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그래서 제가 최지승 씨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요?”
진여은은 여상하게 말을 되돌렸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비웃음은 숨길 수가 없던지 회장실에 앉아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래. 여은아, 아니 진 사장. 해운과 금융계의 만남. 얼마나 좋은가? 응? 우리 명운 그룹도 한 단계 더 클 수 있겠고 말이야. 하하하!”
상석에 앉아 호방한 웃음소리를 낸 사람은 70대의 최명운 회장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여덟 살이 된 자신을 두고 사장 운운하며 비위를 맞추는 듯싶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손가락질 하나로 흔적도 하나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잔혹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진여은은 알고 있었다.
명운 그룹은 아파트 건설로 입지를 다져 해운과 운송 쪽으로 사업을 확장해서 대기업으로 급부상한 회사였다. 현재는 항공과 리조트 사업까지 넘보며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명운 그룹의 꼭대기에 앉은 회장과 경영진들이 조폭 출신인 것은 업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것은 진도 금융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진도 파를 거느린 자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흐응…. 결혼이라….”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뒤를 향해 오른 손가락 두 개를 펴자 곧, 담배가 끼워졌다. 눈을 살짝 가릴 정도로 긴 앞머리와 턱 아래까지 닿는 길이의 날카로운 검은 단발머리,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검은 아이라인과 검은 섀도, 붉은 입술은 진여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검은 마녀라는 별명답게 화려한 검은 리본을 맨 시폰 블라우스와 바지 정장을 멋스럽게 입은 그녀에게서는 무척이나 가녀린 몸에도 불구하고 성별을 초월한 강력한 카리스마가 풍겼다. 자신을 겨냥해서 모인 자리인지 뻔히 알면서도 느긋하게 담배를 입에 문 진여은은 도전적인 시선으로 소파에 앉은 사내들을 한번 훑었다.
거만한 태도로 턱을 세우자 곧 담배에 불이 붙었다. 차갑고도 냉정한 시선, 검은 섀도로 깊이 있는 커다란 두 눈동자는 무척이나 맑은 갈색이었다. 그녀가 얼음장 같은 태도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와 형제 같은 사이였다. 최명운을 필두로 둘러앉은 사장단은 고급스러운 맞춤 슈트 차림에 점잖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명운 파에서 파생된 조폭 두목들이었다.
한국 전쟁 이후에 결성된 깡패 집단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혼란한 정세를 틈타 점차 조직화되어 갔으며 유흥과 도박, 사채 등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본이 상당했다. 머리가 깨인 일부 조직의 보스들은 거대 자본으로 합법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기업이 RUU 그룹, 대명 그룹, 오신 그룹, 그리고 명운 그룹이었다.
작은 상회부터 시작한 아버지를 보고 자란 최 회장은 당시 뒤를 봐주던 정치인과의 인맥으로 택지 개발 붐에 편승해 건설 회사를 차린 똑똑한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 대부터 혈맹으로 맺어진 조직들을 관리하며 사업 확장에 열을 올렸다.
너구리처럼 교활한 그는 항상 먼저 나서는 일 없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사업에 뛰어드는 스타일로 큰돈을 벌어들이기보다 안정성을 추구했다. 그는 기업화한 다른 조직의 동향을 면밀히 살폈다.
“회장님께서는 RUU 그룹이 무척 부러우신가 봅니다?”
끼워진 담배에 불이 붙자 새빨간 작은 입술로 필터가 물렸다. 방만한 그녀의 태도에 사내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것을 보는 갈색 눈동자는 차갑기만 했다. 모두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거물급 조폭 두목들이었으나 거기에 기가 죽을 진여은이 아니었다.
이런 분위기에 어깨를 움츠릴 정도의 담력이었다면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와해하기 직전이었던 진도 파를 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깨어질 듯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화통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 회장이었다.
“역시, 진여은이야! 팔양이가 딸 하나는 잘 키우고 갔지! 암! 내가 늘 너의 기죽지 않는 당당함을 좋아했단다. 하하하! 그러니 불법사채업체에 불과하던 진도 금융을 제2금융권으로 올렸지 않겠니?”
칭찬 일색으로 흐뭇하게 바라보는 최 회장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비웃는 듯 올라간 여은의 입꼬리는 여전했다. 거만하다 못해 오만방자한 그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색이 변함없는 것은 최근 상장한 명운 해운에 관한 진도 금융의 자금이 큰 몫을 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명운 해운뿐만 아니라 명운 그룹의 수많은 자금 세탁과 비자금들이 진여은이 가진 진도 금융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죽은 동료의 딸을 무시하지 못하는 큰 이유였다. 겨우 스물여덟 살에 불과한 계집일지라도 말이다.
“그래, 역시 우리 진 사장의 정보력과 안목은 탁월해. 내가 어린 시절에는 깡패들이 발에 챌 정도로 많았어. 거기서 조직화한 깡패들이 살아남았지. 알다시피 RUU, 대명, 오신, 그리고 우리 명운이 대표적이야.”
그룹의 전신을 조직이라 칭하는 최 회장의 곁에 앉은 사장단의 어깨들이 올라갔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내어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들의 표정에 진여은은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번드레한 겉치레를 일삼고 있지만 그들의 속성은 결국 배신과 폭력이었다. 야비한 속임수였다.
한순간 경멸이 떠오른 눈빛을 정리하던 여은의 갈색 눈동자가 알만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오만한 남자에 닿았다. 최 회장의 외동아들인 최지승이었다. 그는 기 싸움에서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듯 검은 아이라인으로 눈꼬리를 치켜세운 짙은 눈 화장의 그녀를 우습다는 표정으로 깔보고 있었다. 최지승을 노려보는 여은의 사나운 눈매가 담배 연기 사이로 가늘어졌다.
그런 둘의 기 싸움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능구렁이 같은 최 회장의 말은 계속되었다.
“오신과 대명을 보면 이미 거긴 핏줄 세탁으로 텄어!”
최 회장은 상류층의 자제와의 결혼에 혈안이 되어 있는 대명과 오신 그룹을 비웃었다.
“제까짓 게 아무리 유학을 보내고 정, 재계 인맥과 결혼시켜도 주먹으로 돈놀이하던 그것이 어디 지워지겠느냐? 그 자식들 꼴 좀 봐라! 약물 중독에, 허구한 날 주먹질에! 그러면서 상류층에 들어가려고 사람들 비위나 맞추려 알랑방귀나 뀌는 작태라니! 그런 것에 비하면 RUU가 머리는 잘 썼지!”
조폭 출신으로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했던 RUU 그룹이 최근에 재계 순위를 뛰어넘는 기염을 토해냈다. 특히나 RUU 해운은 컨테이너 사업의 통합으로 작년보다 순이익과 증익률의 눈부신 성장을 했다.
명운 해운을 키우고 싶어 RUU의 벤치마킹에 들어간 최 회장의 눈에 걸려든 것은 야쿠자와의 혼맥이었나 보다. 그것을 핑계로 진도 금융을 꿀꺽 삼키고 싶어 하는 그의 검은 속내를 모를 진여은이 아니다.
