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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공(公)과 사(私) (1)
-이번 주 금요일, 오후 4시. 블랙문 호텔 2306호.
전화를 받자마자 ‘KS’라고 짧게 말하는 상대의 음성을 듣고 승진에게 알파벳을 적어 주었다. 그러다 대뜸 들려온 다음 목소리에 우영은 얼굴을 구겼다. 우영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덩달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던 승진은 갑자기 인상을 쓰는 우영을 보고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승진에게 대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잠깐. 그 말은 직접 만나자는…….”
-그때 뵙죠.
“이보……!”
우영의 통화 상대는 제멋대로이다 못해 아예 전화를 끊어 버리기까지 했다. 우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이미 끊어져 버린 전화를 멍하니 응시했다. 우영이 던진 수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던 승진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뭐래?”
우영은 느릿하게 승진을 응시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승진과 눈이 마주친 우영이 황당한 숨을 흘리지 않은 것은, 그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진은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그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영을 재촉하려는 건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어이, 신가?”
“교섭 장소만 알려 줬어.”
“뭐?”
“시간이랑 날짜도 같이.”
“하, 진짜야?”
차분한 우영의 말을 들은 승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머리 아프군.
우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미친 새끼 아냐!’ 하고 외치는 승진을 올려다봤다.
“씨발, 대한민국 검사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시간을 맞춰도 지들이 맞춰야지, 누구한테 명령질이냐고, 명령질이!”
“…….”
“그러니까,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우리더러 직접 나오라는 거냐? 그런 거야?”
굳이 따지자면…… 그런 것 같다.
우영은 대답 대신 승진을 올려다봤다. ‘개새끼들이 진짜! 누구보고 오라 가라야!’ 하고 잔뜩 흥분하고 있는 승진의 모습은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우영은 승진이 왜 이다지도 화가 난 건지 생각해 보다 뒤늦게 수긍했다.
일단 그들의 뜨거운 밤을 방해해 버린 전화가 하필 김철웅이 언급했던 예의 KS 클럽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에 첫 번째로 화가 났고, 아마도 두 번째는…….
‘조폭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 백승진은.’
승진은 암흑가에 종사하는 인물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치를 떨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부산지검에서 일할 때의 전적 때문이다.
[개새끼들. 이번에 또 날랐어! 내가 이 새끼들 때문에 놓친 휴가만 대체 몇 번짼지, 빌어먹을!]
[…….]
[저, 그, 그래서 그러는데…… 흠흠. 신가야, 미안하다. 이번 주말 약속 취소다. 괜……찮지?]
승진이 부산지방검찰청 강력부 소속의 조직범죄수사과로 활동했던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부산에 거주하는 조직폭력배들이 활개를 쳤다. 세관 검사가 소홀해진 틈을 타 러시아 쪽 마피아와 밀수 및 마약 거래를 활발하게 이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마침 정권이 바뀌고, 부산지역 세관이 실로 취약하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정부에서 밀수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지시했다.
하필 그때 부산지검으로 나가게 된 승진은 초임 검사임에도 불구하고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부산 지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 때문에 한 달에 몇 번씩은 어쩔 수 없이 약속 취소 전화를 해야 했던 승진이기에 우영은 불법적으로 칼을 들고 다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던 승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범죄자들의 대대적 검거 이후로는 주말마다 만나 침대를 뒹굴기는 했지만.
‘꽤 곤란하게 됐군.’
하지만 승진만큼이나 상대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KS 클럽 마약 파티와 관련된 일은 공개적으로 드러난 이들의 숫자만 들어도 적잖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정체가 완벽하게 밝혀진 것도 아니었다. 아마도 재벌가의 자제들이라더라, 유명 국회의원과 시·구의원도 참석했다더라, 유명 연예인도 포함되어 있다더라―라는 카더라 소문만 무성할 뿐.
그랬기에 상부에서도 우영과 승진에게 이번 일을 은밀히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고, 두 사람이 속한 각 부서의 다른 검사들은 두 검사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지 못했다.
‘몸을 사릴 만하지.’
그만큼 거대한 배후가 존재할지도 모르는 일. 일개 클럽 관리인인 우영의 정보원으로서는 충분히 조심스러워할 만했다.
“전화로는 도청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
우영이 낮게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대면하는 게 뭐 쉬운 줄 알아?”
승진은 씩씩거리는 제 외침에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우영을 보고 다시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툴툴거렸다.
“블랙문 호텔이면 서울 내에서도 특급에 속하는 곳이라고. 특히나 양 사장이랑 김 의원 사건 이후로 완전히 약 오른 기자들이 요즘 서울 시내 호텔에 장기 투숙까지 하고 있다더라. 어떻게든 다른 건수 잡으려고 눈을 번뜩이고 있다는데, 하필 그 사건 브리핑했던 네가 거기 떡하니 나타나 봐라. 거기다 웬 조폭 같은 놈이랑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걸 들키기라도 한다면…… 씨발, 굶주린 기자들이 안 달려들 것 같아? 특종에 굶주린 기자 새끼들이 수사 방해하는 건 물론이고, 자칫하다가는 네놈 목숨도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그 역시 일리 있는 발언이다.
우영은 ‘아, 진짜 돌겠네!’를 외쳐 대는 승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하나같이 가능성이 있는 말이어서 더욱 두통이 일었다.
승진의 말대로 현재 대한민국은 뇌물 공여 혐의로 시작된 정치 스캔들로 독이 올라 있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다른 정치 스캔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한 한 기업인이 세력 있는 국회의원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길게 가지를 뻗어 나가 김 의원이 속한 정당의 다른 국회의원들에게는 결함이 없는지, 그들이 어떤 식으로 재계 쪽 인물들과 연계되어 있는지, 그 과정에서 성과 관련된 상납은 없었는지, 누군가를 압박하거나 위협했던 일은 없는지―에 대한 사건들까지 쏟아지고 있었다.
