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4)

05.

“진여은.”

루프톱 bar가 있는 호텔을 나온 류태주는 수행원이 열어 주는 차를 타며 빙긋이 웃었다. 결혼 전에 홍콩에서 총각파티를 바라는 이선재들과 마카오의 카지노에서 건전한 여흥을 즐긴 것은 쓸데없는 짓하지 말라고 경고한 류태주 때문이었다.

집안에서 정해 준 결혼이 이선재에게는 꽤나 스트레스였던지 어떻게든 한번 일탈하고픈 그를 다독여 맥주 축제로 흥청거리는 거리로 끌고 온 것은 그에게 아찔한 운명을 느끼게 했다. 거기서 온몸을 흔들며 춤에 빠진 진여은을 보게 될 줄이야!

“우와! 저 여자 예쁜데? 막춤을 추는 데도 매력적이야.”

박태수의 말처럼 함께 온 친구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다름 아닌 진여은이었다.

검은 마녀. 진도 파의 보스이며 떠오르는 금융계의 여왕.

어릴 적 집안 모임을 함께한 녀석들은 화장을 지운 여자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류태주는 똑똑히 알아봤다. 그녀, 진여은을!

처음 그녀를 본 것은 열다섯 살에 우연히 놀러 갔던 이선재의 집이었다. 마침 동맹 관계였던 조직의 보스 집안 모임이 있던 자리였다. 초대받지 않은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으나 이선재의 부친은 조폭 집안의 자식이라는 공통점으로 아들과 초등학생 시절부터 어울리던 류태주의 참석을 흔쾌히 허락했다.

RUU의 외아들이라는 이선재 부친의 짧은 소개가 있었다.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 부모님 때문에 잠시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사정이었다.

“역시 야쿠자의 손자라서 그런지 벌써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네요. 스미도카이의 후계자로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는데 사실일까요?”

“야쿠자와의 정략결혼이라니! 평소 조직이라면 관심 없어 보이던 류진규도 계획이 다 있었던 거예요.”

사람들은 그의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들의 말대로 류태주는 야쿠자 집안의 외동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러나 후계자로 낙점받은 것도 그의 부모가 정략결혼을 한 것도 아니었다. 외가인 일본에서 일곱 살까지 외조부와 함께 살았던 이유는 여행지에서 뜨거운 사랑에 빠진 부친이 어머니와 결혼하는 조건이었다.

스미도카이의 보스인 외조부는 고이 기른 외동딸인 리아를 홀랑 빼앗아 간 외국인 사위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일찍 하늘로 떠난 아내를 대신해 후처도 마다하며 애정으로 기른 딸과 오랫동안 함께 하고팠던 시미즈 요시다는 각종 협박과 방해로 이들을 갈라놓기 위해 갖은 수를 썼으나 결국은 임신한 리아로 인해 고집을 꺾게 됐다.

일본 3대 야쿠자로 알려진 스미도카이 보스를 두 손 들게 한 남자가 바로 RUU의 외아들 류진규였다. 그토록 반대하던 결혼이었으나 한번 결정을 내리면 깨끗이 승복할 줄 아는 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인 외조부였다.

대신 조건을 걸었으니, 아이가 태어나면 유치원까지는 일본에서 외손주를 데리고 있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정하고 마음이 여린 리아가 아이를 떼놓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류진규는 그동안 처가살이를 하겠다고 말하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배 속 아이를 두고 양가는 그런 조건을 걸어 결혼에 합의했다.

두 집안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자란 류태주는 어려서부터 속을 알 수 없는 과묵한 아이였다. 한량 끼가 다분한 친가의 성향과 일본 북서부를 장악한 외가의 타고난 제왕적 카리스마를 타고난 그는 어머니를 빼닮은 외모로 외조부인 시미즈 요시다의 무뚝뚝한 마음을 단숨에 녹여 버렸다. 그러나 자랄수록 타고난 냉정함과 어느 것에도 애착을 두지 않는 무심한 성격에 씨도둑질은 못 하는 것이라며 핏줄로 타고난 비정함을 알아본 외조부는 혀를 찼다.

그런 아쉬움도 잠시, 류태주가 자랄수록 조직을 운영하는 타고난 자질이 있음을 인정한 외조부는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을 받도록 친가에 건의했다. 조직을 가지고는 있으나 한량이었던 선대가 운영하던 것을 그저 큰 의지 없이 유지만 해오던 류진규는 모든 선택을 아들인 류태주에게 맡겨버렸다. 당시 15세에 불과했던 류태주는 그런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 지방에서는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의 외조부 아래서 많은 사람의 시중을 받은 그였다. 손가락질 하나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한 아이는 세상이 금방 지루해졌다. 아무리 재미있어 보이는 장난감도 손에 들어오면 그저 플라스틱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무척이나 어릴 때 알아 버린 그였다.