“하지만 회장님. RUU는 처음부터 시작이 선대들과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전쟁고아로 맨주먹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명운 파의 시조들과 RUU의 류씨 가문은 출신부터가 달랐다. 진여은의 지적에 최 회장은 코웃음을 쳤다.
“흥! 전쟁 때도 재화가 마를 날이 없어서 돈이 화수분같이 쏟아진다던 류씨 집안? 그래 봤자 주먹질하던 정치깡패야. 류씨나 최씨나 다를 게 뭐가 있어? 우리도 할 수 있지. 암! 우리 최지승 전무를 봐! 얼마나 잘생기고 똑똑해? 진 사장도 슬슬 혼사를 생각해야 하는 나이 아닌가? 듣자 하니 진경백이 요새 자꾸만 작업을 건다면서?”
여유 있는 표정으로 최 회장의 말을 듣던 진여은의 미간에 실금이 갔다. 보여주기 위해 손에 끼워 넣은 담뱃재가 길어지자 뒤에서 충직한 수하인 하준수가 허리를 숙여 재떨이를 대어 주었다.
진여은은 최 회장의 입에서 숙부의 이름이 나오자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담배는 그녀의 오른팔인 남자가 끌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들은 준비가 된 진여은의 태도에 최 회장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진팔양이 죽으며 진 사장에게 진도 금융의 지분이 갔지만 동시에 동생인 진경백에게도 갔지. 진경백이 요새 주식을 사 모으는 것도 모자라 명운의 원로들을 찾아다니는 걸 알고 있겠지? 아직 남은 지분은 진팔양의 태어나지도 않은 손주들의 몫이지. 진 사장이 제2금융권으로 올려놓으면 뭐 하나? 그거 홀랑 뺏기면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지 않나?”
최 회장의 발언에 여은은 표정을 굳혔다. 진도 금융 지분에 대한 아버지의 유언장은 가족에게만 공개되어야 했지만 살아생전 형님으로 모시던 최 회장도 입회했었다. 지분의 33% 이상을 갖지 못하도록 한 법 때문에 진팔양은 딸의 자식에게 최소한의 지분을 물려주도록 했다.
그것은 당시 유언장을 들은 이들만 아는 비밀로 하기로 했으나 최 회장은 지금 그것을 공개된 회의장에서 모두에게 말한 것이다. 진도 금융을 노리고 있던 최 회장이었다. 숙부인 진경백이 움직인다는 정보에 몸이 단 것이 분명한 그를 향해 진여은은 한쪽 입술을 비쭉 올렸다.
“그걸 최지승 씨랑 결혼하면 지킬 수 있다?”
지옥의 수문장처럼 뒤에 선 오른팔 하준수와, 왼팔 이윤우가 주먹을 부르르 떠는 것을 슬쩍 곁눈질하며 진여은은 냉정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것이 자신의 결혼이라는 인식도 없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였다.
“물론이네. 진 사장. 진 사장이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며 키우는지 잘 알고 있어. 여린이가 올해 스물세 살이지?”
여동생의 나이까지 들먹이는 최 회장의 말에 들어 올린 여은의 뾰족한 턱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말을 계속해서 기다렸다.
“진경백이 어떤 사람인가? 돈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위인 아닌가? 그 업소에는 겨우 몇백을 빌렸다가 말도 안 되는 이자에 발이 묶인 어린 계집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진 사장도 알잖아. 겨우 스무 살 된 애들도 허다하다고. 그 인간이 조카라고 봐줄 리 만무하지. 진 사장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옛날이야기는 그만하고 본론만 말씀하시죠.”
여은의 날 선 반응에 최 회장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장단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냥감의 상처를 더욱 헤집어 놓는 하이에나처럼 진여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8년 전이군요. 지금 진 사장도 무척 귀여운 얼굴일 때였지.”
“귀엽기만 했나? 무척 예뻤지. 우리 아들 녀석은 진 사장 얼굴 한번 보려고 기를 쓰고 가족 모임에 참석하려 했다니까.”
“설마, 진경백이 제 조카들을 업소에 집어넣으려 할 줄 몰랐지.”
“그때 진 사장이 피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그렇지 여자 몸에 흉터라니, 너무 심했어.”
“심했지. 쯧쯧!”
“정 사장님!”
뒤에 지켜선 그녀의 왼팔, 이윤우가 당장이라도 뛰어들 듯한 기세로 외치자 혀를 차던 남자가 찔끔하며 몸을 떨었다. 모두 뒤에 한가락 한다는 수행원을 거느렸지만 검은 마녀 뒤에 서 있는 남자들은 몸집만으로도 주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진여은의 개들로 알려진 이윤우와 하준수는 이 구역에서도 살인 병기나 다름없었다. 한번 눈이 뒤집히면 상대가 죽을 때까지 물어뜯지만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반도 안 되는 체구로 나긋하기까지 한 여자의 한마디였다.
“조용히 해. 이 실장.”
곁눈질 한번 없이 남자의 사나운 기세를 꺾은 진여은의 카리스마에 개떼같이 몰려들던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재미있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최지승을 향해 완벽하게 그린 검은 눈썹이 올라갔다.
“잊을 만하면 8년 전의 일을 떠올리게 하시니, 다들 그때 일이 무척이나 즐거우셨나 봅니다? 하긴, 신호 대기 중이던 차량을 밀어 버린 범인의 배후가 누구일지 저도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말이에요.”
싸늘한 갈색 눈동자가 최지승을 비켜 다시 한 바퀴 돌았다. 그 속에서는 당신들 안에 그 범인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냐는 비난과 경멸이 공존했다.
“아시다시피, 장례식장에서 우리 자매를 데리고 가려는 숙부를 제가 말렸지요.”
진여은은 자신의 왼팔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왼쪽에 서 있던 이윤우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검은 슈트 소매를 올리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그것도 걷어 올렸다. 그러자 새하얀 팔뚝에 새겨진 붉은 흉터 자국이 드러났다.
붉은 흉과 함께 새살이 돋은 부분이 울퉁불퉁한 화상 자국처럼 뒤엉킨 팔뚝을 보자 남자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일관되었던 최지승의 눈살도 찌푸려지는 것을 본 진여은의 입매가 비틀렸다.
“진도 금융과 동생을 지킬 수 있다면 목숨도 아깝지 않아요.”
거짓말이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 진도가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 너구리 같은 자들에게 자신의 진심 따위는 알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알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아, 그럼. 회장님. 제 목숨과도 같은 진도를 어떻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인지 들어 볼까요?”
□ ◆ □ 윤이아
돌아가는 차 안은 적막했다. 명운 그룹에서 진여은의 뒤를 지키던 남자들은 이제 운전대와 조수석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하준수는 검은 슈트 안에 받쳐 입은 와이셔츠에 목이 죄이는 듯 넥타이를 느슨히 당기고 단추를 하나 풀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명운 그룹에서의 일로 열을 상당히 많이 받은 상태였다. 한때 유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었던 하준수는 다혈질인 성격으로 지금도 분을 삭일 수 없는 듯 거친 숨을 시근덕댔다.
