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2. 민국 대학교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민국 제일의 인재가 모여든다는 민국대 법학관.
뜨거웠던 여름방학이 끝난 뒤 시작된 2학기 첫 번째 전공 수업을 마친 법학대 2학년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두툼한 서적과 전자사전이 들려 있었다.
아직은 사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앳된 얼굴을 한 그들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법학관을 나서고 있는 흑색 머리카락의 남자였다.
180센티를 훨씬 웃도는 커다란 키에 널찍한 어깨, 모델이 시기할 만한 비율을 지닌 그는 웬만한 연예인 부럽지 않은 화려한 마스크를 뽐내며 다리를 쭉쭉 뻗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에 달콤한 향기를 맡은 벌들이 모여들듯 그 주변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눈을 빛내는 학생들이 가득했는데, 하나같이 그의 시선을 갈구하고 있었다.
“우영아, 너 오늘은 뭐 먹을 거야? 오늘도 학식이야?”
“참! 요즘 회계학 공부 잘돼? 나 스터디 만들까 하는데 들어올래?”
“얼마 전에 네가 기다리던 영화 개봉했던데, 나 예매표 가지고 있거든! 같이 보러 갈까?”
“우영 선배님! 저번에 저한테 가르쳐 주시기로 했던 라틴어 말인데요, 오늘 배울 수 있을까요?”
등등의 말을 쏟아 내고 있는 여학생들은 강의실에서부터 여기까지 따라와 그의 주변을 떠날 생각을 않는다. 학년을 가리지 않고 제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그녀들의 눈빛은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미칠 노릇이군.’
줄곧 옅은 미소만 지은 채 계단을 내려오던 우영은 결국 제 주위를 둘러싼 그녀들을 흘끗 쳐다보더니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강의실에서 나선 후 내내 똥 씹은 얼굴로 제 옆을 지키고 있는 친구 재경의 어깨 위로 손을 얹더니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미안. 나 오늘 이 녀석이 도시락 가져왔대서 그거 먹기로 했거든. 밥은 다음에 같이 먹자. 스터디 관련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 그럼.”
재경이 ‘미쳤냐?’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지만, 우영은 대응하지 않았다. 황당해하는 재경의 시선 따위는 무시한 채 아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들에게 눈부신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끝내 한숨과 함께 수긍한 여학생들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재경은 아니꼬운 눈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우영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툭 말을 던졌다.
“이중인격자 같으니.”
재경이 꺼낸 말에 흔들던 손을 아래로 내리던 우영의 고운 아미가 접힌다. 맑게 일렁이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재경은 찌릿, 저를 노려보는 우영을 향해 ‘뭐, 틀린 말 했냐?’ 하고 툴툴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우영은 흥, 콧방귀를 뀌더니 겨우 떨어져 나간 여학생들이 가 버린 학생식당 쪽을 흘긋거렸다.
“젠장. 학식이라도 먹어야 하는데 쟤들 때문에 어딜 갈 수가 없군. 가뜩이나 돈도 없는데…….”
다정한 젠틀남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우영은 차갑다 못해 싸늘한 발언을 흘리며 얼굴을 구겼다.
그런 그의 태세 전환에 입술을 삐죽이던 재경이 피식거렸다.
“부러운 소리 마. 너 그러다 다른 애들한테 두들겨 맞는다. 아까 저기 유영아도 있더라.”
“유영아가 누군데?”
“너 모르냐? 음대 퀸?”
“……알아야 하나?”
“아,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고 보니 유독 하얀 얼굴의 여자애가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 있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신우영에게 중요한 건, 학식보다 저렴한 식비로 때울 만한 점심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결국 답은 라면뿐인 건가. 우영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게 해 줘야 할 거 아냐. 쟤들이랑 같이 있다가 체할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긴, 쟤네가 좀 극성이긴 하지.”
“같은 과도 아닌데 어떻게 내 시간표를 꿰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
마침 눈에 보이던 돌부리를 걷어차며 짜증을 내던 우영은 제 곁의 재경이 어색하게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우영의 시간표를 그녀들에게 넘긴 장본인이었던 재경은 모르는 척 말없이 식은땀만 흘려 댔다.
“참, 우영이 너 헌법 2 과제는 했냐?”
얼른 화제를 돌리고 싶었는지 재경이 손뼉까지 치며 외쳤다. 우영은 생긋 웃는 재경의 반응에 의심쩍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 대꾸했다.
“했지. 사흘 전에.”
“신우영!”
순간 재경이 눈을 반짝이며 우영의 손을 움켜쥐었다. 우영은 갑자기 부담스러운 눈을 빛내는 재경의 행동에 경악하며 손을 빼려 했으나 우악스러운 재경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재경이 애원하듯 간절한 표정으로 외쳤다.
“우리 친구지?”
“뭐?”
“나 좀 보여 주라. 응? 과제 제출이 내일인데 나 하나도 안 했다!”
당당하게 외치는 재경의 말에 우영은 헛웃음을 삼켰다.
“넌 어째…… 제대로 과제 하는 꼴을 못 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우영은 ‘제발!’ 하고 소리치는 재경에게 전공서 사이에서 노트 하나를 빼 건넸다. 그러자 재경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있는 힘껏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신우영! 넌 최고야!”
“야, 미쳤냐? 징그럽게 왜 이래. 당장 안 떨……!”
저보다 손바닥 하나는 작은 재경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자신을 안아 버리자 기겁하며 그를 떼어 내려 애쓰던 우영은 마침 법학관 건물을 나서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곤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뭘 그렇게……. 아!”
황당해하던 우영이 갑자기 얼굴을 굳히자 덩달아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린 재경은 이내 자신의 시야로 들어온 남자 한 명을 발견하곤 작은 신음을 흘렸다.
고작 세 발자국.
그들과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둔 한 남자가 뒤집어쓴 후드 모자 사이로 음침하게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다. 머리카락 아래의 검은 눈동자는 매서운 시선으로 우영과 재경,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재경이 움찔거리자 이내 홱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재경이 슬그머니 우영에게서 떨어져 나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와, 저렇게 보니 진짜 음침하다.”
우영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말하는 재경을 스윽 내려다봤다. 재경은 돌아서서 가 버리는 남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 말이야. 백승진. 우영이 너희 고등학교였다며?”
재경이 우영의 본가 옆집에 산 지는 벌써 10년도 넘었으나, 우영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었다. 툭툭, 제 허리를 찌르며 묻는 재경의 말에도 우영은 입을 열지 않았다.
백승진.
그저 이름만 들었을 뿐인데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지 못한 재경의 의문은 계속됐다.
“예전에도 저랬냐?”
“……뭐가.”
“아니, 원래 저렇게 귀신 같았어? 키도 큰 녀석이 저러고 다니니까 더 눈에 띄잖아. 대체 뭐 하는 녀석이야? 그러고 보니 저 녀석, 학과 행사에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지?”
“…….”
“신우영?”
“몰라, 저런 녀석.”
석고상처럼 그대로 서서 남자를 직시하던 우영은 제 이름을 부르는 재경의 음성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젓자 재경이 픽, 실소를 터뜨렸다.
“너희 학교 수석이었다면서 저 녀석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이야, 신우영. 너 진짜 타인에게 관심 없구나? 역시 넌 훌륭한 이중인격자야. 겉으로는 다정한 척하면서 속은 냉혹하기 그지없지.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한다, 내 친구!”
우영의 등을 힘껏 두드리며 재경이 핵심을 찌르는 말을 던졌지만 제 갈 길을 가고 있던 남자를 여전히 바라보던 우영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 * *
신우영은 남들 앞에서는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를 짓는 예의 바른 청년이다.
그는 언제나 웃고 있으며, 모두의 말을 들어주려 노력한다.
그러나 사실 신우영은 그리 상냥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는 철저히 저 자신만 생각하고, 남들은 그리 신경 쓰지 않으며, 까칠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그의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를 오랫동안 봐 온 가족들, 우영의 옆집에 살았던 재경 가족, 그리고…….
‘……돌겠군.’
툭.
툭.
우영은 굳게 닫힌 오피스텔의 문 앞을 서성이며 한참을 망설였다.
분명 이곳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지기 전이건만, 계속 머뭇거리다 보니 이미 건물 밖의 해는 져 버린 상태였다.
쿵쿵, 뛰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보아도 소용이 없다. 자연스럽게 입 안 가득 욕설이 차오른다. 우영은 1803호라 적혀 있는 숫자를 있는 힘껏 노려보며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고뇌했다.
‘어쩌다 또 여기까지 온 거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영은 두 번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단 이 집의 주인은 우영이 추구하는 길과 너무나도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존재였다. 그 존재와 얽히면 위험해졌고, 가면 안 되는 샛길로 새는 기분인지라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데 왜 자신은 또 여기에 서 있는 것인가. 어째서?
돌아가자. 돌아가는 거야.
머리는 분명 몸을 돌리라고 외치고 있었지만, 빌어먹을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일그러진 얼굴로 이를 꽉 악물고 있을 때, 달칵 문이 열렸다. 우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기서 뭐 해.”
스윽, 누군가가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어깨를 살짝 넘기는 갈색 머리카락의 사내가 눈앞을 가리고 있던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그를 향해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의 검정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자 고요하던 가슴이 두근거려 우영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들어오려면 들어오지, 아까부터 문 앞에 서서 계속.”
하암, 길게 하품까지 하며 눈을 비비던 갈색 머리 사내는 우영이 주저하는 사이 문을 활짝 열며 현관 벽에 기대어 섰다. 우영은 이제 입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온 거…… 알고 있었어?”
머리를 벅벅 긁던 갈색 머리 사내, 승진이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는 우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내가 병신이냐? 공동 문 열어 준 건 나야.”
“……!”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이 오피스텔의 공동 문은 세입자의 확인 없이는 열리지 않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세대 호수를 눌렀기에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우영이 얼굴을 굳히고 서 있자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승진이 집 안으로 고갯짓을 했다.
“들어와. 거기 서서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주지 말고. 하암―”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승진의 뒷모습을 눈으로 멍하니 좇던 우영은 후우, 한숨을 흘리며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우영이 들어가자마자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이놈의 심장은 눈치라고는 없는지…….’
우영은 왠지 좋은 냄새를 풍기는 승진의 집 안으로 들어가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어느새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한데 묶고선 부엌 쪽으로 향하는 승진의 뒤를 말없이 응시했다.
저 녀석이 언제부터 머리를 길렀더라?
[야, 신우영.]
[……?]
[나 머리 기를까?]
[뭐?]
[그럼 네가 날 더 좋아해 줄 것 같은데. 안 그래?]
노란 고무줄로 아무렇게나 한데 묶은 승진의 갈색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고등학교 졸업식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래 봤자 겨우 작년 초의 일이었다.
당시 우영은 미소 짓는 승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고, 승진은 그것을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이후 줄곧 길러 온 머리가 어느새 어깨를 넘기고 있다니.
“그래서?”
부엌에서 돌아온 승진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두 잔을 우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우영이 좋아하는 에스프레소 투 샷에 꿀이 한 숟가락 들어간 커피였다. 습관이라도 된 것처럼 우영이 자리 잡은 테이블 앞쪽에 커피 잔을 내려놓은 승진이 빙긋 웃으며 우영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막 커피 잔을 잡으려던 우영에게 말했다.
“안 온다던 여기에 다시 온 걸 보니, 이제 드디어 내게 안길 마음이 든 거냐?”
* * *
우영은 공부를 잘했다.
아니,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자신과 두 쌍둥이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공부를 잘해야 했다.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만 하더라도 빨리 출세를 해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는 것이 그의 꿈이자 소원이었다.
다행히 우영은 중학교 시절 모든 시험에서 단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그것은 고등학교에서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학성 고등학교의 배치고사 시험에서 그는 처음으로 좌절을 느꼈다. 1등도 아닌 2등. 그의 짧은 인생에 있어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결과를 받아 들고 그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실수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뭐, 배치고사 정도야 한번 실수할 수도 있지. 본격적인 시험은 1학년 1학기 중간고사가 아니던가. 우영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다.
