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검은 세단이 도착하자 대문을 지키던 장정들이 하나같이 허리를 숙였다. 대문 옆 차고가 열리고 차가 주차되었다. 하준수가 열어 주는 차 문밖으로 뾰족한 힐이 바닥을 딛기 무섭게 운전석에 앉은 이윤우도 내려 허리를 숙였다.
“수고했어. 퇴근해. 하 실장은 도장으로.”
“네. 알겠습니다.”
퇴근 후에 집 안에 있는 유도 도장에서의 수련은 진여은이 빼먹지 않는 일과였다. 공부만 하던 얌전한 아가씨가 아버지의 사후, 조직을 책임지게 된 이후 제일 먼저 한 것이기도 했다. 비록 다혈질적인 폭력 성향으로 국가대표의 자격은 잃었지만, 하준수의 유도 실력은 상당했다.
진팔양이 직접 픽업한 인재였다. 무식하리만큼 충직한 그의 성향을 알아본 것이다. 제 아버지의 눈을 믿는 진여은은 그를 가장 최측근으로 두고 동생인 여린과 함께 호신술을 겸해 유도로 체력을 단련했다.
“언니! 오늘도 수고했어!”
현관을 들어서기가 무섭게 달려 나오는 익숙한 인영에 진여은은 미소 지었다. 차갑고 냉정한 가면이 벗겨지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검은 아이섀도 사이의 갈색 눈동자로 똑같은 갈색 눈동자가 다정한 빛으로 다가왔다.
12cm 하이힐을 벗자 조금 더 큰 키의 동생을 보기 위해 여은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완벽한 계란형의 얼굴, 동그랗고 귀여운 이마, 순한 눈매와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코와 시원함을 주는 입매를 보는 여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다정함이 넘쳤다. 클수록 엄마와 닮아 가는 진여린은 어딜 가나 주목받는 미인이었다.
어머니의 우아한 코 모양을 똑같이 닮은 자매였지만 여은과 여린은 생김새뿐만이 아니라 분위기도 완전히 달랐다. 엄마를 닮아 여성스러운 매력이 넘치는 여린과 달리 고집스러운 입매나 뒷모습에 명운 파의 중간 보스들이 흠칫 놀랄 만큼 여은은 아버지를 닮았다.
“어우! 담배 냄새! 언니, 오늘 또 분위기 잡았구나! 누구야! 누가 또 언니에게 까불었어?”
기죽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손에 끼우는 언니를 아는 여린은 껴안은 옷에서 나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건강에 해로운 담배를 입에 무는 것은 싫었지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짓밟히는 비정한 세계였다. 언니가 행하는 그 모든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아는 여린의 눈빛이 깊어졌다.
“학교는 별일 없었어?”
자신의 팔을 껴안는 동생의 어리광에 웃음 띤 목소리로 여은은 물었다. 최 회장의 말대로 최근, 숙부의 동태가 수상했다. 호시탐탐 조카들을 노리는 비열한 작태의 인사였다. 학교에서는 티 나지 않게 원거리에서 경호원들을 옆으로 바싹 붙이고도 모자라 인원도 세 배로 늘렸다.
“응. 과제만 점검받고 왔어. 4학년이라 전공 수업만 있어서 작업은 집에서도 충분해.”
여린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보호자이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언니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진여린의 전공은 서양화였다. 철저한 학점 관리로 4학년 때는 졸업 작품에만 집중하고자 했던 계획이 지금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자신에게 세워진 경호원의 숫자만 봐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집 밖으로 한 걸음만 나가도 언니가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그녀였다.
언니의 과보호 같은 처사에 여린은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부모님의 장례식장에서 겨우 15세이던 저를 보던 숙부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서 자신의 왼팔을 희생한 언니의 강단 있는 행동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경호원들 때문에 학교에서 불편하지는 않아?”
