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학성 고등학교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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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성 고등학교

거슬리는 놈이 있다.

승진은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미간을 좁히고 있는 상태였다.

빌어먹을. 짜증스럽네, 진짜.

거슬리는 정도를 최소 1, 최대 10으로 잡았을 때, 이미 수치는 10을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승진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있다.

같은 반 급우들은 백승진이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기에 쉬이 다가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험난한 시간이 얼른 지나갔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랄 뿐.

“제길.”

기분 나쁘게 생긴 벌레가 얼굴을 기어가는 듯한 느낌.

단지 표현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창가 너머에 위치한 운동장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이고 있었다.

승진은 서늘한 눈동자를 여전히 운동장에 박은 채 인상을 썼다.

삐이익―!

서울 강남에 위치한 학성 고등학교.

고등학교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에 축구공을 찰 배짱을 부리다니. 참으로 여유로운 녀석들이 아닐 수 없다. 그 시간에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한 번 더 본다면 앞으로의 미래가 바뀔 것을.

승진은 혀를 끌끌 차면서 한심한 듯 그들을 내려다보다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는 저 역시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교과서를 펼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만화책을 보다 문득 시야로 들어온 운동장을 발견하고는 지금까지 줄곧 시선을 떼지 못했으니까.

뭐, 피차일반이려나.

“수고했어! 아까 그 골 진짜 멋지더라!”

“대체 그런 골은 어떻게 넣냐? 이 대단한 녀석!”

왁자지껄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슬슬 점심시간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운동장을 누비며 공을 차던 덜떨어진 것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 중앙계단을 이용하는 거겠지.

승진의 교실인 3학년 2반은 중앙계단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4층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대화는 여지없이 들려왔다.

아마도 같은 반 급우들로 보이는 남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멋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빌어먹을 와이셔츠 놈이, 바로 승진의 시선을 며칠 전부터 자극하고 있는 예의 인물이었다.

“패스가 좋았지, 뭐. 너희가 잘해서 그래.”

웃기고 있네.

두 명의 수비수를 제쳐 골을 넣은 저 와이셔츠 놈이 워낙 특출한 축구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골이 들어갔건만, 겸손을 얼굴에 칠했는지 하하 웃던 남학생은 승리의 공을 친구들에게 돌린다. 그런 그의 반응에 곁에 있던 친구들은 감동이라도 받은 건지 와락 와이셔츠를 끌어안았다.

결국 승진은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세게 닫으며 소리쳤다.

“대체 어떤 놈이 춥게 창문을 열어 놓은 거야!”

점심 식사 시간.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겨우 호흡을 고를 수 있는 몇 없는 휴식 시간에, 교실에 앉아 공부하던 3학년 2반 학생들은 화를 내는 승진을 흘긋거리며 눈을 찔끔 감았다.

‘네가 열어 놨잖아!’라는 말을 승진에게 호기롭게 할 수 있는 학생들은 없었다.

승진은 시끄러워야 할 점심시간 내의 교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지자 더 불만을 느꼈는지 젠장, 하고 낮은 욕설을 흘리며 교실을 벗어났다.

기분 잡쳤네.

* * *

“중간고사 성적 떴대!”

드르륵―

누군가 3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르르 달려 나가는 급우들을 한심한 듯 바라보던 승진 역시 느릿하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어차피 예상한 결과일 테지만 그래도 확인할 필요성은 있으니까.

상위 1등부터 300등까지의 점수를 일일이 나열하여 벽보에 붙이는 학교의 전통은 시대가 변한 지금까지 줄곧 이어지고 있었다.

승진이 다니고 있는 학성 고등학교는 각종 국가고시 합격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해 내고, 수능 만점자들 역시 매해 다섯 넘게 배출하는 명문고였다.

그래서인지 학성 고등학교에 속한 선생들은 학생들 간의 경쟁의식을 일으키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저렇게 뛰어가는 거겠지.

승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실소를 흘렸다.

“1등……은 또 백승진이네.”

터벅터벅, 천천히 걸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승진은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벌 떼처럼 모여 있는 학생들은 쳇, 입술을 삐죽이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겠지만, 승진의 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한 놈이 뱉어 내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당연하지.’

1등은 당연한 결과였다.

승진은 머리가 좋았다. 한 번 본 것은 절대로 잊지 않았고, 그 덕분에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1등이라는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이 점은 부모님들께 감사해하고 있다.

대대로 법조계 출신자들을 배출해 낸 머리 좋은 집안의 유전자를 고대로 이어받았던지라 승진 또한 그들을 닮아 수석이라는 자리를 유지한 것이다.

승진은 시기 어린 눈으로 저를 흘긋거리며 소곤대기 시작하는 친구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전 과목에서 만점을 받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결과를 확인한 채 교실로 돌아가려 했다.

“또 1점 차네. 어휴, 왜 이렇게 운이 안 따라 주지?”

“괜찮아. 다음에 꼭 만점 받으면 되지!”

“우리는 너 밀고 있다. 알지? 네가 백승진 코 납작하게…… 헉!”

아무리 너희가 나를 쫓아오려고 애써도 소용없다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리던 승진은 점심시간 때 보았던 무리들에 둘러싸여 있는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승진의 서늘한 시선에 ‘그’에게 승진의 험담을 늘어놓던 남학생 한 명이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렸음에도 승진의 눈동자는 ‘그’에게 꽂혀 있었다.

‘빌어먹을.’

승진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지.

거슬림의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노려보던 승진은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비켜. 떼거리로 모여서 길 막지 말고.”