“하 실장, 목의 단추 잠가. 아직 퇴근 안 했어.”
하지만 곧 날아든 싸늘한 목소리에 하준수는 허리를 바로 펴고 목의 단추를 잠갔다. 넥타이도 더욱 힘껏 조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사장님. 아니, 보스! 그런 노친네 말 따위 무시하십시오! 전(前) 보스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에 대해 지분을 남겨 둔 것은 결혼하더라도 보스와 여린 아가씨의 자리를 더욱 공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 이렇게 팔려 가듯 결혼하라는 말을 아니었을 겁니다!”
다리를 꼰 채 차 문에 팔꿈치를 괴고 창밖을 응시하던 진여은의 갈색 눈동자가 잠시 조수석으로 향했다가 다시 창밖으로 돌려졌다.
“조용히 하자.”
“보…!”
여전히 감정이 없는 서늘한 목소리에 다시 입을 열던 하준수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손날을 만들어 목을 긋는 이윤우의 제스처에 입을 다물었다. 하준수와 이윤우는 모두 죽은 진팔양이 조직에서 직접 키운 충성스러운 인재였다.
유도 국가대표였던 하준수는 다혈질인 성격 탓에 싸움을 일으켜 국가대표 자격이 박탈되어 방황하던 때에 진도 파에 들어 진팔양에게 선택되었고, 이윤우는 그의 아버지 또한 진팔양의 수하였기에 자연스럽게 측근이 되었다. 둘 다 서른 중반의 나이로 진여은보다 훨씬 많았지만, 그녀의 강인함과 기지, 그리고 조직에 대한 애정은 진팔양에 대한 충성심에서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물론 처음부터 진여은이 강한 보스로 보였던 것이 아니었다. 하준수가 보스의 딸이었던 진여은을 처음 봤던 것은 사춘기를 지나는 10대였다. 그때도 다섯 살 아래의 여동생을 살뜰히 챙기던 소녀는 새침하긴 하지만 그를 삼촌이라 부르며 해맑게 웃던 구김 없는 성격이었다. 지금처럼 얼음장같이 차가운 여자가 아니었다.
하준수가 일단은 솟구쳐 오르는 화를 누른 듯해 보이자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봐왔던 이윤우는 백미러로 뒷좌석을 살폈다.
검은 마녀.
진여은을 칭하는 별명이었다.
무척이나 가냘픈 몸은 빈틈없는 검은 슈트가 완벽하게 감싸 그녀를 갑옷과 같이 지켜 주었다. 거기에 덧입는 화려한 블라우스와 12cm는 됨직한 뾰족한 킬 힐과 치렁한 귀걸이는 차갑고 딱딱한 슈트와 오묘하게 맞아떨어져 여자 보스로서 어딜 가나 당당하게 그녀를 두드러지게 했다.
푸른빛이 돌만큼 검은 단발머리,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하는 검은 섀도는 그녀의 딱딱하고 차가운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다. 단지, 가장 가까운 사람만이 강렬한 아이라인으로 감춰진 갈색 눈동자에 서린 다정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진도 파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조직원들은 진여은의 본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거의 화장기가 없어도 작은 티조차 없을 만큼 하얀 피부였고 눈은 강아지처럼 순해서 웃으면 무척이나 곱게 휘어졌다.
갸름하고 작은 얼굴에 비해 조금 긴 코는 자매가 똑같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는데 자라면 틀림없이 우아한 미녀가 될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다니던 미용실 원장의 극찬을 받았다고 딸 바보인 진팔양이 저희에게 자랑하던 것이 엊그제 같았다.
웃으면 완만한 곡선을 그리지만 앙다물면 누구도 말리지 못할 고집쟁이처럼 모이는 작은 입술은 피처럼 붉은 립스틱으로 표정을 가린 채 다물려져 있었다. 웬만해서는 감정의 변화가 없는 진여은이 지금은 누구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명운 그룹 최 회장이 던진 제안이 천하의 진여은에게도 큰 파문을 던진 것이리라. 이윤우는 자못 심각한 고민에 빠진 자신의 보스를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스무 살부터 닥친 재앙은 진여은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가정적이고 다정한 어머니를 닮아 뜨개질을 좋아하고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좋다며 유명 여대 식품영양학과에 막 진학한 때였다. 부부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신호 대기 중이었던 세단을 돌진하는 냉동 탑차가 그대로 밀어 버려 운전기사와 수행원, 그리고 진팔양 부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범인은 30대의 냉동 회사 트럭 기사였다. 배후가 있을 것이라며 명운 그룹의 회장을 붙들고 오열하던 그녀에게 차마 진도 파는 어찌 되느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겨우 스무 살이 된 보스 딸에게 리더십이나 카리스마를 바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례식장에서 어린 조카들을 음흉한 시선으로 더듬으며 당시 진도 캐피탈을 강탈하려는 숙부 진경백을 향해 술병을 깨 자신의 팔뚝을 사정없이 난자하며 그녀는 변했다.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진여은은 그날부터 긴 머리를 감추고 누구보다 강한 여자 보스로 거듭났다.
“한남동으로 갈까요?”
긴 침묵을 깬 이윤우에게 다시 갈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눈빛은 누구보다 날 서고 냉정했다. 그것은 전 보스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카리스마였다.
“무슨 말이야. 오늘 일정을 아직 마치지도 않았는데. 청담동으로 가.”
집으로 갈 거냐는 질문에 내리꽂히는 비난의 눈초리에 이윤우는 침을 삼켰다. 진여은을 태운 검은 세단이 멈춘 곳은 청담동의 고급 주점이었다. 세단이 멈추자 차를 알아본 입구를 지키던 기도들이 뛰어와 공손히 손을 모으고 섰다.
조수석에서 내린 하준수가 뒷문을 열자 곧 붉은 밑창의 킬 힐이 내리꽂히듯 바닥에 닿았다.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인 건장한 남자들 가운데 검은 시폰 리본을 옆으로 드리운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의 여자가 입구로 들어갔다.
“사장님, 오셨어요? 오늘 들어온 아이들 한번 보시겠어요? 휴게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장부를 보는 진여은에게 긴장한 표정의 40대 여자는 손을 비굴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비벼댔다. 바로 ‘花’에서 부장 직함을 달고 있는 박 마담이었다. 2년째 매주 보는 얼굴이지만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사장은 대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사람이었다. 처음에 청담동 ‘花’를 관리할 생각이 없냐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花’는 천만 원부터 1억짜리 술 세트가 있는 초고급 주점이었다. 거기다 연예인들도 울고 갈 만큼 아름다운 텐프로가 즐비한 곳으로 유명했다. 화려한 입구부터 눈에 띄는 이곳은 모든 손님에 대해 비밀에 부쳐질 만큼 거물 단골이 많았다. 게다가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바가 없는 곳이라 신비에 싸인 곳이기도 했다. 관리자로서 월급도 눈이 돌아갈 정도라 어떻게 이런 자리가 자신에게 올 수 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거기? 사장이 여자야. 일하기는 편할 거야, 괜히 조폭이랍시고 껄떡대는 일도 없을 것이고. 전임자? 횡령했대, 술값을 속였나 봐. 어찌나 장부를 깐깐하게 조사하는지 겨우 두 번 해 먹고 나가떨어졌지. 사장이 얌전한데 한번 화나면 엄청 무서워. 전임 이 마담은 아주 폐인 되어서 섬에 팔려 갔을걸?”
