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법연수원
푸르른 봄의 계절, 3월이 밝았다.
‘더워.’
승진은 여름 못지않게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태양을 흘긋거리며 인상을 썼다. 아직 겨울의 기운이 가시질 않고 있건만 두툼하게 껴입은 외투가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도 그렇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외투를 벗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선글라스를 끼고 올 걸 그랬나?
기다란 손끝 사이로 비단결처럼 흘러내리는 갈색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승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하기 시작했다.
승진은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
“긴장되니?”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사법연수원으로 향하는 길.
괜찮다는데도 굳이 저를 데리러 온 어머니가 손을 꼭 잡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제야 승진은 스윽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빙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 한채영 여사가 묘한 눈길을 보내는 것이 보였다. 승진은 퉁명스레 입술을 삐죽였다.
“긴장은 무슨. 남들 다 하는 건데.”
“하긴, 딱히 긴장할 건 없지. 그래 봤자 입소식일 뿐인데. 그치?”
“…….”
“엄마도 겪었고, 아버지도, 할아버지랑 할머니도 겪었던 일이야. 그러니 우리 아들은 더욱 잘하겠지. 안 그래?”
빙긋 올라가는 그녀의 입꼬리엔 미소가 가득했다.
승진은 무뚝뚝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응시하다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은 불편하다.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 보려고 애썼지만, 그나마 흥미를 가지게 된 쪽이 이 계통이었던지라 결국 연수원까지 입소해 버렸다.
남들보다 비상한 머리를 가졌던 그는 대학 2학년 재학 도중 사법고시에 패스했고, 이어 행정고시며 외무고시까지 섭렵하며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렇게 사법연수원 입소식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진짜 덥네.’
승진은 괜스레 갑갑해지는 목의 통증을 느끼며 넥타이를 풀기 위해 손을 가져다 댔다.
“신우영이라.”
두근!
입소식 시작은 10시부터였지만 연수생들이 집합해야 할 시간은 그보다 30분이 빠른 9시 30분이었다. 연수원 대강당에 모여 미리 예행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시각, 오전 9시 10분.
호수 공원을 뒤에 둔 사법연수원의 커다란 건물이 조금씩 시야로 들어오고 있었다.
드르륵, 바람이라도 쐴까 싶어 차창을 내리던 승진은 곁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이름에 반사적으로 반응해 버렸다. 값비싼 장신구와 옷 등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마친 한 여사가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순간 목구멍 사이로 침을 꿀꺽 삼킨 승진은 긴장한 기색으로 그녀를 흘긋거렸다.
한 여사가 고요한 눈으로 신문을 들여다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귀에 익은 이름이야.”
승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희 대학 수석 졸업생이랑 같은 이름 아니니?”
가슴이 뜨끔거렸다.
“사시 성적은 네 다음으로 두 번째…….”
“흠흠.”
“고등학교도…… 같네?”
눈길을 돌리려던 승진은 결국 포기하고 한 여사를 응시했다. 서울의 사립대학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한 여사의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한 여사가 긴장한 승진을 보며 싱긋 웃었다.
“우리 아들이랑 인연이 깊은 청년이구나?”
떠보기라도 하려는 걸까.
승진은 묘한 눈웃음을 짓는 한 여사의 말에 그녀를 흘긋거리다 곧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법연수원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교차로에서 신호에 걸려 멈추어 선 차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심장은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쿵쾅대고 있었다.
승진은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백승진.]
나른한 오후.
해가 뜰 때까지 이어지던 진한 정사로 인해 벌거벗은 채로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승진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영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아래에서 숨을 헐떡이던 우영이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자 숨이 막혀 왔다.
지독하게 섹시하군.
저와 비슷한 체격의 사내에게 또다시 마음이 동한 승진은 붉은 입술을 할짝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승진을 말없이 내려다보던 우영의 입술이 열렸다.
[연수원에서는 아는 척하지 말자.]
[……뭐?]
갓 잠에서 깨어났던지라 모든 것이 흐릿해져 손등으로 눈을 비비던 승진은 하암, 하품을 뱉어 내며 시야로 신경을 집중시키다 그만 굳어 버렸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내 같은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던 우영이 뱉어 낸 말이라고는 쉽게 믿어지지 않아 승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게 좋겠다.]
[어이.]
[대신 한동안 네게 깔려 줄게. 입소 동안은, 아니 2년 내내는 너무 기니 몇 개월 정도는.]
[……!]
[빈말 아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하던 우영의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설마하니 신우영이 먼저 백기를 들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승진은 얼떨결에 승낙하고야 말았다.
뭐, 내가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어차피 대학 초반에도 우영과 아는 척하지 않고 지내지 않았던가.
승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두운 얼굴로 말하던 우영의 표정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 모습마저도 이상하게 심장을 자극해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젠장.
고작 회상에도 사타구니가 뻐근하군.
“친하니?”
한 여사도 곁에 있는데 발정이 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이를 세게 악물던 승진은 곁에서 들려오는 말에 그녀를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잠시 한눈을 파는 바람에 신경질적으로 그녀에게 대꾸해 버린 승진의 말에도 한 여사의 미소는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철의 여왕이라 불리며 대학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부터 드러난다고 승진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살짝 어깨를 으쓱인 승진은 ‘신우영이라는 녀석이랑 친하냐고 물었어.’라고 하는 한 여사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친하기는…… 무슨.”
느릿하게 입술을 삐죽이는 승진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였다.
“원수야, 그 녀석은.”
* * *
“큭!”
다리 사이로 묵직한 것이 밀려들어 간다.
비좁은 공간을 침범하는 낯선 기둥으로 인해 벽에 팔을 대고 있던 우영이 깊은 신음을 흘렸다. 승진은 그런 우영의 턱에 손을 가져다 댄 뒤 살짝 뒤로 돌렸다.
“읍!”
벌어진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자 진한 숨결이 입 안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우영의 짧은 신음이 들려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달아. 기다란 혀로 붉은 입술을 쓸고, 입 안 곳곳을 훑고 나오자 허리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승진은 결국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더 흔들었다.
“젠장. 백승…… 윽.”
곱상한 얼굴에서 튀어나올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험한 욕설들이 우영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그 괴리감이 왠지 모르게 희열을 주어서 더욱더 정복욕이 차오른다.
승진은 막을 수 없는 갈증을 애써 눌러 가며 몸에 반동을 주는 데 집중했다.
퍽! 퍽!
살과 살이 만나 발생하는 질척한 소리가 좁은 공간에 가득 찼다. 은밀하게 접선을 하자마자 바지를 내리게 된 우영은 온갖 인상을 다 쓴 채로 벽에 몸을 기댄 채 안으로 깊게 들어오는 승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적당히…… 하아, 적당히 해. 네 녀석, 조금 이따가 대표로 선서해야…… 큽!”
송골송골 이마에 맺히던 우영의 땀방울이 차가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후드득, 떨어지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조금 더, 조금 더―를 연발하던 승진은 뒤이어 들려오는 우영의 음산한 쇳소리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우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이쯤에서 그만둘까?”
손목에 찬 시계는 어느덧 9시 2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집합 시간은 30분.
대강당이 있는 곳까지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옷을 입고 나간다면 충분히 다른 연수원 동기들과 합류할 수 있겠지.
입꼬리를 올리며 묻는 승진의 굵은 음성에 두 눈을 떨던 우영은 승진과 마찬가지로 졸업 선물로 받은 시계를 힐끔 내려다보더니 다시금 욕설을 흘렸다.
“적당히…… 하랬지, 누가 끊으랬나?”
……!
찌릿한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승진은 벽을 짚고 있던 손으로 제 턱을 잡더니 얼굴을 끌어당겨 진한 키스를 하고 떨어져 나가는 우영을 바라봤다.
“1분 안에 끝내.”
서늘한 우영의 음성이 귓가를 울린다.
콜이다.
승진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크으윽, 하아, 읍!”
비좁고 어두컴컴한 공간이었지만 우영의 깊은 신음과 자신의 진한 숨결이 섞여 점점 하나가 되어 갔다. 스릴 넘치는 감각에 승진은 더욱더 중독되기 시작했다.
“어머니? 너희 어머니도…… 오셨어?”
눈을 크게 뜬 우영의 얼굴이 어쩐지 심상찮다.
인상을 쓰며 신음까지 흘리는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입소식인데. 여사님이 안 오시면 누가 오시나.”
“뭐…… 그건 그렇군. 그나저나 어머님께서 화 안 내셨나?”
“화?”
“졸업 말이다. 당연히 수석이어야 할 아들이 차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드셨을 텐데.”
약 올리는 거지?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우영을 보던 승진이 미간을 좁혔다.
그래, 솔직히 말해 사시 준비 이후 우영의 몸에 홀려 공부를 소홀히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우영보다 조금 낮은 학점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수석이 아닌 차석으로 밀려났다.
매번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승진이 차석이 되었다는 건 한 여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승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우영에게 응수해 주려다 말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가끔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는 거지.”
“그러다가 다리가 부러져서 다시 올라가지 못하는 거고.”
“뭐?”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야, 예를 들면.”
빙긋 웃으며 앞서 나가는 우영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대학 졸업은 차석이었지만, 사법고시 성적은 자신이 훨씬 좋다는 것을 이 자식은 망각하고 있는 건가? 승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우영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품에 안겼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발걸음이 신경 쓰였다.
“백승진.”
승진은 대강당의 문을 코앞에 두고 서 있던 우영이 성큼성큼 움직이다 돌연 뒤를 돌아보자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우영이 문을 잡으려던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승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영의 얼굴이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아마 저 문을 열고 대강당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한동안은 저 녀석과 몸을 섞을 수 없을 거다. 우영이 입소 이후 한동안 제 아래 깔려 주겠다고 선언하기는 했지만, 그 선언이 무색할 만큼 바빠질 테니까.
해서, 마지막 만찬이라도 즐기자는 생각에 조금 전의 일을 벌였던 터라 아직 그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승진은 우영의 목에 언뜻 보이는 붉은 반점을 빤히 직시하고 그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무슨…… 아.
그 말이 곧 연수원 내에서는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떠올린 승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이 옅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나 들어가고 조금 이따 들어와.”
끼익― 힘차게 문을 연 우영이 대강당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승진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근두근.
멈출 줄 모르고 뛰는 가슴 소리가 귀를 울린다.
하아, 깊은 숨결을 입 밖으로 흘리며 잠시 호흡을 고르던 승진 역시 닫혀 있는 대강당의 문을 세게 밀며 발걸음을 옮겨 갔다.
* * *
“이번 차석이 저 녀석이지?”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곧 있을 선서를 위해 가장 앞쪽으로 걸어가던 와중 누군가 뱉어 낸 말이었다.
쑥덕거리던 누군가가 우영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중얼거리자 승진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고 걸음을 멈추었다.
“재학 중에 합격했나 봐?”
“그런가 본데.”
“좋을 때군.”
“아직 팔팔할 때지.”
“부럽네.”
“부럽지.”
세월을 직격으로 맞은 사람들처럼 소곤소곤, 작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역시 이번 사법고시에 합격한 동기들.
검은 두 눈을 흘긋거리던 승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살 만도 하군.’
그 힘들다던 사법고시를 대학 2학년 때 패스해 버렸으니.
승진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기들을 힐끔 쳐다보다 다시금 앞으로 걸어갔다.
“선서. 본인은 사법연수원 연수생으로 임명됨에 있어, 그 본분이 훌륭한 법조인으로서의 인격과 능력을 기르는 데 있음을 명심하여, 법령을 준수하고 성실한 자세로 수습에 힘쓰며, 연수생으로서의 명예와 품위를 지킬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꼿꼿한 등을 세우고 천 명이나 되는 연수원생들을 대표하여 선서문을 읽었다.
[졸업 말이다. 당연히 수석이어야 할 아들이 차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드셨을 텐데.]
사법고시 결과마저 승진이 앞선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 우영은 무슨 생각에선지 대학 학점 관리에 열을 올렸다. 쉬엄쉬엄, 그저 느긋하게 일상을 즐기던 승진과 달리 우영은 꽤 진지했다.
밤마다 집으로 찾아오는 저를 거부하지도 않고 받아들이며 밤잠을 설쳤을 텐데도 불구하고 눈을 뜬 시간엔 연필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찌나 심각한지.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승진이 미간을 좁히며 자극을 해 보아도 공부 시간에는 방해 말라는 핀잔만 들어야 했다.
가끔 코피까지 쏟아 가며 공부하는 그를 보며 약간의 자극을 받기는 했지만 비교적 여유롭게 공부를 했던 자신과 달리 우영은 대학 졸업을 위해 사력을 다 쏟았다.
결과는, 한 여사가 은근한 질투를 쏟아 낼 수석 졸업.
“수석 녀석 얘기도 들었어?”
승진의 대표 선서 이후, 사법연수원을 맡고 있는 이형렬 연수원장의 식사가 이어졌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이 연수원장의 음성에 왠지 나른해짐을 느끼며 하품을 하려는 걸 겨우 참고 있을 때였다. 승진은 잠깐 소란스러워지는 틈을 타 어느새 제 뒤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두 남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백태운 피앤케이 대표 아들이라던데.”
“그 녀석은 몇 살인데?”
“듣기로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다더군. 참, 수석이랑 차석이 같은 대학, 같은 과라더라.”
“둘이 친하겠네?”
조금 전 선서를 한 자신이 코앞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쉴 새 없이 떠드는 동기들은 아무래도 선서 도중 졸았던 것이 틀림없다. 귀가 따가운 느낌에 승진은 괜스레 귀를 후비적거렸다.
소문은 발 없이 가는 법이군.
아무래도 합격자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다 보니 가정사도 함께 밝혀졌다.
잘나가는 부모님을 둬서 그런지 원하지 않아도 호사가들 사이에서 오르내린다며 인상을 쓰던 그는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에 다시 신경을 써야만 했다.
과연, 나와 신우영 사이는 세간에 어떻다고 알려져 있을까.
“그건 또 아니라더라. 어릴 적부터 라이벌 관계라서, 사이가 꽤 안 좋다고 하더군.”
이런.
내심 기대했던 답변이 아니라서, 승진은 쓰게 웃어 버렸다.
* * *
[너희 둘, 정말 신기해. 같은 고등학교에 같은 대학, 같은 과까지 나왔는데 끝까지 안 친해지네?]
졸업식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밤새 이어졌던 우영과의 정사로 인해 다크서클이 눈 밑까지 내려왔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뜨며 도서관으로 터벅터벅 향하던 승진은 같은 과 동기인 예주와 함께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우영을 발견했다.
이른 새벽 눈을 떴을 때 침대에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예주와 같이 스터디를 하기 위해서였냐고 우영을 말없이 노려보고 있자, 예주가 싱긋 웃으며 승진에게 같이 점심을 먹자고 제안해 왔다.
우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지만, 승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그리고 밥을 먹던 도중, 나란히 앉아 묵묵히 수저를 움직이고 있는 두 남자를 향해 예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풉!’ 하고, 입에 든 밥알을 예주에게 쏟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 낸 우영과 달리 승진은 태연자약하게 반찬을 꼭꼭 씹으며 예주에게 대답했다.
[우리 친해.]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아주 친하다 못해 몸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지.
그다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은 웬일인지 안절부절못하는 우영 때문이었다.
예주는 밥을 숟가락으로 뜨며 말하는 승진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친하기는 무슨. 너희 둘, 앙숙이라고 우리 과, 아니 학교 전체에 유명해. 영원한 라이벌, 백승진과 신우영!]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꺄르륵 웃으며 말하는 예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얘는 대체 왜 신우영 옆에 붙어 있는 거야.
이미 오래전 우영에게 차였다는 이야기를 그에게서 들은 것 같은데 대학 재학 4년 내도록 우영의 곁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인상을 쓰려고 하자 우영이 은밀하게 손을 뻗어 승진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홱, 그를 노려보니 그러지 말라는 듯 살짝 고개를 내젓는 우영이 보였다. 승진은 입을 씰룩거리며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런 소문이 났나 봐?]
[어머! 우영이 넌 몰랐어?]
[전혀. 백승진이랑 나, 이야기는 하고 지내는데 말이야. 함께 미팅도 하지 않았었나?]
여전히 남들 앞에선 상냥한 젠틀남 코스프레를 이어 가던 우영이 빙긋 웃으며 예주에게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은 예주는 더욱 큰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가 2학년 때 했던 그 미팅?]
승진은 미친 듯이 배를 잡는 예주를 못마땅한 듯 노려보았다.
예주가 정신없이 웃음을 터뜨렸던 까닭은 시간이 조금 흘러간 뒤에 밝혀졌다.
[그 미팅에서 있었던 일, 엄청 유명해!]
[유명?]
[우영이 너, 승진이 골탕 먹이려고 승진이가 게이라고 했…… 앗! 이거 비, 비밀이랬는데.]
깔깔 웃으며 말하던 예주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승진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예주를 바라봤고, 우영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오간 뒤 우영이 예주를 데리고 사라지자 승진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쳇.
승진은 오징어젓갈 하나를 입 안으로 쏙 넣으며 인상을 썼다.
‘연인으로는…… 안 보이나?’
첫 키스를 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첫 관계를 맺은 것은 대학교 2학년.
‘사귀자.’라는 말을 나눈 적은 없지만 은연중에 서로를 ‘연인’이라 인식하고 있었기에 당연하게 생각했다.
주말을 제외한 오전엔 붙어 있던 적이 손에 꼽히지만, 오후에는 마트의 직원들이 형제냐고 오해할 만큼 철썩 붙어 다녔다.
그들에게 콘돔 케이스 바코드를 찍어 주었던 집 근처 편의점 여직원은 이미 두 사람 사이를 유추해 낸 것으로도 모자라 신형 콘돔이 들어오면 추천을 해 줄 만큼 친해졌다.
관계를 유지한 햇수는 총 5년.
갓 사귀기 시작한 파릇파릇한 연인도 아니고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성숙한 연인 사이로 봐도 무방하건만…… 어째선지 사람들은 그들을 ‘오랜 라이벌’, 혹은 ‘질긴 악연’ 정도로만 치부하는 것 같다.
‘몰래 하는 게 나름 스릴 있기는 하지만…….’
남들 앞에서도 그의 허리를 휘감아 제 곁으로 끌어당기고 싶은 욕구가 어쩐지 날이 가면 갈수록 짙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승진은 미간을 좁히며 작은 욕설을 흘렸다.
“나는 이만 가 봐야겠다.”
하는 일 없이 서 있기만 했던 터라 괜히 따분하게만 느껴지던 입소식이 끝났다.
앞으로 2년 동안 예비 법조인으로서 한 걸음 성장하게 될 연수생들이 그들의 가족과 점심 식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 행위까지 마친 뒤, 오후에 열릴 반별 모임과 조별 모임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들을 배웅하는 시간이 됐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승진은 선글라스를 끼며 불쑥 말하는 한 여사를 내려다보았다. 한 여사가 삐뚤어진 승진의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최 기사님한테 말해 놨어. 오후 스케줄까지 마치면 차 타고 본가에 잠시 들러. 할아버지가 저녁 같이하자고 하시더라.”
