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방검찰청
2년간의 사법연수원 생활을 수료한 뒤, 우영은 곧바로 공군에 입대를 했다.
한창때인 서른이 다 되어 군대에 가느니 차라리 미리 다녀오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꼭 지금 가야 하냐?”
연수생을 끝마치자마자 곧바로 임관을 준비하고 있던 승진은 수료식을 몇 달 앞두고 제게 입대 얘기를 꺼내는 우영에게 미간을 찌푸렸다.
우영은 그런 승진을 보고 ‘대한민국 남자라면 당연히 가야 하는 일이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어.’라고 짧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승진 역시 그의 말에 동의라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가야겠군.”
“백승진, 넌 바로 임관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
“신가 네 녀석이 없으면, 심심하단 말이다!”
“……뭐?”
“잘됐어. 이참에 나도 가야겠다. 생각해 보니까 둘이 같이 다녀오는 편이 낫겠어. 한 사람이 가면 한 사람이 기다리고 이러는 거, 아주 짜증 나는 일이니까.”
쳇,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네가 공군이면 나는 해군을 가 볼까?’라고 중얼거리는 승진의 모습은 의외였다. 우영에게 연수원 수석 수료라는 훈장을 빼앗긴 뒤 검사 임관에 열을 올리고 있던 승진이었던 터라 더더욱.
충동적인 그의 결정에 재고해 보라고 제안할까 하다 말았다. 우영이 알고 있는 승진은 한번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제 말을 귀담아들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훗날 군대에 갈 승진을 3년이나 기다릴 자신은 저 역시 없었기에 우영은 ‘알아서 해.’라고 짧게 대답해 주었다.
덕분에 연수원 수료 이후 큰 마찰 없이 우영과 승진은 나란히 입대하게 되었고, 각각 공군과 해군의 군법무관으로서 3년간의 군 복무를 훌륭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대구지검?”
대한민국 사법연수원을 각각 수석과 차석으로 수료하게 된 우영과 승진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연수원을 수료하자마자 곧바로 판·검사로서 임관하는 것, 혹은 변호사로 개업하여 떼돈을 버는 것, 그도 아니면 입대를 하여 임관을 조금 늦추는 것.
보통 연수생 같으면 첫 번째 과정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두 사람은 파격적으로 동시 입대를 강행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진짜 특이한 녀석들이야.’라고 그들과 함께 수학했던 동기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두 사람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군 제대 이후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연수원 시절 성적이 워낙 좋았던 두 사람이었기에, 함께 연수원 생활을 했던 동기들은 두 남자들이 제대 후 당연히 서울 지역의, 혹은 수도권의 지검이나 지청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승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진은 중앙지검이 아닌 동부지검에서 먼저 검사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영이 제게 꺼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노려봤다. 우영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너 지금 뭐라고 그랬냐? 대구지검이라고 한 거 맞아?’ 하고 한 번 더 되묻기까지 하는 승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대구지검.”
“신우영!”
“소리치지 마라. 귀 아프다.”
“너!”
2, 3년을 주기로 옮겨 다녀야 하는 초임 검사의 특성상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전국의 지검과 지청을 누비며 생활해야 한다. 든든한 배경이 있는 승진과 달리 아래부터 시작해 위로 치고 올라갈 수밖에 없던 우영은 애초부터 눈에 띄느니, 차라리 밑바닥에서부터 제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에 대구지방검찰청을 먼저 선택한 것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승진은 화부터 내기 시작했다. 떨어지기 싫다는 의미였다. 그러자 우영은 ‘너 이 새끼, 사실대로 말해 봐. 대구지검으로 간다는 거, 나랑 헤어지자는 거냐?’라고 으르렁대는 승진을 향해 쓴웃음을 흘렸다.
“승진아. 백승진.”
우영은 열을 올리고 있는 승진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두 눈을 부라리고 있는 승진에게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넌 내가 왜 대구부터 시작하려는 건지 모르겠냐?”
“몰라!”
“…….”
“매번 네 녀석 혼자 결정 내리고 나한테는 말을 안 해 주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잔뜩 화가 난 기색으로 버럭 외쳐 대는 승진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그리던 우영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래에서부터 올라갈 생각이다. 당연히 중앙지검으로 올 거라 여겼던 수석 수료생이 난데없이 지방으로 빠져 버리면, 윗대가리들도 의문을 품겠지. 저 꼴통 새끼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백도 없고, 그렇다고 돈도 없는 녀석이 그렇게 배짱을 부리면 윗분들이 얼마나 의아해하시려나? 아마도 시선을 두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겠지.”
“너……!”
“그 점을 노리는 거다. 처음부터 중앙지검에 머물면서 그래, 엘리트 라인을 타면 승승장구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행여나 라인을 잘못 타 봐라. 능력도 없는 놈이 라인도 잘못 탔다는 말 들으며 그대로 팽 당하기 쉬운 시대다. 게다가 갓 들어온 초임 검사한테 누가 중책을 맡기겠어? 잡무만 하다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수년이 지나야 겨우 손에 들어오겠지. 나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사건 기다리며 윗대가리들한테 아부만 하는 생활하는 거, 사양한다.”
“…….”
“굴러들어 온 돌 취급당하며 라인 타기에만 급급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검사 생활부터 해 보고 사건도 해결하면서 위로 올라가고 싶어서 그래. 이왕 검사가 된 거, 최종 목표인 검사장까지는 가 봐야 하지 않겠어? 아래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서 검사장 자리에 앉으려면, 지방검찰청에서 몇 년 수련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지.”
‘그렇게 생각 안 해?’ 하고 빙긋 웃는 우영의 발언에 승진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너까지 따라와 달라는 말은 안 한다. 염치가 있지. 너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우리가 만나는 건…… 최대한 주말을 비우면 될 것 같은데. 주말은 최대한 비워…….”
