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늑대 혹은 여우
“꼴좋다.”
승진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하아, 하아. 깊은숨을 내쉬고 있는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젠장. 가쁜 호흡을 이어 가고 있는 그를 보자니 짜증이 치밀었다. 승진은 얼른 입고 있던 슈트 상의를 벗어 그의 몸 위로 덮었다.
“그렇게 천지 분간 못 하고 들이대더니, 결국.”
“……후우.”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어?”
요동치던 눈동자가 천천히 승진에게 꽂혔다. 마주친 그의 동공에서 강한 갈증이 느껴져 온몸의 털이 쭈뼛거린다. 대답 대신 뜨거운 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내려다보던 승진은 ‘조금만 참아 봐.’라고 속삭인 후 계단을 올랐다.
“검사님! 여기 계셨습니까?”
지하실의 문을 막 열고 나올 때였다. 승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강 계장과 양 계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인지하고선 멈칫했다. 살짝 떨리던 승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요!”
“아직 신 검사님은 못 찾으셨습니까?”
양 계장이 걱정을 가득 담아 묻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먼저 침투한 이유는 순전히 우영을 찾기 위해서였다. ‘신 검사님이 걱정입니다.’ 하고 한숨을 푹 내쉬는 양 계장에게 ‘신 검사는 지하실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승진은 난처한 표정을 짓다 이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신 검……이랑은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어? 정말요?”
“이쪽에 계신 거 아니었습니까?”
두 계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승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습 직전에 여길 빠져나간 모양이더군요.’ 하고 짧게 대꾸하자 안도했다는 듯 호흡을 흘리는 양 계장이 보였다.
1층 거실 쪽으로 올라가던 승진은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있는 이정후를 발견했다.
‘볼만한 얼굴이군.’
자신의 등장에도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던 사람의 얼굴이 체포 영장과 압수수색 영장을 발견하고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지는 모습은 가히 흥미로웠다. 이후 지하실 문을 열었을 때 마주했던 이정후의 눈빛은 기대 이상이기까지 했달까. 근래 들어 느꼈던 감정들 중 가장 큰 희열이 머리를 잠식해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대로 굳어 버린 이정후의 모습을 더욱더 즐겨 주고 싶었으나, 슬슬 이곳의 일을 정리할 시점이다. 제 말을 듣고 견디고 있는 우영을 위해서라도.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외면하며 이정후에게 다가간 승진은 그의 옆에 서 있던 서초경찰서의 형사과장에게 빙긋 미소를 그려 보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윤 과장님.”
“뭘요, 이 정도야.”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는 윤 과장에게 승진은 이정후를 훅훅 가리켜 보였다.
“여기 계신 우리 이 부사장님, 대한민국 재계에서는 물론 우리 청사의 귀빈이시니 정중히 모셔 주십시오. 행여나 이송 과정에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시게 말입니다.”
“아이고, 검사님도 참. 걱정 마십시오. 정중하다뿐이겠습니까? 유치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주 신처럼 모시겠습니다.”
“하하, 역시. 제가 이래서 윤 과장님한테 연락드리는 걸 좋아한다니까요?”
“참, 아까 뒷문으로 나가신 여의도 쪽 양반들은 어떻게 대우해 드리면 될까요? 역시 이분과 같은 대접을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음, 글쎄요.”
승진은 일부러 턱 끝을 매만지는 척했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슥슥 턱을 매만지던 승진은 ‘아!’ 하고 탄성을 터뜨리더니 방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대부분 여의도에서 한가락 하시는 분들이니 이 부사장님보다 훨씬 더 정중하게 다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차에 밀어 넣는 척하며 은근히 허리 몇 대를 쳐 주면 그분들도 좋아하실 겁니다. 그리고 스포트라이트 받는 걸 정말 좋아하시는 분들이니 유치장으로 가기 직전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설 시간을 만들어 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기자들은 도착했나요?”
“예. 아직 이송차가 도착하지 않아서 대문 앞쪽에 대기 중인데, 기자들이 그 양반들 얼굴 좀 찍게 해 달라며 원성이라더군요.”
“한두 분도 아니니 이송하는 과정에서 그분들의 얼굴이 찍히는 것은 피할 수 없겠네요. 아아, 애석해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몇 번의 협력 수사로 인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윤중경 형사과장이 넉살 좋게 말하자 승진도 웃음을 머금으며 대꾸했다. 쿵짝이 맞아 돌아간다는 말은 아마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발언일 것이다.
승진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윤 과장을 쳐다보다 이내 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이정후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승진은 쯧, 혀를 차더니 입술을 잘근 깨무는 이정후에게 말했다.
“그렇게 노려보실 거 없습니다, 이 부사장님. 다 자초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왜 횡령 따위를 하십니까. 게다가 알 만하신 분이 마약 밀수에 유통이라니. 대놓고 즐겨 주신 덕분에 앞으로 저희 수사는 수월하겠지만…… 부사장님은 고생 좀 하셔야겠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승진이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이정후가 피식 실소를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안서호가…… 나를 배신했나?”
낮게 울려 퍼지는 이정후의 말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긴급 체포를 당하는 와중에도 흥분하지 않는 용의자라니. 서늘하게 가라앉은 이정후의 두 눈을 바라보던 승진은 그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주었다.
“에이, 부사장님도 참. 이제 곧 법의 심판을 받게 되실 분이 그런 사소한 걸 왜 궁금해하십니까? 딴생각 마시고 착실하게 조사나 받으십시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위대한 헌법이 구제 불능에 쓰레기인 당신을 약간이나마 구제해 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금 오래 썩어야겠지만 말이죠. 윤 과장님?”
“예.”
“이송 부탁드립니다.”
승진은 제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정후를 끌고 나가는 윤 과장의 뒤를 흘긋거렸다. 윤 과장을 필두로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경찰관들이 이정후의 별장 앞마당에 주차되어 있는 이송차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승진은 현관 앞에 서선 ‘이거 놔!’라든가, ‘너희 내가 누군지 몰라!’라든가 하는 고함을 질러 대는 이들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아까부터 벨 소리가 끊이질 않네요.”
후문으로 도망치려던 이들이 퇴로를 막고 있던 경찰 관계자들에게 막혔다는 보고를 듣고 있을 때였다. 승진은 제 곁으로 다가와 슬쩍 말하는 강 계장을 내려다봤다.
“위쪽에서 오는 전화죠.”
“부장님들이요?”
“아뇨. 아마도 더 높으신 분들.”
“…….”
“이번 일이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되고 있는 상황이니, 여의도 쪽은 난리가 났을 겁니다. 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악재가 터진 거죠. 뭐, 그렇기는 재계 쪽도 마찬가지겠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승진은 조심스럽게 묻는 강 계장에게 빙긋 웃어 주었다.
“저니까 괜찮겠죠, 아마도. 알고 계시잖습니까? 제 배경 하나는 든든합니다.”
씁쓸한 승진의 말을 들은 강 계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양 계장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자신을 쳐다보자 승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 계장님, 바빠지는 건 이제부터입니다. 현장 검거를 하기는 했지만, 저 사람들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데 아주 도가 텄죠. 절대로 못 빠져나갈 그물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쪽 변호사들만 해도 한둘이 아닐 거고, 한동안은 집에도 못 들어가실 만큼 꽤…… 고생하실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두 계장에게서 동시에 흘러나왔다. 쓰게 웃던 승진이 물었다.
“증거 수집은 모두 마치셨습니까?”
“예. 윤 과장님께서 많이 힘써 주셨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그럼 강 계장님은 지금 청사로 가셔서 이번 일에 대해 부장님들께 간략히 브리핑 좀 해 주십시오.”
“아, 제가요?”
“예. 그리고 양 계장님은 이송차랑 함께 움직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면 저쪽 변호사들이 대거 몰려들 테니 특수부랑 첨수부에 협조 요청도 해 주시고요. 상대가 압력을 가할지도 모르니 언론에 은근히 이번 사건과 한서 비리에 대해 흘려 주시면 금상첨화겠군요.”
“검사님이 직접 안 하시고요?”
승진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양 계장에게 대꾸했다.
“저는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곧바로 뒤따라가죠.”
* * *
[한 가지를 정하도록 하지.]
고심하던 우영이 툭 던진 말에 승진이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보험을 들자는 소리다.]
우영은 마침 눈앞에 있던 종이를 하나 집어 들고선 승진에게 설명했다.
[일종의 신호로 보면 되겠군. 너와 나만이 알 수 있는.]
[신호?]
[그래.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서로의 상황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는 날이 올 수도 있어.]
[흐응, 그렇지.]
[그러니 그날을 대비해 어떤 상황에서도 납득이 갈 만한 약속의 신호를 정하자는 거다. 예를 들면 이런 종이의 왼쪽 귀퉁이를 한 번 접으면 ‘내가 지시할 때까지 움직이지 마.’, 그리고 두 번 접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구하러 와.
알아차렸을까?
만약 승진에게 메모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 접힌 부분을 펼치기라도 했다면 알아내기 힘들었을 텐데.
그런 불안감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확신이 있었다. 다른 이도 아닌 백승진이니까. 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백승진이니까, 반드시 찾아낼 거라는 확신.
그랬기에 믿었고, 저를 구하러 오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윽.’
머리가 지끈거린다. 온몸이 찌뿌듯해서 팔을 들기도 어려웠다.
우영은 겨우겨우 눈꺼풀을 올리고선 멍하니 천장을 들여다봤다.
‘회……색.’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뇌리에 남아 있던 캄캄한 어둠은 완벽하게 걷혔다.
우영은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꽤 익숙한 차 안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미간을 좁혔다.
쿵쿵.
심장이 요란하게 뜀박질한다. 우영은 느릿하게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승진일 줄은 몰랐다. 방금 눈을 뜬 탓에 미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우영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지, 핸드폰을 쥐고 말을 쏟아 내는 차 밖의 승진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백가가 어떻게 여기에……?
이정후가 입으로 먹인 것이 최음제의 일종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정후가 떠난 직후 순식간에 약 기운이 올라왔으니까.
피가 들끓는 갈증이 차올랐다. 이정후의 기분 나쁜 손길이 사타구니 쪽을 더듬자 그 욕망은 더욱 짙어졌다. 이대로라면 정말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던 우영은 가쁘게 숨을 헐떡이는 중이었다.
그렇게 끊이지 않는 두통을 감당하고 있을 때쯤, 머리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와 비명, 그리고 고함의 삼박자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곳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차가운 바닥에서 몸으로 스며드는 한기와 치미는 충동으로 인해 모든 신경이 귀로 향하지는 못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아니 이왕이면 백승진이 제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가! 신가! 신우영!]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의식의 끈을 놓으려던 순간, 누군가가 제 뺨을 세게 내리쳤다.
[정신 차려! 인마, 정신 차리라고! 나야. 나 봐!]
‘젠장’, 욕설을 흘린 승진이 ‘조금만 더 참아 봐.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 하고 속삭이던 것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를 내는 건지, 아니면 이 상황을 만들어 버린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끙끙거리며 자신을 지하실에서 어딘가로 옮기고 있는 승진과 살을 스칠 때마다 참기 힘든 욕망이 치솟았다는 점이다.
[조금만 더 참아 봐라, 우영아. 병원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거기서…… 헉!]
끼이익!
겨우 뜬 눈 사이로 보이는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다 댄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하마터면 좌석 바닥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
우영은 하아, 하아, 거친 숨결을 터뜨리며 차 안의 회색 천장을 올려다봤다.
[너, 너!]
흔들리던 차가 멈추는가 싶더니 뒷좌석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부들부들 떨며 저를 노려보고 있는 승진이 보였다. 등 뒤로 비치는 달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리는 승진이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하마터면 사고 날 뻔했, 흡!]
견딜 수 없어졌다. 지금까지 잘 참았다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주위 상황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씩씩거리는 승진에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승진이 제게로 몸을 쏟자 우영은 거침없이 제 입술을 그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하읏, 야, 잠, 으…….]
타액이 줄줄 흘러내렸다. 당장이라도 승진의 몸 구석구석을 핥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주변을 살필 여유조차 없었다. 우영은 결국 제 의지대로 이성의 끈을 뚝, 끊어 버렸다.
[도와줄게. 그래, 내가 도와주면 되잖아. 그러니까 좀 천천히, 흣…….]
승진의 목에 잇자국을 새기며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별장을 벗어나기 직전 승진이 걸쳐 준 슈트 상의 아래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던 우영은 달아오른 몸을 그에게 밀착시켰다. 승진이 닿은 부위가 뜨겁다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시했다. 제 위로 올라탄 승진의 셔츠 속으로 손가락을 집어넣는 데 집중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자신의 손가락이 승진의 복부를 지나 점점 위로 올라갈 때마다 승진의 미간이 좁아지는 게 보였다. 우영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으으, 읍.]
제대로 옷을 입고 있던 승진이 흐트러지자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그를 제 아래 두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다. 발딱 선 유두 쪽을 지분거리자 으으응,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쓰는 승진이 귀엽게 느껴졌다.
우영은 솟은 유두로 입술을 가져다 댄 후 딱딱한 이로 그 위를 쓸었다. 깜짝 놀란 승진이 눈을 크게 뜨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봐. 너무 흥분한 거 아니야? 조금만 침착, 헉!]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상황이 마무리되기까지 견딘 시간이 얼만데. 차가운 지하실 바닥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던 우영에게 평정심을 유지하길 바라다니.
가슴 끝 부분을 빨아 당기고 있는 우영에게 한 마디 하려던 승진의 경고는 갑자기 배를 밀친 우영에 의해 허공에 묻혔다. 쿵, 소리를 내며 승진이 머리를 차창에 부딪쳤지만 우영은 개의치 않았다.
넣고 싶어.
지금 우영에게는 오직 눈앞의 먹잇감을 집어삼켜야 한다는 욕구만이 가득했다.
[윽, 제길. 너무 아프잖…… 어, 뭐, 뭐야. 왜 내가 깔리는…… 크윽!]
[시끄러워. 머리…… 울려.]
[우영아, 기다려 봐. 이 상황에서는 제정신인 내가 너를, 헙! 너, 너 이 자식 대체 뭘 먹었길래 힘이, 으웁!]
말이 많아.
땍땍거리는 승진의 말이 귀를 울렸다.
입을 틀어막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아서 우영은 숨 가쁘게 소리를 흘리는 승진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으응― 말랑한 혀가 승진의 가지런한 치아를 지나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자 현기증이 일었다.
당장.
‘지금…… 당장.’
제 아래서 몸부림치는 그를 가지고 싶어 미치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몸에 자신의 낙인을 채워 넣고 싶다. 자신의 혀끝에 부르르 몸을 떠는 승진을 핥으면 핥을수록 뜨거워지는 것은 제 몸이다. 우영은 어느새 불룩해진 승진의 바지 앞섶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차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승진이 우영의 손길에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우영은 멈추지 않았다. ‘잠깐!’ 하고 소리치는 승진의 입을 다시 틀어막고선 아래를 가리고 있던 속옷과 바지를 힘껏 내렸다.
스치는 손길에 민감해진 승진의 페니스를 발견한 순간 사고 회로가 멈춰 버렸다. 우영은 기다리라는 승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를 엎드리게 만든 후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뻑뻑한 애널 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자 승진이 차창에 손을 댄 채 요란한 신음을 흘렸다.
우영은 검은 눈으로 승진의 두 엉덩이를 내려다보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곳을 움켜쥐고 딱딱해진 제 페니스를 가져다 댔다.
[기다, 흡, 윽, 큭, 으으!]
질척거리는 애액이 흠뻑 맺힌 주름 입구로 제 것을 대자 승진이 야릇한 교성을 흘렸다. 그에 더는 기다릴 수 없어졌다. 우영은 아직 채 벌어지지 않은 애널 속으로 귀두를 넣었다. 아직 한참은 더 풀어 주어야 했거늘 강하게 밀려드는 우영을 막지 못한 승진은 온몸을 떨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 울음소리에 더욱 흥분이 되는 것을 느끼며 우영은 사정없이 피스톤질을 이어 갔다.
“곧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마도…… 6시쯤엔 청사에 도착할 거고요.”
멍하니 눈을 뜬 채 차의 천장만을 들여다봤다.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승진과의 일들을 되새기고 있을 때, 한숨을 푹 내쉬는 승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통화가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우영은 슬그머니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뒷좌석에서 제게 깔리던 승진이 발버둥 친 흔적이 우영의 몸 곳곳에 남겨져 있다. 복부부터 쇄골까지, 작고 푸른 멍이 군데군데 새겨진 것과 붉고 긴 자국이 존재하는 것은 달려드는 우영을 승진이 말리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아프군.’
몸 전체가 뻐근했지만, 다리 사이의 은밀한 부위가 유독 욱신거린다. 슥슥, 복부 근처를 문지르던 우영은 뒷좌석 앞에 서 있는 승진을 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드르륵, 창문을 내리자 전화를 받고 있던 승진의 눈동자가 우영에게로 내려왔다.
“신 검이요?”
나?
“뭐…… 괜찮습니다. 조금 일이 있긴 했지만 이제는 문제없습니다. 네. 그 녀석도 준비시킨 후에 데려갈게요.”
우영은 흥, 코웃음 치는 승진을 말없이 응시했다. 한숨을 푹 내쉰 승진이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종료하자 우영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에게 물었다.
“부장님?”
“정확히는 우리 부장님.”
승진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꾸했다. 우영은 아직 동이 트지 않아 푸른 하늘을 흘긋거린 후 말했다.
“몇 시냐.”
“몇 시겠냐.”
“새벽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5시 되기 10분 전이다.”
그가 핸드폰 액정 속의 시계를 확인하며 대꾸했다. 우영은 그렇군, 하고 자신이 누워 있던 차 안을 흘끔거렸다.
“냄새가 나는데.”
“이렇게 좁은 데서 그렇게 박아 댔으니, 정액 냄새 정도는 감안해라.”
“…….”
“이정후 그 새끼, 대체 무슨 약을 처먹인 거야? 와, 진짜…… 나 어제 인생 하직하는 줄 알았다. 제길.”
허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다리 사이가 저리는 건지 몸을 비틀어 우영과 정면으로 마주 본 승진이 잘생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우영은 툴툴거리는 승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럼 그게 모두…….