이곳을 소개해 준 이는 명운 파에 소속된 건달이었다. 명운 파의 아래 있는 진도 파에서 관리하는 주점이라는 말에 바싹 긴장했었는데 단발머리의 냉 미녀인 사장을 보고 처음에는 의아함을 가졌었다.
40대 건달이 엄청 무섭다며 학을 떼던 모습을 비웃기도 잠시, 박 마담은 술값으로 시비를 걸어온 다른 조직 건달의 머리를 킬 힐로 찍어 버리는 것을 목격 후, 늘 사장 앞에서는 쪼그라들어 손만 비벼댔다. 날카로운 눈으로 장부를 들여다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혹여나 자신이 ‘0’을 하나 실수로라도 덜 적은 것이 있는지 매일 계산기를 두드려대야 했다.
“신입이 들어왔다고? 들어오라 해요.”
진여은의 허락이 떨어지자 박 마담은 서둘러 움직였다. 사실, 사람을 시켜도 되지만 혹여나 함께 있다가 자신에게 떨어질 불벼락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런 잘못을 한 것도 없지만 시꺼멓게 칠한 깊은 눈 안의 맑은 갈색 눈동자는 없는 죄도 알아낼 듯한 두려움을 주었다.
“이번에 들어온 아이들입니다.”
다섯 명의 여자들은 모두 20대 초반부터 중, 후반까지 다양했다. 박 마담은 이 순간만은 얼음 같은 사장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집에 다섯 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고 들어서인지 여자 종업원에게는 그나마 상냥한 편이기도 했다.
살짝 마음을 놓고 있던 그녀는 서 있는 한 여자를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사장이 온다는 소식에 장부를 한 번 더 들여다보다가 그만 신입들의 옷차림을 체크하지 못한 것이다. 박 마담의 어깨가 잔뜩 오그라들어 눈치를 살피니 아니나 다를까 사장의 얼음 같은 눈매가 더욱 차가워졌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신입 종업원들은 사장에게 인사하러 간다는 말에 잔뜩 긴장했다가 검은 슈트를 입은 화려한 여자를 보고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각자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인사하는 중에도 ‘진짜 사장이야?’ 하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진여은입니다. ‘花’의 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실히 일해 주시길 바랍니다. 계약서에 있다시피 ‘花’에서는 접대 이상의 행위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당한 대우나 추행을 당하신다면 언제든 호출하세요. 퇴근 후의 2차는 개인 영역이니 터치하지 않습니다.”
‘花’에 오는 종업원들은 신인보다 스카우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들 또한 처음에 이곳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을 때 박 마담의 소감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와 설렘, 그리고 호기심. 기본적으로 유명 주점은 조폭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나름 예상하다가 여자 사장이 소개되자 의아함을 품었을 것이다.
여자 사장에 대해 어떤 이는 다행으로, 어떤 이는 실망감을 느꼈는데, 실망감을 느낀 이들은 대부분 실세인 사장에게 잘 보여 그의 애인 자리를 꿰차고 싶은 야망을 품은 이들이었다. 이 또한 모든 신입 여종업원들이 겪는 하나의 통과 의례였다. 박 마담은 늘 똑같은 통과 의례에 지나지 않는 순서에 숨을 죽였다.
진여은 사장은 차갑고 냉정하지만, 일부러 꼬투리를 잡거나 억지를 부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단, 그녀가 세운 원칙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죄를 지은 듯 고개를 숙인 박 마담의 눈에서 앞코가 뾰족한 구두가 움직였다. 역시나 사장은 자신의 실수를 눈감아 줄 리 없었다. 그녀는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들을 질타를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름다운 종업원들의 얼굴은 다양한 실망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 유독 실망한 티가 많이 나는 여자에게 진여은은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푸른빛이 일렁이는 검은 머리가 티 없이 하얀 뺨 위로 찰랑거렸다.
“복장이 이게 뭐지요? 매뉴얼을 보지 못했습니까?”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말투에 여자들의 어깨가 모두 하나같이 올라갔다. 유독 가슴이 풍만한 여자는 제 육감적인 매력을 최고로 어필하고 싶었는지 무척이나 노출이 심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속옷을 입지 않은 얇은 드레스는 둥근 가슴 모양은 물론이고 붉은 유두까지 살짝 보일 만큼 깊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어깨를 노출한 짧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는 헐벗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花’는 몸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여자는 곱고 가는 손가락이 드레스를 당겨 어깨를 가리며 노골적으로 지적하자 얼굴을 붉혔다.
“이 옷은….”
“다른 옷은 없습니까?”
어깨를 가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자 진여은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자신의 말을 끊은 사장을 향해 여자의 눈썹이 치켜세워졌다. 박 마담은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 매장에 준, 준비된 드레스가 몇 벌 더 있습니다.”
“이 옷이 좋아요. 갈아입지 않겠어요.”
여자의 이름은 오소희.
현재 모델 활동을 하며 단역이긴 하지만 영화 크랭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종업원에 대해서도 비밀에 부쳐지는 ‘花’는 고수입을 보장하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외모와 몸매, 매력, 섹시 어필까지,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오소희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돈이었다.
‘花’에서의 스카우트 제의에 뛸 듯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로 당장 사장부터 공략할 생각이었던 오소희는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지자 짜증이 솟구쳐 올랐다. 그런데 뭐? 옷을 바꿔입으라고? 매뉴얼?
팔짱을 끼고 사장을 바라보는 오소희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승리의 표정이 짙게 서려 있었다. 가느다란 체구의 사장을 내려다보며 평가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자만심이 가득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사장은 기본적으로 못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검은 옷으로 모두 가리고 있지만 벗겨 놓으면 제법 볼륨 있는 몸매가 틀림없었다.
맞춤이 분명한 고급스러운 옷감, 완벽한 재봉선, 분명히 몇백은 호가할 만한 화려한 시폰 블라우스, 진품인 귀걸이, 더구나 기품있고 우아한 분위기는 아무리 칼날 같은 냉정함을 가장해도 어느 정도의 수준 있는 집에서 나고 자란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게 칠한 눈매나 음침하게 눈을 반이나 가린 앞머리, 답답할 만큼 검은 단발머리는 여자로서 매력이 전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여자를 자신보다 예쁜가, 예쁘지 않은가로 판단하는 오소희는 당연히 승리감을 느꼈고 그것은 사장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콧대를 세우고 앞에 선 여자를 낮잡아 보았다.