8시나 9시 뉴스들은 매일같이 그 일로 시끄러웠고, 그럼에도 국민들은 청렴한 대한민국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관심을 잃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긴 하지만…….
“그래도 안 갈 수는 없지.”
고민하던 우영이 불쑥 말을 던지자 승진이 긴 한숨을 내쉬며 젖어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헤집었다. 탈탈,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튕겨 나오는 물방울에 우영이 인상을 쓰는 사이, 승진은 소파 헤드에 등을 기대며 목을 뒤로 젖혔다.
“……그렇긴 하겠네. 그 새끼 도움 없이는 당장 명단 확보가 힘들 수도 있으니.”
“…….”
“그래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뭔데?”
한껏 짜증을 냈던 것과 달리 수긍하는 것은 금방이다. 우영은 ‘에라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승진을 묵묵히 응시했다. 그는 우영이 계책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우영은 옅게 미소 지었다.
“백 검, 네 말대로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블랙문에 나타나면, 거기 죽치고 있던 기자들이 난리가 나겠지. 김 의원 일 덕분에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린 나니까.”
“흥, 그걸 말이라고. 그러니까 그때 브리핑은 나한테 양보하라고 했었잖아.”
양보는 무슨.
김 의원 사건 초기, 중간, 최종 브리핑 과정도 두 검사 간의 치열한 선발전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단순히 두 사람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첨수부와 특수부의 자존심 문제이기도 해서, 그들의 상사들 역시 조사는 함께 하더라도 브리핑 기회만큼은 절대로 뺏기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예의 치열한 선발전은 두 검사실 계장들의 입회하에, 공정한 대결로 이어졌다.
[검사님들, 셋 세면 시작하는 겁니다.]
[반칙하시면 바로 기회 날아가는 거예요. 두 분 다 동의하십니까?]
[예, 동의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얼른 카운트하시죠.]
종목은 세 번 다 팔씨름 한판. 승자는 세 번 다 우영이었다.
[신 검, 이 변태 자식! 넌 어째 한 번도 양보를 안 하냐!]
단 한 판으로 결정 나 버린 승부에서 무려 세 번이나 진 승진이 이를 갈며 외쳤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영은 TV에 나올 기회를 놓쳤다며 눈을 부라리던 승진을 뇌리에서 지우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번엔 네 녀석이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거다.”
“뭐?”
“정보원이 뭘 가져올지 모르는 상황에 내가 나타나면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붙을 수 있겠지. 하지만…… 유명한 백씨 집안 백승진은 좀 다르지 않을까.”
“그게 무슨 소리냐?”
빙긋 웃는 우영의 발언에 승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우리 집안이 왜 나와?”
승진은 얼굴까지 찌푸리며 우영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우영은 고요하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굳이 이런 방법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금요일, 블랙문에 가는 건 네 녀석이다, 백 검.”
* * *
[너 미쳤냐?]
욕설이 흘러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자 저를 무심하게 스윽 흘긋거린 우영이 빌어먹게도 냉정하게 안경을 슬쩍 올리며 대꾸했다.
[정상이다.]
[신우영!]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쓸데없이 눈길 안 끌려면. 네 말대로 전국적으로 얼굴 팔려서 ‘나 검사다’라고 외친 건 나잖아. 그렇다면 그나마 얼굴 덜 팔린 네가 나서는 게 낫지. 왜, 내가 제안한 ‘방법’이 마음에 안 들어?]
[그거야 당연히…….]
[그게 그렇게 못마땅하면 내가 너 대신 움직이는 방법도 있다.]
[……!]
[어때, 그렇게 할까?]
싱긋 눈꼬리를 휘며 묻는 우영에게 아무 답도 할 수 없었다. 승진은 이를 악물며 ‘네놈이 가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하고 외치기만 했다. 안 그래도 지난 브리핑 때 우영이 나서는 것이 못마땅했던 승진이다. 저야 자신이 위험해지면 보호해 줄 배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우영은 혈혈단신이지 않은가. 그래서 그 망할 브리핑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건데.
‘제기랄.’
승진은 아직도 그때만 떠올리면 화가 난다는 듯 온몸을 떨었다. 그러자 피식 웃은 우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승진에게 손을 뻗었다. 우영의 기다란 손가락이 제게 닿자 승진의 눈동자가 떨렸다. 우영이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계획은 간단해. 금요일, 너는 블랙문에 가고, 내가 말했던 ‘방법’으로 그곳에 잠입 중인 기자들의 레이더망을 피한 뒤에 정확히 오후 4시, 2306호로 간다. 그곳에서 정보원이랑 접촉하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거 다 알아내 와.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 들어가는 건 그 이후다.]
아주 간단한 발언이었지만, 그리 간단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돌겠군…….”
승진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를 갈았다. 승진이 핸들을 쥐고 있던 차는 어느덧 블랙문 호텔 쪽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끼이익!
호텔 정문에 차를 대자 주차요원이 운전석 쪽으로 달려온다. 승진은 주차요원을 향해 자동차 키를 건넨 후 으리으리한 블랙문 호텔의 로비를 응시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든 싫든, 여기까지 온 이상 하기는 해야겠지만.
‘일단 뭐…….’
부딪쳐 봐야겠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호텔 내의 리셉션 데스크에 멈춰 서자, 승진을 발견한 직원이 빙긋 미소를 그렸다.
“어서 오십시오, 블랙문 호텔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고객님?”
상냥한 눈웃음을 짓는 직원을 바라보던 승진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닫혀 있던 입술을 열었다.
“녹턴 레스토랑이 몇 층에 있습니까?”
“아, 22층입니다.”
