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백승진과 신우영, 그리고 소(小)악마 (15/15)

  

외전 2. 백승진과 신우영, 그리고 소(小)악마

“검사님, 이곳입니다!”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특별수사 1부 소속 백승진 검사실의 강진호 참여계장이 녹슨 컨테이너 앞에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경찰 수사관들과 함께 움직이던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제게 손을 휘휘 젓고 있는 강 계장에게 향했다. 승진은 ‘어떻게 할까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경찰들을 응시하며 고개를 까딱여 주었다.

콰쾅!

굳게 잠겨 있는 컨테이너의 자물쇠가 경찰관들이 가져온 공구로 인해 뚝 끊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커다란 자물쇠를 응시하던 모두의 눈이 끼익, 열리는 컨테이너 문 쪽으로 향했다.

두근두근.

침묵을 깨뜨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귓가로 들려온다.

승진은 앞서 나가는 강 계장과 수사관들의 뒤를 이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헉!”

“차…… 찾았습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컨테이너 속의 고요를 깨뜨린 것은, 손전등을 든 채 앞서 나가던 일행들의 외침이었다.

승진은 그들의 음성을 듣자마자 앞으로 달려 나갔다.

“……!”

이윽고 그의 시야로 들어온 장면은 승진의 얼굴을 딱딱하게 굳어지게 했다.

승진은 랜턴을 비추고 있는 수사관들을 응시하고 있는 힘없는 눈동자들을 발견하고선 미간을 좁혔다.

“거, 검사님.”

강 계장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목소리로 승진을 불렀다. 여기서 지휘권을 가진 사람은 승진이었으므로 컨테이너 내의 인물들은 모두 승진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진은 거무죽죽한 얼굴을 한 채 말라비틀어진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이들의 얼굴에 스치는 불안감을 발견했다.

“일단…… 이분들을 밖으로 모셔야겠습니다.”

“예?”

“강 계장님.”

“아, 네넵! 윤 경위님!”

“알겠습니다. 최 경사는 밖으로 나가서 이분들 부축할 인원들 모으고, 한 경사는 구급대원한테 들어와 달라고 전하세요!”

승진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 계장을 필두로 한 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승진은 그들이 움츠리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거나, 혹은 바쁘게 몸을 돌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후우, 정말 지독한 놈들입니다.”

그때였다.

경악에 가까운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강 계장이 구급대원들과 다른 수사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쩜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을 할 수가 있는지. 만일 검사님께서 빠르게 파악하지 않으셨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쯧쯧, 혀까지 차면서 중얼거리던 강 계장은 ‘그러게 말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승진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어?’

고개를 들어 승진의 얼굴을 살핀 강 계장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그는 못 볼 꼴이라도 봤다는 얼굴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만큼이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승진의 입꼬리가 당혹스러울 만큼 위로 쭉 올라가 있었다.

[반격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군요.]

불현듯 몇 달 전, 승진이 중얼거린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또 그 생각을 하고 계시는군.’

중앙지검의 백승진 검사가 누군가를 향해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은 중앙지검 내 청사, 아니 좁게 말하면 본관 10층을 사용하고 있는 인물 중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흐흐흐.”

하아.

강 계장은 이젠 아예 대놓고 실소를 흘리고 있는 승진을 주시하다 흠흠, 헛기침을 흘렸다. 이러다 누가 우리 검사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쩌나!

여태껏 자신이 보좌했던 검사들 중 가장 싹이 보이는 백승진 검사가 이상한 루머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이다.

강 계장은 저도 모르게 승진의 허리를 쿡 찔러 버렸다.

“강 계장님?”

그런 강 계장의 뜬금없는 행동에 깜짝 놀란 승진이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왜 그러냐는 눈빛을 쏘아 대고 있는 그를 향해, 강 계장이 작게 외쳤다.

“체통.”

“네?”

“체통을 지키십시오, 검사님!”

아무리 완벽한 반격의 찬스가 눈앞에 있대도, 여기는 사건 현장이란 말입니다!

* * *

선후배들과 함께 청사 근처 순두부찌개집에서 식사를 해결한 우영은 차 한잔하고 가자는 유혹을 뿌리친 후 먼저 청사로 돌아왔다. 근래 들어 부쩍 늘어난 여러 사건들의 조서를 훑어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으러 나간 양우혁 계장과 이희주 실무관이 돌아올 때까지 먼저 서류를 들여다볼 계획이었던 그는 문득 입이 심심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습관적으로 마시던 커피를 오늘 오전부터 마시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한 우영은 천장을 뚫을 기세로 쌓인 서류들을 힐긋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커피를 뽑으러 나간 곳에서,

“어? 신 검, 네가 왜 여기 있냐?”

첨수부의 수장, 한형석 부장검사와 마주쳤다.

“일이 있으시다고 들었는데.”

자판기 커피를 내밀며 우영이 중얼거리자 한 부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아, 그게……. 그런데 다른 애들은?”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잔하고 들어온다더군요.”

“친목 도모냐?”

풋, 웃는 한 부장의 말에 우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또 다른 커피 잔을 들고 있던 우영이 제 맞은편에 착석하자 한 부장이 잠시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같은 부 애들끼리 친목도 좀 도모하고 그래야 큰 건을 물어 오지. 안 그래?”

우영은 칫, 잇소리를 내며 투덜거리는 한 부장을 직시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한 부장의 말에 우영이 의문을 느끼는 사이, 한 부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신 검, 네가 대어를 물어 와서 우리가 백 보 앞서 나가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한 부장이 언급한 ‘대어’가 이정후를 가리킨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의 전체적 문맥을 파악하지는 못하겠다. 우영은 대답 대신 한 부장을 바라봤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지 한숨만 푹푹 내쉬던 한 부장은 꺼져 있는 휴게실 안 TV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 검사.”

“네.”

“TV 좀 틀어 봐라.”

“예?”

“틀어 봐.”

우영은 한 부장의 지시에 미묘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전원이 꺼져 있는 TV 쪽으로 걸어갔다.

『긴급 속보입니다.』

우영이 전원 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앵커로 보이는 여자가 진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긴급 속보?’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움찔한 우영이 주저하는 사이, ‘소리 좀 키워.’ 하고 한 부장이 지시했다. 우영은 말없이 볼륨을 높였다.

『지난 5월, 부산 일대를 시작으로 대구, 인천, 그리고 서울 시민들의 안전까지 위협하던 전국적 인신매매조직 아수라파의 대대적 검거 작전을 비밀리에 시행하여 화제를 모은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 팀이 아수라파에 붙잡혀 있던 실종자들을 극적으로 구출했다는 소식입니다. 특히나 이번 인천항 컨테이너 부두의 버려진 컨테이너에서 발견된 피해자들은 총 서른네 명으로, 대부분이 성인 여성이며, 몇몇은 아직 미성년자인 이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만일 검찰의 구출이 없었다면 이 피해자들은 곧 중국으로 이동할 예정이었고…….』

심각한 표정의 앵커의 말이 귀를 울린다.

뭐?

우영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TV를 바라봤다.

“하아.”

체념했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는 한 부장의 음성이 들려왔으나 우영의 귀는 모두 TV에 집중돼 있었다.

뉴스는 계속 이어졌다.

『그럼 이에 대한 중앙지검 특수부 소속 백승진 검사의 브리핑이 있겠습니다. 유정열 기자, 중앙지검에 나와 계신가요?』

『예. 저는 현재 서초구의 서울중앙지검에 나와 있습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간략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조금 전 인천항 컨테이너 부두에서 발견된 아수라파의 납치 피해자로 알려진 총 서른네 명의 피해자들은 중앙지검 특수부의 비호하에 안전하게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며, 이번 구출 작전은 중앙지검 내에서도 비밀리에 실행되었을 만큼 은밀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5분 뒤, 이곳 브리핑 룸에서 열리게 될 검찰의 브리핑에는 이번 사건을 담당한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특별수사 1부의 백승진 검사가 직접 나와 언론에…….』

스튜디오에서 청사 건물로 화면이 전환된 후, 마이크를 든 기자의 목소리와 함께 승진의 사진이 TV 우측에 떠올랐다.

TV를 직시하던 우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젠장할.’

이거, 큰일이다.

아니,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다.

[신 검사, 들었나? 백 검 녀석이 사고를 쳤더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달 전, 5월의 일이다.

뜨거운 여름이 도래하기 직전.

대한민국 국민들을 경악시킨 인신매매조직 ‘아수라파’의 대대적 검거는 대략 10개월 전 일어났던 ‘경기도 별장 스캔들’만큼이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부산 일대를 시작으로 대구, 대전, 그리고 인천, 서울까지.

교차점이 없던 20대 여성들의 실종 사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아수라파의 발각과 검거는 의문의 실종으로 인해 두려움에 떨고 있던 일반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몇 번을 말하지만, 난 네놈이 대검에 완벽히 입성할 때까지 포기한 거 아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방심하고 있던 우영은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렸다. 생긋 웃으며 제 엉덩이를 꽉 움켜쥐던 승진의 발언이 결코 허투루 흘린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경기도 별장 사건, 그러니까 이정후 스캔들로 인해 승진보다 대검찰청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안심한 것이 우영의 오판이었다. 제게 호언장담을 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리던 승진을 보고 한 번 정도 먹혀 주는 것은 마지막 배려라고 여긴 안일함이 이번 일의 원인이었다.

가족들만 초대하여 이루어질 두 남자의 정식 성혼이 이제 겨우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

실제 침대 위의 포지션이 아닌, 말 그대로 단어적인 의미의 ‘며느리’에 대한 문제를 두고 백씨 일가와 신씨 일가는 여전히 은근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다음 달 중순까지 두 남자 간의 합의된 결과를 전해야 하거늘. 다 된 밥에 재 뿌리기도 아니고, 난데없이 발생한 이번 일에 우영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다 됐는데…….’

우드득 이를 가는 우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래, 분명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앞서 나가고 있는 존재는 우영이었다.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승진은 그런 우영의 아래에서 가쁜 신음만 흘려 댈 뿐, 이렇다 할 저항의 의지를 표하지 않았다.

포기했나 보군.