“호모 새끼는 꼴도 보기 싫다고 그 비싼 도자기 던지실 땐 언제고.”
승진이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리자 한 여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건 옛날 일이지. 요즘 네 할아버지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몰라. 아들에 이어 손주까지 한 번에 사시 패스했다고 아주 기분이 좋으셔. 모임에 나가면 네 얘기부터 하신다더라. 사시 수석이라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고, 동네방네 자랑하신대.”
“…….”
“할아버지한테 꼬리 내려. 예쁘게 보이면 혹시 아니? 나중에 로펌 하나 차려 주실지.”
씩 웃는 한 여사를 향해 승진은 조용히 대답했다.
“나 연수 생활 끝마쳐도 변호사는 안 할 거야.”
“어머, 돈 좋아하는 녀석이 의외네? 난 당연히 아버지 로펌에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널 위한 자리도 미리 만들어 놨어.’라고 속삭이는 한 여사의 말에 솔깃한 건 사실이었지만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돈도 좋기는 한데, 그보다 더 좋은 게 있어서.”
“더 좋은 거?”
“있어요.”
싱긋 웃는 승진의 모습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한 여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중에 보면 알겠지― 하고 낮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곧 우아하게 옷자락을 펄럭이며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승진은 저녁에 보자며 사라지는 한 여사에게 크게 손을 들어 올리다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 있네. 작년에 함께 가서 맞추었던 블랙 슈트를 입고선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우영의 모습이 보였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우영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만나 부드럽게 휘날리는 모습 역시, 시야로 들어왔다.
승진은 감상하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검사?]
최종 합격자 명단을 보고 난 승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옆에 다가와 털썩 드러누운 우영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의아해하는 승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우영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판사 쪽. 사실 요즘은 판사보다 검사 쪽에 더 눈길이 가는군.]
[흐음. 공판 쪽? 아니면, 수사?]
[수사. 아무래도 몸으로 부딪치는 일이 더 재미있지 않겠냐.]
[…….]
[왜, 백승진 너는 아니야?]
승진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우영을 보고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변호사나 개업하려고 했는데.]
[참, 그렇군. 너 돈 좋아하는 놈이지.]
[좋아하는 건 아니고, 많은 상태를 유지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 줘라.]
[그게 그거다.]
[……그런가.]
[검사랑 변호사라…… 뭐, 재미는 있겠군. 자주 부딪치겠는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진이 돌연 인상을 썼다.
[진로, 바꿔야겠어.]
[뭐?]
[나도 검사 해야겠다.]
[뭐야, 뜬금없이.]
황당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우영의 모습에 승진은 그의 머리카락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가져다 대던 승진이 야릇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사건, 내가 다 가로채 버리게.]
[뭐?]
[…….]
[너 씨발, 내가 또 욕을 해야 정신을 차릴 거냐? 말을 해도 재수 없게. 내가 사건 뺏기는 걸 가만두고 볼 것 같아?]
‘두고 보지 말라고 빼앗으려는 거지―’라는 대답을 하려다 말고 승진은 그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젠장, 하는 욕설이 귓가로 들어왔지만 승진은 개의치 않고 우영이 입고 있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우영은 그런 승진의 손을 뿌리치며 걸쭉한 욕을 뱉어 댔지만, 결국 포기했는지 아예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승진의 위로 올라탔다. 승진은 저를 집어삼킬 듯 내려다보는 우영을 빤히 직시했다. 우영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승진의 다문 입술을 살짝 쓸며 짧은 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렇게 도전하고 싶다면, 뭐 받아들여 준다.]
섹시하다.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우영의 눈빛은 섹시하다 못해 전율이 일 정도였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가슴에 닿을 때면 숨이 뜨거워진다.
회상 정도로 열기가 달아오를 지경이니.
승진은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에서 반응하려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고는 가족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우영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사진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군.
고등학교 졸업식 때는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곧바로 학교를 나섰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우영밖에 없었기에, 아니 그때의 우영은 제 ‘친구’라고 보기에는 애매했으므로 함께 사진을 찍을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얼마 전 열린 대학교 졸업식 때는 그나마 태혁과 사진을 한 번 찍었다. 그리고 저와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몇몇 여자 동기들과도 몇 컷 정도.
고등학교 때보다는 유순해진 성격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친구들이랑도 사진 좀 찍어.’라고 하는, 수많은 친구들을 소유한 우영의 충고 때문이었을까.
공식적으로 ‘안 친한’ 우영과는 사진 한 번 같이 찍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 걸렸다.
‘여기는 아는 사람도 많이 없으니까.’
그나마 저들에 대해서 아는 이들이 적은 이곳, 경기도 고양의 사법연수원에서의 한 컷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귀찮은 한 여사도 사라졌으니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승진은 연수생이 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우영에게 손을 들어 보이려 했다.
“저기, 신우…….”
“우영아!”
……?
마침 저와 눈을 마주친 우영이 두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소개를 해 줄 생각이었나.
승진은 우영이 향한 곳으로 함께 고개를 돌린 그의 가족들이 자신을 쳐다보자 괜히 쑥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더 힘껏 말을 뱉어 내려다 말았다. 갑자기 제 등 뒤에서 나타난 사람이 그를 밀치고 지나간 것으로도 모자라 비틀거리는 승진에게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우영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승진은 긴 머리를 한데로 묶은 ‘그녀’가 우영에게 직진하여 그를 세게 끌어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멈추었다.
“축하해! 오늘 정말 너무 멋있었어!”
* * *
그러고 보면 우영은 제 주변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우영의 주변은 항상 수많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타인을 유들유들하게 대하는 성격 때문인지, 넓은 교우 관계를 유지했다.
학창 시절 때도 느꼈던 거지만 승진은 그런 우영이 대단하기도 하고, 조금 짜증스럽기도 했다.
뭐하러 남들 눈까지 신경을 쓰는 건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말을 듣고 살던 저와는 다르게 빙긋 웃으며 사람들을 대하는 우영이 못마땅했다.
아마도 사람들이 저와 우영이 절대로 친해지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것은 완벽하게 극과 극을 달리는 두 남자의 성격 때문이 아닐까.
어째서 우리 두 사람이 친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없냐고 묻는 우영을 향해 승진은 그렇게 말해 주려다 말았다.
폭넓은 신우영의 주변 인물들.
남자들부터 시작해서 여자들까지.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끊이지 않는 인기를 유지하는 우영의 사람들이 거슬리기 시작한 것은 거의 반동거를 하고 살던 대학교 3학년 때부터였다.
친구도 좀 사귀라는 우영의 말마따나 태혁과 가끔 학식을 해결하기는 했으나 대학 교정에서의 승진은 거의 대부분 혼자였다.
불편한 건 없었다.
어차피 홀로 사는 인생, 그깟 학교에서 외로이 생활한다고 뭐가 불편하겠나.
멀끔한 얼굴을 하고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승진을 볼 때면 미간을 찌푸리곤 하던 우영이었지만 어차피 매일 밤 그를 침대 위에 눕히는 것은 승진이었으니 딱히 문제 될 건 없었다.
[무슨 소리야? 스터디라니?]
사법고시를 패스한 후 연수원까지 마친 뒤 군법무관으로 복무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승진과 우영은 여전히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승진과 함께 다니던 태혁, 그리고 우영과 다니던 재경은 3학년 1학기가 되자마자 입대를 했기에 승진의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우영의 주변에도 친하게 지내던 여자 동기들밖에 없었다.
매일 클럽에 가자고 졸라 대던 두 남자들이 사라졌으니 우영과 함께하는 기회가 더 많을 거라고 여겼던 승진과 달리 우영은 이상하게 바빴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신우영의 교우관계까지 터치할 생각은 없었기에 1학기를 참아 주었던 승진은 2학기 중간고사가 다가오기 직전 얼마 동안 만나기 힘들 거라는 말을 하는 우영을 노려보았다.
우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혼자 하기엔 벅차니까, 예주네랑 같이 준비하려고.]
그래도 비교적 여유롭던 법학과 1, 2학년 때와 달리 3학년 때는 모든 시험과 과제를 준비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어차피 사시만 패스하면 되지, 학과 생활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던 승진과 달리 우영은 모든 일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승진은 전공서를 펄럭이며 저를 바라보지도 않고 말하던 우영이 말 없는 자신을 스윽 올려다보는 모습을 발견했다. 또 화났냐는 시선에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그럼 너도 같이 하면 되겠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음에도 승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짐작하고 있다는 듯 우영이 툭 말을 던졌다. 승진은 서늘한 두 눈을 빛내며 그에게 말했다.
[나 정예주랑 안 친해.]
[이번 기회에 친해지는 것도 나쁘진 않아.]
[내가 굳이 왜 그래야 하지?]
[뭐?]
퉁명스레 대꾸하자 우영이 들고 있던 전공서를 무릎 위로 내려놓더니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짜증이 가득한 그 몸짓에 입술을 꽉 누르던 승진은 이내 벌떡 일어나는 우영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싫음 말든가.]
말을 마치자마자 외투를 챙겨 들고 승진의 집을 나선 우영은 그 후로 중간고사가 끝날 때까지 승진에게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다. 교정에서 예주를 비롯한 여학생들과 웃고 있는 우영을 보면 괜한 짜증이 치밀어 올라 승진은 획 몸을 돌려야만 했다.
물론 그의 끓어오르는 화는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제집으로 쳐들어와 ‘하자.’라는 말을 뱉어 낸 우영의 달콤한 발언으로 와르르 무너지기는 했지만.
남자들까지는 괜찮다.
신우영이 뜨거운 밤, 제 밑에 깔려 숨을 헐떡이는 신세이기는 하지만 그 말고 다른 남자들에게 눈길을 주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저와 대적할 남자들이 흔치 않다는 것은 승진에게 있어 확실한 이점을 안겨 주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엔 쑥스럽지만 승진은 저보다 잘난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대적할 존재가 우영, 정도랄까?
하지만 주변에 여자가 많다는 것은, 신경이 쓰인다.
‘이건 또 뭐야.’
출렁거리는 보드라운 가슴을 우영에게 밀착시키며 포니테일을 찰랑거리고 있는 여자의 엉덩이에 시선이 갔다.
완벽하게 힙업이 되어 있는 그녀의 엉덩이는 제가 봐도 꽤 예쁘다고 여겨질 정도다.
여자에겐 관심도 없는 승진이 보기에도 보기 좋은 몸매를 지닌 여자가 좋은 향기를 풍기며 우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희?”
갑작스러운 포옹에 눈을 크게 뜨던 우영이 활짝 웃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놀란 목소리를 흘리는 게 시야로 들어왔다. 내심 짜증을 냈으면 했지만 반가워 보이는 얼굴인지라 못마땅해졌다. 승진은 구겨진 얼굴을 좀처럼 펴지 못했다.
“어떻게 온 거야? 너 미국에 있지 않았어?”
“미래의 대법관이 될 소꿉친구가 사법연수생이 됐다는데, 놓칠 수는 없지! 재경이한테 소식 듣자마자 한국 왔어! 너 놀라게 해 주려고 아줌마한테 비밀 엄수 부탁했지.”
“그러셨어요, 어머니?”
“호호. 응. 재희가 좀 장난기가 많잖니.”
우영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부드럽게 미소를 짓자 우영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호호. 이곳저곳에서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한동안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승진은 곧 몸을 돌렸다.
그들 사이에, 자신이 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 * *
“그래, 우리 진이. 입소식은 어떻든?”
빙그레 미소 짓는 할아버지의 음성에 승진은 눈앞에 놓인 팔보채를 뒤적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잘한 주름이 가득한 그의 눈가에서 오늘따라 유독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승진은 기대에 찬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백인우 전 대법원장을 향해 심드렁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뭐, 특별할 거 있나요. 입소식이 그게 그거지.”
딱딱한 승진의 답변에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누나 미진이 콕 옆구리를 찔렀다. 승진이 찌릿, 눈을 부라리며 미진을 노려보았지만 미진은 말없이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백 전 대법원장은 퉁명스러운 승진의 답변에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진이가 아직 할애비한테 화가 많이 나 있나 보구나. 예전과는 다른걸.”
“화날 만도 하죠. 아버님이 진이한테 그 비싼 도자기를 던지셨지 않습니까.”
묵묵히 팔보채를 덜고 있던 승진의 아버지, 백태운 P&K 로펌 대표가 끼어들었다.
조용히 하라며 곁에 앉아 있던 한 여사가 주의를 줬지만 백 전 대법원장은 그런 아들의 반응에도 껄껄 웃을 뿐이었다.
“다치진 않았잖아?”
승진의 뛰어난 반사 신경 덕분에 비싼 도자기가 이마를 찧는 것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승진은 껄껄 웃는 백 전 대법원장의 태연자약한 대답에 헛웃음을 삼키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리 진이는 몇 반, 몇 조가 됐니?”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 강 여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승진은 눈앞에 놓인 물을 입 안으로 들이켜며 대답했다.
“3반 B조요.”
“지도 교수는 누구지?”
“학기마다 돌아가면서 하시는 것 같던데. 장은정 판사님이 맡으셨어요.”
“아, 장 판! 알지. 예전에 내 밑에 있었어.”
이때다 싶어 끼어든 백 전 대법원장의 말에 모두들 쓰게 웃었다.
승진은 ‘내가 장 판한테 전화 좀 걸까?’ 하고 은근슬쩍 물음을 던지는 할아버지를 보며 슬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든든한 백이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확실히 유리하기는 하지만 괜한 구설수에 오르내리기는 싫었다. 이번 가족 식사를 위해 밤늦게까지 열리는 반별 회식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한 자신을 묘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동기들의 표정에서 이미 그것이 힘들다는 것은 눈치챘지만.
“그런데 좀 의외긴 하네.”
“뭐가요?”
“난 우리 진이가 사시 수석은 물론이고, 대학까지 수석 졸업을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응?
“그런데 웬 듣도 보도 못 한 녀석이 대학을 수석 졸업했다니. 신우영이라는 놈이 대체 누구야?”
두근― 괜히 심장이 뛰었다.
무심코 몸을 움찔거릴 뻔했지만 승진은 가까스로 참아 냈다. 미진이 그런 자신을 묘한 눈길로 흘긋거리는 것이 보여서 더욱더 미간을 찌푸렸다.
조용히 단무지를 입 안으로 넣고 있던 한 여사가 백 전 대법원장의 중얼거림에 화답했다.
“승진이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청년이에요.”
“그 녀석이? 우리 진이랑?”
“예. 예전부터 승진이랑 라이벌이었는데, 지금까지 함께해 오고 있더라고요. 신기한 인연이죠?”
어쩐지 가시가 돋친 듯한 한 여사의 대답이 신경 쓰였다.
승진은 서늘하게 말을 뱉어 내곤 웃는 한 여사를 바라보다 입을 꾹 다물었다.
백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가족들의 눈동자가 흥미롭게 빛났다.
“호적수가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지. 우리 진이, 경쟁심이 아주 타오르겠구나. 허허허!”
껄껄 웃는 할아버지에게 ‘그 녀석, 눕히고 싶어 환장하겠어요―’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아 냈다.
그때 마침 울린 핸드폰의 진동이 승진을 이 갑갑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잠시 통화를 하고 오겠다며 자리를 피한 승진은 슬그머니 액정을 내려다봤다. ‘신가 놈’이라 적혀 있는 이름이 보인다. 굳어 있던 승진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어.”
-어디야? 회식 안 갔어?
고급 중식 레스토랑 복도에 있는 저와 달리 우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왁자지껄했다. 승진은 아직 그가 회식 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응.”
-그렇게 빠져도 되는 건가? 반별 회식엔 다들 필참 아니었어?
“뭐, 귀족의 특권이지.”
-지랄하네. 미친놈이.
질펀한 욕설이 흘러나오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짝 긴장하고 있던 VVIP룸을 벗어나니 조금 살 것 같다. 승진은 굳게 닫혀 있는 VVIP룸을 흘긋거리다 머리를 긁적였다.
“혼자 있나 보지?”
주변이 소란스럽기는 했으나 욕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승진이 묻자 ‘어, 지금은.’ 하고 대답하는 우영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고작 전화 한 번에 묘하게 안정을 되찾는 제 마음이 우습기 짝이 없다.
부글부글.
의식하지 않아서인지 더욱 끓기 시작하는 가슴의 혈기에 숨이 턱 막혔다.
현재 그가 입고 있을 옷을 마구잡이로 뜯어내 벗기고 싶어졌다. 승진은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아래로 당겼다. 느슨해진 넥타이 덕분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가족 모임?
“응.”
-그렇군. 알겠다.
뭐?
“자, 잠깐!”
이게 끝이야?
전화를 걸어온 우영이 반가웠다. 저도 모르게 입을 헤실거릴 만큼 즐거워져 끊기가 싫었는데, 그런 저와 달리 우영은 깔끔하게 전화를 끊어 버리려고 한다. 그러자 오히려 조급해진 것은 승진이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의아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승진은 어버버, 잠시 말을 더듬었다.
흠흠, 헛기침을 내쉰 승진이 숨을 고르고 속에 든 말을 뱉어 낸 건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언제 마칠 것 같은데?”
현재 시각, 오후 9시.
짐작컨대, 자신의 저녁 식사와 우영의 반별 회식은 곧 끝날 것이다.
어차피 연수원 근처에 집을 얻었기에 이곳 강남에서 고양까지 이제 슬슬 움직일 생각이었다. 승진은 가슴을 휘젓는 갈증을 느끼며 물었다.
우영이 그의 질문에 ‘아!’ 하고 낮은 탄성을 터뜨리더니 잠시 주저했다.
-보게?
“잠깐이라도.”
-무리일 것 같다.
“왜.”
-11시쯤에 친구랑 잠깐 만나기로 했거든.
친구?
“누구?”
-있어, 너 모르는.
“…….”
-저기, 미안하다. 나 전화 끊어야겠어. 교수님이 부르신다.
“…….”
-백승진?
“……알았어.”
승진은 ‘싱겁긴.’ 하고 피식 웃으며 ‘내일 보자.’라는 말까지 덧붙인 우영이 전화를 끊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어느새 대기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있어, 너 모르는.]
이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젠장.
승진은 거친 욕설을 작게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공개한 저와 달리 여전히 제게 비밀을 두고 있는 신우영.
대충 얼버무리는 신우영.
친구가 많은 신우영.
제게 올인하지 않는, 신우영.
‘드럽게 짜증 나네.’
승진은 하얀 대리석으로 된 벽을 발끝으로 세게 쳤다.
“윽!”
“뭐 해?”
언제 왔는지, 그런 승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미진이 신음을 흘리고 있는 승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승진은 구겨진 얼굴로 피식 웃고 있는 미진을 흘겨보다 입술을 삐죽였다.
“몰라도 돼.”
“너, 애인이랑 싸웠지?”
……!
문 앞에 서 있는 미진을 밀치려던 승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진은 씩 입꼬리를 올리며 흐응, 묘한 콧소리까지 뱉어 내더니 깔깔 웃었다.
“흐응. 사랑에 안달복달하는 백승진, 재미있네.”
“백미진.”