그러나 이어진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도, 기말고사에서도, 2학기에도, 2학년을 넘겨서도, 심지어 3학년 1학기 중간고사 때까지 우영은 단 한 번도 1등의 자리를 얻어 내지 못했다.
그가 한 문제를 맞히면 상대는 두 문제를 앞서 나갔고, 그가 세 문제를 맞히면 상대는 네 문제를 맞혔다. 장애물이라곤 없던 그에게 커다란 벽이 생긴 것이다.
“저 녀석이 백승진이야.”
백승진.
그것이 우영이 의식해 버린 라이벌의 이름이었다.
“백승진, 그 자식? 말도 마. 공부만 잘하지, 인성은 완전 쓰레기야.”
“돈은 꽤 많다던데?”
“엮일 생각 따윈 안 하는 게 좋아.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재학 내내 우영이 다니고 있던 학성 고등학교에서 1등 자리를 놓치지 않은 일명 ‘왕자’, 백승진. 언뜻 보면 표독스럽게도 보이는 검고 깊은 눈동자는 특유의 날카로움을 드러내는 데 한몫했고, 그 때문인지 승진의 주변을 맴도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저밖에 모르는 데다가, 남들에게는 관심도 없어 안하무인이라고까지 칭해지는 승진은 놀랍게도 학교에서는 잠만 퍼질러 자고, 수업도 빼먹기 일쑤에다, 온갖 소란을 몰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자’라 불리는 이유는 단 하나,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타고난 고귀함 때문이었다.
이제 갓 고등학생이 된 녀석에게 대체 무슨 고귀함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도리어 코웃음 쳐 줄 정도로 백승진이라는 녀석에게선 이상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교내에 돌던 소문으로는 아버지는 유명 로펌의 대표에 어머니는 법대 교수, 대법원장 출신의 할아버지에 법무부 장관 출신의 외할머니까지.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법조 집안 설도 있었고, 금융계 대기업의 재벌 3세라는 설도 있었지만 뚜렷하게 밝혀진 것은 없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왕자’라는 단어가 제 몸에 맞춘 듯 잘 어울리는 승진을, 우영은 싫어했다. 짜증스러웠고, 화가 났다.
잘난 얼굴에 부유한 환경에, 심지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천재형 머리까지 가지고 있다니. 신이 너무 가혹한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 분노가 치솟았다.
3학년 2반의 창가 맨 구석 책상에 엎드린 채 자고 있던 승진을 볼 때마다 우영은 생각했다.
언젠가 한 번쯤은, 정말 언젠가 한 번쯤은 네놈을 내 발아래 무릎 꿇리리라.
시험만 보면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매번 제 위에 이름을 올려 둔 그를 굴복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백승진은 열이 받을 정도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건지 모르겠지만, 타인을 너무 의식하지 않았다.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의 이름도 외우지 못하는 듯했고, 자신과 제 이름이 다른 학우들 사이에서 라이벌로 오르내린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우영이 수면 아래서 아무리 발을 흔들어도 수면 위에 둥둥 떠 있는 승진은 그 파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어떡하면, 대체 어떡하면 저 녀석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지?
“한 번만 맞춰 보자.”
그러던 와중 놀랍게도 기회가 왔다. 아주 우연한 사고에 의한 인식이었다. 입맞춤, 아니, 그것은 입맞춤이라고도 부르고 싶지 않은 단순한 접촉 사고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후 우영과 승진의 상황은 반전됐다.
우영은 애절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제발 한 번만.’ 하고 절절하게 애원하는 승진을 말없이 쳐다봤다. 남자 새끼가 남자 새끼한테 입을 맞추게 해 달라고 빌다니. 이 얼마나 치욕적인 일인가!
‘여자, 남자 가리지 않는다더니…….’
소문이 사실이긴 했나 보군.
소문은 믿을 것이 되지 못했기에 지금까지는 믿지 않았으나 승진의 태도를 보자니 속으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안 되냐?’라는 표정을 짓는 승진을 가만히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우영은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앞으로는 내가 이 녀석의 약점을 쥘 수 있겠군―
“대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던 ‘공부’, 혹은 ‘능력’으로 승진의 신경을 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백승진의 뇌리에 제 이름을 각인시켰고, 그에게 구걸이라는 치욕도 안겨 주었으니 승리한 거지, 라 여기던 우영은 유달리 반짝거리는 승진의 붉은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덮었다.
어차피 매일 닦고 씻는 입술 따위 여자에게 하든, 남자에게 하든 우영에게는 큰 가치가 없었으므로 ‘별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오판이었다.
“나…… 나, 너 좋아한다!”
사고였던 첫 번째 입맞춤, 그리고 백승진을 굴복시키기 위해 선사해 준 두 번째 입맞춤, 그리고 수능 전 부적을 핑계 대며 빼앗았던 세 번째 입맞춤 이후 우영은 승진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뭐?’
우영이 지난 3년 내내 지켜봐 온 백승진은 쉽사리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선언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학성고의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철저한 이기주의자였고, 저밖에 모르는 독불장군이었으니까.
그런 그가 먼저 ‘좋아한다’고 외칠 정도면, 이것은 심상찮은 일이 된다.
물론 어디까지나 백승진이 ‘미친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으나 그 말을 들은 신우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팔딱였다는 것이, 우영에게 있어서는 더욱 크나큰 문제였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있는 힘껏 외치는 승진을 보며 여유롭게 대답하고 옥상을 나섰으나, 승진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좋아한다니. 저 녀석이 제정신인가?
‘뭔가…… 잘못되고 있군.’
처음, 우영이 승진의 앞에 나선 것은 그에게 자신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어 승진의 약점을 잡을 생각이기도 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내내 저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 녀석이니 이젠 제가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흔쾌히 입술 정도는 내어 준 것이었고,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녀석의 행동에도 코웃음 치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백승진의 고백 이후, 상황이 조금 이상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사히 대학에 진학한 승진은 그 으리으리하다던 본가를 나섰다.
“받아.”
“이게 뭔데?”
“우리 집 열쇠.”
승진은 무려 자신이 모아 둔 돈으로 학교와 조금 떨어진 오피스텔에 들어가 살기 시작했는데, 우영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그 오피스텔의 비밀번호를 알려 주고, 스페어 키를 건네주기까지 했다.
“나 본가에 말했다.”
“뭘?”
“남자 좋아한다고.”
“……뭐?”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였다. 다가가서도 안 될 존재였고, 도서관에서 그를 발견해도 모르는 척했어야 했다. 게다가 그날, 사고로 입을 맞춰서도 안 됐고, 그 후로 자의로 입을 맞추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존재였다. 이렇게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곤란한 녀석.
제기랄.
아무리 내 위에 있는 녀석이 궁금하다고 해도 철저하게 미친 녀석한테는 말을 걸지 않는 건데. 다가가지 않는 건데. 눈길을 주지 않는 건데.
입 맞추지…… 않는 건데.
우영의 생각보다 백승진은 훨씬 더 상상 이상으로 미친놈이었다.
* * *
백승진과 신우영.
이제 막 성인이 된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감정.
승진은 그것을 호감, 혹은 사랑이라 칭하는 것 같았지만, 우영은 부정했다. 상대는 어떨지 몰라도, 자신은 결코 백승진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승진을 대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계에 가까웠다. 승진은 자신의 출세에 있어 크게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될 수 있으니, 최대한 그를 제 아래 굴복시키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과는 달리 쥐 죽은 듯 고요히 지내는 승진을 묵인하는 것이었고, 내버려 두고 있었다.
철저하게, 저 스스로를 위해서.
특히나 백승진은 놀랍게도 신우영이라는 인간 자체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우영은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승진을 따라 주는 척, 그를 위하는 척, 그에게 관심이 있는 척,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승진은 그 때문에 자신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
“나, 너 안아도 되냐?”
백승진이 그 말을 꺼내기 시작한 것은 우영이 슬슬 이 관계에 대한 위험함을 직감하던 시기였다. 우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안아도…… 되냐고?’
입을 맞춰도 되냐는 것도 아닌, ‘안아도 되냐’라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누가 누굴 안아? 이 녀석이, 나를?
승진과 우영의 키를 정밀 분석해 보자면 아주 미세한 차이로 두 사람의 키는 똑같았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 녀석에게 재력을 붙여 줬다면 내게는 키라도 붙여 주지, 하필 같을 건 또 뭔가. 우영은 ‘젠장, 키까지 같냐?’ 하고 입술을 씰룩거리는 승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키는 고등학교 시절보다 조금 더 자란 185센티미터. 대한민국 남자의 평균 키를 한참 웃돌았다.
그런 우영을, 승진은 감히 ‘안겨도’ 되냐가 아닌 ‘안겠다’고 물어 왔다. 우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반대라면 또 몰라.
……아니. 반대도 싫다.
사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백승진과 남들의 눈을 피해 만나 입을 맞추는 이 상황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지 고심하던 그때 들려온 말이었다. 이때라면, 지금 이 순간이라면 백승진을 이용할 만큼 이용했으니 걷어차기도 쉬울 거다. 남들 눈에도, 그리고 제 눈에도 이상하게 보이는 이 관계를 끊어 낼 수 있는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일단 우영에게는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저만큼이나 시커먼 녀석을 안기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안기는 것은 더 싫었다. 그러니 이 미친놈에게서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적절한 이유는 되지 않을까. 그것을 핑계 대며 이 녀석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 내면 되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데―
“꿈 깨.”
이상하게 백승진의 검은 눈을 보고 있으면 생각했던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네가 대면 모를까, 내가 댈 일은 없다.”
안고 싶은 마음도, 그렇다고 안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는 말 대신, 항상 상상 이상의 말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백승진과의 말도 안 되는 그 포지션 경쟁이.
* * *
“하아.”
더럽게…… 촉촉하네.
우영은 몇 번을 탐해도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빌어먹을 입술을 미친 듯이 핥으며 생각했다.
이쯤 되면 질리는 감도 있어야 하는데 왜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거지. 빌어먹을.
쿵쿵쿵쿵―
심장박동은 이미 제어 불가 상태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뜨거운 혀로 붉은 입술을 쓸고, 벌어진 틈 사이를 파고들며 숨어 있던 혀를 옭아맨다. 제게 반응하듯 미간을 좁히던 승진의 눈썹이 한데로 모아졌다. 우영은 다른 한 손으로 승진의 뒤통수를 거칠게 감싼 뒤 제게로 끌어당겼다.
더욱 깊숙하게, 승진의 입 안을 파고든다. 진한 타액이 섞였다. 호흡이 가빠 와 목이 막히는 듯했지만, 한번 시작된 키스를 멈추지 않던 우영은 가만히 제 키스를 받아들이던 승진의 손이 제 왼쪽 허벅지에 닿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뭐야.”
승진은 갑자기 저를 밀쳐 버리는 우영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우영은 거칠게 숨을 흘리며 승진을 노려봤다. 그러자 승진이 인상을 쓰며 툴툴거렸다.
“너는 해도 되고, 난 안 되냐?”
물론 이번 입맞춤을 시작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신이 맞았다. ‘안길 마음이 든 거냐?’ 하고 피식 웃는 승진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무작정 입술을 들이밀었다. 이유 따윈 없었다. 그냥 손이 먼저 나갔다.
그사이 자연스럽게 응한 승진은 저보다 더 날뛰며 자연스럽게 바지 지퍼를 내릴 생각이었던 게 틀림없다. 어이없다는 어조로 말하던 우영은 어느새 앉아 있던 거실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승진에게 대꾸했다.
“넌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려 하니까.”
“그게 뭐 잘못됐냐?”
승진이 인상을 쓰자 우영이 대꾸했다.
