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잘됐어! 이런 시기에 스위트룸이 비다니, 처음부터 운이 좋아.”
초여름에 시작되는 축제 시간은 일주일이었다. 워낙 국제적인 관광 도시다 보니 예약하지도 않고 호텔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름과 동선이 노출되기에 직접 예약은 물론이고 누구를 시킬 수도 없었다.
이 계획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극비였기 때문이다. 누가 가히 상상이나 했을까?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여자 조폭 보스가 임신을 위해서 남자를 사냥하러 해외까지 갔다는 사실을! 게다가 그녀가 낳을 아이는 이미 수조에 달하는 금융 지분을 움켜쥐고 있었다.
여은은 번화가에서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세 번째로 방문한 호텔에서 운 좋게 금방 캔슬 된 스위트룸을 현금으로 계산했다. 호텔을 예약하지 못한 마찬가지의 이유로 여은은 가방 하나를 현금으로 채워 왔다. 대부분 카드로 계산하는 요즘 같은 때에 상당한 금액을 밀어 넣자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짓던 환전소 직원이 떠올라 그녀는 웃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니 웃음도 헤퍼진다.
임신을 목적으로 한 언니의 황당한 발상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여행은 여린도 처음이었다. 0.2초의 마법이 과연 언니에게 통할지 염려되었지만, 생동감 넘치는 축제 분위기와 수행원은 물론 근처에 칼자국이 난무하는 조직 사람들에게서 해방되었다는 자유로움에 여린은 금방 여행의 설렘에 빠져들었다.
“좋아! 이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보자.”
사람들이란 싱싱한 정자를 지닌 남자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린아, 정말 이 차림으로 가능할까?”
거울로 자신의 차림을 훑어보는 언니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예뻐, 언니!”
최고 30도까지 오르는 이곳 날씨는 완연한 여름이었다. 한여름에도 검은 슈트 차림을 고수했던 여은이 평소에 더위를 잘 느끼지 못한 것은 어딜 가나 최적의 온도를 그녀에게 맞춰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갈 곳은 화려한 사무실도, 조직이 관리하는 업소도 아닌 그야말로 보통 사람들이 즐기러 가는 축제 장소였다. 여은이 가이드북에서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린 곳은 많은 사람, 특히나 젊은 남자들이 모일 만한 곳이었다.
“정말 이런 차림으로 남자를 유혹할 수 있단 말이지?”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 보는 여은의 눈에서는 확신할 수 없는 불신이 떠올라 있었다. 여린의 주문대로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풀어 헤치고 어깨를 드러낸 끈으로 된 원피스, 둥근 코의 낮은 샌들을 신은 여자는 너무나 작고 초라해 보였다.
‘花’에서 지나치게 화려한 여자들만 보던 그녀로서는 입술에 옅은 립스틱만 바른 자신의 얼굴이 너무나 밋밋하고 평범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팔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원피스와 같은 색깔로 맞춰 손가락을 끼운 흰 레이스 토시는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자외선 차단을 목적으로 토시를 한 여자들이 많다는 정도였다.
“그럼! 언니. 정말 예뻐. 언니 눈매는 순해 보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강렬해서 사람의 시선을 끈단 말이야. 게다가 언니는 작은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평소에는 립 라인을 크게 그리지만 정말 도톰하고 작아서 유혹적이야. 그리고 몸매도 너무 예뻐! 90, 60, 85가 어디 쉽게 나오는 몸매야? 공항에서부터 언니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토시도 내가 준비했지만 정말 멋져. 섹시해 보인다고.”
“섹시? 설마.”
미술학도 아니랄까 봐 피사체를 보듯 설명하며 손까지 모으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여린의 칭찬에 그녀는 웃었지만 공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너는 정말 예쁘다. 우리 린이.”
비슷한 원피스와 샌들을 신었지만, 조금의 키 차이가 이렇게 다르게 느껴질까? 커다란 꽃이 그려진 옅은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동생은 여신같이 우아하면서도 고아함이 있었다. 비슷한 크기의 가슴인데도 그 약간의 키 차이로 자신의 가슴이 훨씬 크게 느껴졌다. 늘 붕대로 가슴을 눌러 날렵한 슈트 차림에 익숙해진 여은의 눈에는 D컵인 자신의 가슴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언니, 사진 찍자!”
