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사람들의 열띤 축하를 받고 다시 발을 땅에 딛자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몸에 묻은 샴페인의 끈적함을 씻기 위해 다시 호텔로 돌아온 자매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흥분감에 계속 들뜬 상태였다. 더구나 여은은 여행 이후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남자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누구지? 선글라스를 꼈지만, 분명히 잘생겼어. 그리고 키도 엄청나게 커!”
자매는 함께 거품을 낸 욕조에 앉아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 시간이 있었기에 그녀들은 함께 목욕했다. 커플을 위한 둥근 모양의 월풀 욕조는 자매가 들어가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상당한 크기였다. 마치 저녁에 이루어질 달콤한 유혹을 예상하는 듯 욕조에서 터지는 거품에는 달콤한 장미 향이 진동했다.
“그렇게 눈에 띄는 남자였어? 왜 나는 못 봤지?”
언니가 말하는 남자의 생김새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여린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나도 우연히 본 거야. 그 사람은 마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앉아 있었어.”
“숨어 있었단 말이야?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해. 어제도 그렇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을 거야.”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언니를 보며 여린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사람 아닐까? 왜 다가오지도 않고 멀리서 지켜봐?”
“보통 상황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은은 거품을 손가락에 묻혀 자신과 꼭 닮은 동생의 코끝에 얹었다. 마치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는 여린의 모습에 그녀는 배를 잡았다. 한번 터진 웃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언제 다시 이렇게 웃을지도 모르는 이 순간을 진여은은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비행기에 몸을 싣는 순간 다시 검은 마녀로 돌아가 지옥에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그 남자의 정자가 필요하니 단순히 위험하다고만 볼 수 없지.”
“언니! 그렇게 말하니, 언니가 치한같이 느껴져.”
“그래? 치녀겠지.”
“언니이!”
제발 그만하라는 동생의 웅얼거림에 여은은 그저 웃음만 흘렸다.
“왠지 오늘 bar에 가면 볼 수 있을 것 같아.”
마치 운명이라도 느낀 사람처럼 확신하는 언니를 보니 다시 걱정이 밀려온다.
“정말 괜찮을까? 몇 번 말해 보고 대충 맞는 조건으로 잠자리를 한다는 게 가능할까?”
“사람들은 그렇게 결혼도 해.”
마치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처럼 여상한 말투로 받아쳤지만, 여린의 걱정이 무엇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동생인 진여린의 인생이 달린 문제다. 자신이 무너지면 동생을 지킬 수 없다.
진도 금융도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숙부가 진도 금융으로 끝낼 것이 아니란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것이다. 돈과 권력만이 자매를 보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최 회장이 너른 낯짝으로 자기 아들과의 결혼을 종용하는 것이다. 진도 금융을 준다면 자매를 보호해 주는 방패막이 되어 주겠다고.
“하지만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는 가질 수 있어. 린아, 잠자리 몇 번으로 세상이 망하지 않아.”
내 세상은 누구보다 견고하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내 세상을 지켜낼 것이다.
“그렇지만, 린아. 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왜 나한테만 그래? 언니도 만날 수 있어.”
여린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언니를 보며 울컥함을 느꼈다. 사실 아버지가 자신들의 아이에게 물려주기로 했다는 지분은 여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기에 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에 그 말을 한다면 언니가 얼마나 분노할지 알기 때문이다.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언니의 보호 아래 사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의 안전이 언니 생의 모든 목표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도 언니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어.”
경쾌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언니의 모습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여린이다. 검은 옷, 검은 화장, 차가운 표정을 짓는 것이 전부였던 언니였다. 폭력에 노출된 생활 속에서 타인의 기만을 응징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며 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언니는 음악을 즐길 줄도, 정열에 몸을 내맡길 줄 아는 뜨거운 심장을 가진 여자였다. 우연한 행운에 기뻐하고 사람들과 기쁨을 나눌 줄 아는 보조개가 예쁜 언니였다. 잊고 살았던 언니의 본모습을 본 여린은 더욱 가슴이 아팠다.
“나는 행복해. 지금은 단지 목적을 위한 일탈일 뿐이야.”
아이가 생기면 왜인지 더 행복할 것 같다. 그 아이에게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폭력의 세상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더욱 아이가 절실했고, 남자가 필요했다.