“네가 안긴다면 문제는 없지.”
“안기는 건 내가 아니라 너여야지.”
코웃음 치는 승진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안겨? 라고 똑같이 응수하고 싶어진다. 누가 봐도 안겨야 할 사람은 저보다 예쁘장하게 생긴 백승진이 아닌가.
물론 ‘예쁘장하다’는 정도가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서는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차이가 있을 테지만, 어쨌든 상위 포지션에 어울리는 건 누가 봐도 나지.
뭐, 그렇다고 진짜 안을 생각은 없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신우영.”
우영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슥 닦고 있을 때였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우영을 올려다보던 승진이 자신을 쳐다보는 게 보였다. 우영은 ‘왜?’ 하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승진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승진이 검은 눈을 일렁이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툭 말을 던졌다.
“너랑 나, 무슨 사이냐?”
……뭐?
신우영은 평소 잘 놀라는 성격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백승진이 말을 던지면 정신을 못 차린다. 우영이 승진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다.
백승진이 무어라 말을 하면― 정신없이 휘둘리는 것.
우영은 명치를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승진을 쳐다봤다. 승진은 그런 우영의 얼빠진 표정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그를 응시하더니 이내 느릿하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너, 나 좋아하기는 하냐?”
자신을 좋아한다던 백승진의 고백 이후 약 2년 만에 들은 질문이었다.
우영은 승진의 고백 이후 단 한 번도 그에 대한 질문을 확실히 해 본 적이 없었다. 승진도 굳이 묻지 않았고, 제가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듯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지?
우영은 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그러자 승진이 흐트러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뭐, 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승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신우영을 좋아하는 게 맞거든. 지금 당장이라도 네놈을 발가벗겨서 한 올, 한 올 다 먹어 버리고 싶은데 내 욕망의 대상인 상대는 나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안 서서 말이야. 너랑 나랑 만난 지가 무려 2년짼데,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네. 아니, 우리가 만나는 사이가 맞긴 한가? 흠, 그러고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아무리 내가 제멋대로라지만, 상대의 동의 없이 막 덮칠 수는 없잖아?”
픽 웃으며 낮게 말을 내뱉는 승진의 속눈썹은 아래로 내려가 있다. 스윽, 옷을 다 정리한 승진이 고개를 들어 우영을 바라보았다.
“신우영 너, 진짜 나랑 함께 있고 싶은 거 맞냐?”
승진이 우영의 곁을 맴돌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어떻게 막지 못했다. 아니, 저 역시 은근히 승진을 제 시야에 두고 싶었기에 그것을 허락했다. 그래야만 예전처럼 제 이름이 승진의 이름 아래 가리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철저하게 ‘그것’만 생각하느라 잊고 있었다. 어째서 백승진이 제 그림자 아래서 쉬고 있는 건지. 어째서 저를 이리도 잡아먹을 듯 응시하고, 어째서 매번 제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려 애쓰는 건지, 전부.
“…….”
우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피식 웃던 승진이 뒷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 내일 머리 자를 거다.”
“……뭐?”
“이제 누구한테 잘 안 보여도 돼.”
그게…… 무슨?
승진은 남자치고는 꽤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백승진에게 씁쓸한 표정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승진이 우영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본가에서 백기 들었어. 앞으로 내 맘대로 살라고 하더라. 자중은 끝났다. 더 이상 네놈이랑 이딴 짓 하는 것도, 되도 않는 포지션 싸움으로 다투는 것도, 내 감정을 이용만 하는 널 지켜보는 것도 다 끝이라 이거지.”
다 알고…… 있었어?
한 번도 자신이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들킨 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승진이 키스를 원하면 입술을 내어 주었고,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하면 보내 주었으니까.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는데, 어째서 ‘이용’했다는 걸 들킨 거지?
우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승진은 본심을 들켰다는 사실에 사색이 된 우영의 코앞까지 다가오더니―
“너 말고 나 좋다는 놈 만나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실컷 안을 거다.”
빙긋 미소를 그리며 속삭였다.
“그러니 꺼져, 신우영.”
* * *
“씨발 새끼.”
“어? 우영아, 너 방금 뭐라고 했어?”
……!
“아, 아니야. 아무것도.”
휘휘, 고개를 젓는 우영의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이번 수업을 듣기 위해 제 옆에 앉아 있던 같은 과 동기 예주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우영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태연하게 대답한 후 쿵쿵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제기랄!’
그 자식 때문이다.
그 자식 때문에, 하마터면 평정을 잃을 뻔했어!
우영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철렁거렸던 조금 전의 상황을 무사히 무마시킨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민국대학교 법학과 2학년생, 신우영은 일종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내 것’인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가면과 ‘내 것이 아닌’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가면, 두 가지를 번갈아 사용하곤 했는데,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의 차이를 철저하게 구별했다.
예주를 비롯한 민국대 법학과의 동기들은 후자, ‘내 것이 아닌 것’의 부류에 속했으므로, 그들을 대할 때는 친절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남들 눈에 비치는 우영은 상냥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태도를 가진, 언제 어디서나 친절한 법학과의 젠틀남이었다. 타고난 외모는 그의 인기를 부각시키는 데 충분했고, 고등학교에 이어 지금까지 다정한 남자로 남녀 불문 호감을 얻고 있었다.
현재, 수업이 진행되기 직전의 강의실에서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예주는 아마도 우영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우영이 강의실에 앉자마자 몇몇 여자 동기들과 말싸움을 벌이다 결국 승리를 하고 앉았으니 그 정도는 예상 가능했다. 우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비교적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하얀 얼굴의 예주를 흘긋거렸다.
‘돌겠군, 진짜.’
보통의 평범한 남자라면 이렇게 예쁘고 하얀 애들을 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야 한다. 그래야 정상이고, 그래야 평범한 거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대체 어째서……
[꺼져, 신우영. 그리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 개자식아.]
그 개자식의 올라간 입꼬리를 떠올리면,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치솟는 거지?
발정난 개도 아니고 씨발, 진짜.
‘그 녀석이랑은 이제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며칠 전, 백승진의 선포 이후 우영은 드디어 약 2년 동안 이어진 승진과의 이상한 관계를 끝냈다. 연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었던 그 이상한 관계의 종말이 이렇게 기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찝찝한 이 기분은 대체 뭔지. 확실히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로 인해서인가, 속이 메스꺼운 것 같기도 하다. 우영은 두꺼운 전공서에 얼굴을 푹 파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우영아, 어디 아파?”
거침없이 뛰는 그의 마음 따위는 알 리 없는 예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염려 가득한 음성을 뱉어 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예주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싶었지만, 제 평판을 지키기 위해 우영은 슬쩍 얼굴을 돌려 예주를 바라보고는 흐리게 웃었다.
“머리가 좀 아프네.”
“두통이야?”
“그런 것 같아.”
“어머, 어떡해! 그, 그럼 눈 감고 있을래? 내가 교수님 오면 깨워 줄게!”
“……그래 줄래?”
“당연하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예주는 그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서든 제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예주의 노력에 우영은 속으로 박수를 보내며 대답했다.
“고마워. 부탁할게.”
‘응!’ 하고, 예주의 답변이 들려오자마자 우영은 눈꺼풀을 아래로 스르륵 내렸다.
[나 내일 머리 자를 거다.]
눈을 감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영은 미간을 좁혔다.
수능 전, 옥상에서 담담하게 충격 발언을 했던 그날처럼, 백승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너무도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우영은 자신의 심장을 마구 들썩이게 만드는 말을 자꾸만 뱉어 내는 승진이 싫었다. 무의식적으로 이가 악물린다.
[더 이상 네놈이랑 이딴 짓 하는 것도, 되도 않는 포지션 싸움으로 다투는 것도, 내 감정을 이용만 하는 널 지켜보는 것도 다 끝이라 이거지.]
되도 않는 포지션 싸움이라니.
그럴 거면 네가 져 주면 되잖아! 왜 굳이 이기려 들어?
그리고 내가 네 감정을 이용하는 걸 알았으면 진작 끊어 내지, 왜 끝까지 붙잡고 있어?
병신 새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시금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우영은 서서히 부드득, 부드득 이까지 갈기 시작했다.
[너 말고 나 좋다는 놈 만나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실컷 안을 거다.]
안기는 무슨.
백승진은 ‘안는 것’보다 ‘안기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우영의 생각에는.
그 오만한 얼굴이 눈물로 가득 범벅이 되어 흐트러지는 모습은 생각 이상으로 짜릿할 것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온몸의 털이 오소소 돋아났―
‘……젠장.’
갑자기 다리 사이로 피가 쏠리자 우영은 벌떡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 왜, 왜 그래, 우영아?”
방금 전까지 머리가 아프다던 우영이 갑자기 허리를 펴자 수줍게 웃으며 그를 지켜보던 예주가 눈을 크게 떴다. 우영은 서서히 반응하기 시작하는 다리 사이를 한데로 모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너, 땀 나는 것 같아! 얼굴도 하얘!”
“……아.”
“내가 물이라도 좀 가져다줄까?”
“…….”
“잠깐만! 아까 복도에서 정수기 봤어!”
우영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예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의실 안을 벗어났다. 우영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 할 일을 찾아 나서는 예주의 뒤를 지켜보고 있다 쓰게 웃었다.
살짝 떨어진 곳에 앉아 우영과 눈이 마주친 재경은 그런 우영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우영은 그게 아니라는 듯 손을 살짝 내젓다가 다시 전공서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진정해라, 좀.
진정해.
신성한 강의실에서, 침대에 누워 있을 누군가를 상상하다 발기까지 해 버린 걸 들키는 것만큼이나 쪽팔리는 짓은 없다.
우영은 후우, 후우 숨을 가다듬으며 안정을 되찾으려 했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아니 예주가 돌아오기 전에 이 상황을 원상 복귀시켜야만 했다.
‘그러니, 꺼져.’
……망할.
하지만 자꾸만 맴도는 승진의 낮은 목소리가 도통 잊히질 않아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 뿐이었다. 우영은 더욱더 깊숙하게 얼굴을 묻었다.
미치겠군, 진짜.
“뭐야?”
“누구야?”
“저런 애가 있었나?”
예주가 정수기 물을 뜨러 가고, 우영이 전공서 위에 얼굴을 파묻은 지 1분 정도 흘렀을까. 눈까지 감고 있던 우영의 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수업이 시작되려면 10분도 더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우영은 돌연 소란스러워진 강의실의 변화에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란의 원인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못 보던 학생이 있군.”
터벅터벅, 강의 시간에 맞추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형법각론의 최태익 교수가 우연히 고개를 돌린 곳에서 낯선 얼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최 교수의 말에 모든 이들이 숨을 죽여 한 곳을 바라보았다. 심드렁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던 남자는 페이지 속의 글자를 들여다보기 위해 좁히고 있던 미간을 폈다. 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그래, 자네 말일세.”
최 교수의 인자한 얼굴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깔렸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강단을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최 교수가 고개를 주억였다. 남자는 여전히 따분한 얼굴을 하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백승진입니다.”
“백승진?”
“예.”
“아아. 자네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백 전 대법원장님 손자라지?”
“…….”
“그런데 자네도 이 수업을 듣고 있었나? 출석부엔…… 이름은 있는 것 같군. 출석도…… 꼬박꼬박 했고. 그런데 왜 나는 자네를 본 적이 없지?”
그 말에 갈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자른 지 얼마 안 됐고요.”
“뭐? 머리카락을 길…… 아! 그럼 왼쪽 구석에서 그 귀신 같은 머리를 하고 있던 학생이?”
“예, 접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승진을 보고 최 교수는 하하 웃었다.
최 교수가 들고 있던 전공서를 강연대 위로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 훨씬 보기 좋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 머리를 유지하도록 해. 자, 그럼 수업 시작하기 전에 먼저 출석부터 부르겠네.”
