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유혹(誘惑)과 유인(誘引) 사이 (9/15)

7. 유혹(誘惑)과 유인(誘引) 사이

“그게…… 무슨 소리지?”

우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승진을 올려다봤다. 누워 있는 우영과 달리 어느새 검정색 가운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승진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생긋 웃었다.

“말 그대로.”

“안서호한테 애인이…… 있다고?”

“어.”

“네 맞선 상대?”

“응.”

“이정후의 변호사?”

뭘 이리 놀라시나.

“그렇다니까.”

옅은 미소까지 흘리는 승진과 달리 우영의 얼굴은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벙쪄 있었다.

아, 이렇게 당황하니…….

‘뭔가 귀여운데.’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당황한 우영의 떨리는 눈동자가 보인다. 갈증이 일 정도로 탐스럽게 일렁이는 눈빛에 찌르르, 전율이 일었다.

‘안고 싶어…….’

몇 시간 전까지 우영의 엉덩이 사이로 쉴 새 없이 제 것을 밀어 넣었음에도 여전히 부족했다. 하긴, 이 녀석에게는 평생 쉬지 않고 박아도 모자라지.

승진은 말을 잇지 못하는 우영을 바라보더니 스윽, 혀끝으로 입술을 쓸었다.

“윽.”

그런 승진의 노골적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우영이 인상을 쓰자 그는 풋 웃어 버렸다.

어지간히 경계하는군.

이미 몇 번이나 그의 안을 휘저었던 터라 오늘은 이쯤에서 봐주기로 한 승진은 탐욕이 서린 눈빛을 거두어들였다. 승진의 열기가 가시는 것을 확인한 우영이 짧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서호 씨가 나랑 맞선을 보기로 한 건 나한테 상담을 받기 위해서였다더군. 내가 남자랑 붙어먹는다는 걸 어디서 들은 모양이야.”

“어디……서?”

“알 게 뭐야. 그 사람 말로는 백씨 집안 막내가 게이라는 건 이 세계에서 유명하다던데. 뭐, 할아버지가 그간 엄청 난리를 쳤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겠군. 게이 손자 인간 만들어 보겠다며 정·재계 여자들은 다 들쑤시고 다녔으니.”

“…….”

“어쨌든 그래서 상담해 주느라고 늦었어, 그제는.”

우영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승진을 쳐다본다.

또 못 믿네.

“못 할 거 없잖아. 따지고 보면 이쪽 세계에서는 내가 선밴데 그런 상담 정도야.”

길게 하품까지 하며 목덜미를 벅벅 긁던 승진은 우영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우영 옆의 베개 위로 털썩 등을 댔다. 그런 승진을 우영이 신경 쓰는 것이 느껴진다.

승진은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신우영을 제외한 타인에게는 기본적으로 관심 따위 가지지 않는 승진이었으나, 안서호가 뱉어 낸 말들은 꽤 흥미로웠다. ‘남자랑 남자는 어떻게 섹스를 하죠?’부터 시작해서, ‘데이트는 주로 어디서 해요?’라든가, ‘어떤 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요?’ 등등. 이제 막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설렘이 느껴지기까지 해서, 저도 모르게 안서호와의 대화를 이어 가 버렸다.

뭐, 우영이 이다지도 질투하는 줄 알았으면 아마도 자제했을 테지만.

[백승진 씨는 지금 만나고 계신 분을 아주 소중히 여기시나 보네요.]

[무슨 소립니까?]

[그렇게 느껴져요.]

자신과 우영에게 있었던 어릴 적 감정까지 떠올리며 성실히 대답을 해 주자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안서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잠깐 놀라기는 했으나 굳이 부정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승진은 ‘흐음.’ 하고 눈을 아래로 내리깐 우영을 흘긋거렸다.

비교적 편한 차림으로 출근을 하는 자신과 달리, 우영은 다른 이들에게 트집이 잡히는 것을 기본적으로 꺼렸다. 머리를 내리면 훨씬 더 젊어 보일 텐데, 그것이 싫다며 내내 머리를 올리고 다녔다. 타인에게 얕보이기 싫다면서 도수 없는 안경까지 끼고 다니는 우영은 현재 승진의 아래에서 숨을 헐떡인 후에야 기다란 머리카락을 내리고 있다.

“왜.”

뒤늦게 승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음을 인지한 우영이 고개를 돌려 승진을 바라봤다. 승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내저은 후 멀뚱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안서호 씨, 그 사람 말이야. 여태까지 남자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나 봐. 그러다 이번에 처음으로 남자를 사귀게 됐는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가르쳐 준 거였어. 이것저것. 뭐…… 내가 본래 타인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간곡히 부탁하는 사람을 어떻게 외면하겠냐? 나도 예전의 백승진이 아니라 이거지.”

백승진 성격 참 좋아졌다. 관심도 없는 사람 앞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조언을 해 줄 정도면.

이틀 전의 일이 떠올라 흐뭇하게 웃던 승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난 신가를 만난 뒤 참 많이 변했단 말이지.

“서호 씨한테 얼핏 듣기로는, 그쪽도 앞으로 꽤 험난하기는 하더…… 큭!”

나지막하게 말을 흘리던 승진은 갑자기 가운의 칼라 부분을 움켜쥐는 우영의 손길에 몸을 앞으로 쏟아야 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승진에게 우영이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했지.”

뭘?

“성, 붙이라고.”

“……!”

승진은 그 말을 끝으로 쳇, 하고 투덜거린 후 침대를 벗어나는 우영을 멀뚱히 바라봤다. 벌거벗은 상태로 침실을 나서기 위해 뚜벅뚜벅 걷고 있는 우영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마지막 뒤처리까지 확실했는데, 너무 박아 댔나.

“우영아.”

승진은 막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던 우영을 결국 불러 세웠다. 흐으, 하고 짧게 신음을 흘리던 우영이 왜 그러냐는 듯 뒤를 돌아보자 승진이 이불 위로 턱을 괴고 누워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너 질투하는 거 진짜 보기 좋더라.”

“뭐?”

“특히나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흘리는 욕설. 와, 그거 진짜 미치겠더라고. 피가 거꾸로 흐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제야 이해 가던데? 큭큭.”

“…….”

“그래서 그러는데, 앞으로 그런 질투 자주 해 주면 안…… 윽, 인마!”

미소와 함께 말하던 승진은 갑자기 허리를 굽혀 널브러져 있던 양말 한 짝을 제게 집어 던지는 우영을 향해 얼굴을 구겼다.

이윽고 우영이 부드득, 이를 갈더니 사납게 일갈했다.

“씻고 나올 때까지 닥치고 전화나 걸어.”

“전화?”

“만나야 할 거 아냐, 안서호랑!”

맞다.

* * *

“여깁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을 움켜쥐고 있던 승진이 마침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출입구 쪽에서 승진을 발견한 안서호가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 후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딱 네 취향의 얼굴이기도 하고.]

취향……인가?

승진은 짧은 시간 동안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안서호를 위아래로 훑었다.

확실히 안서호라는 사내는 처음 승진이 그를 보고 느꼈던 것처럼 예쁘장한 외모를 지니기는 했다. 멋지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 다리 사이에 달려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지는 않겠지만 말이지.

선도 굵다기보다는 고운 느낌을 준다. 여자들보다 하얀 얼굴과 목덜미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색기가 돌았고, 웃고 있지만 속을 읽을 수 없는 연갈색 눈동자는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면 미묘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안는다면 저런 쪽이 편하기는 하겠지.

그렇지만…….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의 취향이라는 우영의 말엔 수긍할 수가 없다. 우영만 보면 웅크리던 용이 용솟음치는 것과 다르게, 다가오는 안서호를 봐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저 ‘아, 조금 예쁜 사람이군.’이라는 생각을 할 정도니까.

‘신우영이 더 섹시하지.’

안서호처럼 호리호리한 몸보다는 탄탄한 우영의 근육과 살갗을 스치는 것이 더 기분 좋았다.

‘정복하는 맛이 있기도 하고.’

자신과 똑같은 체격에 똑같은 눈높이를 지닌 우영이 제 아래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뱉어 내는 신음 소리는 세계 최고로 황홀했다.

[너…… 흐으, 씨발…… 진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입술을 악물며 흘리는 우영의 교성은 승진의 털을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더욱더, 지금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욕망이 치밀어 오를 정도니까.

제어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친 듯이 우영을 탐하던 제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

큰일인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할 사이도 없이, 끊임없이 욕설을 흘리며 제 것을 받아들이던 침대 위에서의 우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아 피가 한쪽으로 쏠렸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바지 앞섶에서 느껴져 끙, 숨을 참고 있던 승진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우영이 저를 미친놈처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승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

“저기.”

“1분 준다. 꺼져, 변태 새끼.”

매정하긴.

승진은 신랄하기 그지없는 우영의 욕설을 들으며 방긋 미소 짓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브리프케이스로 대충 앞섶을 가린 후 엉거주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승진 씨, 어디 가세…….”

“서호 씨, 미안하지만 저기 저 사람이랑 대화 좀 하고 있을래요? 자세한 건 저 친구가 말해 줄 겁니다.”

“네?”

“금방 오겠습니다. 1분이면 돼요.”

승진은 깜짝 놀라 저를 올려다보는 안서호에게 말한 뒤 카페 내부의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다.

한편, 우영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미친 새끼. 정신 나간 새끼. 발정 난 변태 새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갑자기 발기를 한 건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안서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뭔가 변하던 승진의 눈빛이 제게 꽂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지경이었으니까.

‘또라이…… 새끼.’

누가 기회만 되면 자신을 눕히려 안달이 나 있는 놈 아니랄까 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발정을 해 버린다.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다는 그 눈빛은 또 뭔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우영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승진을 더 이상 생각 않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그때였다.

눈앞에 놓인 커피 잔으로 손을 가져다 대려던 우영은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출입구 쪽에 있던 안서호가 제 앞에 멈춰 서선 빙긋 웃는 모습이 보였다.

이 녀석이 안서호로군.

과연 사진대로다. 깔끔한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 기본적으로 달고 있는 옅은 미소.

안서호가 흘리는 유려한 미소는 상대의 경계를 풀 수 있게 만들지 몰라도, 제게는 통하지 않는다.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 기분 나쁜 감정이 치솟아 미간을 꿈틀거리던 우영은 곧 생각을 거두어들였다.

현재는 공무 수행 중이니 사적인 감정은 치워 두자고.

“안녕하십니까, 안서호 씨. 신우영입니다. 백승진 씨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 그럼 그쪽 분도.”

“예. 같은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부정하지 않고 긍정의 답을 한 우영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안서호가 손을 내밀었다. 우영은 제 손을 스스럼없이 잡고선 악수를 하는 안서호를 응시했다.

“안서호예요. 한서 전자 전담 변호사이기도 하고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사장님의 전담 변호사지만요.”

우영은 알고 있다는 듯 몇 번의 악수 끝에 서호의 손을 놓아주었다. 착석을 제안하는 우영의 말에 미소와 함께 자리에 앉은 서호가 마침 메뉴판을 들고 다가온 직원에게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승진 씨한테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이미 1분을 훌쩍 넘겼지만 승진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다. 이 자식, 왜 이렇게 늦어? 인상을 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던 우영은 주문한 커피가 제 앞에 도착하자마자 입을 여는 서호를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왜 그렇게 보시죠?”

서호가 당황하는 우영을 보고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주저하던 우영이 물었다.

“승진 씨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우영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자 서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승진 씨와 제가 만나는 자리에 함께 오실 정도면, 우영 씨는 틀림없이 승진 씨가 신뢰하는 분이라는 소리겠죠. 저는 이미 승진 씨께 승진 씨를 도와드린다고 했고, 그렇다면 결국 우영 씨도 믿어야겠죠. 그러니 한배를 탄 우영 씨와 먼저 대화를 나눠도 딱히 문제 될 건 없어 보이는데요.”

말을 마친 후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는 서호의 눈동자가 고요히 일렁였다. 우영은 입을 다문 채 미간을 좁혔다.

역시 이 자식…….

‘마음에 안 들어.’

“이정후 씨가 부사장으로 있는 한서 전자에서는 언제부터 일하셨습니까?”

담담한 우영의 질문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서호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요. 몇 년 전인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음,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올해로 5년째가 되네요.”

“실례지만 나이가?”

“서른셋입니다.”

“연수원은 몇 기신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39기요.”

39기……. 우영과 승진이 42기니 눈앞의 남자는 정확히 따지면 두 사람의 선배였다.

물론 서호의 퇴소 시기와 두 사람의 입소 시기가 한 해 정도 엇나가 있어 연수원에서 마주칠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안서호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을 리 없는데, 어째서 이 남자의 존재에 대해 몰랐지?

우영은 입을 다물었다.

“사시 합격 이후 대학을 중퇴했거든요.”

그런 우영의 의문을 해소해 주겠다는 듯 서호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우영은 물끄러미 서호를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빙긋 웃는 서호에게 ‘생각보다 어려 보이시는군요.’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20대 중후반으로 보이건만, 자신보다 두 살이 더 많다니.

‘하긴, 그랬다면 한서 변호사 일을 할 리가 없겠군.’

우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얼굴로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이정후 씨와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초등학교 동창이에요. 뭐, 그 전부터 건너건너 아는 사이이긴 했지만. 우영 씨도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쪽 세계가 좀 좁잖아요? 자주 얼굴을 부딪치다 보니 친구가 됐죠.”

안서호가 뱉어 낸 ‘친구’라는 단어가 살짝 불안정했다. 우영은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낸 후 생각을 정리했다. 어릴 적부터 알아 온 사이라 이건가.

‘조금 곤란한데.’

친구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두 사람에게 꽤 문제가 있는 걸지도. 그게 아니라면, 혹시 이번 사건을 짐작하고 방해하려는 수작일 수도 있다.

우영이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돌려 묻지 않겠습니다. 이정후 씨와 각별한 사이십니까?”

그 말에 서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일렁였다. 우영은 대답을 기다렸다. 흐응, 하고 묘한 콧소리를 흘리던 안서호가 대답했다.

“글쎄요. 따지자면 그런 건가. 아, 그렇다고 해서 지인 찬스로 전담 변호사가 된 건 아닙니다. 이정후는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성격이어서요. 오히려 자기랑 가까운 인물들과는 함께 일하지 않죠. 덕분에 한서 법무팀 변호사에서 그 녀석 전담 변호사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어요. 어찌나 엄격하던지……. 뭐, 어쨌든 지금은 그 녀석의 일을 대신 봐주고 있으니 이제는 저를 믿고 있기는 하겠네요.”

“안서호 씨는 아니라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놀랍게도 안서호는 속내를 읽기가 힘들었다. 

우영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

안서호는 그런 우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신경이 쓰인 우영이 ‘안서호 씨?’ 하고 그를 부르자, 생긋 웃던 서호가 다시 대답했다.

“이상하네요.”

뭐가.

냉랭한 우영의 시선에 끄떡도 않고 서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이곳까지 나온 건, 백승진 씨의 간곡한 부탁이 있어서예요. 승진 씨는 이번 일에 제 협조가 필요하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지금 우영 씨가 제게 취하고 계시는 행동은 꼭 범죄자를 다루는 취조같이 느껴지는군요.”

“……!”

“제 착각일까요?”

스윽 올라가는 서호의 입꼬리를 보며 우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연갈색 눈의 사내를 응시하는 우영의 눈동자 또한 어느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까부터 느꼈던 기분 나쁜 감각이 등 뒤로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저보다 체격은 작으나 그가 은연중에 풍기는 기운은 쉽게 다루기 힘들었다. 특히 시선을 피할 줄 모르는 서호는 꼭 자신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았다.

그래서 짜증스러운 건가.

‘가면.’

타인을 대할 때 우영이 착용하는 가면처럼, 안서호 역시 비슷한 것을 착용하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다른 이들이 자신과 대화를 하면 이런 기분을 느낄까. 우영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안서호를 향해 피식 실소를 흘렸다.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 웃음에 서호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우영은 서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승진 씨한테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비밀 엄수가 기본입니다. 요즘 저희를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말입니다. 자칫하다가는 정보가 새어 나갈 수 있어서 미리미리 조심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설마 안서호 씨께서 협조를 해 주실지는 몰라서, 제가 조금 예민했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금방이라도 일어나 허리를 굽힐 태세로 우영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서호가 풉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까지 사과하실 필요는 없어요. 괜찮습니다. 우영 씨 사정도 충분히 이해하니까요.”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서호는 미소 짓는 우영을 쳐다보다 커피를 호로록 들이켰다. 우영은 서호가 잔을 내려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입꼬리를 내리지 않던 서호는 차분하게 커피 잔을 테이블 위로 얹고선 다시 우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제 결심을 의심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

“저 역시 여러분이 하시는 일을 기본적으로 반기고, 또 지지하고 있으니까요. 어렵게 결심해서 오랜 친구이자 직장 상사를 팔아 버리는 내부 고발자가 되기로 했는데, 저와 같은 배를 탄 분이 저를 의심하는 것보다 씁쓸한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여러분이 저를 믿기 위해서는 필요한 몇 가지 행동들이 있겠죠.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 마세요. 여러분의 뜻대로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어이, 신 검.]

[왜.]

[안서호 씨 말이야,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아마 괜찮은 사람일 거다.]

[뜬금없이 무슨.]

[아니, 그러니까. 그 사람, 여태껏 우리가 대면했던 대기업 변호사들이랑은 좀 달라.]

[변호사는 다 똑같다, 백 검.]

[하하. 아니라니까? 그 사람들처럼 약아 빠지진 않았어!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아, 그래! 순둥순둥! 큭큭. 착하고 순수하더라고. 인마, 내가 안 그랬으면 그 늦은 시간까지 대화에 어울려 줬겠어?]

[…….]

[분명 너도 좋아할 거다!]

서호와 약속이 정해진 후, 답지 않게 실실거리며 말하던 승진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멍청한 백승진.’

우영은 자신과의 대화에도 결코 지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서호를 노려봤다. 눈썹이 다 꿈틀거린다.

‘대체 어디가 착하고 순수하다는 거지?’

우영의 눈앞에 있는 안서호는 속에 능구렁이 백 마리를 키우고 있는 노련한 남자였다. 대체 백승진이 안서호의 어떤 면을 보고 순수하다는 말을 꺼낸 건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사람을 너무 믿어.’

한번 마음의 문을 열면 간도 쓸개도 다 내어 줄 것처럼 구는 승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영은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있는 정보 하나를 알려 드리죠.”

그때였다. 우영의 태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서호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영은 내렸던 눈을 다시 서호에게 고정시켰다. 서호의 기다란 손가락이 뜨거운 커피 잔의 입구를 슥, 쓸었다.

“이번 주 금요일 밤 8시, 루터 호텔 지하 2층 클럽에서 은밀한 파티가 있을 예정이에요. 파티의 주최자는 부사장님이십니다. 초대된 분들 중에 아마 우영 씨가 흥미를 가질 만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네요. 물론 부사장님께서 요즘 몸을 사리셔서, 우영 씨가 원하는 그런 종류의 파티는 아니겠지만 우영 씨가 부사장님과 안면을 트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우영은 서늘한 눈으로 서호를 바라봤다.

“안서호 씨는 제가 이 부사장에게 접근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서호가 웃었다.

“네. 오늘 우영 씨를 마주하니 그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우영 씨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승진 씨는 이쪽에서 꽤 유명하거든요. 승진 씨 집안이 보통 집안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알음알음해서 중앙지검의 백승진 검사에 대해서는 모두 주목하고 있죠. 장차 법조계에서 한자리 차지할 거라고 말이죠.”

속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서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아는 부사장님은…… 이정후는, 사람을 쉽게 믿는 부류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영 씨라면 의외로 이정후의 마음을 사로잡을지도 모르죠. 우영 씨는 이정후가 무척 좋아할 만한 유형의 사람이거든요.”

알 듯 말 듯한 서호의 말이 신경을 자극해 우영은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런 우영을 빤히 쳐다보던 서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제 제안일 뿐이니 승진 씨와 상의하셔서 결정하시는 게 좋겠네요. 저는 여러분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 드리고, 이정후의 몰락을 기다리는 입장이니까요. 이번 정보를 활용할지 말지는 두 분이 진지하게 고민해 보세요. 만약 원하신다면 파티 초대는 물론이고, 이정후와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제가 여러분께 협조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어요.”

“…….”

“아! 그리고 승진 씨는 반드시 이번 파티에 참석해 주셨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서호의 말을 듣고 있던 우영이 차갑게 대꾸했다.

“그건 승진 씨한테 직접 물어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당연히 그럴 거예요. 그런데 그 전에 우영 씨의 허락을 구하고 싶어서요.”

……내 허락?

의아해하는 우영을 향해 서호가 짙은 미소를 흘렸다.

“승진 씨를 제 파트너로 데려가고 싶거든요.”

* * *

[신 검! 대박, 대박이야! 안서호가 한대! 하겠대!]

계속 꺼리는 승진을 부추겨 안서호를 검찰 편으로 만들게 종용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며 은근슬쩍 안서호를 떠보던 승진이 안서호로부터 놀라운 대답을 들었던 게 일주일 전. 그리고 그 후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승진과 우영은 서울이 아닌 춘천까지 내려와 안서호를 만났다.

[우영 씨가 부사장님과 안면을 트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서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확실히 집안 때문에 정·재계 쪽에 이미 발을 담그고 있는 승진보다는 자신이 활동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얼마 전 있었던 ‘김 의원 스캔들’로 그 세계에서 자신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해서 접근하는 방법도 있었다.