인간도 그에게는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그에게 무조건 굽신거리는 어른이거나 소문난 그의 배경으로 피하는 또래들로 나뉘었다. 그런 그에게 격의 없이 다가온 이선재와 김진호, 박태수는 친구라는 이름의 무척 신선하고도 새로운 존재였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참석한 모임에서 본 신기한 생물.

진여은이었다.

그보다 다섯 살 어린 열 살 주제에 오만한 표정, 얼굴도 쳐다보지 않는 고고함. 말을 거는 또래 아이들을 무시하는 새침함, 그러면서도 다섯 살 어린 동생에게만 보이는 그 다정함이 신기해서 자꾸만 눈길이 갔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니, 입이 매우 짧아 어머니가 주는 음식들에 전부 고개를 젓더니 한쪽에 있는 사탕은 하나 받아먹는 것이 보였다. 보니 수입한 제품이라 인기가 많아서 금방 동나고 말았다. 태주는 어머니가 신경 써서 구한 것이라며 미리 한 개 챙겨 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동생에게 언니 주라고 사탕을 줬더니 그것을 자기가 홀랑 먹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강렬한 인상을 남긴 두 자매를 보기 위해 류태주는 이선재에게 부탁해서 다음 해에도 모임에 조용히 참석했다. 사실, 부모님이 움직이면 큰 행사가 되겠지만 이제 중학교에 다니는 소년의 행보에 집중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나가는 진여은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무시였다.

키가 쭉쭉 자라기 시작한 류태주는 당시에도 또래에게서는 월등히 큰 키와 어머니를 빼닮은 빼어난 미모로 중성적인 모습에서 서서히 남자다운 골격이 나오던 시기였다. 학교나 길거리를 지나가면 누구나 다시 뒤돌아볼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가졌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던 그였다. 그러나 제 허리 위로는 시선도 주지 않는 무심하고 쌀쌀맞은 외면은 류태주로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하는 어이없는 대우였다. 너무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자세히 보게 되었다. 작은 체구, 작은 얼굴, 동그란 눈과 작은 입술, 등을 덮는 긴 머리카락은 약간 붉은빛이 도는 짙은 갈색이었다. 모든 것이 무료하던 그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읽어 주었던 어느 성의 히메(공주) 같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소녀였다.

가만히 있어도 주목받는 것이 당연했던 그는 처음으로 소녀에게 줄 선물을 준비했다. 당시에는 흔히 먹을 수 없는 초콜릿 사탕을 상자에 담아 소녀만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여동생을 불렀다. 여섯 살이 된 계집아이가 그것을 제대로 제 언니에게 전달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미국 유학으로 다음부터 이선재가 참석하던 집안 모임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학 중에서도 가끔 생각났던 고고한 히메의 소식을 들은 것은 그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였다. 진여은의 부모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즉시 그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스로 ‘왜?’라고 물을 여유도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간 그는 조문 갈 계획도 없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올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나 거만했던 소녀, 자그마한 주제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오만한 소녀, 세상 어느 것도 흔들어 놓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소녀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부모를 잃은 슬픔에 그 작은 어깨를 떨면서 울지도 몰랐다.

그러면 다가가서 위로를 해줘야 할까? 타인을 위로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던 류태주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정리하며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는 소녀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혹여나 다가갈 수 있는 빈틈을 찾으려 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슬픈 모습도, 연약한 모습도, 고개를 숙인 모습도 아니었다.

“내가 지켜! 진도 파도! 모두 내가 지킬 거야! 그러니 당장 동생과 내 앞에서 꺼져!”

소녀는 자신의 불행을 비웃는 세상을 향해 분노했다. 그리고 그 어떤 것에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난자된 팔뚝으로 흘러내린 피를 보고 사내들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더 냉혹한 표정으로 더 냉정한 가면을 쓰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Trrrrr.

앉아 있던 뒷좌석 암레스트의 충전기에 꽂혀 있던 개인 핸드폰에서 나는 벨 소리에 류태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즐거운 상념을 방해받은 것이 무척이나 기분 나쁜 표정이었으나 화면에 뜬 이름에 살짝 표정을 풀었다.

그제야 그는 오늘 외조부를 보러 가기로 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어제 공연 부스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추는 여자를 보지 않았으면 그는 아마도 지금 일본에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핸드폰마저 차에 던져둔 채였으니 연락이 되지 않는 외손자를 향한 외조부의 불같은 노성을 예상하며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모시 모….”