“좋아.”
“뭐?”
“대구지검으로 간댔지?”
우영은 제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일어난 승진을 깜짝 놀란 눈으로 올려다봤다. 승진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부산지검으로 간다.”
“……뭐?”
“서울-대구보다, 부산-대구가 더 가까우니까. 앞으로 주말밖에 못 볼 텐데 쓸데없는 걸로 시간 낭비하기는 싫다. 그러니 부산으로 하지, 뭐.”
“……!”
“부산이라. 부산에는 서너 번 정도 가 봤는데, 갑자기 살게 될 줄은 몰랐는걸.”
픽 웃으며 ‘그럼 보고하러 간다!’고 말한 후 사라지는 승진을 우영은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언뜻 스쳤던 승진의 눈동자엔 그간 마주하지 못했던 결의까지 담겨 있어 차마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은 전하지 못했다.
그 후, 우영은 결국 대구지방검찰청의 형사 제3부 소속 검사로 임관하게 됐다. 충동적으로 우영을 따라 미래를 정하게 된 승진 역시 부산지방검찰청의 강력부 소속 검사로 임관하게 되었고 말이다.
그것이 그들의 나이 스물아홉의 일.
3년간의 군 복무 생활에 이어 지방검찰청 생활을 시작하게 된 두 남자의 현재 나이는 이제 막 서른을 넘기고 있었다.
* * *
“오늘이요?”
우영은 내심 놀랐다.
-왜, 안 되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럼 좀 보자꾸나.
“…….”
-우영아?
“알겠습니다. 몇 시에 오십니까?”
-내가 알아서 가도록 할게. 동대구역 맞지?
“……네. KTX 타고 오시는 거면 역에서 내려서 범어 네거리 방면으로 쭉 내려오시면 됩니다.”
-알겠다. 이따 보도록 하자. 그럼 끊는다.
우영은 제 말을 끝낸 후 뚜뚜, 끊어져 버린 전화를 내려다봤다. 오랜만이었다. 아니, 정확히 1년하고도 반년 만인가. 그가 대구지검으로 임관한 이후 단 한 번도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던 어머니 민 여사가 먼저 연락을 해 올 줄이야.
그의 군 생활 동안에도 면회 한 번 오지 않고 두 동생만 대신 보냈던 어머니는 예상치 못한 시점에 갑자기 방문하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거절의 의사를 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오늘 오후에는 시간이 빈다는 거 알고 있다.’라고 말한 민 여사가 사전에 그의 거절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올해로 스물다섯 살이 된 남동생 우빈이 군 복무 중인 지금, 서울 본가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여동생 예빈과 통화를 한 것이 어젯밤 퇴근 직후. 그때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예빈은 근래 특별한 일은 딱히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신 검사님?”
예기치 못한 민 여사의 방문 선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우영은 얼굴을 굳히며 끊어져 버린 전화기를 말없이 들여다봤다. 그러자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던 검사실의 김윤석 참여계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우영에게 말을 걸어왔다.
“무슨 전화입니까? 혹시 안유정 사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김 계장이 언급한 안유정 사건이란 요즘 대구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노인을 타깃으로 한 성폭행 및 살인 사건으로, 공중파의 9시 뉴스에도 몇 번 오르내릴 만큼 큰 이슈를 끌고 있는 일이었다.
이는 노인 돌보미를 자청한 20대 청년 안유정이 대구 일대를 돌아다니며 가족에게 버림받은 독거노인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성폭행까지 저질러 버린 끔찍한 사건으로, 우연찮게 그 사건의 담당 검사로 활약하고 있던 우영은 피의자인 안유정에게 긴급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유례없는 사건으로 인해 대구지검은 물론이거니와 담당 검사인 우영의 검사실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김 계장으로서는 그런 상황에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굳어진 우영의 얼굴이 안유정 사건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우영은 빼곡하게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흘긋거리며 불안한 눈빛을 건네 오는 김 계장에게 쓴웃음을 흘렸다.
“아뇨. 그 사건은 제대로 진행 중입니다. 계장님도 아시다시피 내일 아침 피의자 심문도 있을 예정이지 않습니까?”
“그, 그렇겠지요?”
“예. 그러니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김 계장님.”
안유정 사건을 처음 배속받고 울분을 토하던 김 계장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어떻게 그 불쌍한 노인네들을 처참하게 죽일 수 있냐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어 대던 그는 긴급 체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는 안유정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뿐인가.
저런 놈은 평생 감방에서 썩어야 한다며 침을 튀겨 가면서 소리치기까지 했다.
그런 김 계장을 말리느라 곤혹스럽기만 했던 간밤의 일이 떠오른 우영은 불안해하는 김 계장을 안도시켰다. 그러고는 째깍째깍 흘러가는 벽시계를 흘긋거리며 터져 나오는 한숨을 꾹 삼켰다.
‘시간, 참 안 가는군.’
* * *
“백승진?”
저녁 8시가 되어서야 검사실을 나올 수 있게 된 우영은 대구지검 근처에 위치한 자신의 오피스텔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때부터 무언가 미묘한 기분이 들더라니, 이 녀석의 등장을 알리는 거였나? 쉽게 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하는 승진의 갈색 머리를 마주하고선 입을 열자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던 승진이 홱 고개를 돌렸다.
“신 검!”
승진은 검사로 임관한 이후부터 우영을 그렇게 불러 대고 있었다. 꼭 사석인 자리에서까지 검사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싶었지만, 그가 그리 부르는 것을 딱히 말릴 생각은 없었으므로 모르는 척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우영은 미간을 좁히며 대문 쪽을 흘긋거렸다. 조용한 것을 보니 아직 민 여사는 자신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근래 들어 부산 지역의 신흥 범죄 조직들이 활개를 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쩐 일로 연락도 없이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건지. 의문을 표하면서도 일단 민 여사와 승진을 마주하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직감했다.