미관상 허우대가 멀쩡한 인간으로 붙여 주고 싶었지만, 얼굴로 밥 먹여 주는 세계가 아닌고로 어쩔 수 없이 붙인 경호원들은 누가 봐도 ‘나 조폭이요.’ 하고 광고하듯 험상궂었다. 멋으로 하는 경호가 아니었다. 교활한 숙부가 언제 어느 때 검은 손을 뻗어 올지 모르니 항상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은의 그런 마음을 잘 아는 동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호받는 처지에 불편할 게 뭐가 있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래서 가업을 잇기 위해 합격한 대학을 포기한 언니였다. 언니가 희생한 것은 대학만이 아니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은 왼쪽 팔뚝은 마치 여자로서의 인생도 포기한 것 같아서 여린의 심장을 아프게 찔렀다. 20대의 황금 같은 시간을 아낌없이 포기한 언니에게 과 동기들의 뒷담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고프지? 씻고 바로 내려올 거야?”
은근히 저녁 식사를 종용하는 동생의 말에 여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모든 엄살이 통하지만 단 하나, 들어주지 않는 것이 있었다.
“화장만 지우고 도장으로 갈 테니까, 옷 갈아입고 기다려. 밥은 운동 후에 씻고 먹자.”
“언니이이잉. 나 오늘 생리 첫날…. 알았어요. 준비하러 갈게요.”
운동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여린이지만 경호원만 100%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동생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여은은 빙긋이 웃는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아! 답답해!”
집에 오면 하는 의식 같은 행사였다. 여은은 파우더 룸으로 향하며 팔을 올려 머리에 고정된 똑딱 핀을 풀고 정수리를 한 손으로 집어 올렸다. 검은 단발머리가 쑥, 하고 위로 올라갔다.
“가려워, 으윽!”
파우더 룸의 한쪽에는 검은 단발 형태의 가발들이 줄지어 나열되어 있었다. 여은은 머리를 감싼 망사의 핀을 제거하며 썼던 가발을 얌전히 마네킹의 두상에 얹어 두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한 망사를 풀자 숱 많은 긴 머리가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눈동자가 다른 사람에 비해 옆은 색소인 갈색인 것처럼 여은의 머리카락도 초콜릿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손질하지 않아 거의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유지하는 것은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한 듯 보이는 여은을 향한 동생의 부탁 때문이었다.
긴 머리 따위는 귀찮기만 했지만 순하고 착하기만 한 여동생의 둘도 없는 부탁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인 진여린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이 없는 진여은이었다. 겨우 머리카락 하나 자르지 않는 것이 뭐 대수란 말인가!
여은은 앞으로 흘러내리는 긴 머리에도 아랑곳없이 화장 솜에 아이리무버를 묻혀 검게 칠한 아이섀도와 날카롭게 치켜세운 아이라인을 지웠다. 검댕이 묻은 눈화장은 화장 솜 한두 개로는 어림도 없었다. 새까매진 화장 솜 예닐곱 개가 쌓이자 겨우 본래의 피부색이 보였다.
여은은 옅은 피부 화장을 얼른 지워내고 머리를 묶어 간단히 세안했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다가 문득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도 금융의 사장, 진도 파의 보스, 강렬한 눈화장이 지워진 얼굴은 마치 가면을 벗은 듯 다른 사람 같았다.
사랑스러움이 깃든 미인형의 여동생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닮은 것이라고는 사람들이 우아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길게 뻗은 콧대뿐이었다. 거울에 비친 여자는 삶의 무게에 찌든 28세의 초라하고 창백한 얼굴. 생기도 귀염성도 사랑스러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약한 존재.
“최지승과 결혼하라고?”
집에 오자 일부러 생각하고 싶지 않아 피했던 상념들이 밀려왔다.
“우리 최 상무와 결혼하면 그 아이는 명운 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진도 금융의 남은 지분은 물론 그 아이가 가지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닌가 말이야. 하하하!”
거구를 흔들며 웃어대던 최 회장이 떠오르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제기랄! 최지승, 마음에 안 들어!”
생각을 알 수 없는 음습한 작자였다. 자신을 가면을 알고 있다는 듯 찌르는듯한 시선과 늘 비웃음을 머금은 그 입매가 정말 싫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花’에서 느낀 시선이 떠오르자 짜증이 더욱 솟구쳤다.
“가발을 바꿔 버릴까?”
마음 같아서는 더욱 강한 인상으로 성형도 하고 다리도 늘려 키도 키우고 벌크업을 시켜 몸도 단단히 만들고 싶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휘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지운 여은은 블라우스를 벗었다.
