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그리고, 현재 (6/15)

5. 그리고, 현재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본관 10층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한 이름 모를 창고.

승진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이곳으로 숨어들어 와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는 식사하러 가라는 말을 한 뒤 은밀하게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그가 들어온 지 몇 분 되지 않아 창고를 찾은 또 다른 이가 있었다.

시계를 흘긋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승진이 빙긋 웃으며 창고 문을 잠그는 이에게 물었다.

“뒤는?”

“안 밟혔어.”

“좋아, 그럼 할까?”

싱긋, 미소 짓기가 무섭게 고개를 까딱이는 검정 머리카락의 사내에게 승진은 주저 없이 돌진했다. 남자가 끼고 있던 안경을 벗을 사이도 없이 입술부터 들이밀자 ‘씨발’ 하고 짧게 욕설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곧, 승진이 제 혀를 옭아매는 것을 봐주지 않겠다는 듯 승진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남자는 거칠게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가했다.

“하아.”

길고 긴 키스 끝에 뒤로 살짝 물러나던 승진이 짧게 숨을 내쉬자 남자가 인상을 쓴다.

“벌써?”

“시간, 별로 없으니까.”

“아.”

“최대한 빨리 끝낼게. 뒤돌아 봐.”

“뭐? 나보고 깔리라고?”

“오늘 네 차례야.”

“……”

“신 검?”

“젠장.”

이틀 전 그가 깔려 줬으니, 당연히 오늘은 이 녀석이 아니겠는가. 승진이 생긋 웃으며 ‘얼른 뒤돌아.’라고 속삭이자 검은 머리의 남자, 우영이 낮게 욕설을 흘리며 느릿하게 몸을 돌리려 했다.

거참 굼뜨네.

승진은 그런 우영의 행동을 지켜보다 미간을 좁히며 손을 뻗었다.

“윽!”

쿵―! 

시간이 없단 말이지.

점심시간 내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서는 빠릿빠릿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하는 수 없이 승진이 우영의 등을 슬쩍 밀자 휘청거리던 우영이 차가운 벽 쪽으로 손을 댔다. 짧게 신음까지 흘리는 우영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지만, 얼른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던 승진은 서둘러 우영의 바지와 브리프를 내렸다. 그러자 우영의 탄탄한 엉덩이 근육이 승진의 시야로 들어왔다.

탐스럽기 짝이 없군.

승진은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이를 악물고 있는 우영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크으으.”

우영의 넓은 어깨에서 척추, 그리고 밑으로 이어지는 꼬리뼈와 탱탱한 엉덩이 사이. 보다 수월하게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 엉덩이 쪽을 집중적으로 지분거리던 승진은 어느새 곧게 선 제 것의 존재를 인지하고 인상을 썼다.

쫘악.

있는 힘껏 지퍼를 아래로 내려 제 페니스를 우영에게 들이민 승진은 신음을 흘리고 있는 우영의 애널에 페니스를 박으려다 인상을 썼다.

“야, 신 검.”

“크윽.”

“좁다고.”

“……하아.”

“신 검.”

“왜, 씨발!”

“조금 더 안 벌리냐?”

분명 오전까지만 하더라도 단정했던 우영의 머리카락은 완벽하게 흐트러진 상태였다. 손가락을 집어넣어 미리 입구를 풀어 주기까지 했건만, 여전히 안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다.

“뭐?”

하아.

하지만 그를 받아들이느라 이미 정신을 소모하고 있던 우영으로서는 그 말이 들릴 리 만무했다. 이를 어쩌나. 승진은 굳어 있는 우영의 어깨를 할짝이며 낮게 속삭였다.

“힘 말이야, 힘. 시간도 없는데 빨리하고 끝내야지. 안 그래?”

“이 개새끼가 진…… 흡!”

“욕하지 말고.”

“크으!”

“아, 진짜! 그렇게 전투적으로 버티고 있으면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씨ㅂ…… 그냥, 큭, 알아서 들어, 컥!”

“저 생각해서 말했더니. 뭐, 원한다면 그냥 들어간다.”

“그래! 그러니까 얼른…… 읍!”

배려가 욕설로 돌아오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승진은 쯧, 혀를 차더니 벌어진 우영의 틈새로 기다란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온몸을 관통하는 강렬한 통증에 우영이 벽에 밀착했다. 가쁜 숨을 흘리는 우영의 모습이 아찔하기 그지없어 승진은 그런 그의 아랫배를 커다란 손으로 부축하며 서서히 반동을 주기 시작했다.

“큭, 하아, 으윽, 흐!”

승진이 허리를 흔들고 우영을 압박할수록 벽을 짚고 있던 우영에게서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살이 맞닿아 발생하는 퍽퍽거리는 소리가 좁은 밀실을 가득 채운다.

잠가 놓은 문밖에서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있었으나, 넥타이를 풀어 헤친 두 남자는 식사가 아닌 서로를 미친 듯이 탐닉하고 있었다.

‘좋네.’

좋아도 아주 좋아서, 승진은 멈추지 않았다.

점심시간을 비워서 하는 섹스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 * *

[이봐, 백가.]

그러니까 때는, 하반기 정기 인사를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놀랍게도 승진과 우영은 부산과 대구에서 동시에 서울중앙지방 검찰청으로 발령을 받았다. 평검사 시절, 2년마다 반복되는 인사 발령에서 한번 수도권을 벗어난 검사들이 다시 수도권으로 복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보통 연수원 수료 이후 서울에서 지방 쪽으로 인사이동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지방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 두 사람을 중앙 쪽에서 줄곧 눈여겨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비교적 빨리 서울로 복귀하게 된 승진과 우영은 지방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 먼저 짐을 꾸릴 수 있었던 승진은 자신의 짐을 올려 보낸 뒤 우영의 오피스텔로 와 그가 물건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발령 직전까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우영은 웬만한 주부 못지않게 완벽한 정리를 마친 승진이 자신의 물건들을 커다란 상자 속에 차곡차곡 챙겨 넣는 것을 지켜보다, 대뜸 그를 불렀다.

안 그래도 바쁜데 부르기는 왜 불러.

우영의 옷가지를 개고 있던 승진이 저를 불러 놓고 말하지 않는 우영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왜.]

[…….]

[신 검?]

[너랑 나, 곧 중앙지검으로 간다.]

갑자기 말을 걸고도 왜 말을 하지 않는 건지. 인상을 쓰던 승진은 당연히 알고 있는 말을 툭 던지는 우영을 황당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런데?]

[…….]

[그런데 뭐?]

[……이제 슬슬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정리?]

정리라니.

난데없이 뭘 정리하라는 것인가.

가끔 보면 우영은 주어와 목적어를 잘라 놓고 말을 할 때가 있었다. 우영의 속을 가늠할 수 없어 얼굴을 구기자 말없이 승진을 쳐다보던 우영이 입을 열었다.

[깔았다가, 깔렸다가를 언제까지 반복할 수는 없잖아.]

“검사님! 백 검사님!”

……아.

따사로운 햇볕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나른한 정오.

방금 점심을 먹고 와 눈이 스르르 감겨 오는 것을 느끼고 있던 승진은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내에 위치한 자신의 검사실 안에서 얼마 남지 않은 휴식 시간을 만끽하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달칵, 문을 열고 검사실 안으로 들어오는 백승진 검사실 소속 강진호 참여계장의 외침이 귀를 웽웽 울린다. 승진은 나른하게 하암 입을 벌렸다가 닫는 제게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하고, 묻는 강 계장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잠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실은 졸고 있었던 게 맞다.

“강 계장님이랑 주연 씨는…… 점심 드시고 오는 길입니까?”

여자 실무관인 한주연과 강 계장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빙긋 웃은 승진이 물었다.

“예! 다음에는 검사님도 함께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도요?”

“네! 거기 김치덮밥 진짜 맛있거든요!”

“맞아요. 이번에 오픈해서 그런지 식당 아주머니가 정말 친절하시더라고요.”

일주일 전, 중앙지방 검찰청 앞에 분식집 하나가 새로 오픈했다.

그간 그곳을 눈독 들이며 점심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오늘 식사는 그곳에서 해결할 겁니다!’ 하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을 스친다. 다행히 식사가 꽤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러도록 하죠.”

맛집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었던지라, 승진은 부드럽게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승진의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네!’를 외치며 제자리로 돌아간 주연과 달리, 승진 왼편의 책상을 쓰고 있던 강 계장은 여전히 승진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

뜨거운 시선을 느낀 승진이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짓자 승진을 주시하던 강 계장의 입술이 움직였다.

“검사님.”

“예, 강 계장님.”

“검사님은…….”

나는?

“점심, 드셨습니까?”

“네?”

승진은 예상치 못했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 계장이 그런 승진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했다.

“혼자 드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저희랑 같이 점심 드시는 일이 손에 꼽잖습니까.”

“아.”

“혹시 끼니를 거르고 계시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강 계장이 괜히 특수부 검사실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증명되는 순간이다. 승진은 핵심을 찌르다 못해 아예 쑤셔 버린 강 계장의 예리한 질문에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의문을 표하고 있는 상대에게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점심을 해결해야 할 시점에 바로 옆방의 검사실을 사용 중인 모 검사와 온몸으로 부딪치며 땀을 쭉쭉 흘리는 시간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승진은 의아한 눈을 빛내고 있는 강 계장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와서 말이죠.”

“어휴, 그러다 정말 탈 나세요!”

“하하.”

“안 되겠습니다. 내일부턴 저희랑 같이 점심 먹읍시다!”

“맞아요. 그렇게 하세요, 검사님! 그러다 속 버려요.”

강 계장뿐 아니라 주연까지 그의 말을 거들자 승진은 알겠다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참. 그러고 보니 들으셨어요, 강 계장님?”

“뭘?”

“옆방의 첨수부 신우영 검사님 말이에요.”

……응?

“신 검사님도 대부분의 점심시간을 홀로 보내신다더라고요.”

“뭐?”

“그래서 그쪽 계장님이랑 실무관 언니도 둘이 식사를 해결하나 봐요.”

“허허. 그게 정말이야, 주연 씨?”

“그렇다니까요?”

“백 검사님.”

“예?”

주연의 입에서 나온 ‘신우영’이라는 단어에 온몸의 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것을 느끼던 승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신을 부른 강 계장을 쳐다봤다. 강 계장이 뭘 그리 놀라냐는 듯 피식 웃자 흐릿하게 미소 짓던 승진은 강 계장의 다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첨수부 신 검사님 말입니다.”

“네.”

“정말로…… 싫어하시는 겁니까?”

백승진과 신우영.

신우영과 백승진.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사법연수원을 거쳐 석 달 전, 중앙지검으로 발령받을 때까지 그들의 질긴 악연(惡緣)에 대해 지검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제 모르는 이들이 없었다.

[네 녀석이 여기까지 오다니. 윗분들 안목이 영 말이 아니군.]

[말세야. 개망나니를 중앙으로 부르시다니, 오죽 인물이 없었으면.]

하반기 인사이동에 의해 중앙지검에 모이게 된 두 남자가 서로를 보자마자 툭 던졌던 말은 7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

얼굴만 마주하면 날이 선 말들을 교환하고, 이를 드러내는 것을 감추지 않는 두 검사는 중앙지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붙여 놓아서는 안 될 커플 제1호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했다.

특히나 어제, 야당인 김 모 의원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된 양 씨를 취조하는 과정에서도 마찰이 들려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강 계장은 불과 얼음을 연상케 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못내 의심스러웠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다른 동료 검사들은 없던 학연과 지연까지 끌어들여 어떻게든 줄을 잡으려 하는데, 윗선의 눈길을 받고 있는 잘나가는 두 검사가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으르렁대니 의아할 수밖에.

[조건은?]

[글쎄, 뭐가 좋으려나.]

[대검.]

[……!]

[누가 먼저 대검으로 가는지―로 하자.]

[……하지만.]

[뒷배 없이, 순수 제 실력으로. 그렇게 대검으로 가는 거다. 오로지 그 경우에만 인정해 주는 걸로.]

[……만일 누가 손을 썼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럼 순순히 항복하도록 하지. 어때?]

따지고 보면 대학이나 연수원 생활 때까지만 하더라도 남들 앞에서 인사 정도는 하곤 했던 승진과 우영의 신경전이 다른 이들 앞에서까지 눈에 띄게 된 것은 전부 중앙지검으로 발령받은 7개월 전부터였다.

‘이게 다…… 그놈의 쟁탈전 때문이군.’

우영의 말을 계기로 시작된 포지션 쟁탈전.

그들의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수일, 수 달, 혹은 수년을 기점으로 해서 정기적으로 변하는 포지션 변화는 더 이상 없어야 했다. 그로 인해 승진과 우영은 포지션 쟁탈전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기로 합의 봤고, 그 방법은 ‘대검찰청에 먼저 들어가는 검사가 최종 우승자다.’라는 결론을 냈다.

깔리느냐, 혹은 까느냐―의 최대 기로에 서 있던 승진과 우영이 공(公)적으로는 으르렁거리며, 사(私)적으로는 서로를 탐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백 검사님?”

하여간 예리한 강 계장 같으니.

검사시보부터 시작해 군법무관, 그리고 초임 검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승진은 적잖은 참여계장들과 함께하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곤 했지만 서울 중앙지검에서 일하고 있는 여기 이 강 계장만큼 예리한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호탕하게 웃으면서도 할 말은 다 내뱉는 강 계장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승진은 강 계장의 질문을 회피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답하면 되려나.

‘그 자식을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리죠.’

―라는 정도로 말을 해 주어야 할까?

Rrrr. Rrrr.

그때였다.

승진이 뭐라고 답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승진의 귓속을 파고든 것은 검사실의 전화벨 소리였다. 마침 강 계장의 데스크 쪽에서 울리는 전화에 살짝 안도한 승진이 얼른 전화를 받으라는 듯 강 계장에게 눈을 빛냈다. 그러자 원하던 답변을 못 들었다며 ‘쳇’ 입술을 삐죽인 강 계장이 수화기를 집어 들며 퉁명스러운 말을 흘렸다.

“예.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백승진 검사실입니다.”

승진은 한발 물러나는 강 계장의 태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예에. 아, 네. 예. 계십니다. 예. 잠깐만요. 백 검사님!”

“네?”

“잠깐 로비로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로비요?”

전화를 받으며 소스라치게 놀라던 강 계장이 외치는 말에 승진은 멍하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강 계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찾아오셨답니다!”

“손님?”

내게 손님이 찾아올 일이 있나? 게다가 이 시간에?

사적인 미팅이 있으면 보통 업무 중간이 아닌 업무 이후로 잡곤 했던 승진에게 있어 꽤 당황스러운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어제 있었던 양 사장 일이랑 관련된 건 아니겠지.

승진은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선뜻 일어나기를 주저했다. 그가 김 의원 사건을 수사 중이라는 이야기가 국회에 떠돈 이후, 근래 들어 그의 개인 핸드폰으로 수상한 연락들이 빗발쳐 왔다.

승진은 냉랭한 눈으로 강 계장을 쳐다봤다.

“하하, 검사님도 참. 경계하시기는. 걱정 마십시오, 어머님이시랍니다! 마침 근처에 들렀다가 생각나서 오셨다고 하는군요. 혹 시간이 되면 잠깐 봤으면 한다고 전해 달라시던데요?”

* * *

[외견 좀 설명해 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까?]

[예?]

[제게 ‘어머님’이 한두 분이 아닌지라.]

[……네에?]

[부탁드립니다.]

[아, 예. 어…… 그, 그러니까…… 어깨를 살짝 넘기는 갈색 단발에, 부드러운 인상의…….]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승진은 ‘갈색 단발’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검사실을 나섰다. 벌컥 문을 열다 못해 달려가기까지 하는 승진을 보며 본관 10층을 지나던 동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시선 따위는 무시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로비로 달려간 승진은 헉헉, 숨을 내쉬었다.

[만약 업무를 시작했다면 그냥 돌아가겠다고도 전해 달랍니다. 방해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는데요?]

직접 검사실로 오셔도 될 텐데, 굳이 로비에서 만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보면 생각이 깊은 분이다.

저기 계시는군.

흐린 미소를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승진은 어렵지 않게 자신의 손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머니!”

낯익은 뒷모습.

그의 외침에 천천히 뒤를 돌아본 단발머리 여성이 승진을 발견하고 옅은 미소를 그렸다.

“어머, 승진아.”

언제나 상냥하게 그를 맞아 주는 ‘어머니’에게 승진은 함박웃음까지 지으며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고급스러운 재질의 6단 찬합을 들고 있던 중년 부인이 제게로 걸어오는 승진을 맞이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가끔은 서프라이즈 방문이 재미있잖니.”

“뭐, 그건 그렇죠.”

“참, 이거.”

“응? 이게 뭡니까?”

“아아, 별건 아니고…… 그냥 반찬 좀 만들다가 한번 챙겨 와 봤다. 내가 챙겨 주지 않으면 밖에서 사 먹잖니. 한두 번도 아니고, 너무 바깥 음식만 먹어도 안 좋아요.”

빙그레 올라가는 입꼬리가 부드럽다.

승진은 그녀에게서 예의 찬합을 건네받고 히죽 웃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내 예쁜 아들을 위해서 하는 거야. 꼭 챙겨 먹어.”

“알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승진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했다.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승진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선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볼 때마다 훤칠해지는 것 같아.”

그녀와 함께 2층 휴게실 쪽으로 올라온 승진은 따뜻한 차를 건넸다. 승진에게 차를 건네받은 중년 여성이 물끄러미 승진을 올려다보더니 툭 말을 던졌다.