차르륵, 출석부를 펼치는 최 교수의 입술 사이로 아직 형법각론을 이수하지 못한 4학년 학생들의 이름이 호명됐다. 최 교수와의 간단한 대화를 끝낸 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펜을 휙휙, 돌리고 있는 남자는 제게 꽂힌 시선을 전부 태연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잘생긴 뒤통수를 보기 위해 일부러 그의 뒤에 앉은 몇몇 여자 동기들이 깔깔 웃으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훨씬 보기 좋은 정도가 아니다.
그가 강의실 내로 발을 내딛는 순간 모두 입을 닫아 버릴 정도로 남자는 좌중을 압도했다. 그리고 그건 남자의 학창 시절 내내 있어 왔던 아주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난 1년이 오히려 비(非)일상에 가깝다고 해야 옳았다.
‘…….’
우영은 미간을 좁혔다.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해도 눈길이 간다.
빌어먹을.
대학에 진학한 이래 항상 앉던 계단식 강의실의 첫 번째 줄 왼쪽 구석 자리가 아닌, 강의실 문과 가장 가까운 오른쪽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승진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시위라도 하는 건가.
우영은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승진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괜스레 신경이 쓰인다.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안 쓸 수가 없다. 그렇게 보기 싫다며 자르라고 노래를 부를 때는 콧방귀만 뀌더니 돌연 머리를 자를 거라는 말을 뱉어 내자마자 다른 사람이 됐다. 이전이었다면 이상하게 눈이 가는 그 검은 눈동자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며 좋아했을 텐데, 하필 인연을 끊은 후에 일어난 일이라 그런지 개운치 못했다.
최 교수가 이미 수업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사각사각―
굳은 얼굴로 강단 쪽을 바라보고 있는 승진의 옆얼굴을 노려보고 있을 때, 곁에서 요상한 소리가 들렸다. 힐끔 시선을 돌리니 연습장 같은 곳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 예주가 보였다.
<우와! 진짜 충격이야. 안 그래?>
우영의 손등을 콕콕 찌르며 연습장을 가리키는 예주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우영은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예주를 바라보았다. 예주는 저와 승진을 흥미로운 눈길로 번갈아 응시하며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정말로 백승진이라고? 쟤가? 하긴, 체격이나 분위기가 왠지 묘한 느낌을 주기는 했는데 저렇게 잘생긴 줄은 몰랐어!>
학창 시절 내내 들어왔던 백승진의 외모에 대한 찬양이 오늘따라 왜 이리도 듣기 싫은 건지 모르겠다. 사각사각, 메모장 위에 펜으로 미친 듯이 할 말을 써 내려가고 있는 예주를 가만히 지켜보다 우영은 몸을 움찔거렸다.
두근.
심장이 미세하게 뛴다. 순간적으로 저를 흘긋거리는 승진의 눈동자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우영은 일부러 눈에 힘을 줬다.
‘……!’
그런 저를 바라보던 승진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고 이내 획, 제 시선을 피하는 것까지 확인하자 무심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한 우영은 가까스로 충동을 억눌렀다.
<우영이 너, 백승진이랑 같은 학교라고 하지 않았…… 우영아, 왜 그래?>
입술을 세게 악물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우영을 향해 예주가 의아한 듯 펜을 사각사각 움직였다. 우영은 굳은 얼굴로 ‘수업에 집중하자.’라는 말을 남긴 후 전공서로 눈을 돌렸다. 예주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제기랄.’
세게 부여잡은 펜이, 부러질 것만 같다.
* * *
[백승진.]
[왜.]
[너, 다시 한 번 말해 봐. 나보고 정말…… 꺼지라고 했냐?]
그날, 우영은 인상을 쓰며 승진을 노려봤었다.
제가 할 말을 마친 뒤 무료한 표정까지 지으며 소파에 앉아 있던 승진은 리모컨을 잡고 있다 서서히 우영을 응시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해서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꺼지랬다.]
[……!]
[너도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았어? 더 이상 의미 없는 줄다리기에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지. 이건 너 역시 동의하는 거 아니었나?]
[…….]
폐부를 찌르는 승진을 보며 우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코웃음까지 치던 승진은 말없이 서 있는 우영을 쳐다보지도 않고 채널 버튼을 이리저리 눌러 댔다. 브라운관 안에서 들려오는 예능 프로그램의 방청객 웃음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울렸다. 자신이 있든 없든, 더는 개의치 않는 듯한 승진의 모습이 불쾌해져 우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앞으로 나 봐도 아는 척하지 마라.]
제가 생각하기에도 유치하기 그지없는 말에 승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밖에서는 한 번도 아는 척한 적 없다.]
그 말에 날카롭게 쏘아 주고 싶었지만 참아 냈다. 사실이었으니까. 젠장할! 우영은 신경질적으로 현관을 나서며 투덜댔다.
[거만한 새끼!]
승진은 지지 않았다.
[제 마음도 모르는 병신 새끼!]
백승진과의 불유쾌한 인연은 고등학교 3학년, 도서관에서의 그날 이후 줄곧 이어졌다. 몇 번이고 그와 다퉜다 대화를 가장한 스킨십을 나눴고, 또다시 다투기를 반복했다.
대학교 1학년 땐, 2학년 때 치르기로 한 사법고시와 대학 생활로 인해 스킨십만 주고받았다. 그리고 2학년이 되고 정신없이 흘러간 1학기 이후 다시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지금까지, 우영과 승진은 몇 번이고 시답잖은 말싸움을 했는지 손으로 일일이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접점이라고는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것뿐.
집안 환경도 다르고, 친구 관계도 다르고, 심지어 얼굴만 부딪치면 으르렁거리기에 바쁜 두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합의하에 입술을 맞대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적어도 이 세상에 그들 외엔 없었다.
그래 봤자 결국 백기를 들 건 저면서.
두 사람이 별거 아닌 일로 다투게 되면 항상 먼저 고개를 숙이는 사람이 있었다.
우영은 적어도 그것이 자신은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백승진은 의외로 자신의 입술에 꽤 집착을 하고 있으니까.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우영과 진한 키스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지, 그들의 다툼은 일주일을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가벼이 여겼다.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법조인의 대열에 합류하여 좋은 집안의 여자와 결혼을 하기를 바라는 제 부모님께 자신의 성적 취향을 당당히 커밍아웃한 백승진이 이번에도 또 백기를 들어 올릴 거라 여겼다.
난데없는 커밍아웃 이후 충격을 받은 승진의 부모님이 학비 지원을 거부하자 스스로 등록금을 벌어서 대학에 다니고, 남들 보기 부끄러우니 그 잘난 얼굴도 감추고 다니라는 말을 놀랍게도 성실하게 듣고 있던 그가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린 앞머리를 잘라 버리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 여긴 까닭도 있었다.
그 도톰한 입술의 촉감을 달콤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저뿐만이 아니므로, 저보다 더 갈구하는 눈빛을 보내는 승진이 언제나 약자라고만 생각했다.
나는 널 그리 많이 필요로 하지 않지만, 너는 나를 죽도록 원하잖아.
우영이 그의 앞에서 마스크를 벗어던질 수 있었던 것은 남들 앞에서는 냉담하고 차갑던 그 얼굴이 욕망으로 물들어 버리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기 때문이다.
약자는 백승진, 강자는 신우영.
적어도 우영이 알고 있는 선에서 더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이 승진이어야만 하는데…….
“승진아, 이것 좀 먹어 봐.”
“이야, 설마 나 주는 거야?”
“응. 어때? 맛있어?”
“오, 맛있네. 땡큐.”
“그럼 내가 매일 점심 싸다 줄까?”
“뭐? 그래도 돼?”
“당연하지! 내 거 만들 때 네 것까지 만들면 돼.”
“이야, 그거 고마운데. 미안해서 어쩌지?”
“미영이 도시락 말고, 나도 도시락 만들 수 있어!”
“나도!”
“나도!”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탁―
우영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세게 테이블로 내려놓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제 곁에 철썩 붙어 있던 여학생들이 어느 순간 승진의 옆에 찹쌀떡처럼 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영은 평소와 달리 생글생글 웃으면서까지 한 여학생이 건네는 새우튀김을 오물거리고 있는 승진의 기분 나쁜 태도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우영아, 왜 그래?”
말없이 제 곁에 앉아 있던 예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재경 역시 마찬가지. 서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고 있는 우영이 이상했는지 그와 함께 학생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있던 친구들이 눈을 크게 떴다.
우영은 제 돌발 행동에 한 테이블 너머에서 보란 듯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식사를 하고 있던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꽂힌 것을 발견하고는 획 몸을 돌렸다.
“밥맛이 없다. 먼저 갈게.”
“어? 야, 너 아직 한 숟가락도 안……!”
재경이 뭐라고 하든 몸을 돌리며 학생식당을 벗어난 우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오후 수업이 하나뿐이다. 기분도 더러운데 그냥 이대로 정문 쪽으로 나가 버릴까.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는 우영의 얼굴은 도저히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흐레.’
자그마치 9일.
일주일이 지나기도 전에 발정난 개처럼 제게 달려들곤 하던 백승진이 저를 바라보아도 싸늘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보낸 지 벌써 아흐레째다.
강의실에서 눈을 마주쳐도 먼저 얼굴을 돌려 버리기 일쑤였던지라 점점 불쾌감이 차올랐다.
‘감히 날 무시해?’
처음에는 제 딴엔 노력하나 보다, 라고 여겼지만 갈수록 그의 행태를 두고 볼 수가 없어진다. 우영은 아마도 일부러 제 앞에서 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웃음을 지었을 오만한 승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절대로…… 질투는 아니야.’
쿵쿵, 뛰는 심장의 박동이 이 기분 나쁜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었지만 우영은 강하게 부정했다. 질투라니. 내가 여자도 아닌데, 백승진 옆에 앉아 있는 그 여자들을 질투할 리가 없잖아. 우영은 스멀스멀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르지 말라고 할걸.’
차라리 긴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을 때가 나았다. 동기들에게 기분 나쁘다는 소리를 듣고 살던 승진이 훨씬 그리워졌다. 저와 있을 때면 항상 제멋대로 굴기는 해도 그게 꼭 싫지는 않았는데.
우영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다시 펴며 어느새 다다른 정문 앞 버스 정류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빌어먹을 자식.’
진짜 어이가 없다. 그 자식이 뭐라고.
순 망나니에 틈만 나면 제 지퍼를 아래로 내리려고 하는 변태 자식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이렇게 신경을 쓰는 건지. 머릿속에서 지워 낼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을, 왜 자꾸 시선이 가는 건지. 우영은 부드득, 부드득 이를 갈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빠앙―!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던 우영의 표정은 심상찮았다. 우영을 발견한 몇몇 학생들이 그에게 아는 척을 해 보려고 했지만 워낙 살벌했으므로 입도 벙끗하지 못하고 전부 그를 지나쳤다.
깊은 상념에 빠져 있던 터라 그들의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우영은 제 상념을 깨우는 클랙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드르륵.
차창이 아래로 내려갔다. 동그래진 우영의 눈에 지난 아흐레 동안 제가 시킨 대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그의 신경을 자극한 승진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개자식이.
“백…….”
핸들을 잡은 채 자신을 응시하던 승진이 빙긋 입꼬리를 올리자 우영이 눈을 크게 일렁이며 입술을 열었다. 승진은 반쯤 휘어진 눈을 원상 복귀시킬 생각 따위는 없는 듯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금부터 미팅하러 간다.”
……뭐?
말뜻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우영에게 승진이 다시 한 번 붉은 입술 사이로 음성을 흘렸다.
“누구보다 훨씬, 사랑스러운 애인 만들러.”