* * *

[네가 친구가 없는 건, 그 드~러운 성격 때문일 거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대로 진학한, 성격 더러운 누나 미진은 크리스마스에도 혼자 집에 박혀 있던 고등학교 2학년 승진을 향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승진은 그런 미진의 말에 ‘꺼져.’라고 짧게 대응한 후 게임 활동에 매진했다.

친구가 없는 건 단지 내가 그것들을 사귈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야―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미진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따로 수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굳이 친구 따위가 없어도…….

“야.”

이런 짓을 해 줄 녀석들은, 줄을 섰으니까.

승진은 거세게 용솟음치는 제 것을 꽉 움켜쥔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연한 갈색 머리의 남학생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툭 말을 던졌다.

흐익, 하고 승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남성에게서 손을 떼어 낸 남학생이 강아지 같은 눈을 그에게 고정시키며 울상을 지었다.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마음 약해질 줄 아나.

물론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남학생이 꽤 귀여운 외모의 얼굴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래 봤자 남자일 뿐이다. 승진은 코웃음을 치며 서늘한 말을 흘렸다.

“꺼져.”

“스, 승진아!”

“제대로 하겠다며. 그런데 제대로 풀리는 느낌이 없거든?”

“……!”

“나 혼자 풀 테니까, 그냥 꺼져라. 꼴도 보기 싫어.”

승진은 손을 휘휘 저으며 곧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릴 것처럼 울먹거리는 남학생을 향해 신랄한 말을 흘렸다.

어이없는 자식. 남자 눈물에 흔들릴 줄 알고.

제가 풀어 주겠다고 해서 기꺼이 맡겨 줬더니 아프게 움켜쥐기만 할 뿐 욕구만 더 차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승진은 몇 분 전 저를 유혹해서 도서관까지 끌고 온 세윤을 향해 명백한 축객령을 날리며 인상을 썼다.

“승진아, 미안. 나 정말 잘할게. 응?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너무 커서 그래. 네 거가 너무 커서……!”

“뭐래. 안 꺼지냐?”

“승진아, 제발! 나 너 정말 좋아해! 완전 좋아한다고! 그러니까…….”

아아, 망할.

승진은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우뚝 솟은 자신의 남성을 다시 움켜쥐려 하는 세윤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봤다. 당장 안 꺼지냐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올 뻔했으나, 펑펑 눈물을 흘리는 세윤을 보자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미안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백승진은 머리가 좋았다.

게다가 집안도 엄청나다.

거기서 그친다면 그래, 시기와 질투 정도로 끝날 수 있겠지.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공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 이미 고 2 때 180센티를 넘겨 버린 건장한 체격과 잘 어울리는 잘생긴 얼굴은 승진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성적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1등이라는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수석’의 이미지는 승진이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받아 만들어진 아름다운 외모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그로 인해 승진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지만, 동경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것이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정말 좋아해, 승진아!”

아래가 벗겨진 채 고백을 당하는 기분은 참 더럽다. 승진은 저를 와락 끌어안으려 하면서 소리를 질러 대는 세윤을 세차게 밀며 이를 갈았다.

“난 너 안 좋아한다고 했지. 아니, 그 전에, 남자 새끼한테는 별 관심 없다고. 이번 일도 네가 먼저 해 준다기에 허락한 거다.”

“승진아!”

“야, 됐으니까 그냥 꺼져. 귀찮다.”

푸스슥, 식어 가는 페니스를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승진은 허벅지에 걸쳐져 있던 브리프를 위로 올리려 했다.

그런 그의 손목을 허락도 없이 덥석 잡은 세윤이 간절하게 애원했다.

“소, 손이 마음에 안 들면 나 이, 입으로라도…….”

“미쳤냐?”

승진은 경악을 머금은 채 그를 쳐다봤다.

“더럽게 입으로 왜 해. 꺼져, 그냥. 꼴도 보기 싫으니까.”

“승진아아.”

“너, 나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

“가라.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그의 음산한 말투에 눈알을 굴리던 세윤은 시련당한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훔치며 벌떡 일어나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승진은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세윤을 못마땅한 눈으로 응시하다, 푹 죽어 있는 자신의 남성을 내려다보았다.

‘왜 하필 그때 서서는.’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기한 모습을 보였다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특히, 그놈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면.

‘천만다행이군.’

고작 시선이 마주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몸이 반응했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필 자위하던 제 모습을 목격한 세윤이 직접 그것을 풀어 주겠다며 잠겨 있는 도서관 안으로 그를 밀어 넣지만 않았어도 이런 짜증스러운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거다.

승진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이번에야말로 브리프를 위로 끌어 올리려 했다.

“……!”

슬쩍 엉덩이를 들려는 순간 승진은 제 앞에 드리워지는 어두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발견하곤 돌처럼 굳어 버렸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무엇인지, 승진은 그때 처음 알았다.

“흠.”

온몸의 털이 오소소 돋아날 법한 끈질긴 시선.

소름 끼치는 그 눈빛에 심장이 미친 듯이 일렁였다.

꿈인가, 생시인가?

브리프를 잡은 채 입술을 파르르 떨던 승진은 자신의 다리 사이를 유심히 내려다보던 남학생의 얼굴에 은은하게 번지는 웃음을 발견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학생은 이젠 아예 입꼬리를 올린 채 승진의 두 다리 사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석고상이 되어 버린 승진을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작군.”

……뭐?

승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어이가 없어진 승진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 그를 향해 빙긋 미소를 보내더니 홱 몸을 돌려 사라졌다.

1초.

2초.

3초.

정확히 10초 정도가 흐르고 나서야 충격에서 벗어난 승진은 아직 브리프를 완전히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소리를 내질렀다.

“저 미친 새끼가 방금 뭐랬어!”