“그 무시무시한 눈빛은 뭐니? 설마, 이 누나가 그 정도도 눈치 못 챌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
“그나저나 궁금하네. 한번 데려와 보는 게 어때?”
누구를.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천하의 백승진을 가지고 노는 건지, 궁금하단 말이지.”
“너 진짜…….”
“할아버지가 빨리 들어오라셔. 아직도 하실 말씀이 남았나 봐.”
미진은 분노에 찬 기색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승진을 한참 동안 골려 주다 획 몸을 돌려 VVIP룸으로 들어갔다.
제기랄!
승진은 그런 미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 걸음을 옮겼다.
꼴에 질투라니.
‘백승진 자존심이 말이 아니군.’
* * *
[넌 나 같은 성인(聖人) 정도나 되니까 감당하는 거다.]
턱 끝을 타고 툭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잔뜩 흐트러진 숨결이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었건만, 그런 아찔한 상황에서 뱉어 낸 우영의 목소리가 깊게 와 박혔다.
승진은 뜨거운 우영의 안을 휘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우영의 눈꺼풀이 보여 더욱 달아올랐다.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저를 올려다보던 우영의 미간은 좁아져 있었다. 승진은 피식 웃으며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었다. 보드라운 촉감이 정신을 마비시켰다.
[하여간 키스는 드럽게 잘하는군.]
개자식.
낮게 들리는 욕설도 이젠 익숙해졌다.
남들 앞에서는 그렇게 성자처럼 굴더니, 제 앞에서는 걸쭉한 욕설을 쉬지 않고 흘린다.
만약 이 욕을 못 듣는 날이 오면 어쩌지.
승진은 짜증 섞인 말을 뱉어 내면서도 결코 저를 거부하지 않는 우영을 향해 더욱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영의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아 왔다.
[백승진.]
[왜.]
[넌 나 없으면 어떻게 살 거냐.]
침실 안이 후끈거릴 정도로 거친 섹스를 마친 뒤, 우영이 누워 있던 저를 스윽 쳐다보며 물었다. 노곤함이 찾아와 천장을 올려다보던 승진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글쎄, 어떻게 하지.
[너 같은 놈이 또 있을까.]
부드러운 인상 뒤에 거친 면모를 숨기고 있는 신우영 같은 놈은 확실히 드물었다. 완벽한 이중인격자. 승진은 옆으로 드러누우며 우영을 빤히 쳐다봤다. 우영이 씩 웃었다.
없지.
고개를 가로젓는 그의 말에 승진은 동의했다.
이 세상에 신우영 같은 사람은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승진의 신경을 자극하고, 자꾸만 눈이 가게 만들고, 가슴을 졸이게 하며, 안달복달 못해 미쳐 버리게 만드는 남자는 그 어디에도. 체격도, 신장도, 심지어 성적도 저와 비슷한 우영은 아마 두 번 다시 찾기 힘든 남자일 것이다.
승진은 냉소적인 미소를 흘리며 우영의 입술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손끝에, 우영이 흘리는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신우영.]
[……?]
[넌 왜 나랑…….]
만나는 거냐.
입 안에 맴돌던 그 말이 어쩐지 꽉 막힌 듯 나오지 않았다.
거의 반동거 상황에 이른 상태였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서로의 집이 있었다.
승진이 엄청나게 잘사는 편이기는 하지만 우영 역시 지지리도 가난한 것은 아니었기에 어느 날은 승진의 집에서, 또 어느 날은 우영의 집에서 잠자리에 드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말을 하다 말아?]
우영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다음 말을 뱉어 내지 못하는 승진을 쳐다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승진은 의아해하는 우영을 그저 말없이 응시하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뱉어 낼 수도 있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솔직하게.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우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으니까.
그때마다 승진은 쓰게 웃으며 속내를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승진을 볼 때마다 우영은 ‘싱거운 녀석.’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
몇 년 전, 본가에 자신의 성적 취향을 오픈해 버린 승진과 달리 우영은 자신과 승진이 깊은 관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편이었다.
[보는 눈이 있잖아.]
신중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는 사회적인 시선에 몹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 우영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대한민국 사회의 갇혀 있는 성격상, 자신의 성적 취향을 멋대로 오픈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그 탓에 마음 놓고 우영을 ‘제 것’이라 표현하지 못한다는 점이 짜증스러웠지만 그래도 묵인하고는 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을까. 승진은 간혹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들과의 교우 관계가 수월하지 못한 자신과 달리, 이성과 동성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 같은 우영의 모습을 보면 더더욱.
하루도 쉬지 않고 그에게 사랑을 퍼붓고, 제 것이라는 흔적을 남기고 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애가 타는 것은 저뿐만인 듯해 가끔은 화가 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고 하지 않았나?]
가끔 ‘넌 여자들이랑 너무 친해.’라는 치기 어린 말을 뱉어 내면 우영은 픽 웃으며 그렇게 대답하곤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갈증이 나던지. 아마도 빌어먹을 신우영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승진은 홀로 분노를 삭이곤 했다.
“확실히 어려서인지 팔팔하네.”
대한민국 예비 법조인들이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법연수원이라 할지라도 꽃피는 3월은 보통의 교육기관과 크게 차이가 없다.
엄연히 대한민국 ‘공무원’의 시험을 통과한 그들은 법을 배우는 ‘학생’으로서 연수원에서 열리는 모든 행사에 성실히 임해야 했다.
천 명이나 되는 연수생들이 예비 법조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지는 ‘입소식’부터 조별, 그리고 반별 회식은 꼬박꼬박 참석해야 했고, 이어지는 ‘체육대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장 어린 20대부터 30대, 심지어 40대 이상의 나이 많은 연수생들은 현재 셋째 주부터 열리는 체육대회를 위한 예선을 치르기 위해 운동장에 모여 있었다.
승진이 속해 있는 3반 연수생들 역시 오전부터 열리는 축구 대회의 예선을 관전하기 위해 집합해 있는 중이었는데, 마침 우영의 2반 연수생들과 예선을 치르고 있던 터라 승진의 눈에 공을 몰고 3반 골대 쪽으로 향하는 우영의 모습이 보였다.
‘팔팔?’
고등학생 시절부터 축구에는 발군의 실력을 자랑했던 우영은 현란한 페인팅 기술까지 사용하며 3반 수비수들을 제치고 있었다.
그런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40대 동기가 툭 말을 던졌다.
며칠 전 열렸던 예선전에서 발목을 접질려 부상을 당했던 승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백 동생.”
“예?”
“저 녀석, 백 동생이랑 같은 학교 나왔다며?”
아.
“어떤 녀석이야?”
같은 반으로도 모자라 저와 같은 조에 속해 있던 현석의 질문에 승진은 어느새 골을 넣고 자신의 반원들과 부둥켜안고 있는 우영을 흘긋거렸다.
“뭐…… 괜찮은 녀석이죠.”
“괜찮아?”
“예. 성격도 나쁘지 않고.”
제게는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흘리기는 하지만, 애정이 담긴 행동이니 크게 개의치는 않는다. 승진은 우영을 안은 채 떨어질 줄 모르는 몇몇 남자 연수생들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대답했다.
의대를 다니다 의학 전문 변호사를 꿈꾸며 사시에 도전했다는 현석이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이거 소문과는 다르네.”
승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자 현석이 싱긋 웃었다.
“이번 수석과 차석은, 둘도 없는 앙숙이라는 이야기가 있었거든.”
아.
“그런데 백 동생이 말하는 걸로 보아선 그리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네. 어쩐지 애정도 담긴 말투야.”
괜히 이과와 문과 모두를 점령한 머리가 아니다.
승진은 정곡을 쿡 찔러 버리는 현석의 웃음 섞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뻥―
“…….”
하프라인에서 다시 시작된 공차기는 아쉽게도 2반의 공격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승진은 우영을 비롯한 2반 선수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자신의 반 연수생들을 바라보다 인상을 썼다.
‘돌겠군.’
하필 발목을 다쳐 버려 예선을 뛸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짜증스럽게 만든다. 저 역시 우영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고 싶건만, 차오르는 갈증을 해소할 곳이 없어 더욱 온몸이 달아올랐다.
승진은 저와 현석 사이에 놓인 물통을 집어 들며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오늘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
* * *
<오늘 밤에 너희 집에 간다.>
기숙사 생활을 할까 잠시 고심하기도 했지만, 우영은 다행스럽게도 2인 1실은 싫다며 연수원 근처에 오피스텔을 구했다.
승진 역시 우영의 오피스텔 맞은편에 있는 고급 오피스텔을 구해서 야밤에 불이 켜진 우영의 집을 내려다보곤 했다.
오전엔 곧 있을 체육대회를 준비하고, 오후엔 각자의 조원들과 앞으로 있을 MT에 대한 토론을 하느라 연수원 내에서 얼굴을 마주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하필 반이 달랐기에 더더욱 그랬다.
연수원을 나서자마자 승진은 우영의 핸드폰에 문자를 보내곤 집으로 돌아갔다.
쏴아아―
뜨거운 물줄기가 온몸을 적신다. 곧 있을 뜨거운 밤을 위해 목욕재계를 하고 나온 승진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우영에게서 답장이 오지는 않았지만, 가끔 상대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도 보란 듯이 상대의 집에 들어가 있곤 했기에 답장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우영이 승진의 전자 도어록 비밀번호를 아는 것처럼 승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후우.”
갓 샤워를 하고 나와서인지 3월의 밤공기도 조금은 시리게 느껴졌다.
승진은 빨간불에서 도통 변할 생각을 하지 않는 신호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카운트를 하기 시작했다. 빨리 좀 바뀌어라. 쿵쿵, 요동치는 심장이 안정을 되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인지 숨이 가빠졌다.
<오늘?>
지이잉,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핸드폰이 울린 것은 드디어 초록불로 변한 신호등의 횡단보도를 따라 승진이 걸음을 옮기고 있던 시점이었다.
승진은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기다란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 지금.>
승진은 우영의 집이 있는 K 오피스텔 로비까지 다다라 있었다.
몇 번 승진이 그곳을 드나드는 모습을 확인한 경비원이 그에게 인사까지 하며 빙긋 웃음을 보내자 승진 역시 말없이 고개를 까딱이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마침 위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닫히려는 것을 목격한 승진은 얼른 엘리베이터를 잡기 위해 달려갔다.
“감사합니다.”
‘잠깐만요!’를 외치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외친 승진은 제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급히 ‘열림’ 버튼을 눌러 준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에게 고맙다고 묵례했다. 까딱, 고개를 아래위로 들었다 올리며 ‘천만에요.’라 대답하는 여자에게 흐리게 웃어 주려던 승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비단결처럼 늘어진 검정 머리카락을 예쁘게 한데로 묶은 여자의 볼에는 붉은 홍조가 가득했다. 승진은 유독 하얀 얼굴을 지닌 여자를 힐끔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기시감.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미묘한 감정에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7층 버튼을 누른 여자가 저를 바라보며 ‘몇 층 가세요?’라고 묻는 것을 지켜보았다.
낭랑한 음성 또한, 귀에 익었다.
“저기요?”
“…….”
“저기…….”
“저도 7층입니다.”
승진은 머리가 좋다. 우영처럼 미친 듯이 공부하지 않아도 항상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우영보다 덜 공부했음에도 사시를 패스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스마트한 DNA의 소유자였기에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았다.
책은 물론이거니와 사람의 얼굴이라고 다르지는 않다.
제가 느끼기에도 서늘한 음성을 흘리며 승진은 ‘아아’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의 미소를 눈에 담았다.
어디선가 한 번 본 얼굴.
도통 잊을 수가 없어 신경을 건드리는 그 얼굴이 누구인지 떠오른 것은 7층에 도착하자마자 지이잉 울려 댄 핸드폰 때문이었다.
<미안한데, 오늘은 무리다.>
빠직, 이마의 혈관이 끊어질 듯한 소리가 들리는 환청을 느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승진은 7층이 되자마자 저보다 한 발 앞서 걸어 나간 여자가 저를 흘긋거리는 것을 바라보다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영의 단호한 거절이 담겨 있는 멘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너희 집 앞이야.’라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키패드를 누르려던 승진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누군가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여자를 발견하곤 굳어 버렸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달칵 문이 열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살짝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남자가 보였다.
“와, 진짜 왔네?”
반가운 기색을 잃지 않으며 그가 여자를 향해 웃었다. 여자 역시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다고 했잖아. 들어가도 돼?”
“당연하지. 어서 들어와.”
조심스레 묻는 여자의 말에 남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문을 활짝 오픈했다.
끼이익, 벌어지는 문소리를 들으며 서 있던 승진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뭘 이렇게 싸 왔어?”
“아줌마가 가져가라고 하셔서.”
“어머니도 참. 어서 들어……!”
누가 보면 연인 사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살가운 대화들이 이어졌다. 우영은 젠틀한 미소를 흘리며 여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매너까지 선보였다.
여자는 그런 우영에게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무언가를 건네며 웃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이던 우영이 문을 닫기 직전 정면을 바라보다 승진의 눈과 마주친 건 순식간이었다.
“우영아? 안 들어오고 뭐 해?”
이미 현관에 발을 디딘 여자가 의아한 목소리를 뱉어 냈다.
우영의 당황한 눈동자가 보였다.
승진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여전히 문을 잡고 있는 우영 쪽으로 걸어갔다.
“우영아?”
여자가 재촉하듯 우영을 불렀다. 툭, 우영의 코앞까지 당도해선 멈추어 선 승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우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저와 여자가 서 있는 곳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내 문자, 못 봤어?”
승진은 짙은 미소로 화답했다.
“봤어.”
“봤는데 왜…….”
“들어간다.”
“……!”
승진은 우영을 밀치며 현관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잠깐!’ 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어?”
그가 발을 디디자마자 검정색 구두를 벗고 그것을 정리하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에 놀라 고개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쪽은…….”
엘리베이터에서 승진과 마주쳤던 것이 기억났는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여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승진은 유려한 미소를 지었다.
“또 뵙는군요.”
승진의 부드러운 음성이 익숙하지 않던 우영이 ‘제길’ 하고 숨을 흘리는 게 들려왔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자가 웃으며 말을 거는 승진에게 대답했다.
“우리 우영이랑 아는 사이셨어요?”
‘우리’ 우영.
뭐 이런 년이!
승진은 눈웃음을 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짙게 웃었다.
“예. 잘 아는 사이죠.”
그는 뒤를 돌아보며 이마를 매만지고 있는 우영을 흘긋거리다 다시 여자를 향해 씩 미소 지었다.
“신우영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로요.”
* * *
“우와, 신우영! 아줌마가 이번에 지갑 좀 여셨나 봐! 집 정말 좋은데?”
남자 혼자 살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이는 복층형 오피스텔.
깔끔한 우영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 집 안으로 발을 내디디며 여자가 상기된 음성을 흘렸다.
남들 다 사는 집인데 뭐 저리 호들갑이야.
긴 포니테일을 사정없이 휘저으며 집 안 곳곳을 돌아보고 있는 여자가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굳은 얼굴로 앞서 나가는 우영의 뒤를 따라 승진은 묵묵히 걸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갑자기 여자가 온다고 집 청소까지 해 둔 건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너무 뛰어다니지 마. 청소한 지 얼마 안 됐어.”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있는 승진을 본 탓인지 짧게 한숨을 내쉬던 우영은 작년, 승진이 우영에게 생일 선물로 사 준 값비싼 오디오 버튼을 꾹꾹 누르고 있는 여자를 향해 말했다.
청순한 외견과 다르게 장난기가 넘쳐흐르는 여자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볼 때마다 놀란다니까. 네가 청소라니. 코 찔찔 흘리며 방 어지르고 다녔던 꼬마가 청소를 하다니!”
“어이, 그때가 언젠데.”
“참, 아줌마가 아직 깍두기 안 익었다고 바로 냉장고에 넣지 말랬어!”
“그래?”
“하루 정도는 베란다에……. 아, 여기 두면 되겠다!”
피식 웃던 우영이 손에 든 종이 가방에서 반찬통을 꺼내 들자 소파에 앉으려고 자세를 취하던 여자가 쏜살같이 그에게 달려왔다.
그녀는 우영의 손에 들려 있던 붉은 반찬통을 그에게서 빼앗아 든 뒤, 멀뚱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승진을 지나 비교적 차가운 현관 바닥에 내려놓으며 배시시 웃었다.
‘뭐냐, 이거.’
승진은 그런 여자의 반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우영이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나 말고 다른 손님이 있었다는 걸 잊었네. 거기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으세요!”
……뭐?
“우영아, 커피!”
“어?”
“얼른!”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다 있나.
승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겨우 참아야 했다.
아직까지는 견딜 만했다. 그래, 이왕 견디는 거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참다가, 그때도 화가 난다면 신우영이고 뭐고 뒤집어엎어 주겠어.
어이없는 숨을 토해 내는 승진을 향해 손짓하던 여자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서 있는 우영에게 외쳤다.
이 집의 안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것은 당연했다.
“유재희예요.”
주저하던 우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싱크대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승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그녀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에 승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저…….”
“백승진. 손은 안 잡습니다. 결벽증이 있어서.”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며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던 승진이 스윽, 입꼬리를 올라가며 말하자 재희의 눈동자가 세차게 요동쳤다.
“결벽증?”
재희의 말대로 커피를 타고 있었던 모양인지 전기 포트에 물을 얹고 있던 우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승진은 개의치 않고 올라간 입가를 내리지 않았다. 재희는 아아, 하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리면서도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원래 잘생긴 남자들은 까탈스러운 법이잖아요? 승진 씨도 인물값을 하나 보네.”
승진은 웃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 다 됐나 보다. 가요, 승진 씨.”
왠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주는 시선 교환 도중, 우영이 ‘이리 와.’라고 두 남녀에게 말했다.
얼마 전 승진과 함께 갔던 마트에서 텔레비전 광고가 마음에 들었다며 집어 들었던 예의 믹스커피를 내어 줄 생각이었는지, 방 안 가득 커피 냄새가 진동했다.
승진은 차가운 시선으로 저보다 한 발 앞서 식탁 쪽으로 걸어가 사뿐히 착석하는 그녀를 지켜봤다.
우영은 재희에게 머그잔 하나를 건넨 뒤 승진에게도 그것을 건넸다.
“그런데 두 사람, 어떻게 알게 됐어요?”
호로록, 입 안으로 들어가는 믹스커피가 오늘따라 쓰다.
이상하군. 가끔 신우영이 타 주는 믹스커피를 먹어 본 적이 있었는데 이처럼 쓰게 느껴지진 않았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을 때, 호기심 넘치는 재희가 말을 걸어왔다.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는 승진과 달리 대답한 것은 우영이었다.
“고등학교 친구야.”
“아! 그래서 내가 몰랐구나.”
탄성을 흘리며 말하는 재희를 쳐다보자 우영이 설명하듯 승진에게 말해 주었다.
“재희는 내 소꿉친구고, 고등학교 때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었어.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었거든.”
“딱 하나 있는 재주죠.”
수줍게 웃는 재희와 우영이 시선을 교환했다.
‘또.’
또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승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재희는 재경이 쌍둥이 누나야.”
뭐?