“하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더니 잠이 올 것 같아. 잠깐 잠을 자도 괜찮겠다.”
한번 걱정을 시작하면 끝이 없는 여린의 생각을 끊어 버리듯 여은은 몸을 일으켜 탕을 나갔다. 샤워기 아래에 서서 수도꼭지를 돌리자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은은한 핑크빛 거품이 씻겨 내려갔다. 긴 머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머리카락의 거품을 씻어내던 여은은 상기된 뺨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을 보고 눈썹을 올렸다.
“왜 그래? 새삼스럽게.”
마치 여체를 처음 보는 소년의 모습같이 물들인 발그레한 뺨을 본 여은의 질문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동생의 어떤 표정, 어떤 모습을 하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목소리다.
“언니 몸이 너무 예뻐서.”
“내 몸?”
욕조에 엎드려 팔을 얹고 턱을 괴어 자신의 나신을 보는 동생에게 어이없는 웃음을 보내며 여은은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여자들이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자신의 몸 어디고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숱이 너무 많아서 말리는 데 너무 오래 걸리는 이 머리? 게다가 네가 자르지도 못하게 해서 가발 쓰는 데 얼마나 힘든지 알아?”
여은이 투덜거리자 작품을 감상하는 듯이 보던 여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니의 긴 머리가 얼마나 예쁜데 그래? 나는 언젠가 언니의 긴 머리를 펌한 모습을 꼭 보고 싶어. 정말 여신같이 예쁠 거야.”
늘 자르고 싶었던 머리는 여린의 저 말 때문에 좌절되었다. 언니인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는 듯한 태도에 여린이 얼마나 상심하고 슬퍼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동생은 조직을 떠나 다시 보통 여자인 진여은으로 돌아올 날을 늘 고대하고 있었다. 마치 그날을 꿈꾸듯 젖은 갈색 눈동자로 여린은 말을 이어 갔다.
“언니의 체형은 엄마를 닮았잖아.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워. 언니같이 좁은 어깨가 한복을 입으면 얼마나 예쁘다고.”
연약해 보이는 좁은 어깨 때문에 슈트를 입을 때는 각을 잡기 위해 두꺼운 어깨 뽕을 넣어야 했고 약한 몸에 비해 큰 가슴 때문에 늘 붕대를 감아야 하는 수고를 들여야 했다. 가는 허리와 풍만한 골반은 또 어떤가! 낮에는 스키니 진을 입으며 관능미를 마음껏 뽐냈지만, 평소에 슈트를 입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필요한 몸의 곡선이었다. 그리고…!
“엄마를 닮아 언니나 나나 아래에 털이 없잖아. 내가 열일곱 살에 언니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
시선을 내려 자신의 다리 사이를 쳐다보는 여은을 향해 여린이 웃기 시작했다.
“요즘은 여자들이 일부러 털을 없애는 것이 유행이라며 위생을 위해서라도 털이 없는 것이 좋다며 아무 생각도 없던 나에게 일장 연설을 했지.”
그때가 떠올랐는지 까르르 웃음을 터트린 동생을 보며 여은은 샤워기로 나머지 거품을 씻어내며 따라 웃었다.
지금은 업소에서 일하는 다양한 여자들을 보아 온 터라 일부러 브라질 왁싱으로 털을 없앤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나마 괜찮아졌지만, 아래에 털이 없는 것은 성인이 될 때까지 여은의 커다란 콤플렉스였다.
남과 다르다는 것이 사춘기 소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결함처럼 느껴져서 엄마에게 안겨 울음을 터트린 바보 같은 시기를 떠올리며 여은은 미소 지었다.
“나는 내 체형이 마음에 들지 않아. 키도 더 작아 보이고.”
162cm로 그리 작은 키도 아니었지만, 어깨가 좁고 뼈대가 가는 엄마의 체형을 닮은 그녀는 실제보다 더 작아 보였다.
“아니야. 남자들에게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몸이라고.”
불과 3cm 차이였지만 서구적인 체형인 동생에게 그런 말을 들어 봤자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진도 파의 보스가 보호 본능을 일으켜 봤자 서로에게 민폐일 따름이다.
“그게 오늘 저녁 bar에서 잘 먹혔으면 좋겠다.”
“진짜 그 남자가 나타날까?”