‘꿈이 아닌가?’
우영은 미묘한 표정으로 승진을 응시했다. ‘뭐!’ 하고 얼굴을 붉히던 승진이 다시금 욕설을 흘리더니 소리쳤다.
“그래, 이 새끼야! 안겼어. 너한테 안겼다. 됐냐?”
“아.”
“아―는 무슨. 눈 돌아가서 제정신도 아니더만. 너, 내가 그 타이밍에 발견 못 했으면 누구라도 덮쳤을 게 분명해. 운 좋은 줄 알아, 새끼야. 네놈 체면, 내가 살려 줬다고!”
버럭 소리를 지른 승진이 ‘으으, 빌어먹을! 하필 약에 취한 놈한테 안겨 버리다니. 이건 평생의 치욕이다.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리는 게 들려왔다.
우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승진을 바라봤다.
“왜.”
“이정후는?”
“그게 먼저냐?”
승진이 틱틱거렸지만 우영은 반응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우영을 주시하던 승진이 뒷좌석 문을 벌컥 열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우영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승진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퉁퉁 부은 입술을 달싹였다.
“서초서 유치장에 갇혀서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시는 중이란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 네놈이 유인한 물고기가 완벽하게 어장에 갇혔어. 지금 대한민국 난리 났다. 한서 비자금 의혹에, 여의도 높으신 분들 성 상납이랑 마약 파티가 동시에 터졌으니. 청사 들어가면 플래시 세례 정도는 받아야 할 거야. 그 전에…….”
“증거 수집은 완료한 거지? 기소 요건도 갖췄고?”
“도와준 사람들도 있고, 증거도 대부분 수집하고 압수했으니 걱정 마라. 이 몸이 완벽하게 처리했으니까.”
“……잘됐군.”
가슴을 짓누르던 덩어리가 이제야 내려가는 느낌이다. 진작 이렇게 끝냈어야 했는데, 처리 과정이 너무 길었다.
우영은 쓴 숨을 내쉬었다.
“어이, 신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우영은 저를 부르는 승진의 음성에 행동을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입을 쭉 내밀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승진이 보였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 우영은 빙긋 웃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좁힌 승진이 툴툴거렸다.
“이번에 한 번 더 확실히 느꼈지만, 네놈은 항상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그걸 혼자 해결하려 드는 경향이 있더군.”
뭐?
우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승진은 ‘제길’ 하고 머리를 벅벅 긁더니 욕설을 흘렸다.
“하지만 이 세상은 네놈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어째서 쓸 만한 파트너가 곁에 있는데 자꾸만 독단으로 움직이는 거냐?”
우영은 승진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승진은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뭐…… 네놈이 보기에는 내가 아직 그 짐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못 미더울지 모르겠지만, 네 곁에 있기로 한 이상 나도 네 짐을 덜어 주고 싶단 말이다.”
“…….”
“힘든 걸 함께 나누면서 극복하는 게 그 여, 연인 아니냐!”
연인……이라.
“그러니까!”
“그러니까?”
되묻는 우영을 쳐다보던 승진이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흠흠, 기침까지 하며 소리쳤다.
“가끔은 나한테 기대!”
우영은 말을 한 뒤 얼굴을 찡그린 승진을 들여다봤다. 있는 힘껏 소리친 후 씩씩거리던 승진이 흥분을 가라앉히는 과정이 보였다. 들썩이던 그의 어깨가 잔잔해지고, 힘을 줬던 눈가의 근육이 풀어진다.
“뭘 봐?”
상기되었던 안면이 평상시로 돌아오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우영은 대답 없는 자신을 향해 쯧, 혀를 차는 승진을 보고 빙긋 웃었다.
“승진아.”
우영의 살가운 음성이 의외였던 모양인지 승진이 움찔거렸다.
“뭐, 뭐야.”
본능적으로 우영을 경계한 승진이 탄탄한 엉덩이를 문 쪽으로 붙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우영은 다가오지 말라는 표정을 짓는 승진과 창밖을 흘긋거렸다.
“너, 아까 유 부장님한테 6시쯤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냐?”
“어? 어어, 아마도 그쯤 도착한다고 말했지. 그런데 부장님이 7시에 와도 된다고 하더군. 어차피 기자회견은 검사장님이 하실 거라며…….”
“서울까지는 한 시간 정도 걸리겠지.”
“그렇……겠지?”
“10분 정도 있네. 7시까지 가도 되면 1시간 10분…….”
“응?”
“하자.”
우영은 ‘뭐?’ 하고 소리치는 승진의 발목을 덥석 잡았다.
“이번엔 부드럽게 해 줄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승진이 외쳤으나 승진의 몸을 덮치는 우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 * *
『오늘의 첫 뉴스입니다. 한서 그룹 계열의 한서 전자 부사장, 이정후 씨의 경기도 별장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마약 파티 적발과 관련된 소식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혐의를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는 현직 국회의원부터 시작해 현직 판사, 그리고 강남 모 초등학교 교장까지 얽힌 이번 사건의 대대적 검거 뒤에는 직접 그 현장에 침투하여 관련 용의자들을 추적한 검찰 관계자의 희생이 있었다고, 서울 중앙지검의 오대준 검사장이 밝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 장선영 기자가…….』
“신 검 자식, 끝내 한 건 했네?”
무표정한 얼굴로 휴게실의 TV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승진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초췌한 얼굴의 선배 검사가 그를 향해 다가오며 진한 하품을 흘려 댔다. 승진은 자연스럽게 자신이 앉아 있던 원형 테이블 주변에 엉덩이를 붙이는 두 선배 검사들을 응시했다.
지난 주말 있었던 마약 파티 현장 적발 사건으로 인해 서울 중앙지검에 소속된 대부분의 검사들은 청사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에 관련된 용의자만 해도 수십 명에 육박하는 데다, 그들이 대동한 변호사들이 줄기차게 중앙지검 청사를 드나드는 바람에 대응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특수부와 첨수부는 물론이고, 강력부의 인원까지 총동원해 특별수사본부를 꾸린 오대준 검사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련자 모두를 잡아넣어야 한다는 지시를 내렸고, 그 선봉장을 맡은 이는 다름 아닌 첨수부 소속의 우영이었다.
특수부 선배인 하준오 검사의 말 한 마디에 승진은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준오는 제게 인사하는 승진을 흘긋거리더니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아니 말이야, 그 이상한 행동들이 잠입 작전 일부였다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든가……. 하마터면 진짜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고 오해할 뻔했잖아.”
“하 검,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그냥 말을 하지그래?”
툴툴대는 준오에게 동료 검사인 유태현 검사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넸다. 준오는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미, 미안하긴 누가 미안해! 어쨌든 그 자식, 진짜 속이 검지 않냐? 어이, 백 검. 넌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라.
그 말을 들은 승진은 이번 일의 주범이나 마찬가지인 이정후가 유치장에서 구치소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뉴스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어진 화면에는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오대준 검사장의 기자회견 장면과 그의 뒤편에 서 있는 우영의 모습이 차례로 비쳤다.
오 검사장의 허락하에 마약 파티에 잠입 수사를 진행하였다 알려진 첨단범죄수사부의 신우영 검사에 대한 이야기는 연일 뉴스에 오르내릴 만큼 화제였다.
당시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던 몇몇 용의자들은 참석자 모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우영의 진술과 여러 증거들로 인해 더는 발뺌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서로를 지목하며 자신만 살고자 발버둥 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그 덕분에 당시 현장에서 검거한 인물뿐 아니라 그간 모임에 얼굴을 비추었던 인물들까지 수사 대상에 오르며 소환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윽.’
안경 너머로 보이는 우영의 검은 눈동자가 TV 정중앙을 향하자 엉덩이 골 쪽이 욱신거렸다. 우영과 시선을 마주친 것도 아니건만, 왜 이리 오싹한 건지.
[승진아, 여기 봐.]
[으…….]
[봐줘, 어서.]
[하아…… 어.]
아직도 그날 새벽만 생각하면 찌릿한 전율이 흐른다.
욕망에 가득 찼던 우영의 눈동자가 점점 차분해지고, 자신의 몸을 훑는 손길이 지나칠 정도로 다정해서 승진은 그의 아래서 파르르 눈꺼풀만 떨었다.
그날따라 유독 저를 부드럽게 부르던 우영의 목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한시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거늘, 멈춰 선 차 안에서 벌어진 우영의 어택을 승진은 막지 못했다.
승진은 부드럽다기보다는 딱딱함에 가까운 시트 위에 드러누워 숨을 헐떡거렸었다. 승진이 뿜어내는 짙은 숨결과 제 이름을 부르는 우영의 목소리가 섞여 차창에 맺혔다. 뜨거운 입김이 자리 잡은 창문은 금세 뿌옇게 물들었고, 건장한 두 남자가 얽혀 버린 차체는 요란하게 흔들렸다.
승진이 차를 주차한 곳이 다행스럽게도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망정이지, 그 주변을 누군가 지나갔더라면 영락없이 수상하게 여겼을 거다.
[기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평소 같았으면 우영이 저를 안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해결은 해야 했기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언젠가 이에 대한 보답은 반드시 받겠다 생각하며.
정신없이 달려드는 우영을 온 힘으로 받아들인 후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승진을 향해 우영이 툭 말을 던졌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끼던 승진이 놀란 눈으로 우영을 응시하자 그가 쓴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느끼기에도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지. 하지만…… 그래야 했어.]
[이봐, 그래야 하다니? 이번 일은 엄밀히 네놈과 나의 공조였다고. 신 검 너, 공조의 뜻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까지 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뭐?]
[내 선에서 모든 걸 해결하고 싶었어. 하필 네 맞선…… 상대의 일이었잖아.]
작게 중얼거린 우영의 말을 듣고 둔기로 명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승진은 멍한 표정으로 우영을 내려다봤다. 맞선 상대라니.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키는 우영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눈을 아래로 내리깐 우영이 부어 있는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반쯤 돌았었지. 어떤 상황에서도 공사 구분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 매번 너 타박만 했는데 이번엔 내가 제대로 혼동을 해 버렸다. 어떻게든 너를 그 사건에서 떨어뜨리려 노력하면서 홀로 움직일 생각만 했어. 결과적으로 하필 그게…… 이정후한테 당할 뻔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군. 솔직히 방심했다.]
[시, 신가 너.]
[승진아.]
[…….]
[네가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제정신이 아닐 때는 전부 너랑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이거 꽤, 심각한 일 아니냐?]
멋쩍게 웃으며 승진을 바라보던 우영의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백 검?”
승진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꾹 입을 다물고 있는 승진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준오와 태현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들과 대화 중이었지. 승진은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하고 묻는 준오에게 흐린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통 속을…… 모르겠어요.”
* * *
오 검사장에게 보고를 올리고 검사장실을 나서던 우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하니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던 이가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우영은 미간을 좁히며 상대를 노려봤다.
“살벌한 눈빛이네요. 잘못하면 녹아내리겠습니다.”
우영과 얼굴을 맞댄 이가 빙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묘하게 거슬리는 그의 중얼거림에 우영은 흥, 코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고작 눈빛 한 번에 쉽게 녹을 분도 아니죠, 안 변호사님은.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
검사장실이 있는 곳은 본관 13층이었다. 저를 만날 시간도 없이 바쁜 승진을 만나러 왔을 린 없고, 이보다 더 위층에서 내려왔을 것이 분명한 서호에게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빙긋 눈웃음을 그렸다.
“첨수 1부 쪽에 아는 분이 있어서요. 이번 사건 때문에 잠시 그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일종의 협조……랄까요.”
“그렇군요.”
“신 검사님의 활약상은 뉴스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거침없으시더군요.”
“덕분에. 안 변호사님이야말로 이번 일이 벌어지기 직전 한서 전자에서 나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곧, 로펌을 차리신다고요?”
“아아, 예. 이제 다른 사람의 뒤치다꺼리를 해 주는 일에서는 벗어나고 싶어서 말이죠.”
“하긴, 안 변호사님 같은 분이 고작 기업의 전담 변호사로만 있기에는 아깝죠.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에 안 변호사님의 이름이 오르내리진 않더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
“하하, 제가 좀 용의주도한 편이죠.”
가시를 던지자 비수가 되돌아온다. 가끔 대화를 나눌 때 느꼈지만, 서호는 확실히 우영과는 맞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스타일이어서 더더욱. 우영은 생글생글 웃고 있던 서호가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자 말없이 2층을 눌렀다. 검사장실로 향하기 전 승진이 휴게실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으로 곤란해진 의원분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은 모양이더라고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멈추질 않는다. 보통 한 층에 한 번꼴로 멈추어 설 텐데, 어찌 된 셈인지 계속. 서호와 함께하는 시간이 긴장의 연속인지라 신경을 곤두세우던 우영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뭐…… 어떤 연줄이 있다 한들, 조사에서 쉽게 빠져나가진 못할 겁니다. 몰래 도움을 주신 누, 군, 가 덕분에 이정후 부사장이 그분들께 수수했던 뇌물 혐의 등이 너무도 완벽하게 입증됐거든요. 듣기로는, 그쪽 변호사들이 손쓸 여력이 없답니다.”
“호오, 그렇습니까?”
“예. 거기다 성 상납까지 받았으니, 청렴을 원하는 국민들의 분노를 살 만하죠. 하필 그 과정에 대한 영상들이 인터넷에 실시간 중계까지 됐으니 뭐……. 별장의 각 방마다 CCTV가 설치되어 있을 줄,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럼 이번 지방선거는 여당 쪽이 유리하겠네요.”
“네. 하필 이 부사장의 접대를 받던 쪽이 야당이니까요.”
“대통령님께는 잘된 일이네요.”
눈 한 번 깜빡 않고 웃는 서호의 모습이 소름 끼친다. 우영은 이정후를 사지로 몰아넣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서호의 대범함에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쿡쿡 웃는 우영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서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이 부사장이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네?”
“다른 모두를 적으로 돌려도, 당신만큼은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됐습니다.”
그 말에 멈칫하던 서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입술이 살짝 꿈틀거린 것으로 보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서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우영은 가만히 서호가 다음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거죠, 제가.”
그들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5층을 지났을 무렵, 서호가 중얼거렸다. 우영은 씁쓸함이 감도는 서호를 말없이 바라봤다.
“이미 금이 갔던 우정에 매달린 건 저니까요. 뭐, 이렇게 되니 오히려 홀가분하네요. 정후는 잘 지낸답니까?”
“삼시세끼 꼭꼭 먹고 있답니다.”
“흐응, 뭐…… 공판 준비하려면 밥은 잘 챙겨 먹어야죠. 그 녀석에게 남은 건 이제 시간밖에 없으니.”
“면회는 안 가셨습니까?”
“갈 수 있겠어요? 저만 보면 죽이려 드는데?”
하긴, 그건 그렇지.
완벽하게 틀어진 이정후와 안서호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우영 역시 건너 건너 들었다. 우영은 어깨를 으쓱이는 서호를 내려다봤다. 그때 땡, 하고 엘리베이터가 2층에 멈추어 섰다.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갈 생각이 없던 우영은 서호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벗어나려 했다.
“신 검사님은 백 검사님과 오랜 우정을 유지하셨으면 좋겠군요.”
그때 들려온 서호의 말은 반쯤 엘리베이터를 나서던 우영의 발걸음을 뚝 멈추게 했다. 우영은 고개를 돌려 서호를 응시했다. 서호가 서글서글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러려면 두 분이 공식적으로도 함께 계셔야 할 것 같은데…… 듣기로는 백 전 대법원장님이 또 뭔가를 준비하시는 모양이더라고요.”
……뭐?
“제가 실패했으니, 다른 대체자라도 물색하시는 건가.”
“…….”
“그럼 앞으로도 수고하십시오. 기회가 된다면 또 뵙죠.”
우영은 그 말을 끝으로 드르륵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멍하니 쳐다봤다.
“어이!”
그렇게 돌처럼 굳어 버린 우영이 얼마나 서 있었을까. 우영은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누군가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제게 아는 척을 하고 있는 승진의 모습이 보였다.
승진이 생긋 웃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검사장실 다녀오는 길이냐?”
끊이지 않는 기소장과 변호사들과의 기 싸움 때문에 많이 지쳐 있던 승진이 우영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워하는 것이 보였다. 다른 검사들이 봤다면 기겁할 일이다, 라고 생각하던 우영은 ‘젠장’ 하고 욕설을 흘렸다.
“뭐, 뭐야.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 왜 뜬금없이 욕질…….”
“어떻게든 사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버텨 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군.”
“어?”
“승진아.”
청사 내에서는 승진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던 우영이 그의 어깨 위로 손을 턱 얹으며 말하자 승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깜짝 놀란 승진을 바라보던 우영은 결의를 다진 눈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내일 시간 비워 둬라.”
“뭐?”
“그 전에, 너희 할아버지께 연락 넣어서 급히 볼일이 있다고도 전해.”
“무슨…… 소리야?”
우영은 승진의 어깨를 잡은 손에 꽈악 힘을 주며 이를 갈았다.
“더 이상 쓸데없는 똥파리들이 꼬이는 건 사양해. 내가 어떤 각오로 그 짓까지 했는데, 빌어먹을 맞선을 또 보게 할 수는 없지.”
“이봐, 신 검. 난 네가 뭐라고 하는 건지 도통…….”
“남은 건 정면 돌파뿐.”
우영이 잔뜩 힘을 준 목소리를 내뱉었다.
“우리 사이, 인정받는다.”
꾸욱.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계속해서 힘이 들어간다. 이쯤 되면 아프다고 말할 법도 한데, 승진은 그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영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어?’라는 탄성도 흘리지 않는 승진을 빤히 주시했다. 승진의 눈썹이 아래위로 씰룩이는 것이 보였고, 입가의 근육이 경직되는 모습도 관찰할 수 있었다.
당황했군.
그 어떤 말도 뱉어 내지 않았지만 승진의 작은 행동만으로도 그의 심적 상황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우영은 제 말을 듣고서도 한동안 반응하지 않던 승진이 ‘하, 하하.’ 하고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봤다.
“저기…… 신 검.”