이미 오피스텔 안에 들어가 계신다는 연락을 받았던 우영은 답지 않게 긴장하고 있는 승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연락도 없이 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다. 일단 근처 호텔에서 쉬고 있어. 그럼 볼일 끝내고 다시 연락할―”
“그럴 필요 없다.”
……어?
그러나 우영은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대문을 활짝 열고선 싸늘한 눈으로 자신과 승진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민 여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것이다.
“저녁 차려 놨으니 우영이, 들어오렴. 그리고…… 승진 군도요.”
‘미치……겠군.’
우영은 점점 차오르는 숨을 제대로 내쉬지 못한 채 주변을 흘긋거렸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화롭던 그의 오피스텔 내 식탁 분위기가 왜 이렇게 숨이 막히는 건지. 서울에서 대구까지 내려온 민 여사가 상다리 부러지도록 차려 놓은 반찬들이 한가득인데, 그것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다그닥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가득한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고 있던 우영은 제 옆에 앉은 승진을 힐끔 쳐다봤다.
이 상황이 난처한 것은 승진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승진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더 흐리게 보인다고 생각하던 우영은 민 여사의 말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했던 승진의 말을 떠올렸다.
[신우영, 아침에 보낸 문자 네가 보낸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문자라니?]
[이 자식이. 급한 일 있다고 나한테 여기 와 달라고 부탁했잖아.]
[……내가?]
[답장도 하지 말고 8시 반까지 와 달라고 해서 연차까지 내고 왔다고.]
[……!]
[뭐…… 상황을 보니, 그 문자를 보낸 건 네가 아닌 모양이군.]
쓰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던 승진의 목소리가 귀를 웽웽 울린다. 우영은 죽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는 승진과 고요로 가득한 식탁 앞에 앉아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가고 있는 민 여사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세 명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은 6년 반 만이다. 그날, 연수생 1년 차였던 우영이 승진과 함께 민 여사가 있는 본가에 들러 대형 폭탄을 터뜨려 버린 이후 어머니와의 관계가 소홀해졌으니, 승진 또한 그날 이후 민 여사를 만난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서 계획하신 일인가.’
민 여사가 자신의 번호로 승진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그날 이후 자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민 여사가 수행했던 수많은 일들이 떠올라 쓴웃음을 흘리던 우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식사를 하는 민 여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얼굴 뚫어지겠다.”
“……!”
“어때, 식사는 괜찮니?”
먼저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민 여사였다. 우영의 선전포고를 들은 이후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설득하기도 했으며, 외면하기도 했던 민 여사가 오늘만큼은 단단히 각오한 표정이다.
우영은 왠지 긴장하게 되는 분위기에 민 여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들 먹으렴.”
빈말이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한 반찬들은 우영이 보기에도 부담스럽기만 했기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승진 군.”
“예!”
그리고 올 게 왔다.
우영은 저를 부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날 태세로 크게 외치는 승진의 모습에 헛웃음을 삼켰다. 마침 눈앞에 놓인 떡갈비로 젓가락을 옮기려던 승진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민 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민 여사가 싱긋 웃으며 승진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 우영이랑 다르게 승진 군은 부산지검에서 일한다죠?”
“네. 그렇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이라.
낯간지러운 호칭이 아닌가 싶어 입술을 씰룩이던 우영은 그런 자신을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는 민 여사의 모습에 다시 얼굴을 굳혔다. 우영을 싸늘하게 바라보던 민 여사는 다시 긴장하고 있는 승진에게 시선을 줬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승진 군도 충분히 서울권에서 검사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한 성적을 받았다고 하던데, 승진 군이 부산지검으로 향한 건…… 우영이 때문인가요?”
민 여사는 과감한 성격이다. 상냥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속에 든 말을 거리낌 없이 늘어놓고는 했다. 특히나 우영이 커밍아웃을 한 며칠 뒤, 우영을 직접 찾아와 말했었다.
[우영아, 네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승진 군이랑 불장난은 그만하도록 해.]
그녀의 표정은 근래 우영이 본 얼굴 중 가장 굳어 있어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민 여사는 대답하지 못하는 우영에게 계속 말을 이었다.
[이 엄마, 고지식한 사람 아니다. 요즘 세상에 남자끼리 감정 나누는 거…… 그거 못 본다고 이러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우영이 너, 그 백승진이라는 청년의 집안이 어떤지 듣기는 했니?]
[네?]
[대대로 법조인들을 배출해 온 집안이라더라. 명예를 중시할뿐더러, 돈도 많다더구나. 그쪽 집안사람 말 한번이면 공직에 줄까지 대줄 사람들이 허다하대. 어떻게 이런 정보를 얻었냐고는 묻지 마. 엄마도 바보는 아니야.]
[…….]
[내가 화가 나는 게 뭔지 아니? 내 아들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장남이 남자가 좋다고 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야. 이 상황에서 너를 지지하지 못하고 말려야 한다는 이 사실이…… 화가 나는 거야.]
[……어머니.]
[그 집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는 우리 집 때문에 화가 나. 네가 승진 군과 만나고 있다는 걸 그 집에서 알게 되면 벌어질 상황이 눈앞에 그려져 화가 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지 못하는 환경이 화가 나고, 우리의 기둥이나 다름없는 네가 그 집에서 상처받을 것을 생각하니…… 화가 나.]
[…….]
[그래서 그만두라는 거야. 내 사랑하는 아들이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네 사랑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힘들어할 것이 눈에 선해서.]
[…….]
[우영아, 엄마 말…… 들어줄 수 없니? 승진 군이랑 그만할 수 없어?]