* * *

“니들, 신우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거 모조리 읊어 봐.”

살벌하기 그지없는 음성에 승진의 앞에 횡렬로 줄지어 있던 몇몇 소년들이 몸을 움찔거렸다. 이번엔 또 왜 화가 났나 했더니 전교 2등 신우영이 아무래도 잠자는 백승진의 코털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교내에서도 빼어나기로 소문난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며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승진은 열아홉 소년들을 잔뜩 움츠러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 쪼르르 서 있던 네 명의 소년 중 용기를 낸 것은 3학년 2반의 반장직을 맡은 대영이었다.

대영은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승진을 향해 주저하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저기, 승진아.”

“왜.”

아니나 다를까, 승진에게선 사나운 대꾸가 흘러나왔다.

순간 놀랐으나 대영은 다른 세 친구의 응원을 받으며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우리 공부해야…….”

“내가 생각하는 기말 예상 문제 집어 준다.”

“우, 우영이는 배치 고사에서 전교 2등으로 입학했고, 1학년, 2학년, 3학년 내내 2등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3학년 3반의 반장이야!”

“사교성 좋고 잘생긴 얼굴 덕분에 주위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내가 우영이랑 같이 학원 다니는데, 진짜 친절하고 착해!”

“여자애들한테도 인기 많아! 중학교 때 우영이랑 사귀려고 여자애들이 줄을 섰었다고 하더라고.”

“나 저번에 체육 선생님한테 들었는데, 키는 183센티를 조금 넘는다고 하더라! 어, 그리고 몸무게가 몇이었냐면…….”

뭐야.

승진의 입에서 ‘기말 예상 문제’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신우영이라는 열아홉 소년에 대해 줄줄 읊기 시작하는 네 소년들의 눈빛에선 엄청난 의지가 엿보였다.

그들의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승진이 헛웃음을 흘릴 만큼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우디르급 태세 전환이다.

어떻게 해서든 기말고사 예상 문제를 얻어 내고야 말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승진은 슥, 손을 들어 올리며 그들을 막아 세웠다.

“그만.”

놀랍게도 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승진은 차가운 흑안을 빛내며 물었다.

“신우영의 장점 따윌 듣고 싶은 건 아니고. 약점은? 약점은 없냐?”

용서할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의 백승진에게 그런 망언을 지껄이다니.

치욕이야.

이건, 그냥 간과할 수 없는 엄청난 치욕임이 분명하다.

[생각보다 작군.]

풋, 짧게 비웃음을 흘리며 저를 내려다보던 그 시선이 온종일 눈앞에 아른거려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어젯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을 어떻게 참아 냈던 걸까. 스스로의 인내에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차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리던 승진을 향해 눈치 없는 누나 미진은 ‘미친놈아, 좀 조용히 해!’라고 외쳐 댔다. 그로 인해 승진은 제 마음도 몰라주고 떽떽거리는 미진에게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다.

여자에게 화를 낼 뻔하다니.

아무리 얄미운 누나라도 여자에게는 성질을 부리지 않는 신조를 지닌 백승진이, 고작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성을 잃을 위기에 처했었다는 건, 그에게 있어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러니까 알아야겠어.

그 빌어먹을 놈의 약점이라는 걸.

“약……점?”

“그래.”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승진의 대답에 네 명의 소년들은 서로의 얼굴을 흘긋거리며 쉬이 입술을 열지 못했다.

지금 승진의 눈앞에 있는 소년들은 승진이 속해 있는 3학년 2반에서도 뛰어난 정보력으로 소문난 가십쟁이들. 일부러 이들을 불러 모은 승진은 서늘한 눈을 빛내며 그들의 말이 흘러나오기만을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이 망할 소년들의 입은 아까와는 달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결국 참을성이 꽤 부족한 편에 속했던 승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없어?”

무언의 눈빛만을 주고받고 있는 소년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승진의 음산한 목소리가 그들의 간을 졸이게 했기 때문이다.

승진은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없어?”

“저기, 나 아까 담임이 부르던데. 미안,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

눈을 부라리는 승진의 시선을 피한 대영이 힘겹게 숨을 토해 내며 승진의 앞에서 사라졌다.

“나, 나는 태진이랑 수학 과외 문제집 풀어야 해서.”

“아, 맞다! 그랬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두 놈도 부리나케 도망쳤다.

승진은 마지막 남은 소년을 향해 눈을 움직였다. 흡, 저와 눈이 마주치자 마지막 남은 정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승진은 후우, 한숨을 흘리며 입술을 달싹이려 했다.

“약점, 진짜 없……!”

하지만 승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수는 변명도 없이 등을 돌려 교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승진은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망할!

* * *

“요즘 내 얘기 묻고 다닌다던데.”

쏴아아―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교내의 화장실 안.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되기 직전, 불이 꺼진 복도를 걸어와 화장실에 도착한 승진이 교복 바지 지퍼를 아래로 내리자마자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고개를 돌린 승진의 눈동자가 정확히 저와 똑같은 눈높이를 지닌 소년을 발견하곤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183센티인 자신과 엇비슷한, 아니, 조금 더 클지도 모르는 우영이 싱긋 웃으며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그가 제게 말을 걸어온 것은 승진이 ‘신우영’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이후 처음이었다.

매일 창가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기만 했던 승진은 생글거리는 얼굴 뒤에 우영이 여우 같은 얼굴을 감추어 두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굳이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승진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획 몸을 돌려 변기로 향했다.

“이 학교에 입학한 지 3년 만에 나에 대해 묻고 다니네, 백승진.”