안서호도 그 점을 짚은 거겠지.

‘야욕 있는 검사로 행동해라 이건가.’

괜찮은 수법이다. 웃는 얼굴로 섬뜩한 말을 늘어놓는 서호를 떠올리던 우영은 돌연 머리를 스치는 말에 인상을 썼다.

[파트너라고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구겨 버리고 말았다. 파트너라니. 왠지 기분 나쁜 단어에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런 우영을 바라보던 서호가 여유를 잃지 않은 눈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네. 정확히 말해서는 제 새로운 애인으로 승진 씨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지만, 어깨를 들썩이는 것으로 겨우 참았다. 우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서호를 응시했다.

[저는 게이거든요. 그리고 애인도 있어요. 하지만 애인이 있다는 제 말을 이정후가 도통 믿어 주질 않으니, 증거를 가지고 갈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럼 승진 씨를 이용하지 말고 그쪽 애인을 데려가면 되지 않습니까.]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서요. 제 애인이 누군지 이정후가 알아서는 곤란합니다.]

[…….]

[하하, 걱정 마세요. 그렇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어요. 정확히 말해서, 저는 승진 씨의 배경을 좀 이용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제가 승진 씨랑 맞선을 봤다는 건, 이정후도 알고 있거든요.]

[……!]

[여러분께 협조하기로 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기도 해요. 하여간 염려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조심히 이용하고 우영 씨 품으로 다시 돌려 드리면 되겠죠?]

[그건…… 무슨 소립니까? 돌려……준다니?]

[어?]

눈살을 찌푸리는 우영에게 서호가 은근한 미소를 담아 중얼거렸다.

[아닌가요?]

생글생글 웃는 안서호에게 ‘아닙니다.’라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이정후가 의심하기 전에 올라가야겠다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서호를, 우영은 붙잡지 못했다.

“신가, 왜 그러고 있냐?”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우영이 승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서호가 카페를 나선 지 3분가량이 흐른 시점이었다.

“어? 서호…… 안서호 씨는?”

분명 자신이 화장실에 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영에게로 걸어가던 서호가 보이질 않자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우영은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어? 어디 가!”

“자세한 건 차 안에서.”

“뭐?”

“계산이요.”

우영은 놀라는 승진의 말을 무시하고선 카운터로 가 커피값을 지불했다. 깜짝 놀란 승진이 의자에 걸쳐 두었던 상의를 집어 들고 그를 따라 나왔다. 우영은 터덜터덜 걸으며 그들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어이, 신가. 나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

“신가야?”

“운전해.”

“어? 어어, 응.”

우영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며 운전석에 앉아 의아한 눈을 빛내는 승진을 무시하고 차 키를 건넸다. 얼떨결에 차 키를 받아 든 승진은 우영을 한 번 흘긋거린 후 액셀러레이터를 짓밟았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카페의 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신 검.”

“…….”

“신가?”

“…….”

“우영아.”

“백 검.”

계속 불러도 꿈쩍 않는 우영을 향해 의문을 표출하던 승진은 싸늘한 우영의 음성에 소리를 뚝 멈췄다. 우영은 핸들을 붙잡고 있는 승진이 아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로 주변에 나란히 서 있는 기다란 나무들이 휙휙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안서호가 제안을 하나 했다.”

“제안?”

“이번 주 금요일에 파티가 하나 열린다더군. 거기에서 내가 이정후와 만날 기회를 주겠다고.”

“너랑?”

우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생각이야. 원래 우리 계획도 이정후에게 접근하는 거였으니.”

“뭐…… 그렇긴 하지.”

“그 제안, 받아들일 거야.”

순간 승진이 멈칫했다. 핸들을 붙잡은 그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지만 우영은 모른 척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승진이 어색한 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신 검, 그건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이미 결정이 끝난 모양이군.”

힐긋, 운전 도중 우영의 얼굴을 살핀 승진이 한숨과 함께 뱉어 낸 말에 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생각할 이유도 없지.’

이정후는 검찰 쪽 연줄이 필요하고, 나는 이정후를 낚기 위해 그에게 접근해야 하니 잘된 일이지.

굳은 표정의 우영이 생각을 바꿀 마음이 안 보이자 승진이 짧게 투덜거렸다.

“조심해. 네가 자신한다고 해서 이정후가 의심하지 않는 건 아닐 테니.”

“무슨 소리지?”

“신우영이 검사라는 건 전국이 다 아는 사실인데, 갑자기 친해지겠답시고 접근해 봐. 누가 봐도 수상하게 여길 거다.”

우영은 빙긋 웃었다.

“그렇긴 한데, 내 처지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서.”

“뭐?”

“혈혈단신이잖아. 연줄도 없고, 그렇다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고.”

“어이, 그건 내가 어떻게라도…….”

“대검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검사가 배경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설쳐 대면, 그쪽도 흥미는 가질 거다.”

“……!”

“안서호 말로는, 저번 마약 사건이 발각된 이후 검찰 쪽 인물들이랑 서먹해져서 이정후가 새로운 사람을 찾고 있다더군. 그러니 확실히 좋은 기회야.”

“……그러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우영의 대답에 승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영은 그런 승진의 분위기가 차분해졌음을 똑똑히 인지하고선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너도 그 파티에 참석할 거다.”

“나도?”

“그래. 안서호의 새로운 애인 자격으로.”

끼이익!

아.

갑자기 도롯가로 차를 비틀어 버리는 승진으로 인해 몸이 쏠렸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다면 아마도 정면 유리에 머리를 박았을지도.

우영은 갑자기 멈춰 선 차 안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를 느끼며 쓴웃음을 흘렸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웬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너.”

승진이 섬뜩한 표정으로 웃었다.

“미쳤냐?”

* * *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자식은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승진은 서늘한 눈으로 제 옆에 서 있는 우영을 흘긋거렸다.

휘이잉.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은 이곳에 도착한 이래 말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서 있기만 할 뿐. 그 때문인지 트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분위기는 숨 막힐 정도로 무겁기만 했다.

승진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건가?’

근본적인 질문이다.

승진은 열아홉에 신우영과 만나 서른하나인 지금까지 질긴 인연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젠 거의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몸 수준이었다. 각자의 집에 서로의 물품이 있을 정도면 말 다 했지.

그런데 간혹 이런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공(公)과 사(私)를 구분해도 너무 구분해 버리는 신우영 때문이다.

‘사랑은…… 하는 것 같은데.’

저만큼이나 자존심이 세서 우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내뱉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번 들었으니 아마도 사실일 거다. 게다가 무려 어머니인 민 여사 앞에서 자신을 만난다고 커밍아웃까지 했던 놈이지 않은가.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우영은 절대 남자를 안지도, 안기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 신우영이 날 사랑하지 않을 리 없지.

‘하지만 가끔 보면…… 의심이 된다고.’

이런 의심을 품게 만드는 결정적 원인은 우영이 승진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용해도 너무 이용한다. 아무리 대검찰청으로 갈 수 있는 초고속 에스컬레이터가 눈앞에 있다고 할지라도 승진은 우영을 밟아 가면서까지 올라가고 싶은 건 아니었건만, 우영의 입장은 조금 다른 걸까.

물론 대검으로 누가 먼저 가는가에 대한 대결이 끝나면 수년간 이어져 오던 포지션 경쟁도 끝을 맞이할 것이다. 앞으로 평생 엉덩이를 대 줘야 할 판이라, 우영이 기를 쓰고 그것을 회피하고 싶은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대결에 사랑하는 사람을 이용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점에서 자신과 우영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 같다.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맞선 자리로 밀어 넣지를 않나, 이번에는 뭐? 예의 맞선 상대의 파트너로 파티에 참석하라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질투한다고 좋아했더니……. 빌어먹을 새끼.’

질투로 인해 눈이 뒤집혀서 욕설을 내뱉던 신우영이 웬만한 섹시 여배우보다 훨씬 섹시하다고 느꼈던 거, 전부 취소다.

승진은 제 곁에 서선 입도 뻥끗하지 않는 우영을 흘긋거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백승진.”

왜.

“얼굴 펴.”

“…….”

“부장님들 앞에서도 그 표정으로 있을 거 아니면, 얼굴 펴라고.”

그게 마음대로 돼야 말이지.

검은 하늘만큼이나 속이 시커먼 우영의 눈빛이 심장을 자극한다. 젠장할. 이 자식만 보면 멋대로 뛰는 심장박동이 몹시도 신경 쓰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승진은 애꿎은 돌부리만 툭툭 차며 우영의 시선을 피했다.

“승진아.”

“뭐.”

“너, 그게 그렇게 싫…….”

“어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는 승진을 보며 쓴웃음을 흘린 우영이 막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승진은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이 분명한 두 남자를 보며 굳히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서초구의 청사에서처럼 각 잡힌 슈트 차림이 아닌, 비교적 캐주얼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두 남자는 틀림없는 그들의 상사였다.

승진은 물론이거니와 우영 역시 두 부장검사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까 신 검 말은, 3번한테 직접 작업을 걸겠다?”

인적이 드문 한강 둔치 계단에 앉아 맥주를 들고 있던 사람들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첨수부의 한형석 부장검사였다.

승진은 태연하게 서호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설명하는 우영을 냉랭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우영은 그런 승진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3번 용의자가 근래 들어 검찰 쪽에 줄을 대려 한 것은 사실이잖습니까? 공교롭게도 그 시기가 KS 클럽 사건 이후고요. 그런 점에서 제가 흥미를 돋을 수는 있겠죠. 전 현재 대검에 가려고 큼지막한 정치 스캔들만 공략하는 검사로 알려져 있으니, 단순 마약 사건을 파고들 거라고는 생각 못 할 겁니다. 어차피 마약 관련 일은 강력부 쪽에서 하는 걸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요. 오히려 그쪽에서 저한테 정보를 캐려 할 수도 있죠. 이때, 두 분께서 약간의 협조만 해 주신다면 3번의 신뢰를 얻는 건 금방일 겁니다.”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승진은 태연하게 말하는 우영을 보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으려다 말았다.

“백 검 생각은?”

끙, 짧은 신음을 흘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한 부장과 달리, 특수부의 유재익 부장이 제 뒤편의 승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승진은 그 말에 뒤를 돌아보는 우영과 눈이 마주쳤다. 동조라도 해 달라는 눈빛일까. 더욱더 냉정해진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전 반댑니다.”

“뭐?”

“왜?”

승진이 당연히 동의할 줄 알았는지 승진의 아래편에 앉아 있던 한 부장과 옆에 앉은 유 부장의 눈이 일제히 동그래졌다.

승진은 우영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확인하며 다음 말을 뱉어 냈다.

“접근 계획은 그럴싸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두 분도 한서에 대한 소문을 들으셨을 텐데요? 요즘 한서, 특히 이정후…… 3번이 있는 한서 전자 쪽은 노조 파업 때문에 조폭들까지 고용했다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아.”

“뭐, 그런 일이 있긴 했지.”

그걸 아는 사람들이.

승진은 수긍하는 두 부장들에게 말을 이었다.

“신 검이 유능하기는 하지만 이번 일에 직접 투입되는 건 위험합니다. 그쪽은…… 일이 틀어지면 검사 하나 파묻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그런 곳에 절대 신 검, 못 밀어 넣습니다.”

차갑고도 단호한 승진의 말이 두 부장의 낯빛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절대로 안 된다며 고개를 내젓는 승진의 태도가 꽤 단호했기 때문이다.

그런 승진의 강경한 태도에 쓴웃음을 흘리던 우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냉랭한 시선으로 승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백 검,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내 의도가 3번한테 드러난다는 걸 전제로 말하는 것 같은데, 나는 백 검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승진이 그 말을 듣고 빙긋 웃었다.

“신 검, 상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너 그러다 골로 간다.”

냉막하게 승진을 응시하는 우영의 말에도 승진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싸늘한 냉기가 도는 한강의 밤. 두 젊은 검사의 불꽃 튀는 신경전에 한숨만 푹푹 내쉬던 상사들 중 머리를 벅벅 긁던 유재익 부장검사가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 검이.”

“예, 부장님.”

“대답은 즉각적이구먼. 난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드는데 말이야.”

“예?”

“너, 신 검이라면 치를 떨지 않았냐?”

승진은 예리한 유 부장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유 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신 검이 스스로 하겠다는데 네 녀석이 반대를 해?”

“부장님!”

“내 생각도 한 부장이랑 같다.”

승진이 대번에 얼굴을 구겼지만 유 부장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신 검이 3번에게 접근하는 건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아. 어차피 3번 그놈, 눈치만 슬슬 보고 있어서 지금 당장 뭔가를 꾸밀 것 같지도 않으니 우리가 먼저 덫을 놓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야.”

“하지만!”

“시끄러워. KS 사건은 가급적 빨리 해결하는 편이 좋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물어봤잖아. 꿈을 이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냐고.”

“……!”

“저기 신 검은 준비된 것 같은데 너는 왜 그러냐?”

쯧, 혀까지 차는 유 부장을 보며 승진은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입술을 꽉 악물기만 하는 승진을 무심히 응시하던 유 부장이 미간을 좁혔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지선 두 달밖에 안 남았어. 그러니 시나리오 짜고 작업까지 다 마치려면 적어도 한 달 안에 3번만큼은 반드시 검거해야 해. 지선까지 끌면 나중에 잡기 더 어려워지는 놈들도 생길 수 있단 말이다. 어때, 한 부장. 동의하지?”

유 부장이 6월 중순으로 예정되어 있는 지방선거를 언급하자 한 부장이 어깨를 으쓱이며 동의를 표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승진을 무시한 유 부장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우영에게 입을 열었다.

“신 검사 뜻대로 해. 대신, 위험해지면 발 빼고. 이번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검찰청의 뛰어난 인재를 잃을 생각은 없거든.”

“알겠습니다.”

“우리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SOS 치고, 필요한 정보는 강력부 애들 족쳐서 미리 알려 줄 테니 그 점은 염려 마.”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유 부장이 ‘그럼 우린 간다.’ 하고 음성을 내뱉자마자 한 부장 역시 일어나 그를 따라나섰다.

저벅저벅 멀어지는 그들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던 승진이 이를 꽉 악물었다.

다시금 둘만 남게 된 둔치에 칼바람이 불었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가 이 순간만큼 기분 나쁜 적은 없었다. 승진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백 검.”

두 부장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하던 우영이 툭 말을 던졌다. 스윽 고개를 들어 우영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솔직히 이번 일, 네가 왜 이렇게 반대하는지 모르겠다.”

“그걸 말이라고 해?”

승진이 짜증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우영이 담담하게 제 말을 흘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계획대로 진행할 거야.”

“이봐.”

“부장님들도 동의하셨으니 더는 태클 걸지 마. 할 마음 없으면 그냥 조용히 빠지고. 안서호랑 사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파티 파트너 정도야 충분히 맞춰 줄 수 있는 일이지 않나?”

누가 지금 파트너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아 눈에 힘을 주던 승진이 냉정을 되찾았다. 그는 입을 다물고 있는 우영에게 물었다.

“신가야.”

“…….”

“너,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대검에 가고 싶은 거냐?”

승진의 발언에 우영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짧게 한숨을 내쉰 승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물었다.

“대검 가는 게, 이정후한테 직접 다가갈 정도로 중요해? 물론 우리의 최종 목표가 대검이긴 하지만, 이정후는 진짜 아니야. 그 자식이랑 잘못 얽히면…….”

“그래.”

지금껏 줄곧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우영의 대답에 승진은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꼈다. 당황한 승진에게서, 바람이 불어 표면이 부드럽게 물결치는 한강 쪽으로 시선을 돌린 우영이 낮고 서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나는 이번 일 해결하고 꼭 대검 간다. 그 방법밖엔 없어. 그러니까.”

마치 다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이 이상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방해 마.”

* * *

대검이 무슨 큰 대수라고.

현재 백승진과 신우영,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두 번 생각할 여지도 없이 누가 상위 포지션을 차지하는가―에 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과 상대방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대검에 가고 싶지 않은 승진과 달리 우영은 집요할 만큼 대검으로의 여정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사장 타이틀을 걸고 내기를 할 걸 그랬다. 고작 대검찰청으로 가는 것 따위에 불나방처럼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는 우영을 보자니 성질이 났다.

어차피 이번 사건을 해결해 봤자 발령받는 것은 몇 달, 혹은 몇 년이 더 있어야 하건만, 대체 왜 저리 급한 거야?

이상하게 불안하다.

이정후에게 직접 접근하겠다는 우영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불안감이 더욱 증폭됐다.

두 부장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우영은 자신의 결심을 돌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누가 넣는가에 대한 일로 그런 위험한 짓까지 자청하려는 우영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솔직히 말해 우영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차라리 그냥 대 줘 버릴까.’

그러다 보니 위태로운 행동을 이어 가는 우영을 저지하기 위해 평생 엉덩이를 대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 외로 제 안을 가득 채우는 그 느낌도 그리 싫지만은 않았…….

‘젠장!’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거 완전 짜증 나는데.’

승진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곳에서는 나 모른 척, 해.]

[뭐? 왜!]

[아니면 소문대로 사이 나쁜 척하는 것도 괜찮겠군. 그럼 그쪽에서 더 흥미를 가질지도.]

제 말만 내뱉고 고개를 돌리던 우영의 등이 잊히질 않는다.

승진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모른 척할 것 같냐?’

우영이 스스로 이정후에게 접근하겠다니, 결코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진 않을 거다. 그가 위험해지는 것은 절대로 못 본다.

승진이 서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결정적인 이유는 우영이 이곳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는 데 있었다. 바늘 가는 곳에 실이 따라가야지, 홀로 보낼 수는 없잖아.

“그렇게 날을 세우고 계시면 웬만한 사람들은 접근하지 못할 것 같네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우영을 기다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승진은 곁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

빙긋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서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갑게 일렁이던 승진의 눈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았다.

“서호 씨.”

“늦지 않게 오셨네요.”

그 말을 꺼낸 후 자신을 아래위로 훑는 서호의 시선이 느껴진다. 스캔이나 다름없는 눈빛에 승진은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현재 승진은 아이보리색보다 짙은 카키색 세미 슈트 안에 검정 티셔츠를 받쳐 입은 상태였다. 예리한 시선에 얼떨떨해하는 승진의 탐색을 마친 서호가 다시 그의 눈을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요. 곧 시작될 테니 우리도 들어가죠.”

짙은 서호의 미소에 승진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지금 승진이 가로지르는 곳은 예의 ‘파티’가 열린다는 루터 호텔의 로비.

저녁 7시 45분을 가리키는 현재, 루터 호텔의 로비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서호가 내건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일일 파트너가 된 승진은 서호와의 약속 시간보다 40분 정도 빠른 7시쯤부터 이곳에 와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 회전문을 지나 들어오는 손님들을 예의 주시한 결과, 별로 특별한 움직임을 감지하진 못했다.

‘하긴, 그런 녀석들이 대놓고 로비를 드나들 리가 없지.’

어차피 지하 2층에서 열리는 파티였고, 낌새가 있었다면 승진이 이미 알아차렸을 거다.

그는 제 곁에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서호를 흘긋거리며 생각했다. 어떤 녀석들이 오려나. 한서 전자의 이정후가 주최하는 파티라면 틀림없이 불쾌한 냄새를 흘리는 인간들이 가득할 것이다. 차라리 저번과 같은 마약 사건이 일어나 승진이 공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다면 이 귀찮은 일들을 금방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승진은 제 속을 읽었는지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서호가 여전한 눈웃음과 함께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심을 들켜 버려 멈칫하긴 했으나 승진은 모르는 척 미소로 대응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호는 말없이 지하 2층 버튼을 누른 뒤 고개를 위로 들어 보였다. 서호의 시선 끝에 엘리베이터 내의 감시 카메라가 놓여 있었다. 어째서 그가 말을 끊은 건지 눈치챈 승진은 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번 파티는 다음 모임의 후원자와 참석자를 찾기 위한 일종의 탐색전에 가깝습니다.”

서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엘리베이터를 벗어난 뒤였다.

“다음 모임?”

“아시다시피 저번 모임이 난장판이 되지 않았습니까.”

저번 모임이란, KS 클럽에서 일어난 예의 마약 사건을 의미한다.

“그 이후 모임에 참석했던 부사장님의 주 고객들이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이라서요. 일단 그분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이런 형식의 파티를 개최하는 거죠. 또, 새로운 고객도 모집할 겸 말입니다.”

“…….”

“그러니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승진 씨가 흥미를 가질 만한 일들도 마찬가지. 고객에게 접근하는 건, 어디까지나 부사장님이시니까요.”

말끝마다 부사장님, 부사장님. 오랜 친구 사이라 들었는데,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보시죠?”

승진의 시선을 느낀 서호가 옅은 미소를 그리며 물어 왔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승진이 중얼거렸다.

“접근하는 건 신가…… 신우영인데, 대체 저는 왜 필요한 겁니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자신이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저야 우영을 지키겠다는 일념하에 이곳까지 왔지만, 서호에게는 모험이나 다름없는 일일 것이다. 오히려 이런 곳에 자신을 데려온다면 안서호의 입장이 더 곤란해지지 않을까.

클럽의 입구를 앞두고 뚝 멈춰 선 승진의 질문에 서호의 눈이 보기 좋게 휘었다.

“우영 씨한테 들으셨겠지만, 우리 부사장님은 제가 승진 씨와 맞선을 봤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

알고 있다고?