당시의 어머니께 우영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승진에게 백기를 들어 버렸으니까. 저를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그저 흐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민 여사가 제 말을 듣지 않는 우영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던 것은. 아버지께서 일찍이 돌아가신 이후 그를 의지하며 살아온 어머니의 외면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승진을 포기하는 것이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기에 우영은 담담히 견뎌야 했다. 상황을 모르는 승진은 ‘너희 어머니께서 나를 싫어하시나 봐.’라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지만, 우영은 차마 그런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너희 집 배경이 문제가 된다고.
‘내가 잘나야 한다.’
우영이 바닥부터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누구처럼 훌륭한 배경이 없다고 한탄하는 어머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승진의 손을 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랬기에 우영은 스스로를 가꿔야 한다고 여겼다.
누구나 원하는 일등 신랑감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노력 하나만큼은 그 누구보다 자신 있던 우영이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누구보다 돋보이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아래에서부터 탄탄한 기반을 다져 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연수원 수료를 마치자마자 임관이 아닌 입대를 결심했다.
우영의 자세한 계획을 알지 못하던 승진은 입대를 선택한 우영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군말 없이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런 걸 보면 이 녀석도 보통은 아니지.
우영은 직설적인 민 여사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는 승진을 힐끔거렸다. 승진은 민 여사에게 솔직하게 답변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가늠하지 못해 우영에게 S.O.S.를 쳐 대고 있었지만 우영은 옅은 미소로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렇……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승진이 곧 결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승진은 꽤 눈치가 빠른 남자였다. 우영이 제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하고, 자신을 불러들인 민 여사에게 정면 대응하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우영은 짧게 숨을 흘리며 민 여사를 응시하는 승진을 쳐다봤다. 승진은 입을 다물고 있던 민 여사에게 말했다.
“제가 수도권이 아닌 부산지검으로 향한 건, 확실히 신 검…… 아니, 우영이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서울이랑 대구보다는 부산이랑 대구가 조금 더 가까우니까요. 어차피 떨어질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그편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
민 여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영 또한 이 상황에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다시 정적이 흐르는 분위기를 못 견뎌 한 사람은 승진이었다. 승진은 굳은 얼굴로 두 모자를 차례로 응시하다, 들고 있던 수저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우영은 갑자기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진지한 표정까지 짓는 승진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승진이 각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저를 이곳에 부르셨는지는 대충 예상이 됩니다.”
…….
“아마도 저희 두 사람의 관계를…… 납득하지 못하시는 것이 틀림없죠. 예. 제가 어머님의 입장이더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남자와 남자라니, 이해하기 힘들 만합니다.”
우영은 멋쩍게 웃었다.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승진이 신경 쓸까 봐 말하지 못했지만, 민 여사의 근심거리는 단순한 두 남자 사이의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우영은 ‘백 검.’ 하고, 결의에 찬 승진의 말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휘휘 내저은 승진은 대답 없는 민 여사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어머님, 제가 우영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결코 스치는 감정이 아닙니다. 저는 우영이를 진심으로…….”
Rrrr. Rrrr.
불운한 타이밍이다.
하필 승진의 진지한 말이 이어지던 도중 들려온 핸드폰 벨 소리는 우영을 당황시켰다. 이런. 딱딱하던 분위기가 요란하게 울려 대는 벨 소리로 인해 와장창 깨졌다.
승진은 물론이고 민 여사 역시 놀란 눈으로 우영을 응시했다. 우영은 어리둥절해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다 핸드폰 사이드의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요란하게 울리던 벨 소리가 멎는다.
“말씀들 나누…….”
지이잉.
“…….”
전화를 걸어온 상대도 확인하지 않았던 우영은 태연하게 두 남녀에게 말하다 멈칫했다. 전화에 이어 이번에는 문자 메시지를 몇 개씩이나 보내는 이가 누군지, 그는 인상을 쓰며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퇴근 이후에는 연락을 삼가기로……!
“우영아, 왜 그러니?”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던 우영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하게 굳어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 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진도 비슷한 눈빛을 띤 채 우영을 바라보고 있다. 우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어머니, 백 검이랑 둘이 이야기 나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영아?”
“뭐?”
벗어 둔 정장 상의까지 걸쳐 입는 우영의 행동에 민 여사와 승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우영은 다급하게 그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식탁에서 몸을 돌리며 말했다.
“급한 볼일이 생겨 당장 사무실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먼저 자리 비우겠습니다.”
우영은 깜짝 놀라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빠져나갔다.
<검사님! 큰일 났습니다. 안유정 이 개자식이 갑자기 검사님한테 조사를 받겠다며 난리를 피우고 있어요! 덕분에 퇴근하다 말고 다시 불려 왔습니다. ㅠㅠ 어떡하면 좋죠?>
대구지검의 김 계장이 무려 열 통 넘게 보내 온 문자가 그의 핸드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
“신 검사님! 여깁니다!”
형사 제3부의 검사실들이 줄지어 있는 대구지방검찰청 신관 2층.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비상계단을 올라온 우영이 문을 활짝 열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신우영 검사실의 김윤석 계장이 그를 향해 손을 휘휘 휘둘렀다.
우영은 창백하게 질린 김 계장을 향해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짧게 호흡을 내뱉은 우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김 계장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게 말입니다.’ 하고 인상을 쓰던 김 계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술을 움직였다.
“검사님께서 퇴근하시자마자 검사실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예. 일단 영상조사실로 함께 가시죠.”
우영은 저를 안내하는 김 계장을 따라 움직였다. 김 계장은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안유정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잖습니까. 내일 아침에 이곳으로 올 예정이었고요.”
“그랬었죠.”