승진이 미세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우영을 부른 것은 몇 초가량이 더 흐른 뒤였다. 놀란 것이 분명한 승진의 목소리는 실로 오랜만이다. 설마하니 자신이 그런 말을 내뱉을 줄은 몰랐던 걸까.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로 승진을 바라보던 우영은 대답 없는 제 모습에 구레나룻 쪽을 긁적이는 승진의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승진은 서늘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우영의 모습에 움찔거리더니 다시금 씩 웃으며 겨우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가 아무래도 잠을 못 잤나 보다. 젠장. 나는 몰라도 네놈은 절대로 할 리 없는 말인데. 내가 미쳤지. 망상을 현실로까지 가져오려 하다니…….”
‘알았어.’ 혹은 ‘뭐?’라는 반응이 나올 거라 여겼던 우영의 예측과 달리, 승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태도를 취했다. 우영이 으으, 머리까지 쥐어뜯으며 중얼거리는 승진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지만, 상념에 갇혀 버린 승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래, 미쳤지. 내가 미친 게 분명해. 아무리 요즘 업무가 많기로서니, 이젠 환청까지 들리다니. 설마 네가 그 말을 해주기를 바랐던 것도 아닌데…….”
“그 말이 뭔데.”
우영이 싸늘하게 묻자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승진의 갈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
손을 뻗어 승진의 얇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냉정을 유지해야 했다. 물론 현재 휴게실에 인적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우영이 끓어오르는 욕망을 꾹꾹 누르는 사이, 승진은 손까지 휘휘 좌우로 움직였다.
“아아. 벼, 별거 아냐. 진짜 별거 아니…… 하아, 아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니…….”
“만약.”
“어?”
“만약 너희 할아버지께 인정을 받을 거라는 말을 환청으로 여기는 거라면, 잘못 듣지 않았다.”
“그래! 젠장! 내가 그 말을 너한테 들었다고 생각했다니…… 뭐?”
저러다 눈이 튀어나오겠군.
우영은 담담하게 말하는 제게 맞장구를 치던 승진이 돌처럼 굳어 버리자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주변에 보이는 테이블 의자에 착석한 뒤 망부석이 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잘 감췄어.”
승진이 굳어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우영이 중얼거렸다.
“언젠가는 들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도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우영의 말에도 불구하고 승진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우영은 그런 승진의 모습을 한 번 흘긋거린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끝내 우리 관계에 대해 드러나는 날이 올 거다. 나는 그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 알려지기보다는 우리가 스스로 밝히는 게 더 낫다고 봐. 아마도 그게 확실히 이야기를 들은 상대의 충격도 덜할 거고.”
청사 내에서 나누는 대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私)적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서호에 의해 자극을 받은 우영은 현재 보이는 것이 없는 상황. 승진이 그 빌어먹을 맞선을 또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들끓는 분노를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우영은 얼떨떨한 얼굴의 승진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선수 친다. 불만 있나?”
마치 공격 개시를 선언하는 장수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우영의 두 눈을 승진은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우영은 제 말을 듣고도 대꾸하지 않는 승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인상을 썼다.
“백…….”
“……직은.”
다시 한 번 승진을 부르려던 우영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아직은 아니야.’라는 말로 우영의 말을 멎게 한 승진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또 사고를 치기에는 아직 해결도 못 한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잖냐, 신 검아.”
우영은 웃고 있는 승진을 바라봤다. 승진은 대답 없는 우영을 내려다보더니 그의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며 말했다.
“일단 이번 사건들부터 처리하고 보자. 그러고 난 뒤에 할아버지고 뭐고 다른 세부적인 일에 대해서도 논의하자고.”
“…….”
“걱정 마, 인마. 난 다시는 맞선 따위 볼 마음 없으니까. 당장 눈앞에 닥친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난 뒤에 얘기하자. 어?”
입을 다물어 버린 우영을 안심이라도 시키려는지 승진은 억지 미소를 흘리며 입꼬리를 올려 댔다.
* *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승진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허공에서 그와 눈이 부딪치자 움찔하던 상대가 볼을 빨갛게 붉히는 게 보인다.
‘……하.’
수줍어하는 것이 분명한 그 모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다 큰 남자의 수줍어하는 모습이라니. 이거, 신종 고문인가. 승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아, 잠깐 나와 봐라. 청사 앞이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난데없이 걸려 온 전화로 인해 일어났다.
경기도 별장에서 벌어진 이정후의 마약 파티에 관련된 인원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다. 수사 내용이 언론을 통해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국민들은 분노했고, 그런 국민들의 노여움을 조금이라도 누그러트리기 위해 서울중앙지방 검찰청의 검사들은 밤잠도 자지 못한 채 수사를 이어 갔다.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이 흘렀음에도 제대로 퇴근을 하지 못했던 승진에게 그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오늘 오후 2시를 갓 넘긴 무렵. 한정식집에서의 일 이후 승진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던 백 전 대법원장이 대뜸 통보하듯 말을 전했다.
승진이 황당해하면서도 칫, 입술을 삐죽이며 청사 앞으로 나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노인네의 부탁을 외면했다간 무슨 일로 시달릴지 몰랐다.
[할아버지, 저 바빠요.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 타거라.]
[할아버지.]
[한 번 충돌했다고, 이 할애비까지 영영 무시할 셈이냐!]
[…….]
[타, 인석아. 점심이라도 먹고 일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끼니 거른다는 소리 듣고 시간 내서 온 거니까, 잔말 말고 타!]
그래도 손자랍시고 자신을 생각해 준 것일까.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호통을 치는 백인우 전 대법원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진은 긴 숨을 흘리며 그의 차에 올라탔다.
쏟아지는 업무로 점심시간을 넘기도록 식사를 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한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합니다.’라고 퉁명스레 말하며 문을 닫자 백 전 대법원장이 운전기사를 향해 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차를 타고 청사를 벗어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식사’를 미끼로 승진을 유인한 백 전 대법원장은 안서호의 뒤를 이어 또 다른 맞선 자리를 만들어 놓은 상황이었다.
승진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제 옆에 앉아 있는 백 전 대법원장을 노려봤다.
성질 같았으면 이 테이블을 뒤집어엎고도 남았지만, 하필 백 전 대법원장이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아 제 마음대로 날뛰지도 못했다.
결국 억지로 만들어진 자리 내내 ‘네.’라든가, ‘예.’라는 단답형의 말만 늘어놓던 승진은 그의 반응에 실망한 남자가 먼저 엉덩이를 들 때까지 식사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그런 승진의 반응에 폭발한 쪽은 먼저 맞선 상대를 보내 버린 백 전 대법원장이었다. 입가심용으로 주어진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승진의 검은 눈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꽂혔다. 백 전 대법원장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이 자리, 이 할애비가 얼마나 공을 들여 만든 자리인 줄 아느냐!”
대충 짐작은 간다. 승진은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커피를 계속해서 들이켰다. 백 전 대법원장이 부드득부드득 이를 갈았다.
“방금 그 아이는 네 앞길에 또 다른 날개를 달아 줄 아이였다! 그쪽 집안과 연계되면 지금 진이 네 녀석이 처한 상황보다 훨씬 더 일이 잘 풀릴 수 있다는 말이야!”
“제가 처한 상황이 대체 뭡니까.”
백 전 대법원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승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거짓말을 해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버린 백 전 대법원장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승진은 싸늘한 눈으로 백 전 대법원장을 바라봤다. 승진의 시선에 움찔하던 백 전 대법원장이 에잉, 하고 혀를 차더니 결국 얼굴을 벌겋게 붉히며 소리쳤다.
“그걸 몰라서 묻는 게야? 진이 네 녀석이, 중앙지검의 신가인지 뭐시깽인지 하는 놈보다 뒤처진다는 소문이 파다해. 특히나 이번 별장 사건 이후 그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있단 말이다. 네놈이 알기나 해?”
……난 또 뭐라고.
승진은 ‘내 손자가 비교에서 지는 것은 용납 못 하겠다!’는 표정까지 짓는 백 전 대법원장을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현재 상황에서 대검찰청에 가까워진 것이 우영임은 틀림없다. 중앙지검을 대표하는 오대준 검사장과 함께 브리핑에 참석했고, 수사를 총지휘하고 있기까지 하니 백 전 대법원장이 조바심을 느낄 만도 하지.
그러나 우영은 충분히 그러한 대우를 받을 만큼 훌륭히 그 일을 수행해 냈고, 승진은 오히려 그 모습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진이 너같이 잘난 녀석이 그런 하찮은 놈도 못 이기냔 말이다!”
물론 우영의 연인인 승진과 달리, 백 전 대법원장의 입장에서 우영은 승진의 발톱만도 못한 존재임이 틀림없겠지만.
‘난처하군.’
이래서 우영이 그렇게도 자신의 존재를 피력하려 들었던 것일까.
승진은 쓰게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귀에 더 이상 그놈 이름이 안 들리게 하거라!’는 말까지 외치고 있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입술을 열었다.
“하찮은 녀석, 아닙니다.”
“……뭐라고?”
“그 녀석, 생각 이상으로 괜찮은 녀석이라는 말입니다. 신우영이라는 검사 놈 말이에요.”
“지, 진이 네 녀석 지금 이 할애비 앞에서 그딴 놈의 편을 들려는 거야!”
승진은 쓰게 웃었다.
거봐, 지금 이 상태에서 우영을 연인이라고 소개했다간 도자기나 유리컵보다 더한 것이 제 얼굴로 날아올 거다.
승진은 고개를 내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편을 들려는 게 아니라 외면하고 계시는 진실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할아버지.”
백 전 대법원장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승진은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어 갔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 신 검사 오랫동안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서 잘 알아요. 이번 사건을 시작한 것도, 그리고 해결에 가까워진 것도, 전부 전적으로 그 녀석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그 녀석,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폄하하실 만큼 능력이 없지 않습니다.”
“백승진!”
“그리고 그 녀석은…….”
제가 몹시 좋아하는 녀석입니다―라고.
분노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향해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을 간질이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까닭은, 아직도 우영을 드러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반반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건 정면 돌파뿐. 우리 사이, 인정받는다.]
몇 주 전, 우영은 승진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말을 꺼냈다. 하지만 그런 우영의 의지를 가로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고, 눈앞에 닥친 상황을 먼저 해결하자는 핑계를 대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와의 관계를 가족들에게 밝힌 뒤 제게 닥칠 일은 크게 걱정이 되지 않았으나, 이제 탄탄대로를 달릴 우영의 앞길에 어쩌면 장애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우를 떨칠 수가 없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입 안을 맴도는 말을 다시금 삼키며 승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은 녀석입니다.”
“괜찮다고?”
“예. 다음번에 할아버지께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바쁜 내가 왜 그런 녀석을 만나야 하냐! 싫다!”
“할아버지.”
“그럼 일단…… 청사 내의 인물은 아닌 모양이군.”
더 실랑이를 벌였다간 쓸데없는 소모전만 이어질 것이 분명했다.
숨 막히는 시간이기는 했으나 먼저 일어난 것은 아니니 백 전 대법원장의 비위는 충분히 맞춰 준 셈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백 전 대법원장과 따로 식사는 하지 않겠다 생각하던 승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그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네?”
뜬금없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하던 승진은 흥, 콧방귀를 뀌는 백 전 대법원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백 전 대법원장이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때 네 녀석이 그러지 않았느냐? 네가 네놈이 만나는 녀석을 소개하지 않는 까닭은 내가 그 녀석을 인정하지 않을 게 분명해서라고.”
[제가 만약 그 녀석을 할아버지 앞에 떡하니 대령해 놓으면, 할아버지께서 그 녀석을 받아들이실 수나 있겠습니까?]
물론 승진이 백인우 전 대법원장을 향해 그런 말을 한 전적은 있었다. 그러니까 분명 한정식집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당황하는 승진에게 백 전 대법원장이 물었다.
“진아, 내가 이미 실패한 맞선 때문에 네놈을 여기까지 불러낸 줄 아느냐? 맞선은 가짜다. 조금 전 네 녀석이 만났던 녀석은 백 대표 회사의 신입 비서 녀석이었어.”
“예?”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승진은 눈을 껌뻑였다. 백 전 대법원장은 승진이 무슨 표정을 짓든 개의치 않고 제 할 말만을 이어 갔다.
“네놈의 그 애인이라는 녀석을 유인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아.
“하도 데려오지 않으니 오히려 이쪽이 궁금해지지 않느냐!”
“……!”
“대체 어떤 녀석인지 낯짝이라도 알아 둘 생각이었다. 그래서 네놈이 다시 맞선 본다는 소문을 흘리고, 이번엔 대놓고 청사 앞에서 납치까지 했는데……. 이 자리까지 쫓아오지 않는 걸 보면 청사 내에는 없는 모양이구나. 그게 아니라면 날 대면할 용기가 없든가.”
승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백 전 대법원장의 말에 충격 받은 표정을 짓자, 그가 코웃음을 쳤다.
가슴이 철렁였다.
일언반구도 꺼내지 못하는 승진의 모습을 보며 통쾌함을 느꼈는지 하하 크게 웃던 백 전 대법원장이 돌연 눈을 번뜩였다.
“이거 점점 흥미가 생기는군.”
입맛을 다시는 백 전 대법원장은 과연 과거 법조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자, 다웠다. 이제야 백 전 대법원장이 맞선 자리라던 식사 시간 동안 왜 제 옆자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지 알 수 있었다.
‘큰일 날 ……뻔했군.’
안서호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맞선 자리에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치밀한 계산을 했을 줄이야. 승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백 전 대법원장을 바라봤다. ‘뭘 보는 게야!’ 하고 이를 갈고 있는 백 전 대법원장은 기분 나쁜 티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승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거, 할아버지도 눈치채셨잖습니까.”
“…….”
“저도 슬슬 청사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할아버지.”
“에잉! 알았다. 알았다고, 인석아!”
조금이라도 더 버텨 볼 생각이었는지 승진을 노려보던 백 전 대법원장이 몸을 일으켰다. 승진은 백 전 대법원장을 부축하기 위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못난 놈. 그렇게 숨기고프냐?”
“하하.”
“네놈이 숨긴다고, 이 할애비가 포기할 것 같아?”
승진은 제 부축을 받고 VIP실을 나서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아직은 때가 아닐 뿐입니다. 그 녀석이 조금 더 강해지면, 그때 차차 소개해 드릴게요.”
“얼마나 하찮은 놈을 만나고 다니기에 소개 한 번 받기도 이리 어려워? 그놈, 정상은 맞는 거냐?”
“할아버지, 저의 미적 감각은 매우 뛰어난 편입니다. 그 녀석 어디 나가서 저보다 달린다는 소리 안 듣는 놈이에요.”
“사내새끼가 동성을 칭찬해 봤자 내가 눈 한 번 깜짝할 것 같으냐? 아서라. 오히려 편견만 쌓이고 있다.”
“그걸 아니까 할아버지께서 힘이 빠지셨을 때 소개하려는 거 아닙니까.”
“뭬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 공개를…….”
어?
웃으며 말하던 승진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레스토랑 내의 VIP실을 나와 중앙 홀 쪽으로 움직이던 승진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진아?”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승진과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던 백 전 대법원장이 우뚝 멈춘 승진을 따라 멈춰 섰다. 그러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승진을 올려다봤다. 승진은 자신을 발견하고선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는 낯익은 사람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켰다.
“왜 그러는 게야?”
백 전 대법원장이 사색이 된 승진에게 의문을 표했다. 그러다 스윽, 승진이 보고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얼굴을 구겼다.
“저 녀석은…….”
승진은 백 전 대법원장의 목소리에 서리는 적대감을 인지했다. 그것은 실로 살기에 가까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을 발견한 듯한 사람의 음성. 확실히 현재 백 전 대법원장의 상대에 대한 경계심은 하늘을 찌르는 중이었다.
이 상황은…… 곤란한데.
승진은 하하, 미소를 흘리며 저와 백 전 대법원장에게 다가오는 것이 분명한 남자에게서 몸을 돌리려 했다.
“하, 할아버지. 조금 전 방에 뭔가를 놔두고 온 것 같습니다. 우리 다시 돌아가서―”
“백 검사.”
빌어먹을!
하지만 승진이 백 전 대법원장을 VIP실로 유도하기 전, 상대가 그 앞에 도착하는 것이 더 빨랐다. 승진은 돌처럼 굳은 얼굴을 차마 상대에게 고정시키지도 못했다. 정면이 아닌 옆얼굴을 그에게 보였던 승진은 슬그머니 상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경직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시, 신 검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겠지?
아니, 떨린 것이 분명하다.
백 전 대법원장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나 침착해야 한다, 백승진.
‘침착해야 해.’
너는 충분히 이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어.
그리고 우영아, 아직은 때가 아냐.
아직은…….
승진은 스스로를 향해 되뇌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승진의 미소를 바라보던 상대가 싱긋, 유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젠장!’
더럽게 맑은 미소에 심장이 벌렁거린다. 두근두근.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한 승진의 가슴이 요동쳤다. 당장이라도 금욕의 미소를 흘리고 있는 남자를 눕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쩐 일이긴요.”
평소답지 않게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흘리던 상대는, 그러니까 우영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로 승진을 바라봤다. 우영의 붉고 탐스러운 입술이 자극적일 만큼 예쁘게 움직였다.
“우리 백 검이 또 맞선을 본다길래, 소식 듣고 찾아왔습니다.”
……뭐?
“장소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맸습니다. 꽤 멀리까지 나왔었군요.”
승진은 노골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흘리고 있는 우영을 보고 기겁했다.
이 미친 자식이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백인우…… 전 대법원장님 되십니까?”
놀라 까무러치기 직전의 상태에 치달은 승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우영은 승진에게서 눈을 돌려 백 전 대법원장을 바라봤다. 두 검사의 대화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백 전 대법원장이 ‘자네는?’ 하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쏘아 대자 우영이 싱긋 눈을 반으로 접었다.
“신우영이라고 합니다.”
“신우……영?”
“예.”
이미 우영의 정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의 이름을 되묻는 백 전 대법원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하는 우영을 보던 승진은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거 위험하다. 진짜 위험한데!
“저기, 신 검. 우리는 지금 나가려던…….”
“잠깐만, 백 검. 잠깐 기다려 주지 않겠어?”
……뭐?