“그렇군요. 온 김에 체크인도 함께 하려고 하는데.”
“실례지만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백승진.”
“신분증과 카드, 함께 부탁드립니다.”
승진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장지갑을 꺼내 신분증을 건넸다. 오래전 찍은 사진이나 현재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주민등록증을 승진의 얼굴과 번갈아 보던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이곳과 이곳 빈칸을 기입해 주시고, 여기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체크인 도와드리겠습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승진은 미소를 달고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하고 있는 직원에게 물었다.
“룸 컨디션은 어떻죠?”
키보드를 톡톡 두드리고 있던 직원이 승진의 질문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짙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저희 블랙문 호텔의 스위트룸은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뭐?
“아마 고객님께서도 저희 호텔에 매우 만족하실 겁니다.”
[아, 검사님!]
[예?]
[미리 말씀을 못 드렸는데, 신 검사님 지시로 룸 하나 잡아 놓았습니다.]
[룸이요?]
[일정 층 이상이면 엘리베이터 탈 때 숙소의 카드 키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요.]
[상부에서 허락해 주던가요?]
[예? 아뇨. 하필 결제 당시 부장님들이 안 계시기도 했고, 또 부장님들 결재 받으려면 시간 걸린다고…… 그냥 신 검사님이 검사님 카드로 결제하라고 저한테 카드까지 주시던데요?]
[뭐, 뭐라고요? 그럼 제 돈이 나갔다는 말입니까?]
[헉! 안 되는 거였습니까? 신 검사님이 카드 주시길래 이미 얘기 다 된 건 줄 알았는데!]
이곳을 떠나올 때 제게 따로 지시 사항을 알려 주던 강 계장과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언젠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쓰라며 우영에게 건넸던 자신의 카드를, 우영이 업무적으로 이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우영에게 따질 시간이 없어 급히 호텔로 나오기는 했으나 내내 무언가가 찝찝했는데, 결국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며칠 전 요란하게 울려 대던 핸드폰의 문자를 확인했어야 했다.
승진은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묻는 호텔 직원에게 인상을 쓰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해야 했다.
‘신우영, 이 망할 자식…….’
고작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숙소를 빌리기로 했다면 대충 2인실이나 비교적 싼 룸을 선택할 것이지, 굳이 스위트룸까지 빌릴 필요가 있었을까.
[뭐 잘못됐나? 백가 너, 스위트룸 좋아하지 않아?]
지금 일을 우영에게 따진다면 오히려 위와 같이 되물을 것이 눈에 선했다.
‘신우영한테 쓰는 돈은 안 아깝지. 그치만 나 혼자 사용할 건데 스위트룸을 빌려서 뭐해.’
완전 그림의 떡이다, 떡.
괜히 아쉬운 마음에 입을 쩝쩝거리며 승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라? 백 검사님 아니십니까?”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내 서명을 마친 승진이 카드와 룸 키를 받아 들고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호텔 로비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의 주인공 때문에 승진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윽.’
승진은 그 목소리의 정체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주인공과는 중앙지검에서 몇 번이나 마주친 전적이 있으니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물론 눈에 띄라고 일부러 리셉션 데스크까지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 금방 들통 날 줄이야.
승진은 쓴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살폈다.
“검사?”
“쉬.”
리셉션 데스크에 있던 직원은 물론이고, ‘검사’라는 말에 그의 시선을 회피하는 몇몇 인물들이 보인다. 그리고 제게로 걸어오는 남자 못잖게 눈을 반짝이고 있는 몇몇 인물들도.
‘이거 귀찮게 됐군.’
일명 대포 카메라라 불리는 것을 손에 든 채 제게 다가오고 있는 남자를 피할 길이 없었다. 그를 맞이할 표정이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할 텐데. 안 그래도 쓸데없는 지출을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던 승진은 가급적 높이 입꼬리를 올리려 애쓰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 기자님.”
“하하! 기억해 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잊을 리가 있습니까.”
승진은 생긋 웃었다.
유선일보의 오윤택 기자는 중앙지검 내에서도 꽤 알려진 언론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깃으로 삼은 사람이 있을 경우 집요하게 파고들어, 끝내 타깃이 제 입으로 사건을 불거나 혹은 최악의 선택을 하게끔 만든다고 했다.
만약 오 기자가 전자의 설명에만 그쳤다면 특종을 내는 유능한 언론인으로 인식될 수 있었지만 후자, 즉 타깃을 밑바닥까지 떨어뜨려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든 경우도 몇 번 있었기에 중앙지검의 검사들은 그와 얽히는 것을 꺼렸다.
승진이 그런 오윤택과 안면을 튼 것은 이번 김 의원 사건이 처음이었다.
“검사님께서 이 시간에 여기, 이 블랙문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스톱. 거기까지만 해 주십시오, 오 기자님.”
승진은 눈을 가늘게 뜨는 오윤택을 보며 빙긋 웃었다.
“오늘 여기 온 건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 때문입니다.”
“개인적 용무요? 흐응, 이 시기에요?”
거참, 빡빡한 양반이네.
승진은 노골적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에게 더욱 짙은 미소를 그려 주었다. 마침 저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승진은 그쪽을 흘긋거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오 기자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냥 몸도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빠야 할 중앙지검 검사가, 왜 여기 있는 건지 저도 참 의문입니다.”
“……예?”
“그래서 되도록 업무 시간은 피해 왔는데…….”
“백승진!”
승진의 의미심장한 말에 어리둥절해하던 오 기자가 이윽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음성에 뒤를 돌아봤다. 승진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휘어짐과 동시에,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 한 중년 여성이 ‘너 정말 왜 이렇게 약속 안 지키니!’라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오 기자는 승진과 알고 있는 듯한 중년 여성과 승진을 번갈아 응시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진이 그런 오 기자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들내미 결혼을 원하시는 어머니 부탁은 어떻게 피할 수가 없네요.”
