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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322화 (322/323)

##  322화: 외전. 적인가 친구인가

어른들은 어른들만의 이야기가 있는 법.

황자와 비비안 두 아이를 바로 옆에 딸린 놀이방에 두고, 루드비히와 아가레스, 이벨리아는 응접실의 넓은 원탁에 둘러앉았다.

고풍스러운 원목의 냄새가 고소한 커피 향을 머금고 방안에 퍼진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얇은 커튼을 휘날려 일순 그림자가 졌다가 사라진다.

놓인 커피는 폼일 뿐. 결국 오렌지주스를 집은 이벨리아가 호로록 우아하게도 입으로 털어 넣었다.

“황궁은 다 별로인데 딱 하나가 좋아.”

“내가 있다는 거?”

“오렌지가 신선하다는 거.”

“정만 없는 친우인 줄 알았더니 눈치도 없군.”

“내 눈치는 발군인데.”

“눈치가 발에 달린 게 분명하다. 내가 심히 토라졌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말로는 한껏 투덜대고 있으나 정작 루드비히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자리했다.

과거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진 말장난이 스스로에게도 흡족했던 터다. 마치 본인도 두 친구와 발맞춰 걷고 있다는 방증인 듯하여.

어릴 적 버릇처럼 자신 몫의 애피타이저를 이벨리아의 접시에 덜어주려다 멈칫 내려두며 루드비히가 물었다.

“율리시스는 왜 안 데리고 왔지?”

“그렇지 않아도 누나 따라오겠다고 울고불고 난리였어. 누구를 닮아서 저러는지, 벌써 비비 껌딱지거든.”

“누구를 닮았는지 너무 잘 알 것 같다만. 데려오지 그랬나.”

“아직 황궁 문턱 드나들기에는 너무 어려.”

“아쉽군. 금(金)의 공자라고 불린다 하여 궁금했는데.”

“조만간 비밀기지로 데려갈게. 그러고 보니 황자랑 율이 함께 있으면 아주 번쩍번쩍 눈이 부시겠다.”

다정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테이블에는 송아지 스테이크가 놓였다. 이벨리아는 나이프를 들지 않았다.

대신 아가레스가 자신의 접시 위 고기를 먹기 좋게 자른 다음 부인의 접시와 바꿔주었다.

배려하는 이와 받는 이 모두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아마 일상인 듯했다.

그 덤덤한 행동에서 두 친우의 애정이 엿보여서…… 루드비히의 심장은 이제 아프다기보다는 기꺼웠다.

고기의 힘줄 부위를 떼어 이벨리아의 입에 넣어주면서 아가레스가 루드비히에게 물었다.

“그래서. 아이는 키워보니 어떠한가.”

“너희 둘이 왜 그렇게 바빴는지 알 것도 같다. 손 가는 게 어디 한둘이어야지.”

“하지만 루이는 황제니까 웬만하면 시녀들 손에 맡기고 있지 않아?”

“가능하면 내가 하려고 노력 중이야. 아이가 어릴 적에는 애착을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여.”

“오오오오올-.”

“뭐야. 그 이상한 감탄사는.”

“좋은 아빠네, 루이?”

글쎄. 루드비히가 일부러 가볍게 답했다.

“내 아버지와는 다른 아비가 되어야지.”

“…….”

“…….”

침묵. 역시 황실 눈치를 보지 않는 두 사람답다. 루드비히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빈말로라도 선대 폐하께서는 좋은 아버지셨다 말하지 않는군.”

“내게 왕은 부인뿐이니, 남의 왕에게 빈말을 할 이유가 없다.”

“난 원래 빈말 못 해. 선대 폐하께서는 성군이셨지만 좋은 아버지나 좋은 친구는 아니셨지. 우리 아빠는 아직도 선대 폐하의 무덤에 가서 술을 드신다고.”

“……그래? 선대 공작이?”