그래서 우영은 승진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저 받아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런 승진이 구밀복검의 자세로 자신을 대하고 있었을 줄이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우영은 휴게실의 TV 화면을 응시하다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저와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한 부장이 내내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하여간 백 검 녀석, 끈기 하나는 알아줘야겠군.”

저를 감쪽같이 속여 버린 승진의 행각에 부글부글 끓는 노기를 꾹꾹 삼키던 우영의 귀에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우영을 보던 한 부장은 남 일 얘기하듯 말을 이어 갔다.

“유 부장한테 듣기론, 백 검 녀석 저 사건 수사하게 해 달라고 올 초부터 졸랐다더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무래도 부산 쪽에서 발발한 실종 사건들이 뭔가 이상하다고. 뭐, 백 검 녀석이 부산지검에 있을 때 조폭들 상대했었다지? 그게 헛수고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 덕분에 부산지검이랑 공조도 하고 살판났지, 뭐.”

“…….”

“이정후 이후론 네가 앞서 나간다 생각했는데. 어때, 한 방 먹었지?”

대답 없는 우영을 흘긋거린 후 생긋 웃는 한 부장의 발언은 우영의 미간을 좁아지게 만들었다. 한 부장은 침묵을 유지하는 우영을 응시하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 후 ‘수고해.’라는 말을 남긴 뒤 휴게실을 벗어났다.

‘돌겠군.’

사라진 한 부장을 보던 우영은 끊이지 않는 두통을 막지 못한 채 쓴물을 삼켰다.

지이잉.

그때 울린 핸드폰 문자는 더욱 우영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뉴스, 보고 있냐? 목욕재계하고 이 몸을 기다리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잡아먹어 주지.>

개새끼.

* * *

“어이, 백 검이. 너 기분 좋아 보인다?”

해가 진 이후 청사를 나서려던 승진을 향해 특별수사 1부의 유재익 부장검사가 말을 걸어왔다. 힘차게 엘리베이터로 향하려던 승진은 걸음을 멈추고 그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빙긋 웃었다.

“좋지 않을 리 없잖습니까.”

대어를 물다 못해 중앙지검의 ‘빛’이 되었는데.

승진이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자 ‘표정 좀 감춰, 이 자식아.’ 하고 승진을 쳐다보던 유 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지금 인터넷에 난리더라.”

“인터넷이요?”

“안 봤냐? 너 화면발 잘 받는다고, 왜 모델을 안 하고 검찰청에 있냐고 하던데.”

“하하. 이거 숨길 수 없군요. 하긴, 세상 사람들도 저의 완벽한 미모를 봐야…….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네가 딱 그 짝 같아서.”

“예?”

“백 검이 너, 많이 변했다.”

“또 뭐가 말입니까?”

“예전에는 사교성이라곤 개한테나 주는 것처럼 굴던 녀석이 말이야. 어느새 말이 번지르르해졌다고.”

“하하하, 부장님. 검사 생활 몇 년이면 저밖에 모르는 안하무인도 넉살 정도는 부릴 줄 알게 됩니다.”

“아주 청산유수구만, 청산유수.”

쯧쯧, 혀까지 차는 유 부장을 보면서도 승진은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아직 1층에 머물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흘긋거리던 유 부장은 전광판을 힐끔거리더니 승진에게 물었다.

“그래서.”

응?

“다 잡아넣을 수는 있는 거지?”

유 부장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백했던지라 승진은 머뭇거리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들이 너무도 확실합니다. 잔챙이부터 거물들까지, 모두 기소 가능합니다. 몇몇은 살인 미수 혐의까지 붙을 거고, 다른 몇몇은 마약 소지 혐의를 붙여서 마약 수사과랑 협력할 예정입니다.”

“그래, 잘하고 있군. ……풋.”

“……?”

“아, 아니. 한 부장한테 한 방 먹였다고 생각하니 괜히 통쾌해서.”

아.

“그간 우리가 얼마나 숨죽이고 살았냐. 첨수부 애들 코가 아주 청사 옥상을 뚫을 기세였는데, 네 덕분에 우리도 기 좀 펴고 살겠어.”

툭툭.

승진의 등을 힘껏 두드리는 유 부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이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던지라 승진 역시 배시시 웃고 말았다.

“아수라파 놈들 엿 먹인 기념으로 한잔할까?”

유 부장의 제안이 들려온 것은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출 무렵이었다.

“예?”

“후배이자 부하가 큰 건을 물어 왔는데 선배로서 가만히 있을 수 있나. 다른 애들도 불러서 같이…….”

“아, 부장님!”

“어? 왜?”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들려던 유 부장을 승진이 막아 세웠다. 아마도 특수부 검사들을 호출할 생각이었는지 승진의 외침에 놀란 유 부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승진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저…… 오늘은 안 되겠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유 부장의 눈썹이 뾰족하게 모였다. 제가 뱉어 낸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승진 역시 물러설 수는 없다.

하고많은 날들 중 왜 하필. 오늘만큼은 정말 안 된단 말이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지난 1년 동안 승진이 기다리고 또 기다린 날이 바로 오늘이거늘.

물론 유 부장의 말이 충분히 유혹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도저히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가 없다.

승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유 부장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뭐?”

“제가 이번 주 내로 한턱 쏘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 먼저 귀가하겠습니다.”

“어? 잠깐만. 야! 야, 인…….”

유 부장의 외침을 뒤로하고 드르륵 닫힌 엘리베이터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냐?>

브리핑 룸으로 들어가기 직전, 입가를 꿈틀거리던 승진은 계속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신가.>

<신 검사?>

<이봐, 신우…….>

<닥쳐! 구렁이 새끼.>

몇 번이고 문자를 보낸 후에야 겨우 도착한 답장은 악의를 가득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인즉, 제게 백기를 들었다는 말과도 같아서 승진의 눈꼬리는 보기 좋게 찢어졌다.

청사를 나온 이후, 아니 브리핑 룸으로 들어가기 직전부터 멋대로 움직이는 입매를 막지 못했다. 오죽하면 그를 지켜보던 강 계장이 ‘검사님, 카메라 앞에서 그리 웃으시면 다들 이상하게 볼 겁니다.’라는 말까지 속삭일 정도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뜨는 기분을 감추지 못했던 승진은 유난히 가벼운 발걸음을 앞으로 쭉쭉 뻗으며 집 앞 로비에 도착했다.

‘퇴근은…….’

했네.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고개를 들어 집에 불이 켜졌는지부터 살폈다. 짜증 난 기색을 가득 풍기던 우영이 이미 도착해 있음을 확신한 승진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디서부터 씹어 먹어 줄까.’

샤워고 뭐고, 일단 옷을 벗길까 아니면 처음부터 천천히 실행해 줄까. 지금껏 자신이 당했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안아 줄 생각이었던 승진에게선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잠깐만요! 잠깐만!”

응?

“아, 고맙습……. 어머, 안녕하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드르륵 닫히려 할 때였다. 승진은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른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 인사를 표하는 한 사람이 보였다. 방금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건지 스포티한 차림의 여자가 저를 향해 짙은 눈웃음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웃인가?

얼떨결에 머리를 숙인 승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응시하자 여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몇 번 엘리베이터에서 뵀는데.”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여기로 이사 온 지 세 달 정도 되셨죠?”

“네?”

“이사하시는 모습을 봐서요. 참! 전 12층에 살아요. 1203호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승진과 우영은 지금으로부터 세달 전, 중앙지검 앞 오피스텔에서 대로변 쪽의 보다 넓은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같이 사는 게 어때.]

시작은 우영이 툭 던진 말 때문이었다.

우영의 집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던 승진이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자 쓰고 있던 안경을 벗은 우영이 말을 이었다.

[우리…… 가족들 허락도 받았어.]

[어?]

[그러니까 이제는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볼 이유가 없지. 게다가 괜히 집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슬슬 동거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되는데. ……물론, 네가 아직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야 조금 더 기다리는 것도.]

[어디.]

[뭐?]

[청사와는 너무 멀어지지 않는 게 좋겠지? 야근할 날도 많을 테니. 뭐…… 회사랑 멀어지는 것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잠은 집에서 자는 게 좋잖아.]

[…….]

[왜 그렇게 봐?]

[백가.]

[어?]

[너도 생각이라는 게 있었군.]

[뭐?]

[위치나 인테리어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침대는 양보 못 해. 이번엔 새로 맞추고 싶으니까 그땐 나와 같이 가도록.]

[이봐, 지금 그거 명령하는 거냐?]

[안 되냐?]

[……안 될 건 없지만.]

승진이 우영을 안 지 어언 십여 년이 넘었고, 서로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동거만은 피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작년에 이미 가족들끼리 정식 상견례까지 마친 이상 두 사람이 동거를 하지 않을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말을 던진 우영의 발언에도 일리가 있다 여긴 승진은 석 달 전부터 우영과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고,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출근을 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저기요?”

아.

“1303호입니다.”

조심스레 자신을 부르는 여자를 보며 굳이 대답해야 할까, 라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지만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렸다. 특히나 바로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라면 가끔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도 생길 테니 더더욱.

“바로 윗집이시구나!”

승진의 대답에 손뼉을 탁, 부딪치며 환하게 웃는 여자의 외침에 그는 싱긋 웃었다. 아직 1층에서 출발하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보고 12층과 13층을 차례로 누른 승진은 점점 더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변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분이서 사시는 거죠?”

신경 쓰일 정도로 입꼬리를 씰룩이던 여자가 말을 던진 것은 3층을 지날 때였다. ‘네?’ 하고 승진이 그녀에게 시선을 두자 1203호의 여자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이사 때 함께 짐을 나르시던 분과 몇 번 마주쳤거든요. 가족이세요? 형님? 아니면 동생?”

아랫집 여자가 묘하게 눈웃음을 흘린 까닭이 바로 이것이었나.

승진은 기대의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아뇨.”

“아, 그럼 친구분이세요?”

승진은 짙은 눈웃음을 그리며 단호히 대답했다.

“마누라입니다.”

“네?”

스스럼없는 승진의 대답에 여자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뭔가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보며 더욱 미소를 지은 승진은 ‘집사람 말입니다.’ 하고 한 번 더 말했다. 그러고는 드르륵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가리켰다.

“12층인데, 안 내리십니까?”

승진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 인사를 하고 나가자 승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분명 승진은 우영과의 사이를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마누라라느니, 집사람이라느니 하는 말을 굳이 아래층의 여자에게 할 필요도 없다.

