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외전. 우리의 마지막 글줄
우려했던 대로였다.
비비안의 복귀와 동시에 루페르트 공작저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표정이 부루퉁한 것도 모자라 옷까지 더러워진 비비안을 보고, 율리시스와 헬리오스는 후다닥 달려와 성을 내기 시작했다.
“누나! 모야!”
“누가 이랬습니까, 비비 전하.”
“…….”
“황궁이 지지구나!”
“황자입니까?”
“…….”
동생과 호위의 호들갑에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왠지 일러바치는 치졸한 짓인 것만 같아서 비비안은 침묵했다.
그 정적에서 답을 찾은 헬리오스가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가서 끌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문을 채 박차기도 전.
“멈춰.”
주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송이 하나 떨어지는 것처럼 작아도 헬리오스에겐 늘 우레처럼 와닿는. 악마는 그대로 발을 멈춰 세웠다.
혹시 덧붙여 명하실 것이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으나, 전하께서는 차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계셨다.
“내가 명령하지 않았잖아.”
“……!”
“주인의 명령 없이 멋대로 움직이면 나빠.”
내 명령이 없다면 너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오만한 선언. 그러나 헬리오스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비비 전하.”
그리고 그 옆. 율리시스는 자기 몸보다 커다란 의자를 질질 끌고 문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었다.
헬리오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비비안이 물었다.
“어디 가?”
“혼내러.”
“혼내?”
“용용 삼촌이 그랬어. 누나를 괴롭히면 뽀각뽀각.”
천사 뺨치는 외형의 아들 입에서 악마 뺨치는 험악한 말이 나온다.
이벨리아가 소파 위의 ‘용용 삼촌’ 엔리르를 찌릿 노려봤다. 너로구나, 이 원흉.
율리시스의 행태가 바람직하다는 듯 말랑한 앞발을 짝짝 부딪치던 엔리르는 이벨리아의 시선을 받자마자 날개로 얼굴을 스윽 가리고 쿠션 아래로 숨어들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용이야. 세상에, 율은 왜 저렇게 자라버렸대?
잡아떼는 용의 통통한 엉덩이에 저걸 확 그냥…… 중얼거리며 이벨리아가 율리시스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오렴.”
“뽀각뽀각은?”
“아마 지금 황후 폐하가 혼쭐을 내고 있을 거란다. 율까지 뽀각뽀각하러 가면 황자가 너무 가엾지.”
“우웅…….”
“율은 아빠랑 놀고 있고. 비비는 엄마랑 잠깐 얘기 좀 할까?”
“히익!”
아무리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지만 냅다 물리력을 행사한 딸에게 그저 어화둥둥 잘했다고만 가르칠 수는 없다.
혼날 때는 혼나야지. 이 엄마도 그렇게 컸어요.
이벨리아가 비비안의 손을 잡고 방으로 올라가자, 뒤에 남은 헬리오스와 율리시스의 눈이 한층 더 서늘하게 번뜩였다.
“비비 전하가 왕께 혼나시는 것도 다 그놈 때문이다.”
“나는 정했어. 그놈은 내 적이야. 오늘부터. 그렇지, 아빠?”
“……음. 아빠가 동의했다고 엄마한테는 이르지 말고.”
자신이 전하라서 전하라고 말했을 뿐인 히페리온의 첫인상은 비비안뿐만 아니라 헬리오스와 율리시스에게도 최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각, 공녀의 얼굴에 고기를 던졌다는 이유로 카밀라에게 대차게 혼나고 있는 히페리온이 알면 억울해서 땅을 칠 노릇이었다.
***
그로부터 몇 달 뒤, 여름의 말미.
최근 비비안은 비밀기지를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비밀기지에 꽂힌 이유는 간단했다.
얼마 전 우연히 사용인들의 대화 중 ‘비밀기지’라는 단어를 들어 되물었는데, 다들 입을 모아 마님께서는 참으로 멋진 비밀기지를 가지고 계신다고 했더랬다.
“엄마가 비밀기지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따라서 가지고 싶어.”
비비안에게 우상이자 동경이며 닮고 싶은 대상은 단연 엄마였다.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며, 세상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까.
정리하자면, 비비안은 엄마가 하는 거라면 뭐든 따라 해야 직성이 풀렸다.
늦은 저녁.