평소에는 가장 성능 좋은 카메라가 내장된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면서도 사진 따위엔 관심이 없었지만, 언니와의 단둘이 여행이라는 것에 들뜬 그녀는 제일 먼저 카메라부터 챙겼었다. 호텔을 나서기 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동생의 들뜬 기분이 전염되었는지 들이대는 카메라 렌즈와 찰칵이는 셔터 소리에 여은도 선선히 웃으며 응했다.
“봐! 엄청 예쁘잖아. 언니!”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활짝 웃는 여린이 너무 귀여워 덩달아 웃던 여은은 함께 찍힌 사진에 잠시 말을 잊었다. 작고 하얀 얼굴로 환하게 웃는 여자는 낯설지만, 분명히 자신의 얼굴이었다. 검은 아이라인과 섀도, 긴 앞머리로 음침하게 눈매를 가리고 새빨간 입술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검은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순한 눈매를 드러낸 채 웃는 여자는 뜨개질과 바느질에 소질이 있다고 엄마에게 칭찬받던 새침데기에 깍쟁이로 유명하던 스물의 진여은이었다.
“금고 비밀번호는 잘 외웠지?”
카드를 쓸 수 없기에 넉넉히 챙겨 온 현금은 모두 호텔 방, 금고에 보관했다.
“혹시 오늘 남자를 만날 수 있으니 미리 당부할게. 혼자 호텔로 오게 되더라도 밥 잘 챙겨 먹어. 남자와 호텔에 들어가면 이곳으로 전화해서 알려 줄게.”
“오, 오늘? 오늘부터 바로?”
여행의 설렘에 잠긴 것도 잠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하는 단호한 언니에게 여린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했다.
“오늘부터 가임기야.”
그랬다. 세심한 산전 검사를 통해 건강한 모체임을 확인받은 여은은 병원에서 가임기와 배란일을 받았다. 정확히 28일의 생리 주기인 그녀의 가임기는 바로 오늘부터 시작이었다. 여행 날짜를 정한 날이 마침 축제 시작인 것은 정말이지 운명 같았다.
“배란일이 9일이지만, 혹시 아니? 첫날부터 0.2초의 마법이 일어날지?”
0.2초라고 동생에게 좋은 말로 강조했지만 사실 그런 감정의 흔들림 따위는 믿지 않았다. 여은은 제 눈에 포착된 남자의 조건이 맞아떨어지기만 한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호텔을 잡을 작정이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오랜 시간 교접하고 싶었다. 그래야 임신의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렵게 조건에 맞는 남자를 낚았는데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이 수고스러운 일을 또 해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다수 남자와 관계도 싫었다. 다시 만날 일이 없다 하더라도 누가 아이의 아버지인지 모르는 난잡한 색사는 사양하고 싶다. 그러니까 아주 신중히 남자를 골라야 했다. 자기 생애에 최초이자 최후일 임신에 진여은은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그, 그래도 첫날부터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
여린의 염려가 우스울 만큼 자매는 호텔을 나가자마자 남자들의 대시에 몸살을 앓았다. 화려한 축제의 깃발로 빼곡한 번화가의 하늘은 어둠도 물리치는 듯 열기로 가득했다. 맥주가 넘쳐나는 거리는 그야말로 자유와 열락으로 흥청거렸다. 설치된 무대에서 노래하는 열정적인 밴드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추는 사람, 키스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더없이 자연스럽다.
(헤이. 너 예쁘다.)
자매가 앉아서인지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은 모두 둘이나 셋이었다. 동양인인지라 간혹, 일본어나 중국어로 말을 거는 남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영어를 사용했다. 대부분 소극적으로 눈을 피하는 여린보다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살피는 여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왔다.
(미안, 곧 있으면 남자 친구가 올 거야.)
길거리 바(bar)에 앉아 있던 여은은 턱을 괸 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여린은 재빠른 시선으로 남자를 곁눈질하고는 첫마디에 거절당한 이유를 알았다. 남자는 진여은이 기본적으로 내세운, 단순하지만 대중적이고도 유전학적인 조건 중에서 첫 번째로 땡! 소리가 나는 결격 사유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팔 전체와 가슴까지 이어지는 용 문신!
보통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이렇게 대꾸하면 남자 쪽에서 오히려 얼굴을 붉히고 사과하는데 용 문신의 남자는 오히려 짧은 티셔츠의 팔을 더욱 걷어 올리며 제 문신 자랑을 했다.
(나랑 놀면 오늘 술값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게, 날 거지로 아나? 여은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여린은 언니의 카리스마가 화장과 가발 등으로 꾸며서 나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하트형의 순한 얼굴을 드러내도 서늘한 진도 파 보스의 모습은 살아 있었다. 그러나 역시 접근법은 달랐다.