신우영에 대해 알 만한 3학년 학생들에게 아무리 캐물어도 ‘신우영은 좋은 녀석이다.’라는 긍정적인 답변만 들려왔다. 저와는 평판이 극과 극을 달리는 우영의 이야기에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승진은 더 이상 그의 약점 찾기를 포기했다.

한동안 그의 심기를 어지럽히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가라앉았건만, 우영은 대체 무슨 생각에선지 그의 옆자리에 서서 바지 지퍼를 내렸다.

‘내 이름을 아네?’

무시하려고 했으나 반사적으로 귀가 쫑긋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긴,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

항상 그의 이름 위에 위치해 있던 자신의 이름을 신우영이 모를 리 없었다.

승진은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버텨 냈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로 탐색하듯 옆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비릿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너도 생각보다는 크지 않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천하의 백승진이 한심하게 당할 수만은 없다.

단둘밖에 없는 화장실 안은 두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 소리만이 가득했다. 승진의 말을 들었는지 흠칫하던 우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승진의 옆얼굴을 발견했다.

‘어떠냐.’

솔직히 말해 저와 엇비슷한 크기이기는 했지만 과장된 말을 할 필요는 있었다. 승진은 회심에 찬 미소를 지으며 우영을 바라봤다. 우영은 묘한 시선으로 그런 승진의 따가운 시선을 감내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하지. 아직 발기 전이니까.”

“……?”

“발기 후였던 누구와는 다르지 않나?”

……이거 도전, 맞지?

짙은 미소를 그리는 우영을 보며 승진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우영은 입술을 파르르 떠는 승진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준 뒤 스피커에서 요란하게 울려 대는 종소리를 듣고는 바지 지퍼를 올렸다.

순식간에 돌아서는 우영의 행동에 다급해진 것은 승진이었다. 그는 씩씩거리며 소변보는 것을 서둘러 끝마친 뒤 손을 씻으러 세면대로 간 우영의 뒤로 다가갔다.

“너 이 새끼, 방금 뭐랬냐.”

쏴아아―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강한 물줄기가 우영의 손등으로 쏟아졌다. 잔뜩 약이 올라 있던 승진은 우영의 곁에 서서 음산한 목소리를 흘렸다.

승진이 뭐라고 하든 여유롭게 뽀드득, 뽀드득 손을 씻던 우영은 완벽히 손 씻기를 마친 후 천천히 승진을 직시했다.

“재미있네.”

뭐가?

“학교의 왕자님이 나한테 관심을 다 가져 주다니.”

왕자님.

돈 많고, 공부 잘하고, 나름 인기도 많은 승진을 부르는 몇 안 되는 긍정적인 별명이었다.

승진은 보통 학성고의 악마라 불리고 있었으니까.

‘왕자’라는 낯간지러운 말에 미간을 좁히는 승진을 보며 우영이 중얼거렸다.

“뭐…… 딱히 좋아서 가지는 관심 같지는 않지만.”

무엇이 그리 삐딱한지, 다른 학생들에게는 친절하다 못해 다정하기까지 하다는 신우영은 승진을 향해 코웃음까지 치며 몸을 돌렸다.

‘저 개새끼가!’

내내 억누르던 분노가 끝내 한계점까지 치밀어 오른 승진은 그런 우영을 막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야.”

“…….”

“거기 서.”

하지만 우영은 멈추지 않았다.

“거기 서라고. 거기 서라니까?”

우영은 여전히 제 앞길을 가고 있었다.

“이 새끼야! 내가 서라고 한 거 못 들……!”

황급히 우영을 잡기 위해 그의 뒤까지 달려가 우영의 손목을 세게 붙잡은 승진은 있는 힘껏 우영의 몸을 돌렸다.

침을 튀겨 가면서까지 말을 하던 승진의 입은 우영이 자신에 의해 몸을 바로 세우는 순간 더 이상 소리를 뱉어 내지 못했다.

‘어……라?’

그의 입술 위로 뭔가 촉촉한 것이 느껴졌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다.

게다가 뜨겁기까지 했다.

뭐, 뭐지…… 이건.

입술에서 느껴지는 낯선 촉감에 승진은 인상을 썼다.

눈에 힘을 주며 저와 맞닿은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던 승진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발견하곤 소리를 내질렀다.

“윽, 씨발!”

* * *

“백승진.”

“…….”

“야, 백승진!”

귀가 따가울 정도의 외침과 동시에 어둠이 걷혔다. 승진은 이불을 걷는 미진을 짜증스러운 눈길로 노려보았다.

“백미진, 나 자는 거 안 보여?”

미간까지 좁히며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흥, 콧방귀를 뀌고 있는 미진의 뻔뻔스러운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승진의 말에 피식 웃기만 하던 미진이 창문을 막고 있던 암막 커튼을 좌우로 좍 펼쳤다.

따갑다 못해 눈이 부시는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스며든다. 승진은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짓이야.

“엄마가 오늘만큼은 절대 안 된대.”

“뭘.”

“학교.”

“……!”

“꾀병 핑계는 하루로 족하댔어. 최 박사님이 어젯밤에 급히 왔다 가셨는데, 너 아픈 곳 없이 멀쩡하다고 하셨다던데?”

“…….”

“박사님 말씀도 있었으니, 오늘까지 네 멋대로 결석하면 가족회의 안건으로 올리실 거래.”

“……뭐?”

“30초 준다. 일어날 시간.”

“…….”

“30, 20, 10…….”

그건 30초가 아니잖아!

“젠장!”

카운트다운이라는 개념을 모르는 건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숫자를 세고 있는 미진을 노려보던 승진은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얄미운 둘째 누나 미진이 ‘학교 가는 거지?’ 하고 생글거리며 묻자 인상을 쓰며 그녀를 내려다본 후 욕실 쪽으로 걸어 나갔다.