* * *
째깍째깍―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우영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째깍째깍. 멈출 줄 모르고 흘러가는 초침 소리를 신경 쓰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우영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과감하게 수업을 빼먹고 자취방이 있는 학교 앞 원룸촌에 들어선 지 벌써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미 해는 뒤로 넘어간 상태였다. 슬쩍 돌아본 창밖 풍경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기 위해 몇 번이고 눈을 감고 있었건만,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제길!”
우영은 결국 입 밖으로 상스러운 소리를 흘리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돌겠네, 진짜.”
한번 맴돌기 시작한 욕설은 도통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우영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까부터 계속해서 그의 신경을 자극하던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 오후 7시.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훌쩍 지나 버린 건지. 우영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펴지 못하고 뚫어질 듯 벽시계를 노려보다 책상 위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영의 검은 눈동자는 책상 위에 고요하게 놓인 핸드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 지금부터 미팅하러 간다.]
드르륵, 내려간 차창 너머로 보이던 비릿한 미소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도발하는 것이 분명해서인지 더욱 잊을 수가 없다. 빌어먹을.
[누구보다 훨씬, 사랑스러운 애인 만들러.]
그 개자식은 당황한 우영을 향해 피식 웃으며 매캐한 연기도 뿜어내지 않는 고급 스포츠카를 이끌고 사라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다니던 모습과는 천양지차여서 홀로 남은 우영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우영은 창밖으로 왼팔을 들어 올려 제게 손까지 저어 주는 여유로움을 잊지 않던 그에게 이를 갈며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든 말든.”
어차피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 미친놈이 미팅에 가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자신이 이렇게 기분이 나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요란한 소음을 일으키며 제 앞에 나타난 놈의 스포츠카 때문.
있는 집 자식이라는 걸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대체 그게 무슨 행동이란 말인가?
역시 긴 머리일 때가 좋았다.
우영은 저를 향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저 스포츠카의 주인이 누구냐 물어보던 여자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사랑스러운 애인? 복종하는 애인이겠지.”
우영이 아는 백승진은 절대로 타인 앞에서 호락호락하게 바지 지퍼를 내릴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고등학교 때 도서관에서의 일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는 했지만, 그 뒤로 일절 그런 일이 되풀이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우영은 코웃음 쳤다. 그냥 해 본 소리일 거다.
이것은 틀림없이 주도권 싸움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아마 백승진은 어떻게 해서든 제 바지 지퍼를 마음대로 내리기 위해 비장의 한 수를 둔 거겠지. 그렇게 하면 걸려들 것이라 여긴 걸까.
“날 너무 쉽게 봤군, 백승진.”
미동 없는 핸드폰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우영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을, 물러도 너무 무르게 봤다.
백승진의 입술이 아무리 촉촉해 보이고 탐이 나도 고작 입술 하나에 제 몸을 내어 줄 정도로 우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한 번 깔리게 되면 계속해서 깔리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거라 생각했던 건가.
“변태 새끼.”
기분이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 동요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더 이상은 녀석에게 관심이 없다.
이미 지난 2월과 6월, 우영은 1차와 2차 사법고시를 훌륭하게 치러 냈다. 앞으로 남은 것은 올해 11월에 있을 3차 시험뿐. 승진 역시 묵묵히 학교를 다니며 저와 함께 사법고시를 치르기는 했으나 저보다 완벽하진 않으리라.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1학년 때 이미 사시를 패스할 생각이었지만 1년 정도 늦어져도 상관없었다. 2학년 재학 중의 사시 패스도 충분한 이목을 끌 거고, 그거면 만족한다고 생각했으니 더 이상 승진을 제 아래 묶어 둘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세상에 널린 것은 남자이고, 솔직히 말해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으니까. 이상하게 백승진만 보면 미칠 듯한 충동이 차올랐지만 다른 남자를 보고도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서 아직 이성을 향한 욕망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난 끄떡없어.”
우영은 자답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백승진이라는 녀석과 제대로 대화를 트고 입술을 부딪친 지는 길어 봤자 2년밖에 안 된다.
자신의 인생에서 1년 정도 웬 이상한 놈과 허비했다고 치면 된다.
어차피 인생은 기니까.
그는 평정을 되찾은 검은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좁은 자취방을 둘러보니 책장에 꽂혀 있는 두꺼운 법전이 보였다. 머리가 아플 때는 법전 속의 내용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 우영은 입꼬리를 올리며 책장으로 걸어가려 했다.
Rrrr. Rrrr.
순간 들려온, 핸드폰의 벨 소리만 아니었더라면.
“……!”
침대를 벗어나 책장으로 향하던 우영의 몸은 책상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벨 소리에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우영이 책상으로 다가, 아니 달려가기까지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우당탕!
“큭!”
이어 들려온 굉음은 몸을 비틀며 책상으로 달려가던 우영이 책상 앞에 놓여 있던 의자와 부딪치면서 발생했다. 젠장할! 우영은 지이잉, 울려 대는 핸드폰으로 긴 팔을 쭉 뻗으며 의자와 부딪친 무릎을 다른 한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여보, 끅, 세요!”
심장이 들썩였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간절하게 이 전화를 기다렸던 사람처럼 전화를 받아 버린 그의 가슴은 쉴 새 없이 뛰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무작정 핸드폰을 움켜쥔 채 통화 버튼을 누른 우영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상대가 답을 하기를 기다렸다.
지금 이 시각 그에게 전화를 걸어올 사람, 그리고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공교롭게도 하나뿐이었다.
우영은 두근두근 뛰는 가슴의 박동을 무시하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어?
1분처럼 긴 1초가 흘렀다. 고대하지 않는 척했지만, 은근히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그의 귓가로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우영은 숨을 죽였다.
-우영이? 금방 받네?
……아.
반짝이던 우영의 눈에서 순간 총기가 사라졌다.
워낙 자주 들어서인지 확실히 귀에 익은 목소리이긴 했으나, 그가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우영은 인상을 쓰며 퉁명스레 말을 뱉어 냈다.
“웬일이야.”
-……너 인마, 반응이 왜 이래? 눈에 띄게 실망한다?
“안 했어.”
-했는데? 왜, 기다리던 전화라도 있었어?
…….
“그딴 거 없어.”
심장 한편이 아려 왔지만 우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영의 전화 상대인 재경은 흐응, 콧소리를 흘리며 묘하게 대응했다. 우영은 모른 체하며 벽시계를 살폈다. 어느덧 시계는 오후 8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 시간에 재경이 제게 전화를 걸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놀자든가, 아님 놀자든가, 놀자―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 재경이 왠지 귀찮아져 딱딱한 음성으로 묻자,
-너 오늘 시간 어때?
아니나 다를까, 그가 예상했던 말을 재경이 뱉어 냈다.
예상했던 바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재경의 말에 우영은 실소를 흘렸다.
시간? 지금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다. 많아도 너무 많다. 자취방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어.”
우영은 한발 뒤로 물러났다.
-오늘도 많이 바쁘냐?
재경이 자신을 불러내기 위해 전화를 걸 때, 우영 곁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리고 있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붉은 입술을 위로 올리며 저를 유혹하듯 바라보고 있던 그가.
순간 눈앞을 스치는 회상에 입술을 잘근 깨물던 우영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뭐, 항상 그렇지.”
-넌 대체 언제 시간이 나냐?
“왜?”
저를 타박하듯 말하는 재경에게 오히려 되물었다.
-아니, 그냥 별건 아니고, 우리 오늘 미팅할 건데 너도 관심 있나 싶어서.
우리?
왠지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지만 우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관심 없어.”
-넌 이상하게 여자랑 만나는 데 관심이 없더라.
“가만히 있어도 그쪽에서 먼저 다가오니 그런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나?”
-……재수 없는 새끼. 잘났다 이거지?
경직된 얼굴이 살짝 풀어졌다.
피식, 미소 짓는 우영의 반응에 재경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어 버리려던 우영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재경의 말을 듣고 다시 굳어졌다.
-바쁘다니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는 꼭 시간 내라. 매번 능구렁이같이 혼자 빠져나가지 말고.
“알겠어, 인마.”
-그래. 그럼 승진이랑 나랑 태혁이, 셋이서 미팅 다녀와야겠다. 오늘 예술대 무용과래.
……뭐?
-어쨌든 내일 학교에서 보…….
“유재경!”
-으응?
“너, 방금 뭐라고 그랬지?”
-뭘? 빠져나가지 말라고?
그거 말고!
“승진? 백승진?”
멋대로 심장이 반응했다. 흐릿해졌던 정신이 확 깨 버리는 기분이다. 우영은 목청껏 외쳤다. 그러자 놀란 것은 재경이었다.
-어? 어어. 배, 백승진. 왜, 있잖아. 우리 과에서 얼마 전까지…….
“네가 그 녀석이랑 어떻게 알아!”
버럭 소리치는 우영의 태도에 재경은 크게 당황한 듯했다.
-아아. 태, 태혁이가 백승진이랑 친하더라고.
“그 자식이 친한 놈이 어디 있어.”
-뭐?
“물주면 몰라도.”
-무슨 소리야? 물주?
……빌어먹을.
“유재경.”
-어.
“어디로 가면 되냐.”
우영은 더듬거리는 재경에게 물었다.
-어, 어디를?
재경은 그런 우영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지만 우영은 개의치 않고 외쳤다.
“미팅 간다며!”
-너 방금 바쁘다고……?
“하나도 안 바빠. 안 바쁘니까, 주소 찍어서 문자로 보내. 나 씻는다.”
-뭐? 신우…….
우영은 어리둥절해하는 재경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도 않고 툭 전화를 끊었다. 쿵쿵. 핸드폰을 움켜쥐고 있던 우영의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 * *
“신우영! 여기야, 여기!”
미팅 장소로 정해진 학교 앞 펍을 통해 안으로 들어선 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누군가가 우영을 향해 소리쳤다. 우영의 검은 눈동자가 저를 발견하고 소리치고 있는 남자에게 꽂혔다. 우영은 고개를 까딱이며 제게 손짓하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우와, 진짜 왔네? 너 이런 덴 질색하지 않았어?”
재경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영의 모습을 아래위로 살폈다.
검은 면바지에 회색 니트를 입고 있는 우영은 크게 패션에 힘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길쭉한 다리를 쭉쭉 뻗으며 다가오자 삼삼오오 모여 분위기를 즐기고 있던 펍의 여성 고객들의 눈동자가 따라서 움직였다.
있는 놈들이 더한다더니.
재경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제 앞에 선 우영을 올려다보았다.
“어쨌든, 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재경이 우영의 팔을 잡아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유럽 맥주집을 지향하는 펍의 흐릿한 조명이 시야를 답답하게 했다. 어두컴컴한 내부가 짜증스럽다 생각하던 우영은 미간을 좁혔다. 성인이 된 후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술집을 자의로 오게 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되었지만, 적어도 재경 앞에서는 그런 걸 내색하지 않았다.
“어? 정말이네! 진짜 신우영이잖아? 너도 이럴 데를 다 오냐?”
재경을 따라 도착한 펍의 가장 큰 테이블에는 재경의 고등학교 친구인 태혁이 앉아 있었다. 우영 등과는 다른 학과이지만 몇 번 점심을 같이 먹은 적이 있어 안면이 있던 태혁이 웃으며 말을 걸자 우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눈길을 돌리자 그런 태혁의 옆에 앉아 이미 시켜 놓은 흑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 눈의 남자는 굳은 얼굴의 우영을 보더니 피식 웃어 버렸다.
“흐응.”
……!
“헉! 태혁아, 애들 왔대!”
“어디?”
“지금 1층이라는데?”
“내려가자. 우영아, 승진아,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봐. 우리가 내려가서 애들 데려올게.”
재경과 태혁은 4:4 미팅의 상대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지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영은 그런 그들이 자신을 스쳐 입구 쪽으로 달려 나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승진과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꼬락서니하고는.”
우영은 저를 봐 놓고도 모르는 척하며 제게 추파를 던지고 있는 다른 손님들에게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승진의 귀에 들릴 만한 목소리를 내던졌다. 그러자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우영에게 와 꽂혔다.