“유재경? 그 유재경?”
“응.”
“우리 재경이를 아세요?”
알다마다. 우영과의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던 도중 우영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던 재경을 쏠쏠하게 써먹었었는데.
승진은 눈을 빛내는 재희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재희는 ‘같은 과 동깁니다.’라고 말하는 승진의 말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우영과 승진을 번갈아 응시하더니 말했다.
“두 사람 엄청난 인연이네요! 고등학교도, 대학도 같이 나와서 심지어 사법연수원 동기라니! 이런 질긴 인연이 다 있을까요?”
호호, 미소 짓는 여자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이곳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다.
승진은 그녀를 따라 함께 웃으려다 말았다. 입가에 경련이 일 것만 같다.
“밤늦게 우영이 집에까지 온 걸 보면 우리 우영이랑 엄청 친한가 봐요, 승진 씨.”
“네, 뭐.”
“그럼 그전에도 우영이네 집에 와 본 적 있겠네요?”
이사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나다―라고 답하려다 승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재희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빛은 도통 꺼질 줄 몰랐다.
“그럼 우영이 학창 시절에 대해서 좀 말해 주세요!”
그때였을까. 곧 시한폭탄이 터져 버릴 것 같은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승진과 우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가 한국을 좀 오래 떠나 있어서 우리 우영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재경이를 통해서 간간이 듣기만 했거든요. 그런데 재경이 녀석이 갑자기 군대에 가 버리고, 우영이는 제가 연락 안 하면 소식조차 없어서, 제가 곁에 없을 때 있었던 일들이 궁금해지더라고요.”
“아아.”
“우영이 고등학교 때는 어땠어요? 재경이도 같은 고등학교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고 하던데. 아줌…… 아니, 우영이 어머님 말씀으로는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했다고 하더라고요. 진짜예요?”
“유재희.”
난감한 기색으로 우영이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재희의 시선은 승진에게서 거둬지질 않았다. 승진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얼른요―라고 외치는 듯한 재희의 눈빛에 거북한 기운이 차올랐다.
승진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려울 게 있나요.”
그는 흠칫 놀라는 우영의 검정색 눈동자를 직시하다 재희에게로 시선을 꽂았다.
“대단한 녀석이었죠. 축구도 잘하고,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들한테 귀여움 많이 받고. 입술도…….”
보드라운.
“예?”
“멋진 녀석이었죠.”
승진은 그의 붉은 입술을 바라봤다. 우영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치는 것이 보였다. 재희는 ‘안 믿겨요!’ 하고 깔깔 웃었다.
“대학교 땐 어땠어요?”
무엇이 이리도 궁금할까.
아마도 이 여자는 신우영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승진은 검은 눈을 그녀에게 고정시키며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여자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을 직시하고 있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관찰하듯 그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승진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마찬가지죠. 여전히 축구를 잘하고, 인기가 많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결국 사시까지 패스한 엄친아.”
“우와! 코 찔찔이 신우영과는 거리가 머네.”
“유재희, 내가 거기서 졸업한 지가 언젠데! 대체 찔찔거렸다는 걸 왜 그리 강조하는 거야?”
“사실이면서 뭘.”
“너 진짜!”
……
“그런데 왜 아직 혼자야?”
틱틱 대화를 주고받으며 투닥거리는 것이 말로만 듣던 ‘소꿉친구’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든다.
심장이 차갑게 굳어 가는 걸 느끼며 두 남녀를 지켜보던 승진은 화제를 돌리는 재희의 말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우영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진다. 재희는 놀란 우영과 무표정한 승진을 번갈아 보다 이내 승진에게 웃으며 속삭였다.
“얘가 통 자기 연애사에 대해서는 얘기를 안 하니 말이죠.”
“재희야.”
“우리 우영이, 인기 많았다면서요. 승진 씨, 우영이 여자 친구 본 적 있으세요?”
“……!”
“아니, 얘가 여자 친구 사귀는 거 한 번이라도 목격한 적 있으세요? 없으시죠?”
깜짝 놀라 소리치는 우영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재희는 말을 이어 갔다. 당황하는 우영의 얼굴과 반대로 승진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눈은 웃고 있었으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결코 부드럽지 못했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우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승진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이 녀석이…… 혼자래요?”
“어머, 아니에요?”
승진의 질문에 오히려 놀란 것은 재희인 듯했다.
승진은 젠장, 하고 낮게 중얼거리는 우영의 말을 개의치 않으며 진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당연히 아니죠.”
“……예?”
“아직까지 혼자일 리가 있나. 저런 매력 덩어리를 채갈 사람이 없을 리가요.”
웃고 있던 재희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승진은 이번엔 재희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우영을 바라봤다.
“그렇지?”
우영은 대답 대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승진은 그런 그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한 번 더 물었다.
“너 만나는 사람, 있잖아. 아니야?”
두근두근.
부끄럽게도, 하필 지금 이 순간, 심장이 뛰었다.
젠장.
무심코 욕설을 입 밖으로 흘릴 뻔했다.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속은 타들어 갈 듯한 갈증을 느끼며 승진은 우영을 응시했다. 우영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 저기…….”
승진의 대답에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이 없던 재희가 뒤늦게 두 남자 사이에 끼어들려고 했지만, 왠지 살얼음판을 연상시키는 그들의 모습에 쉽게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두 남자의 검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
아마도 그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라고, 승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짧지만 결코 짧게는 느껴지지 않던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우영의 닫혀 있던 입술이 열렸다.
* * *
“만난 적 있으세요?”
1층을 향해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
왠지 거북해진 우영의 집을 공교롭게도 함께 나서게 된 두 남녀 중 먼저 입술을 연 것은 재희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엘리베이터의 전광판만 들여다보던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누굴 말입니까?”
“우영이 애인 말이에요.”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는 안내 멘트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의 문을 잡고 재희가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려 주던 승진은 그녀가 완벽하게 엘리베이터를 벗어나자 길쭉한 다리를 쭉쭉 뻗으며 보폭을 맞추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십니까?”
승진은 우영의 대답을 들은 직후부터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재희에게 웃음을 흘렸다. 재희는 분에 찬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씰룩거리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적어도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싶어서요.”
“흐음.”
“우영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사귀는 사람은 여태껏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아아.”
“그런 우영이가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지이잉.
“잠깐 실례 좀.”
“아, 네.”
오피스텔 로비를 울리는 구두 소리.
그녀와 함께 걸어가던 승진은 재킷 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을 내려다보던 승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
-30분 뒤, 너희 집.
“……뭐?”
-개새끼. 너 오늘 죽었어. 준비하고 기다려.
제 할 말만 뱉어 내고 뚝 끊어지는 전화를 황당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승진을 향해 재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예요?”
승진은 ‘있어요, 웬 미친놈.’이라고 대답해 준 뒤 재희를 위해 택시를 잡아 주고선 말했다.
“유재희 씨는 신우영한테 관심이 많으시군요.”
내내 궁금했던 일.
내둘러 말하지 않는 승진의 직설적인 화법에 택시로 올라타려던 재희가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문을 연 채 뒤를 돌아보고선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좋아했거든요.”
그럼 그렇지.
불길한 예감은 어쩐지 한 번도 빗나가질 않는다.
재희는 저를 향해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어 승진은 대꾸했다.
“이미 애인이 있는 녀석인데.”
“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지는 않죠.”
유려하게 미소 지으며 택시 좌석에 착석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승진이 말했다.
“하지만 골이라는 게, 아무나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네?”
“조심히 가십시오.”
승진의 답변에 눈을 크게 뜨던 재희가 탄 택시는 그가 쾅, 세게 문을 닫자마자 출발했다.
승진은 멀어져 가는 그녀의 택시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서 있었다.
멀어지는 택시의 뒷모습과 함께 당황하던 우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래, 있어. 아주 성격도 개판인 데다 완전 빌어먹기까지 한.]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빌어……먹다니? 그, 그런 사람이랑 왜 사귀는 거야?]
만나는 사람이 있지 않냐는 승진의 질문에 체념한 듯 중얼거리던 우영은 당황한 재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승진은 그런 우영의 붉은 입술이 열리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이유야 간단하지. 좋아하고 있으니까.]
* * *
딩동―
꾸욱, 버튼을 누르자 초인종이 울렸다.
멍하니 거실에 앉아 있던 승진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딩동, 딩동.
한 번 더 초인종이 들려오자 마력에 이끌리듯 승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 그는 차가운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일찍 왔네? 아직 30분 안 됐…… 웁!”
말을 하는 도중 입술을 덮어 버리는 뜨거운 감촉에 승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보드랍고 말캉한 그것이 입술을 살짝 쓸고 안으로 침범하자 숨이 막혔다. 승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으나, 결코 눈을 감지는 않았다.
하나하나, 전부. 미세한 솜털들까지 들여다보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는 승진의 시야로 강한 열망에 휩싸인 한 남자의 검은색 눈동자가 들어왔다.
우영이 이렇게 달아오른 이유.
아마도 그것은 ‘어떤 행동이’ 그를 자극한 것임이 분명하다.
승진은 피식 웃으며 제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쥔 채 바짝 끌어당기고 있는 우영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흐으.”
승진의 혀를 건드리며 세게 빨아 당기던 우영의 혀가 떨어져 나간 것은 두 사람이 공유하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샤워는?”
정신없이 입술을 물고 핥기를 반복하며 승진을 탐하던 우영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평정을 되찾았다. 우영이 뒤로 살짝 물러나자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던 승진은 쾅― 소리를 내며 닫히는 대문을 흘긋거렸다.
그러고 보니 문도 안 닫고 있었군.
보자마자 강제 키스를 당했던지라 문을 닫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누가 봤으면 난감했을 거라고 생각하던 승진의 귓가로 여전히 열기에 휩싸여 있는 우영의 쇳소리가 들려왔다. 머리카락이 바짝 말라 있는 저와 다르게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우영의 검정 머리카락을 응시했다.
“너희 집에 가기 전에, 이미.”
“그럼 됐어.”
“바로 할 거야?”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까지 온 이유는 하나뿐이다.”
질문하는 승진에게 피식 웃으며 오히려 되묻던 우영은 신고 있던 슬리퍼를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더니 획 뒤를 돌아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콘돔은?”
승진이 말없이 침대가 있는 침실 쪽을 가리키자 빙긋 휘어지던 우영의 눈가가 예쁘게 빛났다.
‘들떴네.’
승진은 성큼성큼 침실을 향해 걸어가는 우영의 뒤를 따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우영.”
“왜.”
“당분간은 금욕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 말에 우영이 인상을 썼다.
“그래서, 안 하고 싶은 건가?”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럼 닥치고 벗어.”
“……!”
“미치겠군. 발정난 개도 아니고, 뭐 하는 건지 진짜.”
자책하듯 혀를 차던 우영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과감하게 벗어 던졌다. 툭 떨어지는 그의 상의를 멍하니 바라보던 승진 또한 말없이 상의를 탈의했다. 그러자 각지고 탄탄해 보이는 가슴이 드러났다.
입고 있던 회색 트레이닝복 바지마저 벗어 던진 채 침대 위로 올라간 우영은 저보다 한발 늦은 승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리를 뱉어 냈다.
“백승진.”
“응.”
“아까 그건 대체 뭐야?”
“뭐.”
“우리 집에서 말이다.”
이미 커다랗고 폭신한 베개에 등을 갖다 붙인 우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승진을 직시하고 있었다. 느릿하게 바지를 내리려던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우영을 향했다. 우영이 피식 웃으며 짓궂게 중얼거렸다.
“질투한 건 아니겠지?”
발목까지 바지를 내린 승진이 순간 움찔거린 이유는 저를 올려다보며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이어 가던 웬 여자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재수 없네.’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른 이 시점에서 하필 그 여자의 얼굴이 떠오르다니.
예감이 좋지 않다.
승진은 생글생글 웃고 있는 우영을 한 번 흘끔거린 다음 묵묵히 바지를 벗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네가 오해한 거다.”
우영은 대답 없는 승진의 뚱한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승진은 짙어지는 우영의 미소를 보고도 모른 척했다.
“깔릴 거지?”
“재희는 거의 내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인 애라고. 너무 경계할 필요 없어.”
“네가 깔리는 거다.”
“솔직히 아까 너, 조금 귀여웠다. 질투라니. 그것도 백승진이.”
“…….”
“재희랑 더 붙어 있을 걸 그랬네. 그럼 더 질투했을지도 모르겠군.”
제길.
“어이! 할 거야, 말 거야?”
어느새 침대 위로 올라온 승진은 실실 웃으며 저를 직시하고 있는 우영을 향해 미간을 좁혔다. 우영은 올라간 입꼬리를 결코 내리지 않고선 승진을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갈증에 휩싸인 저와 다르게 한층 여유로워 보이는 우영의 눈동자가 맑게 요동치는 중이었다.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됐어. 안 해.”
싱긋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우영의 눈을 빤히 응시하던 승진은 미간을 좁히며 우영이 누워 있던 침대 옆에 몸을 돌려 누웠다. 우영은 돌변한 승진의 행동에 ‘왜!’를 외치며 승진을 내려다봤다. 승진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김빠졌어.”
“반응하는 분신이나 숨기고 그 말을 꺼냈다면 믿었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네놈이 선사한 키스가 무지하게 끝내줘서고.
목구멍을 간질이는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는 않는다.
승진은 두근두근, 뛰는 가슴의 박동 소리를 느끼며 드러누워 있었다. 우영이 눈을 깜빡이고 있는 승진의 허벅지를 커다란 손으로 매만지며 속삭였다.
“진짜, 안 해?”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다음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승진은 우영이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꼿꼿한 자세로 누워선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승진은 획 우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우영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승진의 눈과 마주하고는 빙긋 웃었다.
‘오늘따라 웃음이 헤프네.’
승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코 뱉어 내지는 않으며 말했다.
“신우영.”
“응.”
“아까 그 말, 다시 해 봐.”
“무슨 말.”
승진이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우영은 기억을 더듬다 ‘아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쿵쿵, 심장이 두근거렸다.
“해 주면? 네가 깔릴래?”
“미쳤어?”
“그럼 다시 해야 할 이유가 없군.”
우영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승진은 황당한 눈으로 우영을 쳐다봤다. 그러다 곧 머릿속을 휘젓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지는 않죠.]
얼굴이 찌푸려질 만큼 듣기 싫었던, 낭랑한 목소리.
잠시 생각을 했을 뿐인데 금세 험상궂은 표정을 짓게 되어서, 스스로도 당황스럽기만 했다.
확실히 축구의 세계에서 골키퍼가 있다고 골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골키퍼라도 모든 슈팅을 100%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정말 환상적인 각도로 휘어지는 슈팅이라면 골키퍼가 어쩔 줄 모르는 사이 골망을 흔들게 된다.
“너 진짜 안 할 거야?”
뒤늦게 한 방 먹이기는 했지만 자신하던 그녀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걸렸다.
승진은 인상을 쓰며 제게 물음을 던지는 우영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긴 숨을 뱉어 내며 속에 든 말을 한 자, 한 자 최선을 다해 뱉어 냈다.
“신우영.”
“왜.”
“난 너 사랑한다.”
사랑.
같이 있지 않으면 신경 쓰이고, 자꾸만 보고 싶고, 떨어지면 생각나고, 언제나 붙어 있고 싶은 이 빌어먹을 감정이 네가 내게 말했던 그 사랑이라면.
너를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진한 소유욕을 느끼게 만드는 이 감정이 네가 말한 사랑이라면 확실히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젠 도저히 신우영 없이 돌아가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드니까.
“그렇게 사랑하니까, 다음부턴 내가 깔려 주도록 하지.”
“……뭐?”
승진은 얼굴을 찌푸리는 우영에게 그렇게 말을 하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
왠지 모르지만, 눈을 뜨기가 버거워졌다.
제 말이 너무 난데없이 들렸는지, 옆에서 숨을 몰아쉬던 우영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두근두근, 가슴이 졸여 와 긴장이 된다. 씨발, 하고 저와 있을 때면 우영이 입에 달고 살던 욕설이 뒤늦게 들려온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면, 조금은 섭섭했을 테니까.
“윽!”
빼앗기기 싫다.
너는 내 것이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들을 내 아래에 두고 천천히, 그리고 영원토록 탐하고 싶다.
승진은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굴복하며 스르륵 눈을 떴다. 저를 집어삼킬 듯 응시하고 있던 우영이 어느새 서늘한 눈을 빛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짜 가만 안 둔다, 백승진.”
……뭐?
“오늘 너 잠은 다 잔 줄 알아.”
짙은 욕망을 표출한 우영은 낮게 으르렁거리며 누워 있는 승진의 앞섶으로 손을 옮겼다.
* * *
[그렇게 사랑하니까, 다음부턴 내가 깔려 주도록 하지.]
미쳤던 걸까.
미쳤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지껄인 거지?
병신 같은 백승진.
매일 깔고 있기에도 부족하기만 한데, 스스로 깔려 주겠다고 선언하다니.
정말 미친 거 아니냐.
“……동생.”
웽웽.
누군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백 동생! 내 말, 안 들려?”
승진은 미간을 좁혔다. 뭐야. 험악하게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그런 승진을 빙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3반 B조의 조장, 현석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보다 훨씬 더 까칠해 보이는 말투. 승진은 날이 서 있다는 것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으며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승진을 보면 대개의 사람들은 몸을 주춤거린다. 어린 시절부터 다져 놓은 벽이 한층 더 두꺼워진 느낌이다. 이렇게 차갑게 응시하면 제 발에 저려 뒤로 물러나겠지. 명백하게 축객령을 날리는 자신의 태도에는 무리가 없었다. 승진은 귀찮은 현석이 제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그러나 현석은 승진의 마음을 헤아려 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인지, 싱긋 웃음을 흘리며 마침 비어 있던 승진의 옆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그와 동시에 승진의 고운 미간이 처참하게 좁아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현석은 어디서 났는지 들고 있던 오징어 하나를 승진에게 내밀었다. 워낙 자연스러운 그의 행동에 얼떨결에 오징어 다리를 건네받은 승진이 뚱한 얼굴로 현석을 응시했다.
현석의 붉은 입술이 곧 열리기 시작했다.
“백 동생, 오늘 기분 안 좋아?”
누군가에게 제 마음을 들키는 기분은 가히 좋지 않다. 승진은 정곡을 콕 찔러 버리는 현석의 말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대답 없이 앉아 있는 승진을 흘긋거리며 빙그레 입꼬리를 올리던 현석이 말을 이었다.
“안 좋구나.”
“어떻게 알았습니까?”
“응?”
“기분이 안 좋다는 거, 어떻게 아셨냐고요.”
티가 난 건가.
쏘아붙일 생각은 없었으나 말투가 그렇게 들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물음이었다. 현석이 당황한 것은 아닐까, 하고 흠칫 놀라 그의 두 눈을 바라본 승진은 제 눈에 비친 현석이 꽤나 여유로워 보인다는 걸 깨닫고 오히려 당황했다. 현석은 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척하면 척이지. 바보도 알겠는걸? 백 동생 주위에서 엄청나게 싸한 오라가 풍기는데. 무슨 일이야? 연인이랑 다퉜어?”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야?”