빌어먹을 가족회의. 한번 안건으로 오르면 향후 몇 달간은 가족들에게 시달릴 것이 분명한 그 회의에 죽어도 화제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승진은 미진이 ‘엄마! 승진이 학교 간대!’라고 아래층을 향해 소리치는 것을 들으며 2층 욕실 문을 닫았다.

쏴아아―

호수를 틀자마자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얼굴을 강타했다. 뚝뚝, 흘러내리는 물방울 소리가 욕실 바닥을 울렸고, 그에 따라 그의 가슴도 콩콩 뛰기 시작한다. 쿵쿵쿵. 한번 움직인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빨라진다. 쿵쾅쿵쾅. 살짝 시간이 흐르다 보니 가슴의 뜀박질 속도가 더욱 가속된 것 같기도 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와 심장이 정신없이 두근거리는 소리. 그 미묘한 조화에 눈을 내리감았던 승진은 저도 모르게 촉촉하게 젖은 입술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그러다―

“망할!”

어째서 떠오른 것이 그 재수 없는 놈의 눈동자인 거지!

며칠 전 있었던 불유쾌한 기억이 도통 사라지질 않는다. 벅벅, 입술을 문지르고 또 문질러 보아도 그 감각은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그 사건 이후 대체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조차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야간 자율 학습 시간이 끝나 있었고, 집으로 돌아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보니 어느덧 다음 날을 알리는 해가 밝기까지 했다.

몹시 기분 나쁜 감각이다 싶었지만 ‘사고’라 생각하며 떨치려 했었는데, 승진은 다음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 개자식의 입술뿐이었지.’

촉―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린 시간.

그러나 그 녀석의 입술과 제 입술이 맞닿는 순간 느꼈던 감촉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아무리 자위를 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도 느낄 수 없었던 쾌감이 전신을 감쌌다.

‘미친 건가?’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저와 똑같은 키에 엇비슷한 체격. 귀엽지도, 그렇다고 예쁘장하지도 않은 차가운 인상의 소년. 이제 몇 달만 더 있으면 어른이 될 소년답게 나이가 들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녀석은 절대로 백승진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애초에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녀석이 아니라고!

‘미쳤어. 근래 계속 신경 쓰다 보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다. 그 키…… 박치기는 그저 사고였다. 그래, 그건 사고였어!’

그날 이후 심장이 두근거리는 빈도가 심상찮았다. 만년 개근을 노리고 있던 천하의 백승진이 무려 하루 결석까지 하며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은 그 사건 뒤, 우연히 마주치는 신가 놈의 얼굴을 보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뛰어서였다.

다행히도 신가 놈과 하루 정도 떨어져 지내는 동안 고장 난 심장은 제법 제어가 가능해진 것 같으니, 괜찮을 거다. 차마 ‘입맞춤’이라고도 표현하기 싫은 ‘입술 박치기’로 인해 자신이 이토록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정도 스스로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으니, 앞으로 그 일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거다. 대체 별것도 아닌 일에 제 자신이 왜 이리 동요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정말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

승진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며 몇 번이고 숨을 골랐다.

* * *

“제기랄!”

승진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러자 소란스럽던 3학년 2반 교실이 고요에 휩싸였다. 왁자지껄 떠들던 열아홉 소년들은 감기로 인해 하루 결석했다던 승진이 멀쩡한 상태로 등교한 것으로도 모자라, 다시금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자 서로 눈치만 살폈다.

‘이번엔 또 왜 저래?’에서부터 시작하여, ‘누가 백승진 화나게 했냐?’라든가, ‘저 녀석 때문에 우리 반 분위기 말이 아니야!’ 등등의 말을 수군거렸지만, 누구 하나 호기롭게 나서는 이는 없었다. 그저 승진의 살벌한 기세가 가라앉기만을 바랄 뿐.

“저 새끼가 미쳤나!”

그러던 와중 들려온 승진의 욕설은 긴장하던 2반 소년들의 목구멍을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대체 그가 칭하는 ‘저 새끼’라는 녀석이 어떤 녀석일까, 라는 눈으로 승진의 시선 끝을 주시하던 몇몇 이들은 다행히도 승진이 바라보고 있는 곳이 교실 내부가 아닌, 운동장 쪽의 창밖이라는 것을 확인하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우리는 아닌데, 그렇다면 대체 누―

쾅!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승진이 언급한 ‘저 새끼’를 찾기 위해 창문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이던 2반 소년들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교실을 나가 버린 승진의 뒤는 쫓지 못했다.

소년들은 잠시 아쉬운 얼굴로 서로를 흘긋거렸으나, 이내 안도한 눈빛으로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근두근!

‘젠장……. 젠장, 젠장!’

하지만 백승진 입장에서는 결코 지금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뭐? 문제없을 거라고?’

하루 정도 쉬고 나면 멀쩡해질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말짱 도루묵이 됐다.

이거 아무래도, 문제가 있다.

그냥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심각한 상황의 문제가 발생했다. 단순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지라 승진의 심장은 아까부터 내내 진정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전, 승진은 운동장에서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공을 차고 있는 하얀 와이셔츠 놈과 떨떠름한 입술 박치기를 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던 사고였으며, 사고의 당사자들도 다시 거론하고 싶어 하지 않는 흑역사로 기록되었다.

졸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개근상을 노리고 있던 승진은 그로 인해 무려 학교에 결석까지 할 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승진은 본디 회복이 빠른 소년이었다. 입술 박치기의 피해 정도야 하루 정도 푹 쉬고 나면 완쾌하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근두근!