우영에게 그런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던지라 승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르셨나 보네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서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남자를 좋아하게 됐다고도 말하고, 그 때문에 이제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도 했는데 도통 믿어 주지를 않아서 말이죠.”

“……!”

“아마도 저번 모임의 발각 이후 의심이 무척 많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군요. 그래서 그걸 증명하려고 승진 씨의 협조를 구한 겁니다. 맞선을 본 장본인이라도 데려가면 그 의심이 조금 누그러질까 해서요.”

“그런 거였습니까? 뭐, 그 이유라면 언제든지…….”

“실은, 그 이유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승진은 유려하게 웃는 서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서호가 픽 실소를 터뜨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저 안으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거예요. 어쨌든 승진 씨가 클럽 안에서 해 주셔야 할 행동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번 파티가 끝날 때까지는 적어도 제 곁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간혹 제 장단에 발도 맞춰 주시고요. 음,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데이트라고 생각해 주시면 되겠네요. 평소 승진 씨가 데이트를 할 때처럼 저를 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해 주실 수 있죠?”

분명 대수롭지 않은 말이었지만 승진의 얼굴을 당혹스럽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멈추었던 다리를 앞으로 뻗으며 클럽의 입구 쪽으로 들어가려던 서호는 우뚝 멈춰 서 있는 승진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승진 씨?”

승진의 고요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데이……트?

서호가 뱉어 낸 단어가 귀를 맴돌았다.

[이봐, 신가. 지금부터 뭐 할래?]

[……섹스.]

[뭐? 밥 먹으러 안 가고?]

[귀찮아. 집에서 해 먹으면 되지. 이리 와.]

[흠, 시간도 없으니 그게 낫겠네.]

[샤워는?]

[내가 먼저 할게. 넌 준비하고 있어.]

승진은 우영과 함께 있을 땐 언제나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고, 몸을 더듬고, 섹스를 했다.

데이트?

중앙지검으로 올 때까지 자리를 잡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두 사람에게 있어, 데이트는 거의 사치나 마찬가지인 단어였다.

겨우겨우 시간을 내어 간혹 데이트랍시고 함께 밖으로 나가기는 했지만, 흔히들 말하는 달콤한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시커먼 남자 두 명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모텔, 혹은 호텔로 들어가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낼 것이 분명하니까. 해서 함께 간 곳이라고 해 봐야, 담배 냄새가 가득한 PC방이거나 당구장, 혹은 실내 야구장 정도일까. 그곳에서도 항상 경쟁이 붙었던지라 달콤한 밀어를 주고받지는 못했다.

[야, 어떡하냐.]

[또 뭐가.]

[나, 섰어.]

[변태 새끼! 이번엔 또 뭐에 꼴린 거야!]

[글쎄. 아까 네놈이 방망이 휘두르는 모습에 가 버렸나…….]

[하?]

[할래?]

[…….]

[신가?]

[제길! 따라와.]

물론 그런 데이트 끝 무렵엔 항상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PC 게임을 즐기다 화장실에서 짧은 섹스를, 당구를 치다 틀어져 버려 골목길에서 섹스를, 도서관에 들러 공부를 하다 비좁은 책장 사이에서 섹스를…….

‘음.’

백승진에게 있어 데이트는 곧 섹스였다. 아니, 우영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을 거의 섹스를 하며 보냈다.

그러고 보니 나, 제대로 된 데이트 한번 안 해 봤잖아?

지난 몇 년간의 일을 떠올리던 승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십니까?”

서호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다 못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승진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승진은 어리둥절해하는 서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데이트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자의는 아니라지만 결국 안서호의 일일 파트너로서의 동행을 받아들였다.

서호는 제게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행동해 달라고 했지만, 승진이 알고 있는 데이트엔 기본적으로 섹스가 깔려 있었다. 그렇다고 안서호와 섹스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애석하게도 승진의 몸은 우영에게만 반응을 보였다.

이거 꽤 난처하군.

“네?”

곤란해하는 승진의 말을 들은 서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답변 대신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승진을 보며 서호가 책망 어린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분’이랑 오래 만나신 거 아닌가요?”

확실히 자신이 ‘그 녀석’과 오래 만난 것은 사실이다만.

“우리는 서호 씨가 생각하는 형식의 데이트는 안 해서요.”

“그럼 무슨……. 아.”

그저 쓴웃음을 흘리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서호가 다음 말을 삼켰다. 눈치가 빠른데? 승진은 빙긋 웃었다.

“안 변 아냐?”

“옆에는 누구지?”

“어디서 본 사람인데.”

승진과 서호가 입구 쪽에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클럽 안으로 들어가려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흘긋거리며 쑥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한 시선을 끌 필요는 없지. 승진은 제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서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서호 씨 말이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작전에 들어가기 전까진 그렇게 행동하도록 하죠. 그럼 들어가시죠.”

그는 여유롭게 서호의 허리 위로 팔을 둘렀다.

* * *

“당연히 화가 났죠. 설마 남자랑 맞선을 보게 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땐 정말 할아버지께서 노망이 난 줄 알았지 뭡니까. 하지만 뭐,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들어주셨으니 오히려 다행이랄까요? 하하하!”

안서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발 앞서 루터 호텔로 향했던 승진과는 달리, 우영이 루터 호텔 지하 2층 클럽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를 막 넘긴 시점이었다.

그가 클럽으로 들어가려 하자 앞을 막아선 건장한 사내들은 서호가 우영에게 주었던 초대장을 내밀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친절하게 문까지 열어주는 꼴이 누가 봐도 조폭들과 다를 바 없어 미간을 좁히던 우영은 클럽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인상을 썼다.

‘자기가 게이라는 걸 광고할 셈인가?’

호탕하게 웃으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승진의 음성이 원하지 않아도 들려왔다. 우영은 웃고 있는 승진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그러다 그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승진이 부드러운 눈빛을 쏘아대고 있는 상대는 안서호였다.

‘가깝군.’

안서호가 승진을 이곳까지 데려가겠다는 것을 허락한 사람은 자신이었고, 모든 것이 그의 계획대로 진행되고는 있지만 이렇게 짜증이 치미는 까닭은 서호와 승진의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깝다는 데 있었다.

검은 슈트에 짙은 남색 셔츠, 그리고 버건디색 넥타이를 받쳐 입고 있는 클래식 한 차림의 우영과는 달리 승진은 비교적 편한 모습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 시나리오 바꿔.’라고 말하며 제게 눈을 부라리던 남자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승진은 작업에 들어가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곤 했다. 아마도 이번 일 역시 우영의 뜻대로 움직여줄 것이 분명하다.

그런 승진의 괴리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인 거겠지. 우영은 흔들리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승진의 옆자리에 서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안서호는 남자들끼리 맞선을 봤다는 말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서호를 보자니 밑바닥에서부터 불쾌한 감정이 치솟아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안서호 같은 부류에 대해 본능적으로 경계하게 된다. 저처럼 속에 능구렁이를 기르고 있는 것이 분명한 자는, 더더욱.

겉으로는 냉정한 척 굴어도 속은 흐물흐물하기 그지없는 승진은 속아 넘어갔을지 몰라도 우영은 다르다. 안서호가 승진에게 접근한 이유는 분명 따로 있었다. 이정후를 몰락시키려는 것도 그의 주된 이유이긴 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존재했다.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군.’

하지만 아직까지는 대놓고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어 우영은 일단 서호를 내버려 두기로 했다. 거리를 두고, 면밀하게 파악하면서 안서호가 이번 사건으로 무엇을 얻으려 하는지 관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아닌가요?]

하지만 역시, 안서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영은 클럽 내부의 바 쪽으로 다가가 진 토닉 한잔을 주문한 뒤, 삐딱하게 서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승진 쪽을 흘긋거렸다.

[너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대검에 가고 싶은 거냐?]

서호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승진이 툭 던졌던 말이 떠오른다.

대검.

대검이라.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가야 하는 곳이긴 하지.’

승진의 말대로다.

우영은 이번 사건을 반드시 해결한 후, 대검으로 가야 했다. 아니. 대검으로 곧장 향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승진의 맞선 상대가 얽혀 있는 이번 일만큼은 제대로 처리해야 했다.

그러고 난 후.

KS 클럽 마약 파티 사건을 완벽하게 종결시킨 이후 우영은 기필코 해야 한다고 마음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영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따끔거리는 가슴의 통증은 살짝 무시해줘야겠지. 차오르는 질투도 조금 가라앉히고 말이지.

“윽.”

차분하게 제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잠시 호흡도 고를 겸, 바텐더에게 주문한 칵테일을 받아들던 우영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승진이 저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신 검이 여긴 어쩐 일이지?”

약속된 행동들이었지만, 낯선 타인 취급하는 승진의 반응에 속이 쓰리다. 우영은 저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기는 승진의 모습에 속이 뒤집히려는 걸 꾹 참았다. 멀리서 서호가 자신과 승진을 주시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각본대로.

우영은 냉랭한 시선을 쏘아대며 승진에게 대꾸했다.

“초대를 받아서.”

“신 검이?”

“왜. 나는 이런 곳에 오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지만…….”

우물쭈물하는 승진을 바라보던 우영은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서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발견했다.

슬슬 움직이라는 건가.

“어?”

“따라와.”

우영은 주저하던 승진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클럽을 벗어나 화장실로 보이는 곳으로 승진을 끌고 갔다. 난데없는 상황에 잠시 넋을 잃었던 승진이 화장실로 가기 직전의 복도 앞에서 우영의 손을 뿌리쳤다.

“너 뭐하는, 읍!”

우영은 인상을 쓰는 승진을 벽으로 밀친 후 입술을 들이밀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승진을 가둬둔 채 촉촉한 입술을 뒤덮자 찌릿한 전율이 흐른다. 우영은 정신없이 승진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큭!”

우영의 입술이 떨어져나온 것은 승진이 그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던 까닭이다. 우영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나다 결국 쿵 주저앉는 우영을 내려다보며 승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정신 나간 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

“내가 네 놈이랑 어울려 준 건 그때 딱 한 번뿐이다. 그건 실수였고. 앞으로도 이런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라.”

차갑게 울려 퍼지는 그 말이 이상할 정도로 가슴 깊게 꽂힌다. 우영은 슬쩍 고개를 들어 승진을 응시했다. 진심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있었다.

“젠장.”

짧게 욕설을 흘리며 머리를 벅벅 긁던 승진은 주저앉은 우영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있었던 클럽의 입구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멀어지는 승진의 구두소리를 듣고 있던 우영은 제게로 다가온 손길에 시선을 위로 옮겼다.

“소문은 역시 소문일 뿐이랄까.”

우영에게 손을 뻗은 남자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중앙지검의 두 검사님들은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들었던 것보다는 친밀해 보이는군요.”

이정후였다.

루터 호텔에서의 모임이 열리기 이틀 전의 일이다.

서호의 호출에 승진과 함께 나갔던 우영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동요하는 우영을 보고도 생글생글 웃고 있는 서호의 얼굴이 거슬렸지만,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우영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안서호 씨 말씀은, 이 부사장 앞에서 나와 승진 씨가 치정 싸움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겁니까?”

불쾌감이 가득 깃든 목소리에도 서호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

우영과 승진이 동시에 입을 다물자 서호가 옅은 눈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부사장님은…… 정후는, 타인의 약점을 움켜쥐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약점들을 수집하면서 부사장직까지 올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지만 지금 정후의 입지가 조금 곤란해진 상태입니다. 현재 한서 그룹 전체로 보면 검찰 쪽 인맥이 남아 있지만, KS 클럽 사건 이후 정후와 검찰의 직접적인 관계는 모조리 끊어져 버렸거든요. 어떻게든 그쪽에 연줄을 대려고 제게까지 손을 뻗었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정후를 도와줄 마음 따위 없어서 정중히 사양해 왔습니다. 그 와중에 우영 씨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떡하니 치부를 드러내게 되면 틀림없이 그걸 이용하려 들겠죠. 손에 들어온 훌륭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는 녀석이니까. 아마 두 분이 약간의 연극만 해 주시면 쉽게 넘어올 겁니다.”

차분한 서호의 설명에 우영은 수긍했다. 반면, 그와 달리 흠칫 놀랄 정도로 인상을 쓰던 승진은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서호 씨, 방금 하신 말씀은 솔직히 좀 그러네요.”

“네?”

짜증이 가득 섞인 승진의 차가운 발언에 서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승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침묵하는 우영과 당황한 서호를 차례로 흘긋거린 후 말을 이었다.

“결국 서호 씨의 말은 신 검, 아니 우영 씨에게 이정후 앞에서 커밍아웃이라도 하라는 거잖습니까.”

“네, 물론 그렇기는 한데…….”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예?”

단호하기 그지없는 승진의 말을 들은 서호가 우영을 힐끔 쳐다봤다. 그는 설마 승진이 반대할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우영은 웃지도, 그렇다고 입을 열지도 않았다.

승진이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게이라고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건 나 혼자로도 족할 것 같은데, 굳이 우영 씨까지 그 위험을 무릅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

“어차피 부사장한테 검찰 쪽 인맥이 필요한 거라면 차라리 내가…… 인마!”

“죄송하지만 잠깐 승진 씨랑 대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말을 하고 있는 승진의 팔목을 덥석 잡은 우영이 미간을 찌푸리는 승진을 데리고 일어났다. 서호가 멀뚱히 그들을 응시했지만 우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윽!”

승진을 데리고 나온 우영은 인적 없는 복도 벽으로 승진을 밀쳤다. 승진이 짧게 신음을 흘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싸늘한 눈을 빛냈다.

“말했었지. 이번 일, 방해 말라고.”

“신 검!”

“내가 해.”

“……너!”

“순순히 협조하기로 했으면 서호 씨 말대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

“백가.”

“너, 진짜 그렇게까지 하고 싶냐?”

승진이 울분을 담은 목소리를 흘렸다. 우영은 대답하지 않고 크윽, 이를 부드득 가는 승진을 바라봤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남자랑 붙어먹는 검사라고 퍼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야. 네 약점 같은 건 함부로 퍼뜨리는 게 아니라고! 고작 마약 사건 하나 해결하려다 네 인생까지 망칠 수도 있어.”

“…….”

“왜 그걸 몰라? 아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냐? 대체 왜 이러는데! 고작 대검에서 네놈 검사 인생 쫑낼 거냐? 어?”

“…….”

“뭔 말이라도…… 제기랄!”

우영은 버럭 소리치려다 말고 쾅, 벽을 치며 입술을 꽉 깨무는 승진을 말없이 응시했다. 파르르 떨며 한숨을 푹 내쉬는 승진의 얼굴이 복잡해 보였다. 우영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결국 아래로 고개를 떨구어 버리는 승진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긴, 이해가 되지 않겠지.

‘말을 해 주지 않았으니까.’

이 녀석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싶지는 않기에 이번 일을 해결하고 난 뒤에 행할 일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하여 그럴 수가 없다.

틀림없이 말리겠지.

제멋대로,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척하면서도 실은 전부 나만 생각하는 녀석이니.

우영은 결국 고개를 아래로 떨구는 승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얼굴을 찌푸리는 승진을 향해 흐리게 웃으며 그의 턱 끝을 부여잡았다. 기다란 검지와 엄지에 살짝 힘을 주어 승진의 얼굴을 들어 올리자 그의 흐려진 눈동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우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과정은 짧지만 느렸다. 우영의 검은 눈동자 사이로 승진의 흐려진 동공이 선명해지는 게 보였다.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승진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도 지금 이 순간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놈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한 번은 마주해야 할 일이었다. 우영은 떨고 있는 승진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백가.”

“어어?”

깜짝 놀란 승진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자신을 쳐다봤다. 우영은 빙긋 웃어 주었다.

“나, 믿냐.”

“…….”

“믿어?”

“어…… 응, 뭐.”

고개를 끄덕이는 승진을 향해 우영이 작게 속삭였다.

“그럼 안서호가 시키는 대로 하자.”

우영은 짧은 시간 동안 제게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를 스윽 훑어보았다.

‘이자가…….’

와인색 슈트와 베스트 안에 검정 셔츠, 그리고 검정 넥타이를 받쳐 입은 남자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으며 우영의 코앞에 서 있었다.

브리핑 룸에서 봤던, 사진 속 그 남자였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사냥개처럼 요동치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우영은 남자, 이정후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것을 잡을까 말까 살짝 고민했지만 이내 자신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우영의 행동에 이정후가 머쓱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으나 우영은 무시한 채 엉덩이 쪽을 탈탈 털었다.

“누구신지.”

낮게 깔린 우영의 목소리가 두 사람이 서 있는 복도에 깔렸다.

키는 엇비슷하군.

저와 승진보다는 조금 작겠지만, 그렇다고 안서호처럼 낮게 눈을 내리깔 필요는 없었다. 우영은 날이 선 자신의 태도에 ‘이런!’ 하고 탄성을 터뜨리는 이정후를 무심하게 바라봤다.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정후라고 합니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하얀색 심플한 명함을 내밀며 미소 짓는 이정후의 말에 우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오늘 신 검사님께서 저희 쪽 안 변의 초대를 받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요즘 정계 쪽 일로 많이 바쁘시다고 하던데, 그런 분이 여기까지 직접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정후는 무덤덤한 우영의 태도에 하하, 웃음을 흘리더니 클럽의 출입구 쪽을 흘긋거리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저희 안 변이 신 검사님께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죄송스럽네요.”

“무례?”

“예. 아무리 맞선 본 상대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해도, 그 연인까지 이곳에 데려오다니. 후우. 안 변의 상사로서, 대신 사과드립니다.”

머리를 숙이며 말하는 이정후의 음성에 진심이라고는 담겨 있지 않다. 그가 꺼낸 ‘맞선’이나 ‘연인’이라는 단어도 우영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뱉어 낸 것이 틀림없었다.

우영은 손에 들린 명함을 무심히 내려다보더니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그것을 앞주머니 안으로 집어넣고는 대답했다.

“한서의 부사장님께서 친히 사과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백 검과는 깊은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마침 초대를 받아서 왔을 뿐이고, 녀석이 보이기에 어울려 보려 했는데…… 하필 차이는 장면을 보이고 말았네요.”

“아, 그랬던 겁니까?”

“그런 거죠.”

우영은 빙긋 웃었다.

이정후가 말없이 미소 짓는 우영을 쳐다봤다. 허공에서 부딪친 두 남자의 눈빛에 미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던 우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리려 했다.

“신 검사님!”

저를 부르는 이정후의 외침에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벌써 가시는 겁니까?”

“뭐, 문제가 됩니까?”

오히려 우영이 되묻자 이정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뇨. 그건 아니지만…… 오신 지 얼마 안 되신 것 같은데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우영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술맛이 떨어져서요.”

“…….”

“게다가 함께 어울려 줄 사람도 없는데 남아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군요.”

“아.”

“저를 대신해서 부사장님이 당신의 변호사님께 저는 딱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견제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죠. 그럼 이…… 뭡니까?”

다시 한 번 인사를 하려던 우영은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온 이정후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정후가 싱긋 웃으며 우영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신 검사님께서 어울릴 사람이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군요.”

“예?”

“제가 요즘 ‘친구’를 찾고 있는데, 신 검사님이라면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 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어떻습니까? 돌아가서 한잔하시겠습니까?”

[우영 씨는 이정후가 무척 좋아할 만한 유형의 사람이거든요.]

옅은 눈웃음을 그리던 안서호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우영은 속을 읽을 수 없는 미소를 흘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이정후를 직시했다. 그러고는 뒤로 살짝 물러나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기업가들과는 사사로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

“이곳에 온 것도 연수원 선배님인 안 변호사님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해서였고요. 만일 이런 자린 줄 알았다면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겁니다.”

“…….”

“죄송하지만 먼저…….”

“검사님을 굳이 괴롭히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죠.”

“네?”

“오늘 제가 봤던 흥미로운 장면은, 확실히 잊기가 힘들 듯하군요.”

우영이 미묘한 미소를 그리는 이정후에게 미간을 좁혔다.

“무슨 뜻입니까?”

“소문이라는 게, 살이 덧붙으면 위험해지지 않겠습니까? 앞길도 창창하신 분이 남자와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들리면 조금 실망하는 사람들도 생길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사장님의 말씀이 마치 협박처럼 들리는군요.”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우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정후는 무표정한 얼굴의 우영에게 짙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신 검사님의 발목을 붙잡은 건, 검사님과 단순히 대화를 하고 싶어섭니다.”

“…….”

“만일 저와 대화를 나눈 뒤에도 흥미가 없으시다면, 오늘 제가 본 걸 잊는 건 물론이거니와 더는 붙잡지 않겠습니다.”

“…….”

“검사님?”

“10분.”

우영의 중얼거림에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영은 후우, 한숨을 내쉬며 못 이기는 척 머리를 뒤로 넘겼다.

“10분 드리겠습니다. 그 안에 제가 당신의 대화에 흥미를 갖도록 노력해 보시죠.”

* * *

“우와! 이제 지방선거도 진짜 얼마 안 남았네요.”

달력을 보던 강 계장이 중얼거렸다. 벌써 5월 초.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 시간의 흐름에 놀랄 틈도 없었다.

승진은 5월 일정을 체크하며 달력에 시선을 꽂고 있는 강 계장에게 화답했다.

“그러게요. 한 달 반 정도 남았나?”

“한 달 반이라……. 두 달 전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죠. 그러고 보니 신 검사님이 작업 들어가신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네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요즘 청사에서 뵙기가 참 힘들어요. 출근은 하시는 것 같은데 외근이 잦으신 것 같더라고요. 안 그렇습니까, 검사님?”