<모시 모시 같은 소리 하고 있냐, 이 녀석아! 아직 홍콩이라면서! 도대체 아직 거기서 뭣 하는 거야? 이 할애비랑 가기로 한 온천은 어떻게 하고! 이 배은망덕한 녀석! 네가 아무리 RUU를 크게 키워도 스미도카이와는 견줄 수 없다. 고얀 놈!>

스미도카이가 아니라 RUU를 선택한 류태주에게 서운했던 시미즈 요시다는 조금만 마음이 상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을 들먹이며 화를 냈다. 80세가 넘은 그는 최근 들어 더욱 잔소리가 많아져서 이제는 말끝마다 자신의 조직이 더 낫다며 어깃장을 부렸다.

<보라는 선 자리도 전부 퇴짜를 놓고 그렇다고 만나는 아가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네 엄마는 스물둘에 널 배 속에 넣어 왔다고! 도대체 그 좋은 인물로 뭘 하고 다니는….>

“무척 아리따운 히메를 만났어요. 할아버지.”

<뭐? 홍콩에서 말이냐? 누구냐? 어디 아가씨냐? 몇 살이냐? 함께 있느냐? 예쁘냐?>

여자를 만났다는 말에 당장이라도 홍콩으로 날아올 듯 반색하는 외조부의 반응에 류태주는 입술 꼬리를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 하나는 그림 같은 외손자 주위에 여자란 그림자조차 없자 혹시나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기까지 한 외조부였다. 그런 외손자의 입에서 먼저 나온 여자 이야기니 좋아할 수밖에!

“일단은 내일 또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당분간 홍콩에서 좀 더 체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계속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진여은과의 인연이 만들어졌다. 오늘 밤 당장 그녀를 침대로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류태주는 하룻밤의 정사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심을 자극할 로맨틱이 필요했다. 지금 RUU 파의 홍콩 보스들이 제가 묵고 있는 호텔로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을 것이다. 이 홍콩을 탈탈 털어서라도 진여은의 마음을 잡아야 했다.

<그래. 그래! 늙은이랑 가는 온천이 뭐가 중요하겠느냐! 거기서 푹! 푹! 지내다 함께 오너라.>

분명히 아이까지 만들어 오라는 말은 꾹꾹 참아내며 전화를 끊은 외조부의 속내를 아는 류태주는 피식 웃었다. 분명히 뭔가 큰마음을 먹은 것 같은 진여은이 과연 자신에게 어디까지 허락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밤은 바쁘냐고 묻는 여자의 갈색 눈동자는 촉촉하게 물을 먹은 듯 젖어 있었다. 그 눈동자와 살짝 벌어진 분홍색 입술을 보자 다시 사타구니로 피가 몰렸다.

진여은은 자신에게 그런 존재였다. 첫 몽정, 그의 유일한 섹슈얼리즘. 차가운 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게 하고 싶었다. 표정 없는 그 눈에서 화를 끌어내고 싶었다. 정리된 어항을 헤집어 속에 감추어진 부유물로 잔뜩 흐려진 더러운 그 감정의 찌꺼기들을 보고 싶었다.

“그러면… 울어 줄 건가? 나의 히메.”

□ ◆ □ 윤이아

5번가의 시계탑은 방사형으로 뻗은 시가지의 중심에 있었다. 고딕풍으로 지어진 오래된 성당과 함께 곁에는 불교 사원이 나란히 서 있어서 이 나라의 과거 역사와 함께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도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는 연인들의 약속 장소였을 이곳은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어 있었다. 인종의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열을 올리고 있어 여은은 시계탑에서 살짝 벗어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긴 머리가 앞으로 쏟아져 내리지 않도록 옆머리만 뒤로 돌려 살짝 묶은 것은 여린의 작품이었다.

머리를 빗질해 주며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따라가면 안 되냐고 귀엽게 찡얼거리는 여동생을 떠올리며 여은은 빙긋이 웃었다. 자신도 여린이 남자를 데리고 오면 아마도 그렇겠지. 좋은 남자를 만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 같은 여동생을 보살피며 평생 살고 싶었다.

‘그래. 낳을 아이와 평생 이렇게 셋이서 살아도 괜찮을 거야.’

여은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깔린 직사각형의 회색 벽돌을 샌들로 톡톡 쳤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라며 위험한 남자가 아닐까? 하고 계속해서 만류하던 여린의 걱정스러운 눈동자가 생각났다. 여린의 그런 불안을 남자의 정자를 목적으로 한 언니에 대한 걱정으로 치부하며 무시했지만, 여은도 사실은 그 부분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어디서 봤을까?’

여은은 어깨에 사선으로 멘 핸드백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인간관계는 무척 좁았다. 사업상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면 진도 파나 명운 파와 관련된 인간뿐이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 봐도 여중, 여고를 졸업한 그녀가 남학생과 접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남학생이라면 가족 모임뿐인데….