“감사합니다. 쉽게 지지 않으려면, 저 자신도 가꿔야죠.”

“얘도 참. 네가 어디 가서 질 아이니.”

그건 그렇지만.

“어? 백 검 아니냐?”

만나지 못했던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승진의 뒤에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윽.’

홱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곳을 응시하니, 마침 구내식당을 빠져나오던 유재익 특별수사 제1부의 부장검사가 볼록 솟은 배를 탕탕 두드리며 두 남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승진은 자신을 보고, 이어 중년 여성을 본 유 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인상을 썼다.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누구……신,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백 검 어머님께서 오셨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혹시 백 검사 어머님이십니까? 이야!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저는 특수부 유재익입니다. 백 검이 제 부하로 있습니다! 하하하!”

역시나.

유 부장은 ‘어머’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까딱이는 중년 부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다, 스윽 눈을 돌려 승진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승진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승진은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유 부장의 말을 정정하려 들었지만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까딱이는 중년 여성을 미처 말리지 못했다.

“백 검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아…… 네. 겸사겸사.”

“겸사겸사? 하하, 뭐. 어쨌든 참 장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덕분에 우리 중앙지검이 아주 든든합니다! 발령받은 지 7개월 만에 웬만한 어려운 일들은 전부 해결하고 있거든요, 여기 이 백 검이.”

“어머…… 그런가요?”

“예! 우리 지검에서 자랑하는 검사가 딱 둘 있는데, 백 검이 바로 그중 한 명이죠! 다른 한 명은 특수부 녀석인데…… 하여간 아드님을 자랑스러워하셔도 될 겁니다!”

“그랬니, 승진이?”

갑자기 나타나 제 칭찬을 하는 유 부장의 행동이 무언가 이상했다. 꽤 머쓱하기도 하고, 갑자기 낯이 뜨거워져 승진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별거 아닙니다, 어머니.”

그런 승진의 답변을 듣고 있던 유 부장이 무언가 확신을 한 듯 눈을 빛냈다.

어째 불안한데.

유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승진을 흘긋거리며 씩 미소 짓더니 이내 중년 여성에게 한 걸음 다가와서 외쳤다.

“해서 어머님! 제가 긴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네? 제게……요?”

유 부장은 깜짝 놀라는 승진의 ‘어머니’에게 소리쳤다.

“제가 앞길 창창한 우리 백 검의 중매를 서고 싶습니다!”

“중…… 중매요?”

이럴 줄 알았어.

두통이 일었다. 난데없이 나타나 갑자기 제 칭찬을 늘어놓는 유 부장의 행동이 많이 수상했다. 불과 그저께까지만 하더라도 제게 호통을 치던 사람이 아니던가.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여기며 긴장하고 있을 때 들려온 말에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승진은 당황해하는 중년 여성과 생긋 웃는 유 부장을 차례로 응시하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는 수 없지.

“부장님, 무슨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이분은…….”

“팍팍한 요즘 시대에 우리 백 검만 한 사위도 없죠. 마침 제 사촌 조카가 한창때인데, 어머님만 오케이하시면 그 아이랑 백 검이랑 한번 만남을 주선해 보고 싶습니다. 어머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승진이 다급히 유 부장의 말을 끊어 내려 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맙소사. 대놓고 맞선 상대까지 언급해 버린 유 부장의 일방통행에 승진은 얼른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얼굴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이런.

“어머님?”

상황을 알 리 없는 유 부장이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승진과 허공에서 눈이 마주친 갈색 머리 중년 여성이 옅게 웃더니, 이윽고 붉은 입술을 달싹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유재익 부장검사님이라고 하셨나요?”

“예!”

지금이라도 유 부장의 오해를 풀어 주고 싶었지만, 승진은 일단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얼마 전, 자신과 우영을 두고 갈팡질팡하던 유 부장에게 소심한 복수를 하고 싶기도 했으니까.

사실을 알게 되면 창백하게 질릴 것이 틀림없는 유 부장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져 큭큭, 웃음이 흘러나온다. 승진은 입가에 번지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 냈다.

그때, ‘그녀’가 크게 외치는 유 부장에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부장검사님의 제안은 정중히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 그게 무슨……. 아, 너무 노골적인 연결이었나요? 마, 만약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저와 연관이 없는 주변 사람이라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백 검은 이미 제 며느리라서요.”

“……예?”

하하 웃으며 말을 잇던 유 부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승진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며느리가 아니라 사위입니다, 어머님.’

승진은 ‘저게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유 부장에게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두 남자의 눈빛 교환을 지켜보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승진 쪽을 응시했다.

“승진아.”

“예, 어머니.”

“잠깐 얼굴만 볼 생각이었는데 봤으니 됐어. 난 이만 가 봐야겠다.”

“어? 벌써요? 하지만…….”

“아아, 괜찮아. 오는 길에 전화 통화했거든.”

“아…….”

“이사 후에 부엌 정리도 다 못 하고 해서 얼른 들어가 봐야 해. 곧 예빈이도 올 시간이고.”

“아! 그럼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호호, 괜찮다. 택시 타고 가면 돼.”

“그래도…….”

“바쁘잖니. 나 데려다줄 시간에 대한민국의 나쁜 범죄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잡아넣어 주렴. 그럼 이 엄마가 기쁠 것 같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승진은 돌처럼 굳어 버린 유 부장에게 해명도 하지 않은 채 양팔을 벌려 저보다 한참은 작은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와 엄마, 아들 사이로 지내게 된 ‘그날’ 이후 몇 년이 흘렀다. 호호, 미소 짓던 그녀는 포옹 끝에 저를 놓아주는 승진의 두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잘 부탁한다, 승진아.”

“염려 붙들어 매세요. 그리고.”

“응?”

“어머니, 저는 며느리가 아니고 사위입니다만.”

살짝, 그녀의 귀에만 들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리자 ‘맞다, 우리 사위였지.’ 하고 방긋 웃어 준 여인이 손까지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네고는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유 부장에게 짧게 묵례를 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어…….”

유 부장은 로비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서 있다 승진을 올려다봤다.

“백 검.”

“예, 부장님.”

“방금 그분 말이다.”

“예.”

“너희 어머님…… 아니시냐?”

그러자 승진은 피식 웃으며 오히려 유 부장에게 되물었다.

“부장님.”

“으응?”

“부장님은 저희 어머니 얼굴도 모르십니까? 얼마 전에 TV에 나와서 강의도 하셨는데.”

쯧, 짧게 혀까지 차며 승진이 말하자 유 부장이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이름은 익히 들어 왔는데…….”

“어머니께 말씀드려야겠군요. 생각보다 유명하시지 않다고. 그 말 들으면 실망하실 것 같지만요. 나름 유명하다고 자부하시는 분인데.”

승진은 제 이름만 대면 웬만한 사람은 다 고개를 끄덕인다고 생각하는 한 여사의 고고한 얼굴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유 부장이 ‘협박하는 거냐, 인마!’ 하고 그에게 소리쳤다.

씩 웃은 승진이 유 부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리고 아까 그 말씀은 대체 뭡니까?”

“뭐 또, 인마.”

“중매라니. 제가 왜 유 부장님 사촌 조카분을 만납니까? 저는 검찰청이랑 결혼한 남자라고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

“으이고, 이 멍청한 자식아. 내가 너 키워 주려고 그러는 거지!”

한숨을 푹푹 내쉬며 외치는 유 부장에게 승진이 묘한 콧소리를 흘렸다.

“흐응.”

“뭘 그렇게 보냐?”

승진의 태도가 못마땅한지 유 부장이 인상을 썼다.

“아니. 키워 주신다는 분 표정이 너무 아쉬워하는 듯해서 말입니다.”

“큭!”

“저희 집에 어떻게 연줄이라도 만들어 보려고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어이, 백 검. 너 못하는 소리가 없다?”

“뭐…… 나쁜 시도는 아니었습니다만, 행여나 앞으로도 이런 우연은 가장하지 마십시오. 헛수고입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저한테 조금 더 투자해 주시란 말입니다. 사건도 더 많이 배당해 주시고요. 특수부 녀석보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대검에 갈 수 있게.”

“인마, 배당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냐? 네 녀석이 관심 가질 만한 큰 사건들은 전부 검사장님이 지령 내리시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그리고 요즘 한 부장 그 자식도 큰 건은 자기네가 맡겠다며 지랄지랄을 해서 내가 골치가 다……. 잠깐,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냐? 헛수고……라니?”

난데없이 신세 한탄을 하던 유 부장은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승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백씨 집안에서 저, 완전 내놓은 자식이거든요.”

* * *

[네가 왜 내놓은 자식이야?]

우영의 어머니이자 자신이 또 다른 ‘어머니’로 받들어 모시는 민 여사가 중앙지검에 찾아왔던 그날, 옅게 웃는 승진을 빤히 쳐다보며 유 부장이 툴툴거렸다.

[내가 이곳저곳에서 들은 것만 해도 족히 한 트럭은 될 거다. 백 검 네 녀석, 내 밑에 넣어 달라는 청탁을 얼마나 들었는지 알기나 해?]

[……예?]

[적어도 1년은 형사부에서 지냈어야 했다고. 뭐, 사실 위에서 얘기 안 나와도 어차피 네 녀석을 특수부로 데려오려고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너, 절대 내놓은 자식 아니다. 너희 집안이 얼마나 네 녀석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알기는 하냐? 특히 백 선생님께서……. 흠흠. 아무것도 아니다.]

당황한 승진을 보고 싱긋 웃던 유 부장의 말이 귀를 맴돈다.

[뒷배 없이, 순수 제 실력으로. 그렇게 대검으로 가는 거다. 오로지 그 경우에만 인정해 주는 걸로.]

[……만일 누가 손을 썼다는 걸 알게 되면?]

[그럼 순순히 항복하도록 하지. 어때?]

중앙지검으로 오기 전, 승진은 분명 우영과 그런 약속을 했다. 순순히 제 실력으로, 가족의 힘을 빌리지 않고 대검으로 가겠다고. 그런데 만약 자신이 중앙지검으로 온 것이 누군가 힘을 쓴 것이라면?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받아야 할 ‘기회’를 자신이 대신 받았고, 우영이 해결해야 할 사건들을 자신이 받았던 거라면?

[하여간 다들 백 검 자랑스러워하시니까, 그렇게 비하하지 않아도 돼. 뭐, 일단 집안 후원 안 받고도 스스로 잘하고 있잖아. 안 그래?]

‘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애쓰도록 해.’라고 말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던 유 부장의 목소리가 잊히질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 부장의 말을 짐작해 보면 자신이 중앙지검으로 발령이 나고 형사부를 거쳐 특수부로 오게 된 것은 집안의 힘이라기보다는 제 능력 발산으로 인한 것이 틀림없었다.

‘가족들 때문에…… 신우영에게 깔릴 순 없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뿐. 승진은 절대로 우영에게 영원히 깔려 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물론 그를 몹시 아껴서 스스로 엉덩이를 내어 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 짓을 영원히 반복하라니.

‘말도 안 된다.’

휘휘, 고개를 내저으며 승진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멀다.’

멀어도, 너무 멀군.

승진은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길을 빤히 응시하며 인상을 썼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인적 하나 없는 길을 우영과 함께 걷던 승진은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검사님들! 김 의원 건도 잘 마무리되어 가는데, 오늘 저녁 회식 어떠십니까!]

[어이, 양 계장. 마무리는 무슨! 이제 시작이지! 그런 의미에서 회식, 어떠십니까!]

근래 들어 중앙지검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국회의원 김 모 의원 뇌물’ 사건을 기소시킨 후, 양 사장과 관련된 사건은 이제 법원의 판결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번 수사 과정에서 김 의원의 추악한 면모가 만천하에 드러나 그에 꼬리를 문 폭로들이 이어진 터라, 앞으로 중앙지검을 들락거릴 정·재계 유력 인사들이 검찰의 주요 수사 대상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승진과 우영에게 대뜸 회식 제안이 왔다.

생글생글 웃으며 횡설수설거리는 그들 검사실 소속의 두 계장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승진은 그들이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으리라 확신을 하면서도 ‘저희가 한턱내겠습니다!’를 외치는 두 계장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뭐…… 고생들 하셨으니까.’

승진과 우영이 김 의원 사건의 물꼬를 틀 수 있었던 데 두 계장들의 활약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그들 검사실 직원들과 함께 1차로 간단한 저녁을 먹었고, 2차로 방금 전 삼겹살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었다.

[어? 벌써 가시는 겁니까?]

[검사님?]

그러나 그 자리에서 일어난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승진과 우영은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갔던 계장들을 내버려 둔 후 가게를 나선 상태였다.

“아직도 멀었나.”

터벅터벅.

가게를 나와 한참 동안이나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도통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에 참다못한 승진이 불쑥 말을 던졌다. 목을 조일 것처럼 세게 묶여 있던 회색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치는 승진을 보며 우영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택시, 탈까?”

택시?

그 말에 잠깐 갈등하듯 우영을 응시하던 승진이 이내 흐리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돈 아깝다. 그럴 시간에 콘돔 하나를 더 사겠어.”

“……하긴. 틀린 말은 아니군.”

우영의 동조에 승진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신가야.”

“왜.”

“계장님들 말이다.”

“…….”

“오해, 안 하겠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승진은 가게를 나서는 자신들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참여계장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들이 괜스레 눈에 밟혔던 것은, 그 동그래진 눈이 아무래도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승진의 말을 듣고 있던 우영이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해도 뭐…… 딱히 상관은 없지.”

“오해하는 편이 낫다 이거군.”

“가까워 보이는 것보다는.”

그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승진은 쓰게 웃으며 얼굴을 위아래로 주억였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 이 녀석과 나는, 가까운 사이보다 경쟁 구도로 보이는 것이 옳다. 신우영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가만히 생각하던 승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궁금한 거 있다, 우영아.”

해가 진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바삐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강남역 거리.

술 취한 사람들을 피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다 어느새 한적한 인도로 들어선 승진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인지하며 불쑥 말을 던졌다. 그러자 승진을 따라 발을 내딛던 우영의 검정 눈동자가 천천히 승진에게 꽂혔다.

“뭐.”

승진은 무뚝뚝한 우영을 가만히 바라보다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너 진짜 내 키스, 싫냐?”

뚝, 걷고 있던 우영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러자 승진 역시 연이어 걸음을 멈춘다.

깊은 밤하늘 아래, 멈추어 선 두 남자의 검은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러니까 사건의 발단은 조금 전 있었던, 검사실 두 참여계장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서 언급했던 ‘사소한 다툼’이란 전부 신우영 검사실 소속의 양우혁 참여계장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다.

[두 분, 첫 키스는 언제 하셨습니까!]

첫 키스라.

그 질문을 들은 승진은 살짝 고민했다.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계장들 사이에서, 아니 중앙지검 내에서 그들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따로 없었기에 일단은 치를 떠는 편이 나으려나?

생각을 정리한 승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아주, 드러웠죠.]

그러자 그 말을 듣던 우영 역시 미간을 좁히고 있다 입을 열었다.

[저도 매우 기분 나쁜 경험을 했습니다. 첫 키스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군요. 그리고 그런 식이라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내뱉은 말이었다. 아마도 우영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다. 그래서 그렇게 모진 말을 한 거겠지.

그런데 웬일인지, 두 계장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승진과 우영이 앉아 있던 테이블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첫 키스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게 예민했을 줄이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승진의 귀로 우영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그렇게 더러웠을 줄은 몰랐군.]

심장이 철렁거렸다. 승진은 검게 일렁이는 우영의 눈동자를 흘긋거리며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줄도 몰랐어.]

서로를 향한 답변에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두 남자는 사대를 집어삼킬 듯 응시했다. 그러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젠장, 술맛 떨어지는군.]

[마찬가지다.]

[……나와라. 네놈이 말한 그 더러운 경험, 또 한 번 겪게 만들어 줄 테니까.]

[바라던 바다. 다신 겪고 싶지 않던 그 일을, 아주 평생토록 하게 만들어 줄 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지금.

승진은 도통 머리를 떠날 생각을 않는 가게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우영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떨리네.’

쉬지 않고 욕설을 흘린 적은 있어도, 키스가 싫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빌어먹게도 좋아서, 자신과의 관계를 놓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던지라 사실 아까 가게에서의 말은 내심 충격적이었다.

두근두근.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려 승진은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10대 소녀도 아니고…… 대체 무슨 꼴이냐. 백승진, 꼴이 말이 아니군.

“풉.”

그때였을까.

승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우영을 발견하고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큭, 크큭, 크큭큭큭!”

한번 시작된 우영의 웃음이 멈추질 않자 승진의 눈동자가 더욱 큼지막해졌다.

이 새끼가 미쳤나?

“왜 웃어.”

실소를 넘어 폭소를 터뜨리는 우영의 모습에 승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가로수가 흔들릴 만큼 크게 웃음을 흘리던 우영이 한참의 웃음 끝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승진을 바라봤다.

“백 검.”

“왜.”

“넌 왜 내가 아직 네 녀석 곁에 있다고 생각하지?”

승진은 묘한 웃음을 흘리는 우영을 빤히 직시했다.

‘글쎄…….’

곰곰이 생각해 본 승진이 빙긋 웃었다.

“내 침대 위에서의 스킬이 워낙 죽여…… 이 새끼야!”

“너무 미친 소리라 한 대 찼다.”

그렇다고 정강이를 걷어차냐!

승진이 인상을 쓰자 우영이 픽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네놈의 키스가, 그나마 견딜 만해서다.”

……뭐?

구겨졌던 승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견딜 만……하다고?”

“그래.”

“…….”