하루 결석 후의 등교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 다다음 날에도, 그리고 그 다다다음 날에도,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학교에 오기만 하면 승진의 눈은 ‘그 소년’을 좇았고, ‘그 소년’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며, ‘그 소년’의 이름만 들어도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반응을 보였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 진짜…… 미친 건가?’

미친 것이 분명하다. 미쳤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서야 정신없이 공을 차며 운동장을 누비고 있는 하얀 와이셔츠 놈에게 누군가 손을 대는 것이, 왜 이리 기분 나쁜 거지? 게다가 자신은 왜 땀을 뻘뻘 흘리는 그 하얀 와이셔츠 놈을 자빠뜨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냐고!

승진은 심장이 바짝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아직도 안정을 되찾지 못하는 가슴 부근을 문질렀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찬물로 이 열기를 좀 식혀야…….

“헉!”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무의식적으로 도착한 곳은 일주일 전 사건이 일어났던 화장실 앞 복도였다. 언제 이곳에 온 건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해 간담이 서늘해진 승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반대쪽에서 화장실 쪽으로 걸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승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빌어먹을 심장은 눈치 없이 거세게 뜀박질을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그날.

주변이 어둡기도 하고 정신도 없던 와중 뒤로 물러나던 신가 놈이 분명 제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지독하게 차분한 목소리여서 기억에 남는다.

완전히 얼이 빠져 있던 승진이 그 말을 떠올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지만, 틀림없이 그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자신의 망할 심장은 아까부터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지만, 저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할 상대에게 일일이 반응하고 싶지는 않다.

승진은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 역시 마침 멈추어 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한 뒤 아무렇지 않은 척 앞으로 걸어가 그를 지나치려 했다.

자신이 상대를 의식하고 있다는 걸 티 내지 않게. 이상하게 자꾸 눈길이 간다는 걸 드러내지 않게.

차분하게. 침착하게―

“백승진.”

“어?”

막 신가 놈의 곁을 지나치려던 순간 들려온 말에 승진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것으로도 모자라, 고개를 홱 돌리며 소년을 바라봤다. 정말 우연히도 그들 외엔 존재하지 않는 복도 앞에서 제 이름을 부를 사람은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밖에 없었다.

‘백승진, 이 병신아!’

너무도 즉각적인 대답이었기에 승진은 자책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상까지 쓰며 눈을 내리감다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빤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우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하, 어색하게 웃자 가만히 그를 쳐다보던 우영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언제까지 그럴 거지?”

“뭐, 뭘?”

“나를 그렇게 의식하는 행동을 취하는 거.”

“……!”

“백승진이 나를 의식해 주길 바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의식하기를 원했던 건 아닌데 말이지.”

“……뭐?”

“어떻게 하면 그만둘래?”

한 걸음.

머리 색만큼이나 짙은 눈동자로 쳐다보던 우영이 한 걸음 다가오자 승진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두근두근. 심장박동이 몇 초 전보다 빨라진 느낌이다.

이거, 조금 더 가까워지면 위험할 것 같은데.

본능적인 위기감이 머릿속으로 엄습해 왔다.

“백승진.”

어쩐지 달콤하게 들리는 우영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승진은 저와 똑같은 눈높이에서, 똑같이 서늘한 눈을 고정시키며 묻는 우영을 응시하며 이를 꽉 악물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 부담스러운 시선, 거두어들일 거지?”

약간은 살벌하게도 들리는 그 말에 찌릿한 전율이 흘렀다면 변태인 건가.

‘변태, 맞군.’

승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중증이다. 부정하고 싶은데,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을 보면 결코 이 증상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도가 고요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저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는 우영을 바라보던 승진은 ‘백승진.’ 하고 한 번 더 저를 부르는 소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몇 분 전부터, 아니 며칠 전부터 우영의 얼굴만 보면 줄곧 내뱉고 싶었던 말을 가감 없이 내뱉고 말았다.

“한 번만.”

“……?”

“한 번만 맞춰 보자.”

“뭘?”

우영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자 승진은 손을 뻗었다.

“그 입술.”

네 빌어먹을 입술.

한번 자리 잡은 이후로, 도통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네 입술.”

“미쳤군.”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 제가 생각해도 이러한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랬기에 승진은 코웃음 치는 우영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우영이 그런 승진의 반응에 얼굴을 굳힌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제……정신인가 본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승진은 인상을 쓰는 우영을 보며 그제야 웃었다. 대신 우영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지만.

현재의 백승진은 단단히 미친 것이 틀림없다.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던 자신이, 사고로 일어난 일에 이리도 안달이 나다니.

지난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길고 긴 고생 끝에 승진은 확실히 깨달았다. 지금 다시 한 번 우영과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으리라고. 끙끙 앓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 더 정면 돌파하여 이 이상한 감각을 떨쳐 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불쾌하더라도 입술 박치기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하지만 상대는 아무 말이 없다. 승진은 제멋대로인 성격을 지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면서까지 제 의견을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우영이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입술을 부딪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랬기에 조금 전의 그 말이, 제게 큰 약점이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뱉어 내고 말았다.

그러나 우영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없이 우영의 반응만을 기다리고 있는 승진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검고 깊은 눈동자에 승진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은 당연했다.

‘……죽을 맛이군.’

그저 빤히 저를 바라만 보고 있는 상대의 고요한 반응은 숨을 죽이게 만든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를 만큼 긴장하고 있던 승진은 저도 모르게 미간으로 힘을 줬다. 그 영향 때문인지 그의 고운 아미에 세 개의 줄기가 선명하게 새겨진다.

“미친놈이라 듣기는 했지만…… 소문 이상이군.”

칭찬인가?