“맞다! 토시를 챙겼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지던 조직의 가족 모임을 떠올리던 여은은 화들짝 놀라며 핸드백을 열었다.

“휴! 가지고 왔구나.”

여은이 급히 확인한 것은 팔의 흉터를 가려 줄 토시였다. 가느다란 여은의 팔에 딱 맞아서 접으면 부피도 나가지 않는 토시는 흰색 레이스와 일반용으로 두 개를 챙겼다. 지금도 더운 날씨에 부담스럽지 않은 긴팔 블라우스를 입었지만, 여은은 그 남자, 류태주에게 보일 팔의 흉터가 걱정스러웠다. 사실, 홍콩으로의 여행을 계획할 때나 어제 오전까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자신은 진여은이었다. 이 흉터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진도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광의 상처이자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남자와 관계를 하더라도 그것은 오로지 2세 생산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류태주를 본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흉터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이 흉터를 보고 그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랬다. 그녀는 류태주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배란일까지 계속 만나자는 말을 듣고 싶었다.

‘옷을 다 벗겠지? 토시만 하면 이상할까? 그래도 흉터가 보이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번뿐일 것이다.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두근거리고, 설레고, 기대하고, 알고 싶고, 신경 쓰이고, 자신을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이 마음은 단지 훌륭한 수컷을 만나서라는 가임기의 암컷의 호르몬의 영향이라고 치부했다. 그래야 했다.

“너무 일찍 나왔나?”

토시가 있는지 확인하자 핸드백에 넣어 둔 거울을 꺼내서 아침에 몇 번이나 점검한 화장을 다시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곳이 길거리임을 떠올리며 그 충동을 애써 참고 여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남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도 약속 시간까지 30분이나 남았다. 혹시나 늦을까 싶어서 일찍부터 준비했더니 너무 빨리 오고 만 것이다.

진여은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사람을 이렇게 기다려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밖에서 혼자, 그것도 남자를.

“그러고 보니, 이거 꼭 데이트 같잖아?”

자신의 음흉한 흑심만 없었더라면 굉장히 훌륭한 데이트가 되었을 것이다. 설레며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라니!

여은은 자신의 행동이 마치 한 편의 코미디 같다고 생각하며 계속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남자가 오는지 확인하고 싶어 고개가 돌아갔다. 아직 약속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바람맞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핸드폰 번호를 물어볼걸 그랬나?”

골목 안쪽에 주차된 검은 세단에서 담배를 손에 꽂은 채 여자를 지켜보던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 재떨이를 내미는 수행원의 행동에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제가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여자만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못 말리겠다는 듯한 말투였지만 재미있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자신도 이 장소에 온 것은 한 시간 전이었다. 연신 시계를 확인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표시가 역력했다.

여자를 훑는 남자의 시선이 집요하다. 제 매력을 발산하기로 제대로 마음먹었는지 잔잔한 푸른 꽃무늬가 들어간 얇은 블라우스 아래로 아찔한 흰 허벅지를 드러낸 짧은 데님 반바지를 입은 여자는 발랄하면서도 섹시하고 동시에 청순해 보이는 묘한 이미지를 풍겼다.

이유는 소녀풍으로 묶은 긴 머리와 순한 눈매 때문일 것이다. 마냥 무방비해 보이면서도 저에게 말이라도 걸듯 다가오는 남자에게는 냉정한 눈으로 한번 쏘아보고 시선을 돌림으로 거절과 경계를 동시에 표현했다.

류태주는 당해 본 적 있는 그 시선에 빙긋이 웃었다. 진여은의 새침한 저 표정은 타고난 것이었다. 어른 남자도 저런 경계 태세에는 포기하고 발길을 돌릴 정도인데 어린 사내아이야 오죽했겠는가!

진여은은 모르겠지만 아무리 검게 화장하고 차가운 벽을 세워도 그녀를 노리는 남자는 무수히 많았다. 친구 놈들도 술자리만 가지면 빠지지 않는 화제가 진여은이었다. 조폭 보스의 명맥을 이어 가며 거친 사내들 사이에서도 지지 않고 가시 돛은 모습에 혀를 차지만 그 속에는 순수한 수컷의 정복 욕구가 다분했다.

류태주는 조금 더 지켜볼까 하다가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허벅지를 노골적으로 보며 다가가는 남자를 보고, 차 문을 열었다. 더 지켜보고 싶었으나 날파리가 꼬이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은 씨.”