(미안, 남자 친구가 RUU야. 오래 치근대는 걸 알게 되면 귀찮게 될 거야.)
한국과 일본뿐만이 아니라 홍콩에도 진출해 있는 RUU는 지독하기로 유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의 풋내기 건달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그대로 줄행랑쳤다.
“언니, RUU랑 잘 알아?”
“아니.”
“난, 또.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RUU랑도 교류하는 줄 알았어.”
“최 회장이야, RUU랑 교류하고 싶겠지.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RUU가 명운에 발을 걸치겠어? 비슷하게 시작한 해운 쪽도 류진규 회장이 일본 시장으로 발을 뻗어서 벌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 공룡이 되었는데.”
말하면서 손목시계의 시간을 확인한 여은은 아쉬운 얼굴로 맥주 컵을 밀어내고 일어섰다. 술은 몇 모금 입에만 댄 채라 여전히 가득한 상태였다.
“린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봐. 이상한 남자들만 잔뜩 꼬였네. 역시 이런 길거리에서 좋은 남자를 낚는 건 불가능한 것이었어. 춤이나 한번 추고 호텔로 들어가자.”
“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잡은 언니에게 여린은 끌려갔다.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자 밴드 공연하는 부스에 다다랐다. 멀리서 들을 때는 조금 흥얼거릴 정도의 경쾌함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듣는 전자 기타와 드럼 소리는 귀와 심장까지 울렸다.
(히에에에에!)
마이크를 잡은 이가 포효하듯 소리를 높이자 곧 익숙한 록 음악이 연주되었다.
(우와아!)
그것이 신호가 된 듯 부스 앞의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여은도 환호하며 두 팔을 뻗어 올렸다.
“뛰어 봐! 린아!”
자신의 두 손을 잡고 음악에 맞춰 뛰는 동시에 머리를 흔드는 언니를 보며 여린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춤을 추는 언니라니!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었다. 단순하게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언니가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원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껍데기를 벗듯 자신의 가면을 버리고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니 상상 이상의 감동으로 심장까지 전율이 왔다. 온몸이 흔들리는 것은 앰프에서 나오는 진동 때문인지 날아오를 듯 머리를 휘날리며 춤을 추는 언니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린은 이 순간이 너무나 기뻤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자유의 순간을 만끽하는 여은의 몸짓은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웠다. 여린과 짝을 이루어 서로 몸을 돌리고 어깨를 비비자 함께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도 접근해 왔다. 거기에는 오로지 춤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여은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실례지만….)
여은의 긴 머리가 마치 검은 파도처럼 물결쳤다. 그녀는 팔과 머리를 흔들며 살짝 머리가 벗어진 남자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냥 즐겨!)
□ ◆ □ 윤이아
가임기 두 번째 날이 되었다.
주황빛이 도는 립글로스를 바른 여은은 전신 거울 앞에 몸을 비춰 보았다. 첫날에 다가온 남자들의 반응으로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을 갖게 된 그녀는 거울을 보는 표정이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오늘은 긴 머리를 올려 묶어 흰 야구 모자의 조임 끈 사이로 빼고 마찬가지로 하얀 긴 팔 탱크 톱에 짙은 남색의 스키니 진을 입었다. 큰 가슴 때문에 탱크 톱이 상당히 많이 떠서 가느다란 허리가 더욱 강조되어 보였다. 필라테스와 유도로 꽉 짜인 애플 힙은 깊이 들어간 허리선에서 아찔한 곡선을 이루며 가느다란 허벅지로 이어져 있었다.
흰 탱크 톱은 팔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가슴이 드러나서 안에는 립스틱과 같은 주황색 비키니 톱을 입었다. 주황색 비키니 끈이 옆으로 길게 파인 어깨선으로 과감히 노출되어 시원하면서도 섹시한 느낌을 완성했다. 반짝이는 주황빛 립글로스와 함께 귓불에 붙은 앙증맞은 다이아몬드가 하얀 얼굴에 생기를 더 해준다.
“좋아!”
훌륭한 정자를 얻고자 야망에 부푼 여자는 제 모습에 만족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 언니, 오늘은 진짜 전투에 나가는 것 같아. 무척이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데?”
비슷한 스키니 진 위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은 여린의 어깨를 안고 거울 앞에서 함께 선 여은은 주먹을 쥐었다.