“백 검, 네 녀석의 키스가 진짜 미쳐 버릴 정도로 죽여주지 않았다면…… 난 아마 너한테 엉덩이를 내줬던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너 안 봤어.”

“……!”

“씹새끼. 내가 그때 얼마나 아팠는지 알기나 해?”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는 듯 우영이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누구는 뭐 안 아팠나. 투덜거리는 우영을 보며 한 마디 하고 싶었으나, 그보단 우영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아아.’

승진은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는 우영을 말없이 응시했다.

두근두근.

숨이…… 막힌다.

그의 뺨을 스치는 붉은 홍조가 온몸의 피를 증발시키는 것 같다.

‘안고 싶다.’

제 시야로 들어온 그를 침대에 눕혀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친 듯이 탐닉하고 싶다. 신우영을 향한 지독한 갈증을 매일같이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건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 이 갈증은 끊이지를 않는 건지. 빌어먹을 욕구가 다시금 치솟아 입을 다물게 된다.

승진은 그에게 투정을 부리려다 말고, 우영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신우영.”

“왜.”

“우영아.”

“…….”

“우영아.”

“……미친 새끼. 낯간지러워.”

“신 검아, 신가야.”

“뭐, 그건 그나마 낫군.”

낮게 중얼거리는 우영을 향해 승진이 속삭였다.

“택시 타자.”

“안 탄다며.”

“타고 싶어.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다.”

승진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우영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방긋 웃었다. 배알도 없냐. 우영은 실실 웃고 있는 승진을 바라보더니 헛웃음을 삼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은 누가 누울 건데?”

길가에서 대놓고 유혹하는 승진을 빤히 응시하던 우영이 은근한 기대를 담아 승진에게 묻는다. 승진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아니지.”

재고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조금씩 빠르게 움직이는 승진의 발걸음에 맞추어 발을 내디디려던 우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씨발, 그럼 나더러 안기라고?”

“신 검.”

“왜.”

“양 사장 사건 빼고, 너 이번 달에 기소 몇 건 했어.”

“뭐? 갑자기 그걸 왜 물어.”

“빨리.”

불길한 예감을 직감한 우영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열 건.”

“내가 이겼군. 난 열한 건이다. 고로 오늘 밤에 안기는 건 신 검, 너.”

우영은 자연스럽게 제 허리를 휘감으려던 승진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퍽, 후려치더니 이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 새끼가 돌았나. 얼마 전에도 내가 깔리지 않았어?”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증거.”

“뭐?”

“증거 대봐!”

버럭 외치는 우영의 고함 소리와 동시에 마침 길가를 지나던 자동차가 빠앙― 클랙슨을 울렸다. 깜짝 놀라 도로 쪽을 응시하던 승진과 우영은 이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승진은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우영을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못 믿겠으면 우리 부장님한테 확인해 보든가.”

그들의 검사실에서 일하고 있는 참여계장들은 지금 술판을 벌이느라 여력이 없을 테니, 지금쯤 퇴근했을 특수부의 유재익 부장검사를 거론하며 승진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우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백 검, 유 부장님 밤에 전화하는 거 싫어하시지 않나?”

“뭐, 그럼 말없이 깔리든가.”

“지금 건다.”

우영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하는 승진에게 차갑게 응수하고는 키패드를 톡톡 두드렸다. ‘010-2’로 시작한 번호를 끝까지 치고 통화 버튼까지 누르자 요란한 통화 연결음 소리가 들리더니 ‘……윽. 뭐……야.’ 하는 비몽사몽 가득한 유 부장검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영이 하하, 웃으며 소리를 내뱉었다.

“아, 부장님. 안녕하세요, 신우영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긴히 여쭤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

-지금 자정이야.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그러니 꺼져, 개새끼야.

“……예?”

그 말을 끝으로 툭, 끊어져 버린 전화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왜 그런 똥 씹은 표정이냐? 부장님이 뭐라고 하시는데?”

승진이 생글생글 웃으며 우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우영의 얼굴이 휴지 조각처럼 요란하게 굳어졌다.

“네 녀석이 핸드폰을 내밀 때 알아챘어야 하는 건데.”

“응? 뭐라는 건지.”

입가에 만연한 미소를 지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승진에게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한 채 우영은 퉁명스럽게 쥐고 있던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승진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간다.”

소중한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하며 가벼운 걸음을 움직이는 승진을 향해 우영이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승진은 그런 그가 뭐라고 투덜거리든 전혀 개의치 않으며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 신 검. 집에 가는 길에 콘돔은 내가 골라도 돼?”

그 말을 꺼내자마자 승진은 주먹을 내민 우영에게 한 대 맞을 뻔한 것을 겨우 회피했다.

* * *

두 부장검사들에 의한 백승진 검사와 신우영 검사의 ‘화해’ 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후 2주가 더 흐른 뒤의 일이었다.

‘후우.’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본관 10층에 위치한 유재익 특별수사 제1부 부장검사실 앞의 명패를 들여다보며 잠시 호흡을 고르던 승진이 결심한 듯 이내 손을 뻗었다.

똑똑―

마침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점이라 업무로 돌아온 검찰 공무원들은 각자의 검사실에 있거나 외근을 나간 상황이었다. 때문인지 특수부가 존재하는 10층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

노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잠시 멈칫하던 승진이 다시금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문 안에서 들려온 ‘들어와.’라는 짧고 간결한 목소리에 얼른 문고리를 잡았다. 손목에 살짝 힘을 주어 문고리를 돌리자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특수 제1부의 부장검사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서에게서 무언가를 전해 듣고 있던 유 부장은 터벅터벅 제 앞으로 걸어오는 승진을 본체만체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진은 의아함을 속으로 감추며 유 부장의 책상 앞에 멈춰 섰다.

잠시 대기할까, 아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까.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고민을 하기는 했으나 실천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에게 있어 시간은 금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승진은 닫혀 있던 입술을 움직였다.

그 말에 유 부장을 비롯한 비서의 동그란 눈이 승진을 향했다.

“채 비서, 그 얘긴 조금 이따 다시 듣도록 하자고.”

“예, 부장님.”

“백 검, 넌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 음. 그럼 나는 입가심 좀 하게 커피 한 잔만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유 부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게 묵례까지 하고 부장검사실을 나서는 채 비서를 승진은 잠시 흘긋거렸다.

“앉지, 백 검.”

정자세로 서 있는 승진에게 픽 웃음을 흘린 유재익 부장검사가 고가의 가죽으로 된 소파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승진은 유 부장의 말이 나오고 나서야 고개를 까딱이며 상석에 앉는 유 부장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점심은, 먹었나?”

긴장한 듯 소파에 앉고서도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는 승진을 보며 유 부장이 옅은 미소를 그렸다.

이미 오후 2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점인지라 승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의 답변에 유 부장은 아까부터 승진의 시야를 어지럽히고 있는 서류 하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흐음, 보자. 그러니까…… 우리 백승진 검사.”

펄럭거리는 서류는 아마도 자신의 파일인 듯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승진은 대체 무슨 말을 꺼낼 생각인지 묘한 콧소리까지 흘리는 유 부장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수상한데.’

무언가 꿍꿍이로 가득한 유 부장의 얼굴은 지독하리만큼 차분하다. 딱히 좋은 예감이 들지 않아 승진은 굳은 얼굴을 펴지 않았다.

“우리 백 검이 부산지검에서 이곳으로 온 지 얼마나 됐더라?”

“7개월이 조금 넘었습니다.”

“하하. 그런데 왜 10년은 더 지난 것 같지.”

“…….”

“그거 아나, 백 검. 중앙지검에서 일한 지 아직 1년이 안 된 검사들 중에서, 이달의 검사상을 벌써 두 번이나 받은 녀석은 흔치 않아. 그래서 그런지 내가 백 검한테 거는 기대가 몹시 크다는 거, 백 검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어. 그렇지?”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가 부담스러울 만큼 길게 찢어졌다. 승진은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더욱 의심스러운 행동을 이어 가고 있는 유 부장을 가만히 주시했다.

확실히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어 잠시 생각하던 승진은 곧 싱긋 웃으며 유 부장의 말에 동조했다.

“훌륭하신 부장님께서 부족하기 그지없는 저를 잘 지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하하. 이거 참, 쑥스럽게 엄청 띄워 주는군. 그럼, 그럼. 내 밑에 있던 검사들, 전부 잘됐어! 그러니 나만 믿고 따라오도록 해!”

“예, 부장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려니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은 승진은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조심스럽게 유 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부장님, 저를 호출하신 이유가…… 대체 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렇지 참. 잠시 잊고 있었군.”

아부에 취해 넋을 놓고 있던 유재익 부장검사의 눈빛이 어느새 날카롭게 돌변했다.

확실히 남다른 태세 전환에 승진은 속으로 감탄했다.

즐길 땐 즐기고 업무를 볼 땐 업무에 집중했기에 저 자리까지 오른 거겠지. 이런 그의 행동은 본받을 필요가 있었다.

“백 검, 요즘 대한민국의 높으신 분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사건이 뭔지 알고 있나?”

높으신 분?

승진은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입술을 움직였다.

아, 그 사건이 있었지.

“양산 유아 납치 사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고민하다 뱉어 낸 승진의 대답에 유 부장이 ‘맞다!’ 하고 짧게 탄성을 터트리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그것도 아주 예민한 사건이긴 하지. 하필 5세 유아를 납치한 녀석이 지역의원의 아들놈이었으니. 미친 새끼 아니야? 대한민국이 왜 이렇게 됐어? 어?”

“그, 그러게요.”

혀를 끌끌 차는 유 부장의 말에 동조하면서도 승진은 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잠시 숨을 고른 유 부장이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틀렸어. 현재 윗선에서 가장 주시하고 있는 사건은 수원을 시작으로 일어난 KS 클럽 마약 파티와 관련된 일이지.”

“구의원도 연루되어 있다는 그 사건 말입니까?”

“거기 연루된 녀석들이 구의원뿐이면 오죽 좋겠어? 그 외에도 여러 놈들이 있으니 윗선에서 골치 아파 하는 거지. 하필 관련된 놈들이 다 자기들이랑 조금씩 관련이 있는 집 자식들이거나 아님 지인들이거든. 게다가 수사를 하면 할수록 수원지청 쪽에서 감당 못 할 만큼 사건이 커져서, 아무래도 곧 내가 정식으로 맡게 될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머리가 아프단 말이지.”

“…….”

“그래서 말인데 백 검아.”

스윽.

승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제게 얼굴을 들이미는 유 부장의 태도에 흠칫 놀랐다.

자신이 다른 남자들과는 사뭇 다른 성적 취향의 소유자이기는 하나, 추구하는 이상형은 유 부장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가까운데요-라는 말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유 부장의 눈빛에서 묘한 기대감이 느껴져 승진은 가만히 그를 직시했다.

유 부장이 능글맞은 눈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내가 기대하는 유망주인 우리 백 검은, 어디를 목표로 하나.”

목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해하는 승진을 보며 유 부장이 씩 웃었다.

“최종적으로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디냔 말이지. 왜, 검사라면 그런 것 정도는 있을 거 아니야. 앞으로 무엇이 되고 싶다라든가, 아님 어디까지 가고 싶다라는 꿈.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대검. 누가 먼저 대검으로 가는지―로 하자.]

대검찰청.

“물론 있죠.”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나, 백 검은?”

“예.”

“윗선의 압박에도 끄떡하지 않을 자신도?”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럼 이번 사건만 잘 해결되면 내가 백 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힘껏 도와주도록 하지.”

“부장님만 믿겠습니다.”

“하하, 뭘. 다 너 좋고 나 좋자고 하는 일인데.”

“……네?”

대검찰청으로 먼저 가서 신우영을 완벽하게 눕히기 위해서라면 확실히 승진은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주저 없이 대답하는 승진이 몹시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 부장이 두툼한 손을 뻗어 승진에게 내밀었다. 승진은 그의 손을 힘껏 잡으며 아래위로 흔들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부장님.”

대검찰청으로 가는 길이 좁아질 수 있는 계기가 될뿐더러 우영과의 포지션 다툼에서 한발 앞서 갈 수 있는 사건이 눈앞에 놓여 있다. 승리를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다짐하며 유 부장과의 악수를 끝낸 승진은 흡족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유 부장에게 말을 걸었다. 능구렁이 같은 유 부장의 눈동자가 슬며시 승진을 향했다. 승진은 생각하고 있던 말을 뱉어 냈다.

“제게 맡기실 사건이라는 게, KS 클럽 마약 파티와 관련된 일 맞습니까? 그 사건과 관련된 마약사범들을 소탕하라는 게 부장님의 명령이시고요?”

“아아, 뭐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

굳이…… 따지자면?

날카로운 승진의 질문에 잠시 움찔하던 유 부장이 두루뭉술한 대답을 뱉어 냈다. 활짝 웃고 있던 유 부장의 표정이 조금 전과 달리 다시 의뭉스러워 승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유 부장은 그런 승진의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흐음,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똑똑―

“오, 왔군!”

또 올 사람이 있었나.

승진은 흠흠, 헛기침까지 하고 있는 유 부장을 주시하다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 부장이 ‘어서 들어와!’ 하고 큰 소리로 외치기가 무섭게 달칵 문이 열렸다. 느낌상 커피를 타러 갔던 채 비서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승진의 시야로 낯익은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호출하셨다고 들었습……!”

문을 열고 부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길쭉한 다리가 익숙했다.

그 위의 잘생긴 얼굴 역시.

……제기랄.

승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물론, 소파에 앉아 있는 승진을 발견한 상대도 그러한 행동을 취하긴 마찬가지였다. 검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쳐 스파크가 일었다.

승진은 대체 무슨 꿍꿍이냐는 표정을 지으며 유 부장을 바라봤다. 유 부장은 서늘한 시선을 주고받는 두 검사들을 흐뭇한 눈으로 번갈아 보며 붉은 혀를 움직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야, 이번 일을 우리 특수부 혼자 감당하는 건 위험해. 그래서 한 부장한테 슬쩍 제안했더니, 하하! 무려 신 검을 빌려 준다지 뭐야? 그렇게 됐으니 신 검, 앞으로 여기 우리 백 검이랑 KS 클럽 일을 공동으로 맡아 줬으면 좋겠…… 아니, 그런데 두 사람 표정이 왜 그래? 설마 내 말이 기분 나쁘기라도 한 건, 아니지? 에이, 그럼 곤란하지! 돌고 돌아 어차피 우리 검찰을 이끌 인재들이 미리미리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특별히 이 자릴 마련한 거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일은 같이 맡도록 해! 그리고 신 검 너, 한 번만 더 자정에 전화하면 진짜 가만히 안 둔다!”

처음엔 부드러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어쩐지 협박으로 변하는 유 부장의 말에 승진은 물론이거니와 우영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 * *

“너구리 같은 새끼.”

밑바닥부터 끌어 모았다가 툭 던지는 말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다.

우영은 헛웃음을 뱉어 내려다 말았다. 누가 봐도 ‘나 화났어!’라는 것을 눈치챌 만큼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가 조수석에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서늘한 눈매의 그가 왜 화가 났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기에 우영은 알고서도 모르는 척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답도 안 해?”

“무슨 대답.”

“뻔뻔한 놈.”

누가 할 소리.

우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리는 조수석의 남자에게 대꾸하려다 말고선 정면을 응시했다.

내비게이션대로라면 목적지까지 50분 정도 남은 상황.

아마도 50분 동안 이 귀찮은 녀석의 귀찮은 시비를 들어야겠지.

괜한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아 내며 우영은 여전히 핸들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속는 게 아니었어.”

피부를 뚫을 듯한 기세로 노려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우영이 답답했는지 쳇, 입술을 삐죽이던 남자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계속해서 운전하는 척했으나 룸미러로 그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우영은 작게 뱉어 내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얌전히 안겼던 게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니. 너구리가 따로 없군.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다. 빌어먹을.”

참나, 툴툴거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그래. 어제 하루 정도는 자신도 잘못한 것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 일단 들어줬지만, 잘못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건 너무하지 않나?

우영은 한번 세운 꼬리를 도통 내릴 생각을 않는 승진의 행동을 참다못해 결국 브레이크를 밟았다.

악, 하는 짧은 신음과 함께 승진의 몸이 앞으로 살짝 쏠렸으나 다행히 꽉 매고 있던 안전벨트 덕분에 그의 안위는 무사했다.

“미쳤어?”

난폭 운전에 항의하기 위해 승진이 눈을 부라리자 우영은 마침 빨갛게 물든 신호등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인상을 쓰며 승진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가 아까부터 가만히 듣고 있어 주니 못하는 소리가 없군. 내가 병신처럼 보이나.”

“뭐?”

“백승진, 이왕 말 나온 김에 까놓고 말해 보자.”

“뭘!”

“너 씨발, 만약 네가 나 같은 상황에 처했으면…… 아니, 그때 내가 안 나타났으면 나한테 이번 일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긴 했어?”

“……!”

큭, 하고 짧은 신음 소리가 승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영은 처참하게 일그러지던 승진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봤다.

역시 이 새끼, 말 안 할 생각이었어.

우영은 멈칫하는 승진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럴 줄 알았다.”

“그건…….”

“……젠장. 말하다 보니 열 받는군. 네 녀석도 똑같이 하려고 했으면서 왜 잘못은 모두 내 탓이야?”

“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지적하는 건 꼴사납다고 생각하지 않나?”

“웃기고 있다. 가정법의 대가 주제에 ‘만약’ 붙였다고 꼴사납다니? 나한테 시비 걸 때마다 가정법 사용한 놈이 대체 누구지?”