손목시계를 보던 여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짓으로 가르쳐 준 이예은인지 진여은인지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기다리던 근사한 중저음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순해 보이지만 건조한 느낌이 다분하던 눈에 드러난 선명한 반가움과 기쁨에 말을 건 남자가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접근하던 남자는 여자가 반가움에 마지않는 표정을 보내는 사내의 모습에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동양인이었지만 상당히 큰 키에 단련된 근육이 돋보이는 굉장한 미남자였다. 손목에 찬 시계나, 신발,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외모뿐만이 아니라 재력까지 한눈에 알아본 남자는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조건에 포기하며 아쉬운 대로 미끈한 다리나 한 번 더 보려는 욕심에 시선을 돌렸다.

(힉!)

남자는 저를 쏘아보는 무시무시한 시선에 몸을 떨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제 암컷을 탐하려는 다른 수컷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였다. 남자는 짐승같이 성근 그 무시무시한 시선에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물론 시선을 먼저 돌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 류태주 씨.”

남자의 차가운 시선은 반가움을 숨길 수 없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갈무리되었다. 저를 향한 음험한 집착을 전혀 모르는 여자는 갈색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저 상기된 표정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궁금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가리고 살던 여자가 무엇을 위해 가면을 집어던진 것일까?

그러나 저토록 자신에게 호응하는 모습도 순수한 그녀의 모습은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여전히 가늠되지 않는 의뭉스러움은 그를 더욱 집착하게 했다. 다른 가면을 쓴 여자의 놀음에 철저히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류태주는 진여은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줄 작정이다.

“일찍 나오셨군요. 아침 식사는 하셨습니까?”

“…네. 네….”

류태주를 마주한 여은은 그제야 동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한 자신의 옷차림에 후회했다. 어떻게든 남자의 눈에 성적 매력을 어필할 생각에 여행을 준비하며 주문한 짧은 반바지였다. 당장 어떤 남자라도 유혹할 듯한 기세로 거의 헐벗은 듯한 차림의 그녀에 비해 검은 슬랙스와 채도가 낮은 회색 셔츠 차림의 그는 어떤 격조 높은 파티라도 참여할 수 있을 만큼 격식과 기품이 느껴졌다. 그리고 남자와 침대로 뛰어들 생각밖에 없는 자신이 저급하게 느껴질 만큼 배려가 느껴지는 정중한 태도는 쥐구멍이라고 찾고 싶게 만들었다.

‘제기랄! 싸구려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하지?’

원래부터 남자의 정자만을 획득할 생각이었던 여은은 저급한 여자로 보일까 걱정하는 자신의 모순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속으로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녀의 근본 없는 삽질은 류태주의 한마디로 멈췄다.

“오늘은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시는군요. 하지만 아쉽네요. …은 씨의 예쁜 다리는 나만 보고 싶었는데.”

역시 예은인지, 여은인지 모를 모호한 발음이었다. 하지만 독점욕이 느껴지는 말투와 더불어 의식적으로 허리 아래를 보지 않으려는 다분한 의지가 느껴지는 정중한 시선에 정신이 팔려 이름 따위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정말 특별한 남자였다. 단지 시선 하나, 눈빛 하나로 자신의 경계심을 풀어 버린다. 류태주는 진여은의 이런 모습을 또 다른 가면이라고 생각했지만, 호르몬에 충실한 지금이 가장 그녀의 본질에 가까웠다.

이후의 시간은 여은에게 무척 신선했다. 구시가지의 서점을 돌고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오래된 레코드점에서 음악을 선택해서 듣는 것은 어릴 때부터 경호에 익숙한 그녀가 모두 처음 접해 본 것들이었다. 그리고 어디를 가든지 헐벗은 그녀의 다리를 가려 주는 그의 세심한 배려에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데이트와 능숙하게 에스코트하는 남자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몰랐다. 어디를 가든지 그녀의 다리를 힐긋거릴 인간의 존재가 없다는 것을.

사소하게 오가는 대화도 무척이나 즐거웠다. 고등학교부터 유학 생활을 했다는 그는 예술과 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花’의 인테리어도 미술을 전공한 동생의 조언이 절대적이었고 시간이 나면 체력 단련과 재미없는 경영 서적을 뒤적이는 것이 전부인 여은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상식에도 불구하고 매끄러운 대화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배려와 풍부한 지식 때문일 것이다.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스치는 손가락들, 에스코트하며 잡아 주는 손.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보호하듯 감싸는 어깨. 이 모든 행동이 정중했지만 팽팽하게 당긴 성적 긴장감에 여은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외아들이지만 친가나 본가에 조부님들이 건강하셔서 늘 집안이 시끄러운 편입니다.”

무엇에나 느긋한 조부와 괴팍하고 괄괄한 성격의 외조부를 말하며 웃는 그를 보며 다복한 가정에서,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임을 느꼈다. 어두운 배후에 가려진 채 부모를 잃고 집안 어른이라고는 자매와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숙부 한 명밖에 없는 자신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이다.