“노선을 바꿔야겠어. 야외는 어중이떠중이가 너무 많아. 낮에 요트 경기를 보고 저녁에는 실내 바(bar)를 가자!”
어제의 남자들은 대략 초보 건달, 대머리 기미가 보이는 남자, 생긴 것이 영 아닌 인간, 딱 봐도 원 나잇만 즐기는 바람둥이로 뭔가 유전적 결함이 보이는 인간들뿐이었다. 축제를 즐기러 온 학생들도 많아서 너무 어린 햇병아리는 여은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수많은 시선 중에서도 가끔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눈을 돌렸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조직을 이끌다 보니 자연스럽게 발달한 그녀의 예민한 감각은 말해 주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시선을 보내는 사람의 페로몬 때문이지 다른 흑심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 시선을 잡고 싶었다.
“그런데, 린아. 옷차림이 단출하니 귀엽기는 한데….”
짙은 스키니 진 위에 입은 곰돌이 인형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창이 넓은 흰 모자를 쓴 여린은 눈에 띄기 싫다는 어필이 잔뜩이라 웃음이 났다.
“남자는 언니만 사냥하자. 나는 어제처럼 사람들 시선을 받은 게 처음이라 너무 힘들었어.”
남자들이 말을 걸면 뒤로 숨던 동생을 떠올리며 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스물세 살이면 아직 아기지. 안 되면 내가 좋은 남자를 소개해 줄 테니, 너는 그냥 여행만 즐겨.”
겨우 스물세 살 된 여동생은 역시 너무 어리고 약한 존재였다. 반기를 든 진도 파의 인간들을 처리하고 완전히 장악했던 자신의 스물세 살을 까맣게 잊은 그녀는 미소 지으며 선글라스를 썼다.
“가자! 듣자 하니 요트 경기에는 내기도 하나 봐. 재미있을 것 같아!”
승부욕이 강한 그녀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 분명했다. 서서히 다가오는 배란일에 마음이 급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나 붙들고 올라탈 수는 없지 않은가!
호텔을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외모로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시선이었다. 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거의 가린 거나 진배없는데도 집요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여은에게 익숙한 시선은 살기나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것들 뿐이었다. 성적인 호기심이 다분한 끈적거리는 시선에 기분이 더럽기는 하지만 참을 수밖에. 어차피 남자를 꼬이려 입은 옷이 아니던가!
(헤이. 귀여운 아가씨들. 어디로 모실까요?)
택시를 타자 당장에 날아드는 추파는 좀 더 기분이 더러웠다. 얼굴을 가렸다고는 하지만 숨길 수 없는 매끈한 턱선과 가느다란 목, 가슴과 허리를 강조한 옷차림은 가임기의 암컷이 내뿜는 페로몬까지 합해져 가히 뇌쇄적이었으나 그것을 본인만 모르는 여은은 검은 선글라스 안의 고운 눈매를 찌푸렸다.
(요트 경기장요? 축제를 즐기러 오셨군요. 끝나면 선셋이 또 멋지죠. 바닷가 야경을 보며 맥주 한잔 어떻습니까?)
아무리 남자를 유혹하러 왔지만, 집에 자기만 한 딸이 있을 법한 남자의 추파는 그녀의 거친 야성을 깨웠다. 어깨를 옴츠리는 여린을 보니 더 참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그 더러운 눈으로 뒤를 힐끗대면 눈알을 파서 씹어 먹어 줄 테니, 그리 알아.)
뒷자리에서 들리는 음산한 경고에 흰 머리가 성성한 택시 기사는 힉! 하는 소리를 냈다. 상스러운 욕설을 뱉은 것도 아니고 육체적인 위해도 없었지만 어둡고 날 선 카리스마에 뒷덜미가 오싹해지며 어깨가 저절로 올라갔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슬며시 눈을 돌리려다 얼른 앞을 주시했다. 다양한 일을 거쳐 택시 기사를 하기까지 수많은 군상을 겪은 그는 자신의 커다란 실수를 깨달았다. 한때 조직에서 조무래기 건달 노릇을 했던 전적으로 그는 알 수 있었다. 작정한 듯 섹시함을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저 여자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얼굴을 전부 가렸으나 상당한 미인임을 유추할 수 있는 여자는 완벽한 영어 발음을 구사하고 있었다. 여행객처럼 보였으나 옆에 앉은 여자와는 달리 주위 풍경에는 관심도 없는 듯 앞만 노려보고 있었다. 무언가 목적이 분명해 보이는 태도였지만 그 목적이 요트 경기는 아니리라. 한번 조직에 발을 담근 적이 있는 그는 어젯밤 예전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주워들은 잡담을 떠올렸다.