“……!”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쓰게 웃으며 오 기자에게 묵례를 한 승진은 이내 한 여사를 향해 다가갔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어?”
“아직 2시 55분밖에 안 됐는데. 약속은 3시 아니었습니까?”
“그,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일찍 와 있어야지! 네 상대는 벌써 도착해 있다고!”
“시간 개념 하나는 철저한 분이군요. 그 점은 나쁘지 않은데요.”
오 기자가 저와 한 여사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일부러 더 큰 소리를 내던 승진은 ‘쳇’ 하고 입술을 삐죽이며 몸을 돌리는 오 기자를 보고 안도했다.
오 기자가 제게서 떨어져 나가자 그를 주시하던 다른 기자들 역시 흥미를 잃었는지 다시 로비의 회전문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게 보였다.
일단은…… 안심인가.
그는 기자들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응?’
한 여사가 미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인다.
승진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여사님,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너 대체 무슨 꿍꿍이니?”
“예? 뭐가요?”
유려하게 웃으며 되묻자 한 여사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 내가 사흘 전에 할아버지 연락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갑자기 맞선을 보겠다고 할아버지한테 직접 연락드렸다며!”
아아.
“네, 뭐…….”
승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한 여사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을 흘긋거리다 다시 승진에게 다가오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솔직히 말해. 무슨 속셈이야? 그렇게 선보겠다고 해 놓고, 나중에 뒤통수치려고 하는 거지? 응?”
참나. 그렇게 본인 아들을 못 믿으시나―라고 되묻고 싶었지만, 오히려 너무 정확했기에 입을 열지 못했다.
승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한 여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속으로 쓴 물을 삼켰다.
‘누군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줄 아십니까.’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신가 놈 때문인 것을.
[어이, 신가. 너…… 진짜 제정신이냐?]
KS 클럽의 관리인이라는 놈에게서 첫 연락이 왔을 때, 승진은 우영으로부터 황당하고도 어이없는 말을 전해 듣고 그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꽤 무시무시한 시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우영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까지 지어 대며 그 붉고 탐스러운 입술을 달싹였다.
[기자들에게 들키지 않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맞선.]
[야!]
역시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승진은 부글부글 속이 끓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우영은 그런 승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음을 인지했음에도 냉정하게 말했다.
[너희 할아버지께서도 네가 맞선 보는 걸 원하고 계시잖아. 할아버지 소원도 들어 드리고, 네가 그 시간에 블랙문으로 가도 기자들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일석이조지. 하필 그 관리인이라는 녀석이 블랙문을 선택했으니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뭐? 너, 너, 내가 맞선 제안 받았다는 건 어떻…… 아니, 그것보다, 왜 하필 내가 거기에 나가야 하는데!]
[내가 믿을 만한 놈은 너밖에 없으니까.]
버럭 외치는 승진에게 답하는 우영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승진은 입 안에만 맴도는 다음 말을 속으로 삼켰다.
그런 승진에게 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 KS 클럽 마약 파티에 얽힌 인물들이 만만찮은 놈들이라는 건 너도 알고 있겠지. 어쩌면 중앙지검 내에도 그 녀석들 손이 닿아 있을 수 있어. 아직 명단을 확보하지 않은 이상 조심할 필요성이 있지. 계장님들한테도 완전히 계책을 알리진 않을 거다. 그러니 지금 당장 교수님께 연락해. 아니면 네 할아버지께라도. 그 맞선, 보겠다고.]
[…….]
[대신 시간과 장소는 네가 정하는 거다. 금요일, 블랙문 호텔 3시, 22층 녹턴 레스토랑으로 잡아. 그때 그 장소가 아니면 맞선은 없는 거라고 해.]
[…….]
[왜 그런 표정이지?]
승진이 못마땅한 얼굴로 우영을 노려보고 있자 우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승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입을 열었다.
[이 세상에서 제 애인한테 맞선을 보라고 하는 인간은 너밖에 없을 거다.]
누구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서 가족들의 반대까지 무릅쓰고 투쟁을 하고 있건만, 그 마음도 몰라주는 우영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그러자 픽 웃은 우영이 돌연 승진의 두 뺨을 잡으며 눈을 빛냈다.
[백 검.]
[왜.]
[너,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지?]
[……뭐?]
[아니, 누구를 제일 사랑하냐.]
[가, 갑자기 무, 읍!]
난데없는 질문에 승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영은 그런 승진의 입에 살짝 입을 대었다 떼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마지막으로 물어. 네가 사랑하는 놈, 누구냐.]
‘제기랄.’ 하고 쉰 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너다, 이 개자식아.’라는 말과 동시였다. 그 말들을 쏟아 내기가 무섭게 우영을 소파로 눕혀 버린 승진은 우영이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휙 벗겨 젖히며 그의 목덜미로 얼굴을 파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는 거다. 어디까지나 이번에 있을 네 맞선은 ‘공(公)’적인 일이 될 테니까.]
몸 곳곳에 흔적을 새기는 승진을 내버려 두면서도 낮게 웃기만 하는 우영의 말이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맴돈다.
“여사님.”
승진은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제 맞선 상대, 멘탈은 튼튼합니까?”
정확히 2시 58분쯤 예의 약속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입니까?”
앞으로 대략 한 시간쯤 뒤에 바로 위층의 룸에서 누군가를 만날 예정인 승진은 적어도 40분 안에 이 말도 안 되는 만남을 박차고 나올 생각이었다.
굳게 닫혀 있는 레스토랑 안쪽의 VIP룸을 바라보며 한 여사에게 묻자, 그의 뒤편에 서 있던 한 여사가 ‘으응…….’ 하고 미묘하게 말끝까지 흘리는 답변을 해 왔다.