승진은 유독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리며 자신을 향해 웃는 우영을 보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우영이 이렇게 의미 없이 웃을 때는, 무언가 단단히 결심했을 때 말고는 없었다. 승진의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위험 신호가 웽웽, 승진의 머릿속을 울렸다.
우영은 승진이 혼돈을 헤매든 말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을 쏟아 냈다.
“백 전 대법원장님. 아니, 그 호칭은 너무 기니…… 할아버님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흥. 현재 화제의 중심이라던 중앙지검의 신 검사는 TV 화면을 통해 봤을 때보다 넉살이 좋군. 원래 그런 성격인가? 처음 보는 노인한테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려고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아니면, 생각 이상으로 뻔뻔한 편인 건가.”
날이 선 백 전 대법원장의 말에 우영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오해십니다. 물론 제가 백 전 대법원장님을 이번에 처음 뵙기는 하지만, 할아버님이라고 부르려는 것은 백 전 대법원장님을 앞으로 자주 뵙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나를 자주 보고 싶다? 왜지?”
“글쎄요.”
승진은 말끝을 흐리며 자신을 흘긋거리는 우영과 눈이 마주쳤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이런 걸까.
어째서 우영이 여기 있고, 어째서 이런 레스토랑의 복도에서, 어째서 자신의 할아버지와 대면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승진은 불길한 예감에 말없이 휘휘 고개만 저었다. 그런 승진의 필사적인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우영이 다시금 웃었다. 그리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를 깨뜨리며, 말했다.
“청사에서 떠도는 소문과 달리, 제가 백 검사와 평범한 동료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 * *
“신 검사, 요즘 살맛 나지?”
우영은 이른 아침부터 호출하여 대뜸 묻는 서울중앙지방 검찰청의 오대준 검사장을 직시했다. 씨익, 능글맞게 웃고 있는 오 검사장은 우영의 보고에 몹시 만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하지. 우영이 듣기로, 이번 경기도 마약 파티 사건의 확장판으로 전개된 몇몇 사건들 중, 오 검사장이 중앙지검에 부임한 이후 골머리를 썩이던 일도 함께 해결됐다고 했다.
수사를 하려고만 하면 국회에서 알게 모르게 방해가 들어오는 터라 부드득 이만 갈고 있던 오 검사장으로서는 우영이 예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우영은 저를 보는 오 검사장의 부드러운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아직 발뺌하는 의원 양반들과 돈 뒤에 숨어 있는 재벌가 일원들만 소탕하면, 뭐 더 살 만할 것 같습니다.”
“하하, 신 검사는 참 욕심도 많구먼. 천천히 해, 천천히. 대한민국 범죄란 범죄는 다 뿌리 뽑을 일 있나?”
껄껄 웃으며 쉬엄쉬엄하라고 말을 하면서도, 은근히 조사에 박차를 가하라고 재촉하는 이는 다름 아닌 오 검사장이다.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는 그를 향해 미묘한 미소를 짓던 우영은 다음 소환 대상자를 보고한 뒤 검사장실을 나서려 했다.
“참, 신 검사!”
그런 우영이 방을 벗어나려던 순간, 오 검사장이 그를 불렀다. 고개를 뒤로 돌린 우영은 ‘자네, 혹시 이번 달 말에 시간 좀 되나?’ 하고 묻는 오 검사장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달 말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알고 지내는 몇몇 선배들이 있는데 근래 우리 신 검사가 TV에 자주 얼굴을 비추고 있지 않은가. 선배들이 그런 신 검사의 활약상을 지켜보고 많이들 궁금해하셔서 말이야. 어떤 사람인지 하고.”
“아.”
“그날 그 선배들이랑 강원도 골프장에서 퍼팅 연습이 있을 예정이었는데, 오늘 연락이 와서 혹 신 검사도 데려오지 않겠냐고 물어보더라고. 만약 시간이 된다면 신 검사도 함께하는 게 어때? 알아 두면 나쁜 분들은 아니야.”
안경 너머로 비친 오 검사장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 있다.
우영은 그런 오 검사장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약속을 잡기가 무섭게 나가라는 듯 문 쪽으로 고갯짓을 하는 오 검사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우영은 달칵 문을 닫고 검사장실을 나섰다.
‘대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우영은 슬슬 체감되는 대검찰청의 기운에 짧게 숨을 골랐다.
저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 검사장이 건넨 제안처럼 의외의 미팅이 자주 잡히고 있었다. 청와대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주목하고 있는 사건의 ‘주역’이라는 타이틀은 생각 이상으로 커다란 날개를 달아 준 것이 분명했다.
검사장실의 문패를 흘긋거리던 우영은 ‘앞으로도 수고하게!’라 외치던 오 검사장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
우영이 특별수사 1부 소속의 유태현 검사와 마주친 것은 그가 승진의 검사실로 향하던 무렵이었다.
이정후의 검거부터 시작된 강원도 마약 파티 검거 사건은 재벌과 국회의원들 간의 유착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수사로 이어졌고, 지방선거를 앞두고 큰 반향을 일으킬 만큼 중대한 사건으로 확대되어 갔다.
곧 중앙지검의 자체 수사뿐 아니라 특별 검사가 지목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 정도여서 사건 이후 몇 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중앙지검의 검사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자체 조사도 멈추지 않으면서 특검까지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공식 브리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영이 소속된 첨단범죄수사부에서 이정후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동안, 특수부의 승진은 특검에게 넘길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태현은 승진과 더불어 그 일을 수행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신 검도 백 검 만나러 왔어?”
청사 내의 선배이기는 하나, 제 부서의 선배가 아니었으므로 우영은 태현과 아주 가끔 인사를 나눴다. 우영이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태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닫혀 있는 백승진 검사실을 힐끔거렸다.
“백 검은 마침 자리를 비웠네. 급한 볼일인가?”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우영은 고개를 내젓고선 자신의 검사실로 돌아가려 했다.
“아까 듣기로는.”
……?
“백 검의 할아버지께서 근처에 오신 모양이더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음성이었지만, 우영의 귀에까지 닿기에는 충분했다. 우영은 반쯤 돌리던 몸을 멈추고선 태현을 바라봤다. 태현이 싱긋 웃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백 검사네 할아버지가 꽤 파워가 있으신 분이라지? 여기까지 어쩐 일이실까.”
“선배님.”
“그 이상한 맞선 얘기가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야.”
뭐?
우영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태현은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우영에게 빙긋 눈웃음을 그렸다.
“청사 내에 도는 소문과 달리 두 사람이 가까워 보여서 한 말이니까, 한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
“아, 나도 한가한 몸은 아니라서. 그럼.”
우영은 그렇게 말한 뒤 그의 곁을 지나치는 태현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 인상을 썼다.
‘할아버지라.’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하필 정보를 얻어 낸 사람이 태현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고, 또 그가 뱉어 낸 말들이 신경 쓰였지만, 더 급한 일이 눈앞에 닥쳐 있었다.
우영은 슈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기억하십니까? 신우영입니다만…… 여쭤 볼 것이 있습니다.”
* * *
“앉으시지요, 할아버님.”
“흥. 보기보단 예의가 있는 놈이군.”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누가 칭찬이래!”
“백 검, 백 검도 거기 앉지.”
“…….”
“백 검?”
“아, 으응.”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마터면 얼이 빠질 뻔했다. 불과 몇 분 전 나왔던 VIP룸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 승진은 자연스럽게 백 전 대법원장을 에스코트한 후, 그의 앞자리에 착석하는 우영을 황당한 눈으로 응시했다.
만약 백 전 대법원장이 ‘진이 너는 뭐 하는 거냐!’라고 외치지 않았다면 아마 백 전 대법원장의 손자는 자신이 아니라 우영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우영은 태연한 행동을 취했다.
승진은 머뭇거리다 결국 우영의 옆에 착석한 뒤, 간단한 음료를 주문하고 있는 우영을 힐끔거렸다.
‘신가가 여기에 어떻게 있지?’
아니, 그것보다 신우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그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곳에서 이러지 마시고 장소를 옮기는 것이 어떻습니까.]
백 전 대법원장을 향해 말을 꺼낸 우영은 유려하다 못해 수려한 영업용 미소를 흘렸다. 승진은 그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우영이 그러한 미소를 지을 때는 미소를 받는 상대를 제 편으로 현혹시킬 때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남계를 잘 쓰지 않는 우영이 헤픈 웃음까지 흘려 가며 앉아 있는 모습은 그를 적잖은 시간 동안 보아 온 승진 역시 낯설었으니까.
‘위험……한데.’
특히나 백 전 대법원장이라는 벽에 정면 돌파를 선언한 전적이 있던 우영인지라,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승진은 주문을 받고 몸을 돌리던 종업원이 문을 닫고 사라지자 꼴깍 침을 삼켰다.
“다들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짧고 굵게 해 주길 바라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 상황의 분위기를 쥐고 있던 백 전 대법원장이었다. 그는 긴장한 승진의 옆에서 웃고 있는 우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까부터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게 긴히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이 대체 뭐지? 아니, 그것보다…… 신 검사. 아까 자네가 내게 한 말이 몹시 신경에 거슬린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백 전 대법원장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비단 우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영과의 자리를 뿌리치지 못해 결국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승진에게도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던 백 전 대법원장이 음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신우영이 무슨 소리를 했더라?
우영을 이곳에서 만날 줄 예상하지 못했기에 사고 회로가 굳어 버렸다. 백 전 대법원장이 언급했던 말이 무엇인지 떠올리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청사에서 떠도는 소문과 달리, 제가 백 검사와 평범한 동료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영은 노골적으로 승진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백 전 대법원장에게 선포하고야 말았다.
두근두근.
승진이 우영을 발견한 이후, 그리고 이곳 VIP룸으로 들어와서까지 우영의 눈치를 살핀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승진은 백 전 대법원장에게 대답하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는 우영에게 필사적인 눈빛을 보냈다.
제발.
신가야, 흔들리지 마라.
절대로 여기서 그 ‘동료 이상’의 관계에 대해 발설하면 안 돼. 절대로!
1년도 아니고, 무려 십수 년이 넘게 인연을 이어 온 사이였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제 의도가 전달됐을 거라 승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살짝 올라가는 우영의 입꼬리를 보자니 다행히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승진은 천천히 입술을 떼는 우영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드렸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할아버님. 혹시 할아버님께서는 저와 백 검사의 인연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걸 알아서 뭐하나?”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기는 했지만, 백씨 일가 사람치고 신우영에 대한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특히나 얼마 전부터 백 전 대법원장은 식사 자리에서까지 우영에 대해 언급하며 ‘그 빌어먹을 놈은 대체 뭐야!’라는 욕설을 흘려 댄 장본인이기도 하지 않던가.
우영은 쌀쌀맞은 백 전 대법원장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전히 미소까지 달며 말했다.
“백 검사와는……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대학교, 연수원, 그리고 이곳까지, 정말 끈질긴 인연을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경쟁으로 인한 관계가 이렇게까지 지속되어 조금 놀랍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백 검사가 단순한 라이벌로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동료 이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겁니다.”
“이보게, 신 검사. 나는 그따위 일을 알고 싶지 않…….”
“죄송합니다만 할아버님,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잇겠습니다.”
“……!”
우영은 멈칫하는 백 전 대법원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인 후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저와 신 검사, 오랫동안 같은 목표만 바라보며 겨뤄 왔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금도 여전히 같이 애쓰고 있습니다. 현재는 제가 조금 앞서 나가기는 하지만, 곧 백 검사도 따라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 자식, 은근히 제 자랑을 집어넣는 거 봐라.
승진은 피식 터져 나오는 실소를 속으로 삼켰다. 그런 승진의 반응을 눈치챈 우영은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승진을 쳐다보다 이내 제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할아버님.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 사건에 집중해야 할 백 검사에게 맞선이라니…… 조금 너무하신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뭐?
승진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우영을 응시했다. 백 전 대법원장 역시 기분이 나쁘다는 얼굴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영은 두 남자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다음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왜 자꾸 먼 곳에서 백 검사의 짝을 찾으려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두근.
“굳이 멀리 둘러보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 괜찮은 녀석이 있는 걸로 아는데,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고 계십니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승진은 기겁하며 우영을 쳐다봤다. 백 전 대법원장이 입을 쩍 벌리는 승진과 그런 승진이 어떤 얼굴을 하든 미동도 하지 않는 우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음을 던졌다.
“가까운…… 곳이라니?”
우영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저는 어떠십니까.”
쿵.
두근거리던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승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라는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이어지는 우영의 말에 터져 나오려던 음성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저도 꽤 괜찮은 손주사윗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내뱉는다면 그 말을 들은 상대는 보통 넋을 잃기 마련이다.
룸 안에 흐르는 지독한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정자세로 앉아 있는 우영도 아니었고, 그런 우영을 황당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승진도 아닌,
“……뭐?”
백 전 대법원장이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제대로 느꼈다. 비틀거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승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한 목소리로 자신을 어필하는 우영의 말을 백 전 대법원장이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 전 대법원장의 얼굴이 저만큼이나 일그러진 것은 그의 커밍아웃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니까.
‘망할!’
가뜩이나 불안불안했는데, 이 정도로 막무가내식의 행동을 취할 줄은 몰랐다. 백 전 대법원장만 없었더라면 제 눈에 비치는 우영의 목덜미로 손을 뻗어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승진은 ‘시, 신 검사…….’ 하고 음성을 떠는 백 전 대법원장을 쳐다봤다.
백 전 대법원장의 구겨져 있던 얼굴은 이제 아예 사색으로 물들 지경이었다. 아직 쟁쟁한 노인네라고는 하나, 이런 충격적인 일을 마주한다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지. 게다가 만일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자신이 동요해 버린다면, 백 전 대법원장의 건강은 둘째 치고서라도 곧 다가올 마수에서 우영이 무사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돌아 버리겠군.
승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을 준 채 올곧게 섰다.
“하하하.”
살얼음판 위와 같던 팽팽한 긴장감은 승진이 흘리는 웃음소리에 와장창 깨졌다. 경악하던 백 전 대법원장과 그런 그를 응시하던 우영의 눈동자가 일제히 승진에게 향했다. 승진은 언제 흔들렸냐는 듯 싱긋 미소를 그리더니 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우영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신 검, 신 검이 그만큼이나 나를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옅게 눈웃음 짓는 승진의 말에 우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분이 나빴는지, 우영이 무언가 더 말하려 들었지만 승진이 조금 더 빨랐다. ‘할아버지.’ 하고, 우영에게서 시선을 돌린 승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백 전 대법원장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이 녀석 말대로예요, 할아버지.”
“말대로라고?”
백 전 대법원장이 깜짝 놀라 되물었으나 승진은 여유롭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꾸했다.
“아아, 그런 의미가 아니라. 뭐, 어쨌든 전 소문보다 신 검이랑 사이가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니, 나쁘다기보다는…… 오히려 좋은 편이죠.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으니 말이죠.”
“지, 진아, 너 그럼―”
“하지만 할아버지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승진은 단호히 눈을 빛냈다.
“어디까지나 우리 두 사람은 친구일 뿐이고, 이 녀석이 방금 그런 말을 한 건 할아버지께서 좀 지나치시다고 생각해서일 겁니다.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제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이러다 남자와 맞선을 본다는 사실이 기자들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아무리 뻔뻔한 저라도 언젠가는 곤란해지는 상황이 찾아올 거란 말입니다. 아마 신 검도 그걸 알기에 차라리 자신을 추천한 것일 테고요. 안 그래, 신 검?”
승진은 우영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우영의 검은 눈동자는 속을 읽을 수 없을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제발 아무 말 하지 말고 그 입, 다물고 있어.
승진은 허공에서 부딪친 우영의 눈을 향해 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이, 이놈아! 그건 네놈이 만난다는 놈을 숨기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승진이 우영에게 무언의 발언을 쏟아 낼 동안 인상을 쓰고 있던 백 전 대법원장이 외쳤다. 승진은 빙그레 웃었다.
“할아버지, 그 사람은 언젠가 소개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제 말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
“할아버지.”
“에잉, 못난 놈!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생글생글거리는 승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 전 대법원장이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간다!’ 하고 소리치며 VIP룸을 나가 버리는 백 전 대법원장의 뒤를 따라 우영도 나서려고 했지만,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뗄 생각을 않는 승진의 손아귀 힘에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는.”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승진을 돌아보는 우영에게 승진이 생긋 웃으며 속삭였다.
“나랑 할 말이 남았지?”
* * *
[미, 미친 새끼냐, 너!]
백 전 대법원장이 나가는 것을 완벽하게 확인한 승진이 있는 힘껏 외쳤다. 얼마나 큰 목소리였는지, 레스토랑의 직원이 깜짝 놀라 VIP룸으로 달려왔을 정도였다. 우영은 으아악, 하고 머리까지 쥐어뜯을 기세로 이를 갈던 승진이 저를 노려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승진은 한참이나 홀로 중얼거리더니 우영을 향해 이를 갈았다.
[저 노인네가 얼마나 능구렁이 같은 줄 알아? 신가 네놈 따위는 금방 먹혀 버릴 수 있다고!]
[…….]
[또라이 새끼. 요즘 좀 잘나간다고 눈에 뵈는 게 없다 싶지? 네 앞길 창창해진 것 같지? 저 노인네한테 걸려서 다리가 모두 분질러져야 정신을 차리려나. 젠장! 하마터면 우리 사이 들킬 뻔했잖아! 이 몸의 기지가 아니었더라면 네놈의 그 꽃길이 흐트러질 뻔했단 말이다!]
승진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온몸을 부르르 떨어 대며 중얼거렸다. 우영은 아무 말 없이 승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던 승진은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쉰 후 중얼거렸다.
[네가 뭘 그리 염려하는지는 알겠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날뛰려 했던 건지도. 그래, 이젠 다 알겠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이라고. 네가 불안해하지 않게 행동할게. 맞선도 안 보고, 할아버지랑도 안 만나면 되잖냐. 안 그래?]
[…….]
[제기랄. 숨기는 것도 이제 한계라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아. 나도 준비가 될 때까지……. 아까처럼 그렇게 앞뒤 생각 안 하고 무조건 돌파부터 하면 넘어올 사람도 안 넘어온다고!]
입을 닫고 있는 우영에게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승진은 흐트러진 머리를 바로잡을 생각도 않은 채 청사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두려운가?’