“어이, 어이. 잠깐만, 신우영. 네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뭐?”

“와, 이 새끼 진짜 웃기는 새끼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우리 부장님 말씀으로는 너희 부장님한테 이번 사건 얘기 들은 게 사흘 전이라던데, 그 사흘 동안 숨긴 놈이 대체 누군데! 솔직히 말해라. 신가 너, 그거 숨기려고 일부러 나한테 안겼냐!”

버럭 소리 지르는 승진을 보자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우영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씨발! 그럼 대검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내가 너한테 알려 줬어야 했냐! 당연히 일부러 안겨 줬지! 네놈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그 짓이라도 안 하면 진작 눈치챘을 거잖아!”

결국 우영이 침을 튀겨 가며 외치자 승진이 예쁜 눈알을 굴렸다.

우영의 외침에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딱히 그의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씩씩거리며 다시 액셀러레이터를 밟기에 앞서 우영은 고통스럽기 그지없던 지난 사흘을 떠올려 보았다.

[아, 신 검. 마침 잘 왔어. 여기 좀 앉아 봐. 상의할 게 있어.]

특수부 쪽과 달리 첨수부인 자신이 먼저 이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중앙지검의 검사장과 선약이 되어 있던 첨수부의 한형석 부장 덕분이었다. 한 부장에게 보고할 것이 있어 부장검사실을 찾았던 우영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한 부장과 대화 중이던 오대준 검사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KS 클럽 사건에 대한 일을 승진보다 빨리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쿵쿵.

우영은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억눌렀다.

아마도 이번 일은, 제게 있어 다신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찬스였다.

퇴근을 하면서도, 옆방의 백승진 검사실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중앙지검을 나섰다. 세차게 뛰고 있던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은 일단 그 길뿐이었다.

승진과 마주치면 위험하다고 여겼다.

아니, 적어도 ‘그날’만큼은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승진을 피해야 한다고 우영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 검사장을 비롯한 한 부장에게 들었던 ‘은밀한 제안’을 승진에게 딱히…… 알려 줘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대검이다.

대검찰청.

그런 곳에 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탈 발판을 우영은 승진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번 일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승진에게 한 부장과의 만남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어? 이제 와?]

어떻게 해서든 승진을 만나지 않기 위해 퇴근마저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건만, 우영은 제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승진을 발견하곤 창백하게 얼굴을 굳혔다.

이 자식이 여기 왜 있어?

[네가 어, 어쩐…… 일이야?]

떨렸을까.

입 밖으로 뱉어 내는 목소리가 약간 흔들렸던 것 같은데.

우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아니, 물론 따지고 보면 승진에게 무언가를 숨겼기에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나…… 어차피 대결이잖아.

만약 내가 진다면 깔리는 건 내가 되어야 한다고.

우영은 최대한 태연한 척 애쓰며 승진에게 다가갔다.

[왜, 내가 뭐 못 올 곳이라도 왔어?]

[그런 말이 아니다.]

[…….]

[그, 그나저나 웬 맥주? 나보고 마시라는 거군? 고, 고맙다. 잘 마실…….]

[뭔가, 수상하군.]

승진은 눈치가 빨랐다. 가끔은 진짜 빌어먹을 정도로.

하하 웃으며 옆자리에 앉는 우영을 가만히 주시하던 승진이 툭 말을 뱉어 냈다. 우영은 철렁거리는 가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설마 벌써 눈치를 챈 건 아니겠지.

우영의 사고 회로가 급격하게 돌아갔다.

[솔직히 말해, 신우영. 너, 나한테 뭐 숨기는…….]

[백 검아.]

[왜.]

[한판하자.]

[……어?]

[깔려 줄게.]

대검을 위해서라면 그깟 한 번 깔리는 것 정도가 무슨 대수랴.

어차피 의심을 산 이상 승진이 다음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파격적인 대우가 필요한 시점.

승진은 들고 있던 맥주를 고스란히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선 갑자기 윗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는 우영을 홀린 듯이 응시했다.

우영은 야릇하게 웃으며 승진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싫냐?]

[…….]

[뭐, 싫으면 어쩔 수 없……!]

[누가, 싫대?]

저를 몽롱하게 올려다보고 있는 승진을 향해 우영이 눈을 휘며 웃었다. 제 미소 한 번에 입을 헤벌쭉 벌리는 승진이 자신에게 넘어오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이쯤 돼서 슬며시 뒤로 물러나는 수법을 사용하는 여유까지 부리며.

우영의 예상대로 승진은 세 번째 다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 우영의 허벅지 위로 손을 얹었다. 솟아나는 기세로 보아 오늘 제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대검을 위해서!

“사흘이나 그렇게 박힐 줄 알았으면, 그리고 그 뒤에 우리 부장님이 너희 부장님이랑 협력하실 줄 알았으면 내가 미쳤다고 깔렸겠냐? 씨발, 새끼가 좋은 건 알아서 사흘이나 미친 듯이 박을 건 또 뭐야. 개자식.”

곰곰이 다시 생각해 봐도 욕지거리가 터져 나온다.

서울중앙지방 검찰청의 수많은 부서들 중 강력부도 아니고 하필 특수부와 공조를 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한 부장에게서 들었을 때, 이런 일을 예상했어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제발 ‘백승진만 아니어라.’를 반복하며 유재익 부장검사실의 문을 두드렸던 우영은 그곳의 소파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던 승진을 발견하고선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두 검사들이 화기애애한 상황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며, 그들의 등을 힘껏 내리치던 유 부장의 능글맞은 얼굴에 제 주먹을 꽂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 상황에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우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에 몸도 내주고, 일도 뺏기고……. 대체 이게 무슨 닭 쫓던 개 신세지?”

“이봐, 엄밀히 따져서 뺏긴 건 아니지. 공조잖아.”

공조?

‘씨발.’

“공조는 무슨. 이게 뺏긴 거다. 내가 쌓아 올릴 공적이 될 수 있었는데…… 하필 네놈이랑.”

‘두 사람, 협력해서 수사 잘할 수 있지?’ 하고 씩 웃던 유 부장의 옥수수 같은 하얀 치아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우영은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며 다시금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부아앙―!

매끄럽게 도로 위를 지나던 그의 차가 더욱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우영의 몸에서 분노의 기운이 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승진은 ‘그래도 숨긴 건 나쁜 거라고…….’라 중얼거리고 있었으나 더 이상의 태클은 걸지 않았다.

겨우 가라앉은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봐야 제게 좋을 것이 없다는 건 똑똑한 백승진이라면 모를 리 없으니까. 우영은 눈에 힘을 준 채 핸들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차창이 흔들릴 정도로 침을 튀겨 가며 싸우던 두 명의 남자들은 몇 분간의 침묵을 유지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이어져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우영 자신도 괜히 집중하고 있을 때, 고요한 상황을 깨뜨린 사람은 승진이었다.

“우리, 대체 어디 가는 거냐?”

어젯밤, 부장검사실에서 유 부장과의 회동을 마친 뒤, 날이 밝자마자 갈 곳이 있다는 말을 뱉어 내며 우영은 승진을 차에 태웠다.

잔뜩 성이 나 있기는 했으나 목적지가 궁금한지 조심스레 말을 꺼낸 승진은 룸미러를 통해 우영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우영은 대답 대신 속도를 더욱더 높였다.

“내려.”

끼이익, 우영이 차를 멈춰 세운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하필 토요일이었던지라 서울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다행히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겠군.

우영은 철컥 안전벨트를 풀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승진이 차갑게 입술을 움직이는 우영을 말없이 주시하다 주차장에 표시되어 있는 안내판을 흘끔거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밥 먹자고 수원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차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면서 우영의 옷과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씩 훑어본 승진이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우영에게 씩 웃어 보였다.

“우영아?”

“닥쳐. 너랑 결혼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승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굳이 그의 얼굴을 살펴보지 않아도 선했다.

예식장이 있는 층의 버튼을 꾹 누르는 우영을 보고 차 안에서의 다툼은 언제 잊었냐는 듯 말을 걸어 대는 승진은 ‘예식장’이라는 단어에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거겠지.

우영이 차갑게 응수하자 승진이 입술을 삐죽였다.

“대체 누가 결혼하길래 이렇게 쫙 빼입고 와?”

“가서 보면 알 거다.”

“아는 여자라도 돼?”

“보면 안다니까.”

“인마, 나 궁금하면 못 참는……!”

4층에 위치한 예식장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승진은 쉬지 않고 우영에게 말을 걸었다.

그것이 화해의 신호인지, 아니면 지난 사흘 동안 깔려 있던 우영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화해하자며 자꾸만 제 허리를 쿡쿡 찌르는 승진을 흘끔 쳐다보던 우영은 한참 말을 잇던 승진이 드르륵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과 동시에 입을 다물자 픽 웃음을 흘렸다.

“신우영.”

가늘어지던 승진의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문밖에 펼쳐진 광경을 발견하곤 굵어졌다.

승진이 엘리베이터 문밖을 쳐다보는 것처럼 그쪽에 서 있던 검정 정장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들 역시 승진과 우영을 발견하곤 인상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승진은 대수롭지 않게 앞으로 나가려는 우영의 팔을 덥석 잡았다.

“여기, 어디냐.”

생글거리던 얼굴의 미소를 순식간에 지워 버린 승진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영은 제 팔목을 붙잡고 있는 승진의 손을 떼어 내며 빙긋 웃음을 그렸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하객들을 반기고 있는 신랑을 향해 걸어가면서 대답했다.

“어디긴, 결혼식장이지.”

“누구 결혼식?”

“누구긴. 말하면 아냐?”

“당연하지. 네 주변 인물 중 내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따지고 보면 내 ‘주변 인물’은 아니라서 아마 모를 텐데.

속에 든 말을 꺼내려다 말고 우영은 걸음을 재촉했다.

“하하하!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분발해서 더욱 열심히 살…… 으악!”

마침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던 새신랑이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우영과 승진을 발견하곤, 아니 정확히는 우영을 발견하고 입을 쩍 벌렸다.

그의 반응에 의아해하는 승진을 내버려 둔 우영은 자신을 귀신 보듯 쳐다보고 있는 우락부락한 덩치의 새신랑에게 사악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결혼 축하합니다, 김철웅 씨.”

* * *

“꺅!”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축하해 주기 위해 모인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 토요일 오전의 한 예식장.

계단 위를 느긋하게 걷고 있던 우영과 달리 주변을 살피며 경계를 하던 승진은 짧은 스커트의 여자가 뒤로 넘어지려는 것을 발견하곤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

“괜찮으십니까?”

하필 제 앞에 서 있던 여자인지라 자연스럽게 손이 튀어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인상을 쓰며 그 여자를 밀쳐 버렸겠지만, 요즘은 일이 일이다 보니 사뭇 대도를 취하게 된다. 일단은 검사라는 직업도 사람을 응대하는 경우가 있는 편이니까. 덕분에 예전보다는 훨씬 더 살갑게 사람들을 대하고 있던 승진은 제 부축을 받고 놀란 표정을 짓는 여자에게 부드럽게 눈을 흘렸다.

그러자 한발 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우영의 미간이 좁아진 것은 당연했다.

“고, 고마워요.”

“별말씀을. 아, 그런데 굽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

“어머! 어, 어떡해!”

하이힐을 신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흐음.

승진은 주변을 살피더니 멀뚱히 서 있는 우영을 바라봤다.

왜.

우영이 승진의 시선을 받고 얼굴을 구겼다.

승진은 인상을 쓰는 그를 주시하다 이내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실례라는 걸 알지만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제 친구가 아가씨의 구두를 고칠 수 있게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예?”

“뭐?”

“식장 앞에 구두 수선집이 있었던 것 같거든요. 뭐하나, 친구. 곧 식이 시작될 것 같은데 이 아가씨를 도와줘야 할 것 같지 않아?”

씩 웃는 승진의 말에 우영이 눈을 부라렸다. 승진은 옆에서 ‘정말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를 외치고 있는 여자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쉬지 않고 우영에게 미소를 보냈다.

잠시 승진을 쳐다보던 우영의 얼굴에 곧 체념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우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주시죠.”

“네?”

“달라고요, 구두.”

우영은 당황하는 여자에게서 하이힐을 빼앗듯 낚아채더니 이내 승진을 한 번 노려보곤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승진의 입가에 더욱 짙은 미소가 걸렸다.

“개새끼. 일부러 그랬지?”

구두 수선을 보낸 지 15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계단으로 돌아온 우영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여자에게 구두를 내밀었다.

짧은 시간 동안 완벽하게 구두를 수선해 온 것은 아니었고, 대충 구두를 신고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온 우영을 보고 여자는 혀를 내둘렀고, 승진은 헛웃음을 삼켰다.

몇 번이고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여자는 마침 식이 시작된다는 안내를 전해 듣고 얼른 식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뒤를 지켜보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승진에게 툭 말을 던졌다. 승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이미 시작된 결혼식장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목적지가 어딘지 말을 하지 그랬어.”

“…….”

“신랑 입장!”

대답 없는 우영에게 하얀 이를 드러내고 있을 때,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하객들이 앉아 있는 의자 뒤편에 서 있던 승진과 우영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새카만 턱시도를 입은 예의 ‘새신랑’이 기다란 붉은 카펫을 지나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신랑 쪽 하객들로 보이는 검은 정장의 덩치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난 것은 당연했다.

짝짝짝짝!

마치 전장에 출정하는 장수를 보는 사람들처럼 기합이 잔뜩 들어간 박수 소리에 승진은 겨우 웃음을 삼켜야만 했다. 살짝 엇박자로 박수를 치는 이들이 있으면 무시무시한 눈길을 날릴 만큼 엄격한 박수 치기였기에 더더욱.

승진은 환호와 휘파람이 가득한 식장 안에서 느긋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우영을 흘긋거렸다.

“왜.”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우영이 웃고 있던 얼굴을 지웠다. 승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무척 잘 친다 싶어서.”

“시비는. 결혼식장에 왔으면 축하 정도는 기본 아니냐.”

만일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충분히 믿을 만한 발언이었지만 하필 그 말을 꺼낸 사람이 다름 아닌 우영이었다.

누가 봐도 이 결혼식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자신들이었기에 승진은 대답 대신 픽 실소를 터뜨렸다.

“대구에 있을 때냐?”

우영의 교우 관계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는 승진이었다. 그런 승진이 우영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분명 연수원 수료 이후 들어갔던 군 입대 시절이거나, 혹은 지방에서 초임 검사 생활을 했을 때의 일.

물론 초임 검사 시절에는 주말마다 만나 밤새도록 침대를 뒹굴었기에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들을 수 있었지만, 평일이면 제 업무를 보기 바빴으므로 굳이 그 당시의 일을 묻지는 않았다. 그러니 아마도 우영이 대구지검에서 일했을 때, 예의 ‘새신랑’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승진이 그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

우영은 사회자가 뱉어 내는 ‘신부 입장!’ 소리를 듣고 더욱 큰 박수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공군에서.”

“뭐? 군대에서?”

“당시 범죄자의 갱생에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꼴을 보아하니 아직 완벽히 정신을 차린 것 같지는 않군.”

옅은 미소를 짓는 우영의 얼굴에 사악함이 깃들었다.

어째 검사가 된 이후로 우영의 이중인격 중 사나운 면이 더욱 부각되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따지면 대구에서 일어났던 그 안유정이라는 사이코패스 사건 뒤의 일인가.

‘악랄한 놈.’

그래도 하필 골라도 결혼식을 고르냐. 승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혀, 혀…… 형님이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승진이 듣기에도 진심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우영의 축하 인사에 기겁하던 새신랑의 얼굴이 눈앞을 스친다. 그의 얼굴은 지독하다 못해 너무나 창백하게 질려 있어 승진이 다 걱정을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 일은 아닌지라 승진은 잠자코 그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봤다.

[하하, 형님이라뇨. 누가 김철웅 씨의 형님입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검…….]

[아악! 형님! 우, 우리 이러지 맙시다! 그, 그래요, 형님. 대체 원하시는 게 뭡니까? 제가 뭐,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 김철웅 씨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난 단지 축하를 하러 왔을 뿐인데.]

[십 분! 딱, 십 분 정도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식 끝나고 인사드리러 갈 테니 그때 뵙죠!]

[십 분이라. 겨우 십 분밖에 안 되는 겁니까?]

[흐억, 형님! 저 오늘 결혼한다고요!]

[…….]

[형님, 제발!]

[뭐, 그렇게 하죠.]

우락부락한 덩치의 사내들이 식장 안에 와글와글한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 어둠의 세계에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새신랑은 행여나 우영이 씩 웃으며 ‘검사’라는 말을 뱉어 낼까 봐 노심초사했다.

승진은 제발 한 번만 봐 달라고 손까지 싹싹 빌고 있는 새신랑이 우스꽝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우영과 승진은 식이 끝날 때까지 정체를 숨기고 있어 달라는 새신랑의 부탁을 귀가 닳도록 듣고 나서야 그와 멀어질 수 있었다.

‘하마터면……’

아주 좆될 뻔했네.

승진은 뻔뻔한 얼굴로 박수 치고 있는 우영을 흘긋거리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원 KS 클럽에서 일어난 일의 실체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확실히 그쪽 세계의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작업이 필요했다.

우영이 공군 시절 군내에서 발생한 조직폭력배 출신의 병사들 간 다툼을 해결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 제대 이후로도 연락을 하는 사이인 줄은 몰랐다.

만약 우영과 공동 수사를 하지 않았다면 그가 먼저 대검으로 가는 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자신을 이 공조에 합류시킨 특수부의 유 부장이 고마워지는 순간이었다.