“예.”
“정말?”
“예.”
“진짜?”
“…….”
젠장.
“잠깐, 화장실 좀.”
집요하게 물어 대는 현석의 질문에 이마의 혈관이 툭 튀어나올 것만 같다. 승진은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 강의 시작해!’ 하고 현석이 소리를 질렀지만 못 들은 척 강의실을 나섰다.
터벅터벅.
복도 끝에 위치한 화장실과의 거리는 빠르게 걸으면 초 단위로 끊을 수 있을 정도.
아직 형사재판실무 강의가 시작되기까지는 5분가량 남아 있었다.
빠르게 세수라도 할 생각에 화장실 안으로 들어선 승진은 남자 화장실에서 마주친 낯익은 얼굴에 석고상처럼 굳어 버렸다.
쏴아아.
손을 씻고 있었던 건지 세면대에 손을 내밀고 있던 그가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자신을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승진은 주저하다 입을 열려 했다.
“저기, 신…….”
그리고 그런 승진의 곁을, 우영은 말없이 스쳐 지나갔다.
* * *
오후 11시.
하늘을 밝히고 있던 태양은 달 뒤로 숨어 버리고, 은은한 달빛이 대신 세상을 밝히고 있는 시간.
누군가는 일찌감치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또 누군가는 내일을 기다리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왜 이렇게 꾸물거려.”
제 위에 올라타선 짜증을 흘리는 우영의 음성에 승진이 고개를 들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뱉으며 뚝뚝 땀을 흘리는 우영의 검은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이고 있었다.
젠장할.
쿵쿵, 심장이 뛰어 견딜 수가 없다. 승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인상을 썼다.
“그게―”
“왜, 매번 깔다 이제 깔리려니 겁나냐?”
혀를 차던 우영이 픽 웃으며 말하자 승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사랑 고백에 먼저 손을 들어 올린 것은 우영이 아닌 자신이니 물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승진은 욕망에 지배당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영을 향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도 조금은…… 긴장되네.”
“그게 보통이다. 그동안 나는 어땠겠어?”
흥, 콧방귀를 뀌는 우영을 보며 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승진의 계략에 넘어와 먼저 백기를 들어 버렸던 우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난 몇 년 동안, 우영의 엉덩이에 제 것을 박아 넣은 것은 승진이었다. 그랬기에 우영은 다시는 아래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눈을 부라린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신우영은, 지금 이 시간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거겠지.
‘감당……해야겠지.’
생각 이상으로 승진은 주도권 싸움에서 오래 승기를 잡고 있었고, 즐길 만큼 즐겼다. 그러니 이제는 한발 물러나는 것도 이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무섭군.’
우영이 얼마나 저를 안고 싶어 하는 건지 잘 알고 있어서 살결이 떨려 온다.
승진은 쉽게 내려가지 않는 제 브리프를 향해 손을 슥 뻗으려는 우영의 차가운 손끝을 느끼며 살짝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그의 위에 올라타 있던 우영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는 게 보였다.
빌어먹을.
고요하던 가슴이 미친 듯이 팔딱였다.
Rrrr. Rrrr.
11시 11분.
승진의 몸 구석구석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쓸며 자극하던 우영의 움직임이 멎은 것은 뜨거운 열기를 깨뜨려 버리는 딱딱한 벨 소리 때문이었다. 승진은 눈을 크게 떴다. 침대 바닥 밑에 던져두었던 재킷 속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였다.
우영은 흐트러지려는 승진의 정신을 붙잡기 위해 그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었다.
“신경 쓰지 마.”
부드럽지만 강렬한 우영의 음성이 귓가로 들어왔다. 승진은 침대 아래쪽으로 향하던 눈을 우영에게 고정시켰다. 승진의 다리를 들어 올리려던 우영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증이 느껴진다.
“집중하라고.”
“…….”
“이봐, 집중.”
몇 자 되지 않는 그의 음성이 귀에 콕콕 박혔다. 식어 가려던 열기가 다시 후끈거렸다. 승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입술을 핥고 떨어지는 우영의 턱 끝을 살짝 건드렸다. 우영이 피식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Rrrr. Rrrr.
그리고 다시 우영이 승진의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감추어져 있는 은밀한 곳으로 손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 소리가 들려온다. 예의가 없네. 오전도 아닌 오후 시간, 그것도 자정을 코앞에 둔 지금 전화를 걸어오는 예의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승진은 요란하게 울려 대는 자신의 핸드폰 벨 소리에 우영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발견했다.
“씨발.”
살얼음판 위를 걷던 분위기가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승진은 쳇, 입술을 삐죽이며 앞섶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어 낸 우영이 제 옆에 벌러덩 눕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뚫어져라 천장을 응시하는 그의 행동이 전화를 받으라고 지시하는 것 같아 승진은 쓰게 웃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인 승진이 길쭉한 팔을 뻗어 침대 밑을 더듬거렸다. 곧 그의 손끝에 딱딱한 핸드폰이 잡혔다.
‘어?’
지금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아닌데. 승진은 의아해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안한데, 나 지금 좀 바빠서. 내일 다시…….”
-나, 집 앞이야.
……뭐?
-문 좀 열어 줘. 불 켜진 거 다 봤어.
“누군데?”
우영은 대답 없이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승진을 흘긋거리며 물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음성이 심상찮아 잠시 머뭇거리던 승진이 작게 ‘백미진’ 하고 대답했다.
“뭐?”
승진의 둘째 누나인 미진에 대해서는 우영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백승진?
“……그래, 기다려.”
승진은 짧게 답한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섬주섬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는 승진을 흘긋거리던 우영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며 작게 중얼거렸다.
“타이밍 한번 더럽게 못 맞추네.”
뒤통수를 긁으며 입술을 삐죽이는 그에게 승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 일이지.
“대체 뭘 하길래 이렇게 반응이 늦어? 잤어?”
허겁지겁 옷을 갖춰 입고 달칵 현관문을 열자마자 미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승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자신을 지나친 미진이 자연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가자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무슨 일 있었어?”
다짜고짜 미진이 자신의 오피스텔로 쳐들어온 것을 보면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승진은 씩씩거리고 있는 미진을 따라 들어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
미진은 그런 승진의 말에 대꾸할 생각도 하지 않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우영과 눈이 마주쳤는지 감탄사를 터트렸다.
승진은 두 남녀가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색한 침묵을 먼저 깨뜨린 사람은 미진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우영이.”
“예, 누나. 그러네요.”
빙긋 웃으며 말하는 미진에게 우영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대꾸했다. 그리고 다시 TV 리모컨을 누르는 모습이 보통 때와는 달랐다.
만약 평소대로였다면, 우영은 남들 앞에서 보통 착용하곤 하는 웃는 가면을 쓴 채 미진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로서는 승진을 덮칠 기회를 망가뜨린 미진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승진은 왠지 냉랭하게 느껴지는 우영을 흘긋거리며 미진에게 다가갔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이냐니까?”
저도 모르게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뱉어 냈으나 미진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승진을 대해 왔던 그의 식구였으니까.
미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답변했다.
“엄마랑 좀 다퉜어. 당분간 집에 안 들어가려고. 나 며칠 동안 신세 좀 질게.”
“예?”
승진보다 먼저 놀란 것은 우영이었다.
느긋하게 채널을 돌리고 있던 우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기세로 미진을 바라봤다. 세 남녀의 시선이 거실 한가운데서 엇갈렸다.
“어째 우영이 네가 더 놀라네?”
미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묻자 우영이 순간 흠칫하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아, 그게……. 호, 호텔은?”
“비싸잖아. 여자 혼자 가기에는 좀 무섭기도 하고.”
“누나 의사 아니었습니까? 돈은 꽤 버는 걸로 아는데…….”
“호호, 얘도 참. 이제 겨우 레지가 됐는데 무슨 돈을 벌겠니?”
미소 짓는 미진의 말에 우영의 입이 씰룩인 것은 아마도 승진의 착각만은 아니었을 거다. 승진은 속으로 피식 웃어 버렸다.
“아!”
자신이 들고 온 작은 가방을 손에 쥐고 손님용 방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려던 미진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 우영과 승진을 바라보기 위해 등을 돌렸다. 두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묘한 웃음을 짓는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미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혹시 내가 신경 쓰이는 거라면,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응?
“나, 이 집 침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상관없으니까 너희 할 거 하라고.”
* * *
[말한 적 없어.]
승진은 굳은 얼굴로 우영에게 해명했다. 한동안 승진을 쳐다보던 우영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대답했다.
[그럼 대체 누나가 어떻게 우리 사이를 알고 있는 거지? 아마 너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말한 거겠지.]
[한 적 없다니까.]
[그런데 어떻게 알고 계시냐고!]
[그건…….]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까닭은, 입소식날 레스토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진은 당시 승진에게 애인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인이 우영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백승진, 우리 한동안 거리 좀 둬.]
입을 닫고 있는 승진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던 우영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승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간다.]
그렇게 주의를 줘도 승진이 항상 그들의 관계를 세상 밖에 드러내기를 원한다며 차갑게 눈을 빛내던 우영은 한번 닫은 귀를 잘 열려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서늘한 얼굴로 집 안을 나서는 우영을, 승진은 잡지 못했다.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제길!”
음성사서함으로 이어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승진이 욕설을 흘렸다.
사법연수원의 3월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천 명의 연수생들이 모여 각 반을 이루고, 그 사이에서 다시 조를 만들어 생활하게 된다. 그들은 거의 14~15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강의를 듣고 반별, 조별 모임을 갖는다.
본격적으로 연수를 받기 전, 연수생들 사이가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행사인 체육대회나 MT 등도 3월에 열리게 되므로 같은 반 내의 연수생들이 아니라면 자주 부딪치기도 힘들 정도였다.
단체 생활에 익숙하지 않고, 굳이 꼽으라면 꺼리는 편에 속했던 승진 역시 하는 수 없이 반과 조 활동에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에 요 며칠 동안은 우영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망할.
미간을 찌푸리던 승진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몇 통째인지 모르겠다.
연락 달라는 문자를 보내 보았지만, 답장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승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처럼 그의 마음 역시 거세게 일렁였다.
‘집에라도 찾아가야 하는 건가…….’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 동안 우영과 알고 지내 오면서 그와 다툰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생각보다 상황이 심상찮았다.
이렇게 답답함을 느낄 바에는 차라리 얼굴을 마주하는 편이 낫다 여기며 각오를 다진 그는 연수원 밖으로 나서기 위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올 때, 삼겹살 좀 사 와.>
그때였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미진이 눈치 없이 문자를 보내 왔다. 승진은 얼굴을 구기며 ‘네가 직접 사.’라는 답장을 보내기 위해 키패드를 두드리려 했다.
빠앙―!
연수원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승진은 크게 울려 퍼지는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
지난 사흘 동안, 그가 보낸 문자에 답장도 하지 않고 연수원에서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던 우영이 승진의 맞은편에 서 있었다. 승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리며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 했다.
“신우……!”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영의 앞에 빨간 경차가 멈춰 섰다.
* * *
Rrrr. Rrrr.
“어!”
-아들?
상기됐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잠결에 들었던 벨 소리에 놀라 손을 뻗었던 승진은 순간적으로 팔에 주었던 힘을 스르륵 풀며 미간을 좁혔다.
이제야 정신이 든다.
슬쩍 얼굴을 떼어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니 고대했던 글자가 아닌 ‘한 여사’라는 세 글자가 똑똑히 들어왔다. 그는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벽에 걸린 시계를 응시했다.
현재 시각, 새벽 6시 45분.
일찍도 전화를 거셨네.
낭랑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는 핸드폰으로 승진은 다시 귀를 기울였다.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그녀가 전화를 걸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한숨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말하자 한 여사가 기다렸다는 듯 답을 했다.
-거기 있지?
비밀로 하라는 소리는 없었으니까.
“네.”
-오늘은 집에 보내.
“무슨 일입니까? 왜 왔는지 통 말을 안 하던데.”
-시집가라고 했다고 반항하는 거지, 뭐.
……아.
-그것 때문에 한 소리 했더니 제 동생 따라 가출을 해 버리지 뭐야? 누가 누나 동생 아니랄까 봐. 참 나.
일부러 뱉어 내는 것이 분명한 한 여사의 답변에 가슴이 콕콕 찔려 왔지만 승진은 못 들은 척했다. 말 없는 승진의 태도에 픽 웃음을 흘린 한 여사가 말을 이어 갔다.
-엄마가 졌으니까 들어오라고 해. 괜히 바쁜 동생한테 폐 끼치지 말고.
이미 커다란 사고를 쳐 버린 후였다.
승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 내려다 말고 쓰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퇴근하면 누나 데리고 본가로 갈게요.”
-어머, 그럴래?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런데 아들.
“예?”
-목소리에 힘이 없다? 무슨 일, 있어?
흡,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승진은 급작스레 찾아온 두통에 미간을 좁혔다.
귀신은 피해 가도 한 여사는 못 피해 간다더니.
자신의 조그마한 변화도 놓치지 않는 그녀가 놀랍기만 했다.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차마 뱉어 내지 못하고 승진은 ‘별일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후 종료 버튼을 눌렀다.
심장이 거세게 일렁였다.
한 여사의 예기치 못한 모닝콜에 눈을 뜨게 된 승진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침실 안의 하얀 천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미확인 메시지 없음.
한참 동안 천장을 쳐다보다 손에 들린 핸드폰에 다시 눈을 돌린 그는 메시지함을 살펴보고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정말, 이런다 이거지.
이번엔 꽤 오래간다. 금방 풀릴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입술이 바짝 말라 들어가 인상을 쓰던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만히 내버려 둘 문제가 아니었다.
“어머, 일어났니?”
달칵 문을 열고 침실 밖으로 나가자 고소한 버터 향이 풍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좌우를 두리번거리니 부엌의 가스레인지 앞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미진이 보였다.
미진은 말없이 벽에 기대어 저를 쳐다보고 있는 승진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승진은 헤헤, 웃고 있는 미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미진은 성큼성큼 제게로 걸어오는 승진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삼겹살을 사 오라고 문자를 보낼 때의 당당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마도 집으로 들어오던 승진의 얼굴에서 찬바람이 솔솔 풍기다 못해 냉기가 흘러넘쳤기 때문에 제 발을 저렸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양심은 있나 보네.”
프라이팬 위에서 노릇노릇 구워지는 식빵을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승진은 식탁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신을 향해 있던 싸늘한 시선이 거두어지자 짧게 한숨을 흘린 미진은 준비해 두었던 우유 한 컵과 식빵, 그리고 잼 등을 그의 앞에 진열하며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승진은 여전히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식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기…….”
“아직 안 했어.”
“어?”
“물어보려고 했잖아. 화해했는지.”
한 입, 식빵을 크게 베어 먹던 승진의 말에 미진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떨렸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얼굴을 흘끔거리던 승진은 계속 식사를 이어 갔다. 미진은 와그작, 와그작 소리를 내며 빵을 뜯고 있는 동생을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승진아.”
“왜.”
“차라리 내가…….”
“됐어.”
“무슨 말 하려고 하는지 듣지도 않아?”
“뻔하지. 신우영한테 가서 해명하려는 거잖아.”
핵심을 찔러 버리는 승진의 대답에 미진이 입을 다물었다. 승진은 식빵의 마지막 한 조각을 완벽하게 입 안으로 집어넣은 다음 눈앞에 놓인 우유 잔으로 손을 뻗었다. 벌컥벌컥 우유를 마시는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어 미진의 눈동자 역시 같이 움직였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조리 흡입한 승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려다 말고 미진에게 경고했다.
“괜한 일 벌이지 말고, 오늘 집으로 돌아갈 준비해. 더 이상의 민폐는 사양한다.”
냉정한 승진의 음성에 미진은 뭔가 말하기 위해 입술을 열려다 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도가 심하다, 신우영. 벌써 나흘째야. 내 인내력 시험하는 거냐? 아님, 진짜 끝내자는 거냐?>
……젠장.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종료 버튼을 눌러야 했다.
더 애달아하는 쪽이 자신이라니.
이럴 때는 그 사실이 못 견딜 만큼 짜증스럽다.
승진은 미간을 좁히며 어느새 비어 버린 메시지란을 채우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연락 좀 줘.>
열 글자가 넘던 문자는 네 글자로 좁혀졌다. 승진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나흘째. 여전히 답장이 오지 않고 있었기에 속이 더 타들어 갈 지경이다.
승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화났어?”
“예?”
“내가, 백 동생을 데리고 와서 화난 거냐고.”
승진은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B조 조장 현석을 쳐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순간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연수원 앞 복사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망할. 밖에서는 티를 안 내려고 했는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승진은 얼른 고개를 내저어야만 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내가 백 동생 지목해서 그런 거, 정말 아냐?”
체육대회다, MT 준비다 뭐다 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초봄의 연수원 생활이지만 공부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노릇. 체육대회 예선전을 준비하고, MT에서 교수님들께 선보일 장기자랑 연습을 준비하면서도 결코 놓칠 수 없는 1학기 시험 준비를 지금부터 미리미리 시작하자는 데 3반 B조 연수생들은 모두 의견을 모았다.
대표로, 조장인 현석이 연수원 앞 복사집에서 판매하고 있는 판례 모음집들과 각자 준비한 판례들을 엮은 복사본을 가져오기로 했는데 시간을 내어 그와 함께 갈 보조로 승진을 뽑은 것이다.
승진은 말로는 미안한 척하면서도 생글생글 미소를 잃지 않고 있는 능글맞은 현석을 쳐다보다 피식 웃어 버렸다.
“정말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
획 몸을 돌린 현석이 한 걸음 더 앞서 나가선 A 복사집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아주머니! 저 왔어요!”
“오, 의사 학생! 어서 와.”
“전직 의대생이죠. 이젠 법조인입니다. 참! 제가 말씀드렸던 거, 준비 다 됐나요?”
“그러엄! 우리 의사 학생이 싹싹해서 내가 만사를 제쳐 두고 그것부터 했지.”
“하하. 감사합니다. 역시 아주머니뿐이에요! 제가 다음에 올 땐 커피라도 한 잔 사 올게요!”
“어머, 말이라도 고마워. 자, 확인해 볼래?”
“예! 백 동생, 잠깐만 기다려.”
복사집 아주머니와 엄청난 친분을 드러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린 현석의 뒤를 승진은 말없이 따랐다. 종이 냄새가 가득한 복사집 안에서 그는 제본된 책들을 확인하고 있는 현석을 쳐다보다 이어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총 몇 부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었죠?”
“24부요. 아, 여분이 필요할지도 모르니 30부 정도면 좋다고 하더라고요.”
“음, 그럼 제가 15부 들고 갈 테니 은석 씨가 나머지……!”
두근.
그렇게 보기 힘들던 우영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심장이 뜀박질한다. 승진은 정확하게 눈을 마주치자마자 쿵덕거리기 시작하는 가슴의 박동 소리를 느끼며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써 버렸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왜 이렇게 주체를 못 해.
쿵쿵.