“마지막에 사이가 조금 틀어졌다고는 해도 어디 친구 사이라는 게 그렇게 무 자르듯 잘리겠어? 아무래도 더 빨리 귀환하지 못한 게 한으로 남으셨나 봐. 그러니까 폐하는 승천하셔서까지 우리 아빠를 괴롭히고 계신 거지.”

“…….”

“그런 표정 짓지 마. 루이가 죽으면 내가 무덤에 술 뿌려줄 테니까.”

“그게 무슨 불경한 악담이냐. 나 아직 정정하다.”

분위기를 풀고자 하는 농담임을 익히 알고 있다. 픽 웃으며 루드비히는 다시 손을 놀려 식사를 이어갔다.

“근데 황자 이름은 누가 지었어?”

“내가.”

“예쁘던데, 히페리온!”

“히페리온…… 태양신의 이름이로군.”

“이름값 하기를 바라며 지었다.”

일국의 국본에게 붙이기에 좋은 이름이지. 무심코 끄덕이던 아가레스가 순간 멈칫했다. 루드비히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지?”

“……공교롭게도 비비의 호위인 헬리오스 역시 태양신의 이름이라.”

“…….”

“…….”

“왠지 느낌이 좋지 않군.”

“간만에 의견이 같다.”

이만큼 세상을 경험하고 나서 반추하니, 때로 인연은 자신이 나아갈 길에 미리 족적을 찍어두기도 했다.

그 많은 산과 들에서 이벨리아와 루드비히의 비밀기지가 겹쳤던 것. 그 많은 세계 속에서 이벨리아가 아가레스의 귀걸이를 발견해 당겼던 것.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웠던 그런 것들.

“……비비는 귀엽다.”

“몇 년만 지나면 제국 제일의 미인이 될 테지.”

“그야 당연하지. 우리 부인의 피가 어디 가겠나.”

“듣자 하니 그 호위기사는 이미 비비를 어미 닭 쫓듯 따르고 있다던데.”

“네놈의 아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 건-.”

“-네놈만의 착각이나 비약은 아닐 것 같다.”

두 아빠의 똥볼 차기에 이벨리아가 재깍 제동을 걸었다.

“뭐래. 누가 들어도 착각이고 비약인데.”

“……이브는 몰라.”

“우리만 아는 진득한 운명 뭐 그런 게 있다.”

“아직 애들은 아무 생각 없는데 왜 너희들끼리 앞서가고 난리야?”

아가레스와 루드비히가 자신들의 경험담에 근거하여 조만간 다가올 미래를 이벨리아에게 설파하려던 그때.

- 쨍그랑!

옆방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리고.

- 아이고, 황자 전하를 때리시면 안 되십니다, 공녀님!”

- 공녀님께 고기를 던지시면 안 되십니다, 전하!”

- 공녀님께서 이를 드러내신다! 어서 달래드리지 않고 뭣들 해!”

- 황자 전하께서 소매를 걷어붙이시잖나! 공녀님 가까이 가지 못하시게 잡아!”

더불어 자연재해를 맞이한 것만 같은 시종들의 급박한 고함도 들려온다.

세 친구가 느리게 고개 돌려 시선을 마주쳤다.

“……혹시 너희가 느꼈다던 그 진득한 운명 뭐시기가 애정이나 우정이 아니라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생사결(生死結)이니?”

“…….”

“…….”

둘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했다.

시작은 제대로 파국이었다.

***

시간을 아주 조금 되감아, 제국 내 가장 귀하다는 두 아이가 머리채 잡고 싸우게 된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아무리 쟤가 나를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지만 내가 누나니까 먼저 용서해야지. 응. 나는 이제 동생도 있는 누나니까.’

결심한 비비안이 창가에 선 히페리온에게 뽀작뽀작 다가가 물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아가?”

그러자 히페리온이 작은 강아지처럼 아르르 이를 드러냈다.

“나 아가 아니야.”

“다섯 살 아니야?”

“다섯 살 맞아.”