“아이고, 형님! 너무 긴장하지 마십쇼!”

식이 진행되면 될수록 신부를 흘끔거리는 신랑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어찌나 굳었는지, 결혼 서약서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신랑의 모습에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마도 식장 안의 부하 동생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 말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선 시끄럽다고 소리 지르는 김철웅을 보던 우영이 갑자기 등을 돌렸다.

“어디 가?”

“배고파. 밥 먹자.”

“뭐?”

승진은 난데없는 우영의 행동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승진을 보고 우영이 빙긋 웃었다.

“어서.”

* * *

화기애애한 식장을 뒤로하고 김철웅에게서 강제로 빼앗다시피 받아 든 식권을 챙겨 나온 두 남자는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음식들을 진열해 놓은 뷔페로 발을 내디뎠다.

아직 한창 식이 진행되고 있었던지라 뷔페 내에는 하객들이 많지 않았다.

비교적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 시선이 쏟아진 것은 아마도 정장을 빼입은 두 남자가 워낙 주목을 받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리라.

뷔페 내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그들을 흘긋거리는 것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식사를 하던 승진은 아까부터 말을 하지 않던 우영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뭐야.

“왜,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그랬으면 다행이지.”

무슨 소리야?

“재수 없는 새끼. 돈 있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대충 차려입으라 했더니 꼭 비싼 것만.”

뭐?

“뜬금없이 무슨 헛소리야? 너도 나랑 똑같은 거 입었잖아.”

“됐고, 밥이나 먹어. 김철웅이랑 얘기만 나누고 바로 나갈 거니까.”

흥, 콧방귀를 뀌던 우영이 자신을 응시하다 신경질적으로 그릇 위의 연어 초밥을 집어 들자 승진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야 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히 화가 났네.

불과 몇 분 사이 상황이 뒤바뀐 것이 참으로 스펙터클했다.

확실히 이 녀석과 있으면 잠시도 지루하지 않다니까.

승진은 툴툴거리며 식사를 하고 있는 우영에게 능글맞은 미소를 보냈다.

“왜 그렇게 보는…….”

“저기!”

우영이 승진의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려 할 때였다. 누군가 우영의 말을 끊어 내곤 그들 앞에 나타났다.

승진과 우영의 얼굴이 일제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싱긋 웃으며 두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기억, 하시네요?”

우영의 미간이 좁아짐과 동시에 승진이 낮은 탄성을 흘리자 여자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그녀가 낯이 익었던 것은, 식이 시작되기 전 그들이 도와주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식이 시작되는 바람에 통성명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던 그녀가 다시 나타나자 승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무언가가 적힌 쪽지를 승진에게 건넸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예?”

얼떨결에 쪽지를 받아 든 승진이 그녀를 올려다보자 여자가 손으로 전화하라는 시늉을 한 뒤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승진은 황급히 우영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우영이 서늘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에 들린 쪽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여자도 이상하군. 굽을 고쳐 준 건 난데, 왜 너한테 쪽지를 주지?”

승진은 피식 미소를 그리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에 들린 쪽지를 펼쳤다. 연락처와 짧은 메모가 적힌 쪽지를 읽어 내려가던 승진이 중얼거렸다.

“승무원이라는데?”

“그래서.”

“이야, 승무원이라. 내가 비행기 탈 일이 많기는 하지.”

“…….”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강 계장님도 소개팅할 거냐고 묻긴 하더군.”

“씨발.”

“우영아, 네가 보기에 나, 여자 궁해 보이냐? 이상하네. 난 가만히 있는데 말이지.”

“백가, 지금부터 한 마디만 더 하면 주먹 날아간다.”

“하하하.”

“웃지 마. 망할. 몸 대주고 굽까지 고쳐 온 건 난데 왜 너한테 대시가 쏟아져.”

“그러게 말이다. 이게 다 여복이라는 거 아니겠냐.”

“게이한테 여복은 무슨.”

“하하하. 그러게, 그러게.”

“……백승진.”

“응?”

“발, 안 치우냐?”

승진은 차가운 우영의 말에 하얀 이를 드러냈다.

“우영아.”

우영은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승진이 우영의 허벅지 쪽으로 발가락을 꿈틀대며 작게 속삭였다.

“우리 우영이, 난 가끔 네가 여자들 질투할 때 그렇게 꼴리더라.”

우영은 야릇한 승진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친 새끼. 네가 발정난 개냐? 질투하는 모습 보고 꼴리게. 아니, 그것보다 누가 질투를 한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군. 나는 그런 적 없다.”

“솔직하지 못하긴.”

“단단히 돌았군.”

“그러지 말고, 우리 여기 나가면 호텔이라도 갈까? 그러고 보니 수원에 유명한 호텔 있잖아. 전망 좋은.”

“…….”

“오랜만에 수원까지 나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 마침 내일 일요일이기도 하고……. 어때?”

흔들린다.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보면 흔들리는 것이 분명했다.

승진은 갈등하는 우영을 그윽하게 응시하며 점점 더 은밀한 곳으로 발을 지분거렸다. 서서히 반응하던 우영이 눈을 크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승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조금만 더 하면 넘어오겠군.

“우영아, 하자. 어? 매번 집에서 했잖냐. 간만에 밖에서…….”

“아하하하! 형님! 많이 기다리셨지요?”

“……!”

고민하는 우영의 수심이 깊어질수록 승기를 잡아 가던 승진의 얼굴이 돌연 나타난 남자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일그러졌다.

흔들리던 우영의 눈빛이 점점 차분해졌다.

쳇, 입술을 삐죽이며 김철웅을 노려보는 승진과 달리 냉정해진 우영은 어리둥절해하는 김철웅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고개를 까딱이는 우영과 다르게 살기를 숨기지 않는 승진을 뒤늦게 발견한 철웅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우리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 왜, 왜 그러십니까? 제가 바, 방해라도 한 겁니까?”

어디 방해뿐이겠냐.

승진은 김철웅을 집어삼킬 기세로 쳐다봤다.

이 새끼, 죽일까?

“KS 클럽…… 말입니까?”

예식장 안쪽에 마련된 신부 대기실.

한창 인사를 하고 있는 신부를 대신해 승진, 우영과 함께 이곳으로 들어온 김철웅이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열었다.

우영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철웅 씨가 요즘 활약하는 주 무대가 수원인 걸로 아는데.”

“헉! 혀, 형님!”

“하하. 아까부터 날 계속 형님이라고 부르는군요. 애석하게도 난 당신 같은 동생 둔 적 없는데.”

“형니임…….”

“뭐, 김철웅 씨가 제대로 협조를 해 준다면, 당신을 동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고려해 보도록 하죠.”

승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의 덩치를 휘두르다 못해 아주 주무르고 있는 우영을 흘긋거렸다.

무서운 놈이야. 이놈과 ‘파트너’라서 다행이지, 적이었다면 눈앞이 컴컴해졌을 거다.

승진은 ‘철웅 씨?’ 하고 김철웅의 대답을 기다리는 우영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 그날 KS 클럽에서 난리를 쳤던 인간들에 대해서는…… 저희 쪽에서도 쉬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 김철웅 씨가 그쪽과 관련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군요.”

“형니임!”

“뭐, 계속 말해 보세요.”

김철웅은 느긋하게 고개를 까딱이는 우영에게 억울하다는 눈빛을 쏘아 보내더니 두툼한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결단코 KS 클럽과 관련이 없습니다. 믿어 주십쇼, 형님! 제가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저 제 주, 주변 동생들이 그쪽을 관리하고 있어서 대충 소식은 들었……. 뭐, 어쨌든 그날 클럽에 들어왔던 인물들의 신상에 대해서는 클럽 자체에서 쉬쉬하고 있기는 한데…… 다행히 제 친한 동생이 그 클럽의 관리인 중 한 명입니다.”

“호오?”

“혀, 형님이 원하신다면…… 노,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그날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정도는 대, 대충 파악이 가능할 겁니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며, ‘그러니 제발 제 결혼식만은 망치지 말아 주십쇼.’를 반복하고 있는 김철웅의 모습은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우락부락한 사내가 무릎마저 꿇고 외치고 있건만, 그의 간절한 바람의 대상인 신우영은 냉랭한 미소만을 지은 채 김철웅을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승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목표는 달성했다.

김철웅을 만나 KS 클럽 마약 파티 당시 클럽에 있었던 인물들에 대한 정확한 리스트를 얻으려 했던 것이 아마도 우영의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뭐, 일단 알려진 인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들 쉬쉬하고 있는 더 큰 목표를 잡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시작도 나쁘지 않지.

승진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우영을 따라 차를 타다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떡할 건데?”

핸들을 부여잡는 우영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철웅을 만나느라 적잖은 시간을 소비했던 터라 바로 서울로 올라가기는 무리였고, 어디서 한숨 자면 좋으련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슬쩍 운을 던지자 미간을 찌푸리던 우영이 입을 열었다.

“쳐.”

……응?

승진은 난데없는 우영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영이 인상을 쓰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전망 좋은 호텔, 주소.”

“…….”

“알 거 아냐?”

그 말에 승진의 입꼬리가 요란하게 움직였다.

* * *

“돈지랄도 정도껏 해. 방 안에 대충 침대 하나만 있으면 되지, 스위트룸은 무슨.”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곁에서 들려오자 카드 키를 들고 미소를 짓던 승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서늘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던 우영이 저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아까부터 말이 없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였나. 프런트 데스크에서부터 엘리베이터를 탄 지금까지 줄곧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우영의 모습이 약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승진은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간만이잖아. 분위기도 낼 겸 겸사겸사. 게다가, 쓰라고 있는 돈인데 아껴서 뭐하냐?”

어깨를 으쓱이는 승진의 대답에 우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승진은 쉬이 대꾸하지 못하는 우영을 보고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우영아.”

“더워. 좀 떨어져.”

“곧 더 더워질 건데, 뭘. 미리 적응해 두는 것도 괜찮지.”

“……씨발.”

“호오, 설마 우리 우영이, 화났어?”

“뭐?”

“흐응, 나한테 깔릴 게 무섭구나?”

“……새끼야, 한 마디만 더 하면 호텔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바로 서울 간다.”

“하하하. 알았어, 알았어. 입 다물게.”

“…….”

“오, 도착했다!”

땅 위로 쏟아지던 태양이 어느덧 자취를 감추고, 은은한 달빛이 세상을 뽀얗게 물들이는 저녁. 침대에서 뒹굴기 딱 좋은 시간에, 수원에 위치한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승진의 기분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뾰로통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의 유리창만 응시하고 있던 우영과 달리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기세.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어 히죽거리고만 있던 승진은 32층이 되어서 멈추는 엘리베이터 문을 환한 얼굴로 바라봤다.

제길, 하고 작게 욕설을 흘리는 우영의 음성이 옆에서 들려오기는 했으나 무시한 채 승진은 긴 다리를 앞으로 성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뭐 해? 빨리 와!”

신이 나 있는 승진에 비해 어두운 표정으로 일관하던 우영의 걸음은 느릿하기만 했다. 이미 3203호 앞에 서선 카드 키까지 밀어 넣은 승진은 닫혀 있던 스위트룸의 문을 달칵 열며 우영에게 손짓했다.

우영이 투덜거리며 문 앞으로 서서히 걸어왔다.

“섹스할 거라고 광고할 일이라도 있냐. 소리 낮춰.”

“아무도 없잖아.”

“…….”

“뭐부터 할래? 샤워? 아니면 간단히 와인부터?”

“샤워.”

“오케이. 그럼 그사이 내가 세팅해 놓을게.”

“……그러든지.”

퉁명스레 대답한 우영이 획 몸을 돌려 욕실 쪽으로 가는 것을 확인한 승진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실은 저도 좋으면서 괜히 틱틱거리기는.

우영의 성격상 승진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진작 예식장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직행했을 것이다. 어차피 핸들을 잡고 있던 것은 자신이 아닌 우영이었으니까.

얼굴을 구기면서도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하고 싶은 의향이 있는 거겠지.

승진은 마침 테이블 위에 세팅되어 있는 와인 병을 따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분위기 좋군.’

캄캄한 밤하늘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수원의 야경이 전면 유리로 된 창밖으로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수원에서 유명한 호텔이라더니, 전망 하나만큼은 죽여준다.

어떻게 안아 주지? 멀리, 욕실 쪽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레드 와인을 담은 와인 잔을 흔들며 창밖을 바라보던 승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 위에 우영을 엎어뜨리고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갈까, 아니면 가죽으로 된 저 소파에 우영을 앉힌 채 목욕 가운을 풀어 버릴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수증기가 가득 채워져 있을 저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우영을 벽으로 밀쳐 버릴까.

어느 행동을 취하더라도 미간을 좁힐 우영의 모습이 그려져 가운데 다리 사이가 딱딱해졌다. 고작 상상만 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나신이 된 우영을 떠올리니 반응하기 시작하는 자신의 분신을 느끼며 승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녀석은 도통 만족할 줄을 몰라.

입술을 적시던 레드 와인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갈증은 가라앉지 않는다.

“끝났어?”

쏴아아, 쏟아지던 물소리가 멎은 것은 승진이 두 번 정도 더 잔에 레드 와인을 붓고 난 뒤였다. 달칵 문 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는 뜨거운 수증기를 뚫고 밖으로 나오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를 발견했다. 하얀 목욕 가운을 두르고선 검은 머리카락 끝에서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던 우영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승진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근처 테이블에 내려놓으려 했다.

“잠깐만 기다려. 얼른 씻고 나올…….”

“나도.”

“어?”

“나도 한 잔 줘 봐.”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우영의 짙은 눈동자가 승진을 향했다. 승진이 싱긋 웃으며 와인 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우영이 낮은 음성을 흘렸다. 승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한가 보군.

그는 우영의 검은 눈이 창밖을 응시하는 것을 지켜보다 와인 병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

“…….”

“왜, 긴장돼?”

씨익.

짙은 미소를 그리며 승진이 우영에게 레드 와인을 담은 잔을 내밀자 우영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염려하는 것으로 보여 승진은 짓궂게 웃었다.

작게 고맙다고 말하며 뒤를 돌아보던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글쎄.”

여기까지 오는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우영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지자 승진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여유로운 미소를 흘리는 우영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와인 잔을 들고 승진을 응시하던 우영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자연스럽게 제 허리를 감는 우영의 우악스러운 손길로 인해 승진은 순간 비틀거렸다.

“긴장은 네가 해야 할 것 같은데?”

“하하, 그게 무…… 읍!”

어리둥절해하며 웃음을 흘리려던 승진의 말은 곧 제게로 다가오는 와인 잔에 놀라 멈췄다. 곧이어 승진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는 레드 와인의 알싸한 향기가 코끝을 적셨다. 당황한 승진이 큼지막하게 눈을 뜨자 우영은 붉은 입술을 그에게 들이밀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컥!

단말마의 신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와인 액과 함께 삼켜졌다.

승진은 제게 와인을 마시게 만든 우영의 빈손이 제 뒤통수를 세게 감싸는 것을 느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우영은 멈추지 않고 승진의 입 안 구석구석을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혀를 적시고 있던 레드 와인이 승진에게서 우영에게로 넘어갔다. 현기증이 일 만큼 강하게 흡입하는 우영의 행동은 제 생각보다 훨씬 과감해서 승진은 인상을 썼다.

이, 이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콜록, 콜록! 하아, 하아…….”

뜨거운 혀를 밀어 넣어 구석구석 핥으며 결국 승진의 입 속 모든 것을 다 제 것으로 만든 후에야 우영은 승진을 놓아주었다. 그에게서 풀려나자마자 숨을 헐떡이던 승진은 아래로 내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우영을 노려봤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신우영, 너 지금 뭐 하……!”

분명히 깔아야 할 사람은 난데 왜 네가 주도권을 가지냐는 표정을 승진이 짓기가 무섭게 우영이 다시금 다가왔다.

들고 있던 와인 잔까지 내려놓아 두 손 모두 자유로워진 우영이 제 얼굴을 감싸자 승진은 숨을 크게 뱉어 냈다.

우영은 대꾸해 줄 생각 따윈 없다는 눈빛으로 거칠게 승진을 제압해 나갔다.

‘제, 제길!’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멋대로 벌어졌다. 승진은 가지런하게 맞닿아 있던 치열이 위아래로 벌어지는 것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우영이 기다란 혀를 안으로 밀어 넣어 승진의 것을 옭아맸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져 승진은 눈에 힘을 주려 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우영이 나오기 전 마셨던 와인의 취기 때문인지 눈앞이 흐릿해졌다. 코끝을 간질이는 뜨거운 열기 또한 살짝 알딸딸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호흡을 하기 힘들 정도로 입 속을 헤집던 우영이 가느다란 실타래를 만들며 천천히 떨어져 나가자 승진은 거친 숨을 뱉어 냈다.

“너……!”

우영은 다리의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승진을 부축해 주곤 전면 유리 쪽으로 그를 밀었다. 쿵, 소리와 함께 승진이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매던 두 손을 유리에 가져다 대며 겨우 바로 서자 우영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승진아.”

“컥컥.”

“지난 며칠 동안 네놈한테 세 번쯤 깔려 줬으면, 이젠 나도 깔 때가 되지 않았겠냐.”

“……!”

유리창에 손을 대고 있던 승진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거칠게 손을 뻗는 우영을 막지는 못했다. 승진은 순식간에 바지를 내려 버리는 우영의 재빠른 손길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뱉어 내는 숨결과 달리 차갑게 식어 있는 우영의 손이 승진의 브리프 속으로 들어갔다.

“큭!”