마침 주연이 자리를 비운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승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리는 강 계장을 보면서 거짓으로라도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그러네. 벌써 보름이네.

승진은 굳은 얼굴로 검사실 문 쪽을 흘긋거렸다.

[접근했어.]

[뭐?]

[한동안 연락 끊을 거다. 내 방에도 오지 마라. 집도 마찬가지야.]

금요일의 모임 이후, 오피스텔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승진에게 짤막한 말만 던진 우영은 보름 전 그렇게 사라진 이후 제대로 얼굴 한 번 볼 수가 없었다.

‘바로 옆방인데.’

저 문만 열고 나가면 우영의 검사실이 있고,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옆집이 우영의 보금자리이건만 어째서 이다지도 만나기 힘든 것인지.

물론 작업에 들어가면 연락을 끊는다든가, 말없이 잠적한다든가 하는 일은 꽤 흔했지만, 이번에는 이상하리만큼 느낌이 좋지 않아서인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우영이 굳이 반대를 무릅쓰고 이번 작업을 강행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더더욱.

‘되게 걱정되네.’

우영이 3번 용의자에 대한 작업에 들어가는 동안, 이번 사건을 공조 중인 승진은 그의 백업을 해 주기로 했다.

예를 들자면 우영이 3번 용의자인 이정후에게 접근하기 쉽도록 그에게 쏟아지는 업무를 대신 부담해 준다든가 하는. 그 탓에 우영이 맡아야 할 첨수부의 일까지 대신 처리해 주고 있는 승진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마찬가지였다.

굳이 제게 털어놓지 않고서 물밑 작업을 진행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차라리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것을.

‘이번 일만 끝나 봐라.’

지난 보름 동안 우영이 제대로 검사실에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승진은 인상을 썼다. 앞으로 보름, 최대 한 달 안에 이번 사건을 해결한 뒤 접근도 하지 못하게 했던 신우영을 마음껏 탐해 주겠다며 승진은 이를 갈았다.

Rrrr. Rrrr.

‘응?’

“아니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저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 구속이라는 게 그리 쉬운 것도 아니고요. 저희가 아무리 영장을 청구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다 통과가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언제쯤 오신다고요? 음, 그 시간대엔 검사님께서 자리를 비우실 것 같은데요. 법원에 가실 일이 있어서요. 내일은 어떠신지요?”

요란하게 울려 대는 전화벨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검사실의 직원들은 저마다 통화에 전념하고 있었다.

정오 이후 예정되어 있던 미팅으로 인해 자료를 정리하던 승진은 그칠 줄 모르는 전화기를 빤히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예, 중앙지검 백승진입니다.”

-…….

뭐야?

“여보세요?”

-대기업 간부의 비, 비리에 대해 고발할 게 있는데요.

[제가 아는 어떤 대기업 가, 간부가 곧 있을 지방선거의 당선 유력 후보들에게 금품을 건네고 접대를 하, 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회사 돈도 횡령하는 것 같고요……. 이 사람의 나쁜 행동은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 그래서 고발하고 시,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잔뜩 긴장했다는 것을 티 내고 있었다. 보통 때면 웬 건수냐 싶어 단번에 물었을 이야기였지만 마침 지선을 앞둔 시점에 걸려 온 전화인지라 지나치게 경계하게 됐다.

왠지 모를 묘한 냄새가 났다. 어쩌면 유력 당선 후보를 모함하기 위한 다른 쪽의 수작일 확률도 있어서, 승진은 겁을 먹은 상대를 일단 진정시킨 후 후일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골 아프네.”

흥미로운 사건을 눈앞에 뒀음에도 이상하게 머리가 지끈거리는 까닭은 아마도 제 신경이 다른 곳을 향해 있기 때문이리라.

청사 내의 다른 동료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터덜터덜 휴게실로 발걸음했던 승진은 커피 대신 따뜻한 코코아를 한 잔 뽑아 의자에 앉았다.

요 며칠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 미칠 지경이었다.

“어라? 백 검이, 너 밥 먹으러 안 갔냐?”

입맛도 없고 해서 일부러 코코아를 마시고 있던 승진의 귓가로 귀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승진이 슬쩍 고개를 들자 저와 함께 특수 제1부에 소속되어 있는 최현석 검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진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젖혔던 목을 바로 세웠다.

“선배님.”

“얼굴이 핼쑥하네.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어?”

최 검사는 아주 자연스럽게 승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같은 부서에 소속되어 있긴 하나,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한 지는 몇 달 되지 않았다. 그래서 승진은 눈앞의 남자가 영 불편하기만 했다.

빙긋 웃는 것으로 보아서 살가운 성격인 것 같은데 말이지.

“아뇨, 그런 거 없습니다.”

승진이 고개를 내젓자 최 검사가 ‘그래?’ 하고 묘한 콧소리를 흘렸다. 뭐지. 승진은 미소를 흘리며 ‘나도 여기 앉아도 되지?’ 하고 묻는 최 검사를 빤히 주시했다.

‘이미 앉았으면서.’

역시 잘 모르는 타인은 불편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날카롭던 성격이 조금 유해졌나 싶었지만 그것도 특정 인물, 즉 매일같이 얼굴을 부딪치거나 혹은 약간이나마 가까워진 인물들에 한정되어 있다.

이 버릇을 고치기는 해야 할 텐데.

승진은 밀크커피 한 잔을 뽑아 제 앞에 자리 잡는 최 검사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즘 많이 바쁜가 봐?”

“네, 뭐.”

“부장님도 그렇고 검사장님도 그렇고, 우리 부서에서는 이제 막 들어온 백 검한테 아주 기대가 크더라고.”

“아, 하하.”

“역시 목표는 검사장이냐?”

“……네?”

가시가 돋친 것처럼 들렸다면 제 착각일까.

승진은 미소를 그리며 묻는 최 검사를 바라봤다. 최 검사의 휘어진 눈꼬리가 이상할 정도로 짜증이 나서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쓸 뻔했다.

참아야지, 그래도 같은 청사 선밴데.

승진은 말없이 눈웃음을 그렸다.

자신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대꾸하지 않는 승진을 고요히 주시하던 최 검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목표가 검사장이라면.”

“선배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미안, 미안. 내가 돌려 말하는 거 잘 못 해서.”

“…….”

“그럼 그냥 물을게. 백 검이 너, 남자 좋아해?”

생긋 웃는 최 검사의 말에 심장이 철렁거렸다. 자신의 취향에 대해 공공연하게 알려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장에서 그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승진의 눈동자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커졌다가 곧 제자리를 잡았다. 들끓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흐응.”

승진은 그런 자신의 태도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최 검사를 응시했다.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글쎄요. 저는 딱히 남녀를 가리지는 않습니다만.”

“호? 바이냐, 그럼?”

“답해야 합니까?”

승진은 싱긋 웃으며 최 검사를 응시했다. 미동 없는 승진의 눈웃음에 움찔하던 최 검사가 돌부처처럼 그저 미소만 짓는 승진을 바라보다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벅벅 구레나룻 쪽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중얼거렸다.

“굳이 답할 필요는 없지. 뭐, 네 성생활에 관심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소문이 들리기에 물어본 것뿐이야. 내가 궁금한 건 또 못 참거든.”

“그렇습니까?”

“이거 뭐…… 도발 한번 했다가는 목이 베이겠다, 인마. 난 즉사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 그렇게 날 세울 필요 없어.”

“하하하.”

“이봐, 진짜야.”

“…….”

“진짜라고. 내가 너 건드려서 뭐하겠냐. 그랬다가 내 앞길 망치게? 이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명망 높은 백씨 집안사람들은 건드리는 게 아니라더라.”

승진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자 머쓱한 표정을 짓던 최 검사가 생긋 웃었다.

“난 너처럼 주목은 안 받더라도 검사 생활 오래 하고 싶다. 이 명예직은 길게 누릴수록 제맛이거든. 하하하!”

승진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최 검사에게서 서늘해진 눈을 원상태로 돌리지는 않았다. 휴게실이 떠나갈 정도로 웃던 최 검사가 그런 승진의 무표정한 반응에 흠흠, 헛기침을 흘렸다.

“그냥 지나가다 마침 네가 있길래 한번 던져 본 거야. 진짠가 아닌가 싶어서. 아까도 말했지만 호기심이 워낙 넘쳐서. 솔직히 그런 소문 들리면 궁금하잖냐. 뭐, 딱히 사실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만.”

“…….”

“떠보기나 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한창 주목받는 시기니 너도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휩싸이면 나중에 곤란해지잖냐. 하여간 우리 청에는 왜 이렇게 이상한 소문이 많이 나도는 건지……. 너도 그렇고, 첨수부 그놈도 그렇고.”

“선배님.”

“어?”

“첨수부 그놈은, 무슨 소립니까?”

승진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겼던 모양이다. 툴툴거리며 중얼거리던 최 검사의 말을 놓치지 않은 승진이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싸늘한 목소리를 흘렸다.

승진의 태도에 움찔거리던 최 검사가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터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 * *

[왜, 첨수부 신 검 있잖아. 너랑 매번 다투기만 하던. 그 자식한테도 너 못잖은 이상한 소문이 들리더라고.]

[이상한 소문이라뇨?]

[한마디로, 질 나쁜 놈들이랑 어울린다 이거지. 너 강남에 있는 리치라는 룸살롱 알고 있냐?]

[예, 뭐…….]

[거기서 신 검이랑 웬 재계 쪽 애들이 함께 있는 걸 목격한 애들이 있어.]

[네?]

[한서 그룹 계열이던가. 그쪽이었던 것 같은데, 나도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근래 청사에서도 잘 안 보이던데, 너 그 녀석 만나면 한 마디 좀 해 줘라. 한서 쪽이 후계 쟁탈 때문에 조금 뒤숭숭하거든. 그런데 뭐 마려운 불나방처럼 아무 불에나 뛰어들고 하면 나중에 큰코다친다고 말이다.]

불나방.

최 검사가 말했던 그 표현은 옳았다.

무엇이 그렇게 조급한 건지, 대검만 쳐다보는 우영의 태도가 확실히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제 평판을 깎아내릴 정도로 이번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박수를 쳐 줄 만한데, 현재 그가 수행하고 있는 방법들이 승진이 알고 있는 신우영답지 않아 은근히 화가 났다.

현재 우영이 이정후와 가까워지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중앙지검 청사 내에서 우영을 포함해 단 넷. 당사자인 우영과 승진, 그리고 그들의 상사인 유 부장과 한 부장뿐이었다.

민감한 시기였고, 소문이 나면 앞으로의 일에도 차질이 있을 거라 예상된 터라 비밀스럽게 움직이고는 있으나 그 때문에 우영에게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덧씌워지는 것은 역시 화가 난다.

‘멍청한 새끼.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다 못해 매정하기까지 한 우영을 생각하며 승진은 인상을 썼다.

“승진아!”

그때, 상념에 잠겨 있던 승진이 고개를 돌렸다.

“못난 놈.”

툭 던진 백 전 대법원장의 말에 승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승진은 쓴웃음을 흘리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말했다.

“또 뭐가요. 할아버지께서 부르셔서 왔고, 이렇게 즐겁게 밥도 먹고 있잖습니까. 이번엔 또 뭐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승진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묻자 백 전 대법원장이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전부 다 마음에 안 든다, 이놈아!”

“하…….”

“이 할애비가 그렇게 당부하고 또 당부했잖냐! 에스코트 철저히 하고, 어떻게든 계속 만나라고! 그런데 결국 그 인연을 파투 내 버려? 네놈이 제정신이냐! 제정신이야? 내가 안 의원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침을 튀겨 가며 외치는 백 전 대법원장의 음성이 룸 안에 가득 울린다. 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승진이 입을 열려 했지만 마침 백 전 대법원장의 옆에 앉아 있던 어머니 한 여사가 좌우로 머리를 흔드는 게 보였다.

승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귀가 쩌렁쩌렁하게 외쳐 대는 백 전 대법원장의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려 노력했다.

‘미치겠군.’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이냐. 아버지다.]

우영이 맡았던 사건들을 대신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판을 맡은 검사와 법원에서 만나야 할 일이 있었다. 자신이 오자 깜짝 놀라는 그녀에게 우영이 조사한 자료들을 건네준 후 법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걸려 온 전화에 승진은 조금 놀랐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상태라 무시하려 했지만 하필이면 아버지 백태운 P&K 대표가 걸어온 전화여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오늘 가족 모임 있는 거 알지? 문자로 장소 보내 줄 테니, 그쪽으로 오너라. 오늘은 전 가족 소집이다. 너도 예외는 아냐.]

백씨 일가는 매달 한 번, 유명 한정식집에서 가족 모임을 가졌는데, 근래 들어 승진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그 자리를 피하고 있었다. 그 원인의 대부분은 저만 보면 결혼을 부르짖는 할아버지의 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승진은 이미 차갑게 가라앉은 룸 안의 분위기를 살피며 슬슬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에이, 아버님. 너무 승진이한테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듣자 하니 안 의원 손자도 남자랑 맞선 본다길래 재미 삼아 나왔다던데요, 뭘. 그냥 인연이 아니었던 거죠.”

“맞아요. 그나저나 할아버지도 참, 어떻게 승진이한테만 맞선 자리를 만들어 주신 거예요? 저는요? 언니는요? 안 의원 손자분이면 예전에 뵌 적이 있는데, 엄청 좋은 느낌의 남성분이셨다고요! 왜 저 얄미운 승진이한테만 좋은 남자를 붙여 주시려고 한 거예요?”

그때 승진의 어두워지는 얼굴을 주시하던 한 여사가 백 전 대법원장에게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 말에 동의라도 한다는 듯 승진의 둘째 누나 미진이 입을 쭉 내밀며 백 전 대법원장에게 툴툴거렸다.

미진의 태도에 당황하던 백 전 대법원장은 에잉, 하고 쯧쯧 혀를 차더니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한 교수, 너도 그런 소리 하는 거 아니다. 네가 그렇게 유하게 구니 저 녀석이 천지 분간 못 하고 사내새끼가 좋다며 설쳐 대는 거잖냐! 그리고 미진이 너는 이 할애비가 주선한 맞선 자리에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어머, 할아버지도 참. 대한민국 검사 못잖게 바쁜 사람들이 우리 대한민국 의사라고요. 잠잘 시간도 없구만, 맞선은 무슨.”

“그러면서 무슨 맞선 자리를 탐내고 그래!”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좋은 남자는 저랑 언니한테 킵해 둬야지, 왜 대뜸 승진이한테 넘기시냐는 말인 거죠.”

“그건 안 의원 손자가 10년이 넘게 여자를 멀리하길래 혹시나 해서 그런 거다, 이 녀석아.”

“어머, 그런 거였어요?”

싱긋 웃는 미진을 향해 인상을 쓰던 백 전 대법원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다 묵묵히 앉아 있는 승진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에잉, 쯧쯧. 사내새끼랑 붙어먹는다길래 치욕을 무릅쓰고 괜찮은 녀석을 붙여 주려 했더니…… 그새를 못 참고 사고를 쳐?”

“…….”

“지금 만나는 놈이 그렇게 좋으면 집에 데려와 보지 그러냐! 대체 네놈이 만나고 있는 사내새끼가 어떤 놈이길래 우리 앞에 못 데려와? 진이 네 녀석, 한 놈한테밖에 안 선다며! 그렇게 낯 뜨거운 말을 이 할애비 앞에서 볼 때마다 늘어놓는 놈이, 왜 그놈을 소개하지 않냐는 말이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놈이냐? 그래서, 그게 부끄러워서 이 할애비한테 데려오지도 않는 거야?”

“…….”

“백승…….”

“……오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승진의 눈동자가 변했다. 두 눈을 치켜뜬 채 백 전 대법원장을 응시하는 승진의 눈빛에 흠칫 놀란 백 전 대법원장이 입을 다물었다.

승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만약 그 녀석을 할아버지 앞에 떡하니 대령해 놓으면, 할아버지께서 그 녀석을 받아들이실 수나 있겠습니까?”

“뭐, 뭐야?”

승진은 놀라 말을 더듬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 녀석이 할아버지의 기준에 차지 않으면 틀림없이 그 녀석 인생을 망칠 게 뻔한데, 제가 어떻게 그럽니까?”

“……!”

“그걸 아니까 안 데려오는 겁니다. 소개할 일도 없을 거고요. 적어도 할아버지께서 힘 잃으시기 전까지는 그 녀석 볼 일 없으실 테니 꿈 깨십쇼.”

“이, 이 녀석이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이 정도면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처리 못 한 일도 있어 청사로 돌아가 봐야 하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 이노옴!”

분노로 가득 차 온몸을 부르르 떠는 백 전 대법원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승진은 저를 향해 날아오는 유리잔을 슬쩍 피했다.

쨍그랑.

바닥과 유리잔이 부딪쳐 요란한 소리가 나자 방 밖을 지키고 있던 직원이 깜짝 놀라 뛰어 들어왔다. 승진은 그들이 열어 놓은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이놈, 거기 안 서냐!’를 외쳐 대는 백 전 대법원장의 외침을 무시했다.

‘아.’

피곤하네.

우영이 이정후에게 접근하게 된 이상, 서호와 자신이 따로 만남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상호 협의하에 각자의 집안에 맞선에 대해 제대로 잘 이야기하기로 한 게 열흘 전의 일. 그때 이후로 승진의 이야기만 나오면 길길이 날뛰고 계신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가급적이면 할아버지와 맞대면하는 것을 피해 왔던 건데.

결국은 이렇게 됐군.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저를 향해 소리치던 백 전 대법원장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승진은 터덜터덜 걸으며 룸을 벗어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요즘 왜 이러냐…….’

사실 사내새끼와 붙어먹는 자식이다, 어쩐다 하더라도 백 전 대법원장이 결국 하려는 일은 승진의 등에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치욕을 무릅쓰고 안 의원에게 그의 손자와 자신의 맞선을 주선한 거겠지. 막내 손자를 아끼는 백 전 대법원장의 의도를 승진이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제길.’

그러나 그런 백 전 대법원장의 호통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제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백승진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불안, 초조, 염려 등등. 근래 들어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 모든 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자신이 짊어진 것처럼 구는 신우영으로 인해 발생했다.

‘망할 자식.’

갈증이 짙어진다. 고작 보름 정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고 청사에서도, 오피스텔 내에서도 스치듯 보았던지라 더더욱. 바로 옆집에 사는데도 마음 편히 찾아갈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못내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참을성이 이렇게 없었나?’

인내력 부족을 실감하게 된다. 신우영과 관련된 일은 항상 그의 심기를 어지럽혔지만 요즘 들어 더했다. 치기 어린 고등학생도 아닌데, 어째서 이렇게 참을 수가 없는 걸까.

“진아.”

주차요원에게 차를 가져와 줄 것을 부탁한 후 찬바람을 맞고 있을 때였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를 발끝으로 건드리고 있던 승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시야로 백씨 집안의 장손이자 재작년 총선 때 본가의 지역구에서 당당하게 국회의원이 된 우진이 빙긋 웃으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형.”

저보다 열 살은 더 많은 큰형을 향해 묵묵히 머리를 숙인 승진이 어색하게 웃자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온 우진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차 올 때까지만 얘기 좀 할까?”

승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제 곁에 선 우진을 흘끔거렸다.

백 전 대법원장의 엄격한 훈육을 받으며 자라 온 우진은 어릴 적부터 매우 어른스러웠다.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아 제멋대로 구는 것이 익숙해진 승진과 달리, 항상 차분했다. 나이가 들수록 기대주에서 집안을 이끄는 기둥으로 성장한 그는 현재 백 전 대법원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또 아버지와 어머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제가 있으니, 승진이가 꼭 대를 잇지 않아도 되잖습니까? 저 아이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어떠신지요.]

승진이 커밍아웃을 하고 절연 선언을 당했을 때, 어머니와 함께 백 전 대법원장을 설득한 사람도 우진이었다.

돌연 당시의 일이 생각나 미간을 좁히던 승진은 뒷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저기, 미안해.”

“뭐가?”

“아니, 아까 할아버지 앞에서 한…… 말.”

“알고는 있구나.”

“……뭐, 그렇지.”

씁쓸하게 말끝을 흐리는 승진을 보고 빙긋 웃던 우진이 고개를 떨구는 승진의 어깨 위로 손을 얹었다.

“사과는 나한테 하지 말고 나중에 할아버지께 직접 해. 뭐니 뭐니 해도 할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아이는 너니까. 할아버지도 다 너 잘되라고 저렇게 걱정하시는 거다. 네가 이상한 놈한테 꼬일까 봐.”

“형은 내가 이상한 놈한테 꼬일 것 같아?”

“아니. 오히려 네 녀석한테 꼬일 사람이 걱정되기는 한다만.”

“뭐야.”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승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우진이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니?”

“어?”

“아까, 평소의 너답지 않던데. 뭔가 힘든 일이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도 좋다. 너는 항상 우리한테는 잘 얘기하려 들지 않으니까. 나이가 들어도 너는 우리의 귀여운 막내다, 진아. 그, 그러니 그 남자…… 친구랑 잘 안 풀리는 게 있으면, 이 형이 상담이라도…….”

“풉.”

“……?”

“됐습니다, 형님! 방금 진짜 이상한 말 한 거 알아? 남자 친구라니. 큭큭. 소름 돋게 남자 친구는 대체 표……!”

팔의 털이 쭈뼛거리는 것을 느끼며 큭큭 웃던 승진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 다음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기 때문이다.