응접실 소파에 앉아 상어 인형에 턱을 괸 비비안이 헬리오스에게 말했다.
“헬리. 비밀기지는 땅을 파서 만들까? 대부한테 부탁하면 해줄 텐데.”
“땅굴은 축축할 겁니다.”
“그러면 바다는? 엘라임 삼촌한테 말하면 만들어줄 텐데.”
“바다는 춥습니다.”
“그러면 하늘은? 페르세스 이모한테 만들어달라고 할 수 있어!”
“새가 비비 전하를 콕콕 쪼아버릴 겁니다.”
“그럼 화산 속은? 추프리트한테 부탁하면 될 거야.”
“뜨거워서 비비 전하 녹습니다.”
“……혹시 헬리는 내가 비밀기지를 갖는 게 싫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들면 헬리도 출입할 수 있게 해줄게.”
원하는 말을 들은 헬리오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다소 심드렁하던 자세는 꼿꼿하게 바짝 세워졌다.
저도 출입할 수 있게 해주신다면야 세계 전역을 구석구석 뒤져야지요.
“산은 어떻겠습니까.”
“산?”
“왕께서 소유하고 계시는 것과 유사한 환경에 만들면 쾌적하고 따뜻한 비밀기지가 될 겁니다.”
“역시 똑똑해. 산이 좋겠어! 그럼 나랑 같이 찾으러 갈래?”
비비안의 천진한 물음에 마침 놀러와 있던 카론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린 아기씨를 모시고 산과 들을 수도 없이 돌아다녔던 과거가 생각난 터다.
카론의 표정을 살피던 이벨리아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비비를 저대로 두면 헬리도 카론처럼 고생하겠네.”
“고생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떨리는 입꼬리나 숨기고 말해, 카론.”
자리에서 일어선 이벨리아가 비비안을 번쩍 들어 안았다.
“우리 비비.”
“으응.”
“엄마 비밀기지 비비 줄까?”
“……!”
이벨리아를 똑 닮은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엄마 비밀기지는 엄청 멋지고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꼭 엄마처럼!
“저, 정말?”
“응. 정말.”
“엄마한테 엄청 소중한 거라고 했는데?”
“소중하지. 하지만 비밀기지도 이제 새로운 손님을 맞고 싶어 할 거야.”
세월은 흐르는 법이다.
과거에 지녔던 것을 품에 꼭꼭 싸매고 감춰봤자 빛만 바랠 뿐.
우리가 그곳에서 탑처럼 많은 추억을 쌓았듯이, 너희 또한 그곳에 새로운 시간과 이야기를 새긴다면…….
“아마 낡아버린 비밀기지는 그 덕에 다시 빛날 거란다.”
기실 비밀기지를 가지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루드비히와는 이미 이야기를 마쳐둔 상태.
이벨리아는 비밀기지의 또 다른 공유자였던 아가레스를 바라봤다.
오래도록 함께 세월을 새겼던 악마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
비밀기지를 아이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계절은 가을이었다.
공식 소유자는 비비안이었고, 선대 비밀기지 공유자들의 뜻에 따라 출입을 허가한 것은 율리시스, 헬리오스, 히페리온 셋이었다.
비밀기지의 결계 내부로 한 발 들인 비비안은 눈앞의 풍경에 입을 떡 벌렸다.
이벨리아가 늘상 사랑했던 청명한 하늘, 코를 싸하게 만드는 늦가을 특유의 호흡,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낙엽. 그것들이 그대로 머무는 곳.
“엄마는 상상보다 훨씬 대단한 비밀기지를 가지고 있었구나…….”
시간의 손길이 묻어 다소 허름한 오두막도, 여기저기 상처가 가득한 돌도, 수없이 깔아뒀던 것처럼 땅에 조금 파묻힌 돗자리도.
그 모든 게 비비안은 참으로 좋았다. 사랑하는 엄마의 흔적인 것만 같아서.
“아름답지?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야.”
“아르티나 공작저보다 더?”
“응. 더.”
“우리 집보다도 더?”
“미안하지만, 응. 더.”
아이는 아이인 모양인지 헬리오스 역시 여과 없이 감탄했다.
“역시 왕의 비밀기지는 대단합니다. 이 정도 비밀기지는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왕인 거로군요.”