여은은 그의 집안과 배경을 비교하는 자신을 깨닫고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 남자는 어차피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진여은이 가발을 벗고 이 시간, 홍콩에 있다는 것도 이미 정상적인 현실을 아니었다. 그녀는 쓸데없는 생각을 정리하듯 그와 나눈 대화에서 건져 올린 정보를 떠올리며 머릿속으로 체크 리스트를 확인했다.

조폭이 아닐 것

엘리트일 것

잘생길 것

시력이 나쁘지 않아야 할 것

대머리 유전자

유전 병력

성병 유무

유부남이 아닐 것

어디를 보나 1등 신랑감인 류태주의 조건이었다. 좋은 집안, 좋은 환경,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결재해야 하는 서류가 있다는 걸 보니 회사에서도 관리자의 직책을 가진 엘리트일 것이다.

책은 좋아하지만, 집안에서도 안경을 쓰는 사람은 없고 양친 모두 건강한 데다 양가 조부까지 사돈지간에 왈가왈부할 정도라니 유전 병력도 합격. 바람에 날리던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모습을 유심히 봤더니 유전이라고 했다.

대머리 부분도 합격. 마음먹고 속이려 든다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여자가 없다고 은근히 강조한 사실을 보자면 유부남일 리도 없었다.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기에 이 모든 조건은 필요 없는 부분일 수도 있다.

혹여나 이 남자에게 대머리나 시력이 나쁜 유전 인자가 있어도 다 용서가 될 것 같았다. 성병의 유무가 중요하긴 한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질문만큼은 간접적으로 돌려 묻기도, 화제로 올리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조폭이 아니라는 것!

‘이런 남자가 조폭과 관련이 있을 리가 없지!’

이런 확신이 들자 여은은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려 버렸다. 지금은 그가 짜놓은 마지막 일정인 듯 아름다운 선셋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말에 택시를 타고 있었다. 교외로 빠지는 듯 비포장도로를 가는 차 안의 흔들림에 여은의 몸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기울었다. 살짝 떨어져 있던 둔부가 서로 붙고 여은의 어깨가 그의 팔에 닿자 그녀는 몸을 똑바로 세우지 않고 그대로 기댔다.

“땅이 고르지 않군요. 불편하지는 않습니까?”

여은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젓고 그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를 기대는 것만으로도 팔근육이 얼마나 단단한지 느껴졌다.

‘무슨 운동을 하는 걸까?’

근육을 좀 더 느끼고 싶어 뺨을 팔에 비비자 순간 기댄 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반응에 몸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어깨를 강하게 당기는 느낌에 여은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좀 기대요. 오늘 많이 다녀서 피곤도 할 것 같군요.”

여은은 커다란 손에 한쪽 어깨를 감싸여 강하게 당겨졌다. 둥근 어깨를 감싼 커다란 손은 뜨거웠다. 그녀는 갑자기 기류가 바뀐 차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서 괜히 몸을 꼼지락댔다. 한쪽으로 기대자 손을 둘 곳도 마땅찮았다.

더구나 떨어져 앉아 있을 때는 크게 의식하지 못했는데 몸을 붙이고 앉으니 훤히 드러난 허벅지가 민망했다. 여은은 슬그머니 핸드백을 가지고 와 다리 위에 얹었고 두 손으로 무릎이 벌어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아, 이걸 덮어요.”

그가 가방을 치우고 덮어 준 것은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으로 드러난 다리를 가린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한 여은은 그의 놀라운 에티켓에 눈을 깜박였다.

“이렇게 하면….”

몸을 기댄 여은의 한쪽 팔을 잡더니 뒤로 돌려 자신의 허리를 잡게 했다. 어젯밤 첫 만남부터 손을 잡기는 했지만, 이런 적극적인 스킨십은 처음이라 여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녀가 기대 오는 몸에 몸을 굳힌 것은 착각이었을까?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앞으로 늘어진 그녀의 왼팔을 잡아 제 몸쪽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블라우스의 얇은 소매를 쓸어내렸다.

“흣!”

마치 그 안에 흉터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처럼 그곳을 쓸어내린 그는 제 무릎 앞에서 손가락을 얽었다. 여은은 흉터를 쓸어내리는 뜨거운 감각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당황한 눈을 들어 그의 얼굴을 보니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무감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몹시도 가까이 있었다. 여은은 검은 눈동자에 서리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조각같이 날카로운 콧날 아래 시원하게 뻗은 입술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편할 겁니다.”