알겠다고 대답한 후 문고리를 잡으려던 승진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한 여사를 내려다봤다.
“여사님.”
“어?”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세요?”
“어어? 어, 그, 그게…….”
“답지 않게 왜 그렇게 긴장하고 계세요? 혹시 제가 사고라도 칠까 봐 그러십니까?”
승진은 유려하게 웃으며 한 여사를 떠봤다. 그러자 헉,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한 여사의 얼굴이 지나치게 창백해졌다.
이거 좀 수상한데.
승진은 호호 웃으며 제 시선을 회피하려던 한 여사가 얼른 문을 열라며 재촉하자 행동을 멈추었다.
“염려 마세요. 할아버지 생각해서라도 예의는 갖출 테니. 그리고 지금부터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이만 돌아가 보시죠. 바쁘시지 않습니까? 남녀가 만나는 데 굳이 어머니까지 대동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들아!”
일단 한 여사를 돌려보내야 나중에 빠져나오기도 수월해진다. 무슨 핑계를 대든 이곳에서 적어도 3시 45분쯤엔 나올 생각이었던 승진이 도통 움직이지 않으려는 한 여사를 설득하려던 순간이었다. 한 여사가 갑자기 그의 손을 덥석 잡더니 눈을 크게 떴다. 대뜸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승진이 주춤하는 사이 한 여사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화내지 마라. 응? 안에 들어가도 화내면 안 돼.”
“……네?”
“엄마도 여기 와서 알았어. 미, 미리 말해 주려고 했는데……. 어쨌든 절대로 화내면 안 된다. 아무리 성질나도 꾹 참아.”
여사님이 왜 이러시나.
승진은 이상하게 저를 달래려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여사님, 제가 아무리 제멋대로 산다고 해도 맞선을 보겠다고 한 건 접니다. 깔 때 까더라도 매너 없이 까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저 이래 봬도 경우 있는 사람이라고요.”
승진은 생긋 웃었다. 그리고는 뭐라 말을 잇지 못하는 한 여사를 내버려 둔 채 힘차게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일단 할아버지의 체면도 있으니 적어도 30분은 함께 앉아 있을 생각이었다.
의외로 괜찮은 여자다 싶으면, 제 주변의 다른 지인들을 수소문해서라도 그녀와 어울릴 만한 사람을 소개해 줘야지. 그것도 아니라면,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라는, 평소답지 않은 생각까지 이어 가며 그는 끼이익 열리는 VIP룸 안으로 들어섰다.
쿵 닫히는 문 사이로 한 여사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들어왔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승진은 VIP룸 입구에 서서는 앞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말하기 시작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백승진입니다. 다른 설명은 넣어 두고, 가장 중요한 사실부터 밝히자면, 저한테는 생명을 바쳐도 될 만큼 사랑하는 애인이 있습니다. 일단 소중한 애인을 두고 이 자리에 나오게 된 점, 먼저 사과드립니다. 아무래도 저는 그 사람을 놓칠 생각이 없고 그쪽과 좋은 인연을 만들어 나갈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서 괜한 시간 낭비를 하시게 만든 것 같아 찝찝하군요. 제가 먼저 만나 뵙자고 했지만, 그간 저희 할아버지께서 워낙 극성이셔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입니다. 그 노인네, 제가 이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완전히 넘어갈 기세였거든요. 하하하! 뭐 이런 병신 같은 놈이 다 있나 싶으시죠? 이해합니다. 귀한 시간을 내서 준비하고 나오셨을 텐데 하필 맞선 상대가 이런 놈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그쪽한테 제안을 하나 하고자 하는데, 이러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이래 봬도 나름 능력 있는 검산데, 이 험난한 세상을 살다 보면 좋든 싫든 안 좋은 일에 엮일 일도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혹시 일상생활에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게 되는 날이 오면 제가 언제든지…….”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말을 쉬지도 않고 뱉어 냈다. 유창한 웃음까지 흘려 가며 말하던 승진이 제 맞선 상대로 보이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려 시선을 올릴 무렵, 승진은 이윽고 제 시야로 들어온 상대를 발견하고선 얼굴을 구겼다.
“……미친.”
있어야 할 여자는 어디 가고, 웬 남자가 앉아 있는 거냐.
* * *
“후우.”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신우영 검사실 소파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신우영 검사실에서 일하고 있던 양우혁 참여계장은 그 한숨을 놓치지 않았다.
“어이, 강 계장.”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던 백승진 검사실의 강진호 참여계장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자 양 계장이 고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아까부터 여기 와서 한숨만 푹푹. 대체 왜 그러는데?”
“아…….”
“이봐, 고민 있으면 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라니까? 강 계장 너 때문에 여기 윤희 씨도 신경 쓰고 있다고. 안 그래, 윤희 씨?”
툴툴거리는 양 계장의 말에 업무를 보고 있던 정윤희 실무관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침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스윽 쳐다보는 강 계장의 눈길에 ‘호, 호호.’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강 계장은 인상을 쓰고 있는 양 계장과 어색하게 웃는 윤희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입을 열었다.
“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왜 우리 검사님만……!”
그때였다.
어두운 얼굴로 말을 잇던 강 계장은 갑자기 열리는 검사실의 문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신 검사님!”
이윽고 그의 시야로 들어온 사람은 강 계장이 있던 검사실의 주인이자,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부장검사들과 대화를 하고 돌아온 신우영 검사였다.
우울해하던 강 계장의 얼굴이 그를 본 순간 환하게 물들었다.
“강 계장님이 무슨 일이십니까?”
우영은 ‘왜 이제 오십니까!’ 하고 흑흑, 눈물까지 흘릴 기세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강 계장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별거 있겠습니까? 백 검사님 걱정된다고 이리로 쪼르르 달려온 거죠.”