“그 남자라면 일단 외모 부분은 통과야. 이제껏 봤던 남자 중에서는 유전적인 요소가 가장 뛰어나. 그 외에는 알아봐야겠지만 말이야.”
꿈꾸듯 젖어 있던 갈색 눈동자가 다시 걱정으로 흐려지는 것을 못 본 체하며 여은은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만약에 그 남자가 아니더라도 내가 남자와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 같으면 너는 미리 호텔로 돌아와. 혼자 그런 곳에 있으면 위험해. 알았지?”
“그러다가 언니가 위험하면?”
발끈한 동생을 보며 여은은 피식 웃었다.
“검은 마녀를 물로 보지 마.”
언니의 시선에 든 남자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반면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정자를 강탈당할 남자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어떻게든 진도 금융을 지키고 싶은 언니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때문에 다시 변화할 언니의 인생이 싫었다.
이번 여행으로 당장 어떤 남자라도 눕혀 일을 치를 기세지만 언니의 눈은 상당히 높았다. 아무하고 잠자리를 가질 언니가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여행만 즐기다 다시 돌아갔으면 하는 것이 여린의 좁은 속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여린의 편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bar에 앉은 자매에게 다섯 명의 남자들이 퇴짜를 맞은 다음에 나타났다. 아니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드러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를 자리에서 그 남자는 언니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진여린은 첫눈에 이 남자가 언니가 말한 ‘그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앉은키임에도 상당히 큰 키임을 알 수 있는 큰 체격, 갸름한 얼굴선의 정점을 찍는 남자다운 턱선, 뚜렷한 이목구비에 짙은 눈빛, 왜인지 여린은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까 싶을 만큼 무거운 존재감의 남자였다. 언니의 인생을 그냥 둘 것 같지 않았다. 여린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언니에게 매달려 어서 돌아가자고 조르고 싶은 유치한 충동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인가요? 아니면 일본인?)
하지만 교활한 남자가 더 빨랐다. 남자는 상당히 근사한 영어 발음을 했다. 그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는 여린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마치 그것을 알아본 듯 남자는 여린을 향해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그것에 발끈하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언니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국인이에요. 우리 구면이죠?)
남자는 허락도 받지 않고 여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든지 무례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할 법한데 여은은 그저 홀린 듯이 남자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녀들이 선택한 곳은 야외 루프톱 bar로 유명한 술집이었다. K 호텔 35층에 있는 야외 테라스에서 축제의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긴 테라스 옆으로 4인석의 테이블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마주 보며 앉은 자매에게 다가온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여은의 옆에 앉은 것이다.
(흰 탱크 톱을 입은 천사인가 했죠. 남자의 어깨에 앉았을 때는 정말 날아가는 줄 알았어요.)
(설마. 천사라고요?)
전혀 아부라고는 해본 적도 없을 것 같은 남자의 입에서는 단내 나는 말들이 쏟아졌다. 여은은 남자로부터 처음 듣는 찬사가 유치했지만 싫지 않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今はまた違った姿ですね. お姫さま.(지금은 또 다른 모습이군요. 공주님.)”
풍성한 긴소매의 옅은 핑크빛 블라우스에 무릎 길이로 살랑이는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왼쪽 귀 뒤로 반짝이는 핀을 꽂은 채 머리를 풀어 헤친 여은에게 경외의 눈길을 보내며 일본어로 말했다.
(일본인이에요?)
같이 일본어로 대답하며 여은의 눈이 재미있다는 듯 반짝였다. 그러나 곧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근사한 중저음의 한국어였다.
“어머니가 일본인이라 유치원까지는 일본에서 다녔죠. 이후에는 한국에서 중학교까지 다녔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은 미국에서 졸업했고요.”
“엘리트시네요. 공부도 많이 하셨는데 안경은 안 쓰시네요? 혹시 렌즈? 아니면 수술?”
“하하하!”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에 대해 술술 부는 남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회사에서 서류를 볼 때는 안경을 씁니다. 요즘 모니터를 많이 봤더니 시력이 조금 떨어지는 느낌은 있네요. 다행히 평소에는 안경을 쓰지 않습니다. 물론 렌즈도 안 했고, 수술도 전혀 필요하지 않군요.”