마찬가지로 이곳저곳 뛰며 둘러보느라 볼이 발개진 율리시스는 땅에 떨어져 조금씩 터진 열매를 싹싹 그러모아 누나에게 안겨주었다.
“누나. 이거.”
“예쁜 쓰레기구나. 고마워.”
“열매야. 맛있어.”
그렇게 루페르트의 일원들이 비밀기지를 만끽하고 있을 무렵.
멀리 황궁으로 이어지는 샛길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리더니, 이내 루드비히와 히페리온이 결계 안으로 들어왔다.
“왔어, 루이?”
“이브. 악마 놈도 왔군.”
“당연하다. 우리의 비밀기지 수여식이니.”
“우리는 무슨 우리. 20년째 누차 말하지만, 비밀기지의 공유자는 나와 이브다. 그대는 객식구지. 다른 말로 하면 불청객.”
“20년이 지났으면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부모님들이 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와중, 몇 달 전 난투 이후로 처음 만나는 히페리온과 비비안은 뻘쭘하게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
“…….”
어색한 분위기가 낯선 듯, 늘 훈기를 머금고 있던 비밀기지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헬리오스와 율리시스가 금방이라도 히페리온을 물어뜯을 것처럼 형형하게 눈을 빛냈으나, 명령이 없기에 섣불리 발을 떼지는 않았다.
그렇게 꼬마들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대기가 터져나갈 것처럼 극한까지 당겨졌을 때.
- 짝!
이벨리아가 크게 손뼉을 쳤다.
침묵 속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자. 자. 우리 아가들. 서로 그렇게 노려보면 눈이 데구루루 빠져요.”
“…….”
“이 자리에서 비비와 히온 둘이 결투할 게 아니라면 다 같이 오두막 구경이나 좀 하고 오는 게 어떨까?”
“……쟤랑 같이?”
“히온도 비밀기지의 공유자잖니. 당연히 같이 구경해야지. 비밀기지를 혼자 독점하려고 하면 못써.”
비밀기지 독점 건으로 제대로 시달림을 당한 전적이 있던 루드비히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개구리 올챙이 적 기억 못 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무진장 싫다는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비비안이 히페리온을 향해 턱짓했다.
“따라오든가.”
마찬가지로 그다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팍팍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 히페리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연고.”
“뭐.”
“발랐냐.”
“아니.”
서리처럼 차갑게 대답하며 흘끗 반응을 살피니 히페리온의 동그란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목을 끄는 미모로 입을 삐죽이니 괜히 옅은 죄책감이 든다. 비비안이 선심을 쓰듯 덧붙였다.
“바깥세상 사람한테는 처음 받은 거라서.”
“……그러면 아끼느라 안 쓴 거야?”
“몰라. 그만 물어봐.”
확답은 없었지만, 히페리온의 얼굴은 삽시간에 만두피처럼 부드럽게 펴졌다.
그와 동시. 헬리오스는 뚜렷하게 짚을 수 없는 미지의 위기감을 느꼈다.
하여 악마는 비비안에게 가까이 향하는 히페리온의 발을 은근히 막아 세웠다.
“……?”
그러고서 뭐냐고 묻는 시선을 보내는 히페리온에게 작게 속삭였다. 비비안은 듣지 못하게 바람결에 흘리며.
“비비 전하와 반경 30M 거리를 유지해라.”
“그러면 내가 거의 비밀기지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잘 이해했군.”
“내가 왜 그래야 해?”
“비비 전하께서 너를 싫어하시니까.”
“아닌 것 같은데?”
히페리온을 순하게만 봤다면 큰 오산이다.
동글 말랑 만두처럼 보여도 무려 대제국의 유일한 적자이자 카밀라의 아들.
보고 들으며 접하는 모든 것이 투쟁이고 경합이었으니…… 히페리온이 마찬가지로 헬리오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질투해? 쟤가 나를 더 예뻐할까 봐?”
“질투는 무슨……!”
도발에 목소리 높이던 헬리오스는 비비안이 휙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악마를 향해 여우처럼 씩 웃은 히페리온이 보란 듯 율리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아이는 비비안의 동생이니까 잘 대해 주는 것이 좋다.
“잘 지내보자, 공자.”
그러나 기대와 달리 금빛 아이의 답은 상당히 매몰찼다.