“그런데 갑자기 그 개자…… 안 씨가, 지금 당장 조사를 받겠다며 난동을 부렸다지 뭡니까!”
“난동이요?”
우영이 얼굴을 구기자 김 계장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탓에 구치소가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신 검사님 불러 달라고 빽 소리를 질러 대며 자해까지 한 터라 하는 수 없이 검사실로 연락이 왔고요.”
“…….”
“구치소에서 바로 지검장님께 말씀드린 터라, 지검장님이 목 차장님한테 검사님을 불러오라고 지시하신 모양입니다. 퇴근하셨었는데,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는 어떻게 처리할 수 없는 일인지라…….”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는 김 계장을 나무랄 생각은 없었다. 차마 제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김 계장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던 우영은 ‘어이, 신 검사!’ 하고, 안유정이 들어가 있는 영상조사실 앞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던 대구지검의 장이혁 지검장과 목은태 제1 차장검사를 발견했다.
우영이 그들 앞에 머리를 숙이자 장 지검장과 목 차장검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저 미친 자식 진짜 어떻게 해야 하냐?”
“그러게 말입니다. 구치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지금 본관 앞에 기자들 쫙 깔렸답니다.”
“제기랄. 하여간 저 사이코패스 자식이 하루를 못 기다리네.”
우영은 이를 가는 장 지검장에게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장 지검장은 입을 다물고 있는 우영을 응시하며 말했다.
“신 검.”
“예.”
“곧 있으면 발령 시기 다가오는 거 아는데, 이번 일은 제대로 처리해 줬으면 해.”
“…….”
“신 검 인생에서도 꽤 중요한 일일 거 아니야, 이번 일. 언론사들도 난리라고. 전국적 관심이 모아지는 일인데, 잘 해결해야지. 안 그래?”
“맞습니다, 지검장님! 신 검도 이번 일의 중요성을 단단히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신 검?”
장 지검장의 말을 듣자마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외치는 목 차장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중요성이라. 당연히 알고 있다. 그랬기에 오피스텔에 민 여사와 승진을 내버려 두고 사무실로 달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마무리 잘하자. 응? 잘!”
우영은 자신에게로 다가와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장 지검장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목 차장뿐 아니라 이번 사건 배정을 부러워하는 선배 검사들이 우영에게 눈빛을 보냈다.
우영은 그런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조사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돌리는 우영의 눈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
뭇 검사들의 독려를 받으며 조사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란 테이블 위에 이마를 콕 박고 있던 ‘독거노인 살인 및 성폭행 사건’의 안유정이 고개를 들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열 명이 넘는 독거노인들만을 노려 성폭행하고, 그들을 토막 내 강가에 버리기까지 했던 살인자라고는 보이지 않는 얼굴의 사내가 태연하게 히죽 웃고 있었다.
“어라? 우리 검사님, 드디어 오셨네? 나 한참 전에 검사님이랑 대면 요청했는데!”
구속영장 발부 이전, 경찰들과 함께 그를 대면한 적이 있던 우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확히 올해 스물둘이 되는 안유정의 검은 눈동자가 소스라칠 정도로 가라앉아 있어 기분이 확 나빠졌다. 우영은 조사실 안에 달려 있는 카메라의 버튼이 붉게 물드는 것을 인지하고선 히히, 웃음을 흘리는 안유정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나를 보고 싶어 했다지?”
“우리 검사님, 너무 내 스타일이라서. 며칠 안 보니까 보고 싶더라고. 검사님, 그거 알아요?”
“…….”
“나 구치소에서 검사님 다시 만날 날 생각하면서 한숨도 못 잤다? 이렇게 다시 보니까 아주 기분 좋은데?”
정신병자가 따로 없다. 하긴, 그러니 저보다 나약한 노인들을 상대로 그런 악랄한 짓을 저질러 버린 거겠지. 경찰들이 현장 감식을 나갈 때 함께 움직였던 우영은 눈앞의 사내와 더는 길게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었다.
용의자에서 피의자로 안유정을 확정하기까지, 수많은 절차를 걸쳤다. 그가 행한 행동들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남겼고, 안유정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덕분에 전 국민의 지탄을 받던 그를 구속할 수 있었던 거고.
원래대로라면 내일 아침 검찰로 출두하기로 했던 안유정에게 남은 것은 그가 저지른 범죄를 확답 받는 것뿐. 그를 구속하기 위해 수십 번도 넘게 조사를 했던 우영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소름 끼치는 살인자가 자신을 굳이 지목하여 조사를 원했다는 것이 떨떠름했다.
우영은 생글생글 웃는 안유정에게 말했다.
“나한테…… 자백할 것이 있다고 하던데.”
“응, 있지!”
이 자식이 말끝마다 반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안유정의 멱살을 움켜쥐고 서늘한 말을 늘어놓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아 그러지도 못하겠다. 우영은 무뚝뚝한 눈빛으로 안유정을 쳐다보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말이 뭐지?”
“에이, 자백을 그냥 듣게?”
“……뭐?”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검사님, 머리를 써, 머리를.”
자신의 옆머리 쪽을 톡톡 치면서 샐쭉 웃는 안유정의 눈꼬리가 반으로 접혔다. 우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안유정을 응시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검은 유리창을 바라봤다. 두꺼운 유리를 사이에 두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선배와 상사들이 대충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그려졌다.
우영은 주저하다 안유정을 바라봤다. 안유정은 쉽게 걸려들지 않는 우영을 주시하더니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말했다.
“지금껏 내가 죽였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숫자 말이야.”
“…….”
“모두 열 명, 정도였던가?”
우영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안유정은 그런 우영을 보며 씩 웃더니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보이면서 속삭였다.
“다섯 명 더 있어.”
……뭐?