서초구의 서울중앙지방 검찰청으로 돌아오는 길.
우영은 내심 불안한지 계속해서 핸드폰을 살피고 있는 승진을 흘긋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가 알고 있던 백승진이라는 녀석은 자신과의 관계를 숨기기보다는 드러내고 싶어 하는 쪽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반대가 되어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해 승진은 백인우 전 대법원장의 앞에서만큼은 자신과의 관계를 어떻게든 감추려고 했다.
백 전 대법원장이 만만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속 숨기기만 한다면 이전의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현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우영으로서는 답답한 행보를 이어 가고 있는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우영은 ‘그 노인네를 지금 건드리면 안 된다니까.’를 중얼대고 있는 승진이 검사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백인우…… 전 대법원장님이요?”
내내 고심하던 우영이 고민 끝에 상담을 요청한 사람은 자신의 검사실 소속 양우혁 계장이었다.
놀랍게도 이정후의 끄나풀 역할을 하고 있던 존재가 같은 검사실의 정윤희 실무관이라는 것이 밝혀진 뒤, 새로운 실무관을 뽑을 때까지 검사실의 일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양 계장은 막간의 휴식 시간에 들려온 우영의 말이 당혹스러운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인 후 소리를 내뱉었다.
“양 계장님은 과거에 대법원 쪽에서도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네, 뭐…… 속기사로 일하기도 했었죠.”
“그때, 백 전 대법원장님도 뵌 적이 있습니까?”
“제가 대법원에 몸담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일찍 퇴임을 하셔서 함께 일한 적은 없습니다만, 아주 간혹은 뵌 적이 있습니다. 조언을 해 주러 자주 오셨거든요.”
“어떤 분이십니까?”
“예?”
“뭘 좋아하시는지, 어떤 것에 흥미를 가지시는지, 어떤 인간상을 좋아하시는지, 또 취미는…….”
“하하, 검사님. 잠깐만요. 진정하십시오.”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내는 우영을 진정시킨 양 계장은 눈을 휘며 옆얼굴을 긁적였다. 과거를 상기하는 듯 미간을 살짝 좁히던 그의 입술이 곧이어 열렸다.
“제가 아는 백인우 전 대법원장님은…… 음, 원리원칙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불의를 참지 못하십니다. 후배들에게 친절하시고, 배움을 요구하는 학생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죠. 등산 같은 아웃도어파라기보다는 인도어파시고, 매주 주말만 되면 즐기시는 취미 정도는 하나…… 있는 걸로 아는데.”
“아는데!”
흥분한 우영이 책상마저 쿵, 내리찧으며 벌떡 일어나려 하자 움찔하던 양 계장이 싱긋 웃으며 작게 속삭여 주었다.
우영은 그 말이 놀랍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양 계장을 쳐다보다 곧 수긍했다. 제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우영의 상기된 얼굴이 원상태로 돌아오자 양 계장이 중얼댔다.
“그런데 검사님.”
“예.”
“백 전 대법원장님에 대한 건 저보다 백 검사님께 여쭤 보시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백 검사님은 백 전 대법원장님의 손자분이시니까…….”
“참, 제가 양 계장님께 여쭤 봤다는 건 백 검에게 비밀로 해 주십시오.”
“예?”
우영은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고 눈에 힘을 주며 대답한 후 다시 업무를 보기 위해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양 계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는 우영에게 묻지 않았다.
우영의 검사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더 흐른 뒤였다.
-신우영 검사인가?
귀 익은 음성에 우영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혹시 기억할지 모르겠군.
“예?”
-나 백인우라고 하네. 얼마 전에 만난 적 있었지.
“……!”
-다름이 아니라 자네와 만나 의논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네. 요즘 매우 바쁜 건 알지만, 중요한 일이니 시간 좀 내주게. 아, 그리고 나와 만난다는 건 우리 진이에게 비밀로 해 주었으면 좋겠네. 진이 그 녀석, 신 검 얘기만 나오면 날을 세우거든. 괜히 그 녀석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하마터면 우리 사이, 들킬 뻔했잖아!]
백가야, 애석하지만 우리 사이는……
-연인의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 정도 시간은 내줄 수 있지?
이미, 들킨 것 같은데.
* * *
7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정·재계 스캔들은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수사 과정 도중 속속들이 밝혀진 국회의원들과 기업가들의 결탁 관련 사실들은 국민들의 분노를 극대화시켰고, 결국 지방선거로까지 이어졌다.
특히나 이번 스캔들에 얽혀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 집권 여당 쪽이 아닌 야당과 관련되어 있던지라,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로 인해 여당의 기세를 꺾으려던 야당은 이렇다 할 공격 한 번 펼치지 못하고 완벽한 백기를 들어 올렸다.
“후우.”
이정후의 검거 이후 줄줄이 엮이던 고기들을 각 부서에 분배하며 쉴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승진의 검사실 역시 7월 말이 되어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공판 과정도 길어지겠지만 승진 쪽에서 열을 올려야 하는 일들은 대부분 정리가 됐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과도한 업무량에서 이제야 벗어나게 된 승진은 어느덧 여름의 절정에 다다른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더워.’
검사실 내의 에어컨이 빵빵하게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스멀스멀 기어올라 그의 몸을 뒤덮은 여름의 열기는 쉽게 가시질 않는다. 승진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스윽 닦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꼭 그때 같군.’
창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승진의 동공이 짙어졌다. 이렇게 더운 날씨는 오래전의 과거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가 처음 ‘소년’에게 빠져든 시기도 이 무렵 즈음이었다.
물론 그때와 달리 승진의 검사실은 무려 10층에 위치해 있었고 한눈에 보이는 운동장도 존재하지 않았지만, 등 뒤로 흐르는 땀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승진은 아마도 청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분명한 사람들의 머리가 면봉 끝의 하얀 솜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흘렸다.
‘……왜 이렇게 갈증이 나지.’
온몸의 수분이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증발하는 까닭은 비단 덥다는 이유뿐만은 아니리라.
마침 점심시간인지라 강 계장과 주연이 자리를 비워 텅 빈 검사실을 바라보던 승진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족하군.’
대검으로 향하기 위한 사건?
집을 코앞에 두고도 청사에서 지낼 정도로 넘쳐나는 업무를 보았다. 사건이라면 질릴 만큼 대해서 한동안 경찰 쪽에서 넘어오는 사건 기록들도 보기 싫을 정도였다. 어떤 일이든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던 과거와 달리, 넘쳐나는 사건들이 결코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 그리 부족했기에 이렇게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승진은 풋, 코웃음을 쳤다.
‘하하.’
왜 이렇게 짜증이 났나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의외로 결론은 쉽게 났다.
더운 여름이면 항상 그의 머리를 뒤덮은 누군가의 스킨십 부족이 그의 신경을 벅벅 긁다 못해 뜯고 있었다. 젠장. 승진은 하, 숨을 터뜨리며 머리를 뒤로 젖혔다.
“얼마나 됐지…….”
이정후를 검거한 시기가 5월, 그 후 이어지는 기자회견과 검찰 조사, 그리고 지방선거 등등의 이유로 차일피일 만남을 미루다 보니 어느덧 8월에 다다라 있었다. 어째서 몰랐던 거냐. 지난 두 달 동안은 미친 듯이 업무에 매달려 있었던지라 깜빡 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백 전 대법원장과 있었던 일로 우영과의 만남을 무의식적으로 피해 왔던지라 더더욱.
이제야 눈치를 챘다는 것이 황당할 정도였다.
승진은 으으, 낮게 신음을 터뜨리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잠깐.”
그러고 보니 그간 우영과 제대로 만나지 못했던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이 우영을 안았던 게 언제였더라.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살을 맞대었던 것도 자신이 우영을 안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상황이었다. 물론 우영이 미약에 취해 있었고, 자신은 그런 그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움을 주려고 일부러 안기기는 했지만―
‘이거, 위험한 거 아닌가?’
중앙지검에서 대검찰청으로 가는 길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영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사건을 맡고 또 해결했다고는 하나 곧바로 인사이동이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두 남자의 포지션 쟁탈전에서 앞서 나가고 있는 사람은 확실히 우영 쪽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인사이동 이야기가 들린다면 승진은 두말할 것 없이 영원히 우영에게 깔려야 할지도 모른다.
안느냐, 안기느냐는 현재의 백승진에게 있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지만 아직 역전 상황이 남아 있는 한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어차피 끝내 깔리게 될 거라면…… 그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녀석을 깔아도 되는 거잖아?’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시작한 승진이었으나, 최악의 상황이 눈앞에 닥치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보자 싶어 두 주먹을 불끈 쥔 승진은 결국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오늘?”
이번 스캔들의 결말을 짓기 위해 우영이 수사뿐 아니라 공판에도 참여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우영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던 승진은 겨우 시간을 내게 된 우영에게 저녁 식사 제안을 했다.
빙긋 웃는 승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던 우영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긋거렸다. 승진은 아무도 없는 복도에 기대어 서선 말을 이어 나갔다.
“양 계장님께 들으니 신 검 너, 오늘 일찍 퇴근할 예정이라던데.”
“…….”
“내 정보력, 그리 만만하지 않다고. 그러니 신가, 우리 오랜만에 식사나 한 끼…….”
“미안하다.”
“……어?”
생긋 웃는 승진의 말을 뚝 끊어 버린 우영이 차가운 목소리를 흘려 댔다.
“한동안은 약속이 있어.”
뭐?
당연히 ‘좋아.’라는 식의 답변을 들을 줄 알았던 승진은 조금 당황했다. 우영이 이렇게 단호하게 대꾸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얼굴이 경직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슬쩍 우영을 쳐다봤음에도 우영의 냉랭한 눈동자가 변하질 않아 더욱 심장이 덜컹거렸다.
승진은 하,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 그래? 어, 그럼…… 언제쯤 시간이 나는데?”
우영은 꽤 간절해 보이는 승진의 말에 흐음, 하고 콧소리를 흘리더니 대꾸했다.
“정확한 일정은 봐야 할 것 같군.”
“그러냐?”
“어. 미안하다.”
경직된 얼굴을 펴지 못한 승진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우영은 ‘약속에 늦겠어.’라는 말을 남긴 뒤 승진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승진은 멀어져 가는 우영을 잡지도, 그렇다고 따라가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뭐…… 바쁜 건 이해해야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검사를 꼽자면 아마 신우영일 것이다. 승진에게도 귀가 있었기에 우영이 오대준 검사장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는 소리를 전해 들었다.
대검에 가려면 당연히 줄을 서야겠지.
그 입장을 모르지 않았고, 또 우영이 얼마나 대검에 가고 싶어 하는지 이해했기에 승진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는 결코 좁은 마음을 지닌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야망 있는 애인을 수용할 정도로 하해와 같은 마음씨를 지닌 남자이지 않았던가.
승진은 웃으며 넘기려 했다.
그러나.
“저기 신 검아, 곧 여름도 끝나 가는데 우리 여름 끝나기 전에 여행이라도 가는 게 어떠냐?”
“여행?”
“지난 반년 동안 고생한 우리한테 포상을 주자는 의미지.”
“…….”
“웬만하면 사람들 시선이 없는 곳으로. 스페인에 가 볼까. 이비자 같은 곳에 가서 수영이라도 즐기면 괜찮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면 북유럽도 괜찮고. 눈 덮인 곳에 가서 등산이라도 하면 재밌겠네. 한 일주일 정도 휴가 내서…….”
“일주일을 기다리시진 못할 것 같은데.”
“……응?”
“미안. 아무래도 휴가는 무리일 듯하다.”
“그, 그래?”
“그리고 퇴근까지 안 기다려도 돼.”
“뭐?”
“저녁에 정기적으로 들러야 할 곳이 생겨서.”
“…….”
“연락할게.”
옆방을 쓰고 있음에도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우영과 가까스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기회다 싶어 여름휴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돌아오는 것은 냉정한 답변뿐이었다. 승진은 마침 1층이 되자마자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가는 우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연락?”
사건 이후 저 녀석이 먼저 연락을 한 적이 있었나?
* * *
“백 검아, 너 욕구불만이냐?”
휴게실의 테이블 위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승진의 귀가 쫑긋거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웬 남자 두 명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순간 승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소립니까.”
안 그래도 짜증이 한계치까지 치솟았는데 대놓고 정곡을 찌르는 사람을 마주하자니 저도 모르게 싸늘한 말을 흘리게 된다. 흐응, 하고 코웃음을 흘리던 상대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또 다른 남자까지 맞은편에 착석하자 승진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휴게실을 차지하다 못해 짜증까지 팍팍 풍기고 있냐? 왜 그래? 한동안 청사에서 못 나가더니, 애인이랑 헤어지기라도 했어? 그래서 그런 불만에 가득 찬 페로몬을 흘리고 있는 거야?”
평소엔 눈치가 없는 것 같은데 가끔 보면 예리한 구석이 있다. 하긴, 그래서 저와 같은 특수 1부에 소속된 거겠지.
승진은 움찔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는 하준오 검사를 노려봤다. ‘어어, 맞구나?’ 하고 반쯤 눈꼬리를 휘는 준오를 노려보던 승진이 쳇, 입술을 삐죽였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왜 신경을 안 쓰냐. 백 검 네 녀석이 불유쾌한 기운으로 휴게실을 채우는 바람에 쉬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사람들이 우리한테 하소연한단 말이다. 제발 너 좀 어떻게 처리해 달라고. 자기들도 휴게실에서 맘 놓고 쉬고 싶다고.”
“…….”
“그나저나 왜 우리한테 그런 걸 부탁하나 몰라. 우리에게 무슨 뾰족한 수가 있다고.”
툴툴거리던 준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날카로운 눈으로 투덜대는 준오를 바라보던 승진은 속으로 숨을 삼켰다. 수사 등의 이유로 근래 들어 우영보다 이 두 선배 검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밤낮없이 그들과 지내다 보니 아마도 사정을 모르는 이들 눈에는 승진과 이 두 사람이 허물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승진의 처리를 부탁했는지도.
불쾌하군.
괜히 예민해지는 것을 느끼던 승진은 ‘뭐, 그렇게 됐으니 이 선배들이 네 고민 정도는 들어주마.’라는 말을 뱉어 내며 빙긋 웃는 준오를 응시했다. 슬쩍 눈을 돌리자 짓궂은 표정의 준오만큼이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는 태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보인다.
‘젠장.’
욕설을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승진의 행동이 뚝 멈추었다.
“백 검?”
휴게실을 차지하고 있던 승진이 물러날 기미를 보이자 준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준오와 태현을 일어선 상태에서 내려다보던 승진은 다시 털썩, 착석한 후 준오에게 말했다.
“그럼 선배님들이 상담 좀 해 주시죠.”
“……어?”
“어디까지나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만.”
승진은 그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에 띄게 당황하는 준오와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는 태현을 번갈아 바라보다, 요즘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일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우영이 퇴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 들를 생각을 않는다는 것부터 시작해, 그와의 약속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는 약속이 생겼다든가, 혹은 평소에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받았던 전화를 일부러 없는 곳에서 받는다든가 하는 등등의 아주 사소한 일까지.
작은 일이지만 계속 신경에 거슬렸던 일들을 입 밖으로 언급하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안정을 되찾는다. 놀랍게도 홀가분해졌다.
말을 하니 좀 낫군.
승진은 제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굳어지는 준오에게서 눈을 돌리며 빙긋 웃으려 했다.
“고맙습…….”
“저기.”
응?
“백 검아.”
“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꺼내려던 승진이 창백해진 준오의 얼굴을 발견했다. 준오는 심각한 눈빛으로 미소 지으려던 승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친구의 애인이라는 사람 말이야.”
“……?”
“바람, 피우는 거 아니냐?”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준오가 툭 던진 단어 하나에 머리가 멍해진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인지라, 승진은 ‘예?’라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눈앞의 남자를 응시했다. 그런 승진을 걱정하듯 응시하던 준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백 검의 심기가 예사롭지 않았던 거군. 뭐, 그런 거라면…… 이해를 해 줘야지.”
“하 검.”
“아니, 그렇잖아. 유 검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이 녀석이 설명한 건 죄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의 행동들이라고!”
준오의 말을 듣고 있던 태현이 준오를 말리려 들었으나 단단히 화가 난 준오는 빽 소리를 질렀다. 승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준오는 경직된 승진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쓰게 웃는 태현에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이 녀석 친구의 애인이라는 사람 말이야. 자주 만나지 못하는 시점부터 연락하지 않았다며. 게다가 데이트 제안도 은근히 피하고, 휴가 제안도 다른 약속이 있다며 피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그 친구가 있는 앞에서 다른 사람의 전화를 받고 좋아하기까지 했다며! 그럼 당연히 다른 사람이 생겨서 그 친구와 헤어지려고 한다는 걸로밖에 안 보이잖아!”
확신에 찬 준오의 발언에 심장이 덜컹거린다.
그게 무슨…….
당황한 승진이 입을 뻐끔거리자 준오가 두 눈에 힘까지 주며 소리쳤다.
“백 검.”
“예?”
“그 친구 말이야. 평소에는 애인이랑 자주 연락하는 거 맞지?”
“네? 아…… 예, 뭐.”
자주 연락을 할 수밖에 없다. 옆집에 사는 데다, 일하는 곳도 바로 옆방이니. 요즘은 각자의 사건으로 인해 힘들기는 했으나 그 전까지는 남들 몰래 밀회까지 즐기며 붙어 있지 않았던가.
승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준오가 중얼거렸다.
“그럼 더 확실하네. 그 친구의 애인이라는 사람, 네 친구랑 헤어지려고 하는 것이 분명해. 아니면 양다리를 걸치고 있든가.”
더 들을 것도 없다며 쯧쯧, 혀를 차는 준오의 말이 심장을 파고든다.
양다……리라고?
‘신우영이?’
나를, 두고?
“그럴…… 리 없습니다.”
준오의 말이 설득력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승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가설을 부정당한 준오가 ‘뭐? 왜!’ 하고 외쳤지만, 승진은 굳은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 녀석은…… 절대로 바람을 피울 녀석이 아닙니다. 만나는 상대가 있는데 그런 부정을 저지를 만큼 도덕성이 결여된 녀석도 아니고, 또…….”