“용용 삼촌이 그랬어. 누나를 노리는 것들은 혼내줘야 한다고.”
헬리오스가 냉큼 끼어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너도 마찬가지야, 악마.”
“…….”
“죄다 우리 누나 노리는 놈들이야.”
역시 용용 삼촌 말이 딱 맞아. 용용 삼촌은 대단해.
누나를 빼앗긴 전적이 있는 용으로부터 사상교육을 제대로 받은 율리시스는 두 사내아이를 사납게 노려보고 우다다 달려가 비비안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누나. 누나는 내가 지켜줄 거야.”
“내가 율보다 강한데?”
“조금만 기다려. 내가 저 나무만큼 커져서 뽀각뽀각 다 밟아버릴 테니까.”
“갑자기 왜 그래?”
남매의 대화를 들으며 뒤를 따르던 두 사내아이는 재빨리 잔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비비안과 조금 더 친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이 온통 똥파리 천지야!”
율리시스라는 저 험준한 산을 넘어야 하는 모양이니까.
***
오두막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참 뒤 밖으로 나온 비비안과 히페리온 주변에는 제법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비밀기지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 아래 평평한 바위.
적당히 그늘이 져서 세 친구가 즐겨 앉던 그 자리엔 이제 그들의 어린 시절을 빼닮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바라보던 이벨리아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새겨졌다.
“신기하다. 그치.”
“기분이 묘하군.”
“나도 그렇다.”
“우리가 가장 사랑했던 자리에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이 덧씌워졌어.”
그 어떤 명화라고 하더라도 이 풍경보다 심금을 울릴 순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멀었다. 오늘 이날에 오기까지.”
작게 읊조리며, 이벨리아는 아가레스가 매고 온 가방에서 자서전을 꺼냈다.
한 권.
두 권.
세 권.
지금의 광경을 보기까지 남긴 발자취는 이 두꺼운 책 세 권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은 치열했고 다난했으며, 노도(怒濤)인 동시에 폭풍이었다.
이벨리아는 네 권째, 새로운 책 하나를 더 꺼내 가장 앞장을 펼쳤다.
“이 순간도 기록해둬야지.”
우리의 손으로 지킨 세계. 우리가 되찾아온 시간.
그것을 기록하는 손길에는 세상과 삶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자서전의 제1권을 찬찬히 훑어보던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이의 있다. 너를 너무 착하게 묘사한 것 같은데.”
“기각한다. 난 객관적인 사실만 적었어.”
“이것 좀 봐라, 악마. 이게 객관적인 사실이냐?”
“……사실……이다.”
띄엄띄엄 답을 쥐어짠 아가레스가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루드비히에게 속사포처럼 속삭였다.
“내겐 묻지 마라. 그대는 황궁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이브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이다. 알아들어? 대답 잘못하면 부인께서 내게 등을 돌리고 주무신다고.”
“……내 생각이 짧았군. 미안.”
집필자의 편견이 다소 섞인 자서전을 이어서 읽던 루드비히가 문득 물었다.
“자서전은 모름지기 마지막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던데.”
“그렇겠지. 삶의 끝에서 남기는 한 문장이 곧 인생일 테니까.”
“염두에 둔 건 있어?”
바람결에 머리칼이 흩날린다. 가을의 밀밭을 닮은 금빛. 그 사이로 산개하는 노을을 올려다보며 이벨리아는 즉답했다.
“있어.”
“뭔데?”
“이거.”
두꺼운 책을 가장 뒤로 넘겨 마지막 장.
그 끝에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글줄을 적는다.
이것 외에 다른 말은 더 필요 없으리라.
마침표를 찍고 깃펜을 내려둔 이벨리아가 그렇지 않냐고 묻는 듯 돌아봤다.
친애하는 벗은 웃었다.
연모하는 신도 웃었다.
이벨리아가 자서전을 내려두며 눈을 마주 휘었다.
“우리도 오랜만에 저 바위에 앉아볼까?”
“좋지.”
“가자.”
일어선 세 친구가 아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나무 아래 덩그러니 놓인 책.
꽉 닫힌 행복을 의미하는 맺음말 위.
봄과 여름을 한껏 사투하고 비로소 바람결 여정을 시작한 낙엽이 살랑 내려앉았다.
- 방랑은 여행이 되었다. 함께였기에.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