조폭이 아닐 것
엘리트일 것
잘생길 것
시력이 나쁘지 않아야 할 것
대머리 유전자
유전 병력
성병 유무
유부남이 아닐 것
여린은 단박에 언니가 심각하게 꼽았던 여덟 개의 항목 중 세 개에 체크표를 그리는 남자의 조건에 눈을 깜박이며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언니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칵테일의 스트로를 젖고 있었다.
“어제도 저를 봤지요? 오늘 요트 경기장은 따라오신 건가요? 아니면 우연?”
자신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는 말에 남자는 숱으로 그린 듯한 짙은 한쪽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느긋하면서도 호감을 표시하는 방법이 무척이나 세련됐다. 남자는 자신의 어떤 부분이 여자의 심장을 떨리게 하는지 잘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긴 다리를 천천히 꼰 남자는 두 손을 깍지 끼고 무릎에 올렸다.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신중한 태도에 경계심으로 가득한 여린의 시선마저 잡아끌었다. 물론 남자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는 여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연 부스에서 춤을 추는 당신을 처음 봤어요. 무척 아름다워서 눈길이 갔습니다. 당신에게 말을 걸고 싶었지만 함께 춤을 추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목덜미에 문신을 봤지요. 저는 누군가의 애인인 여자에게 말을 걸 만큼 파렴치한은 아닌 데다 조직에 있는 듯한 남자와 다툴 생각도 없어요. 저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과 관계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축제 장소를 떠올려 봤죠. 당신처럼 아름답고 정열적이며 외향적인 여자가 관심이 갈 곳을….”
조폭이 아닐 것
엘리트일 것
잘생길 것
시력이 나쁘지 않아야 할 것
대머리 유전자
유전 병력
성병 유무
유부남이 아닐 것
남자는 놀랍게도 두 개의 항목에 동시에 체크표를 그리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그것은 자매의 머릿속에서만 그리는 체크표였다.
“그래서 우연히 요트 경기장을 왔는데 제가 있었다?”
“운명이라고 하고 싶네요. 다시 보고 싶었던 여자가 사실은 조폭 애인도 없었고 이렇게 저녁에 다시 만났으니 말입니다.”
솔직한 남자의 말에 진여은은 입꼬리를 길게 올렸다. 양쪽 뺨에 깊숙이 들어가는 보조개를 보는 남자의 눈이 짙어졌다.
“공연 부스에서 함께 춤추던 남자는 아마 잠깐 제 옆에 있었을 뿐이에요. 반가워요. 이예은이에요. 저쪽은 제 친구 김예린. 친구와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여행 왔어요. 올해 대학 졸업반이거든요.”
검게 눈화장하는 이유도 너무 어려 보이는 외모 때문인 여은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여린과 동갑으로 만들며 능숙하게 거짓말했다.
“저런, 제 나이가 너무 많군요. 어린 줄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어리군요.”
나이를 들먹이며 짐짓 몸을 빼는 남자의 태도에 여은의 눈썹이 올라갔다. 꽤, 아니 상당히 괜찮은 남자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벌써 가임기 이틀째, 어디를 가나 이만한 남자는 구하지 못할 것 같다는 초조함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몇 살이신데요?”
“서른셋입니다.”
서른셋이면 실제 자신과 다섯 살 차이. 다섯 살의 나이도 적은 편은 아니지만, 남자로서 정자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가 아니던가! 열 살 차이가 무척이나 신경 쓰인다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 여은은 그만 제 속마음을 표현하고 말았다.
“열 살 차이 같으면 나쁘지 않은데요? 저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요.”
남자의 눈이 휘어졌다. 높은 눈썹산 아래 가느다란 속 쌍꺼풀의 깊이 있는 눈은 남자치고 크게도 느껴졌으나 반듯한 이마와 거의 굴곡 없이 떨어지는 높은 코와 시원하게 뻗은 긴 입매와 함께 남자를 무척이나 귀골로 느껴지게 했다.
남자의 얼굴에만 온 신경이 가 있던 여은의 시선에 이제야 남자의 셔츠나 손목에 찬 시계가 보통 사람은 살 수 없는 상당한 고가의 물건임을 눈치챘다. 물론 다시 한번 무릎에 올려진 양 손가락에 반지의 체크도 잊지 않았다.