“지는.”
떨어져 앉은 두 남자의 눈에서 파팟, 불꽃이 튀었다.
“사시 준비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 술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해외 유명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펍 안에서 멀찍이 앉아 벌컥벌컥 물을 들이마시던 우영은 뱉어 내듯 들려온 한마디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좌석의 맨 끝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남자를 흘겨보았다.
치렁치렁한 앞머리를 거두고 나니 확실히 인물이 산다. 검은 슬랙스가 무척 잘 어울리는 튼실한 허벅지도 눈에 들어오고.
돈깨나 있어 보이는 기색을 팍팍 풍겨 대는 꼴을 보니 물주를 자청한 모양이다.
우영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싸구려 술 따위는 공짜로 줘도 안 먹겠다고 그리 지랄을 하던 새끼가, 웬일로 싸구려 맥주를 자청해서 먹고 있군.”
시비를 거는 것이 명백한 우영을 향해 승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넘쳐나는 게 돈이라서 말이야.”
“가끔 기분 전환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우영 또한 지지 않았다.
“3차에도 아주 자신이 있나 보지? 이렇게 여유를 즐길 만큼 네 머리가 그리 좋은 건 아닐 텐데?”
“돈이 주인을 잘못 만나 아주 생고생을 하는군.”
치칙!
검은 두 눈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우영은 이를 악물었다.
죽어도 안 지지.
한 번도 말싸움에서 그냥 넘어간 적이 없다, 저 빌어먹을 녀석은.
도발을 걸면 기다렸다는 듯 응해 온다.
어쩔 땐 말싸움만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불쾌한 과거의 일화들이 떠오르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영은 들고 있던 맥주병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나는 어쩌자고 이곳에 찾아온 것일까.
욱하는 마음에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벌써부터 후회가 된다.
저 망할 인간과 쓰잘머리 없는 말싸움을 하려고 귀한 시간을 허비한 것은 절대로 아닌데.
우영은 젠장, 입 안을 맴도는 욕설을 차마 뱉어 내지 못하고 어느새 눈앞에 놓인 밀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들 기다렸지!”
재경과 태혁이 한껏 차려입은 복장의 여자들과 함께 두 남자가 있는 테이블로 걸어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영의 검은 눈동자가 자신과 승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예쁘장한 여자들을 향해 꽂혔다. 호오, 코웃음 치는 승진과 달리 미간을 살짝 좁힌 우영이 누구냐는 얼굴로 재경을 바라보자 재경이 눈꼬리를 휘며 네 여자를 차례로 가리켰다.
“인사해. 여기는 채린 씨랑 윤미 씨. 그리고 여기는 인정이랑 유진 씨! 인정이는 나랑 같이 이번 자리 만든 무용과 내 친구고, 나머지는 인정이가 데려온 분들!”
“안녕하세요! 장인정이에요.”
“반가워요.”
“성유진입니다.”
“안채린이에요.”
고개를 까딱이며 우영과 승진에게 수줍은 미소를 날리는 여자들의 눈동자가 몹시 반짝였다. 우영은 얼떨결에 얼굴을 주억였다. 실실 웃는 재경과 태혁이 그녀들의 등 뒤에서 브이 자를 그리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젠……장.’
그러고 보니 이곳이 다름 아닌 ‘미팅 장소’였다는 사실이 언뜻 떠올랐다. 우영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됐다. 인사하는 무용과 학생들을 따라 얼떨결에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그녀들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우영은 무의식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무용과 여학생들과의 미팅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대충 인사를 나누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어떻게 자리를 배정받고 술을 시키고 게임을 즐겼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우영 씨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법대 톱이라던데…… 소문 이상이시네요!”
“…….”
“야, 신우영!”
“어?”
“네 얘기 하잖아!”
제길.
우영은 자신과 정확히 대각선 끝에 앉아 옆자리의 여학생과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받는 승진을 바라보다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웨이브 머리의 한 여학생과 그녀 옆자리의 재경이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우영은 그런 여학생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눈앞에 놓인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윤미 씨. 저 녀석이 여자들한테는 쑥스러움을 많이 타서요.”
“어머, 그래요? 하긴, 그렇다고 듣긴 했는데…….”
우영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 재경과 무용과 여학생을 스윽 흘겨보다 다시 승진 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의 잘생긴 얼굴이 확연하게 구겨졌다. 순간 우영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큼지막해지기까지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경기도에도, 강원도에도 별장이 있다고?”
“각 도마다 있어, 하나씩. 왜, 못 믿겠어?”
“아, 아니. 믿어!”
“흐응, 못 믿겠으면 데려가 줄까?”
“뭐? 정말?”
“원한다면.”
“응! 원…… 아, 혼자 가기는 좀.”
“다 같이 놀러 와도 돼. 어차피 혼자 쓰기에는 너무 넓거든.”
“진짜?”
“가족들도 친구들은 언제나 환영이랬으니까. 너도 좋아할 거야.”
“나, 나도? 나도 네 친구야?”
“채린이 너, 나랑 친구부터 시작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마, 맞아!”
“그럼 친구네.”
승진은 무척이나 여유롭게 제 파트너인 무용과 여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영은 제가 앉은 쪽을 살짝씩 흘긋거리며 웃고 있는 승진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저 자식이 일부러!
“저기, 우영 씨.”
“…….”
“저기요!”
“…….”
“이봐요, 내 말 안 들려요?”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이 여자를 다루는 능력이 어쩐지 수상했다.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여기서 태클을 걸면 백기를 들어 올리는 건 자신이 될 것 같아 입을 열지 못하겠다. 부르르. 그저 맥주잔만 움켜쥔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저를 한 번씩 흘긋거리며 피식 웃는 승진을 노려보고 있던 우영은 음악 소리에 버금가는 하이 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쩌다 보니 우영과 파트너가 되어 버린 윤미라는 이름의 여자가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영은 잠시 고민하다 빙긋 웃으며 속삭였다.
“윤미 씨라고 했습니까?”
“이제 내 말 들…….”
“저, 남자 좋아합니다.”
“예?”
“상대는 저 녀석이고요.”
우영의 부드러운 눈웃음에 화답하려던 윤미가 눈을 크게 떴다. 우영은 잠시 엉덩이를 들어 윤미의 근처까지 다가갔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윤미를 비롯한 남은 일곱 명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우영은 난데없이 접근한 자신을 보고 잔뜩 얼어 있는 윤미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대 많이 하고 오셨을 텐데, 초쳐서 죄송합니다. 저 이 미팅, 파토 내러 나왔습니다.”
“뭐라고요?”
“이러면 예의가 아닌 거 알고, 이에 대해서는 다음번에 자리 마련해서 충분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니 죄송합니다만, 저기 앉은 채린 씨 데리고 먼저 나가 주실 수 있을까요? 제 볼일은 어디까지나 채린 씨랑 파트너가 된 저 녀석이라서요.”
“……!”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뒤 고개까지 숙이는 우영을 윤미는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주변에서 갑자기 벌어진 일에 ‘왜? 무슨 일이야?’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우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슬그머니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땐, 윤미의 의심스러운 눈이 제 얼굴로 꽂혀 있었다.
당황하던 윤미의 눈동자는 우영의 가라앉은 눈동자를 확인한 뒤에야 천천히 평정을 되찾았다.
“제가 관상을 잘 보는 편인데―”
“…….”
“우영 씨가 거짓말을 할 사람 같지는 않네요.”
도박이었다.
이 상황을 매끄럽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진실뿐이라 생각했으니까.
우영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윤미에게 멋쩍게 웃어 보였다.
“어? 윤미 씨, 갑자기 왜 그래요? 우영이랑 먼저 나가려고?”
윤미의 옆에 앉아 파트너와 대화를 하고 있던 재경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생긋 웃은 윤미가 어깨를 살짝 으쓱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저와 우영 쪽을 쳐다보고 있는 승진과 채린 쪽으로 다가가 채린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채린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는가 싶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힘내요!”
……!
채린은 가방을 챙겨 나서기 전, 테이블 근처에 서 있던 우영에게 주먹까지 쥐어 보여 준 뒤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녀들이 깔깔거리며 펍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던 남은 일행은 ‘뭐 하는 짓이야!’ 하고 우영에게 소리쳤지만 우영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재경과 태혁의 파트너는 난데없이 친구들이 빠져나가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내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펍을 나섰다. 정말 몇 분 안에 승진과 단둘이 남게 된 우영은 왁자지껄하던 테이블이 텅텅 빈 모습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신우영.”
그때였을까.
줄곧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여자가 사라진 것으로도 모자라 분위기를 띄우던 친구들까지 모두 자리를 비우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승진의 눈동자가 그제야 우영에게 완벽히 꽂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몹시 불쾌한 표정이다. 하지만 그 못잖게 불쾌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우영은 순식간에 고요해진 테이블 의자에 털썩 앉아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인상을 쓰며 앉아 있다 결국 다시 일어났다.
젠장맞을…….
속이 부글거린다.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디질 못하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흐레. 무려, 아흐레였다.
우영은 어느덧 얼굴을 구기고 있는 승진의 근처까지 걸어와서는 커다란 손을 길게 뻗었다. 그리고 승진의 손목을 덥석 잡고선 눈을 부라렸다.
“지금 뭐 하는…….”
“망할.”
“……!”
“백승진 너, 이 씨발 새끼! 오늘 죽었어.”
우영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놔라.”
승진이 앞서 나가는 우영에게 경고했다.
“싫다.”
우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승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한 대 맞고 놓을래, 아니면 곱게 놓을래?”
터벅터벅, 펍을 벗어나 차가운 밤하늘 아래를 걷고 있던 우영의 발걸음이 드디어 멎었다.
승진의 협박이 효력이 있었던 것일까.
승진은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놓고 뒤를 돌아보는 우영의 서늘하고도 깊은 흑안을 빤히 응시했다.
우영은 강제로 데리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흘러넘치는 승진을 아니꼽게 응시했다.
“일부러 그랬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
하필 멈춰 서도 이런 곳에 멈춰 서 버렸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우영은 주변을 한 번 스윽 살피더니 이내 인적이 없다는 것을 인지해 내고는 승진을 노려보았다. 나른한 얼굴의 승진이 저를 직시하며 서 있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너 일부러 그랬잖아. 일부러 나, 자극했잖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군.”
자신의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리는 승진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을 우영은 놓치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게 확실하군.
바보가 아닌 이상 요 며칠간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이 개자식의 도발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나를 너무 물로 봤군.
우영은 씨발, 하고 나지막하게 욕설을 흘리더니 마침 근처에 위치해 있던 전봇대를 발로 퍽 찼다.
“윽!”
“그러게 죄 없는 전봇대는 왜 때리지?”
망할!
딱딱한 전봇대와 부딪치자마자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반사적으로 주저앉아 버리는 우영을 향해 코웃음을 치며 승진이 혀를 끌끌 찼다.
우영은 무릎을 굽혀 주저앉은 상태에서 승진을 올려다보았다.
“씨발, 진짜 좆같아서 못 해 먹겠네.”
남들에겐 상냥하고 다정하면서 유독 그 앞에만 서면 온갖 험한 말들이 튀어나온다. 본심을 숨기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포기해 버렸다. 우영은 저를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승진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다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가 진짜 네놈 때문에 돌아 버리겠어.”
하루에도 몇 번씩, 저 붉은 입술을 보면 집어삼켜 버리고 싶다.
우영은 지금도 쉬지 않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움켜쥐고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며 중얼거렸다.
승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우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같은 건 내 인생에서 별거 아닌 게 틀림없는데, 진짜 별거 아닐 텐데, 이상하게 머릿속에서 나가지 않아 환장하겠다고! 아까도 뭐냐고. 젠장. 내가 이젠 여자들한테까지 질투를 느껴야 해? 미친. 완전 또라이 같은 상황 아니야, 이거!”