‘유치하게.’

질투인가.

승진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벅벅 긁더니 어느새 도착한 집 문을 빤히 응시했다. 굳게 닫혀 있는 1303호 앞. 현재는 두 남자가 그저 ‘동거’를 하는 집이지만, 앞으로 두 달 뒤면 ‘정식 신혼집’이라고 불리게 될 곳이다.

예의 성혼식에서 우영에게 반드시 웨딩드레스를 입혀 주겠다고 마음먹은 승진은 쿡쿡 웃으며 얼른 비밀번호를 눌렀다.

“신가야, 많이 기다렸지? 드디어 이 몸께서 행차하셨다!”

역전에 성공한 백승진에게는 두려운 것이 없다. 승진은 쩌렁쩌렁 목소리를 높이며 힘차게 대문을 열었다.

‘응?’

그러나 승진의 외침이 무색하게 상대방에게서 아무런 답변이 들려오지 않는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승진의 눈동자가 현관 바닥에 꽂히더니 순간 미간이 좁아졌다.

‘운동화?’

정확히는 성인 남자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작은 운동화 두 짝.

분명 우영의 소유는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며 인상을 찌푸린 승진은 그것을 수상하게 내려다보다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한 승진의 시야로 낯선 존재가 들어온 것은 그쯤이었다.

승진은 거실 소파에 떡하니 앉아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존재를 발견하고선 딱딱하게 굳었다.

승진의 인기척을 느낀 건지, 승진의 시선 끝에 있던 존재가 스윽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예의 존재와 눈이 마주친 승진이 움찔했다.

‘파란 눈?’

예의 존재가 성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꼬마 아이라는 것은 둘째 치고, 멀리서도 확연하게 알 수 있는 푸른 눈동자라는 사실에 당황했다.

승진이 입을 벌린 채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어, 왔냐?”

우영이 부엌에서 음식을 들고 나오며 승진에게 말을 걸었다.

* * *

“어떻게 된 거야!”

승진이 짜증을 가득 담아 외치자 ‘시끄럽네요, 백 검사님.’ 하고 핸드폰 너머의 상대가 대답했다. 원하던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자 승진은 인상을 썼다.

“백미진!”

-어머, 검사님? 하늘 같은 누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면 곤란하죠. 우리에게도 엄연히 서열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뭐?”

-그것보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내가 알기로 거기 아직 열 살도 안 된 꼬맹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언성을 높이면 애들 교육에 안 좋지 않겠어요? 내가 차근차근히 설명할 테니, 쉬. 쉬.

“너 진……. 젠장.”

결국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던지려다 꽈악 움켜쥐는 것으로 대체한 승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빌어먹을.’

제게서 눈을 뗄 줄 모르는 그 벽안에 움찔한 승진은 그 옆에서 쿡쿡 웃고 있는 우영을 차례로 응시하다 이를 악물었다.

가만 안 둘 거야.

부글부글 가슴이 들끓어서 어쩐지 진정할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지만 가까스로 노기를 누그러뜨린 승진이 입을 열었다.

“좋아, 해 봐.”

-응?

“해 보라고, 설명.”

목구멍까지 부아가 치밀어 올랐으나 미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계속 소리를 내지른다면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의 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니 화가 나도 평정을 유지하는 수밖에.

억지 미소까지 짓던 승진이 겨우 입을 열자 호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미진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너, 그 애가 누군지는 알겠어?

승진은 인상을 썼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사건 브리핑을 마치고 청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승진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우영을 요리해 줄까, 생각하던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대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목욕재계를 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여긴 우영이 난생처음 보는 웬 벽안의 꼬맹이와 지나칠 만큼 철썩 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제게는 한 번도 먹여 주지 않던 밥까지 직접 떠먹여 주면서.

[이건…… 뭐냐.]

승진이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그대로 표출한 것은 당연했다. 승진은 은근한 기대를 담아 묻는 미진에게 퉁명스레 대꾸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나저나 저 녀석, 신가 놈한테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닌가.

신경질적으로 미진에게 대꾸하면서도 우영의 품에 다소곳이 안겨 있는 푸른 눈의 꼬맹이에게서 경계의 시선을 거두지 않던 승진은 서늘한 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곧 핸드폰 너머에서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백 검사님, 제 일 아니면 통 관심 없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정도가 심하네.

“무슨 소리야?”

-그 애,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 안 해?

……뭐?

승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미진의 말을 곱씹다 다시 천천히 벽안의 꼬맹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서 많이 봤다고?’

대체 어디서?

미진의 말에 의문이 생긴 승진은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 시선을 담담히 감내하고 있는 푸른 눈의 소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정확히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승진의 눈빛 공격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는 걸 보면 보통 대담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 건 나를 닮긴 했…… 어?’

그러고 보니 어릴 적의 제 모습이 떠올라 속으로 생각하던 승진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진다. 곧 주르륵,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백 검사. 승진아?’ 하고 더 이상 소리를 내지 않는 승진에게 미진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지만 승진의 눈은 꼬마 아이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저 뚱한 눈빛부터 아이답지 않은 날카로운 눈빛, 지나칠 정도로 오뚝한 코에 화려한 마스크.

저 녀석, 틀림없이……!

사고를 이어 가던 승진의 입이 벌어졌다. 그러고는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사고 친 적 없는데?”

“백가 네놈이 사고를 쳤을 리 없지.”

우영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승진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며 툭 말을 던졌다. 승진의 목덜미가 화르륵 달아올랐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우영을 올려다보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영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설령 사고를 쳤다 한들 어떻게 해서든 내 귀에 들어왔을 테니, 그럴 리 만무하지. 대학 입학 때부터 지금까지 넌 내 포위망을 벗어난 적이 없으니까.”

“윽.”

“대체 어디까지 머리를 굴리면 그런 생각에 다다를 수 있는지, 원.”

“오해할 만하잖아!”

혀를 차는 우영을 향해 승진이 억울함을 담아 외쳤다.

“집에 돌아오니 알몸에 에이프런을 입고 있어야 할 애인은 웬 꼬맹이한테 밥이나 떠먹이고 있고, 그 꼬맹이는 나를 적대적인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떻게 오해를 안 해!”

“상상도 정도껏…….”

“빌어먹을. 큰누님은 언질이라도 주시지……. 아, 진짜 식겁했다고!”

한숨을 푹 내쉬며 머리를 아래로 떨군 승진이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댔다.

우영은 소파에 앉아 제 머리 숲을 헤집고 있는 승진을 내려다보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신 검사, 안 바쁘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이 모든 일은, 한 통의 문자에서 시작됐다.

승진의 브리핑이 시작되고 난 몇 분 뒤, 우영은 승진의 둘째 누나인 미진에게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급한 일이 없던 그는 또 다른 가족이 된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고, 의심 없이 로비로 내려간 뒤에야 예기치 못한 손님을 맞이했다.

[인사해. 나랑 승진이 조카, 요한이야.]

[네?]

[은진 언니 아들인데, 사정이 좀 있어서 잠시 한국에 들어왔어. 요한아, 뭐 하니? 숙모한테 인사하렴.]

……숙모라니.

우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하는 미진에게 ‘차라리 삼촌이라 불리고 싶습니다.’라고 대꾸한 후 미진의 뒤에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한이라고 했니? 반갑다. 편하게 우영 삼촌이라고 불러 줘.]

유독 삼촌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우영이 손을 내밀자 아이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였다. 자신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아이를 보며, 우영은 그의 동공이 푸르게 빛난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혼혈인가. 백씨 일가의 둘째이자 승진의 큰누나인 은진이 영국인 남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는 승진에게서 스치듯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그녀의 아이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말없이 제 손을 꾸욱 붙잡는 아이와 몇 초간 악수 인사를 나눈 우영은 불현듯 스치는 의문에 아이에게 꽂혀 있던 눈을 미진에게로 옮겼다.

‘그런데 바쁘신 분이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하고 묻자 어색한 미소를 짓던 미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저기, 신 검사. 내가 작은 부탁이 하나 있거든?]

[부탁이요?]

[응! 가족 좋다는 게 뭐야. 참! 신 검, 우리 가족 맞지? 이제 한 가족이잖아. 안 그래?]

[……네?]

“우리가 집에서 일하는 사람도 아니고 애를 좀 봐 달라니. 말이 되냐고. 백미진 진짜 정신 나간 거 아니야?”

단호하다 못해 짜증을 가득 느낄 수 있는 승진의 외침에 우영은 쓴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너희 큰누나의 사정도 곤란하잖아.”

“큰누님은……!”

[은진 언니, 그러니까 승진이 큰누나가 아무래도 형부랑 대판 싸운 것 같아.]

[예?]

[그래서 홧김에 애를 데리고 한국으로 온 모양이더라고. 아 참, 우리 언니가 P&K 로펌 영국 지부 지부장인 건 들었지?]

[네, 백 검한테.]

[신 검사, 아니 올케.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

[올케, 아닙니다.]

[아아, 그래그래. 올케 하기 싫지? 그럼 매제!]

[……그건 나쁘지 않군요.]

[하여튼 은진 언니가 한국 들어오면서 급한 김에 조카를 나한테 맡기기는 했는데 내가 이번에 병원에서 눈을 뗄 수 없는 환자를 만났어. 그 환자에 집중하려면 애한테 신경을 쓸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저와, 그리고 백가…… 백 검이 맡아 달라?]

[호호! 역시 우리 매제는 말이 잘 통한다니까? 며칠만 맡아 주면 돼. 길지도 않고, 한 한 달 정도?]

[그건 며칠이 아닌데요.]

[매제,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다는 말 있지.]

[네?]

[두 사람이 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 들었어.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만 들어준다면, 나와 언니가…….]

“이봐, 신가!”

생각에 잠겨 있던 우영이 정신을 차렸다. 승진이 신경질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왜 제 말에 대꾸하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승진은 뒤늦게 ‘미안, 뭐라고?’ 묻는 우영을 보고 뾰로통한 감정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래도 큰누님에게 전화를 해야겠어.”

우영의 태연한 태도에 고뇌하던 승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는 안방의 제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조카를 어떻게 해서든 밖으로 내보낼 계획인 듯싶었다.

“아니면 본가에라도 저 녀석을……. 뭐야.”

