 침입한 남자들을 보며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남자들은 로봇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휴게실을 둘러본 후 세 개의 화장실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화장실이 모두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한 김문태는 휴게실 안에 다른 문이 있는 것을 보고 노크했다. 노크는 예의상 한번 해본 것에 불과한 듯 문고리를 잡은 손이 곧바로 돌아갔다. 여성만을 위한 흡연 공간인 듯한 방의 창은 방충망이 뜯긴 채 열려 있었다. 김문태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진줏빛 구두 한 켤레를 발견했다.
□ ◆ □ 윤이아
“언니. 이제 곧 도착이야.”
여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거는 동생의 말을 듣고 힘겹게 눈을 떴다. 얼마나 울었던지 눈두덩이에 묵직한 바위라도 얹어 놓은 듯 무겁다. 곧 기내 방송으로 착륙을 알리는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창밖으로 보는 서울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불빛만이 반짝였다.
“언니, 괜찮아?”
아침에 전화로 ‘오늘 출발하자.’라는 말만 전달받은 동생은 저녁이 되어서야 호텔 방을 두드린 자신을 보고 기함할 듯 놀랐다. 미리 짐을 싸두고 온종일 자신을 기다렸을 동생은 찢어진 드레스와 맨발을 보고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자신의 표정을 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묻지 못했을 것이다. 울고 있었으니까. 왜 놀라지 않겠는가, 제 앞에서는 천하에 무서울 것 없이 강인하고 냉정한 언니가 울며 호텔 방을 들어갔으니 말이다. 원래도 자존심이 강하던 여은은 가족들 앞에서도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부모님의 장례식에서도 동생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아이같이 엉엉 우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동생이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큰지 알 만했다. 그러나 이런 것, 저런 것,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진여은은 속이 상했다.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은은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창문을 찾아 헤맸다. 이곳에 창문이 없으면 다시 홀로 들어가, 주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때 진여은은 오직 이곳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류태주를 마주할 수 없었다. 그 남자를 볼 자신이 없었다. 그때 흡연실에 창문을 발견했다. 1층인 레스토랑이었기에 창문은 뒷골목과 연결되어 있었다. 방범 목적이 아닌 방충망은 무척이나 엉성했다.
그녀는 힐을 벗어 날카로운 뒷굽으로 방충망에 구멍을 내고 손으로 뜯어냈다. 턱이 높은 창문을 넘기 위해 화려한 스팽글이 엮어진 드레스를 허벅지까지 찢고 맨발로 그곳을 나왔다. 강변에 있는 대로변이었기에 택시를 잡기는 수월했다.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자 그제야 여은은 자신이 왜 이렇게 도망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화가 났다.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으니 일부러 히메라는 낯뜨거운 호칭으로 부른 것이리라. 이름을 부르는 순간도 늘 애매한 발음으로 ‘…은’이라고 했겠지! 그 인간에게 언제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는지 따지고 싶었다.
“개새끼! 나를 속였어!”
분한 마음에 택시의 시트를 두드리며 화를 내면서 깨달았다. 류태주는 자신을 속인 적이 없다는 것을. 모두 다 임신을 위해 유전자가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며 조건에 체크하고 다닌 어리석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류태주는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가간 것도, 관심을 보인 것도, 호감을 느낀 것도, 유혹한 것도 전부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이다! RUU와는 접점이 없다. 류태주를 만난 적도, 기억도 없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여은은 어린 시절, 근 10년간 가졌던 조직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터라 이선재를 두 번 따라온 류태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스스로 영악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남자의 외모와 피지컬, 풍기는 분위기와 그가 보여주는 다정한 모습에 꽂혀 그가 절대로 조폭과 연관이 없는 인간이라고 쉽게 단정한 것이다. 자신의 어리석음에 속아 남자에게 홀랑 넘어간 자신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여은은 다른 의미로 분노하며 다시 택시 시트를 때리며 울었다. 스타킹 허벅지 부분에 넣어 둔 지폐로 삯을 치르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연신 자신을 살피는 기사를 뒤로하고 택시를 내렸다.
남의 시선에 늘 어깨를 펴고 턱을 들고 다니던 자존심 강하던 진여은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녀는 철철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맨발로 호텔로 들어갔다. 누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는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모호해졌다. 그리고 그녀는 떨어지는 샤워기 아래서 깨달았다.
자신은 류태주를 좋아하는 것이다. 몸을 섞는 동안 그가 주는 쾌감에 취해 그만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억울해서 또 울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그들은 사물함을 열어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는 수없이 많은 전화와 문자로 넘치고 있었다. 대부분 하준수와 이윤우로 일주일 정도 출국해서 다녀올 거라는 일방적인 통보에 놀라고 당황하다가 이내 걱정스러운 문자의 흐름으로 끝나 있었다. 몇 분 전까지도 전화한 자신들의 수하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윤우였다.
<보스! 어딥니까! 어딘데 전화도 안 받으시고…!>
“인천 공항이야. 얼마나 걸리겠어?”
수화음이 두 번이 넘어가기 전에 전화를 받은 이윤우의 옆에서 하준수가 ‘보스야?’라는 절규가 들렸다. 이윤우의 말을 냉정하게 자른 여은은 30분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알았다고 말하며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것이 자신의 현실이다.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30분에 도착하겠다고 말하는 충성스러운 수하를 두었으나 그도 진여은이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무너질 수는 없었다. 부모님을 죽게 만든 조폭이 죽도록 싫고 혐오스러웠지만 자신 또한 조폭이었고, 그것을 등지기 전까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동생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진도 금융을 지켜야 했다. 이제야 머리가 냉정해진다. 남자와 잠 한번 잤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언니….”
이제야 계속해서 자신에게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는 동생이 보였다.
“괜찮아. 린아.”
여은은 동생을 껴안았다.
“개새끼 따위 잊어버리면 돼.”
정황상 류태주는 분명히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다시는 안 볼 것이다.
“언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남자랑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이 실장이 온다니 주차장 쪽으로 가자.”
초여름의 새벽 공항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여기저기 단체 관광과 여행을 앞둔 사람들, 여독이 가득한 사람들로 넘쳤다. 그 사이를 뚫고 가며 여은은 점점 더 냉정을 되찾아 갔다. 불현듯 자신이 계획했던 여행 목적이 떠올랐다.
“아기…!”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우뚝 멈춰 섰다.
“…언니?”
갑자기 멈춰선 여은을 돌아보는 여린의 눈에 걱정이 가득하다. 그 순간만큼은 여은도 냉정할 수 없었다. 일부러 가임기와 배란기를 노려 계획한 여행이었다. 아버지가 남겨 둔 진도 금융의 지분을 위해서! 불안하게 흔들리던 여은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니야. 안 생겼을 수도 있어.”
여은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만약에 생겼다면….”
지울 거야. 그런 씨앗을 낳을 수 없다. 제 몸으로 가장 혐오하는 종족인 조폭의 씨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한 여은은 형형한 눈을 빛내며 다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