짜증이 가득 섞인 외침을 뱉어 내며 우영이 소리쳤다.
승진은 아예 팔짱까지 낀 채 우영의 고해성사를 듣고 있었다.
“망할. 망할. 망할! 어쩌다 별 거지 같은 놈이 눈에 밟혀선! 씨발, 진짜 좆같네! 으아아악!”
고함을 질러 가면서까지 부들부들 떠는 우영을 향해 승진이 코웃음을 흘렸다.
“야, 말은 똑바로 해. 거지라니. 네놈은 봉 잡은 거야. 내가 얼마나 돈이 많은데.”
우영은 찌릿, 눈을 가늘게 뜨며 승진을 노려보았다.
“그게 다 네 돈이냐? 너희 집 돈이지.”
“우리 집 돈이 나중엔 내 돈 되는 거 몰라? 말했잖아. 본가에서 백기 들었다니까.”
그놈의 본가.
그러고 보니 다 그 빌어먹을 본가에서 백기를 들어 올리는 바람에 이런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냥 계속 반대를 해 줬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백승진이 치렁치렁한 앞머리를 대학 졸업 때까지 유지했을 거고, 다른 녀석들도 음침한 백승진한테 신경을 안 썼을 거고, 나도 다른 녀석들이 백승진한테 다가가는 걸 신경도 안 썼을…… 제길.
‘어차피 결국은 일어날 일이었겠지.’
우영은 하아, 긴 한숨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검은색으로 물든 하늘 한가운데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달이 시야로 들어왔다. 마치 백승진의 엉덩짝만큼이나 튼실해 보이는 보름이다.
우영은 이를 악물었다.
“일부러, 그랬지?”
“당연하지.”
“씹새끼.”
“이제 알았냐?”
승진은 체념한 듯 저를 올려다보는 우영을 향해 씩 웃었다. 쿵쿵, 고요하던 심장이 일렁였다. 우영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나, 너 좋아해.”
그래, 인정하자.
진짜 좆같은 상황인데,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아무리 부정하려고 발버둥 쳐 봐도 현실이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고작 입술을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환장하겠는데, 그새 몇 번 하지 못한 사실로 인해 이젠 아예 금단증상마저 찾아오기 직전이었다.
이 녀석 따위는 ‘이용’했을 뿐이라고 아무리 자위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 부정일 뿐, 끝까지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실 금단증상까지 찾아올 지경이라면 정도가 꽤 심각한 거 아닌가.
우영은 열망에 가득 찬 검은 두 눈을 승진의 입술에 고정시켰다.
승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알아.”
알면.
“인심 써서 하나뿐인 정실로 삼아 주지.”
미친 새끼.
우영은 어느새 제게 손을 내밀고 있는 승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누가 네 정실이지? 그리고 말은 바로 해라. 왜 내가 여자 포지션이냐?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신경질적인 우영의 답변에 승진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아냐?”
승진이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영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우영이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자 승진은 작게 속삭였다.
“너한테 그 대답 듣기까지, 꼬박 2년 걸렸다.”
* * *
“야.”
승진의 짜증 섞인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어 온다. 우영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승진이 무어라 지껄이든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듯 신중한 자세로 편의점 진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신우영.”
승진이 시끄럽게 쫑알거렸다.
귀찮은 녀석.
우영은 검은 눈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승진을 한 번 흘겨보더니 퉁명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왜.”
“대충 고르지?”
벌써 10분이야.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가리키며 뱉어 내는 승진은 인내가 폭발하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영에게도 나름 사정이 있었다. 우영은 ‘어차피 그게 그건데.’를 중얼거리고 있는 승진을 아니꼽다는 듯 응시하며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네 엉덩이 사이로 들어올 것도 아닌데, 잠자코 있지? 이것도 못 기다릴 거면 없던 일로 하든…….”
“아하하하! 위대하신 신우영 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얼마든지 기다릴 터이니 천천히 골라 주십시오. 파이팅!”
씨발.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려 했더니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뒤로 물러난다.
망할 자식.
우영은 활짝 미소까지 지어 가며 뒤로 물러나더니 쳇, 입술을 삐죽이는 저를 생글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승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편의점의 생리용품들이 가득한 진열대에 배치된 몇몇 케이스에 눈을 박으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저건 성능은 좋은데 가격이 비싸고, 요건 가격은 싼데 성능을 확신 못 하겠고…….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인터넷에서 미리 주문이라도 해 놓을걸.’
만약 이 기괴한 관계가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미리 준비해 두지 못한 거지?
우영은 철저한 준비성을 자랑하던 자신의 특성이 하락한 것을 한탄하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게 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백승진의 교묘한 술책 때문이다. 결국엔 그의 술수에 놀아나 자신이 먼저 백기까지 들어 올렸지 않은가.
우영은 좌절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이렇게 해. 먼저 백기를 드는 놈이 깔리는 거다.]
오래전, 우영은 승진과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는 올해 초, 2학년 개강을 얼마 앞둔 2월 말의 일.
미친 듯이 입술을 부딪치면서도 결코 그 이상은 가지 않던 두 남자 중,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어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우영이었다.
[백기?]
[져 주는 놈이, 둘 중 그나마 약한 놈이라는 결론이 나는 거니까 흔쾌히 깔려 주는 걸로.]
[종목은?]
[성적 같은 걸로 하면 너무 재미없으니까, 자존심 어때?]
[…….]
[왜, 자신 없어?]
우영이 피식 웃으며 도발적인 발언을 내뱉자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세차게 일렁였다. 승진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하고 짧게 대답했다.
‘약은 새끼.’
그 일이 있은 지 몇 달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연이어 1, 2차 합격 발표가 들려왔던지라, 그 기쁨에 흠뻑 취해서 우영이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일을 승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와 절교까지 선언하며 변신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진열대에 놓인 형형색색의 콘돔 케이스를 노려보던 우영은 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파리하게 떨리는 입술을 세게 악물며 손을 뻗었다.
“어, 그래. 미안하게 됐어. 그래도 계산은 하고 나왔으니까 너무 걱정 마. 응. 그래. 미안. 내일 보자. 어. 우영이한테도 말해 줄게.”
우영이 진열대만을 죽일 듯이 응시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겨우 케이스 하나를 골라 커다란 손안에 세게 움켜쥐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카운터로 향하던 시점, 냉장고 앞에서 수입 맥주 캔을 몇 개 꺼내 들던 승진이 누군가와 통화를 마치곤 우영에게로 걸어왔다.
우영이 인상을 쓰자 정답을 알려 주겠다는 듯 승진이 빙긋 미소 지었다.
“태혁이.”
……몇 번 봤다고 태혁이, 태혁이. 씨발. 내 이름은 성까지 다 부르는 주제에.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저를 향해 띠꺼운 표정을 숨기지 않던 승진은 자신이 백기를 들어 올린 그 직후부터 환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진 우영이 대꾸도 하지 않고 승진의 품 안에 들린 맥주 캔들을 응시하자 승진이 기다렸다는 듯 우영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분위기도 띄울 겸.”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우영은 샐쭉 웃는 승진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 카운터로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승진은 쫄래쫄래 그 뒤를 따랐다.
“드디어 골랐어?”
“…….”
“뭐 골랐는데? 역시 비싼 거?”
“…….”
“비싼 게 돈값을 하겠지. 음식도 비싼 게 더 맛있잖아?”
“…….”
“신우영, 내 말 들려?”
“…….”
“야아, 혼자 쓸 것도 아닌데 좀 보여 주든…….”
탁―!
“계산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창백하게 질린 자신과 달리 승진의 얼굴엔 혈색이 감돌았다.
마음 같아서는 저 번들거리는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려 버리고 싶다만, 그 후에 그에게 주먹을 뻗었다고 자책할 제 모습이 떠올라 꾹꾹, 충동을 누르는 중이었다.
신이 나서 과묵하기만 하던 입술을 가볍게 움직이는 승진을 무시하며 카운터 앞에 선 우영은 들고 있던 하얀색 콘돔 케이스를 판 위에 세게 내려놓으며 서늘한 음성을 뱉어 냈다. 두 훤칠한 남자가 제게로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던 편의점의 야간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영을 바라보았다.
우영은 하하, 웃는 승진이 덩달아 맥주 네 캔을 판 위에 올려 두자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계산해.”
“어? 내가?”
“너 돈 많다며. 계산은 이쪽이 할 겁니다.”
우영은 말을 마치자마자 닫혀 있던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차가운 밤공기가 우영을 맞이했다.
우영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돌겠군.’
단순하게― 정말 단순하게 우영은, 백승진이라는 녀석을 잃기 싫었다.
그냥 알고 지내는 친구에 가까운 녀석이었다면 냉정하게 쳐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는 달랐다.
처음으로 입을 맞춘 남자.
여자에 목을 맨 적도 없건만, 놀랍게도 우영은 남자에 목을 매고 있었다.
젠장할.
자존심 상하는 일이긴 하지만 이미 깊게 빠져 버린 것을 어떡하나.
좋아한다는 걸 깨달아 버린 이상 달려갈 수밖에 없다.
아직 알아 갈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은 나이이나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똑똑히 인지할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승진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요 며칠간 뼈저리게 느꼈으므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영은 그의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양보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아…….’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하는 긴 숨을 흘리는 우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곧 다가올 일을 예감하는 순간 새하얗게 물들어 버린 세상은 좀처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번쩍이는 백승진을 제외하고는.
술집을 나온 직후부터, 아니, 정확히는 승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뱉어 낸 그 순간부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의 박동이 멈추지 않는다. 우영은 쓰게 웃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린 것은 우영이 헛웃음만 삼키고 있은 지 1분 정도가 흘렀을 무렵이었다.
“샀냐?”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에 우영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을 던졌다. 저와 똑같은 눈높이를 지닌 승진이 히죽 웃어 가며 말없이 대답했다.
네놈은 좋아 죽으시겠지.
우영은 입가에 만연한 웃음을 전혀 지울 생각 없어 보이는 승진을 바라보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가자.”
“어.”
두 남자는 무언가가 가득 든 까만 봉지 하나를 손에 쥐고 나란히 밤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하아!”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붉은 혀가 거칠게 치열을 쓸었다. 우영은 미간을 좁혔다. 너무 가까운데. 하긴, 입술이 맞닿고 있는데 멀 수는 없는 노릇이지. 무심코 감았던 두 눈을 슬그머니 끌어 올리며 우영은 거칠게 혀를 옭아매는 승진을 쳐다봤다.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아 축축하게 젖어 있는 우영의 머리카락이 차갑지 않은 건지, 커다란 손으로 우영의 뒤통수를 감싸곤 제게로 끌어당기며 승진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빠져나가기도 힘들 정도로 강하게 옭아맸던 터라 우영은 그에게 한동안 붙잡혀 있어야 했다. 입 안의 모든 것을 쓸어 담겠다는 듯 세차게 흡입해 버린 승진으로 인해 현기증이 일 정도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런 승진이 자신을 리드해도 더 이상 아무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젠장.
신우영은 자존심이 강하다.
자신이 리드를 하면 하는 성격이지, 주도권을 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백승진이 키스를 퍼부을 때면 저도 모르게 힘이 풀려 버리고 만다. 망할. 이게 다 그 부드러운 입술의 촉감 때문이려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승진의 촉촉한 입술과 닿을 때면 항상 이렇게 가슴이 멋대로 뜀박질하기 시작해서 우영 역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중독성이 있다니까. 묘하게 달콤한 맛까지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을 주어서 우영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씨발. 진……짜, 너…… 드럽게…….”
“맛있다고?”
한참 동안 혀를 옭아매던 승진이 제게서 떨어져 나오자 우영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웃고 있던 승진의 대답이 더 빨랐다. 놀리듯 되묻는 승진의 말에 이마의 혈관이 툭 튀어나온 것은 순식간이었다.