“이봐, 백 검. 무슨 순진한 소리를 하고 그래?”
“……예?”
“나야 뭐, 네 친구와 그 애인이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잘 모르는 입장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멀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아주 작은 계기로도 흔들리는 것이 연인 관계란 말이야.”
“……!”
“잘 생각해 봐. 근래 그 두 사람 사이가 흔들릴 만한 일은 없었어?”
“흔들릴 만한 일이라니…….”
“뭐, 예를 들어 그 친구가 애인에게 소홀했다든가, 아니면 작은 다툼이 있었다든가.”
작은 다툼이라니. 그런 것 따위 있을 리 없―
[승진아, 나는 더 이상 우리 관계 숨기고 싶지 않다.]
[하하, 인마. 갑자기 왜 답답한 소리를 하고 그래. 아직은 아니라니까.]
[…….]
[조금만 더 기다려. 노인네가 힘 잃을 날이 얼마 안 남았어.]
[…….]
[신가?]
설……마.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급격하게 굳어 가는 승진의 얼굴을 보던 준오가 쯧, 혀를 찼다.
“짐작 가는 게 있나 보네.”
승진은 대꾸하지 못했다. 설마하니 그런 일로 오랜 인연을 유지해 온 그들 관계가 무너질 리 없지만,
[저도 꽤 괜찮은 손주사윗감이라고 생각합니다.]
백 전 대법원장과의 만남 자리에 대뜸 들이닥친 우영이 그런 말을 내뱉을 정도면 엄청난 각오를 한 것이 틀림없다.
승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아직 네 친구가 애인에게 미련이 남았다면, 뭐 때문에 다퉜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사죄하라고 말해.”
“…….”
“혹시 아냐? 손발이 닳도록 슥슥 빌면 애인이 마음을 돌려서 다시 친구를 받아 줄지.”
조언을 하는 것이 분명한 준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내뱉었다. 그 말이 공기를 울려 승진의 귓전을 강타한다. 승진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오는 넋이 나간 승진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런데 백 검 너, 친구 일로 그렇게 성질을 부리고 있었던 거냐?’ 하고 한심하다는 듯 승진에게 인상을 썼다.
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들썩이는 바람에 승진은 입을 열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그건 아닌 것 같군.”
준오가 승진에게 하는 신랄한 말들을 듣고 있던 유태현 검사가 돌처럼 굳어 버린 승진을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아니기는? 내 말이 다 맞지!”
제 짐작이 맞다는 듯, 가슴까지 탕탕 두드리던 준오가 태현을 흘긋거리며 버럭 외쳤지만 태현은 그에 신경도 쓰지 않고 승진에게 말했다.
“백 검사,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그 사람’이랑 대화라도 해 보는 게 어때?”
……뭐?
“담아 두고 의심만 하다가는 오해만 쌓일 수 있어. 어쩌면 백 검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않아?”
부드러운 태현의 말이 가슴을 두드린다. 승진은 대꾸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유 검? 이건 백 검 얘기가 아니라 이 녀석 친구 얘기…….”
“하준오, 너는 가만히 있어 봐. 괜히 하 검 때문에 백 검이 더 헷갈려 하잖아.”
“뭐? 내가 뭘, 웁!”
태현은 황당해하는 준오의 입에 손을 떡 얹은 후 싱긋 웃으며 다시 승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일이 아니라 모든 걸 알 수는 없지만, 백 검의 말을 들어 보니 현재 두 사람에겐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 그러니 의문이 든다면 그 사람을 만나서 직접 물어보도록 해. 고민은 담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웁웁! 우웁!”
“시끄러워. 백 검, 그럼 우린 이만 가 볼게. 그리고 가급적 휴게실에서는 그런 음울한 기운 흘리지 말도록. 백 검이 그런 기운을 뿜을 때마다 다들 예민해지거든.”
승진은 여전히 준오의 입을 틀어막고선 자리에서 일어나는 태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휴게실을 벗어나며 두 검사들이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입을 다물어 버린 승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 * *
<오늘도 올 수 있겠나?>
어김없이 오후 8시를 넘기자마자 도착한 문자에 우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안 된다고 하면 실망할 것이 분명하므로 ‘알겠습니다.’라고 짧게 대꾸한 후 핸드폰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퇴근하십니까?”
얼마 전, 신우영 검사실에 새로운 실무관인 이희주가 발령받은 이후 눈에 띄게 안색이 좋아진 양우혁 계장이 활짝 웃으며 우영에게 말을 걸었다. 우영은 옷걸이의 슈트 상의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장님도, 희주 씨도 그만 들어가시죠. 퇴근 시간이 훨씬 지났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우영은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리를 시작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브리프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아, 두고 온 서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챙겨 갈 테니 먼저들 들어가십시오.”
동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던 우영이 돌연 생각난 사건 보고서를 떠올리며 말하자 두 남녀는 알겠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다 신우영 검사실로 몸을 옮기던 우영은 또각또각,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를 들으며 발을 뻗어 갔다.
[아직도 멀었습니까?]
[흥. 멀었다, 이 녀석아!]
[얼른 마무리를 지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려면 잔말 말고 협조를 하라고 했지?]
[생각 이상으로 끈질기시네요. 벌써 3주째입니다만.]
[여우 같은 놈. 내가 그리 호락호락할 줄 아느냐?]
신경질적인 노인네를 구슬리는 방법은 그리 쉽지가 않다.
‘큰일이군.’
근래 저를 바라보던 승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우영은 ‘……또?’라는 눈빛을 보내던 승진을 떠올리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가급적 빨리 마무리 짓는 것이 좋겠지. 저를 위해서, 그리고 승진을 위해―
“윽!”
쿵!
필요한 서류를 챙겨 검사실의 문을 닫고 나오던 우영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턱을 붙잡는 강한 손길에 저항할 틈도 없었다. 우영은 딱딱한 문에 부딪힌 등이 아려 옴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들고 있던 브리프케이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자마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려 들었으나,
“……!”
물컹한 무언가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파고든 바람에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우영은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부여잡고선 뜨거운 입김을 뿜어내는 인물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거칠게 파고드는 혀끝의 감촉은 지난 몇 달 동안 그가 머릿속으로 내내 그리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읍.’
어찌나 간절했는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앞이라는 것도 잊은 모양이다. 물론 이미 8시를 훌쩍 넘겨 본관 10층을 지나는 인물들은 없었다. 우영은 눈앞에서 흩날리는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진한 타액이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 상대의 것이 분명한 것이 제 것과 섞여 버리자 온몸의 피가 들끓는다.
이 자식이!
겨우겨우 참고 있는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 이런 공개적인 곳에서 유혹을 해 오다니.
우영은 그의 가지런한 치열을 훑으며 혀를 옭아매는 거친 숨소리를 들었다.
“하아, 하아.”
상대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코끝을 어지럽힌다. 제 안의 모든 것을 빨아 당기는 몸짓이 갸륵하기 그지없어 숨이 차오른다.
위험한데.
이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사람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고 눈앞의 상대를 눕혀 버릴 기세였다.
우영은 열려 있는 그의 셔츠 사이로 뻗으려던 제 손을 가까스로 멈추고선 제 목덜미를 감싸려는 상대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자제, 하지.”
씩씩거리는 숨결이 귀를 어지럽힌다.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끝으로 스윽 닦아 버리는 그의 행동이 야릇하기 그지없어 미간을 좁히게 됐다.
우영은 진한 욕망에 휩싸인 갈색 머리 사내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우영의 콧등까지 흘러내린 안경을 신경질적으로 낚아챈 남자가 인상을 썼다.
“퇴근하냐.”
“응.”
“집에 가는 건 아니고?”
“그렇지.”
“벌써 3주째군. 퇴근 후에 곧장 집으로 안 간 지가.”
짜증이 가득한 얼굴.
누가 봐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였다.
이제 슬슬 말해 줘야 하나.
우영은 잠시 고민했지만 ‘말하기만 해 봐!’라며 그에게 호통을 치던 사람을 떠올리곤 서늘하기 그지없는 승진을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꽤 굶주린 모양인데, 조금만 더 봐줘. 이제 거의 다 됐으니까 한동안만 더 참으면…….”
“닥쳐.”
뭐?
“신우영, 씨발 이 개자식아. 너는 대체 내 말을 뭐로 듣는 거냐?”
우영은 조금 전 제게 키스를 퍼부은 상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살의가 흘러넘치는 승진의 발언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승진은 지독하게 검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너는 내 거야! 아무한테도 안 줘. 죽어도 못 줘.”
아무래도 이곳이 청사 내, 그것도 두 사람이 각각 일하는 검사실의 앞이라는 것을 까맣게 잊은 것이 분명하다. 승진은 대답하지 않는다면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을 띠며 소리쳤다.
“근래 네놈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건지 모르겠지만, 만일 그게 바람이라면 네놈은 내 손에 죽는다. 아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 주지. 다시는 그런 마음을 못 품도록 철저하게 각인시켜 주겠어.”
“……뭐?”
대체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가.
대뜸 키스를 받은 것도 충분히 당혹스럽거늘, 이번엔 각인이라니. 우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제 멱살을 움켜쥐는 승진을 쳐다봤다. 살기에 찬 승진의 주먹에 핏줄이 튀어 올랐다.
“네놈과 어울린 상대가 멀쩡할 거라고는 생각 않는 게 좋아. 감히 이 몸의 것을 탐낸 놈에게, 아니 년일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그 하찮은 인생을 처참하게 짓밟아 줄 테니까.”
“하, 하하.”
“웃지 마, 이 새끼야. 뭘 잘했다고 쳐 웃어?”
잔뜩 약이 오른 승진의 눈은 이미 뒤집힌 상태였다.
‘정말 큰일……인데.’
심각한 상황임이 분명하건만, 어찌 된 셈인지 오싹하고도 짜릿한 감각이 심장을 잠식한다. 이런 희열은 실로 오랜만이라 생각하던 우영은 ‘그 입꼬리 안 내리냐!’ 하고 버럭 외치는 승진을 향해 짙은 미소를 그렸다.
“우리 승진이, 화가 많이 났군.”
“화? 이 새끼가 아직도 내가 장난치는 줄 아나. 당장 안내해.”
“안내?”
“네놈이 바람피우고 있는 그 자식 앞에, 날 데려가라고!”
‘자제가…… 안 되는군.’
폭발할 듯 들끓었던 마음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검은 밤을 밝히는 가로등이 눈앞을 스치는 장면을 멍하니 응시하던 승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대 앞에 앉아 있던 우영이 어딘가로 차를 몰고 있었다. 승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돌겠네.’
이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은 더 이상 혈기 넘치는 10대 소년이 아니었으니까.
흥분으로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20대도 아니었다.
지금의 백승진은 세상의 험난함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30대 청년. 아무리 짜증스러운 상황이 앞에 닥친다 한들, 태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저보다 못나 보이는 타인들과 엮이지 않으려 했던 그의 비좁은 마음을 오픈하지 않았던가.
과거의 그는 더 이상 없었다.
편협하고, 대놓고 남들을 깔아뭉개는 성격은 어떻게든 고치려 애썼다. 그 덕분에 근래 백승진의 인격에 대한 평판은 ‘대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대화는 가능한 사람’ 정도로 변했고, 좁았던 인간관계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적응될 만도 한데…….’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승진은 신우영이라는 남자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도통 이성의 제어를 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유치해지는 거지?’
스스로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빌어먹을.
상념에 잠겨 있던 승진의 미간에 불유쾌한 줄이 세 개 새겨졌다. 입술을 잘근 깨물며 동요하는 자신과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을 이어 가는 우영은 태연하기만 했다. 승진은 창문을 통해 바라보던 우영의 모습을 눈 안에 담다 눈꺼풀을 아래로 내렸다.
‘바보냐, 진짜.’
신우영이 저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바보 같은 감정을 품을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보고서도 미동 없던 우영의 검은 눈을 보자마자 피가 들끓었던 까닭은 자신을 피하는 듯한 그가 몹시 원망스러웠기 때문일까.
[현재 두 사람에겐 대화가 필요한 것 같아. 그러니 의문이 든다면 그 사람을 만나서 직접 물어보도록 해. 고민은 담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야.]
같은 부서 선배인 태현의 말을 듣고 깨달은 점이 있었다.
태현의 말대로 확실히 근래의 자신과 우영 사이에는 ‘대화’라는 것이 부족했다. 그것이 이 신경질적인 반응의 원인이라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었다.
사적인 일이 공적인 일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양이었으므로, 승진은 곧바로 우영과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는 머리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빠듯한 업무 시간 동안엔 그런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영의 퇴근 시간까지 기다렸던 것인데―
[보아하니 꽤 굶주린 모양인데, 조금만 더 봐줘.]
기습 키스를 강행한 승진을 보며 피식 웃는 우영을 보자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그래, 아마도 그런 까닭으로― 분명 대화를 할 생각으로 우영을 기다렸던 승진은 어느새 그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험악한 표정까지 지으며 바람난 상대를 눈앞에 대령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꽤 쪽팔리는군.’
두근거리던 심장이 안정을 되찾았다. 겨우 이성을 차린 승진은 뜨겁던 가슴이 안정을 되찾자 쓴웃음을 삼켰다.
불과 얼마 전까지 ‘네놈과 바람을 피우는 상대가 누구든 죽여 버리겠어―’라 외치던 입술은 꾹 다물어진 상태. 행동이 앞서는 자신의 성향이 죽을 만큼 부끄럽게 느껴지는 건 오랜만이다. 승진은 자신의 예민한 반응에도 덩달아 소리치지 않던 우영을 떠올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고요한 우영의 태도가 승진의 심장을 식히고 있었다.
‘바람이라니.’
말도 안 되지.
워낙 흥분했던 까닭에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 버렸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영이 바람을 피울 이유가 없었다.
근래 몇 달 동안 우영은 이정후의 측근으로 잠입하기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고, 검거 이후에는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동종 업계의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만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원래부터 남자한테 서는 놈도 아니고.’
만약 그날 자신과 엮이지 않았더라면 우영은 다른 남자들처럼 평범하게 여자들과 연애를 하고, 가정을 꾸린 뒤 아이를 낳고 살았을 거다. 저와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으니까. 그러니 우영이 공적인 일로 만나고 다녔을 남자들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을 리 없다.
그런데…….
[좋아, 데려가 주지.]
침을 튀겨 가며 외치던 승진에게 웃으며 대꾸하던 우영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속일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바람난 상대에게 안내하라 외치던 승진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영은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대신 거기까지 갈 차는 네가 제공해.]
그 말을 끝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우영의 모습은 황당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그 덕분인지 승진은 보통 때보다 빠르게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누굴 만나게 하려는 거지?’
우영이 운전대를 잡은 동안 머리를 굴려 봤다. 누군가를 만나게 해 주려는 것은 확실한데, 그 상대가 누구인지 조금도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번 스캔들로 공로를 인정받은 우영이 오 검사장과 어울리며 그의 측근들과 자주 만남을 가졌다던데, 혹 그 사람들에게 자신도 소개하려는 걸까? 아니, 그럴 일은 없다. 포지션 쟁탈전도 쟁탈전이지만 저보다 앞서 나가고 싶어 하는 우영이 일부러 자신을 그들과 엮어 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만나게 하려고?
‘짐작이 안 돼.’
저를 두고 다른 마음을 품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끙끙거리면서 눈을 내리감고 있던 승진은 ‘백가.’ 하고 부드럽게 저를 부르는 우영의 목소리에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야.”
“다 왔어.”
“어?”
“내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승진은 제게 말을 한 뒤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 우영을 멀뚱히 응시했다.
“아니면 내가 풀어 주길 원해?”
불만에 가득 찬 얼굴로 저를 노려보기만 하는 승진에게 우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승진은 ‘됐어!’ 하고 버럭 외친 후 안전벨트로 손을 뻗었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을 지탱하던 벨트가 풀렸다.
‘응?’
톨게이트를 벗어난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줄곧 저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보이는 곳이 웬 저택인지라 승진은 미간을 좁혔다.
“여긴 어디냐.”
어두운 주변과 달리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저택의 모습이 어딘가 낯익었다.
뭐냐고, 여기.
차에서 내린 승진은 이미 저보다 앞서 나가는 우영의 커다란 등을 응시하다 툴툴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에 멈춰 선 우영이 예리한 안경 너머로 그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어두워서 기억을 못 하나?”
“어?”
“일단 가지. 약속에 늦었어.”
약속이라니.
“이봐, 신…… 윽!”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승진을 향해 우영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팔목을 잡아끌며 커다란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거침없이 걸어갔다.
승진은 당황하면서도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아, 신 검사님. 오셨습니, 어머!”
우영의 손에 끌려 움직이던 승진은 제집처럼 현관문을 여는 그를 어이없이 바라봤다. 자주 들락거린 것처럼 행동하는 우영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아 눈만 끔뻑이고 있을 때, 문 여는 소리에 나타난 여자를 발견하고는 얼른 손을 떼려 했다.
‘큭.’
그러나 승진의 팔목을 잡고 있는 우영의 악력이 몹시 세서, 승진은 쉽게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승진은 저와 우영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여자의 모습에 움찔거렸다.
“어르신은 도착하셨습니까?”
“네. 한 시간 전에…….”
“감사합니다. 가자, 백가.”
“어? 어어.”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 집의 안주인이거나, 아니면 일하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상냥한 얼굴의 여인에게 다정하게 말한 뒤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는 우영은 낯설었다.
그나저나 어르신이라니.
‘그게 누군데?’
점점 더 우영의 의도를 알 수 없어진 승진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이, 신가. 잠깐만. 이 손 좀 놓지?”
궁금증을 참다못한 승진은 거침없이 걸어가는 우영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다 끝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젠장, 드럽게 아프네.
얼마나 세게 움켜쥐고 있었는지 승진의 굵은 손목에 선명한 선이 새겨졌다. 승진은 다른 손바닥으로 그 손목을 슥슥 문지른 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우영에게 날카로운 태도를 취했다.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소개하려는 사람을 만나게 하기 전에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리는 게 먼저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거냐?”
“아.”
“‘어르신’은 또 뭐야? 게다가 아까 그 여자는 누구고? 왜 너를 그렇게 반갑게 맞이하는 거야? 너, 솔직히 말해. 여길 대체 얼마나 드나든 거지?”