“양 계장!”
“왜,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크윽.”
버럭 소리치는 강 계장을 보고 오히려 어깨를 으쓱인 양 계장은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터뜨리는 우영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니 검사님께서 좀 말씀해 주십시오. 백 검사님 어린애 아니라고. 듣자 하니 부산지검에서 아주 똘검…… 흠흠. 어쨌든 그 무시무시한 부산 쪽 조폭들도 다 후려 패고 다니셨다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죠. 아니 근데, 대체 뭘 걱정하는 거야, 강 계장?”
양 계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술을 씰룩였다. 백승진 검사실의 강 계장은 그런 양 계장의 말에 동의를 하면서도 여전히 걱정스러운지 빙긋 웃고 있는 우영에게 자신이 품고 있던 불안감을 토로했다.
“실은 말이지요, 신 검사님. 백 검사님이 중앙지검으로 오신 이후 수사를 할 때 저랑 함께 나가신 적은 많지만, 오늘처럼 홀로 움직이신 일은 드뭅니다. 특히나 저번 김 의원 사건 이후로 기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서 백 검사님이랑 통화하려고 해요. 저한테도……. 흠흠. 그런데 블랙문이라니! 신 검사님도 아시다시피 블랙문엔 다른 호텔들보다 기자들이 더 많이 깔려 있지 않습니까. 백업도 없이 홀로 가신 건 완전 호랑이 굴에 쳐들어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왠지 자꾸만 불안합니다. 벌써 3시 반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연락이 안 오셔서 심장이 벌렁거려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죠? 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저도 함께 가는 건데. 일단 블랙문에 숙소를 잡으라고 하셔서 잡긴 했지만…… 만일 기자들이 냄새라도 맡으면 큰일입니다. 검사님들이 계획하신 방법은 완벽한 거겠지요? 이거 원, 아무 말씀을 안 해 주시니 더욱더 걱정이에요. 그러다가 우리 백 검사님이 그 기자들을 만나서 홧김에라도 이번 일에 대해…….”
“잠깐.”
걱정의 핀트가 미세하게 엇나갔다는 것을 잡아낸 우영이 자신이 품고 있는 걱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강 계장을 막아 세웠다. 우영은 놀라는 강 계장을 보고 ‘계장님.’ 하고 옅은 미소를 그리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강 계장님은 백 검사를 그리 못 믿으십니까?”
“……예?”
“뭐, 물론 백 검이 다혈질에 화도 잘 내고, 남한테 말려들기 쉽고, 조금 경솔한 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먹잇감 노리는 기자들에게 이제 막 구성된 시나리오를 발설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태연한 얼굴로 말하는 우영의 말은 얼핏 들으면 칭찬 같지만, 은근한 디스도 깔려 있다. 아니, 이건 대놓고 디스인가. 강 계장은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생긋 웃는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렇겠죠?”
“그럼요.”
우영의 흔들림 없는 눈을 쳐다보고 있던 강 계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하하. 이거 죄송합니다, 신 검사님! 아무래도 제가 요즘 걱정이 너무 많아졌나 봅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백 검사님을 믿지 못하다니…….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백 검사님이신데 말이죠! 중앙지검 최고의 별! 백승진 검사를 믿지 못하다니! 부끄럽지만, 제 믿음이 약했습니다! 맞아요! 우리 검사님은 훌륭하게 돌아오실 겁니다! 암, 그렇고말고요! 하하하! 그럼 수고하십시오!”
검사실 안이 울릴 정도로 크게 웃던 강 계장이 고개를 푹 숙인 후 문을 닫고 사라졌다.
“강 계장 저 녀석, 대체 왜 저래? 나까지 다 걱정되게.”
쾅― 닫히는 검사실의 문을 응시하던 양 계장이 황당한 숨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우영은 그런 양 계장을 스윽 내려다본 후 제자리로 돌아와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강 계장님도 신경이 쓰이셨던 모양이죠. 듣자 하니 강 계장님 뒤까지 밟아 가며 기자들이 다른 건수는 없는지 캐묻는 모양이더군요.”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어머…….”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양 계장과 윤희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우영은 책상 위에 놓인 조서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한동안 양 계장님이랑 윤희 씨도 기자들과 안 마주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죠.”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네, 검사님.”
두 남녀의 대답을 듣고서야 만족한 표정을 지은 우영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시계를 흘긋거렸다.
[벌써 3시 반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연락이 안 오셔서 심장이 벌렁거려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건 아니겠죠?]
째깍째깍.
초침이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시계를 물끄러미 보자니, 확실히 강 계장의 말대로 어느새 오후 3시 반을 넘기고 있다. 지금쯤이면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에 대한 연락 정도는 와야 할 시각. 이미 블랙문 호텔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건만, 아직 승진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으니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것처럼 불안해하는 강 계장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전화, 걸어볼까.
우영은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인상을 썼다.
‘어련히 알아서 오려고.’
다른 녀석도 아니고, 천하의 백승진을 걱정하는 일만큼 한심한 짓은 없다. 승진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그나저나 검사님.”
전화를 걸까 말까 고심하다 결국 기다림의 자세를 취하기로 결심한 우영을 향해 양 계장이 문득 말을 던졌다. 아래로 내렸던 시선을 들어 양 계장을 응시하자 양 계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하는 게 들려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검사님은 역시 백 검사님을 매우 믿으시나 봅니다.”
어디 그냥 믿기뿐이겠나.
우영은 말없이 웃어 주었다.
* * *
“저기.”
“네.”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제대로 웃은 건가.
승진은 입꼬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승진을 빤히 응시하던 상대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하하, 어색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승진은 있는 힘껏 핸드폰을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달칵.