승진의 곁에 서 있던 우진이 돌연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승진의 눈길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던 승진은 입을 여는 우진의 목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같은 청사에서 일하지? 신우영이라고 했던가.”

승진은 우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멀리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상대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우진은 냉담한 표정과 함께 말을 이었다.

“너랑 공조했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나. 어머니께서 옆집 검사라며 칭찬을 하셨던 게 기억난다.”

“아.”

“자주 부딪치는 사이니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가급적이면 저 검사랑은 어울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

“어?”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저기 옆에 있는 한서 전자 부사장은 질이 나쁜 녀석이다. 그런 놈이랑 식사를 할 정도니 대충 가늠이 되지.”

“…….”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꽤 괜찮은 인물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요즘 그의 행보에 실망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가 보더라. 할아버지 귀에 들어가기 전에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

쓴웃음을 흘리는 우진의 목소리가 심장을 파고들어 승진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봐, 언제까지 모르는 척해야 돼? 나 슬슬 한곈데.>

불쾌감이 찌든 문자에 미간이 꿈틀거렸다. 단순히 글자를 봤을 뿐임에도 이 메시지를 보내 온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으며 전송 버튼을 눌렀을지 짐작이 가능했다.

한계.

‘한계라.’

누구는 한계가 아닌 줄 아나.

우영은 무표정한 눈으로 핸드폰을 응시했다.

백가 녀석과 살을 부딪치지 못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다. 제 아래서 숨을 헐떡이던 승진의 숨결과 아찔한 살 내음이 잊히지 않아 한밤중에도 몇 번씩이나 자다가 깨곤 했다. 하지만 작업이 완성되기 전까지 선을 그은 것은 우영 자신이었고, 작업 상대가 완벽하게 넘어온 상황도 아닌지라 섣불리 승진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인내라고는 모르는 자식.’

얼굴을 구기기는 했으나 무의식적으로 실소가 터져 나올 뻔했다. 심장 한편이 뛰어 우영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큰일이군. 며칠 만에 온 문자 하나에 이렇게 동요하는 것을 보면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비단 승진뿐만이 아니었다.

우영은 갈증이 서려 있는 문자를 무표정하게 응시하다 끝내 삭제 버튼을 눌렀다. 제게서 답이 오지 않는다며 짜증을 낼 승진의 얼굴이 선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나저나…….

휙휙 넘어가는 창밖의 풍경을 응시하던 우영의 검은 눈동자가 제 옆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에게 꽂혔다.

[신 검사님은 단순 검사직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무슨 뜻입니까?]

[보다 높은 곳을 노리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

[저는 야망 있는 분들을 서포트하는 걸 즐기죠. 제가 알기로 검사님은 아직 에스컬레이터는 타지 않으신 걸로 아는데, 어떻습니까? 제가 검사님의 앞길에 꽃을 뿌려 드려도 될는지요?]

[저의 스폰서라도 되시겠다는 겁니까?]

[하하, 낯 뜨거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요즘 시기에는 꽤 민감하게 들릴 수 있는 발언입니다.]

[…….]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스폰서가 아니라 검사님의 ‘협력자’가 되고 싶습니다.]

[협력자?]

[강직한 분이시라 이런 제안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으시겠지만, 가끔은 이해관계가 맞는 사람과 손을 잡고 더 큰물로 뛰어드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고 답 주시죠. 실망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보름 전, 자신을 설득시켜 보라는 우영의 말에 이정후는 노골적인 발언을 쏟아 냈다. 어차피 그에게 접근하려고 했던 우영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몇 번의 튕김 끝에 못 이기는 척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우영의 시선을 느낀 건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이정후가 입을 열었다. 매사 미소를 잃지 않는 이정후의 얼굴을 보자니 속이 뒤틀려 미간을 찌푸릴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 낸 우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이정후는 짧은 우영의 답변에 입꼬리를 올리고선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일전에 검사님께서 흘려 주신 정보 덕분에 다행히 단속은 피했습니다. 이번에도 도움을 받게 되겠군요.”

“받는 것이 있으면 드리는 것도 있어야죠. 별거 아니니 개의치 마십시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우영은 여전히 멈출 줄 모르는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체 어딜 가는 겁니까?”

아까부터 신경이 쓰여 말하자 ‘아!’ 하고 이정후가 탄성을 흘리는 게 들려왔다. 그는 안경 너머로 경계의 시선을 쏟아 내고 있는 우영에게 싱긋 미소 짓더니 말했다.

“근래 도움도 많이 받고 해서, 간단한 식사나 대접할까 해서 말입니다.”

“아.”

“슬슬 허기질 시간인 것 같아서요. 협력자가 아닌 ‘친구’로서 사는 거니, 부디 사양치는 마십시오.”

우영은 그 말에 미간을 좁히다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 벌써 8시 반. 그러고 보니 지난 보름 동안은 이정후에게 쓸 만한 정보를 건네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기지 못했다.

‘아, 마침 도착했군요.’ 하고 말하는 이정후를 바라보다 창밖을 응시한 우영은 그들을 태운 차가 조선 시대 대궐 같은 한정식집으로 들어가고 있음을 인지했다.

‘흠.’

회식 때나 드나들던 한정식집의 주차장에 멈춰 선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을 둘러봤다.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차들이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차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억대는 넘어 보이는 검은색 차들이 줄지은 모습은 장관이었다.

서울 외곽에서도 꽤 변두리 지점이라 여겼는데, 아무래도 이 한정식집의 주인은 산 하나를 통째로 소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차된 차들을 바라봤다.

“검사님?”

그러다 저를 부르는 소리에 싱긋 웃으며 이정후를 응시했다.

“이런 곳에서까지 검사 대접을 받고 싶진 않군요.”

“네?”

“괜히 법에 얽히게 되면 피차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친구로서 밥을 사 주신다고 하셨으니, 편하게 이름을 불러 주시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우영 씨?”

“얼마든지.”

“그럼 우영 씨도 저를 편히 대해 주십시오. 어차피 나이도 세 살밖에 차이 나지 않으니까요.”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

자신과 엇비슷한 키의 정후와 나란히 걸으며 대화를 주고받던 우영의 입에서 목소리가 뚝 멈췄다.

‘백승진?’

저 멀리, 주차장 입구 쪽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이 승진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조금 작은 키의 사내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우영이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꽂고 있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이정후가 아아, 탄성을 흘렸다.

“그 유명한 백씨 집안 자제분들이군요.”

우영은 흠칫 놀랐다. 자신이 어떤 눈을 하고 있었는지 이정후에게 들켰을까. 순간 놀랐지만 두근거리던 심장은 비교적 빨리 가라앉았다. 이정후는 우영이 아닌 승진과 정체 모를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영 씨도 알고 계실 백 검사님과…… 그분의 형님 되시는 분입니다. 백우진 의원이죠. 저번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되셨습니다.”

“형님?”

우영이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승진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자 이정후가 미묘한 목소리를 흘렸다.

“모르셨습니까?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승진에게 열 살 위의 형이 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그래서 잠시 잊고 지냈다.

우영은 승진과 그 형을 말없이 응시하다 미소 짓는 이정후를 바라봤다. 속셈을 알 수 없는 이정후의 검은 눈이 우영의 생각을 읽으려 하는 듯했다.

우영은 픽, 실소를 흘렸다.

“백 검과는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어서 말입니다. 딱히, 관심도 없고.”

“…….”

우영이 이번엔 짙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실은 저번 일 이후 완전히 틀어져 버렸습니다. 별로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지만.”

“아, 이런.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실례했군요.”

“괜찮습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죠. 그나저나 아직 멀었습니까?”

대수롭지 않게 손을 내저은 우영은 승진 일행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이정후에게 물었다. 이정후가 묘한 미소를 짓더니 다시금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 * *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인지라 직접 뵙고 말씀드리고 싶은데, 3시쯤 저희 회사로 방문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영은 제 앞으로 도착한 문자를 말없이 바라봤다.

중요한 일이라.

‘슬슬 넘어올 때도 되지 않았나?’

공을 들이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불안해지는 마음 또한 숨길 수가 없다. 이제 제게도 제안이 와야 할 시점 같은데, 아직도 재고 있는 건가.

우영은 이정후가 보내 온 문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현재 시각, 2시 10분.

한정식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난 후 사흘 정도가 흐른 뒤에 온 문자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무시하기에는 꽤 중요해질 것 같아, 고민이 됐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영은 굳은 얼굴로 문자를 응시했다. 그러다 결국 후우,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 계장님.”

“헉! 예, 예! 검사님!”

끙끙거리며 수사 기록을 바라보고 있던 양 계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간인지라 졸고 있었던 모양이다.

윤희가 그 모습을 보며 풉, 웃음을 터뜨렸지만 우영은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슈트 상의를 챙겨 들고 양 계장에게 말했다.

“오늘 처리하지 못한 일은 내일 하겠습니다.”

“예?”

“오늘까지 마감해야 하는 일이면 백 검 쪽에 건네주십시오. 그럼 알아서 해결해 줄 겁니다.”

“어, 하, 하지만!”

“부탁드립니다.”

우영은 깜짝 놀라는 양 계장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인 후 검사실을 벗어났다. 검사실 문을 닫는 동안 양 계장과 윤희의 한숨 섞인 음성이 들려왔으나 무시했다.

우영은 본관 10층의 중앙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아.”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 안으로 발을 내디디려던 우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특수부의 몇몇 동료들과 함께 점심이라도 먹고 오는 모양인지,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승진이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승진의 눈동자에 온몸의 혈관이 들끓었다.

‘제길.’

승진과 마주치면 이렇게 뻣뻣한 반응을 보일 것 같아 우영은 의식적으로 그를 피해 왔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벌써 한 달을 향해 달려가다 보니 점점 익숙해지나 싶었는데, 승진의 맑은 눈동자와 부딪치면 다시금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참을성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진가.’

더는 승진의 눈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우영은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봐, 신 검.”

그때였을까.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를 기다리던 우영은 저를 부르는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우영이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눈을 옮기자 자신을 못마땅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몇몇 검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우영을 향한 적대적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우영이 빙긋 웃으며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들?’ 하고 묻자 팔짱을 끼고 있던 특수부의 하준오 검사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요즘 묘한 짓 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대체 왜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영이 유려한 미소로 답하자 준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준오는 특수부에서도 자주 사고를 칠 만큼 다혈질인 사람이었는데, 생각하는 것이 전부 얼굴에 드러나는 편이었다.

우영이 생글생글 웃자 준오는 더욱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아, 무슨 말인지 몰라? 너, 안 그러던 놈이 그러고 다니니까 더 황당한 거 알아?”

“네?”

“원래부터 그렇게 유혹에 흔들리는 놈이었어? 와, 그럼 내가 너 진짜 잘못 봤다. 넌 그런 것에 끄떡 안 할 줄 알았다고!”

“하 검, 그만해.”

“뭘 그러지 마― 야, 유 검, 백 검. 너희도 이 녀석 소문 들었지? 이 녀석이 돈에 환장해서, 읍!”

“하하, 미안. 먼저 실례할게.”

준오가 열이 오른 얼굴로 외치려는 순간, 그의 뒤편에 서 있던 특수부의 유태현 검사가 준오의 입을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태현에게 붙잡힌 준오가 읍읍거리며 무어라 외쳤지만, 우영의 시선은 그가 아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승진에게 꽂혀 있었다.

우영은 냉랭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승진을 바라보다 한숨 섞인 음성을 흘렸다.

“비켜 주지그래. 엘리베이터 오래 잡고 있으면 욕 듣는다.”

그 말에 승진이 입구를 막고 있던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우영은 안으로 들어갈 길이 생기자 발을 앞으로 뻗었다.

자신이 이런 짓을 한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어 갔기에 청사 내에서 돌고 있는 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것 역시 유도했던 일이므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동료들의 반응과 승진의 차가운 모습을 보니 속이 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난처하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온 우영은 1층 버튼을 누른 뒤 뒤편으로 물러나려 했다.

‘……응?’

하지만 그런 그의 손을 덥석 잡고 엘리베이터의 문 쪽으로 제 등을 밀어 버리는 누군가의 행동으로 인해 우영은 비틀거렸다.

쾅!

등 뒤로 딱딱한 문의 촉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탄 엘리베이터가 흔들렸다. 거의 닫힐 뻔한 엘리베이터 문의 움직임이 뚝 멈추는 게 느껴진다.

“읍!”

우영은 갑자기 밀려들어 오는 타인의 숨결에 짧게 신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떨어져 나가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눈을 크게 떴다. CCTV의 사각지대였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우영이 화를 내기 위해 입을 벌리려 했다.

“조심해라.”

그러나 우영이 뭐라 말을 하기도 전, 잡고 있던 우영의 손목을 풀어 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속삭였다.

드르륵.

우영은 그 말을 한 뒤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사라지는 승진의 등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우영이 한서 전자 본사 건물에 도착한 시각은 2시 50분경이었다. 이정후가 미리 말을 해 둔 건지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안내된 그는 18층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서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영은 생긋 웃는 서호의 연갈색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봤다.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그에게서는 묘한 위화감이 풍겼다.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릴 뻔했으나 우영은 빙긋 미소 지었다.

서호는 우영의 눈웃음에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사장님께서는 오후 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10분 뒤면 돌아오실 테니 부사장실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그러죠.”

“이쪽으로.”

우영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몸을 돌린 서호가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상하로 네이비 슈트를 갖춰 입은 서호의 등을 쳐다보던 우영은 그의 뒤를 따랐다.

[아참,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우리 안 변이랑 백 검사랑 사이가 틀어졌다더군요.]

[예?]

[이제 막 시작한 연인이라 들었는데,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군요. 조금 아쉬운 감도 있습니다. 검찰 쪽 인맥을 늘릴 기회였는데 말이죠.]

얼마 전 있었던 식사 도중 툭 던진 이정후의 말이 머릿속을 아른거렸다. 이정후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승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핑계를 대며 이정후에게까지 승진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자가, 이제는 승진과의 이별을 흘렸다니. 이 뱀 같은 변호사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겉으로는 저와 승진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실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영은 부사장실로 안내되는 복도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적대감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렇게 저를 경계하시면 오히려 부사장님의 의심을 살지도 모릅니다.”

우영이 그 마음을 거두어들인 것은 어느새 안내된 부사장실 앞에서였다. 달칵 문을 열어 주며 우영에게 미소 짓고 있던 서호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말했다.

우영은 휘어지는 서호의 두 눈을 빤히 내려다보다 그의 얼굴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 겁니까?”

그러자 서호가 고개를 들어 올려 우영을 응시했다. 우영의 방패용 안경 너머로 뜻을 읽을 수 없는 서호의 눈동자가 보였다.

검찰 쪽에 협력하기로 했던 서호의 태도가 모호해 짜증이 치밀었다. 이정후의 비서 겸 변호사이면서 자신이 주는 정보를 받아먹기만 하는 서호에게 약간의 분풀이를 해 버리고 말았다.

‘아까 일 때문인가.’

거의 한 달 동안 쌓여 있던 불만이 왜 하필 이 남자 앞에서 터져 버린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중앙지검의 본관 엘리베이터 내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우영은 날이 선 제 태도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서호에게 인상을 써 보이고는 열려 있는 부사장실 앞으로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우영은 대답 않는 서호를 내려다보며 홱 몸을 돌렸다.

“부사장님이 오실 동안 저쪽에 앉아 있겠…….”

“……곧.”

응?

“검사님, 커피나 녹차, 둘 중 어떤 것을 드시겠습니까?”

나지막하게 깔리는 서호의 말을 들었나 싶었는데, 금세 상황을 전환시키는 음성으로 인해 그마저도 차단당했다. 왜 그런 태도를 취하나 했더니 부사장실 벽 구석에 붙어 있는 CCTV가 보였다. 우영은 ‘녹차 부탁드립니다.’라고 짧게 말한 후 소파에 착석했다.

‘후우.’

머리가 지끈거린다. 째깍째깍 울리는 부사장실의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우영은 결국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선 눈을 내리깔았다. 10분 뒤에 온다고 했으니, 아직 이정후를 대면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조심해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 승진이 짧은 입맞춤과 함께 속삭인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돌겠군.’

겨우 참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끈이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슬슬 나도 한곈데. 승진만 아니었더라면 이번 일 따위는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우영은 소파 뒤로 고개를 젖혔다.

[뭐? 또?]

[이정후가 필요하답니다.]

[…….]

[어려울까요?]

[아니, 뭐 협조하기로 한 이상 그런 건 아니지만……. 장 부장이 조금 신경질을 내던데. 어찌 된 셈인지 마약수사과 일이 전부 허탕이라며. 신 검, 너 너무 퍼 주고 있는 거 아니냐.]

[대어를 잡기 위해서 신선한 미끼 투척은 기본이죠. 나중에 일이 잘 해결되면 장 부장님도 이해해 주실 겁니다.]

[하하, 그 전에 네가 잡혀갈 수도 있으니 적당한 선에서 끊고 슬슬 작업 마무리 지어.]

[…….]

[그나저나 이정후는…… 아직도 말 안 꺼내냐?]

미꾸라지 같은 자식.

대체 어디까지 저를 이용할 심산인지, 이정후는 미끼를 물어야 할 타이밍을 몇 번이나 피해 갔다. 저를 위해 강력부 마약수사과의 단속 일정을 알아 와 주던 한형석 부장에게 우영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상이면 자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다. 이미 청사 내에서 들려오는 소문이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것도 알고, 몇 분 전 본관에서 있었던 특수부 선배들의 태도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지방선거일까지 이어진다면 결국 무언가 터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지난주부터 제 뒤를 졸졸 따르는 기자들의 움직임도 느껴졌으니까.

‘골치 아프게 됐군.’

이럴 줄 알았으면 승진의 말대로 직접 작업하지 말 걸 그랬나.

잠시 심란한 마음이 일었으나 우영은 피식 웃었다.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확실히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은 자신이었다. 충분히 모험을 걸어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몇몇 사소한 평판의 하락 따위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면 별거 아니었다.

우영은 복잡한 머리를 정리한 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뭡니까.”

우영이 스르륵 눈을 뜨자마자 생긋 웃고 있는 타인의 얼굴이 보였다. 언제 들어온 건지 이정후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승진 아닌 사내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우영은 미간을 좁혀 버렸다.

“신 검사님은 안경을 벗은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군요. 올린 머리도 내리시면 지금보다 훨씬 더 부드러워 보이실 것 같은데.”

“지금도 충분히 부드럽다고 생각합니다.”

“…….”

“고개를 좀 들고 싶은데…… 부사장님의 턱과 부딪치고 싶지는 않으니 비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하하. 검사님이 골똘히 생각하시는 모습이 흥미로워서요. 무례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우영은 제 말에 뒤로 물러난 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이정후를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허벅지 위에 올려 두었던 안경을 다시 쓴 뒤 제 앞으로 다가와 착석하는 이정후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회의는 끝나셨습니까?”

“예, 덕분에요.”

“돌려 말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으니 바로 묻겠습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뭡니까?”

우영이 날카로운 눈을 빛내며 묻자 ‘아!’ 하고 탄성을 터뜨리던 이정후가 입을 꾹 다문 우영을 빤히 주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를 피하지도 못한 채 그저 바라보고만 있던 우영은 짧게 콧소리를 흘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이정후를 응시했다.

누가 봐도 영업용 미소라는 것을 느낄 만큼 생글생글 웃던 이정후가 천천히 우영의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커다란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이정후의 손바닥에서 짙은 담배 냄새가 풍겨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힌 우영이 이정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부사장님?”

날이 선 우영의 대꾸에 싱긋 입꼬리를 올리던 이정후가 보드랍게 우영의 뺨을 쓸며 중얼거렸다.

“길게 만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잘 흥미를 갖지 않는 편인데, 당신은 꽤 관심을 가지게 되는군요.”

……뭐?

“아무래도 ‘그런’ 장면을 목격한 후 만나게 돼서 그런가.”

작게 중얼거린 이정후의 손가락이 우영의 뺨에서 목덜미로 스르륵 내려왔다. 우영은 CCTV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남자인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는 이정후를 응시했다.

“저는 남자입니다만.”

“다른 남자에게 외면당한 후 상처받은 남자이기도 하죠.”

이정후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의 손가락은 어느새 우영의 목젖을 더듬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날 일이 매우 신경 쓰였습니다. 당신, 아주 버려진 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거든.”

우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안 변이랑 백 검사가 헤어졌다니 당신이 흔들릴까 봐 두려웠어.”

“…….”

“백 검사 따위는 그만 신경 끄고 나랑 놀아 보는 건 어때?”

그 말을 끝으로 싱긋 웃은 이정후가 입을 다물고 있는 우영의 눈가에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우영은 그런 이정후의 넥타이를 향해 손을 뻗더니, 있는 힘껏 그것을 움켜쥐고선 비틀었다.

“윽!”

우영의 거침없는 행동에 오히려 이정후가 소파 위로 쓰러졌다. 우영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이정후의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정후의 잿빛 넥타이를 꽉 움켜쥔 손을 내리더니 비릿하게 웃으며 저를 올려다보는 이정후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깔리는 것엔 흥미 없는데.”

그러자 눈을 크게 뜬 이정후가 쿡쿡 웃더니 중얼거렸다.

“그거 우연이군. 나도 까는 것밖에 못 하는데.”

서늘하게 울리는 이정후의 말을 들으며 미소 짓던 우영이 손을 탈탈 털었다.

“그럼 함께 뒹구는 것은 불가하겠군요.”