커져 가는 심장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를 악물며 그를 바라보던 승진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곁에 있던 사람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는 우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승진은 주저하다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백 동생! 확인 다 했어. 여기, 이것 좀 들어 줄래?”
하필 그런 그를 부르는 현석의 목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승진은 저를 빤히 응시하고 있는 우영을 삼킬 듯 노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티를 내지 않기로 했으니까.
“예.”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것이 나흘 만이다.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개가 아니건만, 입 안에 맴도는 말을 뱉어 내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었다. 우영이 그리도 의식하는 ‘남들의 눈’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승진은 갈등 섞인 얼굴을 감추며 현석을 향해 다가갔다. 승진의 그 같은 행동을 우영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반응을 할 수는 없었다.
“무겁지?”
총 20명이 넘는 조원들의 제본을 반으로 나누어 승진에게 건넨 현석이 옅게 웃으며 물었다. 살짝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별거 아니라며 고개를 저은 그는 현석이 계산을 마칠 동안 우영을 흘긋거렸다.
“…….”
좁은 복사집 안. 만약 둘뿐이었다면 그의 굵은 손목을 세게 움켜쥐곤 벽으로 밀쳤을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우영의 셔츠를 거친 손놀림으로 세게 뜯어내어 단추를 뜯어 버렸을 것이고, 속을 읽을 수 없는 그의 마음을 알아낼 때까지 거침없이 농락해 갔겠지. 젠장할. 승진은 말라 버린 목구멍 사이로 침을 꿀꺽 삼키며 인상을 썼다.
“갈까?”
고민했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제멋대로 굴어 버릴까, 아니면 말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도 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네.”
결국 이겨 버린 것은 이성 쪽이었다.
* * *
지이잉, 핸드폰이 울린 것은 강의실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우영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옆에 있던 현석이 무어라 말을 하는지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나를 떠올리기도 힘드니 현석이 그만 말했으면 좋겠다고 홀로 생각하고 있을 때, 재킷 상의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은 그의 상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저기, 조장.”
강의실 책상 위에 책들을 올려 두고 핸드폰을 확인한 승진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승진은 B조의 일원들에게 복사한 책들을 나눠 줄 계획을 짜고 있는 현석을 내려다봤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현석의 검은 눈동자가 그에게 꽂혔다.
“응?”
“배분은 다른 사람한테 도와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현석을 내버려 두고 승진은 강의실을 벗어났다.
<미친 새끼. 문자, 드럽게 많이 보냈네. 집착 장난 아니야.>
방금 전 도착한 몇 개의 문자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먼저, 바로 답장하지 못했던 이유. 나, 폰 방금 건네받았어. 요 며칠 동안 나한테 없었거든. 그러니 네 문자 씹은 거, 의도 안 했다. 오해 마라.>
두근두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너랑 대화 안 하려 한 건, 그래, 조금 화가 나서. 인마, 솔직히 화나잖아. 누나는 대체 어떻게 안 거냐고. 누구랑 다르게 눈치도 드럽게 빠르시네.>
헉헉.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승진은 넓은 연수원 밖을 향해 달려갔다.
<하루 지나고 나니 논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는데, 말 걸기가 어렵더라. 솔직히 너도 나한테 말 안 걸었잖아. 제길. 내가 화낸다고, 지도 화내고. 우리는 이래서 문제야. 사내새끼들이 돼서 동시에 삐치면 어쩌자는 거냐? 이러고도 너랑 나, 논리적으로 살아야 하는 미래의 법조인이냐?>
호흡이 가빠진다.
정신없이 달리느라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으나 꾹 참아야 했다.
승진은 가까워지는 목적지를 발견하곤 더욱 힘을 냈다.
<나 아까 그 복사집 뒤편 건물 지하 계단에 있다. 10분 내로 튀어와.>
“하아, 하아.”
<늦으면…… 화해는 없다.>
“하아!”
숨이 막혔다.
문자가 온 지 정확히 9분째, 우영이 언급했던 건물 앞에 당도했다. 아직 영업 전의 펍이 위치해 있는 지하 1층의 계단.
승진은 그곳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우영을 발견했다.
“뛰어왔어?”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슥 돌린 우영이 픽 웃으며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승진은 헉헉, 여전히 호흡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내로 맞춰 오느라 숨을 돌릴 시간도 없었다.
우영은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승진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하게 10분 안이군. 어지간히 화해하고 싶었나 보다?”
가쁘게 숨을 고르고 있는 승진을 향해 우영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고 대답할 기운이 나진 않아 승진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은 그런 승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
차갑고 서늘한 그의 손끝이 뺨에 닿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승진은 자신이 고개를 숙인 사이 몇 계단 아래에 있던 우영이 발꿈치를 들어 올리는 것을 발견했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의 감촉이 순간적이었지만 전신을 휘감는 게 느껴졌다. 승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영을 내려다보자 우영이 중얼거렸다.
“만나면 꼭 하려고 생각했던 거라.”
벅벅.
뒷머리를 긁적이며 그가 말하자 꾹꾹 눌러 두었던 욕망이 차올랐다. 승진은 젠장, 하고 속으로 욕설을 뱉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투명한 유리문 밖에는 인적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으슥한 지하 1층 계단을 응시하니 어둠 속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우영이 서 있을 뿐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승진이 아래로 내려오려 할 때, 우영이 그의 손을 잡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은 자제해 봐.”
“왜.”
쇳소리를 흘리며 승진이 대꾸하자 우영이 빙긋 웃었다.
“해결해야 할 게 몇 가지 있거든.”
해결?
“너, 오늘 나랑 같이 가야 할 곳이 있어.”
* * *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밝은 가로등이 시야로 들어오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을 밝히는 그 불빛에 시선을 빼앗겨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던 승진은 스윽, 고개를 돌렸다. 제게서 차 키를 받아 든 뒤로 20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우영의 얼굴은 어딘가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결의를 다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저렇게 심각한 표정이지?
승진은 입술이 자꾸만 들썩이는 것을 겨우 참으며 운전석으로 향했던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차에서는 엔진 소음 하나 나지 않는다.
‘돈값을 하네.’
몇 년을 사용해도 처음 탔을 때와 똑같은 승차감을 주는 자신의 애마에 승진은 입꼬리를 올렸다. 대학 입학 기념으로 할아버지인 백 전 대법원장이 선물해 준 스포츠카는 여러 의미에서 유용했다. 가령 우영과 함께 급히 나갈 데가 있을 때라든가, 마트를 갈 때라든가, 각자의 본가에 잠시 들를 때라든가, 아니면 답답할 때 드라이브를 할 때라든가, 그리고…….
‘…….’
맞다. 시트, 갈아야 하는데.
불과 몇 주 전, 좁지만 아늑한 이 스포츠카 안에서 일어났던 행위를 불현듯 떠올린 승진은 눈을 크게 떴다. 대충 청소를 하기는 했으나 그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리 없으니 언제든 청결을 유지해야지.
다가오는 주말에는 세차장에 한 번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던 승진이 슬며시 눈을 돌렸다.
여전히 우영은 앞을 바라보며 운전을 하는 중이었다.
[갈까?]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며칠 동안 연락 한 번 없던 그가 슬슬 퇴근할 즘이 되자 전화를 거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매번 하던 일인데 며칠 안 했다고 그새 새로운 느낌이 드는 건 또 왜인지. 승진은 싱긋 웃으며 제게 손을 내미는 그를 향해 차 키를 건네고선 말없이 조수석에 안착했다.
[어디 가는지 정말 얘기 안 해 줄 거냐.]
조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연수원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머릿속에 맴돌던 말을 묻고, 또 물었지만 우영은 묘한 미소로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덕분에 오후 내내 그가 언급했던 그 ‘해결’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만 했다.
제기랄.
신우영, 이 빌어먹을 놈은 대체 얼마 동안 내 머리를 지배하려는 거야.
입술을 잘근 깨물며 우영을 뚱한 얼굴로 바라보자 승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마침 멈추어 선 차 안에서 우영이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뭐가 궁금한데, 또?”
“목적지.”
눈빛만으로도 승진의 질문이 예상되는지 우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승진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자 우영은 흠흠, 하고 몇 번 기침을 흘리더니 옆얼굴을 긁적이며 승진의 시선을 피해 창문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또 피하지?”
“뭘 그리 궁금해하는 건지 모르겠군. 어차피 곧 도착하면 다 알 텐데.”
“넌 내가 궁금한 거 못 참는 성격이라는 거 모르냐?”
“가끔은 좀 참기도 해라, 인마.”
“신우영.”
“누나는, 집에 들어가셨냐?”
사실 우영이 향하는 곳의 목적지 말고도 궁금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일단, 왜 며칠 동안 핸드폰을 분실했던 것이고, 그날 밤 어째서 그 여자의 차를 탔던 건지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원인을 밝히지 않는다면 아무리 신우영이라 할지라도 곱게 넘어갈 수 없는 상황. 지금도 충분히 참고 있어―라는 말이 입 밖으로 차올랐다가 겨우 들어간 건 열려 있던 우영의 입술에서 낯익은 이름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들어갔을 거야.”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자신이 직접 미진을 본가까지 바래다줄 예정이었지만 우영이 꼭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해서 기사를 불렀다.
차 시계를 흘긋거린 승진은 심드렁하게 대꾸하곤 입을 다물었다.
신호등이 다시 초록불로 바뀌자 그의 스포츠카가 직진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화 많이 났을 거라고 생각하시겠지.”
우영은 흐리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당연하지. 승진은 대답하려다 말았다.
“그땐 나도 이성을 잃었었다고, 네가 대신 잘 말씀드려 줘.”
“……그럼.”
“응?”
“그럼, 지금은?”
파르르, 떨리는 우영의 속눈썹의 진동을 승진은 놓치지 않았다.
아직은 완전히 풀지 못한 건가.
우영에게 미안해 죽겠다며 발을 동동 구르던 미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승진은 우영의 대답을 기다렸다.
핸들을 잡고 있던 우영의 말이 들린 것은 아주 짧은 침묵이 흘러간 뒤였다.
“지금은…… 이성을 찾았지. 생각해 보면 누나가 눈치를 못 채셨다고 생각한 것도, 이상하긴 해.”
우영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승진은 가만히 그를 직시했다.
“너, 생각나냐?”
“뭐.”
“우리 대학교 3학년 때 말이야. 나 너희 본가에 처음 놀러 갔던 날. 네가 그때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해서 갔는데, 그날 누나가 아파서 집에 계셨잖아.”
아아.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 승진은 우영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영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누나가 옆방에 계시는 줄도 모르고 한판하려다가…….”
[승진……이니?]
말끝을 흐리는 우영의 말을 듣고 있으니 돌연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본가의 침실에서 나누는 섹스가 스릴 있을 거라 확신하며 완벽한 나신이 된 상태에서 침대로 달려들어 우영을 덮치려던 순간, 가정부 아주머니가 방으로 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잠가 두었던 문이 덜컥 열리자 이불 속에서 스킨십을 나누던 두 남자의 행동이 멎었었다.
자다 깼는지 쇳소리를 흘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려는 미진을 향해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던 그날.
제 아래 있던 우영이 미친 듯이 웃음을 참으며 숨소리도 흘리지 않길 바랐던 그날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야, 다시 생각해 봐도…… 아찔하네.
갑자기 소리를 지른 미진에게 대체 뭘 했냐는 추궁을 당하기는 했지만, 당시엔 특유의 뛰어난 언변으로 상황을 잘 마무리했다고 여겼다. 부르르 몸까지 떨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승진을 힐긋거리던 우영이 낮게 중얼거렸다.
“만약 그때부터 알아차리셨던 거면, 누나도 정말 오랫동안 모르는 척하셨군.”
“설마, 그때 알아챘을 리가.”
“분명 그때야. 그때 말고는 우리, 엄청 철저했다.”
……그랬었나.
우영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날 이전에 우영은 단 한 번도 승진의 본가에 찾아온 적이 없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마찬가지. 일리 있는 발언이라 흐음, 신음을 흘리던 승진은 우영의 팔이 왼쪽으로 움직이는 것을 목격했다. 좌회전을 하기 위해서 핸들을 움직인 까닭이다. 승진은 웬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차를 아직 인지하지 못했다.
“뭔가 찝찝해서 그날 이후 네 본가라면 얼씬도 안 했는데…… 그때부터 우리 금지 구역이라는 걸 정하지 않았었나?”
“뭐, 그랬었지.”
아무리 스릴을 즐기고 싶다 할지라도 섹스를 하기에 적절치 못한 곳을 바로 그날 이후 정했었다.
딱 두 곳.
백승진과 신우영의 본가 내 침실.
생판 모르는 남도 아닌 가족들에게 들러붙어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순 없다는 이유로 두 남자 모두 동의했고, 철저하게 그것을 지켜 왔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난 아직 너희 부모님과 제대로 대면한 적이 없는 것 같군.”
“…….”
“뭐,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마침 비어 있던 주차 공간에 차를 대기 위해 조수석의 의자 어깨 부분을 잡던 우영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두 남자의 대학 졸업식 날, 대표로 단상 위에 오르던 우영을 못마땅한 기색으로 바라보던 한 여사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한 여사가 우영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둘러 표현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지도. 승진은 ‘내려.’라고 짧게 말한 뒤 안전벨트를 푸는 우영을 지켜보다 닫혀 있던 차 문을 열었다.
“웬 아파트?”
묘한 기분이 들어 우영에게 물었다.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하더니 기껏 온다는 곳이 아파트 단지냐? 의아한 표정으로 높이 솟은 아파트를 빤히 바라보는 승진에게 우영이 차 키를 넘겼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무슨 생각.”
“너도 슬슬 소개를 해 줘야겠다는 생각.”
뭐?
뜬금없는 우영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승진은 인상을 썼다. 그러자 옅게 웃던 우영이 결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대궐 같은 너희 본가만큼은 아니지만…… 소개하려고.”
대체 뭐를?
“우리 가족에게, 너를.”
* * *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진짜 제정신이야?”
쿵쾅쿵쾅, 들썩이는 심장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승진은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제어시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우영을 향해 소리쳤다. 우영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9층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남은 엘리베이터 안의 표시등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누가 보면 싸우는 줄 알겠군. 소리, 낮춰.”
“뭐?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내가 지금 소리 낮추게 생겼어? 난생처음 어머님을 뵙는 길인데 나보고 그냥 들어가라고? 돌았냐? 젠장! 안 되겠다. 일단 네놈 먼저 올라가고, 난 요 앞에서 뭐라도 좀 사서……!”
이제 막 3층을 지나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5층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으려고 했으나 승진의 그런 행동은 바로 우영에게 저지당했다.
“신우영!”
빽 소리를 지르며 우영을 쳐다봤으나, 그는 싱긋 웃기만 할 뿐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됐어. 그런 거 불편해하셔.”
“야!”
“괜찮다니까. 어, 다 왔군.”
“…….”
“뭐 해? 거기서 안 내리기라도 할 건가?”
……제기랄!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른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능글맞은 우영의 얼굴이 오늘따라 낯설다. 승진은 9층이 되자마자 드르륵 열린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성큼 걸어 나가는 우영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백승…….”
“알았어. 내려, 내린다고!”
고작 몇 발자국 앞으로 내딛는 것뿐인데 왜 그렇게 망설여지는 건지.
승진은 재촉하는 우영의 닦달에 못 이겨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그렇게 긴장을 하고 그래?”
겨우 엘리베이터 밖으로 벗어나서는 길게 호흡을 고르고 있는 승진에게 우영이 싱글벙글 웃어 가며 말을 걸자 승진은 찌릿, 눈을 흘기며 그를 노려봤다.
“미리 말했으면 빈손으로 안 왔을 거 아니냐.”
“빈손이 덜 부담스럽다니까.”
“그래도.”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건데.
아마도 우영의 부모님은 승진을 ‘친구’로서 자신을 환영하겠지만, 우영과 한 침대를 쓰는 입장으로서 긴장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스물넷 백승진의 인생 중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말라 버린 목구멍 사이로 침을 꿀꺽 삼키며 승진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우영이 ‘웃긴 놈.’ 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가쁘게 호흡하고 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는 기다란 다리를 쭉쭉 뻗었다.
“안 와?”
승진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아마도 본가 대문 앞일 것이라 짐작되는 곳으로 간 우영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에게 소리쳤다.
제기랄.
승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승진이 제 옆에 서자 우영의 손가락이 초인종 버튼에 닿았다. 꾸욱, 망설이지도 않고 눌러 버리는 우영의 행동과 동시에 심장이 쾅쾅 뛴다.
‘미쳐 버리겠군.’
잔뜩 굳은 얼굴로 대문을 바라보던 승진의 심장이 급격하게 요동친다.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어머님께 뭐라고 인사를 하면 좋지?
눈앞이 하얗게 물들어 갈증이 인다.
-누구…… 어머, 우영아!
반가움이 가득한 음성이 인터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머님 목소리가 매우 젊으시군.’
돌처럼 굳어 있던 승진은 흠흠, 목을 다듬었다. 그를 흘긋거리며 픽 웃던 우영의 입술이 열렸다.
“문 좀 열어 주세요. 말씀드렸던 친구, 데려왔어요.”
-어? 친구? 어…… 내가 생각했던 ‘친구’가 아니네? 알았어. 기다려!
의문 섞인 중얼거림이 들려오긴 했으나 이어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는 그것을 까맣게 잊게 했다. 인터폰이 꺼지자마자 승진이 우영을 바라봤다.
“미리 말씀드렸어?”
우영은 대답 대신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온몸을 뒤덮는다.
우영의 연인으로 소개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건지.
승진은 입술을 깨물다 떼기를 반복하며 굳게 닫혀 있는 대문이 열리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몇 초 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끼이익 대문이 열렸다.
호흡을 고르던 승진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며 환하게 웃는 여자를 발견하곤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와, 우영아! 다들 너 오기를 기다…… 어머, 백승진 씨?”
“……!”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무심코 신음을 흘릴 뻔했다.
승진은 마치 ‘당신이 왜 거기 있어?’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재희의 모습에 입술을 꾹 닫았다.
순간 기분이 나빠져 저보다 한 발 앞서 있던 우영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응시했지만, 스윽 뒤를 돌아본 우영의 눈동자에도 당혹감이 가득했다.
의도한 건 아닌가.
승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흘끔거리는 재희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으나,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입을 쭉 내밀며 승진을 직시하고 있던 재희가 우영의 본가 대문을 꽉 붙잡은 채 멈춰 있자 우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가 붙들고 있던 문고리를 잡아채며 물었다. 재희는 갑작스러운 우영의 행동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활짝 미소를 그리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우리 집이 바로 옆인데, 좀 놀러 오면 안 돼?”
“……그런 건 아니지만.”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자. 아줌마가 진수성찬을 차리셨어!”
자연스럽게, 우영의 팔에 팔짱을 끼는 재희의 행동엔 스스럼이 없다. 두 남녀의 바로 뒤편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승진의 떨리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황당한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긴장은 어느새 사라지고 지독하게 차분해진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문밖에 서 있던 승진은 ‘참!’ 하고 탄성을 흘리며 뒤를 돌아보는 재희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백승진 씨도 거기 서 계시지 말고 들어오세요. 우영이 어머니, 요리 정말 잘하시거든요! 아마 입에 맞으실 거예요.”