VIP룸의 문을 닫고선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키패드를 꾹꾹 누른 후 누군가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 소리가 들리더니 ‘어어, 우리 진이니!’ 하고 승진을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노인네가 진짜! 노망이라도 난 겁니까!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바락바락 소리를 내지르는 승진의 외침에 마침 복도를 지나던 웨이트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응시했다.
승진은 놀라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에게 싱긋 눈웃음을 흘려 준 후 다시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다. 곧 핸드폰 너머의 상대도 지지 않겠다는 듯 성난 음성을 흘렸다.
-너 이 자식, 방금 뭐라고 했냐! 노망? 노망이라니!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감히 할애비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네놈이 남자 아니면 안 선다길래, 이 할애비가 치욕을 무릅쓰고 사내새끼를 네놈 앞에 가져다 바친 거 아니야!
“할아버지!”
어느 멍청한 자식이 할아버지 앞에서 남자 아니면 서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인가. 왜곡해도 정도가 있지. 승진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외쳤다.
[화내지 마라. 응? 안에 들어가도 화내면 안 돼.]
몇 분 전, 한 여사가 유독 자신을 진정시키려던 이유가 있었다. 승진은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지금 이 상황에 헛웃음을 삼키며 이를 갈았다.
아니, 그렇게 정·재계 고위 인사들의 ‘여식’이랑 자신을 엮으려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승진은 문득 제 할아버지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졌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이 패륜아 같으니!’를 외치며 부득부득 잇소리를 내던 백 전 대법원장이 ‘진아.’ 하고 한층 누그러진 음성을 흘렸다.
승진은 얼굴을 구겼다.
“왜요!”
-네놈이 염치가 있다면, 이 할애비 체면도 생각해라.
……뭐?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백 전 대법원장의 경고 메시지에 눈을 껌뻑거리게 된다. 승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을 제대로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백 전 대법원장이 음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오늘 네 녀석이랑 마주 보고 있는 상대, 전 전대 국회의장 지낸 안윤호 의원이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운 친손자다.
뜬금없이 이 무슨 소리신가.
“그래서요.”
-그래서긴! 싫다는 안 의원 겨우겨우 설득해서 만든 자리니까, 이 할애비 얼굴에 똥칠하지 말고 제대로 에스코트하고 와. 후우. 사내새끼한테 에스코트라니…… 말세군, 말세야.
싫은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하.”
-진아, 내 경고했다. 이번 자리까지 망치면 도자기 하나로는 안 끝날 줄 알아!
“할아버지,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확실히 게이이기는 한데요, 특정 사람한테만 서는…….”
-누가 네 녀석이 누구한테 서는지 듣고 싶다고 했냐! 나 진심이다. 에스코트 완료할 때까지는 전화하지 마!
“잠깐만 기다…… 제기랄!”
제 할 말만 하고 끊은 것으로도 모자라 협박 멘트까지 덧붙인 할아버지의 말을 끝으로 통화가 종료됐다. 승진은 아무리 외쳐도 돌아오지 않는 답변에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망할…….”
그의 할아버지인 백인우 전 대법원장은 승진이 커밍아웃한 지 1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승진의 확고한 성적 취향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승진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그가 하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승진에게 침을 튀겨 가며 호통을 치기도 했고, 돈을 두둑하게 주면서 회유하기도 했으며, 도자기는 예사하고 물건을 집어 던진 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오죽하면 가문에서 내쫓겠다고 위협을 가한 적도 있었을까.
하지만 전직 대법원장답지 않은 말과 행동을 구사하며 으르렁거리던 그는 자신의 지랄 맞은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손자에게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승진의 나이 스물하나, 즉 대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손자가 머리카락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며 거지같이 사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 이 할애비가 잘못했으니 일단 집으로 들어와.]
자신의 많은 손주들 중에서도 유독 승진을 아끼고 사랑했던 백 전 대법원장이 한숨을 내쉬며 뱉어 낸 말에 승진은 코웃음을 치며 본가로 돌아갔고, 그 후로 집안의 모든 이들이 그를 받아들인 줄 알았다.
그러나 승진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백 전 대법원장이 ‘일단’은 물러나는 방법을 취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손자가 세상 물정 모르고 치기 어린 결정을 했다고 판단해 시간을 들여 그를 설득하는 방법을 선택했다는 것을.
승진이 사법고시에 패스한 이후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던 할아버지의 행동은 그가 부산지검, 그리고 중앙지검으로 발령받고 난 뒤로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어떻게든 승진을 결혼시켜야 한다며 어머니를 압박하고 아버지까지 압박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에는 제멋대로 이렇게 맞선 자리까지 마련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왜 씨발, 남자냐고!”
차라리 여자였으면 자신이 게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깔끔하게 이 맞선을 깨뜨릴 수 있었을 텐데, 대놓고 남자가 떡하니 앉아 있으니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안녕하세요, 백승진 씨.]
VIP룸에 앉아 자신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있던 상대의 얼굴은 승진의 성별이 ‘남자’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나온 듯했다.
이 세상에서 단단히 미친놈은 저와 신우영뿐인 줄 알았는데 빙긋 웃고 있는 맞선 상대를 본 승진은 역시 세상은 넓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하고야 말았다.
“젠……!”
아.
벽을 쿵 치며 욕설을 흘리려던 순간,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발견했다. 그 시선이 조금 전까지 룸 안에 앉아 있던 남자의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승진은 어느덧 VIP룸을 나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지독하게 새카만 머리카락에 그 못지않은 칠흑의 눈동자, 찹쌀떡처럼 새하얀 얼굴에 앵두같이 붉은 입술. 확실히 노인네가 혹할 만큼 겉으로는 얼핏 ‘여자’처럼 보이기는 했으나, 틀림없는 남자였다. 그것도 꽤 강인한 눈빛을 지닌.