170cm인 작지 않은 키에도 불구하고 10cm 힐을 신은 덕에 검은 머리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꽤 높은 힐을 신은 것 같은데도 이 정도의 키라니! 오만방자한 표정으로 혀를 차는 순간 냉랭한 목소리가 울렸다.
“계약서 가지고 와요.”
박 마담은 신입 여종업원의 돼먹지 않은 태도에 연신 쩔쩔맸다. 오소희는 최근 근방에서 꽤 인기가 좋은 여자로 그녀가 직접 스카우트 명단에 이름을 올렸었다. 가끔 지나치게 제 몸매를 과시하려는 여자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박 마담의 엄포에 꼬리를 내렸다. 이렇게 사장의 지적을 받은 사례는 없었기에 그녀는 정신까지 혼미한 상태였다.
나름대로 화류계에서 20년을 일하며 겪을 수 있는 험한 일은 다 겪었다고 자부하지만, 진여은의 앞에 서면 왜 이리 다리부터 후들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처음에 사장이 여자라는 사실에 실망 어린 표정을 짓던 다른 여자들도 지금은 진여은의 카리스마에 동화되어 저절로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그런데 저 오소희는 뭘 믿고 저렇게 오만방자하단 말인가? 저것은 분명히 눈치가 젬병이거나 머리가 나쁜 것이라고 속으로 한탄하며 박 마담은 계약서를 찾아 대령했다.
“흐응….”
계약서를 보는 진여은이 알만하다는 콧소리를 내자 그제야 오소희는 누가 갑인지 파악된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계약금을 받았군요. 좋습니다. 매뉴얼에 따르기 싫다면 오너로서 나도 어쩔 수 없지요. 계약 파기 위약금은 필요 없으니 받은 계약금만 받도록 해요.”
“마, 말도 안 돼요! 겨우 옷 하나 때문에 해고라니요!”
오소희는 간단히 말하고 계약서를 박 마담에게 돌려주는 진여은을 향해 소리쳤다. 그 목소리에서는 방금까지의 오만하고 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만 원에 달하는 돈은 이미 화장품과 밀린 월세를 내는 데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당장도 생활비가 절실했다. 그래서 월급이 아니라 주급으로 바꿀 수 있을지 의논할 계획이었는데 해고라니!
“여기는 말했다시피 몸 파는 곳이 아니에요.”
싸늘한 시선이 여자의 드러난 젖가슴과 아슬아슬하게 짧은 치맛단에 닿았다. 오소희는 사장의 시선이 자신에게는 없는 여성적인 매력에 대한 질투가 아닌지 의심하는 눈으로 살폈다. 그리고 곧 참담한 자신의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진여은의 눈빛은 건조하기 짝이 없을 만큼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마치 상품을 품평하는듯한 무감한 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이리저리 단역을 다니는 신세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나서면 여자들은 질투 어린 선망의 시선을, 남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속이 뻔한 추파를 던져 왔다.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花’에서는 비밀스러운 회담이나 계약이 진행되고는 합니다. 오는 사람도 전부 예약제에 신분이 보장된 인사가 대부분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매끄러운 분위기를 주도하는 역할과 비밀을 엄수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손님들이 주는 팁은 그런 용도이지 당신들을 유희 거리로 봐서 주는 화대가 아니란 말입니다.”
처음에 아버지에게서 받은 주점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당장 2차가 이루어질 정도로 난잡한 공간을 은밀한 계약과 유희가 함께하는 고급스러운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진여은은 근 2년을 잠도 못 이루고 코피를 쏟아 가며 공부해야 했다. 그런 자신의 노력을 이렇게 헐벗은 몸으로 돈 많은 남자 하나 물어 팔자를 고치려는 야망 어린 계집아이가 흠집 내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박 부장님, 오소희 씨에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잘못했어요!”
조금의 여지도 없이 그 자리에서 돈까지 정산하는 사장에게 오소희는 질린 얼굴로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자그마한 체구에 주름 하나 없이 투명한 피부라 자신보다 어리거나 비슷한 나이로 생각해서 우습게 본 것도 있었다. 대면했을 때도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 여자는 자신과 사는 세계가 완전히 다른 생물체였다.
이제야 오소희는 저가 감히 말을 섞을 수도 없는 수준의 사람에게 멋도 모르고 까불었다는 인지하고 겁을 먹었다. 이곳의 진정한 강자가 누구인지 오소희는 뼈저리게 깨달으며 두 손을 모았다. 그녀에게는 돈이 최고였다. 당장 생활을 영유할 수 있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곳이 ‘花’임을 진여은의 말로 더욱 확신했다. 자신은 이곳에서 반드시 돈 많은 남자를 물어야 했다.
“사장님, 정말 잘못했어요. 옷, 당장 갈아입을게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요.”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애원하는 여자를 보며 진여은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실력 행사에 다들 기가 죽었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평가하느라 바쁘던 눈들이 제법 다소곳해졌다. 정말 이쪽이나 저쪽이나 모두 진절머리 나는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여은은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봤다.
“박 부장님, 예약 손님들 도착 시간이 어떻게 되죠?”
여전히 냉랭하지만, 사장이 하는 말의 의미를 눈치챈 박 마담은 활짝, 얼굴을 폈다. 사장은 눈치 없이 헛된 야망만 가득한 햇병아리 종업원에게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보아하니 당장 갚을 계약금도 없어 보이는 여자는 제가 추천해서 스카우트한 터라 만일에 잘리게 되면 자신에게도 책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일부러 꼬투리는 잡지 않지만 한번 물고 늘어지면 끝장을 보고야 마는 진여은이었다. 그냥 검은 마녀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님을 아는 박 마담은 얼른 오소희에게 붙어섰다.
“곧 도착할 겁니다. 저녁 6시거든요.”
시계는 5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녁 6시라…. 귀국 환영회라도 하나?”
술자리를 갖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아마도 어딘가에서 간단히 요기한 주인공을 위한 시간일 것이다. 주문한 천만 원짜리 세트는 비즈니스 관계자로는 과하니 사적인 자리일 것이고 추가 주문한 안주에는 한국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감 단자가 있었다.
거기에다 제품명까지 명시된 초콜릿 사탕이라니! 여동생이 어릴 때 무척이나 좋아해서 눈에 익은 사탕을 보고 어딘가의 돈 많은 애송이가 귀국했군. 하고 생각한 것이다.
역시나 날카로운 지적에 박 마담은 혀를 내둘렀다. 예약자가 귀국한 친구의 환영회라고 어울리는 술과 안주를 추가로 주문했던 것이다.
“대명 그룹, 이선재 전무로 예약되어 있습니다.”
“이선재? 친구 중에 아직 공부하는 인간이 있나? 팔자 좋군.”
“어머! 잘 아는 사이신가요?”
묘한 어조로 투덜거림을 파악한 박 마담은 활짝 웃어 보였다가 사장의 뒤에 장승같이 서 있는 수행원들의 기세에 다시 쪼그라들었다.
“장부는 별문제가 없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네. 네. 감사합니다.”
“잘…. 관리하세요.”