어깨를 잡은 커다란 손이 엄지로 얇은 뼈를 부드럽게 덧그리더니 가는 팔뚝을 천천히 쓸었다. 여은은 놀라서 동그래진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속 쌍꺼풀이 있는 그의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 언뜻 보면 무척이나 날카로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을 몰랐던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호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빛을 가리는 듯한 긴 속눈썹을 홀린 듯 바라보던 여은은 마른침을 삼켰다. 뒷좌석을 울리는 엔진의 진동이 허리까지 전해 오는 듯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경험이 없는 그 어떤 여자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짙은 정염의 뜨거운 눈길에 그녀는 허리를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무릎 위에 얽어진 손가락이 더욱 죄어 왔다.

“원래 그렇게 순진한 눈을 하고 있습니까?”

그의 시선이 갈색 눈에서 우아하게 뻗은 코로 그 아래 입술로 내려갔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요? 눈동자가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맑군요.”

지금은 번듯한 제2금융으로 이름을 올린 진도 진융은 원래 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사채놀이가 주력이었다. 여은은 누구보다 지독하게 이자를 받아내고 돈을 갚지 못한 이들의 숨은 재산까지 다 찾아냈다. 자기 구역을 노리는 다른 조직을 응징하고 피도 눈물도 없이 살아왔다.

그런 자신에게 아이처럼 맑은 눈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이를 다섯 살이나 속이고 기만하는 그녀에게 순진하다고 말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여은은 진실하지 못한 그들의 관계에 심장이 아릿해졌다.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얼굴을 바라보며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을 때였다.

덜컹! 커다란 돌에 걸렸는지 크게 흔들리는 차체에 몸이 앞으로 쏠리며 여은은 그의 가슴에 코를 박았다. 돌처럼 단단한 그의 가슴이 울리고 있었다. 류태주는 웃고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 도착할 것 같군요.”

꽤 오랜 시간 달려온 것 같았다. 여은은 고개를 들어 자동차 앞 유리에 펼쳐진 광경에 작은 탄성을 질렀다. 그가 선셋을 보자고 초대한 마지막 장소는 빌딩만큼 커다란 열기구였다.

“와아!”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나름대로 낭만적이라고 들어서 기대가 되었거든요.”

낭만이라니! 류태주를 아는 누구라도 뒷덜미를 잡을 말을 그는 태연히 하며 조금만 힘을 주면 바스러질 것 같은 여린 어깨를 다시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러자 얽힌 작은 손가락이 움칠 떨더니 꼼지락거린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 부드럽고 작은 생물체를 만진 적이 없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번에 소유하게 될 이 몸만은 전 생애를 통틀어 절대 질릴 일이 없음을. 자신에게 첫 몽정을 선사한 요요한 히메는 그의 무료한 인생에 커다란 의미를 줄 것이다. 물론 즐거움과 함께 말이다.

“세상에! 열기구라니! 이게 하늘을 나는 거예요? 정말?”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어쩔 줄 모르는 여은을 보며 태주는 빙긋 웃었다. 예정에 없던 홍콩에서의 장기 체류에 그가 묵던 스위트룸은 사무실이 되었다. 따라왔던 비서들이 바쁘게 연락해서 일본과 한국에서 실무진들이 급파되었고 급한 서류를 우선 처리한 그는 홍콩 RUU 조직의 간부들을 소집했다.

그들은 오전 11시부터 여성과 함께 갈 만한 일정을 내놓으라는 보스의 엄포에 진땀을 흘리며 부하들을 소집해 여러 장의 보고서를 적어냈다. 류태주가 누구인가! RUU 해운의 전무이자 후계자로 알려졌지만, RUU 파의 실질적 보스였다.

그는 관리만 하고 조직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던 선대 회장들과는 달리 직접 간부들을 소집하고 일본과 한국, 홍콩 등지에 지부를 설치했다. 일각에서 들리는 소리엔 그가 어떤 인간에 대한 복수 때문에 RUU 조직을 이용한다고도 했으나 류태주가 맡고 나서 RUU 파의 세가 커진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들의 자금줄이 RUU 해운과 연결되어 있으니 야밤에 이런 황당한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해도 오직 충성뿐이었다. 4, 50대가 대부분인 간부들도 류태주의 한마디에 쩔쩔맬 만큼 그는 상당히 무서운 인간이었다.

그의 등장에 공부만 한 샌님이라고 우습게 보고 회의에서 이죽거리던 간부들은 다음 회의에 나오지 못했다. 각각 자신이 관리하던 업소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들은 아마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다.

류태주는 그런 잔인한 힘의 논리를 태어나면서 이미 유전자로 받은 인간이었다. 그런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뒤적이더니 선택한 것이 바로 열기구에서 보는 선셋이었다. 간부들은 만족한 표정으로 다음 사업의 수주를 약속하는 보스의 얼굴을 뒤로하고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너무 멋져요! 세상에!”