커다란 손이 오른쪽 엉덩이를 주무르자 반사적으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뒤돌아 우영을 제압하고 싶었지만, 전면 유리로 되어 있는 창에 손을 대고 있었던지라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이 자식, 그래서 일부러 날 이곳으로……!

뒤도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공간에 자신을 가두어 버린 우영이 사악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투명한 유리에 반사되어 보인다.

제기랄!

승진은 이젠 멋대로 자신의 엉덩이를 지분거리기 시작하는 우영의 손길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우영이 승진을 더욱 유리 쪽으로 몰아붙이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백승진.”

머릿속을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짙은 신음이 터져 나온다.

콕콕, 미세한 진통이 찾아온 까닭이 아랫배를 어루만지는 차가운 손길 때문인지, 아니면 달아오른 열기 때문인지 분간하지 못하겠다.

“승진아.”

땀에 젖은 우영의 음성은 갈증에 휩싸여 있었다. 승진은 제 등 뒤에서 아까부터 손을 지분거리고 있는 우영을 쳐다보기 위해 억지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제길……!’

하지만 생각보다 목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승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화끈거리는 허리 밑 부분에 힘을 주었다.

“윽!”

“그러니까 말했잖아.”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감싼다. 몸을 밀착할수록 아득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들고 있던 승진의 귀로 우영의 쇳소리가 들려왔다.

“힘, 빼라고.”

너 같으면 그게 쉽겠냐!

“크으으―!”

마음 같아서는 힘이고 뭐고 진작 빼고도 남았다. 그러나 몸이 뜻대로 움직인다면 그가 유리창 위로 손을 대고 있을 일도 없을 것이다. 제 것이 아닌 타인의 기다란 손가락과 맞닿아 금세 반응을 보이는 엉덩이 안쪽이 미친 듯이 쓰렸다.

뚝, 이마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턱 끝에서 떨어져 바닥을 적시자 승진은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너, 이 새끼…… 빨리 안 넣어?”

아까부터 간 보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 하는 거냐고!

하아― 가쁜 숨을 토해 내며 승진이 뒤에 서 있는 우영을 노려봤다. 승진의 브리프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연신 주물럭거리고 있던 우영의 입꼬리가 야릇하게 휘어졌다. 우영은 계속 벌렁이고 있는 주름과 맞닿은 손가락을 빼낼 생각 따윈 하지 않고 승진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넣어도 돼?”

이……!

“이 미친 새끼야! 아까부터 넣으려고 이 지랄 하고 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순진한 척이야!”

소리치는 승진의 외침에 우영이 픽 웃음을 흘렸다.

“나는 아직 네 허락이 안 떨어졌으니까.”

뭐?

“배려하는 차원에서.”

“개소리 집어치워! 배려는 무슨. 3초 이내로 안 넣으면 내가 넣…… 읍!”

입구 쪽을 질척이며 계속해서 자극만 하던 손가락이 들어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젠장! 승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좁은 구멍 속으로 침범하는 낯선 감각에 말을 하다 말고 이를 악물었다. 고작 손가락 하나가 애널을 비집고 들어왔을 뿐인데, 다리가 미친 듯이 후들거린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다시 유리 쪽으로 몸을 기댄 승진은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수원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승진아.”

하아―

“백승진.”

“흐으, 왜 자꾸 불…… 읏!”

가빠 오는 호흡을 뱉어 내는 승진으로 인해 투명한 유리창 위에 입김이 서린다. 뿌옇게 물든 창문에 몸을 기댄 채 얼굴을 찌푸리던 승진은 자꾸만 제 이름을 불러 대는 우영에게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애널 안을 휘젓는 손가락이 아닌 다른 손가락으로 승진의 척추를 쓸어내리며 우영이 속삭였다.

“난 말이야.”

하아, 하아―

“네가 그렇게 미간을 찌푸릴 때, 진짜 꼴리더라.”

……뭐?

허리 밑의 부드러운 살과 기다란 손가락이 맞닿아 퍽퍽,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자극적이어서 온몸이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승진은 제 아래를 희롱하던 우영이 귓불을 살짝 깨물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감내할 수 있는 수준. 애액이 흘러나오는 애널이 출입을 반복하는 손가락의 굵기에 점점 적응해 가고 있던 시점, 우영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밀착시켰다. 승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빌어……먹을!’

우영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목 뒤를 간질인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빳빳하게 선 것이 자꾸만 엉덩이 사이를 찌르는 것이 느껴졌다. 승진은 이를 악물었다. 저 망할 크기의 기둥이 안으로 들어오는 데는 아마 5초도 걸리지 않을 테지.

급박해진 승진은 제 어깨에 입술을 대고 붉은 반점을 새기고 있는 우영의 혀를 무시하며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승진의 눈이 침대 위의 무언가를 발견하곤 동그래졌다.

‘저거다!’

스르륵―

“못 참겠…….”

“신우영!”

우영이 입고 있던 목욕 가운을 훌러덩 벗어 던지자 그의 몸이 뿜어내고 있는 열기가 아래에서 느껴졌다. 쑥, 애널 속을 휘젓던 우영의 손가락이 빠져나가면서 해방감을 느낀 승진이 다급히 우영을 불렀다. 멈칫한 우영의 눈동자가 살짝 일렁이자 승진은 빙긋 웃었다.

“관계 전엔, 서로 간의 배려가 필요하지 않겠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의 우영을 바라보며 승진은 눈꼬리를 휘었다.

“적어도 젤 정도는 발라 줘야 후에 문제가 없지.”

“……!”

“그래야 내 애널도 건강할 테고. 네놈 분신이 좀 크냐?”

싱긋―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꼬리에 우영의 검은 눈이 승진의 얼굴을 훑었다. 삐질삐질, 땀이 흘러내렸지만 승진은 애써 태연한 척했다.

걸려들어라. 걸려들어, 제발!

“흐음.”

우영이 그런 승진의 눈동자를 말없이 응시하다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개소리는 아니군.”

그렇지?

“하긴, 앞뒤 안 가리고 마구 박아 대는 네놈 때문에 사흘간 내가 움직이기가 좀 불편하긴 했지.”

“헉! 뭐? 그랬어? 어휴, 내 코끼리가 잘못했네.”

승진은 일부러 과장된 표정을 지어 가며 혀를 끌끌 찼다. 어이없다는 듯 승진을 바라보던 우영이 흥, 코웃음을 쳤다.

“뭐, 좋아.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곧 깔릴 놈 소원을 들어주지 못할 이유는 없지.”

“하하하! 역시,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해! 배려의 아이콘 같으니! 사랑해, 신우영!”

“입에 발린 소리 집어치워.”

“하하하!”

“그래서 젤은? 어디 있는데? 아까 네가 가져왔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어. 저기, 저 침대 위에!

계략에 넘어온 우영이 승진의 손짓에 의심 없이 몸을 돌렸다. 침대 위에 러브 젤을 던져둔 것이 승진의 한 수라면 한 수였다.

목욕 가운을 벗어 던졌던 터라 나신이 된 우영이 제게서 몸을 돌려 침대 쪽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며 승진은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우영의 탄탄한 엉덩이 근육이 앞으로 움직일 때마다 반동으로 들썩였다. 승진은 러브 젤을 가지려 제게서 등을 돌린 우영에게로 손을 뻗었다.

“신우영, 미안하지만 이번엔…… 윽!”

하나, 세상의 일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무방비한 상태로 나아가던 우영의 팔을 낚아채려 하기도 전에, 우영이 먼저 등을 돌렸다. 놀란 승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그의 손목을 잡아 버린 우영이 세게 힘을 주어 제 품으로 승진을 끌어당겼다. 방심한 승진의 몸은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쏟아졌다.

‘뭐, 뭐야!’

두근두근―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승진은 순식간에 일어난 반전에 멍하니 호텔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야심찬 계획과는 다른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는 정신없이 뛰고 있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느끼며 폭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네가 그럼 그렇지.”

바로 그때, 건장한 체격을 지닌 아름다운 나신의 남자가 픽, 코웃음을 치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승진은 반격할 수 없을 정도의 힘으로 팔을 눌러 버린 우영의 승기에 찬 미소에 눈을 크게 떴다. 우영은 무표정한 얼굴에 옅은 미소만 그린 채 무심하게 젤 뚜껑을 열었다.

손바닥 위로 쭈욱, 젤을 짜던 우영이 당황한 승진을 아랑곳 않고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맞닿아 질척거리는 소리가 승진의 목을 죄어 왔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미끈한 것이 우영의 손바닥에서, 점점 아래의 높이 솟은 기둥을 덮어 버리자 그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웬일인지, 숨이 가득 차오르기까지 해서 승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야 했다.

“하……하하. 우, 우영아.”

슥슥.

우영은 자신을 부르는 승진의 음성에 전혀 개의치 않으며 굵은 페니스를 젤로 문질렀다. 욕망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딱딱하게 솟아 있던 우영의 분신이 냉정한 얼굴과 미묘하게 어울려서 승진은 속으로 욕설을 흘렸다.

“하하하. 이, 이 자식…… 무섭게 대답은 왜 안 하냐?”

“…….”

“우, 우영아? 야, 인마. 신우영! 시, 신 검사!”

“…….”

“어, 저기, 그러니까…… 하하. 바, 방금 그건 말이지, 널 덮치려 한 게 아니라…….”

“닥치고 벌려.”

……뭐?

“아님, 내가 벌려 주지.”

“야! 일단 내 말…… 악!”

승진의 계획을 어찌 알아차린 건지, 뒤를 돌아보며 저를 침대에 눕혀 버린 우영은 눈에 힘까지 주면서 화난 기색을 표출했다. 서둘러 변명할 생각이었던 승진의 말은 그의 양다리를 미끈한 두 팔로 붙잡고선 들어 올려 버리는 우영의 재빠른 손놀림에 끊어졌다.

승진은 양쪽 다리를 강제로 벌려 버린 후 공기와 마찰해 벌렁거리고 있는 핑크빛 애널을 유심히 내려다보는 우영의 뜨거운 시선에 인상을 썼다.

제길. 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냐고!

웅크리고 있던 승진의 굵직한 페니스가 우영의 집요한 시선에 저절로 반응했다. 눈길 한 번에 솟아 버린 제 분신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획 고개를 돌려 버린 승진은 픽 웃음을 흘리는 우영의 행동에 다시 고개를 들어야 했다.

“부끄럽냐?”

아주 작은 웃음소리였지만 적어도 승진의 귀에는 세게 울려 퍼질 만큼 컸다.

완벽하게 승기를 잡아 버린 우영은 낮은 욕설을 흘리는 승진의 입술을 제 입술로 쓸며 하하 웃었다.

“졌어, 이 새끼야. 제길. 네 마음대로 해!”

우영은 아까부터 요동치고 있는 페니스를 승진의 애널 가까이로 가져다 대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누가 그런 꼼수를 쓰래?”

통할 줄 알았으니 쓴 거지!

승진은 한결 여유로워진 우영을 올려다보며 이를 갈았다.

“언제부터 눈치챘던……!”

기다란 손가락으로 촉촉이 젖은 애널을 지분거리는 우영의 손길에 전율이 일었다. 자포자기하며 두 다리를 든 채 엉덩이를 벌리고 있던 승진은 말을 잇다 느껴지는 살을 찢는 고통에 눈을 크게 떴다.

푹―

“아아, 읏!”

아무리 전희를 즐기긴 했으나, 좁디좁은 구멍 속을 침범한 불기둥에 익숙해질 리가 없다. 승진은 신음을 뱉어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간드러진 교성을 입술 밖으로 뱉어 내고야 말았다.

‘으으으―’

왜, 왜 이렇게― 커!

그간 줄곧 아래에 깔려 있었던 터라 쌓여 있던 욕정이 폭발한 것만 같다. 승진은 우영이 설마 오늘 밤, 제게 모든 것을 쏟아 낼까 봐 두려워졌다.

이 녀석 크기는 감당하기 힘든데!

“흐읏, 크으으…… 아, 하아!”

닫혀 있던 입술이 자꾸만 벌어졌다. 야릇한 신음이 쉬지 않고 터져 나온다. 빳빳하게 서 있던 우영의 페니스가 물 만난 고기처럼 안쪽을 휘저어 버리자 승진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백승진.”

퍽퍽―

침대가 삐걱거릴 만큼 강한 진동에 숨이 막혔다. 한번 탄력을 받기 시작하자 도통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 피스톤질에 눈앞이 아찔해진다.

우영은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며 승진의 이름을 불렀다.

“눈 떠.”

그가 짧고 굵게 명령했지만 승진은 인상을 썼다.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야 뜨든가 말든가 하……!

전립선을 찌르르 울릴 만큼 더욱 깊게 들어오던 우영의 페니스가 갈수록 감당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여길 때쯤, 우영의 미끌거리던 손이 승진의 페니스를 세게 움켜쥐었다.

“너!”

승진은 발기한 자신의 분신을 손에 쥐고 위아래로 슥슥 문지르는 우영의 행동에 뜨거운 숨을 쏟아 냈다. 우영은 자신을 노려보는 승진의 신음 따윈 신경 쓰지 않고 허리 아래에선 피스톤질을, 허리 위로는 차갑고 큰 손으로 승진을 농락해 댔다.

빌어먹을!

하나만 공략해도 금방 백기를 들 예민한 부위를 한 군데도 아닌 두 군데나 지배해 버리는 우영의 손길에 승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통 멈추질 않는 피스톤질이 온몸을 뜨겁게 만들었다.

하, 망할, 읏, 하아, 씨발…… 우윽, 제, 젠장할!

매트리스 위에서 우영의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받아들이며 제 것까지 부푸는 것을 느낀 승진의 신음은 점점 늘어만 갔다. 쉽게 가라앉질 않는 열기가 넓은 스위트룸을 메워 나갔다. 승진은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주체하지 못하고는 이불을 붙잡고 있던 팔을 들어 올렸다.

“……!”

흐으.

“빨…….”

“뭐?”

“빨리, 이 새끼야. 하아!”

“…….”

“제길, 망할, 빌어먹…… 으읏!”

스슥.

아래도 위도, 어느 것 하나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면, 차라리 그대로 즐기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승진은 우영의 등을 부여잡으며 아래로 끌어당겼다.

픽 웃는 우영의 입술 쪽으로 신음을 토해 내던 승진이 보드라운 입술을 핥으며 인상을 썼다.

아득하게 멀어지려는 정신줄. 그러나 이대로는 질 수 없다는 생각에 버티려는 이성. 승진은 터질 듯 두꺼워지는 자신과 페니스의 팽창에 결국 입술을 짓눌렀다.

점점, 참는 것이 힘들어진다.

“승진아…… 하아, 나, 갈 것 같아.”

어느 순간 들려온 우영의 말에 승진은 대꾸하지 못했다. 새우처럼 휘어지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는 건, 그 역시 그랬으니까. 승진은 일부러 그의 귓가에 대고 그런 야릇한 음성을 뱉어 내는 우영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외쳤다.

“그럼 빨리 싸라고, 이 새끼야!”

* * *

‘으윽―’

날이 밝은 지 벌써 일곱 시간이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불기둥과 닿았던 애널 입구 쪽이 벌렁거렸다.

빌어먹을 새끼. 대체 얼마나 박아 댄 거야?

승진은 인상을 쓰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오늘따라 따갑게 느껴지는 정장 바지 하의가 불편해도 너무 불편했다.

“검사님?”

……따가워 미치겠네.

“백 검사님?”

“아, 예?”

엉덩이 부근을 쓸어내리는 것이 자갈밭 위를 걷는 것처럼 뜨거워서 미간을 좁히던 승진은 곁에서 들려오는 귀 익은 음성에 정신을 차렸다. 아까부터 얼굴을 구기고 있는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승진은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지하 2층의 엘리베이터 안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강 계장님. 부르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는 지금 억지로 몸을 움직여 사무실의 강진호 참여계장과 함께 구내식당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좁은 엘리베이터 벽면에 붙어, 어젯밤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에는 부적절한 곳이란 소리.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강진호 계장의 눈빛에 양심의 가책이 드는 것을 무시하며 승진은 애써 태연을 유지했다.

“예! 저 아까부터 여기 서 있었습니다, 백 검사님!”

“하하, 미안해요.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다른 생각이요? 아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그리 불편한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까?”

“불편……이요?”

“예! 그것도 엄청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셨다고요!”

“아, 그게…….”

드르륵―

“어? 백 검사님들 아닙니까!”

강 계장의 질문에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하려던 승진의 말을 뚝 끊어 내곤 엘리베이터 문이 1층에서 열렸다. 우영의 검사실에서 일하고 있는 양우혁 참여계장이 승진과 강 계장을 발견하곤 반가운 척을 했다.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양 계장의 뒤를 이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에게 고정됐다.

어젯밤, 수원의 호텔 스위트룸에서 제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며 쉬지 않고 피스톤질을 하던 남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서늘한 얼굴을 한 채,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하는 냉정한 옆 검사실의 검사만이 존재할 뿐.

‘망할 자식!’

승진은 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목례만 한 후 시선을 돌려 버리는 우영에게 일부러 말을 건넸다.

“신 검.”

“……백 검.”

고작 하룻밤 사이에 승진이 지난 사흘 동안 그를 안았던 것 이상으로 우영은 승진의 안을 농락했다. 덕분에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서울로 출발했던 그들은 하마터면 지각까지 할 뻔했다.

승진은 눈인사를 하고선 다시 고개를 돌리는 우영의 행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백 검사님네도 점심 먹고 오는 길?”

“아, 어어. 오늘 식당 밥이 맛있다더라고. 그러는 두 분은……?”