드러난 검은 캐미솔 사이로 흰 붕대가 보인다. 그녀는 바지의 허리띠와 지퍼를 열어 흘러내린 바지 사이에서 다리를 빼며 아무렇게나 캐미솔을 벗어 던지고 가슴을 압박하는 붕대를 풀었다. 붕대를 고정한 핀을 뽑자 수축성이 강한 붕대가 저절로 줄어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살 것 같다!”
가느다란 몸에 비해 상당히 큰 가슴은 슈트 차림에 몹시 걸리적거렸다. 작은 체구에 여성스러운 몸매는 엄마를 닮은 것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커지기 시작한 가슴에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정도로만 인식했던 몸매는 조직을 꾸려 가야 하는 진여은에게 귀찮기만 했다.
차갑고 냉정하고 비정하기까지 해야 하는 조직에서 커다란 가슴과 손에 잡히는 가는 허리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히려 여자임을 우습게 보고 약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하극상을 일으키기에 딱 맞은 약점에 불과했다. 자신과 여동생을 강제로 데려가려는 숙부 앞에서 병을 깨어 제 왼팔을 난자하며 보인 강인함에 무릎을 꿇어 충성을 맹세한 진도 파였다.
장례식 초반 이후로 8년간 진여은은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더 강해져야 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도록, 그 누구도 해칠 수 없도록, 더 단단해져야 했다. 여은은 고치처럼 옷을 벗어 던진 상태로 스포츠브라를 하고 흰 티셔츠 위로 유도복을 입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긴 머리를 다시 빗어 위로 질끈 동여매며 진여은은 다짐하듯 스스로에게 말했다. 곧 동생이 학교를 졸업한다. 진여린이 결혼하면 이 지긋지긋한 조폭 생활을 마감할 것이다. 어디서 좋은 남자와 연애라도 하게 해서 보내고 싶지만, 집 밖으로의 외출은 학교가 유일했다. 그 학교마저 칼자국이 흉측하게 난 조폭들이 경호하고 있는데 감히 진여린에게 어떤 남자가 붙을 수 있단 말인가!
“좋은 남자! 좋은 남자를 짝지어 주려면 든든한 친정이 있어야지!”
죽을힘을 다해 키우고 지켜 온 진도 금융은 진여린에게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진도 금융을 지킬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 ◆ □ 윤이아
텅!
천장이 높은 지하에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한 판!”
중간에서 매의 눈으로 자매들의 유도 기술을 심판하던 하준수가 우렁하게 선언했다. 여린은 바닥에 누워 있는 언니에게 손을 뻗어 일으켰다.
“웬일이지? 오늘 무슨 날인가?”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을 닦으며 해사하게 웃는 여린을 보며 여은은 끄응, 하고 몸을 일으켰다. 지상 2층으로 된 주택 지하에는 이곳에 사는 자매들의 체력 단련을 위한 방이 꾸며져 있었다. 칸을 나누어 필라테스 기구와 러닝 머신 등이 있는 방 이외에 가장 넓은 곳이 바로 이 유도실이었다. 충격에 대비해 두꺼운 매트가 깔린 방은 천장이 높아 몸이 내리꽂힐 때마다 울리는 소음이 유독 컸다.
좀처럼 이기지 못하던 언니를 연달아 업어치기에 성공하자 여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에 세워 둔 물을 마셨다.
“언니, 무슨 일 있지?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
운동하는 것은 싫어하지만 타고난 승부 근성이 있는 여린은 의외로 상대하기 벅찼다. 진도 금융의 지분에 관련된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여은은 쉽게 허점을 노출했다.
“허튼소리. 한 번 더 해.”
“네. 네. 어련하실까요.”
누구보다 지기를 싫어하는 여은의 성격을 잘 아는 여린은 수건으로 목의 땀을 닦고 준비 자세를 취했다. 여은은 방 중앙에서 좌례 자세를 잡은 동생을 확인하고 앞에 마주 앉아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두 사람이 절하며 인사하자 중간에 서 있던 하준수가 한 손을 들어 올려 시작을 알렸다.
하준수는 무릎을 살짝 굽혀 두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서서 자매가 날카로운 눈으로 서로의 옷자락을 쥐기 위해 허점을 노리는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호신을 위해 배우기 시작한 유도 실력은 둘 다 이미 수준급이었다. 날카롭게 허를 찌르는 진여은과 시작할 때마다 싫다는 투로 칭얼거리지만 일단 경기에 들어가면 승부 근성이 있는 진여린이었다.