남자는 여은의 말에 무릎 앞에 깍지 꼈던 손가락을 천천히 풀었다. 무척 큰 손이었지만 손가락 모양은 길고 우아했다.
“그것참 다행이군요. 반갑습니다. 류태주입니다.”
“류태주?”
왜인지 기시감이 드는 이름에 여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이름이 흔하지는 않지만 아주 생소한 이름은 아니죠. 이예은 씨.”
누구인지 떠올리려 깊은 생각에 빠져들던 여은은 급하게 정한 가명을 부르는 남자의 말에 가로막혔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진 것을 반증하듯 살짝 모였던 미간은 자신을 류태주라고 소개한 남자의 느른히 풀린 입매를 보고 활짝 펴졌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붉은 혈색이 도는 건강한 저 입술에 닿는 느낌이 궁금했다. 그러나 이성적인 회로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머리는 남자의 더 많은 정보를 캐기 위해 열심히 돌아갔다.
“홍콩에는 무슨 일이죠? 일반 회사원이라면 이 시기의 평일에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친구가 곧 결혼할 것 같아서 친구들과 여행을 위해 회사 출장과 연차를 맞췄습니다. 친구 중 첫 결혼이라 기념하고 싶었거든요.”
“총각파티인가요?”
상류층 자제들은 가끔 진여은이 관리하는 유흥주점인 ‘花’에서 여자들을 불러 난잡한 파티를 벌이고는 했다. 업소에서 일하는 시간 외에는 무슨 짓을 하건 상관없었기에 그녀들이 불려 나가는 파티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 입원할 만큼 몸을 다쳐 종업원이 펑크 난 사건이 있었다.
알고 보니 재벌 3세라는 인간이 변태 행위로 상해를 입힌 것이다. 여자의 치료비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바람에 조직원까지 급파해서 해결했는데 그 인간이 하는 말이 가관이라 깊이 뇌리에 박혔다. 결혼식을 하기 전에 하는 의례적인 총각파티였다고.
“아닙니다. 서른이 넘었지만, 부모님의 회사를 받을 녀석이라 탈선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그 아버님이 아주 엄격하시거든요.”
총각파티라고 말하며 찌푸려지는 미간이라도 본 걸까? 남자는 서둘러 말하며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 류태주의 마음을 엿본 여은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스쳤다.
“흐음… 무서운 아버님이라, 류태주 씨는 친구분들과 일정이 많이 남았겠군요. 제가 괜히 아쉬운데요?”
상대를 탐색하며 밀당하는 남녀를 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음흉한 목적을 아는 여린의 마음은 그저 좌불안석이었다. 그녀는 호감이 듬뿍 담긴 남자의 말투나 시선에 언니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백기를 들었다. 그러나 역시 꺼림칙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던 여린은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반색했다.
“마침, 일은 내일 오전이면 끝납니다. 여행 일정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에스코트해도 될까요? 홍콩은 워낙 자주 오는 곳이라 현지인만큼 좋은 곳을 알고 있습니다.”
한참 좋은 분위기에서 발을 빼는 듯한 남자의 태도에 여은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렇게 간다고? 오늘 방 잡는 거 아니었어?’
그녀는 남자의 두툼한 가슴과 꼬고 앉은 다리의 튼실한 근육을 가늠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남자에게서 받아낼 건강한 정자를 생각하니 아랫배가 뜨끈하게 끓어오르는 듯했다. 가임기 2일 차 여자는 탐욕스러운 혓바닥을 내밀어 저도 모르게 말라 가는 입술을 핥았다.
새빨간 여자의 혓바닥을 본 남자의 눈이 순간 번득였다. 그것을 맞은편 자리에서 본 여린은 놀란 듯 동그란 눈을 깜박였으나 그 빛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마치 신기루같이 없어져 버린 형형한 안광에 여린은 제 눈이 잘못되었나 생각할 정도였다.
“오늘 밤은 바쁘신가 봐요?”
여린은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작게 속삭이는 언니의 말을 듣고 아연해졌다. 누가 들어도 명백한 유혹적인 속삭임은 남녀 간의 농밀한 시간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언니의 입에서 들을 줄 몰랐던 여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여린에게 언니는 부모이자 스승이자 세상 전부인 존재였다. 자신에게만은 다정했지만, 걱정스러울 만큼 타인에게 감정이 없는 차가운 모습만을 봤었다. 아무리 목적이 분명하다지만 이렇게나 적극적인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터라 당황을 넘어 배신감까지 드는 묘한 감정에 여린은 스스로 당황했다.