한번 시작된 의문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승진은 날카로운 눈으로 우영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이런 곳에 드나드느라 저를 그토록 방치했던 건가―라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어졌다.
승진이 음산한 기운마저 흘리며 눈에 힘을 주자 우영이 빙긋, 눈꼬리를 휘었다.
“저기.”
“뭐?”
“저기 들어가면 다 알게 될 거야.”
“…….”
“갈 거지?”
우영의 생글거리는 모습에 기분이 상해 입을 다무는 사이, 우영이 웬 방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발하는 것이 분명한 그 말투는 분명 제게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덥석 물지 않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먼저인 승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내뿜으며 우영을 지나쳤다.
성큼성큼.
우영이 가리켰던 방으로 걸어가는 승진의 발걸음에 주저라곤 없었다.
‘시시한 일이면 가만 안 두겠어.’
도무지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우영을 노려보던 승진은 예의 방 문고리를 덥석 잡고 돌렸다. 달칵, 수월하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그의 시야로 들어온 장면에 승진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신 검, 너 이놈! 왜 이리 늦어! 30분이나 늦을 거면 차라리 다른 날로 미루면 되지 않느냐! 하필 오늘 온다고 해서 바쁜 내가 얼마나 네놈을 기다렸는지 알기나……!”
승진은 이곳에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의 소리가 들려온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공에서 승진과 눈이 마주친 사람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갔다.
“진이?”
파르르 떨리는 눈가의 주름이 익숙하다.
승진은 저를 보고 들고 있던 바둑돌을 툭, 떨어뜨리는 백인우 전 대법원장을 황망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어떻게 할아버지가…… 여기 있지?
“신 검, 왔으면 들어가지 왜 거기 서 있…… 어? 진이 아냐?”
쿵쿵 뛰던 심장의 바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다. 이곳에서 백 전 대법원장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인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그가 너무도 존경하는 사람의 것이었다.
승진은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형?”
고개를 꾸벅이는 우영에게 옅은 미소를 짓고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은 틀림없는 승진의 큰형, 우진이었다.
승진은 난데없는 이 조합에 어리둥절해졌다. 할아버지에 형, 그리고 신우영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냐.’
주르륵,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승진은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눈빛으로 우영을 응시했다. 승진의 싸늘한 표정에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짓던 우영이 흠흠, 헛기침을 흘리고 있는 백 전 대법원장을 바라봤다.
“할아버님,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간 저는 할아버님께서 한 시간, 두 시간을 늦게 오셔도 계속 기다렸는데 말이죠.”
뭐?
“어허! 이 도둑놈 같은 녀석이 어디서 하늘 같은 나와 맞먹으려 들어! 이 할애비는 조금 늦어도 돼!”
“부조리하군요, 정말.”
“에잉! 잔말 말고 이리 오기나 해라! 진이까지 대동한 걸 보니 오늘 단단히 마음을 먹었나 보구만.”
“눈치채셨습니까? 전 오늘 꼭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결판이고 뭐고, 얼른 앉으라니까? 이러다 날 새겠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은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닌 듯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승진은 ‘그럼 응원해 줘.’ 하고 작게 속삭인 후 그를 스쳐 지나간 우영이 백 전 대법원장의 맞은편에 앉는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대체 이게…….
“진아.”
어떻게 된 일이냐―는 물음을 꺼낼 시간조차 없었다. 우영은 백 전 대법원장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선 백 전 대법원장과 흑돌과 백돌의 선택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나누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게 설명을 해 주지도 않고 백 전 대법원장과 대결 구도를 연출하는 우영을 쳐다보고 있을 때, 어느새 다가온 우진이 그를 불렀다. 승진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이 방에 들어오면 다 알게 될 것이라던 우영의 말과 달리 승진은 아직까지 이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진이 다가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오늘은 내가 백이다!’ 하고 외치고 있는 백 전 대법원장의 말을 끊고 그들에게 다가갔으리라.
승진은 말없이 웃으며 두 남자를 바라보던 우진이 제게로 시선을 돌리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우진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흑돌을 집어 들어 바둑판 위로 올리는 우영을 쳐다보다 승진을 향해 입술을 달싹였다.
“진이 네가 신 검사랑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고 들었다.”
“쿨럭!”
갑자기 시작된 바둑 대결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던 승진은 대뜸 정곡을 찌르는 우진의 음성에 기침을 시작했다.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콜록거리는 승진의 등을 우진이 차분하게 두드려 주었지만, 이미 대결로 들어간 백 전 대법원장과 우영은 그들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겨우 숨을 고른 승진은 안정을 되찾은 후 우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무슨 소리야, 형!’ 하고 하하, 웃고 싶었지만 우진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가라앉은 것으로 보아 이미 상황 파악이 다 끝난 듯싶었다.
속으로 젠장, 욕설을 삼킨 승진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우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인가 보군.”
이제 와 발뺌해 봤자 소용이 없다. 승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게 됐어.”
“얼마나 됐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
“근래는 아닌 모양이구나.”
“어…… 어.”
근래라고 할 수가 없다. 십여 년이 넘게 이어져 온 관계니까. 순간적인 감정이었다면 가족에게까지 오픈하지 않았을 거다. 물론 백씨 일가에만큼은 숨기고 싶었지만―
‘할아버지를 만나고 있었을 줄이야.’
하여간 속을 알 수 없는 놈 같으니.
백 전 대법원장과 바둑을 두고 있는 우영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진지했다. 시야로 들어온 그 광경이 지나치게 심장을 두드려서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승진은 구레나룻 쪽을 긁적이며 입술을 삐죽였다. 누가 보아도 수줍어하고 있는 티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승진이 의외였는지, 우진은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3주 전 신 검사가 할아버지를 찾아왔을 때, 마침 나도 같이 있었다.”
……어?
“할아버지와 지선 이후의 일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갑자기 찾아와 너를 달라고 하던 신 검사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뭐?!”
승진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조용히 좀 하거라, 진아! 집중을 못 하겠다!”
그런 승진을 향해 백 전 대법원장이 혀를 쯧쯧 차며 핀잔을 줬다. 얼떨결에 ‘예에.’ 하고 대답해 버린 승진은 픽 웃는 우영을 발견하고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자신과의 대화보다 백 전 대법원장과의 대결에 더 집중하고 있는 우영에게 왠지 다가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진을 응시하자 우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처음에는 네 인맥을 이용해서 연줄을 잡아 보려는 건 줄 알았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승진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는 놈이 우진에게 정상으로 보였을 리 없었다.
승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더구나. 마치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을 짓고 계셨지.”
“그게…… 무슨 소리야?”
승진이 놀란 표정을 짓자 우진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할아버지는 알고 계셨던 모양이더라. 너와 신 검사 사이를.”
“……!”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럼 그날, 자신의 필사적인 변명이 모두 허사였다는 건가.
백 전 대법원장이 승진의 애인을 유인하기 위해 마련했던 예의 두 번째 맞선 자리. 그때 난데없이 나타나 승진의 혼을 쏙 빼놓았던 우영의 일을 백 전 대법원장이 그냥 흘려 넘길 줄 알았다.
‘하긴, 고작 그런 변명에…… 속아 넘어갈 분은 아니지.’
승진은 자신과 우영을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바라보던 백 전 대법원장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삼켰다.
우진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어쨌든 당황하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두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신 검 같은 평범한 집안에 너를 줄 순 없다고 하셨고, 신 검은 제 입장을 고수하더군.”
“하, 하하.”
미친 새끼.
지난 3주 동안 자신을 방치하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는 줄 알았더니, 무려 그의 할아버지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저를 감쪽같이 속여 놓고.
‘말이라도 좀 하지.’
만약 알았더라면 자신이 도울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방해가 됐으려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영이 입을 다문 이유가 있었다. 승진은 백 전 대법원장에게 그들 사이를 밝히지 말자고 끊임없이 주장했고, 우영은 그 반대였다. 승진이 우영의 계획을 알았더라면 기를 쓰고 반대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그것을 알았기에 우영은 제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거겠지.
“그런데, 어째서 저런 꼴이 된 건데?”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보아도, 어째서 백 전 대법원장이 우영과 저렇게 진지하게 바둑 대결을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승진이 미간을 좁히자 옅게 웃던 우진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사람까지 동원해서 신 검을 너한테서 떨어뜨리려고 하셨지만 그걸 예상했는지 신 검이 포석을 잘 깔아 놓았더구나. 할아버지, 아니 우리 생각 이상으로 신 검의 입지가 꽤 단단했다. 하긴, 스타 검사를 잃을 수 없는 검찰청의 마음도 이해한다. 여의도 쪽에선 신 검에 대해 호의적이었거든. 그래서인지 할아버지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다. 최후의 방법으로 너한테 협박을 가할까도 생각하시는 것 같았지만…… 네가 어디 할아버지의 말을 들을 녀석이니.”
승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자신은 백 전 대법원장이 우영과 만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도 콧방귀만 뀔 것이었다.
생긋 웃던 우진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치가 일주일 정도 이어졌을 때, 신 검사가 다시 할아버지를 찾아와 제안을 하나 하더구나.”
“제안?”
“너를 상품으로 한 바둑 내기였다.”
“……!”
자신이 이곳에 도착했음에도 아무렇지 않게 바둑을 두고 있는 두 남자를 보며 설마설마했다. 그런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 버리자 어이없는 숨이 터져 나온다.
기함하는 승진을 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그리던 우진이 중얼거렸다.
“너도 알다시피 할아버지가 바둑광이시잖니.”
그래, 그랬다.
백인우 전 대법원장은 바둑이라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바둑 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것은 여사였고, 은퇴한 법조인들을 모아 바둑 모임을 만들어 회장으로 취임할 만큼 좋아했다.
그런 백 전 대법원장에게 바둑 내기를 제안했다니.
백 전 대법원장의 유일한 강점이자 약점을 파고든 우영은 그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친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시간이 나는 대로 대결을 펼쳐서, 총 일곱 번 이기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듣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너와 헤어지기를 원하셨고, 신 검사는 너와의 교제를 허락해 달라고 했어. 현재까지의 승부는 육 대 육. 오늘 대결에서 이기는 사람이 두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거다.”
“하? 뭐……라고?”
나긋나긋한 우진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냐. 승진이 당황하다 못해 헛웃음을 흘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개자식이.’
겨우 바둑 내기 따위에 나를 걸고, 포기하려 들어!
승진은 이를 악물었다. 침착한 표정으로 흑돌을 둘 곳을 찾고 있는 우영의 모습은 심장이 뛸 만큼 섹시했지만 자신을 속이고 이런 황당한 대결을 이어 간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먹을 불끈 쥔 승진은 당장이라도 바둑판을 뒤엎을 기세로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잠깐만.”
하지만 그런 승진의 움직임은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아 버린 우진에 의해 멈추었다. 승진이 ‘이런 대결 따위는 용납 못 해!’ 하고 음산한 기운을 표출했지만, 우진은 동요하지 않았다.
“진아.”
“왜!”
“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만,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으로 봐서…… 신 검이 장난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지는 않구나.”
“그게 무슨 소리야.”
승진이 인상을 쓰자 우진이 빙긋 웃었다.
“현재 할아버지께서는 신 검을 몹시 깔보고 계신다. 할아버지는 신 검을 상대로 수월하게 6승을 하셨지만, 신 검이 가져간 6승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이긴 거였거든. 그래서 오늘은 기어코 신 검을 함락시키려 하시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할아버지께서 가져가신 처음 여섯 번의 승리가 결코 할아버지의 실력이 신 검을 앞서서는 아닌 것 같아. 오히려 신 검 쪽에서 할아버지를 방심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였지.”
“형,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승진은 생글거리는 우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나도 신 검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밝혀진 이상 더는 싫지 않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하시지만 나는 진이 네가 행복하기를 원해.”
“형?”
“너도 알고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실력은 보통이 아니다. 하지만 신 검의 실력도 보통은 아니지. 이번 대결은 두 사람의 정신력에 달려 있어. 누가 먼저 흐트러지느냐에 따라, 이 대결의 승패가 갈릴 거다. 그렇다면 네 미래도 바뀌겠지. 만약 진이 네가 누군가의 손을 꼭 들어주고 싶다면…….”
……싶다면?
“지금 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지 않겠니?”
“하암.”
두 시간이 넘도록 이어지는 바둑 대결을 지켜보던 승진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 충분히 하품이 나올 만도 했다.
‘끝날 생각을 안 하는군.’
프로 기사 간의 대국도 아니건만 뭐 저리 진지한지. 바둑에 흥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던 승진에게 있어 지금 이 대결은 그저 지루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결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 승부의 결과가 자신의 장밋빛 미래와도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승부를 보겠다니.’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큰형 우진이 승진에게 알려 주었던 백 전 대법원장의 우영에 대한 압박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잘하시는 거. 전직 법관으로서 주변 인물들에게 은근한 압박을 가하는 거지.]
[압박?]
[예를 들자면, 신 검사의 라인을 망가뜨린다든가.]
[악질이군.]
자신의 친할아버지이기는 하나, 백 전 대법원장은 생각 이상으로 냉정한 면이 있었다. 집안에 이익이 되지 않는 인물들은 철저하게 내리쳐 간혹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족들마저 놀라게 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승진은 백 전 대법원장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이다.
[너를 상품으로 한 바둑 내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우영이 저를 두고 백 전 대법원장과 바둑 내기를 벌일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 만큼 무모했다. 바둑 내기라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바둑이 뭐냐고.
‘골 아프네.’
솔직한 심정으로는 고작 바둑 내기로 내 미래를 결정할 거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이 의아할 정도로 대결에 임하는 우영뿐 아니라 백 전 대법원장의 눈빛이 진지하다. 덕분에 승진은 생글거리는 우진과 나란히 앉아 그들의 모습을 잠자코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백중지세(伯仲之勢)군.”
“뭐?”
언제 끝나려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승진의 귓가에 우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바둑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흑돌과 백돌의 향연을 따분하게 지켜보는 승진과 달리, 우진은 이 상황이 몹시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진의 눈빛이 반짝이기까지 하는 것은 오랜만인지라 승진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초반엔 분명히 흑돌이 앞서는 형국이었는데 말이야.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돌이 두 집 정도 앞서고 있어.”
“흐응, 그래?”
“바둑의 세계에서 두 집 차이는 엄청난 거야.”
“어?”
“하지만 진이 네가 할아버지를 응원한다면야, 이대로 결과가 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뭐?”
구분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둑판 위에 놓인 저 돌들이 흑색과 백색이라는 것밖에 알지 못하는 승진이었지만, 우진의 중얼거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승진은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승진에게 미묘한 눈웃음을 짓고 있는 우진을 빤히 응시했다.
바둑은 정신과 집중의 승부다.
온 신경을 가로 42.42cm, 세로 45.45cm인 나무판에 고정시켜 가로와 세로로 19개의 줄이 교차한 점 위에 놓는다. 돌을 하나하나 놓을 때마다 엄청난 정신력을 요구하기에 약간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금세 전세 역전을 허용하기 쉽다.
[만약 진이 네가 누군가의 손을 꼭 들어주고 싶다면…… 지금 네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지 않겠니?]
두 시간 전, 우진은 어리둥절해하는 승진을 향해 그렇게 속삭였다. 그러더니 현재는 일부러 우영의 불리한 형세를 알려 주기까지 하며 은근히 승진의 돌발 행동을 부추기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대국을 이어 나가고 있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기는 꽤 난처했던지라 승진은 고민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신가가 패배하는 걸 관망하는 건 싫은데.’
지긋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정정한 노인네는 안경 너머로 예리한 눈빛을 뿜어 대고 있는 연인을 도통 봐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승진의 연인을 제게서 떼어 내려 하고 있었으니까.
그래, 뭐. 확실히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하나뿐이기는 하지.
그저 관찰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던 승진은 한참의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진아?”
우진은 승진이 난데없이 일어나자 입술을 달싹였다. 멈추지 않고 두 남자 쪽으로 걸어가던 승진은 우진의 부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비겁한 게 아니야. 그저 내 일을 지켜만 볼 수 없어서 행하는 거니까. 애초에 저 녀석이 날 데려온 이유도 그것 아니겠어?’
저도 관련된 일에, 아니 자신을 상품으로 건 내기에 제삼자인 것처럼 앉아 있는 건 도무지 성미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영이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이런 일을 예상했기 때문이라고밖에 짐작되지 않는다.
백 전 대법원장만큼이나 머리를 잘 굴리는 신우영을 승진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짓이냐, 진아. 할애비가 거기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갑자기 드리워진 바둑판 위의 그림자에 싱글벙글 웃고 있던 백 전 대법원장의 눈동자가 승진을 향했다. 승진은 말없이 미소만 실실거리더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윙크를 보냈다.
“뭐, 뭐 하는 게야!”
백 전 대법원장이 그런 승진의 행동에 움찔하며 마침 두려던 백돌을 허공으로 휘둘렀다. 승진은 당황하는 할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불리한 형국을 읽기 위해 바둑판 위로 시선을 꽂고 있는 우영에게 입술을 달싹였다.
“신가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우영이 고개를 든다. 무슨 꿍꿍이냐는 눈빛을 띠고 있는 백 전 대법원장의 의심스러운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은 승진은 허공에서 마주친 우영의 고요한 눈동자에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었다.
“승……!”
손가락이 닿은 우영의 턱 끝이 까칠하다. 자정에 가까워지니 거뭇거뭇한 수염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승진은 갑자기 제 턱을 부여잡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우영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헉!”
“오호.”
이내 소리를 낸 사람들은 승진과 우영이 아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백 전 대법원장과 우진 쪽이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입을 맞춘 적이 있었던가. 곰곰이 되짚어 보면 지난 몇 년 동안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은 언제나 숨기기에 급급했으니까. 승진은 입술에 닿은 부드러운 촉감에 피식 웃음을 삼켰다.
쿵쿵.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를 울린다. 고작 스치기만 했음에도 이렇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면 자신은 눈앞의 남자에게 엄청난 애정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코끝을 간질이는 우영의 숨결이 달콤하다. 마음 같아서는 턱 끝이 아니라 그의 양 볼을 부여잡고 혀를 집어넣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경악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는 백 전 대법원장이 기절을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아니, 기절보다 우영을 죽여 버리겠다며 날뛸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 정도로 해야겠지?’