“검사님이 잘 협조해 준다면, 모두 밝힐 의향도 있는데? 알다시피 나, 내 발로 빠져나가기는 쉽지 않잖아? 그 불쌍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어디 묻혀 있는지 정도는 검사님도, 그 사람들 유가족들도 알아야 할 거 아냐. 안 그래?”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안유정의 말은 도발이 틀림없었다. 다섯 명이라. 열 명의 노인들을 죽이고 묻어 버린 안유정은 인간의 탈을 쓴 악마였다. 그는 노인들을 제 발아래 굴복시키는 것으로 자신의 정복성을 높였다. 게다가 그는 어릴 적 겪은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불구자이기도 했는데, 우연찮게 살해를 저지르면서 그 욕구가 다시 살아나 지금까지 힘없는 노인들을 죽이는 행위를 이어 왔다.
‘다섯보다 훨씬 많겠지.’
알려진 증거만으로도 그의 손에서 목숨을 잃은 노인들이 벌써 열이 넘거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은 틀림없이 다섯 이상일 거다. 우영은 ‘검사님?’ 하고 샐쭉 웃는 안유정에게 일부러 대응하지 않았다. 우영이 지금 입을 닫고 있는다면 아마도 더 많은 피해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분명하니까.
우영은 ‘안 궁금해?’라고 묻고 있는 안유정을 조금 더 가만히 내버려 두려 했다.
-신 검! 뭐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그런 우영의 계획은 갑자기 마이크를 들어 조사실 안을 가득 울리는 장 지검장의 음성으로 인해 뚝 끊어졌다.
우영의 얼굴이 있는 힘껏 구겨졌다.
‘……젠장.’
안유정과의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에 갑자기 끼어든 지검장의 외침은 우영을 불리하게 내몰았다. 우영은 ‘호오?’ 하고 코웃음을 흘리는 안유정을 응시하며 이를 악물었다 입술을 열었다.
“뭘 원하나?”
“별거 없어.”
“……?”
“다른 검사들이 내 성과에 대해 열을 올리는 게 싫어.”
뭐?
“우리 검사님만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그러니 가까이 와 볼래?”
“가까이 오라니?”
“귀에다 대고 살짝 말해 주고 싶어서 그래.”
“…….”
“어서!”
대놓고 수상쩍은 안유정의 말에 우영은 멈칫했다. 쿵쿵! 그때 유리창 쪽에서 한 번 더 소리가 들렸다.
‘맡겼으면 그냥 내버려 둘 것이지…….’
저를 믿는다며, 맡긴다며 어깨까지 두드려 주던 상사가 빨리 대답하라며 문을 두드리는 것이 분명했다. 우영은 인상을 쓰며 유리창 쪽을 흘긋거리다 이내 안유정에게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검사님.”
“…….”
“내가 지금까지 총 몇 명을 죽였고, 죽일 예정이냐면―”
죽일…… 예정?
귀를 간질이는 안유정의 말에 깜짝 놀란 우영이 그에게 들이밀었던 얼굴을 들려던 시점.
푹!
우영은 어깨목 쪽을 강하게 파고드는 무언가를 인지했다.
* * *
“우영아!”
……아.
“우영아, 정신이 드니? 정신이 들어?”
“어머……니?”
스르륵, 눈을 뜨자마자 보인 사람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는 민 여사였다. 민 여사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다 소리까지 지르자 우영은 의아해졌다.
어머니께서 어떻게……?
무언가 이상했다.
분명 자신은 안유정을 심문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승진과 함께 그의 오피스텔에 있었다. 안유정과의 대화가 쓸데없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와 승진이 대체 무슨 대화를 주고받을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안유정 사건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안유정이 아닌 틀림없는 어머니였다.
우영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눈썹을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윽!”
“우영아!”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우영은 후드득,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그를 부축하는 어머니를 보고 인상을 썼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뜻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몸이 경직됐다. 손을 들어 올리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우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끝내 올린 손가락 끝에서 무언가가 느껴진다. 목 부분을 감싸고 있는 거즈의 느낌이었다. 우영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민 여사에게 물었다.
“어머니.”
“으응?”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 * *
『다음 뉴스입니다. 열 명이 넘는 독거노인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를 받아 구속 수사 중이던 피의자 22살 안 모 씨가 검찰청으로 송치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발생한 검사 피습 사건을 두고, 피의자는 우발적 사건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 모 씨에 의해 기습을 당한 담당 검사는 현재 응급 치료를 받고 입원 중이며, 생명에 지장은 없는 걸로…….』
정오 뉴스.
습관적으로 TV를 켠 우영은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씩 웃고 있기까지 한 안유정을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방심……했군.’
평소였다면 흔들리지 않았을 것을, 하필 민 여사와 승진을 내버려 두고 대구지검으로 돌아와야 했던 터라 그 순간의 일을 피하지 못했다. 스르륵 눈을 뜨고 민 여사를 바라볼 때까지만 하더라도 생각나지 않던 그날의 일들이 눈에 선했다.
[이 개새끼가 진짜! 신 검사님, 괜찮으십니까!]
콸콸, 샘솟듯 솟구치는 피를 응시하며 제 목에 박혀 있는 볼펜을 무심히 바라보던 우영과 달리,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김 계장의 외침이 귀에 윙윙거렸다. 우영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피, 피가 납니다!’를 외쳐 대는 김 계장에게 괜찮다는 듯 흐리게 웃어 보이고는 배시시 웃고 있는 안유정에게 다가갔다.
우영이 기습받는 것을 보고 영상조사실로 뛰쳐 들어온 검사들에 의해 포박당한 안유정은 줄줄 피가 흘러내리는 어깨목을 그저 부여잡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것 같았다. 우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천천히 다가오는 자신을 보고 흠칫 놀라는 안유정을 향해 빙긋 웃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나?]
[……!]