반쯤 가린 앞머리 사이로 날카로운 안광이 비치자 박 마담은 힉! 하고 소리를 내다 급히 입을 막았다. 그리고 뻣뻣한 오소희의 등을 힘껏 눌러 허리를 숙이게 했다.
진여은은 영혼이라도 바칠 듯 허리를 숙이는 박 마담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당장 저렇게 자존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굽신거리지만, 누구보다 비정한 세계임을 잘 알고 있었다. 돈에 웃고 돈에 우는 세계였다.
저렇게 비굴하게 숙인 머릿속으로는 일주일에 억 단위의 가게 매출과 진도 파에서 관리하는 사업체가 몇 개가 되는지 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진도 금융의 실소유주임을 떠올리며 자신의 나이를 유추해 보겠지. 그다음에는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조합하며 금수저를 물고 나서 일찍 죽은 부모에게 받은 사업체를 굴려 여자 주제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갖게 되었다고 떠들 것이다.
단지 살기 위해, 그리고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치러야 했던 희생과 노력한 시간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그 노력의 시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하다.
진여은이 사무실을 나오자 기도부터 웨이터까지 남자들이 양쪽으로 나열해서 서 있었다. 거기에는 앞치마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여자 종업원 외에 일하는 남자들은 모두 진도 파의 조직원이었다. 클럽부터 다양한 주점과 카지노 사업체를 가진 진도 파는 명운 파에 아래에 있는 것치고 꽤 알짜배기 조직이었다.
더구나 진도 금융이 제2금융권으로 승격된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돈이 곧 힘인 이 세계에서 조직의 보스가 여자라는 것은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말해 주듯 사무실부터 입구까지 줄지은 남자들의 얼굴에는 맹목적인 충성이 흐르고 있었다. 진도 파에 입단하는 순간부터 그들의 꿈은 진여은의 가장 측근이 될 수 있는 진도 금융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모두 수고해.”
슈트 바지에 찔러 넣고 걷던 진여은이 한 손을 들자 남자들의 허리가 더욱 굽혔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우렁찬 목소리가 화려한 꽃이 프린트된 유리 벽으로 울려 퍼졌다.
“어이쿠!”
진여은이 막 입구에 닿았을 때 마침 들어오는 남자 중의 한 명이 놀라는 소리를 냈다. 익살이 가미된 과장된 목소리였다. 시간을 보니 6시에 예약했다는 손님들일 것이다. 남자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사람일랑 무시한 채 허리를 숙인 직원들을 무심히 보며 여은은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기가 질린 이런 행태도 8년 정도 거듭되니 익숙해진다. 익숙해지고 힘으로 눌러 굴복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꿇리고 비참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 세계에서 그녀는 살아남았다. 동생을 지키며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고 말이다.
“이건 뭐, 야쿠자 저리 가라군.”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에 긴 앞머리 아래로 갈색 눈동자가 잠깐 움직였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복도를 꽉 채우는 존재감을 가진 장신의 사내였다. 이미 한눈에 네 명의 남자를 스캔한 진여은은 저 낯선 남자가 오늘 입국한 이선재의 지인임을 알아봤다.
최명운 회장이 모두 텄다고 혀를 차는 대명 그룹의 자식 중 그나마 쓸만한 인재였다. 주문한 것은 천만 원짜리 거베라 세트.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 낯선 남자 외에 이선재와 함께 온 두 사람도 안면이 있는 인간들이었다. 하나는 전(前) 대명 파의 중간 보스 아들이었고, 하나는 연수 파 보스의 아들이었다.
한때 연합으로 집안 모임을 할 정도로 우애를 다지던 그들이 조직을 탈피하고 거리를 두자 최명운 회장은 분노하며 서운함을 표현했지만, 진여은은 그들의 행보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조폭 따윈 동생인 진여린이 결혼만 하면 빠이빠이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코피 터지는 과정을 거쳐 진도 금융을 키우지 않았던가!
12cm의 날카로운 킬 힐이 움직일 때마다 푹신한 카펫에 파묻혔다. 뺨으로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느끼며 천천히 걷던 여은은 끈덕지게 따라붙는 시선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어딜 가나 주목을 받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선재와 나머지 둘은 어린 시절 집안 모임으로 1년에 한 번씩은 꾸준히 만나던 사이이기도 해서 가끔은 사석에서 알은체하는 통에 진여은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낯선 저 남자, 저 시선…. 짜증 나.
남자들의 시선이 나긋하게 걷는 긴 다리부터 철벽같이 입은 슈트로도 감출 수 없는 가는 허리선과 반듯한 등을 훑었다. 그러자 모든 불순한 시선에서 보호하듯 뒤에선 남자 둘이 그들에게서 완벽하게 여자를 가렸다. 직원들이 허리를 펴고 흩어진 것은 입구에서 검은 시폰 리본이 사라지고 나서였다.
“진도 파는 여전하네. 진여은도 여전히 대단하고 말이야.”
김진호가 낮은 휘파람을 불며 이죽거리자 곁에 선 남자가 다시 여자가 사라진 입구를 바라보았다.
“진여은?”
“그래. 예전에 너도 보지 않았나?”
“RUU는 회원이 아니었잖아.”
“모임을 하는 날 우리 집에 놀러 왔기에 함께 참석한 적이 있지. 그다음 해에도 모임에 온 것 같은데. 어른들이 RUU의 외아들이라고 엄청나게 좋아하셨지. 큭큭.”
“아이들이 다 비슷한 또래였잖아. 그중에서도 진여은이 가장 독보적인 존재였지. 새침하고 거만한 아가씨!”
“검은 마녀라는 별명을 얻었지. 우리 아가씨께서.”
근 10년간 이어 가던 가족 모임은 진팔양의 죽음으로 흐지부지되었다. 만날 당시에는 다들 고만고만한 연령대의 아이들로 무척이나 분위기가 좋았다. 그중에서도 진팔양의 딸들은 예쁘장한 외모로 인기가 많았던 것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모두 서른이 넘은 나이였지만 만나기만 하면 어릴 적 놀던 버릇으로 사내들은 시시덕거렸다.
“천하의 류태주에게 뭘 기대하냐? 저 녀석이 어디 누군가를 기억이나 하겠어? 어제 받은 고백도 기억 못 하는 인간에게.”
함께 유학 생활을 한 네 명 중에서도 대명에서 벗어나 아예 RUU 해운에 입사한 박태수의 말에 이선재와 김진호가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호라. 뭇 여학생들의 마음을 다 가져가시더니 이제는 회사를 접수하셨다 이 말이지?”
“회사뿐이겠어? 이 녀석 뜨는 곳마다 사교계가 들썩이는 것 몰라? 일본이고 한국이고 미국이고 다들 야단법석.”
“싱거운 소리.”
여상히 대꾸하는 류태주의 인물은 그야말로 후광이 비친다는 말을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멀끔해서 그의 친구들은 비죽이 입술을 올렸다.
“나도 어디 가서 인물 빠진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류태주 옆에만 서면 오징어가 돼버리니 원!”