(RUU 파의 황태자가 입국했대. RUU 새끼들, 바짝 얼어 있다던데.)
(RUU? 거기는 회장 일가가 조직까지는 관리하지 않잖아. 그리고 처음부터 그룹과 조직은 별개로 움직이는 거 아니었나?)
(지금 회장은 그랬지만 그 아들은 다른가 보던데.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다더군. 회장 부인이 야쿠자 집안 딸이잖아. 그 피가 어디 가겠어?)
(헤에…. 홍콩에는 왜 왔대?)
(모르지. 겉보기에는 친구들과 왔다는데, 그 친구들도 다 조직의 후계자감이라고 하더라고.)
축제 기간에 맞춰서 갑자기 몰려든 조직 후계자들의 소식과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여자. RUU와 관련된 여자인 걸까? 분명히 보통 사람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실언에 머리털이 곤두섰다. RUU는 물류 쪽으로 성공을 거두고 최근에는 해운 사업에서 큰 성장을 한 기업으로 알려졌지만, 뒷골목에서 들리는 사정은 달랐다.
분명히 그 시작은 다른 조직에 비교할 수 없이 작게 시작했다. RUU의 초대 보스는 한국 어느 지방의 유지 출신인 한량이라고 하던가?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으로 무료함을 견딜 수 없었던 부자가 당시에 동네를 어슬렁대는 젊은이들을 놀이 삼아 모아들였던 것이 조직의 시초라고 어디선가 들은 듯했다.
사실 조직이라기보다 부잣집 도련님의 유흥거리에 불과했던 RUU는 조직 중에서 가장 먼저 기업화했다. 남아도는 젊은 힘을 거친 물류와 화물 운송의 인력으로 투입한 그들은 눈부신 성장세를 거쳐 대기업으로 자리 잡았으나 그 움직임이 바뀐 것은 3대째 회장인 류진규가 야쿠자와 손을 잡으면서부터였다.
일본 고베시에 주둔지를 둔 스미도카이의 외동딸과 결혼한 류진규는 기업과 함께 조직에 힘을 싣기 시작하더니 그 아들이 본격적인 보스 노릇을 하며 엄청난 세를 확장했다고 했다. 상당한 엘리트로 알려진 아들은 드러내지 않은 채 확고한 RUU 파의 수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뒤 세계에서는 소문이 파다했다.
RUU의 황태자로 알려진 조직의 보스와 비슷한 행보를 걸어가는 그 친구들의 입국설, 어마어마한 카리스마의 여자! 오늘 술자리에서 푸짐한 안줏거리를 획득한 택시 기사는 전방을 주시한 눈을 움직이지 않기 위해 얼굴 근육에 더욱 힘을 주었다.
“와! 너무 시원하고 아름다워!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택시에서의 불쾌한 감정도 시원한 바닷바람과 하얀 요트에 달린 화려한 돛을 보자 씻은 듯 없어졌다. 더구나 아이처럼-여은의 눈에는 아이가 맞겠지만- 좋아하는 동생을 보자 여은의 눈꼬리도 자연스럽게 휘어졌다.
도심에서 벌어지는 용선 축제와는 별개로 바닷가에서의 요트 경기는 비싼 입장료가 있다 보니 여느 축제장과는 다르게 조용한 편이었다. 워낙 인파가 몰리는 축제다 보니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지 여기에 모인 사람 수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역시 이곳이 물은 더 좋군.”
남자들을 우수한 정자의 제공자로 보는 날카로운 여은의 눈이 선글라스 안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언니도 참!”
아무리 좋은 풍광과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는 훌륭한 배경에도 결코 목적을 잃지 않는 여은의 한결같은 태도에 여린은 혀를 찼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루를 초 단위로 바쁘게 사는 언니가 가임기 동안 빼놓은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결혼하지도 않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간절히 원할 만큼 진도 금융은 진여은의 20대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존재였다. 그것을 자신에게 주기 위한 것임을 까맣게 모르는 여린은 언니의 이런 간절함을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사업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해했다.
“응?”
내기에 돈을 걸 요트를 고르기 위해 팸플릿을 보던 여은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 기세가 자못 험악하여 곁에 있던 여린도 덩달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언니? 왜 그래? 누가 있어?”