천하의 백승진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생긋 웃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만만찮은 사내임이 틀림없다.
‘돌겠군.’
대체 무슨 꿍꿍이야.
승진은 싱긋 미소 짓는 맞선 상대를 쳐다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안서호.”
“안서호 씨.”
아마 제대로 사고가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남자를 상대로 맞선 장소에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덧 시계는 오후 3시 3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45분쯤에는 23층에 가야만 하는 승진은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그러고는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맞선 상대를 향해 짙은 미소를 흘리며 말하기 시작했다.
“들어오면서 이미 말했지만, 난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대가 누군지 이 사내에게 직접적으로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승진에게는 그냥 만나다 못해 만나기만 하면 입을 맞추고, 호흡을 교환하고, 침대를 함께 뒹구는 애인이 존재했다. 단순히 몸만 탐하는 상대였다면 가족들에게까지 자신의 취향을 밝히지 않았겠지만, 백승진에게 있어 신우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물론 내가 남자를 좋아하기는 해도, 그놈 아니면 안 꼴리는 몸이 되어 버려서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이 홀딱 벗는다 해도 내 아래가 반응하진 않을 겁니다. 한마디로, 당신은 이 맞선을 통해 나한테서 얻어 갈 수 있는 게 없다는 소리죠.”
째깍.
승진의 손목에 달린 시계 초침이 멈추지 않는다.
‘뭐야, 이 반응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동요라도 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상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승진이었다. 승진이 되레 인상을 쓰며 물었다.
“안 놀랍니까?”
그러자 작게 웃던 사내가 대답했다.
“글쎄요. 백승진 씨 취향이 특별하다는 건 이 세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인데요, 뭐.”
“예?”
승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자식이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승진을 향해 안서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깐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백승진 씨의 특별한 취향에 대해 먼저 언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백승진 씨를 만나고 싶어 한 건 그 때문이었거든요. 아무래도 이 자리에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승진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내뱉고 있는 안서호를 황당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안서호는 자꾸만 손목에 찬 시계와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있는 승진을 향해 말없이 웃어 보이더니, 자신이 열고 나온 VIP룸을 가리키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시간 많이 안 뺏을 테니 다시 들어가 주실 수 있나요? 백승진 씨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 * *
“어? 19층 검사님 아니십니까!”
서울시 서초구의 B 오피스텔 19층에 사는 검사라면 단둘.
1901호의 특수부 소속 백승진 검사와 1902호의 첨수부 소속 신우영 검사가 바로 그들이었다.
현재 백승진 검사는 오전에 나갔던 외근에서 밤이 늦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오피스텔 로비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이 칭하는 ‘19층 검사님’은 아마도 자신, 신우영일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우영은 저를 보고 반가운 인사를 하는 경비원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어디 나가는 길이세요?”
“예. 요 앞에 좀.”
“하하, 그럼 얼른 다녀오십시오!”
그럴 필요 없다고 해도 굳이 배웅까지 해 주는 경비원에게 감사를 표한 뒤, 우영은 인적이 끊어진 도로가를 향해 걸어갔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우영이 승진의 전화를 받은 것은 정확히 오후 5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연락을 기다리던 강 계장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해 버리기 직전까지 시간을 끈 승진은 모두의 숨통을 단단히 조이고 난 후에야 소식을 알려 왔다.
[명단 받았다. 조금 이따가 문자로 사진 찍어서 보낼 테니까, 확인해.]
[확인하라니? 바로 들어오는 거 아니었나. 어차피 블랙문에서 볼일은 끝났을 텐데.]
[아…… 그게 좀.]
[백승진 씨, 저쪽 룸으로 들어갈까요?]
[아, 예! 먼저……. 어쨌든 신 검, 나 볼일 있어서 끊는다. 한동안 연락 안 될 거야.]
[뭐?]
[그럼.]
[야, 백승진!]
평소에도 제멋대로 말하고 제멋대로 통화를 끊어 버리기 일쑤였으나, 오늘처럼 중요한 볼일을 두고 중앙지검으로 돌아오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우영은 끊어져 버린 전화기를 황망한 표정으로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신 검사님? 우리 배, 백 검사님한테 무슨 일 생겼……답니까?]
승진에게 연락이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신우영 검사실로 달려온 강 계장은 급격하게 어두워진 우영의 낯빛을 마주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르르 입술까지 떨고 있는 강 계장에게 ‘백 검이 위장용으로 준비한 룸을 사용하려나 보네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지라 우영은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아뇨. 잘 처리……됐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우영에게 연락이 왔고, 예의 KS 클럽 관리인이 건넨 것이 틀림없는 명부가 손에 들어왔다. KS 클럽 마약 파티 사건 당시, 그곳에 출입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리스트였다. 분명 그 리스트는 이번 사건을 수사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줄 내용임이 확실했다.
그런 리스트를 본 우영의 입꼬리가 씰룩여도 무방할 판에, 우영이 핸드폰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를 주시하던 두 계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를 흘긋거렸다. 하지만 우영은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 따위는 하지 않고, 한참 핸드폰만 노려보고 있다 겨우 시선을 뗐다.
‘벌써 11시.’
무의식적으로 들고 나온 핸드폰의 홈 버튼을 살짝 누르니 현재 시각이 떴다.
대체 난 왜 이러고 있는 거냐.
어이없는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빌어먹을. 우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윽!’
그때였을까.
밤 11시를 갓 넘긴 시간인지라 주변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어쩐지 공기도 쌀쌀한 것 같아 그냥 몸을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순간, 우영은 멀리서 비치는 전조등 빛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끼이익.
환한 빛을 발산하며 우영이 서 있던 곳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차의 문이 열렸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짜증스러운 눈으로 불빛이 비치는 곳을 쳐다보던 우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저 녀석이…… 왜 저기서 내려?
- 2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