“누가? 누가 인물이 빠지지 않는다고 해? 고슴도치도 예뻐 죽는다는 네 어머니가?”
“야! 이래 봬도 고등학교에서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휩쓴 사람이라고.”
“류태주의 원천 봉쇄로 너한테 간 것 다 아는데 왜 이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3년이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만나기만 하면 흰소리하며 킬킬대는 사내들이었다. 선조부터 특이한 직업군인 탓에 초등학교 때부터 또래 아이들로부터 위화감을 줄 수밖에 없었던 만큼 이들은 더욱 친하게 뭉쳐 다녔다.
중학교를 마치자 유학 간다는 류태주를 따라 모두 미국으로 날아간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조폭 집안의 자제들이 몰려다닌다는 우려도 있었으나 쉽게 약물과 유흥에 휘말리는 나약한 정, 재계의 2, 3세보다 그들은 오히려 건전했다. 어쩌면 피로 물려받은 폭력성을 인지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서 오세요. 이선재 님, 김진호 님, 박태수 님. 안내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분은 처음 뵙는군요. 안녕하세요? 박 마담입니다.”
사장을 맞이하는 일로 시간을 지체해 버린 박 마담은 안면이 있는 남자들에게 먼저 인사와 함께 사과했다.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가며 대화를 들은 그녀는 남몰래 미소 지었다. 조폭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돈이 전부인 세상에 그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자기들끼리 흰소리는 해도 종업원들에게 추접스러운 작업을 거는 일도 없이 점잖은 사람들이었다. 교양과 매너를 갖춘데다 맞춤 슈트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외모까지 갖춘 젊은 손님들에게 호감을 느끼던 박 마담은 아마도 오늘 모임의 주인공인 듯싶은 장신의 남자를 보며 숨을 삼켰다.
비율 좋은 반듯한 이마와 연결된 높은 콧날, 짙은 눈썹, 눈썹 산이 도드라진 깊은 눈과 검은 눈동자는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나무랄 데 없이 시원하게 생긴 섬세한 입매와 굴곡 없이 매끈한 얼굴선은 여자들도 울고 갈 만큼 아름다웠다. 자칫 여성스럽게 보일법한 얼굴에 정점을 찍듯 강인한 턱과 굵은 목은 원시적인 야생성을 보여주는 듯 남자다웠다.
“어머…!”
여자에게 나이를 잊게 하는 멋진 남자의 외모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 박 마담은 얼굴을 붉히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가슴이 설레었다. 이런 설렘을 주는 남자를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안녕하십니까. 류태주입니다.”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마저 달콤했다. 박 마담은 방으로 그들을 안내하며 류태주를 흘깃거렸다. 대화의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대 이들과 절친해 보이는 남자의 존재감은 유독 특출났다. 큰 키에 속하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도드라진 키에 슈트 재킷 아래로 엿보이는 벌어진 어깨와 발달된 가슴, 그리고 걸을 때마다 팽팽하게 드러나는 허벅지의 근육에 자꾸만 침이 고였다.
‘저들의 나이가 서른셋이던가…?’
음흉한 마음 한가득 자신과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고 있을 때 다시 그 달콤한 중저음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주점 이름이 왜 ‘花’인가 했더니 테마를 그렇게 잡은 거로군.”
입구의 복도는 물론이고 실내 복도 벽에는 미국 여류 화가가 그린 꽃으로 가득했다. 그림의 보호와 어두운 조명의 실내를 환기하는 유리 벽 안에는 벽마다 꽃잎과 수술이 극사실로 표현되어 있었다.
추상 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여류 화가의 꽃 그림은 마치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시켰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손님은 예술성을, 그림을 전혀 볼 줄 모르는 손님은 은근한 유혹을 즐기리라.
“아, 아, 진여은이 이곳에 신경을 엄청나게 썼지. 분위기 좋지? 너 미국에서 이 작가 전시회도 갔었잖아.”
류태주의 입매가 유난히 느긋하게 풀린 것을 보며 이선재가 거들었다. 여자가 붙는 주점을 싫어하는 까다로운 성미의 류태주를 아는지라 장소 선정에 무척이나 고심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왜인지 상기된 얼굴을 한 마담이 깍듯이 인사하고 나갔다. 슈트의 재킷의 단추를 풀고 앉는 류태주의 모습을 끝까지 아쉬운 눈으로 보던 박 마담은 트레이를 든 직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한국에 얼마 만이지? 오랜만에 온 거지?”
세트로 주문한 화려한 술상이 펼쳐지고 여자들이 들어와도 남자들은 자신들만의 대화를 여상히 이어 갔다.
“잠깐씩이야 들어왔지.”
“일 때문에 들어온 건 치지 말자. 지독한 일벌레. 나를 스카우트해 갈 때 알아봤어야 했어!”
얼마 전에 RUU 해운의 수석 자리에 들어간 박태수가 술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투덜거렸다.
“연봉을 업계에서 최고로 모셔갔으면 일을 시켜야지, 암.”
술잔을 받아 든 김진호가 킬킬댔다. 방에 들어온 여자들의 눈이 돈 이야기가 나오자 반짝였다. 누구나 한마디 끼어들어 어느 회사인지 직함은 어떻게 되는지 묻고 싶었지만, 오늘도 다녀간 사장이 엄하게 매뉴얼에 정한 법칙이 있었다.
바로 손님의 술자리에 먼저 나서지 않는 것이었다. 여자 사장은 그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지만, 표정 없이 냉랭한 얼굴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해고’였다.
방금 휴게실에서도 후한 손님의 팁이나, 2차를 콜 받은 여자가 받은 선물이나 돈의 금액에 모두 하나같이 침을 흘린 참이었다. ‘花’는 그들에게 노다지가 묻힌 땅이었다. 고가의 팁이나 2차의 보상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시간을 때우기만 해도 떨어지는 돈은 어디를 가든지 받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괜한 잘난 척과 과한 욕심으로 이곳에서 쫓겨날 수 없었다. 그것을 몸소 겪은 오소희도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박 마담이 주는 얌전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부터 레이스로 감긴 옷은 평상복으로도 입지 않는 것이었지만 첫날부터 밉보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단골이나 지명을 받기 위해 눈을 굴리는 여자들을 보며 오소희는 비릿하게 웃었다.
‘바보들! 저렇게 눈만 굴려서 어떻게 눈길을 끈다고!’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그녀는 몸을 뒤틀었다. 이렇게 온몸을 다 가리는 옷을 입었다 한들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를 감출 수는 없었다. 이곳에 출근하기 위해 수십만 원을 들인 긴 머리를 한쪽으로 모으고 은근히 어깨를 비틀며 옆자리의 남자를 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오소희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긴 치맛단만 보느라 앉아 있던 사람들을 미처 보지 못했던 그녀는 마치 조각을 깎아 놓은 남자의 얼굴에 넋을 놓았다. 남자들은 곁에 앉은 여자들을 마치 공기처럼 대하며 대화를 이어 갔다.
“선재, 곧 결혼한다고?”
“뭐. 그렇게 되었네.”