[안유정 씨는 매를 버는 스타일이군.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는데 말이야.]
볼펜이 꽂힌 채로 말하는 우영의 모습은 아마 안유정에게 꽤 기괴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우영은 싱긋 웃으며 멍한 표정을 짓는 안유정에게 더 짙은 미소를 그려 주었다.
[조사 도중 검사를 기습한 건 당신에게 좋은 상황이 아니야. 나를 자극하고 싶었다면, 이런 방법보다 다른 방법을 쓰지 그랬어.]
[뭐, 뭐?]
[그리고, 다섯 명이라고 했나? 이상하군. 나는 다섯이 아닌 일곱이 더 있다고 들었는데.]
[……!]
[뭐,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돼. 조금 전까지는 여섯인지 일곱인지 헷갈렸지만 방금 전 당신 눈빛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거든. 일곱. 일곱이 확실하군.]
[이, 이 개자…… 컥!]
[미친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그만두지 못해? 그리고 김 계장, 뭐 하고 있는 거야? 당장 119 불러! 신 검, 너는 제발 정신 차려! 지금 네 목에서 피 흐르고 있다고, 이 자식아!]
선배들에게 붙잡혀 발버둥 치는 안유정에게 비릿한 미소를 짓는 사이, 조사실 유리창 너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목 차장이 조사실 안으로 달려 들어와 소리쳤다.
그때부터였나, 이를 악물며 안유정에게 말을 걸던 우영의 눈앞이 흐려진 것은.
[뉴스에서…… 네 이야기를 들었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가만히 있었는데, 승진 군이…….]
인터넷이 존재하는 시대의 뉴스는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다.
대구지검의 한 영상조사실에서 있었던 일은 지검 앞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들에 의해 대구 안은 물론이거니와 전 지역으로 뻗어 나갔고, 때마침 승진과 어색한 대화를 나누다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TV를 켰던 민 여사에게도 금세 흘러들어 갔다.
우영은 후드득 눈물방울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말하는 민 여사의 손을 말없이 잡아 주었다. 아버지에 이어 우영까지 잃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던 민 여사의 안색이 그제야 제대로 돌아오는 모습은 꽤, 씁쓸했다.
[승진 군이 아니었더라면…… 승진 군이 아니었더라면, 견딜 수 없었을 거야. 우영아, 엄마는…… 엄마는…… 흐흑.]
입술을 파르르 떨던 어머니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하다. 형사부 검사 일이 이토록 위험할 줄 몰랐다며, 굳어 있던 어머니를 진정시키느라 적잖은 시간을 소비한 우영은 저 외엔 존재하지 않는 병실을 두리번거렸다.
[신 검사님.]
[네.]
[혹시, 이 병원에 아는 분이라도 계십니까?]
[……네?]
[아뇨. 별건 아니고, 검사님께서 입원하셨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여기 병원장님이 내려오셨거든요.]
[예?]
[처음에는 검사님이 아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얘기 들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차장검사님도 이상하다셨어요. 지검에서는 VIP실은 무리고 2인실이나 최대 1인실 정도를 마련하려고 애썼는데, 병원장님이 직접 나타나서 검사님을 VIP실로 모신다고 해서……. 다들 의아해하고 있을 때, 마침 병원장님이 검사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알겠다고 하기는 했죠.]
오늘 아침, 경과보고를 하기 위해 우영의 병실을 찾았던 김윤석 계장의 말이 잊히질 않는다. VIP실이라. 대충 누가 손을 쓴 건지,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
볼펜이 파고든 부위는 다행히 그리 깊지 않았다고 한다. 목동맥을 찔렸다면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날 뻔했거늘 기적적으로 그곳은 피했다며, 아마 며칠 뒤 퇴원도 가능할 거라며 오전 회진을 온 의사가 설명해 주었다.
우영이 누구에 의해 이런 일을 당했는지 알고 있던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풀고 있었던지라, 병원 생활에 문제가 되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목 차장과 장 지검장은 이번 일을 겪으며, 그간의 공로는 인정해 줄 테니 괜한 신경 쓰지 말고 다른 검사들에게 이번 일을 모두 넘기라고 제안했다.
한번 맡은 일은 제 손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던 우영은 그것을 거부했다.
[끈질긴 자식. 내가 그래서 네 녀석을 아낀다, 신 검.]
그런 우영의 말을 듣던 목 차장이 피식 웃으며 그의 등을 세차게 두드려 준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안유정에 대한 조사는 우영이 회복하여 퇴원할 때까지, 같은 형사 제3부의 선배 검사에게 맡겨질 예정이었다.
완벽하게 회복하기까지 하루에서 이틀.
저를 마주하지 않고서는 입을 열지 않을 것이 분명한 안유정의 약을 바짝 올리며, 우영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차라리 잘됐군. 어차피 휴식이 필요한 시기였으니, 우영은 나쁘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물론 목 쪽의 상처가 쓰리기는 하지만―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으십니까, 최 계장님. 글쎄, 한 일주일 정도는 나 없어도 되잖아요. 예? 하하. 아니, 나 없으면 처리 못 하는 일이 뭐 그리 많……!”
불과 반나절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되짚어 보고 있을 때였다.
우영은 커다란 목소리를 흘리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자와 공중에서 시선을 마주쳤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며 툴툴거리는 모습이 꽤 매력적인 갈색 머리의 소유자였다.
“계장님, 30분 뒤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예? 아, 몰라요. 부장님한테는 계장님이 잘 말씀드려 주세요. 끊어요!”