한참이나 입을 열지 않고 자신을 응시하고만 있던 우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승진은 빙긋 웃었다. 승진의 미소를 발견한 우영의 얼굴이 팍 구겨지는가 싶더니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 탐스러운 입술을 달싹였다.

“좋아.”

“어?”

승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거의 도박에 가까웠던 자신의 제안을 눈앞의 소년이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저답지 않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승진을 미묘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한 걸음 다가왔다.

떨어져 있던 두 소년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우영은 놀란 승진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리고 또 한 걸음. 계속 더, 한 걸음.

“대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뭐?

두 소년의 거리가 불과 몇 센티도 남겨 두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승진은 코끝에서 우영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댕, 댕―

지금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이 다음 수업이 시작되는 소리를 알리는 학교 종소리인지, 아니면 힘껏 머리를 맞아 울리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다. 백승진은 놀랍게도 잔뜩 얼어 버렸다. 그리고 그의 온 신경이 그쪽을 향해 있던 순간, 우영의 붉은 입술이 승진의 입술 위로 살포시 포개졌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찌릿, 하고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흘렀다. 가라앉았던 심장의 박동이 터질 듯 뜀박질하기 시작했고, 전신의 구멍이 팽창하는 기분을 느꼈다. 아주 살짝, 정말 살짝 닿았다가 떨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느껴 버린 알 수 없는 감각에 승진은 눈을 크게 떴다. 우영이 제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도 느끼지도 못할 만큼 동요했고, 흔들렸으며, 그제야 자각이 됐다.

‘망할…….’

이제야 확실해진다.

지난 일주일 동안 자신이 왜 이렇게 짜증이 났던 건지. 어째서 신가 놈만 보면 그렇게 잡아먹고 싶고, 신가 놈을 건드리는 놈들에게 살벌한 시선을 날렸던 건지. 신가 놈의 근처에서 맴도는 존재는 남자건 여자건 다 죽여 버리고 싶고, 신가 놈이 향하는 모든 곳을 그렇게 걸어갔던 건지…… 전부, 다.

“됐냐?”

승진과 닿았던 입술을 손끝으로 스윽, 닦으며 우영이 만족했냐는 표정을 짓는다. 승진은 그런 우영을 가만히 쳐다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왜.”

제기랄.

“……?”

운도 없지.

“백승진?”

하필이면 반해도 왜 이 녀석이지?

승진은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고르고는 다시 우영을 쳐다봤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거……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되냐?”

* * *

‘내 생애…… 이런 날이 오다니.’

승진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한 단계 내려간 고교 재학 마지막 성적표를 확인했다.

승진이 다니고 있는 학성 고등학교는 주변의 다른 학교들과 달리, 같은 학교 1, 2학년생들이 중간고사를 볼 때 마지막 기말고사를 시행해 왔다. 일종의 수능 전 테스트인 셈이다. 하여 최대한 힘을 빼긴 했다지만, 이 정도로 처참한 성적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승진은 이미 오래전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끝마친 상태였고, 혹시나 하는 상황에 대비하여 대학 과정까지 대부분 마스터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런 그가 자사고나 특목고로 진학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본가에서 가까운 고등학교가 학성 고등학교였기 때문이다.

일반 인문계 중에서도 명문에 속하는 학성 고등학교는 대충만 공부를 해도 충분히 전교 1등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입학 후 단 한 번도 수석 자리를 놓지 않았었는데 말이지.

“야, 이번 1등 진짜 백승진 아니야?”

“벽보 못 봤냐? 우영이라잖아.”

“우영이면, 그 3반의 신우영?”

“와! 신우영, 막판 역전극 대단한데? 그렇게 추격하더니 결국은 해내네?”

……젠장!

쑥덕이는 소리가 공기를 타고 귓가로 흘러들어 온다. 인상을 쓰며 앉아 있던 승진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나서려 했다.

칼바람을 휘날리며 뒷문을 향해 걷는 승진을 보며 ‘화났네, 화났어.’ 하고 혀를 끌끌 차는 2반 소년들의 말이 그의 심기를 더욱 거슬렀다.

빌어먹을 놈들이.

자신이 한 계단 내려갔다는 것이 뭐가 그리 기쁜지,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는 학우들의 모습이 짜증스러웠던 승진은 있는 힘껏 뒷문을 닫아 버리며 인상을 썼다.

기분도 거지 같은데 바람이나 쐬어야겠다.

승진은 이를 갈며 중앙계단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

승진이 막 몸을 비틀려는 순간, 하필이면 3반 교실 앞문을 열고 나오던 우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몸이 굳는다. 머리는 이 녀석에게서 눈을 돌리라고 하는데, 행동은 제 의지를 멀리 벗어나 있다.

우영에게 꽂힌 눈길을 옮기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던지라, 아마도 우영은 자신이 그를 빤히 바라봤음을 인지했을 거다.

제기랄.

승진은 ‘백―’ 하고, 제 이름을 부르려다 중앙계단 쪽으로 홱 몸을 돌리는 자신의 모습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우영의 음성을 뒤로한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거 사람 구해 줬더니 왜 살려 줬냐고 화를 내는 꼴이군.]

그날, 한 번 더―를 외친 승진에게 우영은 코웃음을 쳤다. 어찌나 신랄한 표현인지 가슴이 뜨끔했다.

[분명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못 들은 건 아닐 테고.]

[확실히 들었지.]

[그런데도 또 해 달라?]

[안 되냐?]

승진은 대답 대신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우영에게 그의 타액이 묻어 있는 입술을 달싹여 주었다.

[네가 알지 모르겠지만…… 난 다른 사람한테 뭔가를 요구해 본 적이 없는 놈이다.]

[그런데?]