“이 자식, 표정이 왜 이래? 집안에서 맞춰 준 자리라 그런 거야? 맘에 안 들어?”
결혼이라는 단어에 정신을 차린 오소희는 남자의 술잔에 얼음도 넣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집게로 얼음을 담아 술을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얼음에 감기자 그제야 제 술잔임을 눈치챈 남자가 살짝 고개를 까닥이며 감사를 표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인사는 남자가 이런 자리에 꽤 익숙하다는 것을 말했다.
굵지만 긴 손가락이 유리컵을 감쌌다. 오소희는 남자의 손가락을 재빠르게 살폈다. 특별한 무언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혹여나 누구의 소유는 아닌지 살피는 본능이었다. 컵을 잡은 오른손이나 단단한 무릎 위에 올려진 왼손도 깨끗했다. 그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남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 남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의 마음도 십분 이해가 가지. 형님이 사고만 치고 다니니 나에게 기대하는 심정도 이해돼. 그런데 얼굴 겨우 몇 번 보고 결혼이라니…! 조금 답답하다.”
이선재의 큰 한숨에 빈말로도 위로할 수 없는 김진호나 박태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남의 일이 아니라 나도 해줄 말이 없다.”
미국에서 유학할 때까지 생활에 어떠한 제약도 없던 부친들이 그들이 세운 회사에 아들들이 입사하자 약속이라도 한 듯 맞선 사진을 내밀었다. 모두가 건실한 기업가 집안의 이미지를 원하는 부친들의 뜻에 맞는 정, 재계의 딸들이었다.
“태주, 너는 집안에서 아무 말 없어? 너희 집 유명하잖아.”
남자를 향한 말에 오소희의 귀가 번쩍 띄었다. 태주, 이름이 태주였다. 유명하다는 뜻이 어떤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그녀는 침을 삼키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유려한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태주 부모님 유명하시지. 우리 아버지도 태주 아버지가 정략인 줄 아시더라니까?”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지. RUU 외아들과 스미도카이의 외동딸 전격 결혼! 한국 조폭과 일본 야쿠자와의 결합!”
“그런데 알고 보니 여행지에서 만난 뜨거운 열애.”
친구들이 한마디씩 하며 잔을 모으자 류태주도 잔을 가까이 대었다. 챙! 경쾌하게 유리컵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여자들의 눈이 일제히 흔들렸다. 오소희도 마찬가지였다. 유흥주점에 발을 디디는 순간, 여자들은 밤을 지배하는 조직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어 있었다.
이곳 ‘花’도 진도 파의 소유가 아니던가. 더구나 남자들이 말하는 RUU는 일본 야쿠자와 손잡은 악질 중의 악질로 유명했다.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RU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일본 야쿠자 밑에서 수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가입 자체가 힘들 정도로 문턱이 높은 RUU는 현재 한국 조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졌다고 했다.
“아버지는 원래 크게 관심이 없으시고.”
류태주의 부친 류진규의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어머니인 리아 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때가 되면, 이라고 생각하시니까.”
여유 있는 류태주의 미소에 친구들은 탄식했다.
“너는 정말 괜찮아? 안 해도 되는 조직 일을 왜 굳이 하는 거야?”
대명 그룹은 탈 조직을 선언하고 기업가의 이미지로 선회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류태주는 이미 해운뿐만이 아니라 RUU 파의 정식 후계자로서 조직 관리도 하는 것을 아는 친구들은 오랜만의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한 질문을 던졌다.
“찾을 게 있어서 말이야. 뭐,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아.”
“히야! 이 녀석. 진짜 찐 보스감일세.”
여자들의 흔들리는 눈빛이 두려움과 선망의 시선으로 나뉘었다. 오소희는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 눈앞에 있는 절세 미남이 RUU의 정식 후계자라니! 출근 첫날부터 당한 수모를 참아낸 자신이 기특하면서도 운명적인 느낌에 몸을 떨었다.
이 남자다! 이 남자를 잡아야 했다. 어떻게든 류태주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싶은 오소희는 열심히 남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은 안주로 들어온 초콜릿이 발린 동그란 사탕 바구니였다.
“그런데 오늘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어딜 다녀온 거야? 한국에 볼일이 있었어?”
마침 여자들이 과일 안주를 하나씩 건네는 것을 남자들이 손으로 받고 있었다. 오소희는 그가 눈여겨보던 초콜릿 사탕을 살며시 집어 들었다. 류태주는 이선재의 질문에 의뭉스러운 미소만 지어 보였다.
“아, 아. 예전에 의뢰한 것이 연락이 와서 말이지.”
“태주 자식, 인제 보니 그 볼일을 보러 온 거였구먼.”
“의뢰? 무슨 일인데 그래?”
“아서라. 이선재. 너는 초등학교 때부터 겪어 오고도 모르냐? 저 인간이 언제 속 시원히 말해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어? 속에 무슨 능구렁이가 몇 마리나 들었는지 누가 알까?”
류태주는 투덜거리는 김진호의 말에 웃으면서도 끝내 일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피같이 붉은 양귀비꽃이 그려진 벽에서 초콜릿 사탕으로 향했다.
“아, 그 초콜릿. 네가 좋아해서 주문할 때 말해 뒀어. 잘했지?”
“사탕? 이 녀석 단것 안 먹는데?”
“그래? 그래도 항상 태주 방에 가면 초콜릿 사탕 한두 개는 있지 않았나? 어?”
류태주는 왜인지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드는 인간이었다. 녀석의 취향을 파악해서 칭찬을 듣고 싶었던 이선재는 친구의 곁에 앉은 여자가 사탕 비닐을 벗기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저기요, 아가씨. 그러면 안….”
이선재가 말리기도 전에 여자의 행동은 더 빨랐다. 검은 초콜릿 사탕을 쥔 손가락을 나른하게 풀린 입가에 들이대는 순간이었다.
“악!”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이 방을 갈랐다. 여자의 손에서 떨어져 나간 동그란 초콜릿 사탕이 바닥과 벽으로 튀다가 도르르 굴렀다.
“내 몸에 손대는 것, 무척. 싫어합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남자의 눈빛에 오소희는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저 베일에 가려진 RUU의 후계자의 달콤함 따위는 없었다. 그의 친구들이 찐 조폭이라고 말한 의미를 눈빛 하나로 알아 버렸다. 찢어 죽일 듯한 공포가 무엇인지 느끼는 순간이었다.
“야, 야. 그나저나 총각파티라도 할 겸, 이번에 홍콩 여행 어때? 곧 용선 축제가 있잖아.”
이선재는 멋모르고 제 친구에게 과감히 대시하다 비참하게 거절당한 여종업원에게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어때? 류태주. 오랜만에 같이 즐겨 보자고.”
학교 졸업 후에 미친 듯이 일에 빠져든 류태주에게 너나 할 것 없이 기대하는 시선을 모았다.
“홍콩이라….”
호박색 액체가 담긴 유리컵을 돌리는 류태주의 차가운 눈빛이 다시 초콜릿 사탕으로 향하며 나긋하게 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