류태주는 두 손을 마주 잡고 ‘세상에!’를 연발하는 여자를 보며 가슴이 뿌듯해짐을 느꼈다. 왜 세상의 모든 남자가 치열하게 싸워 획득한 자신의 부장품을 여자에게 바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오늘 모든 행선지와 마찬가지로 RUU 조직에서 미리 손쓴 열기구에 오를 탑승자는 류태주와 진여은뿐이었다.

미리 가스 화력으로 일으켜 세워 놓은 열기구에는 파일럿이 타고 있었다. 계단을 이용해서 먼저 바스켓에 오른 태주는 계단에 선 여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어머!”

마치 가벼운 인형을 들어 올리듯 작고 가벼운 몸을 들어 올리자 다리가 자연스럽게 모였다. 가슴께에 닿은 매끈한 허벅지에 그의 눈이 살짝 짙어졌다.

“준비되셨으면 올라갑니다.”

RUU 조직에서 하루치를 몽땅 빌린 열기구를 조정하는 파일럿은 잔뜩 얼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삼합회를 위협할 만큼 성장한 RUU 조직은 일반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RUU에서 직접 나와 계약하고 잘 모셔야 한다는 엄포를 놓고 갔으니 단순히 관광객만 상대하던 30대의 파일럿이 뻣뻣하게 얼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과 자신을 뒤에서 감싸고 있는 커다란 존재에 온통 신경을 빼앗긴 여은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파일럿의 존재 따위는 머릿속에 없었다.

자유롭게 비행하는 열기구가 아닌 밧줄에 묶여 단순히 하늘로 떠오르는 정도였지만 바닥에서 서서히 오르는 비행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점점 높아지는 시야에 한참 택시로 달려온 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멀리 있는 바다로 해가 넘어가며 하늘과 마주 닿은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해가 져요!”

높은 고도의 기압으로 인한 바람과 엔벌로프로 들어가는 시끄러운 버너의 소음으로 여은은 크게 소리를 높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뺨에서 서서히 깊이 패었던 보조개가 사라졌다. 높은 고도의 비행이라든지, 온통 붉게 물든 하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류태주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요. 당신 뺨이 온통 붉게 물들었거든.”

“정말 고마워요. 정말 멋진 하루였어요!”

“당신이 기뻐한다면….”

뒤에서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저음의 목소리에 배 속이 조여든다. 어제도 이 남자의 눈빛과 쓰다듬던 엄지에 플레어스커트로 가려진 허벅지가 떨린 경험을 한 여은은 그것이 제 몸 안에서 이 남자를 바라는 솔직한 욕구임을 알고 있었다. 욕실에서 벗은 속옷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지금도 아슬아슬할 만큼 짧은 반바지 속은 물이 흐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젖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오전에 그를 만났을 때부터 시작된 반응이었다. 이 남자와 손가락이 마주칠 때마다 어깨를 감싸 올 때마다 털 한 올 없이 민둥한 그 아래가 두근거렸다.

택시에서의 접촉으로 풀릴 뻔한 다리는 다행히 열기구를 본 더 큰 흥분에 다행히 가려지는 듯싶었다. 여은은 이 남자를 원했다. 모든 조건을 거의 충족시키는 완벽한 남자였다. 이 남자 류태주와 류태주의 완벽한 정자를 원했다. 여은은 팔을 뻗어 남자의 굵은 목을 끌어당겨 귓가에 속삭였다.

“0.2초의 기적을 믿어요?”

여자에게 당겨 간 태주의 아름다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과 자고 싶어요. 혹시 성병…!”

“그런 것 따위 없어.”

성병 유무

마지막 조건의 체크박스에 체크가 되자 여은의 입매가 길게 휘었다. 태주는 으르렁대는 소리를 내며 만족스러움을 드러내는 그 입술을 덮쳤다.

“하압!”

그것은 여은이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뜨거웠다. 고개만 돌아가 있던 작은 몸을 완전히 제 쪽으로 돌려 꼼짝하지 못하게 포획하듯 단단한 두 팔에 가두고 연거푸 열리지 않는 입술을 빨았다. 태주는 빨기도 하고 살며시 이로 깨물기도 하며 작은 입술이 열리기를 종용했다.

“혹시 더 물어볼 것이 있으면 지금 말해. 당신을 호텔로 데리고 가면 대화 따위 할 생각이 없으니까. 내 집안, 내 직업, 재산도 알려 줄까?”

여은은 남자가 정중한 태도를 벗어 버리고 고압적이고 거만한 말투로 말하자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이 모습이 진정한 그의 모습인 거다! 양파 같은 남자였다. 한 꺼풀 벗기면 또 어떤 모습이 나올지 궁금했다.

“알고 있었어요? 내가 어떤 것을 묻고 있었는지?”

“글쎄…?”

“약았어.”

여은은 웃으며 그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입을 벌리고 그의 혀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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