“…….”
“백승진 씨?”
“예, 뭐…… 그러죠.”
영락없는 여자 친구 행세다. 아니, 안주인 행세인가.
승진은 치밀어 오르는 노기를 다스리려 애써야 했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려 노력했으나 딱딱하게 굳어 버린 얼굴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승진은 심드렁한 목소리를 흘리며 신고 있던 검은 구두를 벗었다.
대체 얼마나 붙어 있을 건데.
입가에 맴도는 말을 속 시원히 털어놓을까 말까 망설였다. 도가 지나치지 않나?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 온, 각별한 사이의 소꿉친구라고 해도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우영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장성한 남자의 팔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러붙어 있는 여자의 엉덩이에 꼬리 백 개가 달려 있는 것만 같아 승진은 인상을 썼다.
“유재희.”
정말 더럽게 안 떨어지네.
두 남녀도 남녀지만, 오늘따라 구두가 잘 벗겨지지 않는다 중얼거리던 승진의 귀로 낮게 가라앉은 우영의 음성이 들렸다. 동시에 신경질적으로 구두를 벗으려 애쓰던 승진의 고개가 들렸다. 신발을 다 벗고 슬리퍼를 신은 우영이 재희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거.”
“어?”
“놓아줄래? 불편해.”
승진의 눈동자뿐 아니라 그 말을 들은 재희의 눈에도 당혹감이 내려앉았다. 우영은 말을 뱉어 내자마자 자신의 오른쪽 팔에 붙어 있던 재희의 가느다란 팔을 떼어 내고는 승진을 직시했다.
“뭐 해? 안 들어와?”
“……어?”
“재희가 말했잖아. 다들 기다린다고.”
“아.”
“얼른 들어가자. 나 무지하게 배고프거든.”
놀라는 승진을 향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던 우영은 제 말을 끝내고선 획 몸을 돌려 거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그를 반기는 집안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는 우영의 등을 멍하니 응시하던 승진은 졸지에 함께 남게 된 재희를 쳐다봤다.
“불편하다네요.”
승진은 저를 노려보고 있는 재희에게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었다.
* * *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들어요.”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음성이 귀를 간질였다. 승진의 앞에 잘 구워진 갈비가 담긴 그릇을 놓아주며 미모의 중년 부인이 눈웃음을 그렸다.
신우영이랑 닮았네.
모전자전 아니랄까 봐, 우영이 미소를 지을 때마다 간혹 나타나는 보조개를 그녀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승진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어머님. 자, 잘 먹겠습니다.”
제기랄. 저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어 버렸다.
승진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왜 긴장을 하고 그래. 정신 차려, 백승진. 움켜쥔 숟가락에 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표정이 안 좋네? 승진 군, 어디 아파요?”
숟가락을 위로 올리는 승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칫 놀라 대답하려 했지만,
“아, 저는…….”
“체질적으로 아픈 녀석이 아니에요. 다만.”
“다만?”
“답지 않게 엄청 긴장한 것 같기는 하네요.”
우영이 조금 더 빨랐다.
“긴장?”
“예. 이 녀석, 어머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 났거든.”
인마!
‘너 미쳤냐?’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나 가까스로 참아 냈다.
견뎌. 견디자, 백승진.
“무슨 소리니?”
우영은 제 말에 의아해하는 어머니, 민옥희 여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였다. 승진의 찌릿한 시선에도 아랑곳 않는 우영을 보던 승진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얼굴을 붉혔다.
‘망할.’
진짜 쪽팔리네.
왠지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승진은 마른 입술을 축였다.
민 여사의 눈을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다. 똑바로 바라보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입 안을 맴돌던 말이 튀어나와 버릴 것 같아서.
자신과 우영을 그저 단순한 고등학교 동기이자 대학 동기, 그리고 연수원 동기로만 생각하고 있을 민 여사에게 ‘아드님을 제게 주십시오.’라는 말을 뱉어 냈다가는 볼기를 맞기 십상이지 않은가.
승진은 애꿎은 밥알을 입 안에 가득 넣기만 한 채 제대로 씹지도 못했다.
일찍이 세상을 떠나신 우영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우영과 동생들을 키워 오신 민 여사의 존재감은 가히 엄청났다. 설마하니 이 작은 여인이 천하의 백승진이 말을 더듬게 만들다니.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가 둘 사이를 알게 되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 괜히 제 발이 저리게 된다.
일단 최대한 평범한 ‘친구’인 척하자.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건 밥을 먹고 얘기하자며 묵묵히 식사를 이어 가고 있는 우영을 흘깃거리던 승진이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지 뭐니.”
그때였을까. 수능 공부로 인해 집에 없는 우영의 쌍둥이 동생들, 우빈과 예빈을 제외한 네 명의 남녀가 커다란 테이블 앞에 오순도순 둘러앉았다. 식사를 시작하며 침묵을 유지하던 분위기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로 인해 와장창 깨졌다. 커다란 갈비 조각을 우영의 밥그릇 위로 놓아주던 민 여사가 그 시작이었다.
“난 우영이가 데려온다던 손님이, 재희인 줄만 알았거든.”
“그러셨어요?”
우영은 옅게 미소 지었다. 민 여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당연하지. 우영이 너,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네게 정말 소중한 ‘친구’를 데려온다고 했잖니. 네 소중한 친구라면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재경이 아니면 재희뿐이잖아. 그런데 재경이는 군대를 갔고, 그럼 남은 건 재희인데…… 마침 재희가 초인종을 누르지 뭐야?”
“호호. 아줌마, 그래서 저 엄청 반기신 거예요? 초대받은 줄 알고?”
현관에서 있었던 일로 인해 약간 침울해 있던 재희가 물 만난 고기처럼 눈을 반짝였다.
승진은 우영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재희를 바라봤다. 재희가 과장된 표정을 지어 가며 말했다.
“그런 거면 엄청 섭섭한데요? 저보고 특별한 일 없어도 놀러 오라고 하셨잖아요!”
칫, 삐친 행동을 취하는 재희에게 호호 웃으며 민 여사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에이, 재희야. 넌 언제든 와도 되지.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는걸.”
“그렇죠? 역시 아줌마도 제가 가족처럼 느껴지시죠?”
“그럼. 우리 가족이지, 재희는.”
‘그것 봐.’라는 눈빛으로 재희가 승진을 쳐다봤다.
……뭐야?
그녀의 눈동자가 우영이 아닌 자신을 향했다는 사실에 승진은 조금 놀랐다.
가만히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영의 입술이 열렸다.
“오해할 만했네요. 제가 정확하게 누굴 초대하는지 밝히지 않았으니. 그런데…… 재희야, 넌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재희를 바라보는 우영의 시선을 따라 승진의 눈도 움직였다. 민 여사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하하 호호 웃음 짓던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왜? 쫓아내려고?”
우영을 대신해서 ‘어.’라고 대답해 주고 싶어서인지 닫혀 있던 입술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말을 들은 우영은 흐음, 하고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겠다. 이왕 듣는 거, 너도 같이 들어도 상관없지.”
“들어? 뭘?”
“그런 게 있어. 이따 식사 끝나고 얘기할게.”
묻는 재희의 말을 단칼에 끊어 내며 우영은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완벽히 비웠다.
승진은 싱크대에 식기를 가져다 놓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우영과 함께 민 여사 역시 움직이는 걸 목격했다. 대각선이기는 하지만 불편한 재희와 남아 있던 승진은 두 모자가 사라지자마자 제게 적대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는 그녀에게 물었다.
“유재희 씨,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는 겁니까?”
어쩐지 딱딱한 음성이 새어 나온다.
승진은 하아, 한숨을 흘렸다. 재희가 그런 그의 말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백승진 씨는 뭐 없으신가요?”
내가?
“있어야 합니까?”
“아마도요.”
승진은 애매한 대답을 이어 가는 그녀를 빤히 직시했다. 재희는 두 모자가 무언가 이야기를 하며 거실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다 다시 승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영이랑 저, 백승진 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거든요.”
그래서?
“근래 제가 귀국한 뒤로, 함께 있는 시간이 잦았어요. 그러다 언제였지? 얼마 전에 우영이가 핸드폰을 제 차에 두고 갔더라고요.”
승진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 갔다.
재희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침 다음 날 제가 일이 있어 출장을 가는 바람에 우영이한테 핸드폰을 제때 돌려주지 못했는데…… 혹시나 해서 들고 갔던 핸드폰에 연락이 참 많이 오더군요.”
“돌려 말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 그쪽이 하고 싶은 말이 뭐지?”
결국 참지 못하고 승진이 음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무표정한 얼굴이 차갑게 식어 가자 흠칫거리던 재희가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승진에게 말했다.
“우리 우영이한테서 떨어져요.”
“…….”
“염치도 없어. 어떻게 그렇게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식사를 할 수가 있지? 두 사람, 남자잖아.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거라고. 알아?”
“이봐.”
“아, 그래. 섭리 그런 건 둘째 치고서라도 당신, 그때 그래서 나한테 골키퍼 운운한 거였구나? 내가, ‘당신의’ 우영이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풋, 실소를 터뜨리며 재희가 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있던 승진은 제게 활짝 웃어 보이는 재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뭐 이런 여자가…….
욕설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곳이 우영의 본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승진은 이를 악물며 이어지는 재희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재희는 굳어진 승진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우영이네 집이야.”
알아. 그래서 참고 있는 거고.
“우영이의 보금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면, 이쯤에서 돌아가는 게 어때?”
흥, 코웃음 치며 여자가 대답 없는 승진을 향해 싸늘한 말을 쏟아 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던 승진이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글쎄.”
어?
“우리 집을 나서야 할 사람은 저 녀석이 아니라 재희 너 같은데?”
* * *
쾅―!
있는 힘껏 등을 밀쳐 버리는 우영으로 인해 승진의 등이 딱딱한 벽에 닿았다.
윽, 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좁힐 만도 한데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은 없었다. 승진은 제 뒷머리를 감싸 쥐고 자신을 벽으로 몰아세우는 우영의 검은 눈동자를 쳐다봤다.
‘뜨거……워.’
입 속을 지배해 버린 강렬한 열기가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어쩐지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 닭살이 오소소 돋아난다. 기다란 혀로 거칠게 치열을 쓸고 그의 혀를 옭아매고 있던 우영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해 숨이 막혔다.
승진은 일렁이는 우영의 눈동자에 압도되는 자신을 인지했다. 엇비슷한 키의 두 사람이었기에 눈을 마주하는 높이가 딱 맞았다.
쉴 틈을 주지 않고 혀끝으로 입 안을 헤집는 우영의 타액이 제게로 넘어오는 것을 느끼며 승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미진이 본가로 돌아가 비어 있는 승진의 집으로 들어가는 동안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이렇게 돌변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조금은 낌새가 있기는 했지만…….
[백승진.]
새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제 이름이 왠지 모르게 섹시하게 들려왔다. 못난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우영이 뱉어 낸 이름에 묘하게 심장이 들썩였다. ‘왜?’라는 대답을 하기 위해 스윽 고개를 돌리는 순간 코끝에 닿아 버린 야릇한 숨결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승진은 ‘문 열어.’라고 속삭이며 제 목덜미에 빨간 반점을 새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우영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훤히 트인 복도 앞에서, 누군가 볼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신우영은 자신의 눈에 서린 욕망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그의 열망은 우영의 본가에서 나올 때부터, 아니 그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어울려 줘야 하나.
사타구니 근처가 화끈거려 와 승진은 강한 체취를 풍기는 우영의 머리 숲을 가만히 응시했다.
[뭐 해. 안 열어?]
[노력……하고……!]
[꾸물거리지 마.]
[……큽!]
승진의 새빨간 귓불을 살짝 깨물어 버린 우영은 참고 있던 욕정을 모두 표출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붉어진 동공을 살짝 위로 올리며 제게 명령하는 우영의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와 승진은 가쁘게 호흡을 내쉬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우영의 습격에 적응하려 했으나, 등 뒤로는 집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전자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러야 했기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승진의 약해진 방어벽을 우영은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결국, 다행히 인기척이 없던 복도 앞에서 승진은 탄성을 뱉어 냈다. 등 뒤로는 오른손을 미친 듯이 더듬으며 버튼을 누르고, 가슴 앞으로는 제 입술을 덮어 버리는 우영의 목을 왼손으로 감싸며 버텼다. 힘이 빠져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으나 이대로 무너지면 완벽하게 백기를 들어 올리는 것이기에 참고 또 참았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자 승진의 입술을 물어뜯던 우영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는 것을 우연히 보고 말았다. 승진은 우영에게서 변화가 일어나기 무섭게 저를 밀쳐 버리는 그로 인해 결국 뒷걸음질 쳤다.
‘위험한데, 이거.’
승진의 눈치 빠른 심장이 외치고 있었다. 정신없이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누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서서 모든 것을 진행시키고 있는 신우영의 다급한 행동을 보니 더더욱. 그의 침입이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온몸이 경고를 했다. 이대로 함락되어 버리면 결국 깔리는 건…….
“자, 잠깐만!”
입술과 입술이 닿아 발생한 은빛 실타래가 길게 늘어지고, 벽을 짚고 있던 우영의 손이 점점 승진의 배를 짓눌렀다. 우영의 품 안에서 꼼짝 못 하게 된 승진이 허겁지겁 우영의 키스에 대응하다 소리친 것은 그를 지배하던 우영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벌어진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승진의 셔츠를 벗기려던 우영의 요동치는 눈동자가 승진을 향했다.
승진은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우영의 달아오른 뺨에 커다란 손을 가져다 댔다.
“저기…… 신우영. 우영아.”
굶주린 야수처럼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우영이 낮게 으르렁거리는 신음을 흘렸으나, 승진에게 대꾸하지는 않았다.
이거 점점 무서운데.
승진은 저를 물어뜯을 기세인 우영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엔 잘 부르지도 않는 이름을, 아주 다정하게 부르며.
“조금만 진정하는 게 어때?”
신변의 위기가 느껴진다. 이 상태라면 백승진의 엉덩이가 안전하지 못할 것은 확실하다. 일단 지금 이 상황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신우영이니.
승진은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쓸며 속삭였다.
“그래! 일단 샤워부터 하고 마음을…….”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하지만 그런 승진의 바람은 다음 말을 잇기도 전에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틱틱거리던 말투를 내던지고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던 승진은 딱 잘라 버리는 우영의 음성에 눈을 크게 떴다.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자 우영이 피식 웃으며 그의 턱을 부여잡았다.
“어디서 내빼려고.”
“어?”
“오늘은 죽어도 안 봐준다.”
“……!”
“각오해. 그동안 내가 당했던 고통, 고대로 돌려줄 예정이니까.”
씨익, 올라가는 우영의 입꼬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빌어먹을. 이 새끼 진짜 맘 단단히 먹었네.
승진은 거칠게 들썩이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하하, 웃었다.
“너…… 너 좀 무섭다? 진정해. 진정하라니까.”
“헛소리 집어치워. 그리고…….”
그리고?
“자꾸 입 열지 마. 그럼 더 꼴리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런 우영을 뒤로 밀치고 도망쳐 버리고 싶은데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 그럴 수도 없다.
제2차 자존심 대결에서 결국 승리한 것은 자신이 아닌 우영이니까.
‘젠장할!’
승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인상을 썼다. 그런 승진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웃던 우영이 붉은 입술을 승진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해 볼까?”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 * *
[우, 우영아……?]
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여자의 아리따운 얼굴이 그렇게 처참하게 망가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과정은 나름 흥미로웠다.
저렇게 빨리 돌변할 수 있나?
창백하게 질려 가는 그녀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승진은 닫고 있던 입술 사이로 실소를 터뜨릴 뻔한 것을 겨우 참아야만 했다.
두근두근. 아마도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인 것이 틀림없는 소리가 터질 듯 귓가로 울려 왔지만 모른 척했다.
승진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움직이며 우영을 돌아보는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야, 아무리 절친한 관계라도 선이라는 게 있다.]
후우, 진한 숨을 터뜨리며 우영은 자신을 직시하고 있는 두 남녀에게로 걸어왔다. 귀찮은 일에 얽매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쓰며 뱉어 내는 그 말은 자신이 아닌 재희에게 꽂아 주는 말이라고 승진은 생각했다.
예상대로 성큼성큼 걸어온 우영은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커다란 눈의 재희를 향해 빙긋 웃었다.
[난 널 무척 아끼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옆집 친구로서 그 이상은 아니다.]
[어? 갑자기 왜 그런…….]
[유재희.]
[아, 아니야, 우영아. 네, 네가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 나는 단지 백승진 씨에게…….]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
[나는 널 소꿉친구 이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우영……아.]
[그리고 어제 핸드폰을 돌려받을 때 이미 돌려서 말했던 것 같은데, 이해를 못 했나 보군. 나는 선을 제멋대로 넘는 사람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야.]
[나, 나는!]
[네가 내 사람한테 뱉어 낸 그 말은, 네가 지켜야 할 선을 충분히 넘은 것 같군. 그러니…….]
우영은 현관 쪽을 가리켰다.
[나가라. 지금 당장.]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차갑게 뱉어 내는 우영의 말들이 재희에게는 비수같이 꽂혔으리라.
새하얗게 변해 있는 재희의 얼굴을 보았을 때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승진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 사람’이라는 호칭.
가슴이 요동쳤다.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던 승진의 목이 말라 가기 시작했다. 갈증이 일었다.
[날…… 쫓아내는 거야?]
[그래.]
[이 남자 때문에?]
[그게 뭐, 잘못되기라도?]
[시…… 신우영.]
[어.]
[너 미쳤니!]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으며 재희가 우영에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야?]
안방에 있던 민 여사가 부엌 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놀라 세 남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재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민 여사에게 빙긋 웃음을 흘리더니 다시 제 앞을 가로막는 우영과 제 등 뒤에 서 있는 승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낮게 소리쳤다.
[이 사람은, 남자라고!]
우영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대답했다.
[알아. 눈이라는 게, 너한테만 달려 있는 건 아니거든.]
[우영아! 너 정말 왜 이러니? 앞으로 네 미래가 얼마나 창창한데. 고작 이런 남자한테 붙잡혀서 모두 끝장낼 생각이야? 제발 정신 차…….]
[……릴 시기는, 오래전에 놓쳤어. 미안하지만 네 바람대로는 어려울 것 같다.]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헉!]
재희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서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던 승진 역시 숨을 크게 들이마셔야만 했다. 기다란 팔을 뻗어 제 손목을 잡고선 그를 품으로 끌어당긴 우영 때문이다. 방심하던 차에 우영에게 끌려간 승진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제 입술을 덮어 버린 우영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두 남자가 한 여자의 앞에서 입을 맞춘 지 1초, 2초, 3초, 그리고…… 5초.
부드럽게 승진의 입술을 머금던 우영이 눈꼬리를 휘며 떨어져 나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멍해 있던 승진과 재희를 번갈아 바라보며 우영은 번들거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난 이 녀석한테만 키스하고 싶거든. 그러니 정신 차릴 시기는 이미 지난 셈이지.]