[그런데 너한테는 요구, 아니 부탁하고 싶다.]

[…….]

[한 번만 더 하자. 아니, 더 해 줘. 응?]

그토록 절실하게 무언가를 바랐던 것은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맛을 알아 버린 이상 헤어 나올 수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승진은 애원하는 저를 어이없이 쳐다보던 우영의 시선을 잊지 못했다. 제기랄. 천하의 백승진이 남한테 구걸을 하는 날이 오다니. 이런 치욕이 있을 수가. 짧은 그의 일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기에 자존심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석하게도 치솟는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딱 한 번 더, 그 붉은 입술을 딱 한 번 더 맛보고 싶어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만약 우영이 거절한다면 무슨 일을 저질러 버릴지 몰라 스스로가 걱정스러워질 만큼.

지난 며칠 동안, 아니 그전부터 이상하게 신경 쓰이던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승진은 꽤, 아니 조금 많이 똑똑한 소년이었고, 자신이 어떤 감정으로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지 충분히 추론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승진은, 놀랍게도 신우영을―

“뭐 하냐?”

11월 초의 학교 옥상. 곧 다가올 겨울의 기운이 조금씩 느껴지는 곳에서 멍하니 난간 앞에 서 있었다. 댕댕 울리는 수업 시작 종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하암, 하품하고 있던 승진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귀 익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보니 몇 분 전 저와 눈이 마주쳤던 우영이 보인다. 두근. 심장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지만, 승진은 내색하려 하지 않았다.

“기말 성적 나왔던데.”

웃기는 자식이다.

“나보다 낮더라?”

시비 거는 건가?

다른 녀석들과 있을 때는 말 한 번 안 걸더니, 이렇게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는 꼭 먼저 말을 걸어와 신경에 거슬린다. 그래서 더 눈이 가고, 눈을 뗄 수 없는 거겠지만.

승진은 일부러 말을 던지는 것이 틀림없는 우영을 냉랭하게 응시하다 입술을 삐죽였다.

“마지막 두 문제, 밀려 썼어.”

“그렇다더군.”

실수 중의 실수였다. 딱 두 문제를 틀려 만점의 기회를 놓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불과 보름 정도 남겨 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인지라, 그리 좋은 예감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변명거리는 존재한다. 잠을 못 잤다. 밤새도록 눈앞에 아른거리는 이 빌어먹을 녀석의 입술 때문에. 자꾸만 커져 가는 이 말도 안 되는 감정 때문에.

툴툴거리는 승진의 곁에 멈춰 선 우영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안 그래도 교무실 가니 선생님들이 그걸로 난리더라. 이제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우리의 기대주 백승진이 설마 실수하면 어떡하냐고. 안절부절.”

“……수시는 이미 합격했는데 뭐가 문제야?”

“최저 조건도 성립 못 할까 봐 그러는 거지.”

“미쳤군. 내가? 걱정도 팔자네.”

“나도 그렇게 말해 줬지.”

……뭐?

조금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우영이 자신의 실드를 쳐 줄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승진이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응시하자 우영이 뭐 잘못되기라도 했냐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백승진 걱정할 시간에 다른 학생들 걱정하시라고 말이지.”

싱긋, 눈을 반쯤 휘며 웃는 우영의 얼굴에 귀가 화끈거린다. 망할. 이젠 아예 스스로 제어가 되지도 않는다. 승진은 반쯤 포기한 눈으로 지난 몇 달 동안 그의 머릿속에 눌러앉아 떠날 줄 모르는 우영에게 말했다.

“신우영.”

“어.”

“듣자 하니 너는 정시로 대학 간다고?”

승진의 말에 우영의 눈이 큼지막해지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수시보다는 정시로 가야 전액 장학금을 받을 확률이 높다더군.”

“나랑 같은 대학에 지원할 거라던데. 수능은, 자신 있냐?”

“그럭저럭.”

몇 달 되지는 않았지만 그간 그를 유심히 지켜봐 온 결과, 우영이 그렇게 대답할 때는 꽤 자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승진은 흐응, 하고 나지막하게 콧소리를 흘리다 말했다.

“행운의 키스, 해 줄까?”

“미쳤군.”

은근히 사심을 담아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냉랭하다.

쳇.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이야.

백승진이 신우영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닌 지 무려 3년째인 고등학교 3학년의 어느 날.

백승진이 신우영과 우연하게도 입을 맞춘 것은, 그렇게 신우영을 인식하고 난 후 며칠이 더 흐른 어느 날.

그리고 백승진이 다른 학생들 몰래 신우영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로 변한 것은, 신우영이 백승진의 입맞춤 제안을 허락한 후 어느 날.

‘그날 이후 한 번도 안 했는데…….’

생판 모르던 사이에서 적어도 남들 눈을 피해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정도로 발전했다면 앞으로 가능성은 그리 나쁘진―

……어?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언가 시커먼 것이 시야를 가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승진의 입술에 닿았던 우영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뒤였다. 승진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방금 이게 무슨―

“어디까지나 수능을 앞두고 있으니까. 부적치고는 나쁘지 않겠군.”

그렇게 말한 뒤 입술 위에 묻은 타액을 스윽 닦는 우영의 행동은 피를 들끓게 만든다. 승진은 ‘간다.’ 하고 말한 뒤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가는 우영의 등을 바라보며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내뱉었다.

“신우영!”

우영이 멈춰 섰다.

젠장. 이런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벌렁거리는 심장이, 그 말을 얼른 내뱉으라고 말하고 있다. 승진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크게 외쳤다.

“나…… 나, 너 좋아한다!”

그러자 스윽 앞서 나가던 우영이 뒤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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