우영은 인상을 쓰던 승진이 갑자기 덥석 손목을 잡는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입을 열었다.

“한 달인데, 뭐.”

“어?”

“큰누님도, 미진 누나도 다 사정이 있으니 가족 된 도리로 우리가 잠시 맡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본가에는 말 안 하고 들어오신 거라며.”

“하지만!”

“백가 너, 조카한테도 그리 매정하게 굴 거냐? 네가 그 정도로 비인간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윽…….”

우영의 말에 대꾸하려던 승진이 우물쭈물거린다. 우영은 제 덫에 걸려든 승진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뒤늦은 샤워라도 할 생각으로 승진의 손을 제게서 떼어 낸 뒤 몸을 돌려 욕실로 걸어가려 했다.

“참.”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춘 우영이 승진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동안 잠자리는 자제해야겠다.”

“뭐?”

승진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우영이 계속 말을 이었다.

“식객이 있는 집에서, 그것도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 소리가 나면 곤란하잖아. 안길 때마다 내는 네 소리가 좀 작은 것도 아니고.”

우영의 발언에 움찔한 승진이 순간 넋을 잃은 사이 그는 얼른 몸을 돌려 욕실로 걸어갔다.

“야! 내가 안기긴 왜 안겨!”

하고 승진이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우영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 * *

‘으음.’

스르륵 눈꺼풀을 올리자 환한 빛이 쏟아졌다.

새로운 아침을 알리는 태양의 노크에 눈썹을 꿈틀거리던 승진은 무심결에 팔을 움직이다 멈칫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실타래가 나풀거렸다.

아마도 신가 녀석의 머리카락이겠지.

승진은 빙긋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손안에 들어온 머리를 움켜쥐며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아직 잠이 덜 깬 승진은 당연히 우영이 제 곁에서 잠을 자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머리가 작……!’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우영의 작은 머리를 제 품 안으로 끌어 모은 후 속으로 생각하던 승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승진의 시야로 똑똑히 들어온 푸른 눈동자에 그는 그만 굳어 버렸다. 쩌억, 입이 벌어졌다.

“으헉!”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승진은 저도 모르게 와락 껴안고 있던 존재가 우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낮은 탄식을 터뜨렸다. 승진의 품에서 말없이 눈을 뜨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푸른 눈동자의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승진은 무의식적으로 소년에게 향했던 팔을 거두어들였다.

“윽.”

그러자 그에게 붙잡혀 있던 아이가 그 반동으로 인해 낮은 신음을 터뜨렸다.

‘이런.’

승진은 순식간에 옆으로 튕겨 나간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다 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살짝 미간을 좁히고 있는 아이의 푸른 두 눈이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자 심장이 벌렁거린다. 주르륵,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게 대체 어떻게.

“백가, 일어났…….”

똑똑, 침실에 노크까지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온 우영이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인상을 썼다. 킹사이즈의 드넓은 침대 위에서 대치하고 있는 승진과 요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승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당황한 표정으로 우영을 쳐다봤고, 우영은 그런 승진과 요한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괜찮아?”

승진이 뭐라 입을 열 틈도 없이 우영은 요한의 곁으로 다가가 물음을 던졌다. 푸른 눈동자의 요한이 우영에게 대답하기 전, 승진을 힐끔거리더니 곧 다시 우영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은 그런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준 후 승진에게 말했다.

“밥 먹으러 나와.”

“아, 그…….”

“가자.”

우영은 승진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침대 위의 요한에게 손을 내밀고선 냉정하게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던 승진은 기다란 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돌겠군, 진짜.’

나보다 저 녀석이 더 삼촌 같잖아.

졸지에 홀로 남게 된 승진은 온기만 남은 텅 빈 제 옆자리를 힐끔거리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젠장.”

몇 번을 걸어도 똑같은 안내 멘트만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 연락을 차단시켰거나 혹은 일부러 받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망할 백미진.

승진은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정말 곤란하다고.

만일 곤란함의 정도를 1부터 10까지의 수로 표현해 본다면 현재 승진의 상황은 9와 10 사이를 오가는 중이다.

‘다 된 밥이었는데…….’

코앞이었다.

정말 코앞.

1년을 숨죽인 채 칼을 갈고 또 갈았다. 그렇게 버틴 끝에 이제야 겨우 승기를 잡아 반격을 시작했고, 상대를 승복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지난 1년 동안 자신이 아래에서 헐떡였던 것만큼 우영도 신음하게 만드는 것이었건만.

[그런 의미에서 한동안 잠자리는 자제해야겠다.]

‘일부러 승낙한 건가.’

하필 백기 투항을 받기 직전 펼쳐진 상황을 보니 그러한 생각까지 든다. 승진의 조카를 자연스럽게 떠맡아 버린 우영의 얼굴이 지나칠 정도로 차분해서 더더욱. 누가 봐도 깔리지 않겠다는 의도로 파악되어 승진은 속으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우영이 어떻게든 버틸 거라 생각하기는 했으나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응?’

받지 않는 전화에 포기하고 비상계단에서 빠져나온 승진이 다시 검사실로 향할 무렵이었다. 청사 본관 10층에 자리 잡은 자신의 검사실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영의 검사실을 스칠 수밖에 없다. 뚱한 얼굴로 터벅터벅 걸음을 움직이던 그는 신우영 검사실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군중들을 발견하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중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사람들이 검사실 앞에 이렇게 우글거리고 있을 때는 딱 두 가지 경우로 볼 수 있다. 첫째, 검사실의 주인이 사고를 쳤거나, 혹은 둘째, 검사실 안에서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지거나.

“계장님.”

“헉! 아, 검사님 오셨군요.”

“무슨 일입니까?”

의아함을 느낀 승진이 강 계장의 어깨 위로 손을 얹으며 묻자 깜짝 놀란 강 계장이 뒤를 돌아보더니 하하, 어색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신 검사님 검사실에 보기 힘든 손님이 찾아오셔서요.”

둘 중 하나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후자 쪽이었던 모양이다. 승진은 ‘손님?’ 하고 대답 대신 신우영 검사실의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발꿈치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정말 네가 백 검사님 조카라고?”

“백 검사님한테 이런 귀여운 조카가 있을 줄은 전혀 몰랐어요!”

“요한아, 뭐 먹고 싶니? 아직 점심 안 먹었지? 뭐 시켜 줄까?”

저 녀석이 왜 여기 있어!

* * *

-도우미 아주머니께서 하필 집에 문제가 생겼다고 연락을 해 오셨어. 애를 혼자 둘 수도 없고, 그래서 데려왔지.

“뭐?”

-문제 될 건 없잖아. 양 계장님도, 실무관님도 괜찮다고 하셨고.

“인마!”

-아, 마침 잘됐군. 백 검, 내가 복귀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그동안 대신 그 녀석 좀 부탁해.

“신 검사!”

-미안하지만 끊는다. 공 판사랑 담판 지어야 할 게 있거든. 그럼.

“야! 아직 내 말 안 끝났……. 이 자식이 진짜!”

제멋대로 전화를 끊어 버린 우영의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무의식적으로 욕설을 흘렸더니 승진을 주시하고 있던 강 계장과 주연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승진은 뒤늦게 그들의 시선을 눈치채고선 구겼던 얼굴을 억지로 폈다.

“신 검사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씩씩거리던 승진이 흥분을 가라앉히려 하자 강 계장이 능글능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승진은 그런 강 계장을 쳐다보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잠깐 맡아 달라네요.”

“여기서요?”

“네. 실무관님.”

“예, 검사님!”

“혹시 여기에 아이스티라든가, 애들이 먹을 만한 음료수 같은 게 있습니까?”

“아, 네네! 잠깐만요!”

승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간단한 요깃거리를 넣어 둔 찬장을 뒤지는 한주연 실무관을 주시했다. 그러다 강 계장을 향해 말했다.

“오늘 급한 업무는 살짝 미뤄 주십시오. 신 검사 올 때까지 저 녀석이랑 놀아 줘야 하니까.”

“하하하, 네, 알겠습니다.”

“……왜 웃으십니까?”

승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젓는 강 계장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 하고 낮게 탄성을 터뜨리던 강 계장이 멈칫하더니 이내 우물쭈물거렸다.

“강 계장님?”

승진이 한 번 더 묻자 주저하던 강 계장의 입이 열렸다.

“백 검사님께서는 의외로 마음이 여리신 것 같아서요.”

“네?”

승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승진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배시시 웃은 강 계장이 말했다.

“매번 싫다, 싫다 해도 결국 신 검사님 부탁을 전부 들어주고 계시잖습니까.”

“……!”

“가끔 두 분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무슨 생각?

“산전수전 다 겪은 오랜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달까…….”

“어머, 계장님! 저도 그거 공감해요!”

아이스티를 꺼내어 컵에 탈탈 털어 넣던 한주연 실무관이 두 남자의 대화를 들었는지 까르르 웃으며 외쳤다.

“우리 백 검사님이랑 신 검사님, 사이가 무지 안 좋으신 것 같으면서도 실은 엄청 좋으시잖아요! 부서도 다른데 가끔 신 검사님 일 자청하실 때도 있고, 또 이렇게 검사님 조카분을 신 검사님이 봐주시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는 같이 사신다면서요?”

헉!

“그건 어디서 들으…….”

[어라? 검사님, 이 주소 옆방의 신 검사님이랑 같은데 뭔가 실수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정확히 일주일 전, 승진의 우편물을 들여다보던 주연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서둘러 대답을 하려다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유 부장 때문에 답변하지 못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젠장할. 승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하려 했다.

“저기, 주연 씨. 제가 신 검이랑 사는 건 쓸데없는 지출을 아끼려고……!”

“호호, 변명은 안 하셔도 돼요! 청사 내 소문과 달리 두 분이 사이좋으신 거, 저희도 다 안다고요!”

“그치? 주연 씨도 실은 두 검사님들이 죽마고우라는 거 알아차렸지?”

“그럼요! 어디 알아차렸다뿐이겠어요? 두 분이 가끔 점심때 다른 분들 모르게 따로 맛있는 걸 먹으러 가신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요!”

“그건!”

“저희도 알 건 다 안답니다, 검사님. 저희가 검사님 밑에서 일한 지가 몇 달인데요!”