키와 체격은 동생인 진여린이 좀 더 우세했지만, 발기술과 순간 파워가 폭발하는 진여은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상대의 힘을 이용해서 메치는 기술이 수준급인 진여은이 업어치기를 할 때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솜씨에 선수 출신인 자신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하준수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유도인으로서의 뜨거운 피가 동한다는 것이지 결코 이성적인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공적으로 볼 때 진여은은 상사이자 자신이 모시는 보스였고, 사적으로는 어린 동생뻘이었으나 몇천 명의 건달들을 부하로 거느린 진여은을 감히 28세의 여자로 볼 수 없었다. 하나의 깃발을 꽂으면 그것만을 보는 그 단순함을 진팔양은 높이 샀다.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준 진팔양의 딸들을 보호하고 섬기는 것이 이번 생에 그에게 떨어진 일이었다.
사정거리를 유지하며 옷깃을 잡으려는 순간에도 진여은의 머릿속은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최 회장의 말대로 진경백은 뒤에서 지분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누가 하는 사업마다 말아먹고 도박과 유흥으로 탕진하는 인간쓰레기에게 투자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여은이 신경 쓰는 부분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녀는 제 숙부가 부모님의 죽음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기분 나쁜 놈과 결혼 따윌 할 수 없지!’
최 회장이 노리는 것은 진도 금융이다. 아이를 낳아 아이에게 상속된 지분으로 진도 금융을 지킬 수 있을지라도 진여린에게 그것을 주고 싶은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다. 욕심 많은 최 회장이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다.
결혼하더라도 허수아비에 불과한 최지승이 자신의 편에 선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인 최 회장이 내민 결혼 이야기에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냉혈한에다 철면피였다.
‘게다가 그 알 수 없는 눈빛이란…!’
“앗!”
딴생각을 하는 것이 들켰는지 기습적으로 파고들어 온 두 손이 여은의 목깃을 잡아챘다.
‘다리 걸기!’
앞에서 왼쪽 발이 들어오며 배대되치기를 시도하는 여린이 목깃을 잡은 채 아래로 누웠다. 여은은 동생의 기술을 즐기며 한번 두른 다음 가볍게 착지했다.
“어?”
여린은 자신이 기술이 먹혔는데 반전된 상황에 어이없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히 배대되치기로 완벽하게 넘겼는데 왜 자신이 조르기에 들어가 있는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허억! 언니! 언니!”
자신의 아래에서 팔로 목을 조여 오는 강한 힘에 여린은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다리를 버둥거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허리 아래도 단단한 다리에 제압당한 채 언니의 다리에 감겨 있었다.
‘하지만 최 회장의 말도 일리는 있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33%만으로는 부족해. 최 회장도 넘볼 수 없도록 지분을 더 확보하는 게 좋겠지. 아이가 필요해!’
여린은 아무리 언니를 불렀지만, 시합 중인 그녀는 심판의 한판을 듣기 전에는 결코 제 몸에 감겨 있는 팔, 다리는 풀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자신의 목을 감은 한쪽 팔이 하얀 토시에 감싸인 것을 보고 순간 몸의 힘을 풀려던 여린은 더욱 힘껏 버둥거렸다. 언니의 왼팔에 새겨 있는 흉터는 보통 여자로서의 인생을 포기한 진여은의 상징이었다. 바로 자신을 위해서!
“아윽! 언니! 나도 더 버틸 거야!”
이 게임을 한순간의 유희로 여기며 대충 시간을 때울 수도 있었으나 언니는 그러지 않았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았다. 그것이 진여린을 항상 채찍질했다. 살짝 몸을 풀고 항복으로 들어갈 것 같던 여린이 최선을 다해 저항하자 굳히기에 들어갔다.
‘결혼 없이 아이만…?’
여린은 땀을 뻘뻘 흘리며 제 위에서 카운트를 세는 하준수에게 조금 더 빨리 세라고 눈으로 애원했다.
“한 판!”
하준수의 커다란 목소리가 넓은 유도실을 쩌렁쩌렁 울리는데도 여린을 옭아맨 가는 팔은 풀리지 않았다.
“끙! 으윽! 어, 언니…!”
“보, 보스…?”