순식간에 태도를 전환한 우영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던 이정후가 풋, 실소를 터뜨렸다.

“애석하네요. 신 검사님은 울리면 재미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말이죠.”

“부사장님도 마찬가집니다. 당신 정도의 사람이라면 까는 것에도 흥미가 생기는데 안 된다니 어쩔 수 없죠.”

“하하, 미안하지만 내 엉덩이를 내주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피차일반입니다.”

이 녀석에게 엉덩이를 내줄 바에야, 차라리 백승진에게 ‘평생’ 엉덩이를 내어 주는 것이 낫다.

우영은 진심이라곤 하나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이정후를 향해 빙긋 웃었다. 조금 전 제 목젖을 스쳤던 기분 나쁜 손길이 잊히지 않았지만 애써 무시한 채 상대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정후가 짧게 숨을 흘리더니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유혹에 넘어오시지 않으니 장난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본론부터 말씀드리면.”

우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친구’가 된 의미로 검사님을 제 프라이빗 파티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뭐?

“프라이빗…… 파티?”

우영은 어느새 들어온 서호에게서 커피를 건네받고 있는 정후에게 의아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런 우영의 시선에 싱긋 웃던 정후는 호로록 입술 위로 커피 잔을 가져다 대고선 말을 이었다.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리더가 되어 움직이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한서의 부사장인 저는 그 범위가 더 넓은 편이죠. 그러다가 우연히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분들과 공식적인 자리에선 할 수 없는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만든 모임입니다.”

“검사님, 녹차입니다.”

정후에게 커피를 건네준 뒤 제게 찻잔을 내미는 서호를 흘긋거리며 우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정후는 그런 우영을 말없이 지켜보며 싱긋 웃었다.

우영은 말없이 녹차를 들이켰다.

입 안 가득 퍼져 가는 녹차 향이 왠지 모르게 떫다.

“그 모임에, 저도 끼어도 되는 겁니까?”

“하하,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이번 한 달 동안 제가 알게 모르게 신 검사님의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하는 의미에서라도 반드시 초대하고 싶습니다.”

“…….”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우영은 고민하는 척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서호에게 물러가라는 고갯짓을 한 정후는 달칵, 부사장실의 문이 닫히자 말을 이었다.

“잠자리 파트너는 되지 못하더라도, 그런 초대 정도는 받아 주실 수 있겠죠?”

노골적인 발언에 미간을 좁힐 뻔했다. 우영은 스스로가 무슨 말을 꺼낸 건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눈으로 말을 마친 이정후를 응시했다. 백 년 묵은 구렁이도 이보다 능글맞지는 않으리라.

분명 입 안에 독니를 숨겨 두고 있건만 아직은 전부 드러내지 않고 있는 이정후가 미끼인지, 아니면 진짜 제안인지 알 수 없는 덫을 놓고 있었다.

[조심해라.]

오후의 엘리베이터 안, 그 말을 흘리며 우영을 지나치던 순간 언뜻 보았던 그의 눈빛이 잊히질 않는다. 짧게 일렁이던 검은 동공 안에 차마 제게 하지 못한 말이 숨겨져 있는 듯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승진은 찌르르, 전율이 이는 사타구니 사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쳇, 입술을 삐죽였다.

일단 오늘 반찬은 그거면 되려나.

신성한 검사실 안에서 그 짓을 할 수도 없고.

승진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브리프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응?’

대부분의 검사들이 퇴근해 버린 본관 10층의 불 꺼진 복도를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였다. 승진은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 문자 메시지 도착 소리에 무심하게 주머니를 뒤적이다 우뚝 멈춰 섰다.

<오늘 밤 이정후가 움직일 겁니다.>

서호의 문자였다.

* * *

“어떻게 생각하냐?”

특수 1부의 유재익 부장이 미간을 좁히며 승진의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핸드폰 속에는 오늘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만이 적힌 간단명료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오후 10시 23분.

승진의 연락을 받고 급히 중앙지검으로 소집된 유 부장과 한 부장, 그리고 두 검사실의 계장들은 브리핑 룸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영이 이정후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면서, 두 계장들 역시 이번 일에 투입됐다는 점은 홀로 이번 사건 진행을 담당하던 승진에게 적잖은 도움이 됐다.

머리를 맞댈 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무척이나 든든한 일이니까.

“끙.”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과 달리 홀로 움직이는 우영이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승진은 유 부장의 말에 끙, 한숨만 흘리는 한 부장을 힐긋거렸다. 한 부장은 까끌까끌한 턱 끝을 손가락으로 쓸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한 부장이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강 계장이랑 양 계장 생각은 어때?”

유 부장과 한 부장만큼이나 고심하던 두 계장들 역시 대답하기를 꺼렸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급히 브리핑 룸으로 달려왔던지라 그들의 옷차림은 평소보다 후줄근했다.

두 부장의 눈길을 받은 두 계장 중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백승진 검사실의 강 계장이었다.

“안서호가 허투루 말할 사람도 아니고. 절호의 기회 아니겠습니까?”

“파티 시작 시간이 11시니, 지금이라도 경찰 쪽에 연락을 넣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가장 좋은 건 사건 현장을 급습해서 모조리 잡아들이는 거니까요.”

강 계장의 말에 동조하며 눈을 빛내는 양 계장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가 당장이라도 전화기를 들 기색으로 부장검사들을 향해 말하자 승진의 눈이 더욱더 가라앉았다.

“그럼 진짜 칠까?”

“다 잡아들일 수 있으려나.”

“몇몇은 빠져나가겠지. 하지만 근래 우리가 워낙 당했고, 또 정보를 퍼다 주고 있으니 한 번쯤은 반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

“이봐, 백 검. 자네 생각은 어때?”

이정후가 움직일 거라는 안서호의 문자를 보자마자 상사들과 신뢰할 수 있는 부하 직원을 청사까지 불러들인 사람은 승진이었다. 승진의 어두운 얼굴을 보자마자 상황을 직감한 동료들이 머리를 맞댄 채 고뇌하기 시작했고, 지금 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승진은 논의가 시작된 지 20여 분 만에 제게 말을 거는 특수부 유재익 부장검사의 시선과 조우했다. 첨수부의 한형석 부장검사 역시 비슷한 뜻을 담은 시선을 보내고 있자 속이 울렁였다.

승진은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안서호 씨가 이번 일에 협조하고 적잖은 도움을 준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덕분에 신 검이 3번 용의자에게 접근할 수 있었죠. 하지만…….”

“하지만?”

승진은 제게로 쏠린 시선을 담담하게 응시하며 대답했다.

“아직 신 검한테 연락이 안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브리핑 룸 내의 시선들이 흔들렸다. 승진이 지독하게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 검이 연락할 때까지?”

“예.”

한 부장의 물음에 대답하는 승진에게 망설임이란 없었다. 한 부장은 즉각적인 승진의 답변을 곱씹어 보다 유 부장을 응시했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유 부장이 승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너 요즘 신 검 두고 무슨 소리 오가는지 알고 있지? 오죽하면 검사장님이 그 녀석에 대해 언급하실 정도다.”

모를 리 있을까.

“부장님들이 넌지시 알려 주셨으면 검사장님이 그 녀석을 의심할 리는 없었을 텐데 말이죠.”

“비밀 수사잖냐. 그게 우리 탓이라는 거야?”

승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유 부장의 툴툴거림에 픽 웃던 한 부장이 ‘백 검.’ 하고 승진을 불렀다.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한 부장을 향했다.

“근래 들리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 녀석을 믿는다는 거냐?”

“소문은 소문이고, 그 녀석은 절대 배신할 녀석이 아니니까요.”

“아주 믿음이 확고하군그래.”

“그러게 말이다. 그런 놈들이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니, 이거 원.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뜻 모를 웃음소리를 흘리며 눈빛을 주고받던 두 부장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승진을 비롯한 두 계장은 그들의 움직임에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유 부장과 한 부장이 의자 위로 던져 놓았던 재킷으로 손을 뻗더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승진에게 말했다.

“백 검 뜻대로 해.”

상사들에게서 아직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기에 입을 다물고 있던 승진은 그들을 응시했다. 한 부장과 무언의 고갯짓을 나눈 유 부장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번 일을 감독하기는 하지만 실행하는 건 백 검이랑 신 검이잖아? 신 검은 현장에 투입되어 있는 중이니 검찰 쪽은 백 검이 맡는 게 지당해. 언제 칠 거다, 말 거다 한다는 보고만 정확히 한다면 앞으로 우리까지 불러낼 필요 없어. 어차피 백 검에게 맡긴 일이니 백 검의 감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

“맞는 말이야. 신 검에게 연락 오면 우리한테도 말해 주고. 그럼 내일 다시 보자고!”

승진은 그 말을 끝으로 브리핑 룸을 나가 버리는 두 부장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쿵쿵, 뛰는 가슴이 쉽게 평정을 찾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연락 없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은 기회를 놓친 거 아닐까요?”

두 부장이 나가고 난 뒤의 브리핑 룸.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불구하고 청사로 달려온 계장들과 말없이 앉아 있던 승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대는 강 계장을 바라봤다.

“이정후가 움직일 거라는 말은, 곧 그자가 주관하는 마약 파티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잖습니까. 11시면 앞으로 20분도 안 남았는데, 지금이라도 이 장소를 습격하는 것이…….”

“계장님.”

“예?”

“제가 안서호 씨를 알게 된 건 몇 달 안 되지만, 신 검이랑 알고 지낸 건 수년이 넘습니다.”

승진은 ‘아’ 탄성을 터뜨리는 강 계장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제 감은, 그 녀석의 연락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군요.”

확고하다 싶은 승진의 대답을 들은 강 계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강 계장의 곁에 있던 양 계장도 ‘그래, 강 계장! 우리 검사님 좀 믿어라! 의심이 그렇게 많아서야.’라며 혀를 쯧쯧 차자 강 계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강 계장은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한 후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양 계장님.”

“예, 검사님!”

“한 가지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뭡니까?”

저 혼자만 결정 내리기에는 난처한 상황이었던지라, 사건을 함께 수사 중인 동료들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소집한 긴급회의. 그 회의가 슬슬 끝나 가는 것을 느끼던 승진은 내일을 위해 일어나려는 계장들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 기업 비리 관련 제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승진이 조심스레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뭔가 냄새가 나서 그러는데, 신 검 몰래 그쪽 관련 일을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 * *

따각, 따각.

우영은 애꿎은 볼펜의 끝 부분만 누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며칠 전, 그에게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아 눈앞에 놓인 사건 기록지가 읽히질 않는다.

우영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친구’가 된 의미로 검사님을 제 프라이빗 파티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닷새 전, 이정후가 우영을 향해 묘한 제안을 해 왔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열린다는, 예의 프라이빗 파티에 대한 초대였다.

장장 한 달 동안 이정후의 곁을 맴돌며 그에게 미끼까지 던지던 우영의 가슴이 철렁거릴 만큼 놀라운 제안이었다.

만약 평소 같았다면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 생각하며 승진에게 연락을 했을 거다. 지금이 바로 습격을 할 시간이라고, 잔뜩 들떠서는.

‘……!’

이정후의 제안을 승낙하고 그들과 함께 예의 파티가 열린다는 곳으로 움직이기 직전, 우영은 이정후의 뒤편에 서 있던 안서호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을 발견해 버렸다. 안서호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젓지도, 그렇다고 은밀한 정보가 담긴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파티가 열린다는 오후 11시를 훌쩍 넘긴 시간까지, 승진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무언가 의심되는 것이 있었다.

우영은 그저 자신을 주시하고만 있는 안서호에게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우영이 결국 슈트 깊은 곳으로 그것을 밀어 넣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안 변.]

[예, 부사장님.]

[검찰 쪽 반응은 어떻지?]

[아무 반응 없습니다.]

[호오, 그래?]

서울 근교에 위치한 산속 별장으로 안내되어 온 우영이 저를 힐긋거리는 이정후의 말에 미간을 좁힌 것은, 이정후의 뒤를 따라 현관으로 들어서던 시점이었다. 우영은 앞서 나가던 안서호와 대화를 주고받은 이정후가 빙긋 웃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썼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이정후 씨. 조금 불쾌하군요.]

검찰 쪽 반응을 운운한 것으로 보아, 파티의 제안은 그를 떠본 것이 분명했다. 그제야 안서호의 뜻 모를 시선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우영이 살벌한 눈을 빛내자 이정후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하하. 미안합니다, 검사님. 하지만 검사님도 아시다시피, 근래 우리가 워낙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습니까? 때문에 약간의 주의가 필요했습니다. 검사님을 의심한 게 아니라, 혹시나 있을 상황에 대비한 거라 여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은 번지르르. 우영은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는 이정후를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검사님도 참. 이번 일은 친구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라고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관문 같은 걸 뛰어넘어야 하는 ‘친구’는 하고 싶은 마음이 없군요.]

우영은 차갑게 대응한 후 몸을 돌려 사라지려 했다.

[어? 부사장님, 벌써 오셨어요?]

[이분은 누구……신지.]

하지만 그가 현관을 벗어나기 직전 마주쳐 버린 두 명의 사내들이 우영의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우영은 생긋 웃으며 이정후에게 손을 흔드는 톱 배우 한서준과 KS 미디어의 윤주혁 대표를 발견하고선 걸음을 멈추었다.

[제가 주최하는 프라이빗 파티는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가는 분들이 소소한 일탈을 즐기실 수 있도록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회적 지위가 있으신 분들인지라 그분들의 신분은 철저히 보장해 드리면서 말이죠. 그런 파티에 초대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셨으니, 우리 신 검사님도 참가 자격을 부여받으셨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 호의를 거부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신 검사님과 이 우정을 유지하고 싶거든요.]

한서준과 윤 대표에 의해 돌아갈 타이밍을 놓쳐 버린 우영에게 이정후가 붉은색 봉투 하나를 내밀며 빙긋 웃었다. 우영은 경계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체념한 표정으로 봉투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죠, 라고 짧게 대답한 우영에게 싱긋 웃어 보인 이정후는 파티가 끝나기도 전에 우영을 오피스텔로 데려다주었다.

<검사님, 오늘 밤 파티에는 참석하실 거죠? 몇 시 퇴근인지 알려 주시면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우영은 조금 전 도착한 문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정후로부터 도착한 문자는 오늘 밤 10시에 열리는 파티에 그의 참석을 종용하고 있었다.

장소를 알려 주지 않은 것은 여전히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까.

무표정한 얼굴로 문자를 내려다보다 주위를 둘러본 우영은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고선 입술을 움직였다.

“윤희 씨.”

“네, 검사님.”

“양 계장님은 어디 계십니까?”

신우영 검사실의 정윤희 실무관이 ‘아!’ 하고 낮게 탄성을 흘리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우영이 미간을 좁히자 윤희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양 계장님이 자주 자리를 비우세요.”

“계장님이요?”

“네. 뭔가 따로 조사하실 것이 있다면서 가끔…….”

우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계장님 호출할까요?’ 하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윤희에게 고개를 젓더니 작은 메모지를 꺼내 들었다.

“이거, 백 검한테 전해 주십시오.”

윤희는 얼떨결에 우영에게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저기!”

윤희가 그를 부르기도 전에 ‘퇴근합니다.’ 하고 사라져 버린 우영은 이미 검사실을 빠져나간 뒤였다.

윤희는 머쓱한 표정으로 홀로 남게 된 검사실을 둘러보다 손에 들린 메모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

우영이 남기고 간 메모지엔 놀랍게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 * *

“그거 아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백 검사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해.”

승진은 다짜고짜 본론을 늘어놓던 안경남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하는 말에 빙긋 웃었다.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지만 애써 미소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 애석했다.

승진은 ‘절대로 생각하는 걸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는 눈빛을 제게 쏘아 대고 있는 오대준 검사장의 얼굴을 생각하며 치솟는 분노를 꾹꾹 참았다.

[여기가 백승진 검사실인가?]

뱀보다 더 추악한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백승진 검사실의 문을 두드린 것은 오후 1시 22분경이었다.

근래 들어 점심을 먹을 시간도 없이 많은 업무량에 파묻혀 있던 승진은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명품 슈트를 입고 나타난 중년 남성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를 고발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귀티. 책상에 앉아 있던 승진을 정확하게 응시하면서 ‘자네가 백 검사인가?’라고 묻는 남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거부감이 일었다.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힌 승진이 입을 열 사이도 없이 뒤이어 도착한 오대준 검사장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 계장과 주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승진은 왠지 모르게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덕분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냉정하게 가라앉는다.

“서 변호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쓸데없는 짓이라니요?”

안 그래도 남몰래 진행하고 있는 일을 조사할 시간도 부족한데, 이런 한심한 대화까지 나눠야 하다니. 승진은 안면이 뒤틀리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싱긋 미소 지으며 오히려 되물었다. 그러자 피식 웃는 승진을 주시하던 ‘서 변호사’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백 검사가 파헤치고 있는 한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세.”

껄껄 웃으며 말하는 서 변호사의 말에 생글생글 미소를 흘리던 승진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서 변호사는 딱딱하게 굳은 채 입을 열지 않는 승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한서 전자 쪽에 이상한 꼬리가 붙었다는 소문이 돌아 조사를 해 봤는데, 백 검사가 뒤에 있더군.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한서를 건드리는 이유가 뭔가?”

승진은 대답 대신 미소 짓는 남자를 응시했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도 백 검사가 한서에서 얻어 낼 것은 없을 걸세. 승진을 위한 기업 비리에 대해 한서를 타깃으로 삼은 거라면 내 더 괜찮은 먹잇감을 주도록 하지. 그러니 백 검사, 피차 귀찮아지는 일은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서 변호사의 안경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쓰고 있는 안경 때문인지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다. 몇몇 동료들이 차가운 이미지를 유지하고자 안경을 쓰는 것처럼 그 역시 그런 걸까.

승진은 자신이 할 말만 내뱉은 후 차를 들이켜는 서 변호사를 쳐다보다 샐쭉 웃어 보였다.

“서현수 변호사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러네.”

“한서 그룹 전담 변호를 맡고 있는 유한 로펌의 대표이시자 전직 부장판사, 그리고 여기 계신 검사장님과 오랜 친구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하하, 나를 못 알아보기에 세상 물정 모르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군. 오 검사장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지.”

“그러셨군요. 고등학교…… 동창이라.”

“어, 어이, 백 검. 너 뭐 하려고―?”

미소 짓는 승진의 행동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오 검사장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승진은 그런 오 검사장에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어 보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싱글벙글 웃으며 서 변호사를 내려다봤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겐가?”

갑자기 일어나선 자신을 보고 웃기만 하는 승진이 어이없었는지 서 변호사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 정도의 청탁은 가끔 있는 일이지.’

승진은 속으로 생각하더니 더욱 짙은 미소를 그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흐응, 어쩐지. 한서 쪽에서 퀴퀴한 냄새가 풀풀 풍긴다 했더니, 확실히 뭐가 있기는 있나 보군요. 이거, 햇병아리 검사의 호기심을 매우 자극하는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상대에게 전달됐다.

승진은 놀란 표정을 짓는 서 변호사를 향해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하긴 뭐,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죠. 서 변호사님이 어떤 뜻으로, 또 누가 보내서 이곳까지 오셨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서 변호사님의 뜻을 들어 드릴 수 없습니다. 타깃으로 삼은 상대가 켕기는 티를 내면 세세히 파드리는 것이 대한민국 검사가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뭐?”

“조만간 영장 들고 찾아갈지도 모르니 그때까지 몸 청결히 하시고 저를 맞아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아! 이왕이면 압수 수색이 편하도록 자료를 분리해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럼 후일 조사할 때 더 편할 테니.”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사색이 되는 서 변호사를 바라보며 승진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는 오 검사장을 흘긋거렸다. 오 검사장은 체념한 듯한 얼굴로 승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의 승낙인가?’

승진은 오 검사장의 표정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 뒤늦게 승진의 말뜻을 깨달은 서 변호사가 벌떡 일어나며 승진에게 손가락질했다.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내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했어?”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인간이군.

승진은 조금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제가 조금 바빠서 그러는데, 대한민국 검사를 방해하면서까지 하시고픈 말씀이 고작 그런 부정한 청탁들뿐이라면, 이만 물러가도 될는지요?”

“뭐라고?”

“변호사님께서 아실지 모르겠지만 중앙지검의 꽃은 그리 한가롭지 않아서요. 잠잘 틈도 없이 쏟아지는 사건들을 해결할 시간도 모자랍니다. 특히나 유독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한서 전자의 비리와 관련된 일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는지라.”

쾅!

“이, 이 자식이! 감히 하늘 같은 선배를 뭐로 알고! 너,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해도 괜찮은 줄 알아!”

승진의 도발에 폭발한 서 변호사가 기다란 회의실 책상을 내리찧으며 소리쳤다. 얼굴이 새빨개진 서 변호사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오 검사장은 고개를 푹 아래로 떨구며 이마를 문지르는 중이었다.

서 변호사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너같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햇병아리는 내 발아래…….”

“어어? 그러는 선, 배, 님은 못 들으셨습니까?”

승진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 대는 서 변호사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속삭였다.

“선배님 발아래 냉큼 머리를 숙일 만큼, 저 그리 만만한 집안사람 아닌데.”

서 변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승진은 얼어 버린 서 변호사를 내버려 둔 채 몸을 돌렸다.

달칵―

그가 회의실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닫혀 있는 회의실 안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저 미친 새끼가 감히 누구한테!’라든가, ‘또라이 새끼 아니야?’라든가, ‘저 새끼 당장 데려와!’ 등등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왠지 죄송하군.’ 