“하하. 맞아, 맞아!”

죽이 아주 잘 맞는 강 계장과 주연의 대화에 승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러다가 진정한 관계까지 들키는 건 순식간이겠는데.’

승진과 우영이 몇 달 전 동거를 시작한 이후, 그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그런 두 분이 왜 다른 분들 앞에서는 계속 다투시냐는 거예요.”

“그러게 말이야. 나도 그게 가끔 의문일 때가 있어.”

“오해를 안 받으려고 하시는 걸까요?”

“오해라니?”

“견원지간 같은 특수부와 첨수부 사이이니, 너무 친한 것도 무리가 있잖아요. 보는 눈도 있고.”

“아, 그건 또 그러네?”

“흠흠.”

승진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긍하는 두 남녀를 향해 헛기침을 흘렸다. 그러고는 꼬마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방 쪽을 힐끔거리며 은근히 화제를 돌렸다.

“아이스티는, 다 됐습니까?”

* * *

“자.”

미묘한 눈빛을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온 승진은 말없이 소파에 앉아 있는 소년을 향해 아이스티가 담긴 유리잔을 건넸다.

승진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아이의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승진은 허공에서 부딪친 파란 동공에 움찔거렸지만, 곧 제게서 잔을 건네받는 아이의 행동에 짧은 한숨을 삼켰다.

‘난감하네.’

올해 나이 서른둘, 백승진.

3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백승진이 딱 하나, 잘 못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다.

‘애들은 어렵다고.’

백씨 일가의 사랑받는 막내로 태어나 지금껏 제멋대로, 그리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며 살아왔다. 제 앞을 가로막는 것도 없었고, 설령 가로막는 것이 있다 할지언정 그것을 하나둘씩 부수면서 헤쳐 나왔다.

두려울 것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건만, 여전히 걸리는 것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이다. 두드러기가 일 것만 같다.

승진은 말없이 아이스티를 홀짝이는 푸른 눈동자의 아이를 뚫어져라 응시하다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네가…… 요한이란 말이지.”

검은 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소년의 풀 네임은, 요한 백-필립.

P&K 로펌의 영국 지부를 담당하는 승진의 큰누나 은진과, 그녀의 동반자이자 P&K 로펌 영국 부지부장인 승진의 매형 라이언 필립 사이에서 태어난 작은 아이.

‘이 녀석 얘기를 들었을 때가 갓 태어났을 땐데…….’

[참, 백승진. 너 소식 들었어? 큰언니, 애기 낳았대!]

그의 나이 스물여섯, 승진이 군법무관으로 막 해군에 입대했을 무렵이었다.

분명 입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틀림없이 미혼이었던 큰누나 은진이 생판 보지도 못한 놈과 결혼했다는 이야기만 해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어느새 애까지 낳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머리가 얼얼해져 한동안 끊어진 전화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저와 두 살 차이여서 자주 투닥거리는 미진과 달리 승진은 나이 차이가 꽤 있는 큰누나 은진과 큰형 우진을 깍듯이 대하는 편이었다. 특히 저보다 한발 앞서 법조계에서 일하고 있던 은진은 당시 승진이 기댈 수 있는 최고의 조언자이자 상담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결혼에 출산까지 하다니. 한때는 배신감까지 느끼며 투덜거렸지만, 그에 서운해할 틈도 없이 군 생활에 적응해야 했고, 그로부터 3년 뒤 민간인이 되고 나서야 승진은 처음으로 예의 ‘조카’를 처음 볼 수 있었다.

[이 녀석이 그 녀석이야?]

[응. 어때? 귀엽지?]

[……뭐.]

[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진이 네가 생각나.]

[내가?]

[너도 이렇게 귀여웠거든.]

아이들이라는 존재에 대해 호감을 가진 적이 없던지라, 은진이 있다는 영국으로 제대 기념 여행을 갔을 때 처음 마주한 조카를 보면서도 은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세 살배기 꼬마 아이. 쿨쿨 자고 있는 조카를 무심히 쳐다보다 ‘잘 봤어.’ 하고 돌아서던 승진은 꽤 냉정한 편이기도 했으니까.

그날 이후 처음 마주하는 거다. 조카, 요한과는. 요한은 내내 영국에서 지냈고, 그의 소식을 간혹 접하기는 했으나 큰 관심이 없었기에 들은 척 만 척 했다. 저와 우영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꽉 차서 한국에 있는 조카들도, 타국에 있는 조카도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눈치를 보는 걸까.

‘돌겠군.’

승진이 반강제적으로 요한을 떠맡은 지 사흘 정도가 흘렀거늘, 요한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보지 못했다. 동생들도 없었고, 주변에 어린아이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요한과의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런 저와 달리 능숙하게 요한을 다루고 대화를 이어 가려 애쓰는 우영은 확실히 장남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좀 섹시하기도 해서 입꼬리를 올리던 승진은 그럴 때마다 저를 빤히 주시하는 요한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후우.”

승진은 제 이름을 부른 후에도 말없이 아이스티만 홀짝이는 요한을 힐끔거리다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절 대할 때 어려워하실 필요 없어요.”

어?

그때였을까.

저보다 더 삼촌 같은 우영이 돌아올 때까지 이 녀석과 어떤 말을 나눠야 하나, 부터 시작해 차라리 아수라파 사건을 더욱더 파고드는 게 좋지 않을까, 그건 잘 진행되고 있나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승진은 아무렇지 않게 아이스티를 소파 앞 테이블에 내려놓고 말하는 요한을 멀뚱히 응시했다. 요한은 당황한 승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굳이 상대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전 대충 시간만 때우면 되니까. 일일이 신경 쓰면서 말 걸지 않으셔도 되고요.”

“……!”

“괜히 바쁘신 삼촌께 피해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승진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외국에서 살고 있는 녀석 아닌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한국말에 멍한 얼굴을 하자 ‘아’ 하고 탄성을 터뜨린 요한이 말했다.

“집에 있을 때는 어머니께서 꼭 한국어를 쓰게 하셔서요.”

“어?”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구사할 줄 압니다. 그러니 놀라실 필요 없어요.”

내가 생각을 얼굴로 표출하는 스타일이었던가?

승진은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낸 후 아이스티를 홀짝이는 요한을 황당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러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꼴깍 침을 삼킨 승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배, 백요한.”

“네.”

“너…… 몇 살이냐?”

입술을 파르르 떠는 승진의 질문에 요한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께 못 들으신 겁니까?”

“어?”

“올해로 일곱 살입니다. 한국 나이로요.”

일곱…… 살?

‘아니, 무슨 일곱 살짜리가 열다섯처럼 이야기를 해!’

승진은 요한의 대답에 기겁하는 저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떼는 요한을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요한은 더 이상 승진과는 어울리지 않겠다는 듯 이내 품속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었다. 승진의 눈동자가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저게 무슨…….’

놀랍게도 승진의 눈에 들어온 노트에는 무언가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영어로 휘갈겨 놓은 것이 분명한 그 노트를 슬쩍 살펴보니…….

‘축구?’

포메이션과 축구공, 그리고 유명 축구 선수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승진은 이제 아예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진지하게 그 노트만을 들여다보는 요한에게 물었다.

“이…… 이유. 너,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뭐야?”

그 말에 노트에 꽂혀 있던 요한의 눈동자가 승진을 향한다. 이제야 그것을 묻냐는 표정이었다. 아이의 얼굴이 너무도 어른스러워 순간적으로 승진은 당황했다.

“아, 그러니까…….”

뒤늦게 제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승진이 아이에게는 조숙한 질문이라 생각하며 손사래를 치려 할 때였다.

“두 가지 이유에서예요.”

저를 향한 눈을 아래로 내리고선 노트를 덮어 버리는 요한의 태도는 절도 있었다. 승진은 순간적으로 제압당했다.

“두 가지?”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로는, 어머니께서 아버지랑 다투셨어요.”

“뭐? 크, 큰누님이랑 라이언이?”

큰누님 부부가 다퉜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이에 대해서는 미진도 알려 주지 않았고, 우영과도 이야기를 할 타이밍을 놓쳤다.

하루빨리 요한을 내쫓아야 한다는 사실에 혈안이 되어 정작 큰누님 부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크게 당황하는 승진을 보고도 반응하지 않은 요한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네. 하지만 그것도 삼촌이 걱정하실 필욘 없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요한의 차분하고도 고요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이쯤 영국을 떠나는 건, 재작년부터 어머니께서 매년 하시던 시위나 다름없거든요.”

“시, 시위?”

“네. 하필 어머니와 저의 이번 여행지가 한국일 뿐이죠.”

“아…….”

“사정은 그래요. 아버지께서는 제 동생을 가지고 싶어 하시는데, 어머니는 그 반대세요. 아직 할 일이 더 남으셨기 때문이죠. 하지만 아버지는 어떻게든 귀여운 딸을 가지고 싶어 하시고, 어머니는 계속 버티시고. 아버지께서 칭얼거리시니 어머니는 짜증이 나시고.”

“그, 그래?”

“뭐, 그런 어른들의 사정 때문에 피해를 입는 건 저지만.”

“쿨럭쿨럭!”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 가지고.

아니, 그것보다 이 녀석…….

‘진짜 일곱 살 맞아?’

승진은 냉정하게 콧방귀를 뀌며 어깨까지 으쓱이는 요한의 모습에 헛기침을 흘렸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그러다 문득 생각난 의문점에 다시 입을 열자 요한이 말없이 저를 빤히 응시했다.

‘왜 이렇게 봐?’

승진은 어쩐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요한의 눈빛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그때.

“궁금해서.”

“뭐가?”

덮어 둔 노트를 허벅지 위로 얹으며 생긋 웃는 요한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

그리고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 느꼈다면,

[이 아이를 보고 있으면, 진이 네가 생각나.]

……내 착각일까.

승진은 불안한 예감에 미간을 좁혔다.

요한은 움찔하는 승진을 보며 앙증맞은 입술을 달싹였다.

“누가 신부가 될지, 궁금해서.”

신부?

승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신부라니.

이건 또 무슨…….

예기치 못했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승진이 돌처럼 굳은 사이, 요한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어머니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삼촌이 곧 사랑하는 사람과 성혼식을 치를 거라고. 그런데 신부가 될지, 신랑이 될지 모르겠다고. 삼촌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우영 삼촌인 건가요? 그러면 삼촌, 둘 다 가능한 거였어요? 신랑이든 신부든?”