시합이 끝났는데도 뭔가에 열중한 듯 눈을 빛내는 진여은을 향해 하준수가 막 팔을 뻗을 때였다. 목을 죄던 두 팔이 갑자기 풀리자 여린은 크게 호흡하며 언니의 몸 위에서 달아났다. 시합 도중부터 계속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듯한 진여은의 표정에는 마치 숙제를 끝낸 후련함이 서려 있었다.
“푸하! 언니! 무슨 일…!”
“그래! 남편이 없어도 아이는 생길 수 있지!”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여은은 매트에 누워 활짝 웃음 지었다.
□ ◆ □ 윤이아
아이를 만들 거다.
아이가 있으면 지분이 완성되고, 그렇게 되면 최 회장이든, 진경백이든 상관없이 진도 금융을 지킬 수 있고 동생인 진여린에게 진도 금융을 넘길 수 있다. 남편이란 작자 없이도 말이다.
최악의 경우, 최지승과의 결혼으로 아이를 만든 다음 이혼도 생각해 봤으나 애정 없이 아버지의 명령으로 결혼을 받아들인 인간이 순순히 이혼해 줄지도 의문이었다. 게다가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인간과 잠자리를 해야 하는데 진여은은 전 생애를 통틀어 그 흔한 썸 한번 타본 적이 없는 연애 고자였다.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아이의 유전자를 그따위 조폭 집안에서 받을 수는 없는 일이지!”
나이가 있어서인가? 갑자기 제 핏줄에 대해 애틋함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여동생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자신의 태에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느낌은 또 다른 소유욕과 집착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평생 자신과 함께일 것이라는 동반자적인 의지도 있었다.
“언니….”
진여린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으로 옆에 앉은 언니를 응시했다. 언니는 한 달 전 유도장에서 갑자기 아이 이야기를 하더니 그다음 날 산부인과를 예약하고 산전 검사를 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일을 추진할 때는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는 행동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큰일을 뚝딱뚝딱 해치울지는 몰랐다. 더구나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라니…!
“너무 걱정하지 마.”
곁에 앉은 여린의 손등을 두드리는 진여은의 표정은 다정했으나 결심한 것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의가 느껴질 만큼 단단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뜬금없이 아이라니. 게다가 그렇게 중요한 일을 어떻게 혼자서 결정하고…. 왜 나에겐 아버지가 진도 금융의 지분을 그렇게 나눠 놨다는 걸 말해 주지 않았어?”
화가 난 듯 볼을 부풀리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을 알려 줬다고 해서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미안해. 네가 알면 괜히 걱정만 할 것 같아서.”
최 회장이 입회했던 유산 공개는 아직 어렸던 동생을 입회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자리에 진경백도 있었기 때문이다. 진여린은 늘 과하게 자신을 보호하는 언니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예쁜 긴 머리를 숨기고 이상한 화장으로 다니는 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철저하게 숨기려고만 하는 언니에게 반발한 여린은 운전기사님께 부탁해서 진도 금융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충성심이 깊은 조직원인 운전기사는 진여린의 부탁이 마땅찮은 기색이었지만 보스가 어떤 분인지 아는 것도 좋을 것 같다며 차를 돌려주었다. 당시, 진도 금융은 아직 제3금융권으로 일명 사채를 하던 시기였다.
진여린이 도착하자 마침 사장님이 계신다고 말하는 직원은 몹시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그냥 살짝 보기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무실로 올라간 그녀는 문을 열지 않고도 날아드는 차가운 음성에 몸을 굳혔다.
“횡령이 아니라고? 지금 장부에 있는 것을 계산만 하면 되는 것을 지금 저에게 바보라고 하는 겁니까?”
존대하지만 그 속에 담긴 멸시와 경멸이 그대로 느껴지는 말투였다.
“사장님!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사장님!”
“장부로 장난한 건 두 번인데 한 번만 용서를 해달라?”
“사장님!”
소리 지르는 여자의 애원에는 이미 자포자기한 느낌이 강했다. 진여은은 장부의 조작을 눈치채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리라. 신중한 그녀는 첫 번째의 횡령을 눈치채고 어떻게 나오는지 주시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간도 크지. 유림에서 빌린 돈을 진도 금융에서 빌려 갚고 이자는 횡령으로 채워 넣었네요. 뭘 한다고 빌린 돈부터 갚지 않았는지? 아! 차를 바꾸셨군. 참, 가지가지 해. 이봐. 유림에서 빌린 돈은 얼마야?”