긴 숨을 흘리던 오 검사장을 회의실에 내버려 둔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승진은 벅벅, 뒷머리를 긁으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형 사고를 치셨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유한 대표는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라던데.”

그렇게 회의실을 나온 승진이 자신의 검사실로 돌아가기 위해 터덜터덜 걷고 있을 때였다. 승진은 저를 기다리고 있는 두 명의 계장들을 발견하고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의실 밖 복도까지 서 변호사의 고함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승진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딱히 한서가 무섭지는 않으니까요.”

순탄하게 세상을 살아온 덕에 두려울 것이 없는 백승진이 이 세상에서 무서워하는 것은 신우영과 관련된 일 말고는 없었다.

때문에 한서 그룹 쪽의 청탁 따윈 깔끔히 외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할 일들 역시 걱정되지 않았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요즘 들어 계속해서 걸려 오는 익명의 고발 전화를 접하고 한서를 떠올린 것은 순전히 감이었다. 내부 고발자의 설명이 한서 전자를 가리켰고, 그로 인해 이정후 쪽이 어떻게든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그래도 이렇게 전관까지 보내 가며 수를 쓸 줄이야.

‘나도 서둘러야겠군.’

승진은 하여간 못 말린다며 웃고 있는 두 계장들 중 양 계장을 쳐다봤다.

“그런데 두 분은 왜 여기 나와 계십니까?”

강 계장은 그렇다 치고, 근래 승진이 부탁한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던 양 계장까지 이렇게 복도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자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귀신 같은 승진의 눈초리에 움찔하던 양 계장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하나를 승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죠?”

승진은 뜬금없는 메모지 하나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끙, 신음을 흘리던 양 계장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신 검사님께서 남기신 메모집니다.”

“네? 신 검이요?”

양 계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님이 유한 대표를 만나기 직전에 이걸 남기고 나가셨다는군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오늘 신 검사님한테 외근 일정이 없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제가 한서 쪽 내부 고발자들이랑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일어난 일이라서요.”

승진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메모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글자가 적혀 있거나, 혹은 파여 있는지 들여다보았으나 매끄러운 메모지에선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승진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한숨을 푹 내쉰 양 계장이 중얼거렸다.

“혹시 다른 메모지를 잘못 주셨나 싶어서 윤희 씨한테 이걸 받고 난 후 신 검사님 책상을 찾아봤는데, 그것뿐이었습니다.”

“정말 저한테 주라고 했단 말입니까? 이 메모지를?”

“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승진은 도통 속을 읽을 수 없는 우영의 행동에 인상을 썼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메모지 하나를 덜렁 남겨 두고 가면, 내가 추론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인상을 써 가면서 속으로 숨을 삼키던 승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검사님?”

“검사님, 왜 그러십니까?”

유한 대표를 만날 때도 눈 한 번 깜빡 안 했던 승진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지자 두 계장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진은 갑작스러운 제 반응에 당황하는 두 계장들을 향해 소리쳤다.

“강 계장님!”

“아, 예!”

“강 계장님은 지금 당장 경찰 쪽에 연락하세요. 출동 협조 부탁드린다고.”

“네?”

“그리고 양 계장님은 이 번호 위치 추적 가능한지 알아봐 주시고, 이은혁 판사님께 가셔서 체포 영장 좀 발부받아 오십시오. 제가 미리 말해 둘 테니 받아 오시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손에 들려 있던 메모지에 핸드폰 번호를 휘갈기던 승진이 대뜸 자신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자 양 계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무, 무슨……. 어? 이 번호는 신 검사님 핸드폰, 윽!”

그러나 그런 양 계장의 의문은 다급하게 외치는 승진의 음성에 의해 묻혔다.

“지금 당장이요!”

* * *

“……크윽.”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린 우영은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발목부터 머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외면하며 꼬여 가는 생각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자신이 왜 창문도 없는 검은 방 한가운데에 있고, 왜 하필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앉아 있으며, 또 어떻게 이런 곳까지 오게 된 건지.

차분하게.

[아. 오셨습니까, 신 검사님.]

시작은, 이정후의 문자였다.

밤 10시에 열리는 이정후의 프라이빗 파티에 초대된 우영은 윤희에게 메모 한 장을 건넨 후 바로 청사를 나섰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타자마자 안대를 쓰고 어딘가로 향했지만 그때만 해도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나, 란 느낌으로 차가 멈추기를 기다리던 우영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안대를 벗었다.

군청색 슈트에 와인색 나비넥타이를 한 이정후가 우영이 탄 차의 문을 열어 주며 빙긋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그때 시간이 오후 5시쯤이었을 거다.

[대표님, 대체 저 검사는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부사장님께서 초대하신 분이다. 그렇게 노려보면 예의가 아니지.]

[알아차리라고 그러는 거예요. 저 사람, 진짜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쉬, 서준아.]

[쳇!]

이정후와 이야기를 나누며 파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우영의 귀에 그를 의심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한서준과 윤주혁이 이정후의 별장에 도착한 시점이었다.

이정후가 잠시 다른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혼자 남게 된 우영은 저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한서준을 발견했다. 우영이 빙긋 웃으며 미소를 건넸지만 홱 고개를 돌려 인상을 쓰면서 이상할 정도로 한서준은 그를 경계했다.

딱히 경계받을 짓은 하지 않았다고 여겼으나, 손님 접대를 마치고 돌아오는 이정후에게 환한 눈웃음을 그리는 한서준을 보고 우영은 어째서 한서준이 자신을 노려본 건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난처하군.’

설마 톱 배우 한서준이 남자에게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쩐지 첫 번째 만남 이후 유독 제게 불만을 표하더라니.

머리가 살짝 지끈거렸지만 크게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에게는 오늘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의 정신은 모두 그 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봐요, 검사님. 잠깐 얘기 좀 하실래요?]

이정후의 별장에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재계의 거물 기업가들부터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까지 이정후와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응시하고 있는 우영에게 한서준이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생글생글 미소 짓는 한서준의 눈웃음에 진심이라고는 보이질 않아 우영은 본능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딱히 무슨 일이 있어야 대화를 나누나요. 그냥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져서 그러는 거죠.]

[…….]

[동의하셨다면 이쪽으로.]

한서준이 제게 접근하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인지라 잠시 당황해 버렸다. 하지만 그의 제안에 따르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윽 훑어봤음에도 이미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의 얼굴은 대략적으로 파악해 둔 상태. 그것만으로도 우영이 목표했던 일의 절반은 이룩한 셈이어서, 조금 방심했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게다가 한서준 역시 그의 검거 리스트 톱 3 안에 들어 있었으므로 한서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고, 당시의 그는 생각했다.

우영은 여의도에서도 이름난 정치인을 상대하고 있는 이정후를 흘긋거리다 한서준의 뒤를 따랐다.

‘그 이후……인가.’

바람이나 쐬자며 현관 밖으로 자신을 유도하는 한서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우영은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에 윽, 소리를 내뱉으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눈을 떴을 때는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 갇혀 있었고, 온몸이 로프로 보이는 단단한 것에 묶여 있는 상황이었다.

“후우.”

이거…… 곤란한데.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하다 싶더니, 슬쩍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보이는 제 꼴이 영 수상쩍다. 브리프 말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의자에 꽁꽁 묶여 있는 모습이라니. 손을 움직여 보려 해도 수갑을 차고 있어서인지 행동이 자유롭지 않았다.

곧 스스로 탈출하는 것을 포기한 우영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하실인가.’

일단 이곳이 어디인지부터 알아내야 했다.

우영은 온몸을 비틀며 쿵쿵, 바닥을 찧던 의자를 다시 고정시키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빛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검은 방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이정후의 화려한 별장 아래 존재하는 지하실이 틀림없었다. 바로 위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의 짐작이 맞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인물이 얽혀 있었어.’

이정후의 호의 아래, 우영은 오늘 프라이빗 파티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대부분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중에는 몇몇 정당에서 고위 인사 취급을 받는 국회의원들과 그들의 뒤를 봐주는 재력가들 역시 끼어 있었다.

인사를 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이들은 현직 판사로 재직 중인 사람들이었다.

[자네는…… 중앙지검의 신 검사 아닌가?]

어째서 네가 여기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놀라던 판사들의 얼굴이란. 생긋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제법 시간이 걸릴지도.’

무사히 이 공간을 빠져나간다 할지라도, 자신이 파티에서 마주했던 이들을 검거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수사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는 될 수 있겠지.

우영은 잠시 숨을 고르며 눈을 내리감았다.

‘눈치……챘으려나.’

이정후를 정식 기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번 파티에 대한 급습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그의 ‘파트너’가 이 파티에 대해 알아차려야 했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우영은 약간의 단서를 남긴 후 청사를 나섰다.

‘현직 판사도 얽혀 있으니 청사 내부도 안전하진 않겠지.’

자신이 인사를 나누었던 판사의 사위가 중앙지검에서 일하는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어 염려가 되었다.

그가 자신의 파트너에게 어떠한 ‘말’ 대신 예의 ‘메모’를 남기고 온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매우 옳은 판단이었다. 우영은 이정후의 별장에 오기 직전, 글자 하나 적혀 있지 않은 백지의 메모를 자신의 파트너에게 남겼다. 정중앙에 자리 잡은 중앙지검의 로고를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메모지였지만 왼쪽 귀퉁이 부분을 일부러 두 번 접어 두었다.

만일 그 행동의 의미를 파트너가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영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끼이익.

덜컹!

가빠 오는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하던 우영의 귀에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지하실 내부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또각, 또각.

제게 다가오는 것이 분명한 발소리. 그에도 반응하지 않던 우영은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눈앞에 서는 커다란 그림자를 마주하기 위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 그러자 싱긋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는 한 남자가 시야로 들어왔다.

“한동안 안 보이시기에 조금 걱정했었는데, 이곳에 계셨던 모양이군요.”

검은 장갑을 낀 이정후가 턱을 스윽 매만지며 우영을 내려다봤다. 조용하게 일렁이는 이정후의 눈동자는 확실히 기분이 나쁘다. 우영은 짙은 미소를 그리며 메말랐던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잠깐 방심한 사이 이 모습이 되었네요.”

이정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우영에게 유려한 눈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서준 씨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녀석이 저를 과하게 따르는 경향이 있어서 말이죠. 부디 검사님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죠.”

자신이 시킨 일이 아니라는 뜻을 보이며 이정후가 밑밥을 깔고 있었다. 이곳은 이정후의 별장이다. 이정후의 철저한 감시하에 모든 상황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그의 허락 없이 서준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지하실로 옮기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서준 핑계를 대는 걸 보면, 이정후는 역시 뱀 같은 인간이었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내를 숨기려는 이정후의 대답에 속으로 코웃음을 친 우영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딱히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주십시오.”

“하하, 역시. 신 검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

“…….”

“풀어 주지는…… 않는 겁니까?”

우영은 제 앞에 서서 그저 바라보고 있기만 한 이정후를 향해 물었다. 이정후가 도착함으로써 대충 상황이 마무리됐을 거라 여겼지만 아직도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다.

짧게 웃음 짓던 이정후가 묘한 콧소리를 흘리며 우영을 내려다봤다.

“아직은, 안심할 수 없어서 말입니다.”

이정후의 검은 눈동자가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구겨 버린 우영에게 꽂혔다. 이정후는 미소를 거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대부분의 패를 꺼내 보였지만 우리 검사님이 여전히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이런. 대체 어디까지 보여 드려야 부사장님이 안심하고 저를 믿으실지 모르겠군요. 그간 부사장님을 적잖이 도와드린 것 같은데.”

“하하하. 물론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검찰 쪽 눈을 피해 고객분들을 모실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하다?”

“아무래도 위치가 위치인 만큼 쉽게 믿을 순 없어서 말이죠.”

귀찮은 새끼.

이래서 재벌가의 인간들과 얽히는 것은 짜증스럽다.

우영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정후를 바라보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대체 어디까지 해 드려야 하는 겁니까?”

체념한 얼굴을 한 우영이 인상을 쓰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정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인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우영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 이정후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우영은 붉은 알약을 들고 있는 이정후의 기다란 손가락을 주시하다 그를 올려다봤다.

“뭡니까?”

이정후가 빙긋 웃었다.

“검사님의 특별한 취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

“이제 알게 되신 것 같지만, 저는 보기보다 훨씬 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말이죠.”

“…….”

“지금 제 손에 들어온 약점으로는 아직 배가 많이 고프네요. 그러니 검사님.”

싱긋 올라가는 이정후의 입꼬리가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우영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이정후가 싱긋 웃으며 그를 향해 속삭였다.

“저와 같은 배에 타 주셔야겠습니다.”

같은 배?

“웁!”

우영이 뭐라 대꾸할 틈조차 없었다. 우영은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이정후가 붉은 알약을 입 안에 넣더니 갑자기 제게 얼굴을 가져다 대자 인상을 썼다.

으윽.

기분 나쁜 타액이 입 속을 파고든다.

물컹한 무언가가 혀끝을 자극하며 우영의 목구멍을 간질였다. 꿀꺽 넘어가는 식도의 느낌이 불쾌해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쳤다.

쿵!

자신이 어떤 차림을 하고 있든 내내 차분한 자세를 유지하던 우영이 결국 몸을 바닥 쪽으로 기울이자 그 상황을 버티지 못한 의자의 다리가 뿌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하아, 하아.”

우영은 온몸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지하실 바닥의 촉감을 느끼며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 지금 뭐 한…….”

“약효는 빠르면 5분, 늦으면 15분 후부터 돌기 시작할 겁니다.”

뭐?

“그때까지 이곳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계시면 곧 돌아와 검사님을 즐겁게 해 드리죠.”

숨을 헐떡이는 우영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던 이정후가 얼굴을 찡그리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사라졌다.

우영은 쾅, 닫히는 지하실의 문과 사라지는 빛의 흔적을 눈으로 좇다 눈을 내리감았다.

‘어디쯤……인 거냐.’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제 파트너가 보고 싶었다.

* * *

“검사님, 한 가지 여쭤 볼 게 있습니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승진이 조심스레 저를 부르는 강 계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표 지점에 도착한 이후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승진을 불안한 얼굴로 지켜본 강 계장은 냉랭한 승진의 시선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정말, 확신하시는 겁니까?”

강 계장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승진은 쓰게 웃었다. 확신이라.

‘확신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승진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강 계장에게 입 안을 맴도는 말을 내뱉어 줄까 하다, 무의식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메모지를 내려다봤다. 어느새 꾸깃꾸깃 접혀 있는 그 메모지는 처음 발견했을 땐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왼쪽 귀퉁이 부분이 두 번 접혀 있었다.

승진은 호흡을 고른 뒤 강 계장을 응시했다.

“확신합니다.”

“……!”

“확신해요.”

여기까지 온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

확고한 의지가 드러난 승진의 대답에 눈을 크게 뜬 강 계장이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고 나지막하게 대답하는 강 계장을 쳐다보던 승진은 다시금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19대째.’

환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차들이 끊이질 않는다. 이미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끝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나가는 차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한창때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죠. 선택은 검사님 몫입니다.]

낮게 깔린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자신을 돕는 건지, 아니면 방해하는 건지 여전히 의심스럽기는 하나, 이곳의 지리를 알려 준 사람은 틀림없이 그 남자였다. 그런 상황에 우영의 위치가 끊어진 곳도 하필 이곳이라는 점이 적절하게 맞아 들었다.

승진은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강 계장에게 말했다.

“계장님.”

“예?”

“양 계장님 쪽은 준비됐답니까?”

“아, 예! 후문 쪽에서 대기 중이랍니다. 검사님 지시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퇴로 확보는 어떻게 됐습니까?”

“별장이 산을 등지고 있어 막는 데 수월했답니다. 몇 분 전에 윤 과장님이 웬만한 곳은 경찰 배치 완료했다고 연락 주셨습니다. 땅굴을 파지 않는 이상 대부분 현장 검거될 겁니다.”

“그렇군요.”

“저기, 그런데…… 윤 과장님이 여쭤 보시던데요.”

“뭐를요?”

“잠복한 지 벌써 두 시간짼데, 대체 언제 치는 거냐고. 혹 기다리시는 게 있으면 말이라도 해 달라더군요. 그럼 조금 더 움직이기 수월해질 거라고도…….”

어색하게 웃는 강 계장에게 빙긋 웃어 주던 승진은 어느새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시계를 흘긋거렸다.

“그렇군요. 슬슬, 칠 때가 됐네요.”

“그렇죠?”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검거한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앞으로의 일을 위해 덫을 놓을 필요는 있죠.”

“네?”

“이 전화만 받겠습니다.”

승진은 척하면 척 하고 대답하는 강 계장에게 미소를 흘렸다. 강 계장이 그러라는 듯 말없이 물러나자 지이잉, 울려 대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백승진입니다.”

-나다.

대뜸 말하는 상대의 목소리에 승진이 생긋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준비는 다 됐어. 여의도 쪽이랑도 얘기 끝났고. 우리도 브리핑 준비 마쳤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럼 이제 날뛰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그래.

“하하, 감사드립니다.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두 분도 발 뻗고 주무시겠네요.”

-그건 그렇지만……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만약 백 검 네 예상이 빗나간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검사장님, 그리고 우리한테 도움을 줬던 모든 사람들이 다 위험해져. 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염려 가득한 상대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승진은 핸드폰 너머의 상대에게 ‘그럴 일은 없습니다.’ 하고 짧게 대답한 후 종료 버튼을 눌렀다.

“강 계장님.”

“예, 검사님!”

통화를 마친 승진의 눈빛이 달라지자 움찔하는 강 계장의 모습이 보였다. 승진은 제 손에 들린 종이 몇 장을 슈트 상의 안쪽으로 집어넣고선 굳게 닫혀 있던 차 문을 힘차게 열었다.

“지금부터 파티 타임입니다.”

* * *

“부사장님,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지하실 문을 닫고 계단을 올라오던 정후는 벽에 삐딱하게 기대서 있는 서준을 발견했다. 서준의 예쁜 얼굴이 보기 싫을 정도로 구겨져 있자 정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리 서준이, 또 왜 그런 표정이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나?”

그러자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린 서준이 소리쳤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안 든다고!”

“…….”

“아무리 몇 번 도와줬다지만, 저 검사 새끼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건 머리 안 좋은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저 자식을 여기까지 끌어들인 거야? 그리고, 안 변 이 자식은 대체 어디 있어? 오늘 모임에 참석하는 거 아니었어? 그 자식이 저 검사 자식을 상대하기로 했잖아!”

씩씩, 콧김까지 내뿜으며 외치는 서준의 모습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평소 냉미남으로 불리는 서준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황당해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정후는 자신이 화났다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이는 서준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안 변은 오늘 모임에 참석 못 할 만큼 중요한 볼일이 있다더군.”

“볼일? 오늘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안 변은 당신 말이라면 죽고 못 사는 거 아니었어?”

그래. 물론 그랬었지.

정후는 인상을 쓰는 서준에게 뭐라 대답할까 하다가 ‘그런 게 있어.’ 하고 짧게 대응했다.

말을 얼버무리는 정후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서준이 곧 칫, 하고 입술을 삐죽였다. 짜증을 표하는 그를 냉랭하게 내려다보던 정후가 서준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거래는 어떻게 되고 있지?”

“몰라.”

“한서준.”

“……대표님이 진행 중이야. 양 의원이 자기가 데려온 사람들까지 총 13대 요청해서 지금 놓아주는 중이고, 정 판사 쪽에는 이미 10대 건넸어. 남은 건 250대 정도고. 그것도 금방 마무리될 거야.”

“증거는?”

“여자 끼워서 보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섹스하면서 건네주랬으니 지금 한창 주는 중이겠네.”

“잘했군.”

정후가 서준의 머리 위로 손을 얹자 서준이 배시시 웃으며 ‘정말?’ 하고 입꼬리를 올리는 게 보였다. 정후는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손목에 찬 시계를 건네주었다.

벌써 10분이 지났다. 슬슬 약점을 잡아야 할 시간. 살짝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해서, 지하실 쪽으로 시선이 갔다. 정후는 서준에게 ‘남은 손님들도 부탁할게.’라고 작게 속삭인 후 다시 지하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자, 잠깐만!”

그런 정후의 옷깃을 덥석 잡은 서준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정후가 서늘한 눈으로 ‘왜?’라고 물으며 인상을 쓰자 서준이 입을 쭉 내밀었다.

“어디…… 가는 거야? 설마, 지하실에 다시 가는 건 아니지?”

정후가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네가 참지 못하고 사고를 쳤으니 어쩔 수 없잖아.”

윤 대표에게서 서준이 일을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하필 자신의 손님을 건드리다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하, 하지만 그 자식 눈빛이 이상했단 말이야!”

이상해?

“수상했어. 부사장님을 먹어 버릴 것 같았다고. 그래서 불안했단 말이야!”

검은 안경 너머로 비치던 눈길을 떠올리며 서준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쁘다며 슥슥, 팔을 문지르기까지 하는 서준을 쳐다본 정후는 뒤늦게야 그 말뜻을 이해했다.

‘꽤 끈질긴 시선이기는 했지.’

웃고 있기는 했지만 언제든 자신을 덮칠 것 같던 그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긴, 그래서 더 흥미를 가졌던 거니까. 정후는 쿡쿡 웃으며 제 허리를 꼭 끌어안는 서준을 내려다봤다.

‘신우영이라.’

재미있는 검사였다.