“어, 어?”

귀가 먹먹하다.

요한이 뱉어 내는 말이 귀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승진은 빛나는 눈을 제게 고정시킨 채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내는 요한을 멀뚱히 응시했다. 요한은 멈추지 않고 앙증맞은 입술을 움직였다.

“어머니께서는 이왕이면 삼촌이 신랑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신부가 되는 것도 귀여울 것 같다고도 하셨죠. 그 말씀을 들으니 저도 궁금해지더라고요. 삼촌이 신부라니. 어머니께서 보여 주신 삼촌의 사진들은 항상 멋졌거든요. 그런 삼촌이 드레스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잖아요. 안 그래요?”

드, 드레스?

승진은 그 말에 기겁을 했다.

요한이 생긋 웃었다.

“네. TV에서 보면 신부들은 하얗고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더라고요. 뭐, 남자라고 드레스를 입지 말라는 법은 없죠. 멀리 나가지 않아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전통적으로 스커트인 킬트를 착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삼촌한테는 안 어울리지 않을까요?”

“나, 난…….”

“흐음, 그렇다고 우영 삼촌이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도 상상이 안 가는데.”

“…….”

“저기, 삼촌. 만약 두 분 중 한 사람이 웨딩드레스를 입을 계획이라면, 제 앞에서 미리 입어 보시는 건 어때요? 아! 그때 저, 사진 몇 장만 찍어도 될까요? 어머니께서 그러셨거든요. 살다가 재미있고 신기한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면, 망설이지 말고 카메라부터 들이밀라고.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어.”

“예?”

물 만난 고기처럼 말을 늘어놓던 아이가 고개를 푹 떨구더니 중얼거리는 승진의 음성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승진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던 아이는 부르르, 어깨를 떠는 승진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젠장할!

승진은 그런 아이에게 대답하기 위해 있는 힘껏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는 외쳤다.

“웨딩드레스 따위, 안 입는다고!”

* * *

“그 자식 당장 내보내!”

우영이 검사실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옆방의 검사가 난데없이 들이닥쳤다.

씩씩거리며 소리치는 승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우영은 모르는 척했다.

“신 검!”

“나중에.”

“인마!”

“여기 회사야.”

“윽!”

승진이 언급한 ‘그 자식’이 누구인지 대충 눈치챘지만, 우영은 그보다 더 걸리는 것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승진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는 신우영 검사실 직원들의 눈빛이다. 미간을 꿈틀거리며 입술을 꽉 깨문 승진은 그런 그의 말을 이해하고선 홱 몸을 돌려 검사실을 나갔다.

“그 자식이라뇨?”

“백 검사님, 왜 저렇게 화가 나셨어요?”

쾅, 문을 닫고 나간 승진을 보며 신우영 검사실의 두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우영은 어깨만 으쓱일 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악마야.”

그리고 그날 밤, 집으로 귀가한 우영을 굳이 서재로까지 데려온 승진은 우영의 어깨를 덥석 잡으면서 외쳤다.

“어린아이의 탈을 쓴 악마. 그래, 소(小)악마! 소악마란 말이야!”

악마?

그 녀석이란 틀림없이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기에 한숨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우영은 급한 볼일을 위해 외근을 나갔던 저 대신 승진에게 요한을 부탁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서너 시간 정도.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요한과 함께 있었던 승진이 미간까지 좁혀 대며 얼른 꼬마를 보내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고, 그로 인해 머리가 지끈거리는 쪽은 우영이었다.

친조카이면서 이렇게 안 맞다니.

우영은 쯧쯧, 혀를 차며 승진의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백가, 네가 그런 별명을 붙여 줄 정도면 요한이가 어지간히 밉보였나 보군.”

“뭐?”

“하지만 요한인 네 말처럼 그리 나쁜 아이 같지 않아.”

“아니, 그게 아니라…….”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맡기로 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지. 한 달이면 금방인데, 조금만 더 참아.”

“신가! 그게 아니라니…….”

“쉬. 애 깨겠어.”

청사에서 귀가하자마자 피곤했는지 곧장 침대로 간 요한이 있는 방 쪽을 힐긋거리며 우영이 당부했다. 승진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우영은 그저 핑계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 일곱 살이 아니란 말이야!”

라고, 승진이 계속해서 외쳤으나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렸다.

“신가야, 잘 생각해 봐. 그 녀석 진짜 위험해.”

그러나 승진은 멈추지 않았다.

“꼬마가 아니야. 그 녀석은 소악마라고. 얼른 쫓아내야 해.”

“백가.”

“속에 능구렁이를 키우고 있는 놈이라고! 그래, 한 마리가 아니야. 백 마리야. 그 속엔 백 마리가 든 게 분명해! 뭐? 사진? 카메라? 쪼끄만 녀석이 대체 뭐부터 배운 거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외쳐 대는 승진의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위를 먹었나 보군.’

우영은 씩씩거리다 못해 광분하는 승진을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 후로 무려 일주일 동안, 승진은 이상하게 요한의 눈치를 살피며 제게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한 승진의 반응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요한을 얼마나 불청객으로 여겼으면, 사정이 있는 제 조카를 집에서 내쫓고 싶어 하는 걸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진짜 답답해 죽겠네! 넌 지금 속고 있는 거라고!”

승진이 불같이 날뛰고 또 날뛰어도 반응하지 않으려 했다.

‘날 아주 어지간히 잡아먹고 싶은가 보군.’

요한으로 인해 시간을 번 쪽은 우영이었고, 승진은 요한을 쫓아내야만 우영을 쓰러뜨리는 게 가능했다. 아무래도 정서적으로, 그리고 어린아이의 교육 면에서, 아이가 머무르고 있는 집에서는 간단한 스킨십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승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 때마다 욕구불만 때문에 저런다고만 여겼다.

“신가! 너 진짜 왜 내 말을 안 믿는 거야!”

그리고 승진이 요한을 ‘소악마’라 부르며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생각 이상으로 황당했다.

이제 겨우 일곱 살.

게다가 지금껏 영국에서만 줄곧 살았던 꼬마 아이가 유창하게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며, 어쩌면 우영과 승진 사이의 관계를 알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요한을 맡게 된 며칠 동안 우영이 보았던 꼬마 아이는 승진의 주장과는 달랐다. 요한은 놀라울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아이였고, 가끔 조숙해 보이는 눈빛을 띠고 있기는 했지만 그게 거슬리는 것은 아니었다.

우영이 시키는 일을 군말 없이 수행했고, 주는 음식도 잘 받아먹는, 말 잘 듣는 일곱 살 소년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백가,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니냐?”

정확히 일주일 동안 승진에게 시달렸던 우영은 결국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그러자 억울함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내던 승진이 제 머리카락을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큰누님이 그랬어.”

“큰누님?”

승진의 큰누님이라면, 요한의 어머니이자 변호사로 활동 중인 은진을 말하는 거였다. 우영이 되묻자 고개를 끄덕이던 승진이 넋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그 녀석이 나를 닮았대.”

뜬금없이 그건 무슨 소리야.

“백가.”

“정말로…… 정말로 그 녀석이 그 당시의 나를 닮은 거라면. 그렇다면 그건 단순히 웃으며 넘길 문제가 아니야.”

“이봐.”

“어머니가 바쁘셔서, 어릴 때 백미진이랑 나는 거의 큰누님이랑 지냈어. 누구보다 날 잘 아는 큰누님이 나를 닮았다고 할 정도니까 위험해.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면, 일곱 살 때 나는…….”

“거 되게 시끄럽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우영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는 승진을 쳐다보다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승진이 ‘어?’ 하고 고개를 들어 올리자 우영은 팔을 뻗었다.

“……!”

요 며칠 내내, 우영을 짜증스럽게 할 만큼 요한에 대한 경고를 이어 가던 승진의 입술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승진의 머리를 감싼 우영의 손이 얼굴 쪽으로 그를 끌어당기자 승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게로 끌려왔다. 우영은 그런 승진을 무심히 바라보더니 망설이지 않고 벌어진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었다.

아! 당혹감과 놀람이 서린 탄식이 승진의 입에서 우영에게로 넘어온다. 그와 함께 승진이 뿜어 낸 얕은 숨결도.

‘오랜만인데.’

임시로 요한이 그들의 집에 머물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자제하게 됐다. 일부러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둘 중 한 명이 늦게 들어오는 날은 가끔 손님용 방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인가. 치열을 훑고 안으로 훅훅 들어가는 혀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거침없다.

‘아닌 척해도, 결국 애타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군.’

안쪽에서 저와 만나자 주저 없이 얽혀드는 승진의 혀를 깊게 빨아 당기며 우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리고 그때였을까.

타액이 뒤섞일 만큼 승진과 진한 키스를 하고 있던 우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정말 태연하게 제 가슴에서 아래로, 점점 아래로 손을 내리는 승진의 행동에 멈칫했다. 우영의 옆구리에서 끝내 허리춤으로 내려간 승진의 손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영의 바지 버클을 풀려 하자 그는 승진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왜.”

손이 묶여 버린 승진이 우영에게서 떨어져 나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우영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우리만 있는 게 아닌데.”

그러자 승진이 이번엔 얼굴을 구겼다.

“그래서, 여기서 멈추란 소리야?”

우영은 잠시 고뇌했다. 그러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말은 아니고.”

“진작 그럴 것이지.”

“…….”

“서서 한다.”

굶주려도 한참은 굶주렸는지, 붉게 충혈된 승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그러다 가쁘게 제 바지 앞섶으로 손을 뻗으려는 승진에게 우영은 한 번 더 말했다.

“콘돔은?”

“신가, 그게 중요…….”

“중요해. 뒤처리 힘드니까 확실히.”

“……젠장, 알겠어. 딴말하기 없기다!”

예전 같았으면 요한이 있든 없든, 집이든 청사 내에서든 당장 달려들었을 승진이 일주일이나 버틴 것도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군.

체념한 듯 피식 웃은 우영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머리를 벅벅 긁던 승진이 알겠다는 듯 대답한 후 방 밖을 벗어나려 했다.

‘응?’