“우린 요 앞에 생긴 분식집에 잠시. 그런데…….”

응?

“백 검사님, 아까부터 안색이 좋지 않으신데, 어디…… 불편하십니까?”

양 계장의 말에 승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승진은 우영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저 자식이……!’

하아, 짧은 한숨을 흘리며 강 계장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말 한번 잘 꺼냈어, 양 계장. 안 그래도 나도 걱정하던 중이었거든. 저기, 검사님. 아침부터 계속 불편해 보이시던데, 혹시…….”

혹시?

“아래쪽에 문제가 생기신 겁니까?”

“예?”

예상치 못했던 강 계장의 말에 승진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나려다 멈칫했다. 강 계장은 다 이해한다는 듯 쓰게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후우, 걱정 마십시오, 검사님. 제 지인 중 한 명이 그쪽 방면으로 꽤 유명한 의사입니다. 제가 몇 마디만 하면 한 방에 해결해 줄 겁니다!”

“자, 잠깐만요. 지금 무슨…….”

“아, 뭐야. 그런 거였습니까? 하하. 백 검사님, 강 계장 지인은 진짜 유능합니다. 저도 예전에 간 적이 있어요. 뭐, 우리 같은 사무직에겐 일상사 아니겠습니까? 그거 별거 아닙니다. 수술 한 방이면 해결되죠!”

아니, 이봐들.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큭.”

……!

“하하. 백 검사님이 부끄러우신가 보군요.”

“신 검사님, 웃을 일이 아닙니다. 이건 충분히 신 검사님께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요.”

두 계장들이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우영을 타박했다. 승진의 얼굴은 어느새 사색이 된 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우영은 두 계장들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크큭, 웃음을 겨우겨우 참는 중이었다.

제기랄!

승진의 귀는 어느덧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해명, 해명해야 돼!

“계장님들, 뭔가 단단히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전 치…….”

“백 검.”

설마 그 병이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란 생각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승진이 입을 열려는 시점, 우영이 승진을 불렀다. 우영은 인상을 쓰며 자신을 노려보는 승진에게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걷잡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병원 가도록 해.”

……뭐?

『10층입니다.』

톡톡, 어깨를 두드리는 우영의 말에 승진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영은 픽 웃음을 흘리곤 마침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유유히 빠져나갔고, 양 계장 역시 그의 뒤를 따랐다.

“강 계장님! 저 치질 아닙니다!”

승진은 그런 그들이 우영의 검사실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 곁에 서 있던 강 계장에게 외쳤다. 강 계장은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승진에게 미소 지어 보였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검사님. 저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 왜 이러세요! 저 정말 치질 아니라고요!”

“네네. 그래도 의사 친구 전화번호는 드릴 테니 언제든 전화하십쇼.”

“강 계장님!”

달칵―

젠장. 완전 돌아 버리겠…… 어?

아무리 해명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을 법한 반응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승진은 자신의 검사실 문을 돌리기 위해 문고리를 잡으려다 문고리가 먼저 돌아가자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의사라니?”

닫혀 있던 백승진 검사실의 문이 열렸다.

“어디 아픈 거야, 우리 아들?”

* * *

“백 검사님, 진짜 불편해 보이시던데……. 검사님이 한번 말씀드려 보세요. 강 계장 지인, 그쪽 방면으로는 진짜 유명합니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양우혁 참여계장의 말에 우영은 또 한 번 풋,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귀여운 자식.’

톡톡,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윙크를 하자마자 창백하게 질리던 승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돌아서려는 자신을 향해 차마 입 밖으로 뱉어 내지 못할 욕설을 입 모양으로 그리는 모습이라니.

분할 거다, 아주.

스윽,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가 없다. 치질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승진의 외침이 귓가에 남아 있어 냉정함을 유지하면서도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걸 참지 못한 우영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제게 말하는 양 계장에게 옅은 미소를 그려 보였다.

“걱정 마십시오, 계장님. 백 검에게 꼭, 전하겠습니다.”

고개까지 끄덕이는 우영을 보며 양 계장은 그제야 환한 웃음을 지었다. ‘사이가 좋지 않다더니 사실은 매우 좋으시군요!’를 외치는 양 계장에게 대꾸를 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온 우영은 의자에 앉은 뒤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너…… 이 자식…….]

[입 열지 마. 네 목소리 들으면 더 꼴리니까.]

[하읏.]

[개새끼, 그러니까 누가 꼼수 부리래.]

[크으으…… 제길!]

사실 그렇게까지 많이 안을 생각은 없었다.

많아 봤자 두세 번.

당장 다다음 날 출근을 해야 했으므로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지만 저를 눕힐 발칙한 계획까지 세운 승진을 발견하곤 그만 꼭지가 돌아 버렸다. 밤의 주도권을 쥔 사람은 누가 보아도 자신이었으므로 승진에게 톡톡히 그 사실을 알려 주려고 했다가 동이 틀 때까지 침대 위를 뒹굴게 된 것이다.

‘너무 심했나?’

양 계장의 말대로 승진의 표정이 심상찮기는 했다. 멀쩡하다 못해 얼굴이 번지르르한 저와 달리, 날이 밝을 때까지 아래에 깔려 있었던 터라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승진의 눈 밑은 퀭했다.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 줘야 하나.

우영은 고심하며 들고 있던 펜의 뒷부분으로 구레나룻 쪽을 긁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깔일 일이 더 많을 텐데 말이지.

Rrrr. Rrrr.

“예. 서울중앙지방 검찰청 첨단범죄수사부 신우영 검사실입니다.”

한 재로는 부족하다. 두 재 정도는 지어 줘야 지금보다 훨씬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지도 모른다.

조만간 한의원을 한번 방문해야겠다 중얼거리며 피식 실소를 터뜨리던 우영은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신우영 검사실의 정윤희 실무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정도 올라가자 상념에서 벗어났다.

“누구……시라고요?”

“뭐야? 윤희 씨, 왜 그래?”

“아뇨. 그게…….”

양 계장을 비롯한 우영의 시선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윤희에게 향했다. 윤희는 입술을 삐죽이며 전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어 낸 채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남자가 다짜고짜 검사님을 바꿔 달라고 하잖아요.”

“이름은?”

“그래서 이름을 요구했더니 무턱대고 검사님 안 계시냐고, 수원에서 온 전화라고 하면 아실 거라는데, 수원이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그거 가지고 검사님이 어떻게 알아요? 양 계장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아.

“윤희 씨, 저한테 전화 돌려주세요.”

“예?”

“부탁합니다.”

‘수원’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남자가 있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연락을 할 줄은 몰랐는데. 미심쩍어하면서도 우영은 윤희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망설이던 윤희는 떨떠름한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우영 쪽으로 걸려 온 전화를 넘겼다.

“네. 신우영입니다.”

-아이고, 검사 형님! 접니다, 저! 누군지 아시죠?

역시나.

어제 해외로 신혼여행을 간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허니문 1일 차도 되지 않아 전화를 걸어온 것을 보면 그의 협박에 가까운 부탁이 제대로 들어먹힌 모양이다. 우영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구수한 목소리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예. 알고는 있습니다만, 누가 그쪽 형님입니까.”

-아하하하. 또 그러시네! 섭섭하게 왜 이러십니까?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입니다!

우영이 승진을 대동하여 수원까지 내려갔던 이유, 그의 정보통이 되어 줄 김철웅이 과장된 웃음을 흘려 가며 소리쳤다. 귀가 따갑기는 했으나 우영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제 기억으로는 지금쯤 하와이라고…….”

-아, 예! 덕분에 잘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왜 제게 감사한지는 모르겠지만 뭐, 축하는 드립니다.”

-하하하, 형님도 참. 당연히 감사드려야죠!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제 결혼식에 와 주셨지 않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의도가 있었으니.

-그나저나…… 소식이 있습니다.

우영이 그의 결혼식에 갔던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김철웅이 우영에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우영이 쓰고 있는 감투를 그 또한 이용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서로가 속고 속아 주는 관계인지라 픽 웃음을 삼키던 우영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소식이라면?”

-형님께 도움이 될 만한 소식이죠. 사건 일어났던 날, 클럽에 있던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알아보라고 하셨죠. 다행히 KS 클럽 관리인 녀석이랑 연락이 닿았습니다.

“흐음.”

-조만간 형님에게 그 녀석이 전화를 드릴 겁니다. 제가 지금 해외에 있는지라 형님과 전화를 주고받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려요. 대신 그놈 좀 잘 봐주십쇼. 싹싹한 놈이라 형님이 원하시는 일 처리 똑 부러지게 잘할 겁니다.

“혹시 내게 뭔가 보답을 바라고 일을 하는 거라면…….”

-하하. 형님도 참. 보답이라뇨! 절대 그런 거 아니니 걱정 마십쇼! 단지, 저는 형님과 오래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도와드리는 겁니다! 예전에 진 빚도 있고 말이지요.

얼굴을 맞댄 건 아니지만 김철웅의 능글맞은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약간 탐탁잖은 구석이 있기는 하나, 윗선에서 단단히 막고 있는 이번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절대적이긴 했다. 우영은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끄덕이다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귀국하면 한번 뵙도록 하죠.”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때 형님 친구분도 함께 뵈었으면 좋겠군요! 두 분, 매우 잘 어울리시던데.

잠깐.

“방금, 뭐라고…….”

-헉! 형님! 마누라가 부릅니다! 전화기를 좀 오래 붙들고 있었더니. 하하하! 새 신부를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겠죠? 저 그럼 전화 끊습니다!

“이봐요! 잠깐만! 방금 뭐라고 했…….”

제길!

순간 들려온 말에 벌떡 일어나 외쳤으나 이미 전화는 끊어진 뒤였다. 하필이면 국제전화였기에 다시 전화를 걸기도 애매했다.

우영은 껄껄 웃으며 전화를 끊어 버린 김철웅의 두꺼운 낯짝을 떠올리며 인상을 썼다.

“대체 누구 전홥니까, 검사님?”

설마 하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우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양 계장이 물음을 던졌다. 씩씩거리던 우영의 시선이 그제야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양 계장과 윤희를 훑었다. 우영의 일그러진 얼굴이 순식간에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그냥 아는 사람입니다. 계장님, 저 잠깐 백 검 검사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상의할 게 있어서…….”

“예?”

우영은 당황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도망치듯 자신의 검사실을 나섰다.

[백 검사님이요? 검사님은 잠시 휴게실에 가셨습니다. 가신 지 30분쯤 지났어요. 급하신 일이면 호출해 드릴까요?]

전화기를 드는 강 계장을 만류하며 우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직접 가 보도록 하죠.]

[아! 그런데 지금 검사님은…….]

[예?]

[……아닙니다. 지금쯤 가 보셔도 될 겁니다.]

터벅터벅.

승진의 검사실 문을 달칵 닫고 나와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던 우영은 내적 갈등에 빠졌다. 과연 자신이 얻은 소식을 승진과 공유해야 하나, 라는 점에 대해서.

[너 혼자 대검 가게 둘 것 같아? 절대 안 되지!]

정보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확실히 우영이 이번 사건의 실마리를 잡는 데 유리하기는 할 테지만, 어차피 공동 수사가 되어 버린 이상 승진에게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뒤늦게 사실을 접하고 길길이 날뛰는 승진을 볼 바엔, 차라리 마음 편하게 미리부터 정보를 공유하는 편이 좋았다.

크게 급한 일은 아니었으나 최대한 빨리 사건을 처리할 생각이었던 우영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빙긋 웃던 강 계장을 떠올리며 얼마 남지 않은 휴게실로의 발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다.

“백…….”

“아, 진짜 미치겠네. 이봐요, 여사님. 더위라도 드신 겁니까? 갑자기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멀리서 승진의 갈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우영은 돌연 들려오는 귀 익은 음성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틀림없는 승진의 목소리. 그것도 잔뜩 화가 난 음성을 흘리고 있는 승진의 뒤통수가 파르르 떨리자 우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여사님?’

손님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이제야 강 계장이 우영에게 멈칫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미팅 중이었군.

승진의 큰 체구에 가려 보이지 않는 여자가 누군지 조금은 궁금해졌지만 엿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몸을 돌리려 했다.

“선이라뇨! 제정신입니까?”

하지만 이어진 승진의 말은 우영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다시 들러야겠다며 일단은 유재익 특수부장검사에게 가려 했던 우영은 반쯤 돌아간 몸을 다시 휴게실 쪽으로 돌리며 얼굴을 굳혔다. 화가 난 승진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저 게이인 거 아시잖아요! 갑자기 선은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아들, 흥분 가라앉히고 내 말부터 들어 봐.”

“듣기는 뭘 들어요! 됐습니다. 여사님 말 안 들을 거고, 들을 생각도 없습니다. 이만 가시죠. 저 바쁩니다.”

“닥치고 일단 내 말부터 들으라니까!”

드디어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만 봐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그녀의 정체가 우영을 멈칫하게 만든다. 우영은 서늘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눌렀다. 승진과 실랑이를 벌이던 그녀, 승진의 어머니 한채영 여사가 크게 소리치자 버럭버럭 대들던 승진이 놀란 듯 멈췄다. 우영은 휴게실 입구의 꺾어진 복도 앞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하아아, 제기랄…….”

긴 숨을 흘리던 한 여사는 우아한 입에서 터져 나오지 않을 욕설까지 뱉어 냈다. 언제나 고고함을 유지하던 한 여사가 꺼낸 그 욕지거리에 승진이 놀란 숨을 토해 내는 것이 들려왔다.

평범한 일은 아니군.

우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들, 너 솔직히 말해 봐.”

쿵쿵, 이상하게 심장이 뛴다. 그들의 말을 엿듣는 것이 불안해서인지, 아니면 한 여사에게서 무슨 말이 터져 나올지 몰라서인지. 아직까지 제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휴게실의 모자를 생각하며 우영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 지금 만나는 놈, 누구야?”

뭐?

“뜬금없이 무슨 소리예요? 여사님, 제 연애사는 인정해 주시기로 했잖아요. 이제 와서 태클 거는 건…….”

“묻는 말에만 답해. 누구냐고.”

묘한 살기마저 느껴지는 그녀의 질문에 승진이 당황한 듯 쉬이 대답하지 않는다.

[한 여사? 걱정하지 마, 인마. 커밍아웃했을 때 먼저 백기 들고 그나마 나 인정해 준 건 여사님뿐이니까. 우리 엄마, 그렇게 빡빡한 사람 아니다?]

웃으며 말하던 승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빡빡한 사람이 아니라니. 뭣도 모르는 소리.

우영은 코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래도 약간의 여유를 부리고 있던 승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우영은 후우, 숨을 흘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한 여사의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소리를 들어서 그래. 말도 안 되지. 남자 좋아하는 건 그래, 백번 양보해서 인정한다 치더라도, 그건 아니라고.”

“돌려 말씀하시지 말고 그냥 하세요. 무슨 소리를 들으셨길래 이 호들갑이에요?”

“아들, 아니, 승진아.”

두근두근―

직접 말을 듣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뛰는 이유는 뭔지. 우영은 침을 삼켰다. 그러다 이어지는 한 여사의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너, 어제 수원에 있었니?”

쿵쿵.

아주 단순한 질문이었을 뿐인데 고요한 가슴이 일렁인 까닭은 걸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장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매서운 질문에 한 여사의 얼굴을 마주한 승진뿐 아니라 휴게실 근처 복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영 역시 반응했다.

‘어떻게……?’

발이 넓다고 소문난 승진의 어머니, 한 여사이기는 하지만 설마하니 그들을 쫓아 수원의 그 예식장에 갔을 리는 없을 테고.

우영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휴게실 안쪽을 흘긋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승진이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한 여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저렇게 연기가 티 나니 뭘 믿고 맡길 수가 있나.

유독 한 여사에게 약한 승진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던 우영은 하하,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는 승진을 노려보는 한 여사를 바라봤다. 흥, 코웃음을 친 한 여사가 말없이 웃고 있는 승진에게 다음 말을 쏟아 내는 것이 들려왔다.

“미진 미술관 옥 관장이 널 봤대.”

“옥 관장이 누…… 아, 옥 아주머니요?”

“그래. 어제 일이 있어서 수원에 갔다가 너랑 웬 남자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봤다더라?”

“일을 하다 보면 시시덕거릴 수도 있…….”

“매우 다정해 보였다던데.”

“……!”

“백승진! 너, 밖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길래 내 귀에까지 한 여사 아들 게이냐는 말이 들리게 만들어? 내가 허락한 건 어디까지나 너의 성적 취향이지, 밖에서 함부로 몸을 굴리라는 건 아니었다고, 이 망할 자식아!”

으르렁거리는 한 여사의 음성이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말을 들은 승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침을 삼킨 건 우영도 마찬가지.

‘잘못 대처하면 이거 큰일이 되겠군.’

이미 강산이 변할 시간을 훌쩍 넘겨 20년을 바라보고 있는 두 남자의 관계가 탄로 나기 직전, 우영은 불안한 마음에 입술을 세게 짓눌렀다.

한 여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말해 봐. 그 수염 난 산적 같은 놈, 대체 누구야?”

……뭐?

“안 그래도 불길하다 했어. 하필 네가 웬 떡두꺼비한테 잡아먹히는 꿈을 꾸고 옥 여사를 만났는데, 그게 사실이 될 줄이야! 백승진, 내가 남자는 허락해도 산적은 허락 못 한다. 이 엄마는 남자라도 예쁜 며느리를 보고 싶지, 널 잡아먹는 산적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콧김을 내뿜을 기세로 웃음을 흘리는 한 여사의 발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물론 승진에게서 한 여사가 추구하는 미적 수준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저리 반대를 할 줄이야.