류태주의 눈이 빨개졌다, 창백해지기를 반복하는 맞은편 여자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나 철저히 감정을 가린 표정에서는 여자의 유혹에 반응하는 표현으로 비칠 뿐이었다.
“아쉽게도 내일 오전까지 마쳐야 하는 일 처리가 있습니다. 이 설욕은 내일 즐거운 시간으로 꼭 보답하지요.”
“흐응….”
알 게 뭐야? 여자를 만날지! 왜인지 차오르는 짜증에 칵테일 잔에 꽂힌 스트로를 마구 돌렸다. 그러다 문득 묵직하고도 따뜻한 기운에 여은은 눈을 크게 뜨고 제 손을 바라보았다.
“방에서 저를 기다리는 것은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와 기획 작성안과 수주할 회사들에 대한 자료들이죠.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오늘 오전에 요트 경기장 따위는 가지 않는 건데 그랬습니다.”
그랬더라면…. 흐린 말끝으로 유추되는 문장에 여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단지 손 하나만 감싸였을 뿐인데도 헐떡이는 남자의 신음과 뜨거운 숨결이 연상된다. 그녀는 이상하게 가려운 아랫도리에 허벅지를 비볐다. 살랑이는 플레어스커트 안으로 마주 대는 매끄러운 허벅지가 자신의 살인데도 묘하게 뜨겁다.
“내일 저와 만나 주실 겁니까?”
남자는 물으며 덮치듯 감싼 작은 손등을 엄지로 문질렀다.
“하읏!”
여은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신음에 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이 남자의 정자에 홀렸어도 말이지, 동생 앞에서 보인 추태에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너무 부끄러워 그녀는 여린이 앉은 맞은편 쪽은 보지도 못하고 느른히 움직이는 커다란 엄지손가락을 노려보았다.
남자의 손은 무척이나 컸다. 늘 타인을 향해 위협하는 주먹만 봐온 여은은 제 손을 덮은 남자의 손이 무척이나 곱고 섬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디가 굵고 큰 손이지만 굉장히 길어서 우아해 보였다.
거친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고운 손에 여은은 다시금 조폭이 아님을 확신했다. 이런 손은 그의 말대로 서류나 만져 봤을 만한 엘리트 중의 엘리트임이 확실했다.
“네. 네에.”
대답을 종용하듯 손등을 만지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여 손가락 마디와 검지의 손톱까지 내려오자 여은은 서둘러 말하며 손을 아래로 뺐다. 그의 엄지는 타인의 살갗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살피고 확인하고 탐색하듯 집요했다. 마치 불에 덴 듯한 화끈함에 여은은 다른 손으로 잡혔던 그 손을 잡아 덮었다. 그 모습을 보는 남자의 눈은 재미있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느 호텔로 모시러 가면 될까요?”
자신들이 머무르는 호텔을 묻는 말에서 정신이 돌아온 여은이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자리 이후에 다시 만날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녀 또한 남자의 호텔을 알고 싶지 않았다.
“5번가의 시계탑 앞에서 11시 어때요?”
몹시도 구시대적인 약속 방법에 남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사실은 제가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가방을 소매치기를 당했어요. 거기에 저랑 친구의 핸드폰이 들어 있어서 둘 다 핸드폰이 없어요.”
“저런…! 많이 놀랐겠습니다. 다친 데는 없나요?”
여은은 자신의 구태의연한 거짓말에 진심으로 걱정하는 남자를 보자 오히려 당황했다.
“저는 괜찮아요. 도난 신고는 했고. 통신사에 연락해서 정지시켰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자마자 놀랄 일을 당했지만, 액땜이었나 봐요. 이렇게 멋진 남자를 만난 것을 보니.”
정말 굉장한 남자임이 분명했다. 아직 대머리나, 유전병, 성병의 유무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내일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당장 정자를 획득할 기회를 잃은 아쉬움을 더 확실한 조건을 알 기회가 된 것에 위안 삼기로 했다.
“그럼 저는 아쉽지만 일어서야겠습니다. 내일 꼭 뵙죠.”
“네. 저희는 조금 더 앉아 있다가 갈게요.”