잔뜩 달아오른 승진이라면 순식간에 콘돔을 들고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문 앞에 선 승진은 돌처럼 굳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왜 저래?

우영은 당장 뛰쳐나가도 모자랄 승진이 우뚝 서 있기만 하자 의아해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백가, 왜 그……!”

태연자약하게 물으려던 우영의 음성이 뚝 멈춘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시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영은 새하얗게 질린 승진과 자신을 번갈아 쳐다보며 생긋 웃고 있는 작은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 앞에서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던 소년이 티 없이 맑은 푸른 눈동자를 고정시키며 우영에게 물었다.

“두 삼촌 중 누가 신부예요?”

찰칵!

“신부 사진, 찍어도 돼요?”

* * *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냐?]

1년 전, 우영이 상견례 장소로 향하기 직전의 일이다.

우영과 나란히 걷고 있던 승진이 돌연 툭 말을 던졌다. 우영은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얼굴로 승진을 바라봤지만 승진은 사뭇 진지했다.

[후회할 것 같았으면 할아버님께 너 달라고 말 안 했다.]

아니, 할아버님께 모습을 드러내며 찾아가지도 않았겠지.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대답하자 승진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다시금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그는 ‘신가.’ 하고 한 번 더 저를 부르는 승진을 쳐다봤다.

[마지막이야. 도망칠 수 있다면 지금뿐이다. 가족들 모두 만나게 되면, 난 너 붙잡고 안 놓을 거야.]

[…….]

[그러니까, 너 닮은 딸이나 아들 낳고 살고 싶은 거라면 지금 이 순간뿐이…… 읍!]

시끄러운 녀석.

대체 왜 저런 진지한 얼굴인가 했더니 쓸데없는 말을 흘려 대고 있었다.

그때의 우영은 심각한 눈빛을 쏟아 내는 승진의 멱살을 움켜쥐고선 제게로 끌어당겼다. 부딪친 입술 사이로 진한 타액이 밀려들어 왔다.

우영은 ‘몇 번을 말해.’ 하고 낮게 속삭인 뒤 입을 열었다.

[가자. 얼른 인사드리게.]

마지막으로 제게 도망칠 기회를 준 승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만일 조금이라도 후회했더라면 처음부터 승진과 그 끈질긴 쟁탈전을 벌일 이유도 없었고, 지금까지 그와 엮일 일도 없었다.

진작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겠지.

하지만 상대가 승진이었기에 우영은 10여 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작이야 어찌 되었든 이제 승진은 떼어낼 수 없는 신우영의 파트너였고, 그 길을 함께 걷는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과 승진을 쏙 빼닮은 아이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살짝 안타깝기는 했다.

법적인 부부가 되지 못하는 것도, 그리고 서로의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는 것도 가슴 아픈 사실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시간이 아주 흘러 세상이 달라지는 날이 온다면 두 사람도 정식 부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황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면 우영은 한국을 떠나서라도 법적인 파트너가 되어 승진에게 제 모든 것을 남길 의향이 있었다.

우영이 처음 승진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이런 관계까지 발전할 줄은 몰랐다.

그때의 승진은 우영에게 있어 제 앞길을 가로막는 ‘거슬리는’ 존재였고, 이왕이면 제 밑으로 끌어내리고 싶던 ‘라이벌’일 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승진을 짜증스럽게 여기기는 했지만 부러웠다. 무의식적으로 갈망했고, 원했다.

그래서 접근했다.

자신이 건드린다면 과연 백승진이라는 녀석이 어디까지 내려올지, 궁금했으니까.

만약 그의 계획이 들어맞아 승진을 제 아래로 끌어내리게 된다면 제 자존심을 무너뜨린 그에게 철저한 응징을 가해 줄 생각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 2년 동안 제 존재를 무시했던 그에게 신우영이라는 이름을 완벽하게 각인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가, 승진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헤어 나올 수 없게.

‘…….’

하지만 그로부터 10여 년이 훌쩍 지나가 버린 지금, 백승진이라는 늪에 빠져 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이날이 오고야 말았군.’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날의 아침이 밝았다. 우영은 쓴웃음을 흘리며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들여다봤다. 검은 턱시도 차림에 검정색 나비넥타이. 평소 청사를 드나들던 제 모습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모습이 꽤 이질적이지만 어쩌겠는가.

똑똑.

우영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닫혀 있던 대기실의 문이 살짝 열렸고, 그 사이로 익숙한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우영은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고선 빙긋 웃었다.

“얼마나 준비됐는지 보고 오래?”

“네.”

“거의 다 됐어.”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왜?”

“삼촌은 드레스 안 입으세요?”

뭐?

요한의 말에 악의는 없었지만 황당한 건 어쩔 수 없다.

‘범상찮은 녀석이지.’

소악마라던 승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린 것은 틀림없는 제 실수였다.

[거봐! 저 녀석, 악마 맞지? 야! 너 무슨 사진 찍은 거야!]

[뽀뽀 사진.]

[뭐?]

[아, 흔들렸네.]

[이리 내놔!]

[왜요?]

[왜긴 왜야! 지우려고 그러…….]

[승진 삼촌,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는 범죄가 뭔지 아세요?]

[뭐?]

[절도죄예요. 절도죄는 한국식 형법으로는 최하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라는 거, 알고 계시죠?]

[너, 너 뭐라고……. 너 인마! 그럼 네가 나랑 우영이 사진 찍은 건 몰카 범죄라는 거 아, 알기는 아냐! 잔말 말고 핸드폰 이리 안 줘? 어어? 야! 어디 숨어! 거기 안 서!]

제 조카이면서 온몸을 부르르 떠는 승진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것도 어느새 한 달 전의 일. 우영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 버린 한 달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요한이? 아아, 그 애가 조금…… 남다르기는 하지? 호호호!]

요한에게 승진과 자신의 스킨십 장면을 들킨 이후, 얼른 그를 데려가라며 승진이 큰누나인 은진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조카에게 그런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는 건지, 평소 이상으로 날뛰는 승진에게서 겨우 전화기를 빼앗은 우영은 은진과 통화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우영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들은 은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요한이가 한국으로 가자고 주장했어. 솔직히 나는, 큰 다툼도 아니고 일종의 시위여서 며칠 동안 이비자로 가려고 했었거든.]

[요한……이가요?]

[응. 보고 싶었다나 뭐라나.]

[뭐가……?]

[삼촌이 곧 성혼식을 치를 거라고 하니까, 신기했던 모양이야.]

[……!]

[떨어져 있기도 하고, 너무 바빠서 얼굴도 잘 못 보던 삼촌이지만, 그 애가 제 삼촌한테 관심이 많거든. 아, 물론 우리 신 검사한테도 말이지.]

요한을 맡은 지 일주일하고도 며칠을 더 넘겼을 때야 어째서 그가 승진과 자신의 집에 맡겨졌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집안이 집안인지라,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머리를 지니고 있다는 요한은 자신과 닮았다는 승진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고, 그로 인해 어머니인 은진의 목적지를 한국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그래서, 결국 성혼식 때 누가 신부가 되기로 했어? 요한이가 궁금해하더라고. 남자가 정말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지, 인간이 어디까지 뻔뻔해질 수 있을지 궁금해하던데?]

1년 전 예고했던 ‘약속의 날’이 밝을 때까지 우영과 승진은 둘 중 누가 ‘며느리’ 포지션을 낙점받게 될지 아직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 요한이 나타났고, 가족들만 초대하여 열리는 그들의 성혼식에서 두 사람 중 누군가가 웨딩드레스를 입을 것이라 확신했던 모양이다.

우영은 웃는 은진에게 ‘아무도 웨딩드레스는 안 입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해 주었다.

“나는 절대 안 입어.”

그리고 대망의 D-day.

집에서 나가지 않으려는 요한을 두 남자의 성혼식에 초대한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쫓아낼 수 있었던 우영은, 오늘이 되기까지 몇 번이고 승진에게 안겨 주었다. ‘거봐! 내 말이 맞지!’ 하고 눈을 부릅뜨는 승진의 어택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쳇.”

“요한아, 입술 삐죽이는 거 다 보인다.”

“흥. 하여간 삼촌도 준비 다 됐대요. 곧 이리로 오신다고 전해 달라셨어요.”

분명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거늘. 우영은 대놓고 실망한 기색을 풍겨 대는 요한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신…… 윽.”

양반은 못 되겠군.

제 말만 하고 돌아서려는 요한의 작은 등 뒤로 누군가가 환하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우영을 향해 손을 흔들려던 백색 턱시도의 승진이 요한을 발견하더니 몸을 움찔거렸다.

‘쫄았군.’

승진은 몇 주 전, 요한에게 자신과의 스킨십 모습을 적발당한 뒤 답지 않게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럼.”

“그래. 조금 이따 보자.”

“네.”

우영은 예의 바르게 자신과 승진에게 머리를 꾸벅이더니 대기실을 나서는 요한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승진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요한이 나가는 것을 확인하다 얼른 문을 잠근 후 말했다.

“저 녀석, 진짜 무섭단 말이지.”

“일곱 살 때의 너를 보는 것 같아서?”

승진이 싱글거리는 우영을 보고 움찔했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었다고.”

“큰누님께 들어 보니 요한이보다 더 심했다고 하던데.”

“조숙해서 그래.”

“싸가지가 없는 거였겠지.”

“이봐.”

“10년을 넘게 알아 왔는데.”

“……?”

“아직도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군.”

과거 승진의 모습은 현재 우영이 지켜봐 온 요한의 어릴 적 모습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다고 은진은 우영에게 스치듯 말해 주었다.

승진은 그런 우영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열아홉 때이니, 뭐 그럴 만도 하지.”

“정확히는 열일곱이지만, 네가 기억을 못 하니까.”

“어?”

“백가, 이리 와 봐.”

“어, 어어. 왔…… 잠깐. 잠깐, 잠깐. 너 지금 뭐 하는, 웁!”

우영은 크게 당황하며 저를 저지하려는 승진의 입을 제 입술로 틀어막고선 긴 혀를 집어넣었다. 말랑한 우영의 혀가 벌어진 승진의 틈 속을 파고들어 가 강하게 휘젓자 버둥거리던 승진이 몇 초 후 행동을 멈췄다.