제 등을 침대에 눕히려던 승진의 목을 감싸 안은 우영은 획, 몸을 비틀었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와 함께 승진의 등이 폭신한 이불과 닿자 우영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새끼야. 드럽게 맛난다.”
툴툴거리며 말을 흘린 우영은 조금 전과는 반대로 자신이 직접 승진의 입술을 핥기 시작했다. 일단 도톰하고 탐스러운 아랫입술부터 시작해 잘근잘근 윗입술을 깨물며 승진의 심기를 건드렸다. 승진의 검은 눈동자가 탐욕에 물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마약이다.
이쯤 되면, 마약이 확실해.
처음 입술이 닿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물고 빨았지만 갈증은 가시질 않는다. 우영은 차오르는 숨을 승진의 입 안에 불어넣으며 그의 곳곳을 헤집었다. 우영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듯 여유롭게 침대에 누워 있던 승진의 동공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두 사람이 입술을 부딪쳤을 때는 항상 소파에서, 그리고 옷을 입은 상태였던 것 같다. 조금만 더 지퍼를 내리려 하면 우영이, 혹은 승진이 ‘위는 내가.’라는 신경전을 벌이며 행동을 멈추었던 터라, 둘 사이는 대부분 키스로 끝났다.
물론 가끔, 아주 가끔 분위기가 타오를 때면 펠라티오 정도는 교환한 적도 있기는 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목욕재계를 한 뒤 완벽하게 나신이 된 상태에서 승진의 침실에 위치한 킹사이즈 침대 위를 뒹군 적은…… 단연코 없었다.
“큭!”
잔뜩 부어오른 입술을 쪽쪽 빨던 우영이 조금 아래로 내려왔다. 야릇한 숨결을 승진의 목덜미 쪽에 불어넣자 무슨 짓이냐는 얼굴을 하고 그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묘했다. 그 신음 소리를 듣는 순간 다리 사이가 묵직해져 우영은 잠시 멈칫했다.
“섰냐?”
승진이 고작 그것에 반응하냐는 듯 픽 웃으며 묻자 우영은 인상을 썼다.
“네놈이 이상한 신음을 흘려서잖아.”
“내가 뭐 하고 싶어서 그랬나. 네가 목에 숨을…… 읍!”
흥, 냉정하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는 우영에게 비웃음을 날리려던 승진의 말이 끊어졌다. 우영이 오뚝하게 솟아오른 승진의 오른쪽 유두를 혀끝으로 강하게 쓸었기 때문이다. 붉다 못해 타들어 갈 듯 뜨거운 우영의 혀는 닿을 때마다 몸을 비트는 승진을 계속해서 건드렸다. 입을 크게 벌려 돌기를 머금기도 하고, 유륜 주변을 동그랗게 그리며 배회하기도 했다.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며 농락하는 우영으로 인해 누워 있던 승진의 숨결은 점점 더 가빠졌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철저하게 제 밑에서 농락당하는 승진. 그와 입술을 쪽쪽거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영이 오랫동안 꿈꾸던 모습, 그대로였다. 가빠지는 숨결과 흐려지는 시야. 최후의 만찬을 즐기기 위해 그 전의 전희 정도는 우영에게 양보한 승진은 그에게 녹아 내려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어쩌면, 아래에 있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닐 수도 있겠군.
우영은 승진이 숨을 내쉬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실낱같은 희망을 품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그를 정신 못 차리게 한다면, 콘돔을 페니스 끝에 씌워야 할 사람은 승진이 아니라 자신이 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더 힘이 났다.
우영은 탄탄하게 새겨진 초콜릿 복근을 지나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혀가 닿을수록 진하게 반응하는 승진의 눈은 거의 풀어진 상태였다.
‘좋았…….’
“욱!”
자연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우영은 행동하려 했다.
승진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와, 그의 길쭉한 두 다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얼굴을 파묻은 뒤, 하늘을 향해 무서운 줄 모르고 뻗어 있는 불기둥을 움켜쥐고 귀두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대려는 순간, 우영은 제 등을 세게 내리찧는 승진의 강한 발길질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씨발, 너…….”
“어디서 약을 팔아?”
“……!”
갑작스러운 승진의 행동에 무의식적으로 욕을 흘리던 우영은 서늘하게 저를 노려보는 승진의 말에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승진은 흥, 코웃음을 치며 우영을 가소롭게 내려다보더니 이내 우영의 양어깨에 드리워진 제 다리로 우영의 목을 졸랐다. 갑자기 제 목을 조르는 승진으로 인해 우영이 캑캑거리자 승진은 힘을 풀고 욕설을 흘리고 있는 우영의 가슴을 손으로 밀쳤다.
“……!”
침대 끝에 머리를 맞대게 된 우영은 폭신한 이불이 등과 닿자 눈을 크게 떴다. 침대 헤드 쪽에 머리를 향하고 있던 승진이 어느새 제 위로 올라와 저를 음산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젠장할. 우영은 그의 손에 들린 하얀색 콘돔 케이스를 발견하곤 절망 어린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너, 설마…….”
승진은 말없이 종이로 만든 콘돔 케이스를 북북 찢으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기괴스러운지 우영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배, 백승진.”
대꾸하는 대신, 콘돔 케이스에서 고무로 만든 무언가를 꺼내 든 승진은 덜렁거리는 제 페니스 위로 그것을 씌우기 시작했다. 굵직한 페니스 위에 억지로 끼워지는 콘돔을 보자니 참으로 무서웠다. 저 빌어먹을 것이 애널 안을 뚫고 들어올 생각을 하니 더더욱.
우영은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승진의 이름을 다시 불러야만 했다.
“스, 승진아. 백승진? 승…… 승진아.”
“내 이름을 참 살갑게도 부르네, 우영아.”
“야, 잠깐만. 우리 다시 생각하자.”
“생각은 무슨. 이미 결정된 일이야. 사내새끼가 쪼잔하게 왜 그러냐.”
“미친 새끼야, 네놈은 그걸 넣을 입장이니까 보이는 게 없겠지! 씨발. 적어도 나한테 준비할 시간은 줘야 하잖아!”
“시간은 무슨.”
촥촥!
우영의 하소연을 단칼에 끊어 낸 승진은 미끈한 액을 손에 가득 묻히며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그걸 본 우영은 이를 갈았다.
[이런 날이 올 걸 대비해서, 몇 개 주문해 뒀지.]
샤워를 마치고 나온 우영이 침대 옆 테이블에 놓인 로션 같은 것을 흘긋거리며 무엇이냐 묻자 승진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러브 젤이라는 것을 우영은 그때 처음 알았다.
“야, 씨발. 잠깐만. 어? 야, 백승진. 승진아!”
“쉿, 말이 많다.”
“아, 씨발, 이 새끼야! 나 아직 준비 안 됐다고!”
“그놈의 준비는 대체 몇 달이 걸려. 그냥 포기해.”
“네가 내 상황이 돼 봐라! 그 말이 쉽게 나오…… 헉!”
보기만 해도 미끄러질 것 같은 투명한 액을 비비며 승진이 제게로 다가오자 우영이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제 다리를 벌리고 그 미끈거리는 두툼한 손을 애널 근처로 가져다 대며 승진은 결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우영은 뜨거운 열기가 엉덩이와 가까워지자 있는 힘껏 눈을 떴다. 어찌나 크게 떴는지 얼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기겁하던 우영의 말이 멎은 것은 벌렁거리는 애널 입구를 톡톡 건드리던 기다란 손가락 하나가 비좁은 주름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온 직후였다.
“크윽!”
“야, 힘 풀어.”
난생처음으로 타인의 것을 받아들이는 우영이 반쯤 들어간 승진의 손을 받아 내지 못하고 강하게 조여들자 승진이 인상을 썼다. 고작 손가락 하나가 침입했건만 비 오듯 땀을 흘려 대던 우영이 애타는 눈으로 승진을 바라봤다.
“씨…… 씨발, ㅃ…….”
“뭐? 빡세게 박으라고?”
“빼!”
버럭 소리치는 우영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승진은 더욱 강하게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크흡! 야릇한 신음 소리가 우영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젠장할! 쪽팔리게 대체 무슨 짓인 건지. 손가락이 안에 들어오는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다. 백승진에게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다는 사실도 낯 뜨겁기 짝이 없건만, 손가락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하다니. 우영은 입술을 세게 악물었다.
“왜 이리 뻑뻑하지. 조금 더 발라야 하나.”
승진은 잘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을 뺐다 넣기를 반복하며, 애널 입구를 넓히는 데 집중했다. 그런 손가락 개수가 하나둘씩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허리를 튕기며 가쁘게 숨을 내쉬던 우영은 의아해하는 승진을 겨우 뜬 눈으로 흘긋거렸다.
“너…… 하아, 섹스…… 흑, 어떻게 하는지는, 씨발, 알고 있는…….”
“알아, 알아. 아까 오는 길에 검색해 봤어. 흐음, 이렇게 하는 게 맞는데. 이상하네. 많이 아파?”
말로 표현해야겠냐!
우영은 대답 대신 찌릿 눈을 부라리며 승진을 노려봤다. 괜찮아, 하고 작게 속삭여 주던 승진은 우영을 자극하느라 꼿꼿하게 서 있는 자신의 페니스를 내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쩌지.”
뭐.
“신우영.”
“안 돼.”
우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로 안 된다. 이제 겨우 손가락 세 개에 익숙해졌는데, 다섯 개보다 훨씬 두꺼워 보이는 저 빌어먹을 것을 내 안에 넣겠다고? 우영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승진이 그런 우영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야, 미래를 생각해.”
“하아, 씨발. 뭐? 미래, 뭐.”
“오늘만 날이겠냐.”
조금, 솔깃했다.
“내일 없이 달리지는 않잖아, 우리.”
우영은 말없이 그를 지켜봤다.
“만약 네가 나한테 아래를 내주면, 언젠간 내가 너한테 내줄 수도 있는 거고. 오늘 네가 나한테 안기면, 내일 또 내가 너한테 안길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
“…….”
“뭐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어?”
“…….”
“속는 셈 치고 나 믿어 봐. 부드럽게 할게, 부드럽게.”
“…….”
“응? 우영아.”
……빌어먹을.
누가 미래의 법조인 아니랄까 봐, 승진은 유려한 말발을 소유하고 있었다.
우영은 불행히도 그 언변에 현혹됐다. 승진이 벌리려는 다리를 허벅지에 힘까지 주어 가며 오므리다 달콤한 승진의 음성에 백기를 들어 올렸다.
그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이, 어렵겠어?
승진은 굳은 얼굴로 두 다리를 활짝 여는 우영의 허벅지에 짧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고마워.
“아프게 하면 네 머리 차 버린다.”
“걱정 말라니까.”
“빈말 아니야.”
“그래서 내가 젤도 사 오고, 넓혀도 준 거잖아. 안 아파, 안 아파.”
승진은 아기 달래듯 우영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우영은 다시 러브 젤의 뚜껑을 열어 미끈한 액체를 페니스 위로 슥슥 바르는 걸로 모자라 제 애널에 문지르는 승진의 행동을 묵인했다.
“후우, 후우.”
우영이 긴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 봤자 신체의 일부인데 뭐. 너무 아프면 부러뜨리면 되는 거고. 그래, 괜찮아.’
제 것이 아니라고, 우영은 악행을 저지를 각오를 하며 숨을 골랐다.
“간다.”
축축하게 젖어 있는 우영의 애널 입구에 귀두가 닿았다. 뜨거운 감각에 우영이 아찔함을 느끼기 직전, 승진이 그의 양다리를 잡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푹, 비좁은 입구를 헤집고 들어오는 단단한 불기둥에 곧 새우가 튀어 오르듯 허리를 튕기며 우영이 소리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흑! 씨발. 백승진, 개새끼야! 아프잖아!”
아파도 드럽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