꼬았던 다리가 풀리고 몸을 일으키자 가벼운 셔츠 아래 입은 데님 바지의 중심 부분이 시선에 들어왔다. 여은은 그가 왜 다리를 꼬고 있었는지 알고야 말았다. 류태주라고 소개했던 저 남자는 옆에 앉은 내내 자신을 보고 흥분해 있었던 거다.
여은은 보기에도 두툼한 그의 바짓가랑이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왜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설 수가 없었다. 당황한 시선을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은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놀란 눈만 깜박였다. 타인이 흥분한 기색을 알아차린 자신은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설 수조차 없는데 본인의 얼굴은 너무나 태연했다.
마치 방금 레몬이라도 한 상자 먹은 듯 상큼해 보이기까지 했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무척이나 커서 뒤에 조명을 등진 그는 마치 거인 같았다. 그가 갑자기 허리를 숙여 왔다. 그 어떤 기습에도 재빠르게 반응했던 것이 불과 이틀 전이었다.
여은은 홍콩에 온 지 이틀 만에 모든 경계심이 허물어져 버렸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에게 말이다.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눈만 깜박이는 여자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그래도 일찍 들어가세요. 다른 놈들이 아름다운 당신에게 꼬이면 화가 날 것 같으니까. 히메미야.”
남자가 작게 웃었는지 귓가에 뜨거운 숨결이 가볍게 지나갔다. 여은은 순간 오싹하며 돋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시 남자가 낮게 한번 웃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유유히 사라졌다.
“뭐야? 언니! 왜 그래? 저 남자가 뭐라고 했어?”
갑자기 창백하게 질린 여은의 표정에 여린이 애타는 눈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이상한 말 했어? 음담패설? 그거 성추행 아니야?”
언니의 이상한 반응으로 남자가 좋지 않은 말을 했다고 단정 지은 여린이 벌떡 일어섰다.
“아, 아니야. 나를 여왕이라고 불렀어.”
“여왕?”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허탈하게 다시 자리에 앉는 여린은 남자가 나간 테라스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순 바람둥이 아니야? 마음에 들지 않아. 앉자마자 천사니, 공주니. 여왕이니, 입바른 소리나 하고. 여자를 다루는 데 너무 능숙한 것 같아.”
남자가 언니 손을 잡았을 때의 야릇한 분위기를 잊으려 애쓰며 여린은 투덜거렸다. 여전히 자매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아직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는 모태솔로지만 언니와 남자 사이에 있었던 묘한 성적 긴장감은 눈치챌 수 있었다. 더구나 남자 앞에서 무너진 언니의 경계심에 여린은 충격을 받았다.
남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언니를 너무나 쉽게 여자의 얼굴을 드러나게 했다. 그것은 마치 이슬만 먹고 살 줄 알았던 아이돌이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는 것을 알았을 때 느끼는 충격과 배신 같은 것이었다. 깊은 시스터 콤플렉스가 있는 여린은 어떻게든 언니를 빼앗기기 싫은 유치한 감정에 다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지? 내일 낮에 시간을 보내면 판단이 서게 되겠지.”
아이처럼 자신에게 독점욕을 느끼는 여린의 볼멘소리에 여은은 소리 없이 웃었다. 동생의 불만 섞인 말에 잠시 보류한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저 남자의 정자를 제 몸에 받아들일 것이라는 강력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것은 가장 우수한 수컷을 골라 짝짓기를 결정하는 본능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아, 언니? 나는 왠지 낯이 익어.”
“저런 남자를?”
한번 보면 다시 못 잊을 얼굴이었다. 왜인지 느껴지는 기시감도 있었으나 생존의 욕구에 충실한 암컷으로의 본능이 발현된 여은은 동생의 말을 무시했다. 어릴 적부터 워낙 자존심이 강하고 새침데기였던 여은은 원래 사람의 얼굴을 잘 보지 않았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라 특별히 사업에 관련된 만남이 아니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덕분에 눈에 담는 것은 전부 조폭들뿐이니 자신의 시야에 닿지 않았다는 자체가 곧 조폭이 아니라는 말이다.
“히메미야?”
낯간지러운 말을 하던 그 남자의 표정은 어땠더라? 긴 머리가 포근한 밤바람에 살랑이며 뺨을 간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