우영은 그를 놓치지 않고 잠겨 있던 승진의 턱시도 상의와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으, 너 진짜 맛 간 거, 읏, 기, 기다, 헉!”

승진은 곧 시작될 예식이고 뭐고, 반쯤 돌아 버린 우영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으윽.”

현란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우영에게는 당할 도리가 없다.

“하, 우……영아.”

벌어진 셔츠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어느새 꼿꼿하게 선 유두를 지분거리자 승진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가지런히 넘겨진 승진의 앞머리는 이미 아래로 내려온 상태. 승진은 파르르 눈꺼풀을 떨며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더 은밀한 곳으로 손을 움직이려는 우영을 막으려 들었다.

“우리 곧 식…… 식 올려야, 허읏!”

그래.

오늘은 다름 아닌 백승진과 신우영, 신우영과 백승진이 양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비공식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는 날이었다. 그래서 우영도 평소 꺼리던 턱시도 차림으로, 헤어 스타일링까지 받으며 서 있던 것이었지만.

“백가.”

“하으.”

“승진아.”

“으읏, 흣!”

“며느리 말이야.”

“으으읍.”

“그 며느리라는 직함은…… 급한 대로 내가 달 테니까.”

“크헉.”

“낮이랑 밤은 철저하게 구분하도록 하자. 낮에는 나, 밤에는 너. 괜찮겠지?”

신우영은 도량이 넓다.

드넓은 마음씨를 지녔기에 백승진 같은 포악한 성정의 사내도 포용했다.

그래.

제 잘난 맛에 사는 이 빌어먹을 녀석을 인생에서 떼어 낼 수 없으니 자존심이 살짝 상하기는 하지만 양가의 ‘며느리’ 취급을 받는 것도 상관은 없다. 녀석의 곁에만 있을 수 있다면. 그렇지만.

‘도저히 밤에는 양보 못 하지.’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낮에는 자신이 ‘며느리’가, 그리고 밤에는 승진이 ‘며느리’가 되는 것이다.

하루는 24시간이나 되니 정확히 반반이면 이건 나쁘지 않은 분배잖아?

우영은 생긋 웃으며 ‘뭐?’ 하고 되묻는 승진의 셔츠를 완벽하게 열었다. 그는 이내 시야로 드러난 승진의 탄탄한 가슴으로 혀끝을 가져다 대며 움직이다 승진의 바지 앞섶 쪽으로 손을 내렸다.

“헉!”

아아.

참으로 애석하고 참담한 일이지만 우영은 오늘 백씨 일가의 며느리가 될 생각이었다.

물론 낮 한정 며느리이기는 하지만, 며느리는 며느리니까.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을 어찌하겠나.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자신이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는데 일단 한발 물러나는 수밖에.

그러니 아마도 오늘의 이 작은 성혼식은 훗날을 대비한 일종의 보험과도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겠지.

일단 그들을 아는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합법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부부’가 되는 거니까.

신우영과 백승진.

서로를 인식하고 난 이후, 오롯이 상대만을 바라 온 그들 두 사람은 오늘, 진정한 가족이 된다.

“하윽! 잠깐…… 잠깐만. 진정해, 우영아. 네가 급한 건 알겠지만…… 아직 식도 안 올렸, 윽, 씨발, 이 새끼 왜 이렇게 힘이 센……. 이, 인마. 너 지, 짐승이냐? 바, 바지에 묻으면 큰일이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가 내릴 테니 좀 저리…… 윽!”

쿵!

뒤로 물러서던 승진이 우영의 어택에 와르르 무너져 소파에 털썩 넘어진다. 우영은 그런 승진의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타며 빙긋 웃었다. 스륵, 기다란 손가락으로 그의 벌어진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자 승진이 야릇한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좁혔다. 우영은 승진의 귓불에 숨을 흘리며 속삭였다.

“백가.”

“으으.”

“요한이가 말했던 그 드레스.”

“……?”

“한번, 입어 볼 의향은 없나?”

“흐읏, 뭐?”

인상을 쓰던 승진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영은 대기실 구석을 흘긋거렸다.

“혹시나 해서…… 정말 혹시나 해서 준비한 게 있기는 한데.”

“……!”

“입어 볼래?”

드레스는 물론이거니와 스타킹도 있으니까.

“사이즈도 너랑 맞, 으읏!”

입꼬리를 올리며 승진에게 말하려던 우영이 갑자기 흔들리는 몸을 겨누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등이 바닥에 닿게 된 우영이 으으, 신음을 흘리는 사이 그는 제 몸을 짓누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다.

“그거 재미있는 소리군.”

……어?

“드레스라.”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밑에서 교성을 흘리던 사내는 어디 가고, 비릿하게 웃고 있는 남자 하나가 보인다. 우영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승진은 불안을 가득 담아 저를 올려다보는 우영이 ‘배, 백가야.’ 하고 자신을 진정시키려 하자 짙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거 매우 흥미로운 소리기는 한데.”

“너, 너 이…… 컥!”

“일단은.”

단정히 정리된 우영의 목덜미로 손을 뻗은 승진이 망설임 없이 단추를 끌렀다. 우영이 ‘식 시작한다고 했던 건 너잖아!’라고 소리쳤지만, 붉게 충혈된 승진의 눈에는 그런 우영이 보일 리 없었다.

승진은 발버둥 치는 우영의 입술을 길게 빨아 당기며 제 사랑을 퍼부어 준 뒤 생긋 웃었다.

“내 반격부터 끝난 뒤에.”

“으흡.”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지.”

이……,

‘이게 아닌데.’

달려드는 승진을 저지하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우영의 기다란 손가락은 잠시 허공을 휘젓다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

“이봐, 신 검! 아직 멀었냐?”

“기다려. 거의 다 됐어.”

우영은 재촉하는 승진의 외침에 서둘러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삐딱한 자세로 현관 신발장 앞에 기대서 있던 승진이 쯧, 혀를 차며 우영을 타박했다.

“빨리 좀 움직여. 나 오늘 대법 가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냐.

무릎을 굽혀 구두를 신고 있던 우영은 그런 승진의 말에 고개를 들어 승진을 바라봤다.

“너…… 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설거지 당번 잡아다 아침부터 달려든 게 누군데!”

“어디서 앙탈은. 오늘은 네가 안길 차례였으니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

“하? 출근 시간만은 피해 달라고 몇 번을 말해!”

“그럼 그렇게 섹시하게 서 있지를 말든가. 사람 돌아 버리게 그런 포즈로 서 있으면 당연히 달려들지.”

“이 미친 새끼가. ……하아, 됐다. 말을 말자.”

반박하려던 우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우영의 모습을 보고 히죽 웃던 승진이 막 현관을 나서려던 우영의 어깨로 팔을 턱 얹으며 생글거린다.

“그나저나 신가야.”

“또 왜!”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저거, 되게 잘 찍히지 않았냐?”

우영은 그 말에 승진이 주시하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

그러자 신발장 옆 선반 위에, 보란 듯이 놓여 있는 한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불현듯 그날의 일이 눈앞을 스쳤다.

[백승진! 신우영! 너희 도대체 안에서 뭐 하는 거야! 식 시작된 지가 언젠데!]

[거기 있기는 한 거니?]

[얘들이 대체 어딜 간 거야? 어머, 요한이 너 여기 있었구나. 삼촌들은? 혹시 삼촌들 봤니?]

[네.]

[어디 있어?]

[저 안에서.]

[응?]

[안에서 지금 엉키…….]

[하하! 저희 왔습니다!]

[벌써 식이 시작됐다고요?]

……난장판이었지.

[이봐, 소악마. 이 삼촌들이 간곡히 부탁할게. 부디 안에서 있었던 일, 어른들께는 말 안 할 수 없어?]

[사진.]

[어?]

[사진 찍게 해 주면.]

[으으! 이 망할 꼬맹이가!]

[……하는 수 없잖아. 양보해.]

[빌어먹을!]

[백요한, 대신 둘 중 한 사람만 찍어.]

[안 돼요.]

[뭐?]

[거래는 거래니까. 내 마음에 안 들면 거래에 응하지 않을 거야.]

[이, 이 자식이!]

[조건이 뭐지?]

[둘 다. 두 분 다, 입어 주세요.]

[……!]

[뭐?!]

[핸드폰 가져올게요.]

그 말을 내뱉은 푸른 눈동자의 소년은 두 남자에게 말을 한 뒤 싱긋 웃었다. 어찌나 악랄한 웃음인지 승진은 물론이거니와 우영도 당황해 버렸다.

[자, 자, 삼촌들. 그렇게 찡그리지 말고 웃어 주세요. 하나, 둘…….]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일곱 살 꼬맹이의 손에서 탄생한 역작.

성혼식이 끝난 후, 소악마에게 협박을 받은 두 남자가 강제로 입은 드레스 차림이 담긴 사진은 어느 날 갑자기 ‘성혼 선물이에요.’라는 편지와 함께 동봉됐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처음에는 질색을 하던 승진은 드레스는 물론이거니와 면사포까지 쓴 자신과 우영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 신발장에 떡하니 올려 두기까지 했다.

[으악, 이게 뭐야!]

[벌칙이에요, 검사님들?]

그런 두 남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찾아온 몇몇 지인들이 기함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

승진은 쿡쿡 웃으며 사진을 힐끔거리다 우영에게 말했다.

“실은 저때 말이야.”

“……?”

“살짝 비치던 네 허벅지, 꽤 야릇했는데. 간혹 생각나더라고. 흐음…… 스타킹이라.”

“뭐?”

“신가야.”

두근두근.

심장이 벌렁거린다.

승진이 이렇게 오싹하게 저를 부를 때면 언제나 불안한 일이 발생하고는 했으니까.

우영은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런 우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승진이 씩 웃음을 지었다.

“오늘 내 차례니까, 침대 위에서 플레이는 뭐든 해도 되는 거지?”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잠깐, 방금 이 녀석이 무슨……!

순간적으로 당황한 우영이 뭐라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승진은 후후 웃으며 우영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현관을 벗어났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우영의 심장이 가쁘게, 더욱 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언가 깨닫고선 황급히 승진의 뒤를 따라나섰다.

“백가!”

우영은 이미 저보다 한참은 앞서 나가고 있는 승진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안 돼!”

절대로 안 돼.

“또 여장은, 안 된다고!”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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