1초, 2초, 3초. 그리고 몇 초가 흘렀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대결에 집중하느라 팽팽했던 방 안의 분위기가 자신의 도발로 인해 싸늘하게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떨어져 나올 시점이라는 것을 파악한 승진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며 우영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우영의 입술을 스윽, 손으로 닦아 주고선 눈꼬리를 휘었다.
“마지막 대결이라며.”
“…….”
“무려 이 몸을 두고 벌인 내기니, 당연히 승리하라는 의미에서. 지면 가만 안 둔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우영을 내려다보던 승진은 백 전 대법원장과 우진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간에 상관치 않고 우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기서 졌다가는, 네놈 따윈 평생 안아 주……!’
우영에게만 들릴 만한 작은 목소리로 말한 뒤 뒤로 물러나려던 승진의 몸이 갑자기 움직여지질 않았다.
“윽!”
승진은 돌아서는 제 허리를 기다란 팔로 감싸고선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비틀거렸다. 그의 엉덩이가 착지한 곳은 놀랍게도 승진을 기다리고 있던 우영의 단단한 허벅지 위였다.
승진이 다리에 힘을 주기도 전에 우영은 승진의 양 볼을 움켜쥐고선 고개를 숙였다.
“흡!”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승진이 입을 벌려 우영을 저지할 틈도 없이 우영의 말랑한 혀가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승진은 우영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전신을 마비시키는 저릿한 감각이 혈관을 통해 뻗어 나갔다. 우영의 혀가 입 안을 헤집을수록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하아.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하는 뜨거운 신음이 목구멍을 감돈다. 입가에는 타액이 흘러내리고 있건만, 닦을 겨를이 없었다.
승진은 멎어 버린 제 혀를 옭아매고, 강하게 빨아 당기는 우영으로 인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승진의 커다란 몸이 우영의 품 안에서 흐물흐물하게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빌어……먹을.
조금 전, 승진이 기습적으로 키스를 가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열기가 두 사람을 감돌았다. 지루해하던 승진의 얼굴이 붉어진 것은 당연지사. 우영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스치듯 보았던 바둑판 위의 돌이 아니었더라면, 승진은 우영의 목에 팔을 둘러 그의 셔츠를 벗겼을 것이다.
“하아, 하아―”
뜨거운 전율이 온몸을 휘감는다. 거친 숨을 터뜨리며 어깨를 들썩이던 승진은 제게 진한 키스를 가한 후 엄지로 입가를 닦는 우영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우영은 반쯤 풀어진 승진의 눈 위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추더니 그를 일으켜 주며 속삭였다.
“승리를 기원하려면 뽀뽀가 아닌 키스 정도는 되어야지.”
뭐?
“꼭 이길 테니 걱정 마라.”
승진은 그 말을 하고선 작게 웃는 우영의 안경이 살짝 흐트러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젠장. 할아버지와 형만 없었더라도 이 녀석을 눕혔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리를 장악할 무렵이었다.
“그나저나 할아버님.”
“……으응?”
“거기, 두신 거 맞으시지요?”
“무슨, 헉!”
일어나던 승진을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선 바둑판을 들여다보던 우영이 태연하기 그지없는 음성을 흘렸다. 승진의 나른해진 눈동자 역시 바둑판 위를 향했다.
‘흐응?’
바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승진이라지만 손에 쥐고 있던 백돌을 밀집된 곳이 아닌 텅 빈 곳에 떡하니 두어 버린 백 전 대법원장의 행동이 무리수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백 전 대법원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악수를 두셨네요.’ 하고 바둑판을 함께 들여다보던 우진이 백 전 대법원장의 부아를 돋우려는 것인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우영을 바라봤다. 저와 마주친 우영의 눈꼬리는 결코 휘어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실수를 하시다니. 갑자기 10집이나 손해를 보셔서 어떡해요, 할아버지.”
우진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말을 이었다. 승진은 우진이 알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건지 모르겠다고 여겼다.
하여간 형도 속을 읽을 수 없다니까.
“……놈들.”
응?
“이…… 이 파렴치한 놈들!”
100수가 넘는 동안 단 한 번도 실수라고는 하지 않았던 백 전 대법원장이 사과보다 더 빨갛게 익어 버린 얼굴로 승진과 우영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떨어져!”
노기 어린 외침을 흘리던 백 전 대법원장은 태연하게 앉아 있는 두 검사를 향해 이를 갈며 백돌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당장…… 당장 떨어지지 못할까! 이, 이 신성한 대국장을 더, 더럽히지 말란 말이다, 이 나쁜 노옴들!”
“할아버지께서 화가 많이 나셨어.”
한숨을 내쉬기는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는 음성이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 말에 승진은 ‘그래?’ 하고 오히려 되물었다. 우진의 눈에 미소가 맴돌았다.
“경건하게 치러야 할 바둑 경기를 망친 진이 네 얼굴 따위는, 앞으로 절대 보지 않겠다며 씩씩거리시더라.”
“하하.”
“사내새끼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쪽쪽거린다고, 아주 치를 떠시더구나. 신 검사 욕도 엄청 하시던데?”
“신가 욕을?”
“그런 염치없는 짓을 하는 놈을 어떻게 백씨 집안에 들이겠냐며 온몸을 부르르 떠시더군.”
승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럴 만도 하네. 사랑하는 손자가 키스 당하는 모습을 대놓고 목격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셨겠어.”
“아니, 그 이전의 문제지. 이번엔 진이 네가 심했어.”
“하지만 은근히 그런 상황을 바라고 훈수를 둔 건 형 아니었어?”
“…….”
“진짜 실행에 옮길 거라고는 생각 못 한 얼굴인데?”
승진은 제 질문에 말없이 미소 짓는 우진을 내려다봤다. 우진은 뜻 모를 표정으로 승진을 쳐다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네 입맞춤 정도면 됐었는데 말이야. 설마 신 검사가 그렇게까지 행동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 녀석, 얼굴은 금욕적이어도 꽤 밝히거든.”
“흠흠. ……알고 싶지 않았던 동생의 성생활까지 들은 기분이구나.”
“익숙해져. 할아버지 앞에서 오픈했으니 난 이제 대놓고 즐길 생각이라고.”
“뻔뻔한 녀석.”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우진은 그의 말에 화를 내지 않았다. 승진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저택을 응시했다.
“어디서 많이 본 저택이다 싶었는데, 할아버지 건 줄 방금 알았어.”
대형 사고를 치고 나서야 이 저택이 어떤 곳인지 깨달았다. 승진은 ‘당장……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이 망할 놈들아!’라고 외치던 백 전 대법원장의 붉어진 얼굴을 떠올리며 낮게 쿡쿡거렸다.
이곳은 백 전 대법원장이 승진이 태어나자마자 구입했던 경기도의 한 저택이었다.
날이 밝으면 이 저택 뒤편의 호수 표면이 아침 햇살을 받아 잔잔하게 반짝인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러 왔을 때 그 빛나는 호수를 멍하니 응시했던 기억이 있다. 작은 소년이었던 승진은 ‘이곳이 좋니?’라고 묻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언젠가 자신이 크면 이곳을 할아버지에게서 얻어 내겠다고 호언장담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낯이 익었던 거군.
승진은 ‘어디 내게서 가져갈 수 있다면 해 봐라.’ 하며 제 머리를 슥슥 쓰다듬던 백 전 대법원장을 떠올렸다.
“신 검사가 바둑 대결을 제안하자, 할아버지께서 대국 장소로 이곳을 고집하셨어. 진이 네가 좋아했던 곳이라고 하시더군.”
우진은 상념에 잠긴 승진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승진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 신 검사한테 거의 넘어오셨어.”
“……!”
“그간 신 검사도 많이 노력했거든. 아마 오늘 대결에서 졌더라도, 두 사람 사이는 인정해 주셨을 거야. 생각보다 신 검사가 마음에 드신 모양이야.”
흥, 당연하지.
‘누가 고른 놈인데.’
승진은 왠지 자신의 콧대가 올라가는 것을 꾹 참으며 우진의 말을 듣고 있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봐. 막내 손자라면 사족을 못 쓰시는 분이니 의절이다 뭐다 해도 곧 연락하실 테니까.”
“그런 걸 알면서 나를 부추겼어?”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생글거리는 우진은 아마 백씨 일가 중에서 가장 능구렁이 같을 것이다. 하긴, 그러니 그 뱀들이 가득한 여의도에서 살아남은 것이겠지.
승진은 미소 짓는 우진을 쳐다보다 손을 휘휘 흔들며 몸을 돌렸다.
“느긋하게 기다릴게.”
“조심히 들어가렴.”
백 전 대법원장과 함께 자고 가겠다며 저택에 머무는 우진에게 인사를 한 승진은 우영이 기다리고 있는 차고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
자정을 훌쩍 넘겨 버린 밤하늘엔 눈부신 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별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남자는 칠흑같이 어두운 차에 몸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으으. 고요하던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해서 입술을 살짝 깨물던 승진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기다렸냐.”
인기척을 느낀 상대가 고개를 돌려 승진을 응시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우영의 검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말없이 웃음 짓는 우영을 쳐다보던 승진은 입술을 삐죽였다.
“어이.”
“……?”
“너 인마. 아무리 내가 먼저 시작한 도발이라지만, 그 상황에서 키스는 너무하지 않았어?”
“그랬나.”
“그랬지! 우리 할아버지가 심장마비라도 걸리시면 어쩔 뻔했냐고.”
“그럴 분으로는 안 보이시던데.”
“이봐, 노인네들은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고.”
“그럼 앞으로 주의할까?”
“……어?”
“할아버님 앞에서는 너한테 일절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내,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 언제 금지하라고 했냐?”
하여간 이 녀석은 너무 나간다니까.
승진은 픽 웃는 우영에게서 시선을 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고요해진 틈을 타 중얼거렸다.
“바람이 아니었다면 말이라도 해 주지. ……쪽팔리게.”
우영에게 화까지 내면서 도착한 곳이 하필 할아버지의 경기도 별장이었고, 우영이 저 몰래 자신을 두고 협상까지 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후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른다. 매번 숨기자고만 하던 자신과 달리, 우영은 저와 계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미안해져 중얼거리자 우영이 낮게 웃으며 대꾸했다.
“바람을 피운다고 한 적은 없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영은 바람난 상대한테 안내하라고 하는 승진에게 데려가 주겠다고만 했고, 약속대로 그를 이곳까지 데려와 줬으니까. 멋대로 오해하고, 멋대로 망상하며, 멋대로 화를 냈던 것은 자신이다.
승진은 나지막한 그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며 우영의 옆에 몸을 기댔다.
“신가 네놈과 관련된 일이면…… 머릿속이 엉망진창이 돼.”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온몸이 저릿해지는 우영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네놈과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요만큼도 안 드는 걸 보면, 나도 꽤 중증이지 않냐?”
옅게 미소를 흘리며 승진은 고개를 옆으로 옮겼다. 별처럼 반짝이는 우영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치자 심장이 덜컹거렸다.
아, 제길. 또다. 승진은 쿵쿵 뛰는 심장박동에 무의식적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허공에서 부딪친 우영의 눈동자도 저 못잖은 욕망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런 눈빛을 마주하면 참을 수가 없는데―
“중증인 건 너뿐만이 아니야.”
갈증이 치밀어 올라 입맛을 다시던 승진은 귓속을 뒤덮는 우영의 목소리에 움찔거렸다.
“벌써 몇 년째, 백가 네게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잖아.”
사로잡혀?
승진은 미묘한 단어를 사용하는 우영을 응시하다 피식 웃었다.
“확실히 내가 마성의 인물이긴 하지.”
“……낯짝은 좀 두껍지만.”
“어이.”
“오늘은.”
응?
“오늘은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나는 질 생각 없어.”
나지막한 우영의 음성에 툴툴거리던 승진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우영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할아버님께서 흥분을 가라앉히시면 오늘 경기에 이어 남은 경기를 펼칠 거다. 새로 시작할 마음은 없어. 할아버님의 실수로 인해 내게 기운 대국이었으니까.”
“풋. 이봐, 그걸 할아버지가 동의하시겠냐?”
“동의하실 수밖에 없을 거야. 흑돌과 백돌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놓여 있었는지 기억하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니까.”
한번 본 것을 기억하는 비상한 머리를 지닌 사람은 우영의 말대로 그뿐만이 아니었다. 승진과 우영의 스킨십에 기겁하며 악수를 두고 바둑판까지 흐트러뜨리기는 했으나, 판 위의 상황을 암기하고 있던 사람은 우진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아마도 우영이 우진을 증인 삼아 남은 대결을 이어 가자고 한다면 백 전 대법원장도 발뺌할 수 없을 것이다.
‘으응?’
우영이 이렇게 영악한 수를 쓸 때면 이상할 정도로 혈기가 치솟는다. 그의 몸 구석구석을 핥아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슬슬 돌아가는 게 어떠냐?’라는 말을 건네려 할 때였다.
“이, 인마. 너 뭐 하는― 흣!”
승진은 갑자기 뒷좌석의 문을 열더니 저를 뒤로 밀치는 우영을 황당한 표정으로 올려다봤다.
“백가.”
“어어?”
“다른 사람에게 너를 주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
난데없이 무슨 소리를 하나 싶더니, 귀를 울리는 우영의 말이 머릿속을 하얗게 만든다. 고요한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뒷좌석에 등을 맞댄 승진이 그의 위로 올라타려는 우영을 바라봤다.
“네가 도망치면 포획해 올 거고, 돌아서면 붙잡을 거다.”
“……하?”
“나는 너를 놓아줄 생각 따위 없어. 저번 일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됐다. 난 네가 맞선 보는 건 이제 죽어도 못 봐. 그러니 앞으로 네 일이라면 뭐든 관여할 거다.”
승진은 이글거리는 눈을 빛내는 우영에게 픽 웃음을 흘렸다.
“맞선은 두 번 다신 안 본다니까.”
“일이든.”
“…….”
“……가족사든, 취미든…… 뭐든. 너와 관련된 일에는 항상 내가 개입할 거다.”
마치 맹세하듯 말을 뱉어 내는 우영의 눈빛이 너무 진지했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것을 꾹 참으며 승진은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는 우영의 뺨이 뜨겁다. 승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신가, 공과 사는 명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었냐. 예전 말과는 어폐가 있는데.”
생글거리는 승진에게 우영이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딴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앞으로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마.”
미친놈.
백승진과 신우영의 관계에서 미친놈은 저뿐인 줄 알았는데, 단단히 미친놈이 하나 더 있었다.
승진은 그 말을 끝으로 제 입술을 손끝으로 지분거리는 우영을 올려다봤다.
[이, 이 빌어먹을 놈들! 한 놈은 늑대고, 다른 한 놈은 여우나 다름없구나! 아니, 두 놈 다 늑대 혹은 여우인 거냐! 당장 사라져! 할애비 앞에서 못 하는 짓이 없어!]
늑대 혹은 여우.
보다 완벽하게 자신을 가지기 위해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군림하는 백 전 대법원장을 구워삶으려 했던 것을 보면 늑대보다는 여우에 가까우려나.
“……여우 자식.”
승진은 ‘그런 의미에서 할아버님께는 절대로 지지 않겠어.’라며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우영을 바라보다 피식거렸다.
“이왕이면.”
“읏!”
그러자 슥, 자신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친 우영이 굳어 버린 승진의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난 여우보다는 늑대로 불리는 게 좋다.”
“뭐?”
그 말을 한 뒤 승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 우영에게 주저란 없었다.
“핫!”
승진은 난데없이 벌어진 우영의 기습에 크게 당황하면서도 그의 숨결이 닿자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반동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아, 아니…… 자, 잠깐. 갑자기 왜 거기서 핀트가 나간, 흡! 우영아, 카섹……스, 조, 좋아. 좋은데, 왜 하필 여기, 읏!”
차라리 별장에서 좀 벗어난 도로라면 모를까, 차고에서 이런 일을 벌였다가는 떡하니 존재하는 CCTV에 찍힐 수도 있는―
“으윽.”
목덜미에서 쇄골 쪽으로 점점 옮겨 가는 우영의 혀끝에 온몸의 털이 쭈뼛거렸다. 반응하고 싶지 않건만, 우영과 스쳤다는 이유로 움직이는 허리는 그에게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승진은 우영의 혀 놀림 하나로 꿈틀거리기 시작한 다리 사이의 반응을 느끼며 인상을 썼다.
이대로라면 진짜 당하겠……!
“승진아.”
대검찰청으로 인사 발령이 나지 않은 지금 이 상황에서 완전히 결판이 난 것은 아니다. 승진은 자연스럽게 제 바지 버클을 풀려 손을 움직이는 우영에게 미간을 찌푸리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영의 검은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친다. 우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승진에게 다가오며 속삭였다.
“사랑한다.”
……!
“사랑해.”
단 한 마디였지만 마음을 울리기엔 충분하다.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그 진심 어린 음성이 발버둥 치며 반대 상황을 연출하려던 승진의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게 만든다. 깔리는 게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뭐…… 상관없나.’
귓가를 맴도는 우영의 고백이 반항하려던 의지를 무너뜨린다. 승진은 칫, 하고 잇소리를 흘리다 브리프를 내리는 우영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촉, 우영의 볼에 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자 우영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승진은 놀란 우영의 허리를 기다란 다리로 감싸며 싱긋 웃었다.
“좋아. 오늘만큼은 안겨 주지.”
……너니까.
“하지만 심하게 아프면 바로 뒤집어 버린다.”
내 마음을 뒤흔드는 놈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신우영 네놈밖에 없으니까.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
그런 네놈이라 깔려 주는 거야.
“나도…….”
널, 사랑하니까.
‘그렇다고 영원히 깔려 줄 거라는 생각은 마라. 인사이동까지 시간이 남은 만큼, 나 역시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안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안는 재미를 포기할 수는 없지.
양팔을 벌려 환영의 의사를 전하던 승진은 그런 제게 거침없이 달려드는 한 마리의 늑대를 향해 위와 같이 속삭이려다 말았다.
일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즐기게 내버려 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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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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