조용히 문을 닫던 갈색 머리 사내가 뭐라 소리치고 있는 핸드폰 너머의 상대에게 제 말만 쏟아 내고선 뚝 전화를 끊었다. 치밀하게 배터리까지 분리하는 모습이 꼴통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니 부산지검에서 그는 꼴통 검사라고 불린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쳇, 하고 입술을 삐죽이던 남자가 분리된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선 제게로 다가오자 우영도 그를 주시했다. 그는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던 의자 하나를 꺼내 우영의 병상 옆에 툭 놓더니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며 앉았다.
“흐응?”
“…….”
“낯짝 보니 살 만한가 본데?”
퉁명스레 뱉어 내는 말에 불현듯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너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어. 혹시나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그래서 승진 군이랑 가까이하지 않길 바랐던 건데……. 승진 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네게 진심이더구나.]
[무슨 소리십니까.]
[승진 군 말이야. 울더라고.]
[……예?]
[우영이 네가 그 살인자한테 피습당했다는 뉴스 보자마자, 말없이 우는 거야. 처음에는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어. 승진 군, 나보다 훨씬 큰 청년이잖니. 하지만 네가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 듣고 눈물 흘리는 거 보니…… 나만큼이나 널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솔직히 조금 안도했단다.]
민 여사가 말했었다. 우영의 손을 꼭 붙잡으며, 차분하게.
[만약 거기서 그쳤다면 아마 승진 군을 믿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네 소식에 눈물만 흘리는 나약한 사람이 어떻게 너와 함께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런데 그렇게 눈물을 흘리던 승진 군이 갑자기 눈물을 닦더니 나한테 그러더라.]
[…….]
[걱정하지 말라고.]
[……!]
[우영이 너는 그렇게 쉽게 당할 녀석이 아니니까, 어머님도 걱정 마시라고. 죽을 위기에 처해도 자기가 모든 힘을 다 사용해서 살릴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시라고. 무엇보다 지금은 우영이 너를 믿어야 한다고. 그렇게 내 손 잡고선, 말하더라. 승진 군이 없었다면…… 엄마는 너를 보러 올 용기도 안 났을지 모르겠어. 처음 뉴스에서는 네가 중태라는 말을 했었거든.]
“뭘 그렇게 보냐? 내 얼굴에 뭐 묻기라도 했어?”
병실 안으로 들어와 제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면서도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우영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승진은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 얼굴을 슥슥 문질렀다.
우영은 그런 승진을 가만히 쳐다보다 붉은 입술을 열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어? 나?”
“…….”
“아아, 어머님께서 네 동생 데리러 역에 가신대서 잠시…….”
어머님.
왠지 친근하게 들려오는 그 말에 웃음이 날 것 같다.
“부산엔 왜 안 갔어? 살짝 들으니 멋대로 출근 안 한 것 같은데.”
“신 검, 너 진짜 섭섭한 소리 한다?”
“…….”
“애인이 중상을 당했는데 어디를 가냐! 이 자식,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
쯧, 혀를 차는 승진을 보며 우영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윽.”
“괜찮아?”
“……어.”
그러다 짧게 신음을 흘리자 느긋하게 콧방귀를 뀌던 승진이 벌떡 몸을 일으켜 우영을 살폈다. 우영은 ‘조심 좀 해라. 심장 떨어지겠다.’를 중얼거리는 승진을 말없이 응시하다 중얼거렸다.
“울었냐?”
“……뭐?”
“울었다던데.”
“미, 미친! 내가 애냐? 고작 이런 일로 울게.”
“…….”
“안 울었어, 이 자식아! 인마, 그리고 너 조심해. 대한민국 검사 자리,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멍청하게 살인자 새끼한테 얼굴 들이미는 띨빵한 검사가 어디 있어? 하여간 신우영, 이 자식은 조심할 줄 몰…… 헙!”
붉은 입술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우영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승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기다란 손에 뒤통수를 잡혀 버린 승진이 우영에게로 몸을 쏟았다. 목 부분이 뻐근했지만, 우영은 제 입술에 닿은 승진의 입술을 핥으며 깊게 빨아 당겼다.
“컥컥. 이, 이 자식이 갑자기…….”
“백가.”
“왜!”
“하자.”
“어?”
“대줄게.”
“뭐?”
귀 따갑군.
우영은 ‘너 이 새끼, 제정신이냐!’ 하고 소리치는 승진의 입술을 잘근 깨문 뒤 서서히 떨어져 나와 어깨를 으쓱였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
“문 잠긴 병원의 VIP실 침대 위에서 한판이라.”
“…….”
“나쁘지 않군.”
말랑한 혀끝으로 도톰한 입술을 슥, 훑던 우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본 승진이 ‘제길!’ 하고 이를 악물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우영은 어떻게 할래? 라는 표정을 지으며 승진을 응시했다. 빨갛게 물든 얼굴로 깊은 고뇌를 대놓고 표현하던 승진이 ‘망할!’ 하고 한 번 더 크게 소리를 지르더니 잠시 떼었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너 이 새끼, 나 시험한 거지?”
……뭐?
“내가 아무리 안하무인이라지만, 때와 장소는 구분할 줄 안다.”
“백승진?”
“안 해! 양심이 있지, 죽다 살아난 녀석을 회복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안아?”
승진은 끝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네 녀석이 환자복 입은 건 꽤 꼴리긴 하다만…… 으으, 젠장! 됐어! 안 해! 제기랄. 이 새끼가 하필이면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네! 빌어먹을!”
……하?
우영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내지르는 승진을 황당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러다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우영아.]
여동생을 데리러 가기 전, 어머니께서 병실 입구에서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안고 싶어 미치겠네!’를 외치고 있는 승진을 쳐다보던 우영 역시 입을 열었다.
“백승진.”
[예?]
“왜!”
[승진 군 말이다.]
“너 말이야.”
[내 며느리니, 아니면 사위니?]
“우리 어머니가…… 며느리 삼고 싶다더라.”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사위보다는 며느리가 적절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