그렇게 대놓고 자신을 향해 접근한 검찰 쪽 관계자는 실로 오랜만이었으니, 더더욱.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정황이었으나 뿌리치지 않고 가까이 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 유용했기 때문이다. 우영이 건네준 마약 수사 관련 정보들은 확실히 그가 행하고 있는 유통 일을 수월하게 만들어 주었고, 미소 뒤에 본심을 숨긴 것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걱정 마. 금방 돌아올 거니까.”

“부사장님!”

“말이 많군, 한서준.”

“부사…… 큭!”

손을 뻗어 서준의 목을 움켜쥔 정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얕은 숨을 흘리며 색색거리는 서준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떨렸다.

실로 약한 생물이군.

제 말이면 바닥이라도 핥을 서준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정후는 제 손에 들어온 서준의 하얀 목을 응시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센 힘으로 그의 목을 비틀어 버린다면 틀림없이 의식을 잃을 것이다. 그보다 더 강한 힘을 가하면 호흡이 끊어질 수도 있겠지.

“끅, 끄으…….”

제 손을 벗어날 생각도, 뿌리칠 생각도 없어 보이는 서준을 내려다보던 정후는 후우, 숨을 흘렸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서준의 목을 붙잡고 있던 손을 바닥으로 휘둘렀다.

쿵!

“콜록콜록!”

서준이 힘없이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자 정후가 빙긋 웃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난 내 말에 토 다는 걸 싫어한다, 서준아.”

“부, 부사…….”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네가 손님들 접대 담당하도록 해. 알았나?” 

웃고는 있지만 은근한 살의를 담은 정후의 눈빛에 서준이 온몸을 파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후는 피식 실소를 터뜨린 후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여전히 콜록거리는 서준의 음성이 들려왔으나 모르는 척했다.

뚜벅뚜벅.

‘이제 어떻게 한다…….’

파티 준비는 마쳤고, 저 대신 활동할 인물을 지목하기도 했다.

이제부터 자신이 할 일은 없으니 여흥을 즐길 일만 남은 셈이었다. 마침 재미있는 장난감을 손에 쥐었으니 그것을 마음껏 취하기만 하면 될 터.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리를 앞으로 뻗은 정후는 사내가 갇혀 있는 예의 지하실로 가 그곳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다들 올라가서 쉬도록 해.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

구경꾼이 있다면 더 흥분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홀로 즐겨 보고 싶었다. 정후는 제 말에 자취를 감추는 경호원들을 무심하게 응시하다 몸을 돌렸다.

정후의 손이 지하실의 문고리로 향했다.

“윽. 크으…….”

끼이익, 문을 열자마자 들린 것은 지하실 안을 가득 울리는 숨소리였다. 신음에 가까운 그 소리가 온몸의 털을 쭈뼛거리게 만들었다. 반사적으로 가슴이 두근댄다. 표현할 수 없는 오싹함이 전신을 감돌았다.

정후는 차분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

그의 발 앞에서 거칠게 숨을 흘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 깊은 밤, 몇 번이고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과 같았다. 브리프 하나만 걸친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지독하게 뇌쇄적이었다.

정후는 인기척에 고개를 든 그의 눈꺼풀이 저를 발견하고 파르르 떨리는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약 기운이 도나 보군요. 미약 중에서도 가장 효력이 좋은 거라 듣긴 했는데, 사실인 모양입니다.”

그러자 미간을 꿈틀거리던 남자의 눈꺼풀이 위로 들린다.

‘아.’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찔하다. 허공을 헤매던 올곧은 눈빛이 제게 닿자 전율이 일었다. 지금 당장 그의 브리프를 내려야겠다는 충동이 일 만큼 아찔한 모습이어서 숨이 막혔다.

정후는 부서진 의자에 묶인 채 저를 노려보는 남자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흐트러진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취향인지라 놀랐습니다. 이대로라면 지금 바로 안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으…….”

“어떻게 해 주길 원합니까? 안아 달라고 부탁하면 기꺼이 안아 드리죠.”

“흐으으.”

“검사님?”

“크큭.”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던 정후는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리는 남자를 놀란 눈으로 내려다봤다.

“큭큭큭. 크큭!”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왠지 신경을 건드리는 그 모습에 정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가쁘게 숨을 내쉬면서도 실소를 터뜨리는 우영을 냉정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큭큭,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 대던 우영의 눈동자가 천천히 그를 향한 것은 몇 초간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우영은 미동 없는 정후에게 눈을 치켜뜨며 생긋 웃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난, 안기는 취미는, 후, 없습니다.”

“…….”

“장난은…… 여기까지 하시죠.”

뜨거운 호흡을 흘리면서도 결코 정신을 놓지 않는 모습이 의외였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꼿꼿한 태도를 유지하는 우영의 행동이 심장을 자극했다.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군.

저보다 커다란 사내를 안는 취미는 없지만 확실히 이자라면 안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후는 겨우겨우 말을 토해 내 놓고 수갑과 끈을 풀라는 눈빛을 쏘아 대는 우영을 바라봤다.

“신 검사님.”

기다란 손가락으로 우영의 허벅지를 쓸자 스윽, 스치는 그의 손길에 우영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투항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우영의 사타구니 쪽으로 손가락을 움직이자 꾹 다문 우영의 입술이 벌어졌다. 정후는 그의 숨결이 점점 더 가빠지는 것을 인지했다.

“강제로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이왕이면 동의를 구하고 싶군요. 저는 보다 오래 당신을 곁에 두고 싶거든요.”

“읏!”

“이걸 보면, 당신의 몸도 딱히 저를 거부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브리프 중심에 손을 가져다 대자 몸을 비트는 상대에게서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참지 못할 희열이 온몸을 휘감는다. 근래 이런 기분을 느꼈던 적은 없는데,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사내가 제 아래에서 헐떡대는 모습을 보니 가라앉아 있던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살결을 스칠 때마다 찌릿찌릿한 감각이 일었다.

정후는 후후, 웃으며 인상을 쓰고 있는 그의 볼에 입을 맞추려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마십시오, 검사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군데도 빼먹지 않고 귀여워해 드리겠습니다.”

30대 남자라기에는 지나치게 보드라운 그의 뺨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대자 우영이 ‘하!’ 하고 짧은 교성을 흘렸다. 생각보다 감도가 더욱 좋아 입꼬리가 올라간다. 정후는 옆으로 누워 있던 그를 바로 눕히며 생긋 웃었다. 딱딱한 지하실 바닥에 등을 쓸린 남자가 으르렁거렸으나 정후의 신경은 온통 그의 얼굴에 쏠려 있었다. 절망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고 싶어졌다.

‘……!’

쿡쿡 미소를 흘리며 우영의 위로 올라탄 정후가 시선을 아래로 내릴 때였다. 정후는 허공에서 마주한 우영의 눈동자에 인상을 썼다.

“마음에, 하아, 안 드나?”

자신의 배 위로 올라타 거칠게 넥타이를 풀던 정후가 행동을 멈추자 우영이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정후는 차갑게 시선을 내리꽂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마음에 들지 않아.”

“흐응.”

“어째서 그런 얼굴이지?”

“그런, 얼굴이 대체 뭔데?”

저와 비슷한 사내에게 잡아먹히기 일보 직전이건만, 어찌 된 셈인지 올 테면 와 보라는 눈빛을 하고 있다.

오뚝 선 유두, 차오른 땀방울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건만, 대체 어째서.

역시 관객들을 모을 걸 그랬나.

먼저 자신이 즐긴 후에 다른 이에게도 그를 가질 기회를 베풀어 주려 했으나 이 눈동자를 마주하자니 무언가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뭔가…… 믿는 게 있는 모양이군.”

정후의 중얼거림에 사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글쎄.”

“신 검사, 그렇게 고개를 세울 때가 아니야. 당신, 지금 먹히기 직전이라는 거 잊었나?”

“흡!”

우영은 기다란 손끝으로 유륜 근처를 쓰는 정후의 행동에 큭, 신음을 흘리더니 입술을 악물었다. 여유롭던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그제야 안심이 된다. 정후는 흥, 코웃음을 흘리며 뻣뻣하게 고개를 든 남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끅, 소리와 함께 우영의 입이 열린다. 거친 신음이 귓가로 들려왔다.

“대한민국 검사가 남자 아래서 신음을 흘려 대는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 걸 생각하니 입이 찢어질 만큼 기분이 좋군. 난 번듯한 인간이 무너지는 걸 꽤 좋아하거든.”

“우읍! 하!”

“입 벌려. 깨물었다가는 이를 모두 부러뜨려 줄 테니, 행여나 그럴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쾅!

있는 힘껏 우영의 목을 움켜쥔 정후가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기 전, 마지막 경고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방해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열려 버린 문소리에 정후가 고개를 돌렸다. 가늘게 뜬 정후의 시야로 헉헉 숨을 헐떡이는 서준이 보였다.

“한서준, 너.”

“크, 큰일 났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를 뱉어 내는 정후에게 서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검찰이 냄새를 맡았어! 대문 앞에서 들여보내 달라고 초인종만 누르고 있대. 손님들이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대표님한테 소리치고 있어. 대표님이 부사장님 데려오래서 왔는데, 나, 나 어떡해야 해? 응? 부사장님, 나 어떻게 해야 해?”

파리한 얼굴로 외치는 서준의 말을 듣자마자 지하실을 나섰다. 정후는 굳어진 얼굴을 펼 수 없었다.

검찰이라니, 말도 안 된다.

우영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그를 믿지는 않았기에 아침부터 밤까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오늘 그를 초대하고 난 후 자신에게 도착한 정보에 의하면, 우영은 이곳에 오기 직전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차에 올라탔다고 했다.

서준에 의해 감금된 우영의 물품들을 모두 수거해 핸드폰까지 뒤져 보았으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정보를 준 흔적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그랬기에 더욱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신우영 검사실의 실무관까지 포섭해 감시를 했는데, 대체 어떻게 검찰이 여기까지 쳐들어온 거지?

구겨지는 얼굴을 억지로 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냉정히 유지하려 애썼다. 정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기세로 제 옷깃을 붙잡고 있는 서준을 떼어 내고선 명령했다.

“윤 대표한테 일단 후문 쪽으로 손님들 대피시키라고 전해. 검찰을 이곳에 들여보낼 이유는 눈곱만큼도 없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키고. 그리고 여자애들 시켜서 그 애들이 갖고 있던 주사기 모두 들고튀라고 명령해. 별장에 버릴 생각 했다가는 다 죽여 주겠다고도 하고.”

“아! 으응, 응!”

“만일…… 만일 검찰이 대문 통과한다는 소리 들리면 윤 대표한테 후문 통해서 손님들 보내 드리라고도 전해. 그리고…….”

“그리고?”

차분하게 말하는 정후에게 귀를 기울이던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후는 쓴물을 삼키며 말했다.

“안 변이 올 테니 신경 안 써도 된다.”

정후는 덜덜 떨고 있는 서준에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귀찮게 됐군.’

어떻게 꼬리를 밟혔는지 모르겠지만 검찰이 그의 별장까지 당도했다는 것은 분명 유쾌한 일은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해서 정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하실이 있는 계단 쪽을 한 번 흘긋거린 정후는 필요한 인력을 모두 손님들에게 배치시킨 후 인터폰을 들여다봤다. 바쁘게 움직이던 별장 내의 고용인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딩동딩동, 쉬지 않고 초인종을 울려 대는 남자의 얼굴이 익숙하다 싶었다. 싱긋 웃으며 손까지 흔드는 이가 중앙지검의 백 검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정후는 하아, 길게 숨을 흘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한창때 아니야?

신호 연결음이 끝난 후 귀 익은 음성이 머리를 울렸다. 나긋나긋한 서호의 목소리를 들은 정후는 인상을 썼다. 이제 와 별장 내의 전등 스위치를 차단한다는 건 무리가 있다. 일단 서호와 말이라도 맞춰야겠다 생각하며 정후가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았다.

“당장 이곳으로 와 줘야겠어. 검찰 쪽이 냄새를 맡았다.”

-검찰이?

정후는 3층 쪽에서 들려오는 쿵쾅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며 말을 이었다.

“모임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갔나 본데, 증거를 잡기는 쉽지 않을 거다. 시끄러워질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네가 와 줬으면 한다.”

-…….

“어디지? 참, 그리고 이곳에 오는 김에 본가 변호사들도 대동했으면 좋겠군. 겁 없는 놈들이 감히 누굴 건드린 건지 알려 줄 필요가 있겠어.”

-…….

“왜 말이 없지?”

-정후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대답 대신 제 이름을 부르는 서호의 음성에 무의식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보통 때였다면 ‘지금 당장 갈게!’라고 외쳤을 사내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귀에 거슬린다. 정후는 ‘안서호’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이번엔 빠져나가기 힘들 거야.

하지만 그런 불길한 예감을 확신하기 전, 서호가 그에게 속삭였다. 정후가 대꾸할 기회 따위는 없었다. 쿡쿡 웃는 서호의 웃음소리가 고막을 울리더니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준비 많이 했거든. 혹시나 네가 빠져나갈까 싶어서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았어.

“너…….”

-더 이상 네 편 안 해.

“……!”

-그러니 머리 굴릴 생각 말고 백 검사님한테 문 열어 줘. 그 사람한테 최대한 협조해야 그나마 형량 줄일 수 있을 테니.

“너!”

-끊을게. 유치장에 들어가면 의리상 얼굴은 비출 테니 웃으며 맞아 주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이 개자…… 젠장!”

서호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려 했으나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에 핸드폰을 바닥으로 집어 던져 버렸다. 일그러지는 정후의 얼굴을 발견한 경호원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인다. 두근두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안정을 되찾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들썩였다. 정후는 이를 갈며 제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주시했다.

‘침착해. 침착……해라.’

서호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자신과 가까운 이였다. 특히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제 곁을 지켜 준 이이기도 했다. 자신이 그를 배신한 적은 있었으나, 그가 자신을 배신할 수는 없다고 확신해 왔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딩동딩동―

끊이지 않는 초인종 소리.

“부, 부사장님!”

“어떻게 합니까? 이를 어떻게!”

제게 해답을 요구하는 외침.

지금껏 많은 일을 해 왔고,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그런 내가, 고작 이런 일에 무너질 것 같아?’

빠져나갈 구멍 따윈 만들지 않았다는 서호의 말이 거슬리기는 했으나, 그는 이정후였다. 그깟 변호사 한 명이 없다고 한들 이 정도 일은 충분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열어 줘.”

“예?”

“열어 주라고!”

정후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이야, 여기까지 들어오기 참 힘드네요. 제가 그렇게 초인종을 눌렀는데도 대답이 없어서 모두 도망가신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하!”

크게 웃음을 흘리는 남자의 말이 짜증스럽다. 현관문을 열어 주자마자 제게로 다가오는 갈색 머리 사내를 응시하던 정후는 경련이 이는 입가를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도망이라뇨? 무슨 섭섭한 말씀을.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라 맞이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중앙지검의 바쁘신 검사님과 수사관분들이 이런 누추한 곳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제 기억이 맞다면, 백 검사님이시죠?”

“에이, 이미 한 번 인사한 사이면서 뭘 모르는 척하십니까. 그래도 굳이 모르는 척하셔야겠다면…… 좋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시는 대로, 중앙지검의 백승진이라고 합니다. 그쪽은 한서 전자의 이정후 부사장님, 맞습니까?”

생글생글 웃는 남자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고 싶다. 정후는 조금도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승진에게 옅은 미소를 흘렸다.

“네, 맞습니다……만.”

승진은 고개를 끄덕이는 정후에게 짙은 눈웃음을 그렸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저도 꽤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죠. 부득이하게 이 부사장님의 협조를 구할 일이 있어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가 이 부사장님의 별장이라 들었는데, 맞습니까?”

“협……조요?”

예상치 못한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정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진은 하아, 길게 한숨을 흘리더니 중얼거렸다.

“예예.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참으로 송구스러운데 말이죠.”

뒷머리를 벅벅 긁던 승진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소식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청사의 검사 한 명이 실종됐거든요.”

“실종…….”

“예. 하필 이곳 근처에서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게 되었습니다. 뭔가 방해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가 말하려던 정후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미소를 잃지 않던 승진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그 녀석’이 갑작스럽게 사라질 만큼 만만한 인물이 아닌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유혹이 안 통하던 녀석이었는데, 누구한테 유혹이라도 당했던 걸까요? 어쨌든 실종 사건은 24시간이 지나기 전에 얼른 해결해야 해서 긴급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무례한 일이 아니라면 이 별장 전부를 수색해도 되겠습니까?”

“…….”

“이 부사장님?”

생글생글 웃으며 협조를 요청하는 승진의 말에는 명백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정후는 제 허락을 요구하는 승진과 두 번 정도 악수를 나눈 후 떼어 낸 손을 슥슥 닦으며 화답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백 검사님. 하지만 요청하신 건에 대한 수락은 힘들 듯싶군요. 죄송하지만 저는 현재 작은 모임을 개최하고 있어서요. 비밀스러운 모임인지라 수색 협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초대장이 없는 분들은 정중히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여기까지 찾아오셨는데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웃으며 대답하는 승진을 보자니, 이곳의 수색 영장은 없었던 모양이다.

여전히 지하실 바닥에서 진한 숨을 흘리고 있을 우영을 떠올리며 정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데 실종이라니, 간과할 문제는 아니군요. 별장 수색 외에 제가 도와드릴 다른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어?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흠, 그럼…… 화장실을 좀 써도 될까요?”

“예?”

“하, 여기까지 오는데 화장실이 하나도 없어서요. 꽤 급한 일인지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도 못 하겠고.”

하하, 웃는 남자를 쳐다보던 정후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백승진이라는 녀석이 이런 인간이었나.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안 됩니다.’라고 대답하려 했다.

“에이, 야박하게 구시지 말고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예?”

“…….”

“부사장니임~”

왜인지 모르겠지만 친근하게 구는 승진을 향해 얼굴을 구길 사이가 없었다. 정후는 한숨을 내쉰 뒤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입니다.”

“앗, 감사합니다! 계장님, 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여기 대기해 주십시오.”

“검사님, 저희 그렇게 한가하지 않…….”

“알고 있어요. 금방 오겠습니다!”

나참,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람들을 응시하던 정후는 웃음을 잃지 않는 승진을 화장실 쪽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모임입니까?”

뚜벅뚜벅 걷고 있던 정후에게 승진이 물었다.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 생각하던 정후는 ‘예?’ 하고 고개를 돌렸다. 싱긋 웃던 갈색 머리 남자가 눈꼬리를 휘었다.

“비밀스러운 모임이라 하셨는데, 어떤 비밀 모임인지 살짝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아까 슬쩍 보니 꽤 많은 차가 이 별장 안으로 들어가던데.”

“…….”

“흐음, 이런 한적한 곳에서 열릴 재력가들의 파티라면…… 마약 파티나, 난교 파티 정도 되려나?”

걸음을 움직이던 정후의 발이 뚝 멈췄다. 정후는 스윽 고개를 돌려 미소 짓는 남자를 응시했다. 중앙지검의 백 검사가 제게 눈웃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화장실은…….”

“응?”

“다른 곳에서 이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후가 차가운 목소리를 흘리자 하아, 한숨을 내쉰 남자가 입술을 삐죽였다.

“제 말이 실례가 됐나 보군요?”

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보기와 달리 야박하십니다. 화장실 한 번 정도는 쓰게 해 주셔도 될 텐데.”

“지금 당장 나가 주시죠.”

정후가 현관 쪽을 가리켰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검사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초대장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예?”

“하긴, 조심스러운 모임이니만큼 초대장이 꼭 필요하겠지요. 암, 필요하고말고요. 제 본가가 본가인지라 이런 모임의 참석 방식에 대해서는 몇 번 들어 봤거든요. 확실히 초대장 없이는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겠죠.”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 이건 초대장으로 봐도 될까요?”

무의식적으로 승진의 말에 반박하려던 정후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곧 정후의 시야로 승진이 들고 있는 서류의 내용이 들어왔다.

정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승진은 말을 잇지 않는 정후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더니 손에 쥔 종이를 펄럭거렸다.

“이정후 부사장님, 당신을 한서 전자 비자금 조성 및 횡령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보시는 대로 이 별장의 압수 수색 영장도 들고 왔으니 이제 그만 제가 화장실 정도는 이용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왕 영장이 나온 거, 화장실은 물론 이 별장 전체를 철저하게 수색해야 해서 말이죠. 강 계장님!”

“예, 검사님!”

“허락 떨어졌습니다. 슬슬 움직이시죠!”

“네!”

현관 쪽에서 ‘비켜!’라고 소리치며 경호원들과 몸싸움을 하는 수사관들과 경찰들의 실랑이 소리가 들려왔다. 정후가 막을 틈 따위는 없었다. 정후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쪽이구나.”

뭐?

무의식적으로 지하실을 응시하던 정후가 몸을 움찔거렸다. 제 앞에서 실실 웃던 승진이 말이 끝나자마자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잠―”

쾅!

“흐응.”

지하실 문을 박차고 열어 버린 남자가 기분 나쁜 콧소리를 흘렸다. 정후는 지하실 아래쪽을 내려다보던 남자의 검은 눈이 제게 꽂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등 뒤가 오싹해졌다.

느리게, 그러나 어쩐지 발목을 붙잡는 승진의 눈동자가 지하실 아래에서 제게로 천천히 옮겨 왔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던 정후는 덫에 걸린 쥐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때.

옴짝달싹 못 하게 되어 버린 정후의 귀로 조소를 흘리는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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