“5억입니다.”
“그럼, 그 돈으로 우리 돈부터 처리하고 모자라는 건 차랑, 아파트 다 팔아.”
“그래도 2억이 빕니다.”
“섬에 빈자리 있나 알아봐. 퇴물이라도 받아 준다고 하면 넘겨.”
“유림의 부채는….”
“그건 그쪽에서 해결해야지. 이 마담. 열심히 일해요. 예?”
분명히 진여은의 밑에 있을 때는 상당히 존중받았을 여자는 끝까지 매달렸다.
“사장님! 유림 놈들이 얼마나 악질인 줄 알잖아요! 제발 살려 주세요! 같은 여자면서 어떻게 저를 섬으로!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입 다물어요. 여자라서 봐준 거야. 남자라면 벌써 구두 굽에 머리 깨지고 시멘트 바닥에 묻어 버렸어요. 같은 여자? 잘못 봤어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고. 나는 진도 파 보스야.”
언니의 차가운 일갈에 진여린은 살며시 뒷걸음질해서 건물을 빠져나왔다.
“보스는 정말 최선을 다하시는 겁니다. 보통 다른 조직 같았으면 그 여자의 가족이라도 끌고 와서 담보라도 잡았을 겁니다. 너무 겁내지 마십시오. 조직의 보스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운전기사가 굳이 말해 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진여린은 깊이 깨달았다. 제 언니는 여자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진여은도 희생한 것임을. 그 모든 중심에 자신이 있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사랑 없는 관계로 아기까지…!
“언니, 그래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아이까지 갖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반대야.”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며 여린은 반대쪽 창문에 보이는 하얀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미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래서 찾으러 가는 거잖아, 멋진 남자를. 진여린, 세상에 사랑에 빠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줄 알아? 0.2초래. 더불어 사랑에 빠졌다는 감정을 인식하는 데는 50초면 끝나는 거야. 그리고 끝나는 시간은? 6개월이야. 길어 봐야 3년이라고.”
“그렇게 쉽게 빠질 수 있는 사랑이 왜 한국에서는 안 된 거야?”
아이를 갖게 할 남자를 굳이 홍콩에서 찾을 필요가 있냐고 진여린은 묻고 있었다.
“검은 마녀에게 누가 넘어오겠어? 남자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야 해. 게다가 숙부님이 알면 안 돼. 나는 지금 심한 감기로 집에서 앓아눕는 중이고 너 또한 병간호로 두문불출인 거야.”
그랬다. 진여은은 이윤우에게만 진여린과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전화로 통보했다. 무척이나 당황하는 이윤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의 전화기는 공항 사물함에 꺼둔 채 처박아 놓았다.
그녀들의 뒤에는 따라다니는 경호원도, 얼쩡거리는 타 조직의 인간도 없었다. 게다가 진도 파 보스로 검은 눈화장을 하지 않고 단발머리 가발을 쓰지 않은 자연 그대로 진여은의 모습이었다.
“너무 자유롭지 않아?”
지긋지긋한 조직, 검은 눈화장, 가방, 가슴을 죄던 붕대, 끔찍한 검은 슈트, 발이 아파 미쳐 버릴 것 같던 뾰족한 킬 힐도 안녕이었다. 진여린은 긴 머리를 느슨하게 묶은 언니의 편안한 얼굴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언니의 생각은 따라갈 수 없다니까.”
생각뿐만이 아니었다. 한번 결심하면 앞만 보는 추진력과 행동력은 자신은 가히 따라갈 수도 없으리라. 언니는 배란일에 맞춰 마침 축제 중인 홍콩으로의 여행을 잡았다. 가장 가깝기도 했고, 나름대로 우수한 혈통의 다양한 인종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잡은 나라라고 했다.
“그래서 홀가분해?”
“무지, 무지! 너무 홀가분하고 가벼워!”
“언니, 미안해. 늘 언니한테만 큰 짐을 지워서 마음이 무거워. 그래서 전공도 경영 쪽을 간다니까.”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인 진여린은 예술 중,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꽤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그녀는 미대가 아닌 다른 전공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혼자서 애쓰며 언니에게 늘 보호받는 처지로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싶은 그녀는 경영학 쪽으로 선회하려고 했다.