[아마 넌 합격일 거야.]

한 여사가 작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신을 만나면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는 우영을 향해 승진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합격이고말고. 내가 인정한 얼굴인데, 여사님이 인정 안 할 리 없지.]

[뭐라는 거야, 이 자식이.]

[우리 예쁜 마누라, 이리 와 봐.]

[시발, 이 새끼가 돌았나? 누가 네 마누라야!]

[마누라아~ 우리 색시~]

[당장 안 떨어져? 어딜 만져!]

……윽.

실실 웃으며 자신을 덮치던 승진의 모습이 떠올라 우영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승진은 빈틈만 보이면 잠시도 아랫도리를 가만두지 않았다.

망할 자식.

“큭.”

그때였을까.

우영이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휴게실 쪽에서 승진의 실소가 흘러나왔다. 우영은 놀란 눈으로 휴게실 안을 쳐다봤다. 그와 같은 얼굴을 한 한 여사가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어디서 웃어!”

“크큭. 큭큭큭!”

“백승진!”

“하하하! 여사님. 큭큭. 진짜 미치겠네. 난 또 뭐라고. 옥 아줌마가 뭘 잘못 봐도 한참은 잘못 봤어! 여사님, 제가 제일 꺼리는 스타일이 뭔 줄 아십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심드렁한 한 여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승진은 웃음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를 흘렸다.

“수염 난 녀석들입니다. 이유는 간단해요. 키스할 때 감각이 진짜 별로거든.”

확실히 승진의 말대로였다. 승진은 수염을 싫어했다. 그것도 매우 싫어했다. 우영에게 빳빳한 수염이라도 나면 어디서 났는지 바로 면도기를 들고 나타났으니, 대충 짐작이 갔다.

뻔뻔하게 대답하는 승진의 말에 한 여사가 기겁을 했다.

“넌 엄마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승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솔직하지 않으면 솔직하지 않다고 또 뭐라고 하실 거면서.”

우영은 승진의 답변에 입을 벌리려다 다시 다무는 한 여사를 바라보며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누그러진 한 여사의 얼굴에 히죽 웃던 승진이 스윽 팔을 뻗더니 한 여사의 손 위로 제 손을 덮는 것이 보인다.

“여사님, 걱정 마세요. 여사님을 닮아서 제 미적 감각, 그리 떨어지지 않으니까.”

“어린 녀석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어리기는 무슨. 서른 넘긴 지가 언젠데요.”

“흥.”

“제 애인, 여사님이 보면 아주 입을 쩍 벌릴 정도로 멋져요. 얼마나 핸섬한지, 아주 인기도 많다고.”

애정을 가득 담은 승진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우영은 어쩐지 귓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흠흠, 숨을 가다듬었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습니다. 가끔 틱틱거리는 게 문제기는 한데, 뭐 귀여우니까.”

“어이구, 잘난 사랑꾼 납셨네. 그래서 대체 나한텐 언제 보여 줄 건데!”

“예?”

“아들, 너 그거 알아? 매번 보여 준다, 보여 준다 해 놓고 한 번도 안 보여 준 거? 볼 때마다 애인 자랑을 그렇게 늘어놓으면서 대체 안 보여 주는 이유가 뭐야?”

“제가 그랬습니까?”

“그랬어!”

버럭 소리를 지르는 한 여사의 말에 승진은 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영은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거 낯 뜨거워서 듣고 있을 수가 있나.

간혹 승진이 그의 자랑을 가족들에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그의 둘째 누나인 미진일 줄 알았건만, 한 여사에게까지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니. 얼굴이 화끈거려 미칠 지경이다.

“언젠가 인사시킬게요. 하지만 아직은 무리예요. 그 녀석이 부끄러움을 무지 많이 타서 설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내가 언제.

“꼭이다? 네 잘난 애인, 허락하든 안 하든 봐야겠어. 그래야 이 엄마도 마음을 놓지.”

“걱정 마세요. 진짜 완벽하다니까? 여사님 마음에 쏙 들 거야!”

“흥.”

“참! 그런 의미에서 여사님! 저, 선 안 봐도 되죠?”

그러고 보니 그걸 잊고 있었군.

돌아서려던 우영의 걸음이 다시 멈췄다. 우영은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다시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리던 한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가 잡은 게 아니니까 그러지. 할아버지는 너 아직 포기 안 하셨더라. 어떻게 해서든 너랑 고위 의원들 여식들이랑 엮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시던데?”

“아, 진짜! 여사님이 어떻게 좀…….”

“어어? 난 모르는 일이야. 나까지 엮지 마. 반항할 거면 할아버지한테 하는 게 좋을 거다.”

“……젠장. 할아버지는 왜 씨알도 안 먹히는 일을 계속 벌이시는 건지 모르겠네. 귀찮아 죽겠어, 진짜.”

구시렁거리는 승진을 보며 한 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Rrrr. Rrrr.

마침 걸려 온 전화에 한 여사에게 양해를 구한 승진이 투덜거리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통화를 하더니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사님, 저 이만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재미는 무슨. 앞으로 전화 제때제때 받아!”

“하하, 네!”

콧방귀를 뀌는 한 여사에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춘 승진은 우영이 있는 복도가 아닌 반대편 복도로 빠져나갔다. 한 여사는 그런 승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이잉, 우영의 핸드폰도 그와 비슷한 시점에 울리기 시작했다. 한형석 첨수부 부장검사였다.

“신우영입니다.”

-신 검, 부장실로 와.

“알겠습니다.”

아마 승진도 비슷한 맥락의 전화를 받은 거겠지.

우영은 낮은 한숨을 내쉰 뒤 몸을 돌리려 했다. 부장검사실은 휴게실을 지나쳐 가는 편이 빠르겠지만 아무래도 아직 한 여사가 머물러 있으니.

돌아가더라도 평검사실이 있는 곳으로 가려던 우영의 발걸음은 한 걸음도 내딛기 전에 멈춰지고 말았다.

“……!”

그 어느 상황을 맞닥뜨린다 할지라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것은 신우영의 특기이건만, 이상하게 단 한 사람 앞에서만큼은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신 검사.”

또각―

멀지 않은 거리.

그랬기에 더욱더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가 귓속으로 스며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있는 옷 전체가 값비싸 보였고, 그것이 결코 어색하지 않은 것은 여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마주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도 훨씬 더 전의 일.

그의 졸업식이기도 했고, 승진의 졸업식이기도 했던 학성 고등학교의 졸업식 날이었다.

[들었어? 저 아줌마가 유원대 법대 교수라던데?]

[아아, 그럼 백승진 엄마겠네?]

아이들의 졸업식이라 하여 한껏 멋을 부리고 온 다른 학부모들과 달리, 블랙으로 통일된 의상을 입고 온 그녀의 모습은 고지식한 이미지의 교수라기보다는 TV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외모의 중년 부인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은 물론이거니와 선명한 이목구비가 화려한 외투를 입고 있는 다른 학부모들보다 훨씬 더 반짝거렸다.

‘백승진이 어머니를 많이 닮았군.’

승진의 어머니를 두고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흘려들으며 우영은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 승진이 이렇게까지 긴 인연을 유지할 줄은 몰랐던지라 한번 보고 말 사람이라 여긴 것이 실수였다.

‘……또.’

평소와는 다른 심장박동. 급격하게 증가하는 숨소리.

젠장.

저도 모르게 욕설을 흘릴 뻔한 우영은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생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든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당혹감을 품게 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그녀에게 약간의 미안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승진은 미진을 제외한 가족들에게도 우영과의 관계를 철저히 비밀로 부쳐 왔다. 만일 우영이 자신과 깊은 사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면, 안 그래도 승진의 ‘연인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그의 할아버지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자신이 승진과의 관계를 고백한 상황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혀를 차던 우영은 그의 어깨에 툭 손을 얹으며 말하던 승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가, 네놈이 우리 집안을 너무 만만하게 봐서 그러는데…… 일단은 내 말에 따라 주는 게 좋을 거다.]

[……뭐?]

[네가 걱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걱정돼서 그래. 너 기억 안 나? 나 성인 되자마자 커밍아웃하고, 우리 집안 완전히 개박살 난 거.]

[…….]

[그때 나한테 학을 떼고 할아버지가 한발 물러나기는 했지만…… 나 퇴마의식까지 받은 거 너 모르지? 하마터면 고추도 뗄 뻔했다. 으으.]

[……뭐?]

[하하. 놀랄 것 같아서 말 안 했어. 별거 아니었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어쨌든 지금은 일단 할아버지가 원하는 루트대로 움직여 주고 있어서 잠잠한 것 같기는 한데…… 우리 자리 잡을 때까지는 숨죽이는 것이 나아. 그래, 확실히 그게 낫지. 노인네가 약해지고 내가 조금 세졌을 때, 그때 당당하게 밝히지 뭐.]

[…….]

[왜 그런 표정이지?]

[백 검.]

[어.]

[그거, 정말 당당한 거 맞냐?]

‘맞아!’ 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외치던 승진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우영도 승진의 ‘엄청난’ 집안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였다. 대한민국 사법부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승진의 집안에 대해 모른다고 하면 간첩일 것이다.

우영이 승진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그가 단순히 고등학교 재학 내내 수석을 차지해서가 아니라 승진의 집안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니까.

결과적으로는 잘 해결되었다지만, 우영의 어머니 민 여사가 승진을 탐탁잖게 여겼던 것도 결국은 승진 자체가 아니라 승진의 집안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랬기에 승진의 집안은 확실히 승진뿐 아니라 우영에게 있어서도 골치 아픈 숙제나 다름없었다.

그로 인해 승진과 우영은 암묵적으로 합의를 봤다. 두 사람이 확실히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승진의 본가에 우영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미진이라는 장애물이 있기는 하나, 다행스럽게도 미진은 그들에게 꽤 협조적이었으므로 차치하고서 말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승진의 가족들은 ‘신우영’이라는 남자를 지금까지 그저 승진의 단순한 ‘라이벌’ 정도로만 인식해 왔다. 우영은 딱히 그에 불만을 품지 않았고, 의식적으로 그들을 피하고 있기까지 했다.

그 까닭에 서초구에 위치한 오피스텔에서 우영이 정식으로 한 여사와 인사를 나누었던 것은 정확히 우영이 승진의 옆집으로 이사 온 날이었다.

“신 검사?”

아.

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굳어 버린 우영을 굳이 한 번 더 부르는 여인의 모습에 고요하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친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를 계속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우영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한 교수님.”

우영의 인사에 한 여사가 호호, 낮게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어머, 신 검사도 참. 한 교수라니. 딱딱하게 교수님은 무슨. 그냥 선배님이라 부르라니까? 아니면 채영 씨라고 불러도 되고……. 만일 그것도 부담스럽다면, 음, 채영 누나는 어때요?”

……그게 더 부담스러운데요, 어머니.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온 한 여사는 가끔 들어온 승진의 설명과 다르게 미소 지으며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는 여성이었다.

‘예?’ 하고 우영이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이사 이후로도 몇 번 그녀와 마주치면서 대화를 나누었던지라, 그것이 한 여사의 농담이라는 것을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담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한 여사는 말 없는 우영을 올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그나저나 우리 얼마 만이죠? 내가 우리 백 검한테 반찬 주러 갔을 때 신 검사랑 만났으니까…… 한 3, 4개월 정도 됐나요?”

우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의 그렇게 됐습니다.”

“신 검사는 잘 지내죠?”

“네, 덕분에. 누…… 교수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방금 누나라고 부르려 했지? 호호, 내가 이래서 우리 신 검사를 좋아한다니까!”

“…….”

우영은 꺄르륵 맑게 웃는 한 여사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주었다.

한 여사는 ‘아주 잘 지냈어요.’라고 대답한 뒤 우영을 빤히 올려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교수님?”

“흐응. 아니,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생각?

“우리 백 검 말이야. 어릴 적부터 같은 고등학교에 대학교, 심지어 연수원 동기인 신 검사랑 중앙지검에서 같이 일하게 됐는데…… 옆집에 살면서도 어떻게 친해질 생각을 안 할 수가 있지?”

“……!”

“다 그 녀석 성격이 너무 날카로워서 그래. 신 검처럼 상냥하고 동글동글했어 봐. 다른 사람들한테 예쁨도 많이 받았을 텐데 말이죠. 난 신 검이랑 처음 대화해 보고 그간 백 검한테 들었던 말이랑 달라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어휴, 내 아들이지만 그 녀석 진짜 모났지?”

우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쩐지 그녀를 향한 미안한 마음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말 없는 우영을 보고 제 말에 수긍한 것이라 여긴 건지, 한 여사가 ‘그래도 내가 아들 욕했다는 거 녀석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 하고 눈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백 검은…….”

“응?”

“잘하고 있습니다.”

아뿔싸.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그럼 먼저 가 볼게.’ 하고 손을 흔들며 사라지려는 한 여사에게 툭 말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어?”

갑작스러운 말에 깜짝 놀란 한 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잠시 당황한 우영은 곧 침착해진 모습으로 어리둥절해하는 한 여사에게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고, 또 검사실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려 애쓰고……. 갈수록, 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검사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지금 이 말을 승진이 들었다면 ‘신가, 네놈은 나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도 취급 안 했던 거냐?’라고 외칠지도 모르겠다.

‘빌어먹을.’

한 여사의 앞이라 긴장을 한 것일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입 밖으로 흘러나와 스스로도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겉으로나마 억지 미소를 지으려 하는데, 굳어진 안면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우영은 말을 마친 뒤 눈을 질끈 내리감고 싶어졌다.

“풉!”

그때였을까.

제가 무슨 말을 꺼낸 건지 횡설수설한 모습만 생각나 아찔해지던 시점, 그는 코앞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한 여사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생긋 웃고 있었다.

“고마워요, 신 검사.”

당황한 우영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흘리며 한 여사가 말했다.

“그래도 내 앞이라고 어떻게든 우리 백 검 띄워 주려 하는 거, 생각 이상으로 듣기 좋았어.”

“교수님, 그게 아니라…….”

“호호. 우리 백 검도 신 검이 이렇게 자기 칭찬했다는 거 알려나 모르겠네. 백 검한테 신 검 같은 친구가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이왕 옆 검사실에서 일하게 되고 또 옆집에서 살게 된 거, 나를 봐서라도 둘이 좀 친하게 지내봐요. 응?”

“…….”

“그러다 혹시 알아? 내가 신 검한테 좋은 중매 자리까지 마련해 줄지?”

“……!”

“생각보다 이 업계, 되게 좁다니까? 오늘 얘기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봐요.”

톡톡, 우영의 어깨를 살짝 두드린 후 몸을 돌려 버린 한 여사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후우.’

그녀가 완벽하게 시야에서 없어지고 나서야 꼿꼿하게 서 있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망할. 어째 그녀를 대하는 것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대하는 것보다 피가 마르는 건지.

Rrrr. Rrrr.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한 여사가 사라지기 무섭게 울리는 전화에 우영은 액정을 내려다봤다. 한형석 부장이었다.

“네, 신우…….”

-신 검! 너 대체 언제 오냐?

아차.

* * *

“신가, 너 아까 나 보러 왔었다며? 네가 웬일이야? 검사실로 다 찾아오고. 아까 강 계장님이 난리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퇴근길엔 너랑 싸우기라도 했냐고 의심하시더라니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승진이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털며 우영에게 물었다. 뚝. 뚝. 그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말없이 응시하던 우영이 인상을 썼다.

“무슨 일이었어?”

하암, 길게 하품하며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은 승진에게선 계속해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다.

“신가? 어이, 신가! 신 검! 신우…… 윽!”

꽤 피곤했던 모양인지 자신의 집에 들어오자마자 욕실로 바로 직행했던 승진에게 우영은 수건을 던져 줬다. ‘아프잖아!’ 하고 버럭 외치던 승진은 냉정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우영에게 입을 쭉 내밀었다.

“닦아.”

“어?”

“물 흐른다.”

무뚝뚝하게 말하자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흘린 승진이 방긋 웃으며 우영의 목으로 팔을 둘렀다.

“윽! 백승……!”

“흐흐. 우영아, 내가 너희 집 물바다로 만드는 거 싫냐?”

굳이 따지자면 싫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 물론 샤워 이후 승진이 그의 하반신을 반응시킬 만큼 섹시해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다시 청소하기 귀찮으니, 물은 제대로 닦고 나와 줬으면 하는 거지.

“신가야.”

“왜.”

“그렇게 물 떨어지는 게 싫으면, 하기 전에 나 샤워하지 말까?”

자신이 뭐라고 말할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야릇한 미소를 짓는 승진을 볼 때면, 그의 붉은 입술로 제 입술을 미친 듯이 비벼 대고 싶다.

우영은 ‘신 검아, 내 말 들리냐?’ 하고 쿡쿡 웃는 승진의 팔을 거둬 내고선 그의 턱을 잡으려다 지이잉― 울리는 전화에 멈칫했다.

“무시해.”

“…….”

“어이, 업무 이외 시간이다.”

“…….”

“인마.”

“네, 신우영입니다.”

한창 분위기에 빠져들 시기에 진동하는 핸드폰을 보고 승진이 그것을 멀리 치워 버리려 했으나, 통화 버튼을 누르는 우영의 손짓이 더 빨랐다.

쳇.

승진이 입술을 씰룩이며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우영은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인데?”

‘하여간 무드 없는 자식.’ 하고 툴툴거리면서도 우영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던 승진이 무언가를 직감하고 입을 열었다.

우영은 대답 대신 승진의 손바닥 위로 ‘KS’라는 글자를 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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