Rrrr. Rrrr.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재킷 안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의 벨 소리가 들려온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흘리고 있던 승진이 제 위에서 그의 돌기를 자극하고 있는 우영의 머리 숲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야…….”
Rrrr. Rrrr.
“신우…… 끅!”
그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잔뜩 부은 입술을 움직였으나 문장을 완성하기도 전에 툭 끊어졌다. 하얀 이빨로 승진의 유두를 살짝 깨물어 버린 우영 때문이었다.
“누가 한눈팔래.”
미간을 찌푸리는 승진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린 우영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승진은 붉은 반점이 가득한 제 몸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저, 전화…… 오잖냐.”
“알아.”
“안 받아도…… 큽.”
“돼. 그러니까 집중하라고.”
도통 말할 틈을 주지 않는다. 승진은 가슴에서 복부 쪽으로 움직이는 그의 혀끝에 온몸을 비틀며 입술을 꽉 다물었다. 우영은 거침없이 승진의 몸을 탐하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아니까.”
아마도 둘 중 하나겠지. 승진의 앞에서 망신을 당한 재희이거나, 아니면…….
[우영이 너…… 뭐라고 했니?]
그의 어머니, 민 여사.
우영의 폭탄 발언에 경악하는 재희를 내버려 두고 담담하게 승진의 어깨에 어깨동무를 한 우영이 미소를 가득 담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어머니. 여기 있는 승진이, 제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만나……다니?]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 이 녀석이랑 정식으로 교제하고 있어요.]
만약 커밍아웃을 하게 되면 다른 누구보다 가족에게 먼저 할 것이라는 오래전의 말을 우영은 철저하게 지켰다. 승진은 자신이 대비할 틈도 없이 일어난 상황에 멍하니 눈만 뻐끔거렸다. 아마 우영의 말이 끝난 직후 이어진 1분간의 침묵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상황을 정리하게 만들기엔 충분하지 못했다고 승진은 생각했다.
“크으윽!”
야릇한 숨결이 입술 밖으로 흘러나왔다. 승진은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막지 못한 채 허벅지까지 내려간 우영의 뜨거운 혀 놀림을 느꼈다. 망할! 우영의 거침없는 입술과 자신의 소중한 엉덩이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정말 위험한데! 이거 정말 위험천만한데!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어떻게 우영의 행동을 막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기랄!
“긴장하지 마, 새끼야.”
우영의 뜨거운 혀가 움직였다. 그의 혀가 훑고 지나갈 때마다 타들어 갈 듯한 낙인이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을 비틀고 몸부림쳐 봐도 우영은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끝까지 웅크린 다리를 펴지 않으려 애쓰던 승진은 다리 사이에서 하늘 위로 크게 솟아오른 기둥을 움켜쥔 채 중얼거리는 우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쯧, 혀까지 찬 우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난 시작도 안 했어.”
“그러니 시작 전에…….”
“웃기고 있네. 내가 오늘 같은 기회를 놓칠 것 같아?”
스윽 올라가는 우영의 입꼬리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럴 것 같지 않아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제기랄. 이 자식은 왜 말도 없이 그런 말을 여사님 앞에서 해 가지고는.
승진은 ‘벌려.’라고 말하곤 그의 다리 사이로 몸을 움직이는 우영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풀어 줘야겠네.”
“괜…….”
“괜찮기는. 너 이거 좋아하잖아.”
씩, 입꼬리를 올리며 우영의 커다란 손이 승진의 요동치는 페니스를 감싸 쥐었다. 손에 닿기가 무섭게 부풀어 오르는 승진의 불기둥이 우영의 차가운 손안에서 미친 듯이 펌프질을 해 댔다.
마, 망할……. 현기증이 인다.
슥슥, 기둥의 시작에서부터 귀두까지 아래위로 움직여 발생한 마찰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승진은 매끄러운 우영의 손놀림에 혀를 내두르며 인상을 썼다.
“그, 그만…….”
“뭘 그만해. 잔뜩 흥분했으면서.”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승진은 우영의 손안에서 더욱 딱딱해지는 자신의 페니스가 조금은 원망스러워졌다. 이 행위가 끝난다면 바로 그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 그렇다면 조금 느긋하게 상황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크읍!”
손바닥과 기둥 표피가 만나 들려오는 슥삭거리는 소리에 온몸이 더욱 달아오른다. 숨결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사정을 늦게 하기 위해 노력하려던 승진은 잔뜩 부풀어 오른 페니스 끝이 뜨거워지는 것을 인지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친 숨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하아―!”
딱딱한 치열이 귀두 끝과 닿았다. 가장 예민한 피부를 자극해 버린 우영의 행동이 갈증을 유발했다. 승진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우영이 입 속 깊숙이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큭, 크으윽.
밖으로 뱉어 내지 못하는 신음이 입 안에 맴돌았다. 물었다 놓고, 빨아 당겼다 뱉어 내는 행위를 반복하는 펠라티오에 신경이 곤두섰다.
젠장할. 진짜 못 참겠네.
그동안 제 밑에서 가쁜 신음을 흘리며 인상을 쓰던 경험 덕분에 우영은 승진이 자극받을 만한 부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간드러진 신음은 절대로 흘릴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승진은 참고 또 참았지만 어찌나 세게 입술을 깨물고 있는지, 비릿한 핏물이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너―!”
웁웁.
까끌거리던 우영의 입술은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미끄럽게 불기둥을 받아들였다. 우영의 목 끝에 제 귀두 끝이 닿자 그의 목을 허벅지로 조이려던 승진은 우영의 입 속에서 팽창하는 자신의 페니스가 한계에 다다랐음을 자각했다.
얼마 동안 배출하지 못했던 투명한 애액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 직전, 우영의 머리를 들어 올리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승진은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반응을 해 버린 자신의 페니스에 눈을 크게 떴다.
쿵쾅쿵쾅.
이것은, 아마도 제 심장에서 들려오는 소리. 꼿꼿하게 위로 솟아 우영의 목구멍을 콕콕 두드리던 승진의 페니스가 조금씩 힘을 빼기 시작했다.
승진은 여전히 뜨겁기 그지없는 우영의 입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애액들이 제게서 쏟아져 나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스윽.
끝까지 참으려 했으나, 결국 본의 아니게 그의 입 안에 사정을 해 버린 승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땀 때문에 젖어 버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지도 못하고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자 우영이 입술 밖으로 삐져나온 액체를 손등으로 닦았다. 꿀꺽, 침을 삼키듯 목구멍 안으로 무언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승진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봉사는 여기까지.”
우영은 빙긋 웃으며 몸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승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입고 있던 정장 바지를 아래로 쭉 내리는 우영을 겁에 질린 듯 바라봤다. 우영은 승진이 어떤 표정을 짓든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입고 있던 브리프를 망설이지 않고 내렸다.
“미, 미친 새끼야!”
승진의 것 못지않게 빳빳하게 솟아 있던 우영의 굵은 페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엔 그리도 사랑스럽던 핑크빛 기둥을 멍청하게 응시하던 승진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다시 다가오려는 우영을 향해 소리쳤다. 승진의 기다란 두 다리를 잡아채려던 우영이 왜 그러냐는 듯 미간을 찌푸린다.
“설마, 그냥 넣을 건 아니……지?”
심장이 터져 버리겠다. 저 망할 것이, 순식간에 몸 안을 파고들 것만 같아 두려워졌다.
이런, 제기랄.
신우영이 몇 년 전, 내 것을 마주하고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숱하게 서로의 것을 지분거렸지만 막상 그것을 엉덩이 사이로 집어넣을 거라 생각하니 숨이 콱 막혀 온다. 승진은 침을 꼴깍 삼키며 우영을 바라봤다.
“그냥 넣다니?”
긴장하다 못해 창백하게 질려 있는 승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우영이 무슨 같잖은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픽 웃었다.
“아직 오픈 전인데. 설마 내가 그런 예의도 없으려고?”
그렇게 빙긋 웃으며 답을 한 우영은 곧 침대 옆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더니, 몇 주 전 승진이 사용했던 러브 젤을 꺼내 들었다.
“……!”
딸깍, 뚜껑이 열리고 주르륵 진득한 액체를 손바닥 위에 쏟아붓는 우영의 행동은 매우 익숙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는 정확히 반대의 행동을 취하고 있던 승진의 눈동자가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됐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승진의 말에 기꺼이 응해 주겠다는 듯, 유려하게 웃던 우영이 미끌거리는 제 손바닥을 승진에게 보여 주며 다가왔다. 그럴수록 승진은 더욱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독히도 강한 열기가 우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눈앞이 아찔해져 승진은 입을 꾹 닫았다.
“흐음, 좁아 보이네.”
관장까지 마치고 낮게 뱉어 내는 우영의 중얼거림이 승진의 눈을 큼지막하게 만들었다. 곧 있을 참사에 대비하여 벌렁거리고 있는 분홍빛 애널이 제 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진득한 러브 젤이 입구 쪽에 덕지덕지 발려 있어 얼굴이 붉어져 있던 승진은, 이제는 아예 제 두 다리의 허벅지를 세게 움켜쥐는 우영의 강한 팔 힘에 쇳소리를 흘렸다.
“좁으면…… 아무래도 어렵……겠지?”
네 녀석의 큰 것이 들어가기엔?
그다음 말을 뱉어 내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주어를 생략한 승진의 말을 놓치지 않은 우영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씩 웃었다.
“천만에. 어려울 리가.”
뭐?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무슨 말?
“안 되면, 되게 하라.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
“아니야. 그런 말 따윈 없어. 그러니 안 되는 건 깔끔하게 포기하…… 읏!”
제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것이 맞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야릇한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기다란 우영의 손가락이 애널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승진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 하아, 뭐 하는……!”
“경험상, 풀어 주고 시작해야 할 것 같더라고.”
……뭐?
“그렇지 않으면 아플 거다.”
“제길, 당장 이거, 안, 하윽, 읍!”
좁은 입구 사이로 손가락 하나가, 두 개가, 그리고 세 개가 텀을 두며 들어오자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경험이고 뭐고, 당장 안 빼, 이 새끼야―! 하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 외침 대신 흘러나오는 것은 제 것인지 의심되는 신음 소리였다.
승진은 온몸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감기를 반복했다.
미치…… 미치겠군.
입 안이 바짝 마른다. 우영의 손가락이 개수를 늘리며 제 안을 휘저을수록,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휘감는다. 타인의 침범을 허락한 적이 없던 안쪽의 감각이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인해 점점 더 민감해진다.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은 어느새 주르륵 흘러내리고, 헉헉거리던 심호흡은 하아, 읏, 으읏! 등의 뜨거운 탄성으로 변해 버렸다.
“승진아.”
“으윽!”
“백승진.”
부드럽게 귀를 울리는 우영의 목소리가 머리를 잠식한다. 개자식. 배려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그의 애널 안을 휘젓고, 솟아 있는 페니스 기둥을 문지르는 행동에 거침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혼을 쏙 빼 버리는 걸까. 승진은 그의 아래서 가쁜 호흡만 내쉬었다.
“백승진.”
얼굴이 땀에 흠뻑 젖어 입 안에서 짠맛이 났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그를 희롱하던 우영이 고개를 든 것은, 승진이 그의 손안에서 다시 한 번 뿌연 액체를 쏟아 낸 직후였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흐릿한 눈으로 우영을 올려다보던 승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우영의 행동에 본능적인 불안감을 느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자식아.
승진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선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우영의 행동에 정신을 번쩍 차렸다.
우영은 승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승진의 양다리를 좌우로 힘껏 벌리더니 제 몸을 가까이 밀착시켰다.
이게 뭐 하는……!
“크윽!”
승진이 우영의 굵은 페니스를 보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치기 직전, 우영이 애액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애널 안으로 귀두 끝을 밀어 넣었다.
“아악! 아아악!”
손가락과는 차원이 다른 물컹한 무언가가 제 안으로 쑥 들어오자 승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어떻게 해서든 제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우영을 설득시킬 시간도 없었다. 그러자 순간 멈추어 선 우영이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직 반도 안 넣었다. 엄살은.”
이…… 이 또라이 새끼가, 엄살이라니!
“그리고, 너 씨발, 기억 안 나? 내가 그만하라고 방이 떠나가라 소리쳐도 끝까지 박은 건 너였다. 그러면서 누구한테 봐주기를 원해?”
내, 내가 그랬나?
후회한다.
회개한다.
반성한다.
승진은 제 외침에 행동을 멈춘 우영이 흥, 콧방귀를 뀌자 애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거기까지만 해 주면―
“으윽!”
“웃기고 있네.”
그런 승진의 간절한 눈빛을 읽었는지 우영이 픽, 실소와 함께 코웃음 치며 승진의 허벅지를 세게 움켜쥐고선 더욱 가까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신우영, 잠깐만 기…… 크악!”
간절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끄떡도 하지 않는 우영이 무서워졌다. 승진은 제 다리를 아예 두 팔로 감싸 쥐고선 엉덩이를 살짝 드는 우영의 행동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 말을 하기 위해 목젖을 울리려는 순간, 다시금 괴성을 내질렀다.
“하아, 하아!”
딱딱하고 뜨거운 불기둥이 한 번도 침입을 허가한 적이 없던 은밀한 곳으로 거침없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하지?
숨이 가득 차올랐다. 삐질삐질 흘러내린 땀방울이 온몸을 적혔다. 벌어진 입술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다 들어갔나?”
무언가 찝찝한지 우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진은 따뜻한 우영의 살갗이 제 엉덩이를 스치자 인상을 쓰며 그를 올려다보려 했다. 하지만 눈앞이 흐려져 쉽지 않았다.
빌어먹을. 망할!
“움직인다.”
“아, 잠…… 읏!”
이런 상황에서 새삼 느끼는 거지만, 무언가를 결심한 신우영의 행동은 너무도 재빠르다.
승진이 숨 돌릴 시간 좀 달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우영은 허리를 움직였다. 길쭉한 것이 안쪽으로 더욱 깊게 들어왔다.
“하윽, 읏, 으윽!”
한번 반동하기 시작한 우영은 처음에는 부드럽고 느린 속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승진의 허리가 튕기면 튕겨질수록 그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살과 살이 부딪쳐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비례해서, 비명만 내지르던 승진의 신음도 점점 고통에서 멀어져 갔다.
“하, 젠장, 윽, 크으으. 우, 우영, 헉, 야, 그만, 흑, 아악!”
우영의 단단하고 굵은 페니스가 안을 휘저었다. 뻑뻑하고 비좁은 공간을 침범하는 그로 인해 승진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머리를 쥐어뜯고, 몸을 숙이면서 피스톤질을 멈추지 않는 우영의 등을 있는 힘껏 긁어도, 우영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떼어 내야 해.
이 빌어먹을 기둥을 제 안에 박고 움직이는 이 녀석을 떼어 내야 한다고.
그래, 그래야 하는데 어째서…….
‘제기랄, 왜 이렇게 좋아!’
이상하게 따뜻해진 안의 감각이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제 안에 가득 들어차는 우영을 조였다 풀어 주는 이 행동에 의외로 희열이 느껴져, 되레 화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이 말을 입 밖으로 쏟아 내면 저 망할 녀석이 계속해서 이 포지션을 장악하려 들 테지. 승진은 절대로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어 이를 악물었다.
“하아아. 하읏. 으윽. 흣!”
오늘 한 번만이다. 이번 딱 한 번만.
그래, 딱 오늘 밤만 지나면 다시 네놈을 눕혀 주지.
앞뒤로 몸을 움직여 승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는 우영의 몸짓이 정신을 하얗게 물들였다. 이성을 놓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있던 승진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움직이는 침대 위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으으.”
이가 부딪쳐 덜덜 떨려 왔다. 불기둥이 밀려들어 오는 고통을 참기 위해 주먹까지 세게 움켜쥐던 승진은 ‘승진아.’ 하고 제 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이는 우영의 목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스윽 눈을 올려 그를 쳐다보자 제 위에서 짭짤한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우영의 욕망에 젖은 얼굴이 시야로 들어온다.
승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 갈 것 같아.”
퍽퍽, 살을 맞대며 제게로 달려들던 우영의 흥분에 찬 음성이 짜릿한 전율을 일게 만들었다. 승진은 제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는 자신을 안아 버리는 우영으로 인해 반쯤 몸을 든 상태에서 인상을 썼다.
가면 가는 거지, 말하고 가냐.
그러고 보니 자신이 우영을 안을 때와 달리 일일이 설명하는 그를 못마땅한 듯 바라보며 얼굴을 구기고 있던 승진은 긴 팔을 뻗어 우영의 목을 휘감았다.
“가든가…… 하윽, 말, 든…… 읍!”
앉은 상태에서 그의 품에 안기니 꼿꼿한 우영의 페니스를 더욱 올곧이 느낄 수 있었다. 승진은 목구멍이 말라 가는 것을 인지하며 우영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를 안은 상태에서 승진의 몸을 아래위로 들어 올리던 우영이 속도를 높였다. 몸이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심장이 뛰어 견딜 수가 없다. 승진은 제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우영의 땀방울을 느끼며 그의 아래에서 거친 신음을 흘려 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안에 들어차 있던 우영이 승진의 안을 따뜻하게 녹였다.
흐으으.
가득 들어차는 액체가 주르륵 애널 밖으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 콘돔도 안 하고…….
너무 정신없이 몸을 비비는 바람에 저도, 우영도 미처 그것을 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승진은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신……우영.”
마지막 순간, 피스톤질을 하던 우영이 헐떡이며 옆에서 호흡을 내쉬고 있자 승진은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붉게 상기된 우영의 얼굴이 스윽 옆으로 돌아갔다. 승진은 긴 숨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너, 앞으론 꼭…… 끼고 해라.”
“뭘.”
“콘돔.”
“아아.”
우영은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승진의 뺨에 입을 맞추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애널 안을 꽉 채우던 우영의 것이 사라지자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두 번 다시는 못 할 정도로 엉덩이 사이가 아프지만 그래도 나름, 정말 나름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고 생각하던 승진은 깊은 신음을 흘린 뒤 입술을 움직였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이런 고통은 딱 한 번이면 되었다. 승진은 대답 없는 우영 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오늘과 같은 일은 없을…… 너, 뭐 하냐?”
아무래도 미리 경고를 해야겠다 싶어 말을 하던 승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테이블 서랍을 뒤적이는 우영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영은 그런 승진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서랍 속에 손을 넣어 한참 동안 무언가를 찾더니 씩 웃으며 소리쳤다.
“여기 있군.”
……어?
이윽고 우영이 승진을 향해 들어 보인 것은, 두 남자가 평소 애용하던 콘돔이었다.
‘이 개자식이!’
순간 콘돔을 찾아낸 우영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한 승진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침대 헤드 쪽을 향해 몸을 붙이려 했다.
“윽!”
하지만 곧, 저를 덮쳐 오는 우영으로 인해 옴짝달싹 못 했다. 우영은 ‘이 변태 새끼가!’ 하고 버럭 외치는 승진의 귓불을 살짝 깨물어 준 뒤, 그의 귓가에 대고 야하게 속삭였다.
“그럼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승진의 눈앞이 컴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