물론 쭉 미술을 전공했기에 당시 예술학교 담임 교사는 그 선택에 무척 당황하며 철회하도록 설득했다. 담임과 진여린의 일주일간의 지루한 대치는 늘 그렇듯 진여은의 한마디로 정리되었다.
“그때도 말했듯이 평생 이 바닥에서 살고 싶지 않아. 네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면 나도 정리할 거야.”
그랬다. 여린은 언니의 희생이 한시적임에 안도했고 좋아하던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다. 이렇듯 진여은은 동생에게 이야기를 다 해주었지만 늘 중요한 이야기는 빼먹었다. 최종적인 목표는 진도 금융을 진여린에게 주기 위해서라는 것은 좀 더 천천히 할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이번에 가서 좋은 남자를 찾아봐. 언니는 네가 외국인을 데리고 와도 상관없어.”
단, 그 남자는 정말 동생을 사랑해야 했다. 모든 것을 바쳐 동생을 보호하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만 진도 금융을 맘 편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어리게만 보이는 동생이 타인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는 것을 생각하면 심장 한쪽이 잘려 나간 듯 아렸지만, 자신도 아이가 있을 테니 괜찮다. 진여은은 생기지도 않은 자신의 아이에게 벌써 애정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나는 좀 무서워, 언니. 그냥 언니 기다리며 호텔에만 있을래.”
소극적이며 겁이 많은 아이.
진여은의 눈빛에 동생에 대해 안쓰러움과 무한한 애정이 드러났다.
“그것도 좋지. 맛있는 룸서비스나 실컷 먹으며 호텔에서 뒹구는 것도 좋을 거야.”
그것은 진여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희망 사항이기도 했다. 그것을 눈치챈 여린의 눈이 다시금 깊이 잠겼다가 그것을 들킬세라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언니, 언니가 생각하는 남자의 조건이 있어? 내 조카의 아빠니까 그래도 괜찮은 남자였으면 좋겠다.”
여은과 마찬가지로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기에 대한 기대는 여린도 가지고 있었다. 언니가 낳을 아이라고 생각하니 벌써 애정이 마구 샘솟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김칫국부터 마시는 동생을 보며 여은은 키득거렸다.
이렇게 바보 같은 계획을 세우며 머리를 맞대고 웃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부터 진여은은 조직과 상관없는 8년 전의 소녀로 되돌아간 듯 마음이 가벼웠다.
“물론이지. 한 달간 내가 얼마나 머리를 짜냈는지 알아?”
고심했다고는 하지만 평소에 남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 여은이 결정 내린 조건은 몹시도 간단했다.
“제일 중요한 조건이야. 절대로 조폭과 관련이 되어 있으면 안 돼.”
단호한 언니의 말에 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바였다. 그것은 돌아가신 엄마가 그녀들이 철들 무렵부터 누누이 강조하던 말이었다. 조폭인 아버지의 정체를 모르고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진 엄마는 어쩔 수 없이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항상 폭력과 위험에 노출된 아버지를 걱정했다.
결국 엄마의 걱정대로 부부는 음모가 느껴지는 사고로 비명에 가버렸다. 함께 죽어 버린 사고자의 배후를 캐려고 노력했으나 베일에 가려진 그 존재는 아직도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언니가 말하는 남자의 조건을 듣는 여린의 눈이 반짝였다.
“아이를 위해서는 인물을 무시할 수 없지. 잘생기고 키도 커야 해.”
“맞아. 더구나 언니의 첫 상대이자 0.2초 만에 사랑에 빠질 상대인데 잘생겨야지.”
“내가 왜 경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짐짓 싸늘한 여은의 눈빛에 여린은 당황했다.
“그, 그야, 부모님이 계실 때까지는 미성년이기도 했지만 얼마나 깍쟁이 같았는지 말 거는 오빠들한테는 눈길도 안 줬잖아. 혹시 최근에 섹파라도 있었던 거야?”
늘 시계 초침처럼 출퇴근이 정확한 진여은의 동선을 꿰고 있는 동생이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보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여은이었다. 순진하게만 봤던 동생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섹파라는 단어가 나오자 놀란 것이다.