늘 습격과 폭력이 일상인 여은의 감각은 가히 동물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예민했다. 선글라스로 가려진 날카로운 눈이 자신들을 둘러싼 사람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선글라스를 위로 올렸다.
“글쎄…. 어제부터 뭔가 따라붙은 것 같은데….”
모르겠단 말이야. 여은은 말을 흐리며 눈동자만 좌우로 돌리며 다시 살폈다.
“언니가 신경 쓸 정도면 위험한 거 아니야? 혹시 숙부님이 사람을 보낸 건 아닐까?”
“그건 아닐 거야. 내가 신경이 예민한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 자, 내기에 걸 요트를 정하자.”
여은은 걱정하는 동생을 추스르기 위해 얼른 표정을 바꿨다. 불안한 눈으로 자꾸만 두리번거리는 여린의 어깨를 손으로 다정히 어깨를 다독이자 굳은 몸이 스르륵 풀린다. 자신의 눈빛 하나, 손길 하나에 금방 달라지는 동생을 바라보며 여은은 가슴 아래에서 북받쳐 오르는 사랑스러움을 전혀 숨김없이 드러냈다.
“여기 걸자. 빅토리아! 승리하는 거야!”
순전히 시간을 때우기 위해 왔기에 요트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요트 닻을 장식하는 화려한 무늬와 이름만 보고 선택한 여은은 화통하게 상당히 많은 금액의 돈을 걸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알아내려 촉각을 곤두세웠다.
신경을 긁는 시선이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자매를 위협하는 숙부, 진경백의 끄나풀은 아니다. 그래도 마냥 추파를 던지는 시선도 아니었기에 여은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이 어떤 종류인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단순한 호기심도 아니다. 마치 자신을 알고 있는 듯한 묘한 그것은 이상한 집착까지 느껴졌다.
“어? 언니! 저기 봐! 우리 배야! 빅토리아야! 세상에!”
환희에 찬 동생의 목소리에 여은은 날카로운 신경을 거두고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순전히 화려한 돛과 이름만으로 돈을 건 요트가 선두로 출발한 부표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날의 바람, 조류, 파도 등 해상 상태에 영향을 받는 요트 경기는 원래 7차례의 레이스 중에서 6개 레이스 벌점의 합계로 승패를 결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내기 도박. 단 한 번의 레이스로 승패를 가르기에 정말 운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출발할 때는 후발에 가까워 어차피 버린 돈으로 생각했다. 가슴까지 뚫리는 시원한 바닷바람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함께 가진 자매간의 즐거운 시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니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벌어들인 돈은 내기에 건 다섯 배나 되었다.
“언니! 우리 부자 됐어!”
나중에 진도 금융 소유주가 될 여린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에 여은은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운이 좋은 날이었다. 청명한 하늘 위로 여러 개의 샴페인이 터졌다.
내기에 승리한 기념으로 여은도 비싼 샴페인을 주문했다. 시중가보다 세 배의 가격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오늘은 왜인지 양질의 좋은 정자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기대에 부푼 여은은 선글라스를 모자챙 위에 끼운 채 샴페인을 흔들어 터트렸다.
펑!
(와아아!)
사람들이 위로 터지는 샴페인에 환호했다.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퍼지는 하얀 거품을 맞으며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에 빠져 함께 환호했다.
“하하하!”
샴페인을 이어받은 어떤 사람이 샴페인을 사람들에게 뿜어댔다. 여은은 뺨에 맞은 달콤한 샴페인을 닦아 내며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보조개가 깊게 팬 두 뺨이 홍조로 빨갛게 달아올라 활짝 웃는 여은은 마치 승전을 전하는 여신 같았다. 원래는 트로피를 거머쥔 선수의 헹가래가 관례처럼 이루어졌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부풀어 오른 탱크 톱 아래로 주황빛 비키니 상의를 살짝 노출한 아름다운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 중의 한 명이 갑자기 여은의 허리를 잡더니 위로 들어 올렸다.
“어멋!”
놀람도 잠시, 단지 자신을 어깨에 올려 기쁨을 표현하는 남자의 매너 있는 손길에 여은은 흥에 취해 환호했다. 눈높이가 순식간에 두 배로 높아진 덕에 그녀는 파티의 주최자처럼 중심에 서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구석 자리에 앉은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선글라스를 꼈지만, 알 수 있었다. 계속 신경 쓰이던 시선을 보내던 존재라는 것을.
미풍이 그녀의 가슴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