“바, 바보야!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아무튼 노코멘트!”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진여은은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남자의 조건으로는 엘리트여야 해. 아이는 엄마 머리를 닮는다지만 그래도 얼굴만 번지르르한 그런 인간은 싫으니까! 그리고 시력을 봐야 해. 시력은 유전이라고. 아울러 안경을 쓰지 않았다면 수술했는지도 봐야 하고, 집안에 대머리는 없는지도 알아봐야지. 대머리는 격세 유전이라고. 당연히 다른 병도 없어야 해. 혹여나 집안에 다른 유전병이 있는지도 봐야겠고. 콘돔을 안 쓸 거니까 성병도 없어야겠지? 아! 그리고 유부남이면 안 돼. 나중에야 다른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나의 아이가 불륜의 씨앗인 것은 용서할 수 없지.”
여린은 언니가 말하는 장황한 조건에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어마어마한 것 아니야? 너무 완벽한 남잔데 그냥 결혼하는 건 어때?”
상상 속의 형부를 그리며 활짝 웃던 여린은 곧 현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언니는 철저히 자신을 숨기고 남자에게 다가갈 것이다. 설사 사랑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그 남자가 사랑하는 상대는 진정한 진여은이 아니었다.
“빠르면 6개월, 길면 3년이야. 귀찮게 그런 존재를 왜 만들겠어?”
동생이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여은은 선택의 여유를 드러냈다. 그때 스튜어디스가 지나가며 후식을 권했다. 간식을 좋아하는 진여린의 눈이 반짝이더니 초콜릿 사탕을 집어 들었다.
“이 초콜릿, 언니가 좋아하는 것 아니었어?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가족 모임을 할 때 말이야. 두 번인가? 사탕을 주며 언니 주라고 했던 오빠가 있었는데.”
어릴 적의 기억을 더듬는 동생의 예쁜 미간에 주름이 가자 여은은 손가락으로 그곳을 톡, 톡, 두드렸다.
“생각해 보면 그 오빠, 진짜 잘생겼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기억이 안 나네. 내가 그걸 홀랑 먹어 버리지 않고 전해 줬더라면 언니가 연애의 맛을 느꼈을지도 모르는데. 미안해, 언니.”
이제야 고백하는 여린의 표정에 진심 어린 안타까움이 어리자 여은은 빙긋이 웃었다.
“직접 전해 주지도 못하는 그런 소심한 남자는 됐거든? 게다가 가족 모임? 전부 조폭 집안인데 일차적으로 거르는 인간이야.”
자매가 어린 시절에는 매년 명운 파를 중심으로 나쁘지 않은 관계의 보스 가족들이 모임을 했다. 당시에는 기업화된 지파들이 사교계에 막 입성할 때라 견제와 함께 서로가 가진 정보에 열을 올리던 시기였다.
거드름을 피우며 상류 세계를 흉내 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짓던 어른들과는 달리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 꽤 잘 지냈다. 유독 아들만 득시글대는 모임에서 유일한 자매였던 여은과 여린은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언니, 무지 깍쟁이였어. 남자들 쪽으로는 시선도 안 뒀잖아.”
게다가 냉정했다. 학교에서 집까지 따라오던 남학생, 고백하는 편지와 꽃다발을 무시하고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쓰레기통에 버리는 언니를 봐 온 여린은 당시에도 언니에게 전해 달라는 초콜릿 사탕을 냉큼 먹어 버렸다. 물론 당시에 겨우 네댓 살의 어린 나이라 그랬었지만 생각해 보면 다음 해에 그 오빠에게 받은 초콜릿 상자는 무척 신경 쓴 티가 났던 것 같다.
“기억은 안 나는데 엄청나게 잘생긴 오빠였던 건 확실해.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아깝다.”
“됐다니까.”
연신 아깝다고 말하는 동생의 말을 무시하며 여은은 책자를 펼쳤다.
“아무리 극악으로 잘생긴 남자라도 조폭은 안 되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접고 어서 묵을 호텔과 여행지부터 잡자. 물론 좋은 정자들이 많이 있을 만한 곳으로.”
“언니도 참…!”
사냥이라도 가는 듯한 여은의 태도에 여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밝은 표정으로 관광 가이드 책자를 눈에 담았다. 이 여행이 자매의 인생을 180도 달라지게 하리라는 것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