“다섯 살은 아가야.”

“너는 몇 살인데?”

“나는 여섯 살.”

다섯 살에게 여섯 살은 꽤 높다. 시무룩해진 히페리온의 머리 위에 작은 짐승의 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대단하네, 여섯 살. 내 이름은 히페리온이야. 히페리온 에르카디아.”

“너무 낙마하지는 마. 너도 금방 클 테니까. 물론 그때가 되면 나는 더 커져 있겠지만! 나는 비비안이야. 비비안 루페르트.”

그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좋았다. 아이들을 파국으로 이끄는 1등 공신인 나이 문제에는 의외로 히페리온이 접고 들어갔던 것이다.

안심한 시녀들은 아이들이 즐기는 음식을 속속 날라 테이블 위에 가져다 두었다. 누나의 위엄을 발휘하여 단정히 앉은 비비안이 물었다.

“너 포크 쓸 줄 알아?”

“그건 기본이야. 다섯 살도 그런 건 해.”

“그럼 나이프는?”

“그건…… 조금 어렵지만 여러 번 움직이면 자를 수 있어.”

여섯 살의 위용에 살짝 기가 죽어 움츠러들었던 히페리온이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하나 이상한 게 있다.

여섯 살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나한테는 말을 높이는데. 얘는 왜 말이 짧지? 우리 아빠와 엄마가 내게 그러는 것처럼? 심지어 ‘너’라고 부르네?

“그러면 너 비밀기지는 가지고 있…….”

“전하.”

“응?”

“너라고 하지 말고 전하라고 불러야 해. 나는 황자니까.”

황족의 위치를 잊지 않겠다는 듯 삽시간에 단호해진 강아지. 보통 귀족들에게라면 달게 먹혔을 위협은 안타깝게도 비비안 앞에서는 빛바랜 낙엽처럼 스러졌다.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날 비비안 전하라고 불러야 해.”

“왜? 우리 제국에 전하는 나 하나야.”

“아니, 내가 전하야. 다들 나를 그렇게 불러.”

“그건 역, 역, 역…….”

“봐.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다섯 살이 전하는 무슨 전하야?”

그러자 히페리온이 고사리손으로 탁자를 탁 내리쳤다.

“어허! 불량하다, 이 가짜 전하야!”

“너야말로 불량하다! 감히 나한테 가짜라고 해?”

난데없이 나타난 못된 귀족이 황자 자리를 위협한다. 히페리온은 화가 났다. 그러나 우글우글 폭발할 것 같은 감정에 비해 어휘는 아직 단조로웠다.

“이, 이, 전하 도둑놈!”

“도둑? 도둑은 너야!”

“이이…… 여봐라! 당장 이 여섯 살을 땅속에 가두어라!”

“땅속?”

히페리온이 회심의 공격을 날렸음에도 비비안은 코웃음을 쳤다.

“가둬 봐라! 내 대부가 땅의 왕인데!”

벌떡 일어난 비비안은 손을 쭈욱 뻗은 다음 히페리온 몫의 음식을 집어 홀랑 입에 털어 넣었다. 히페리온이 경악했다.

“……내 밥!”

“넌 더 크지도 마! 평생 다섯 살 해!”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분연히 일어난 히페리온 역시 비비안의 접시를 통째로 낚아채 입에 와앙 털어 넣었다.

“너도 더 못 커! 평생 여섯 살 해!”

그때부터는 전쟁이었다.

누가 먼저 머리채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비비안은 히페리온의 등을 팔꿈치로 내리찍었고, 히페리온은 손에 잡히는 대로 고깃덩이를 집어 비비안의 얼굴에 맞추었다.

비비안이 각성한 고양이처럼 으르렁 이를 드러냈고, 히페리온은 일생일대의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소매를 걷어붙였다.

동그랗고 작은 스푼을 레이피어처럼 든 비비안이 캬르릉 외쳤다.

“덤벼! 내가 바로 신과 대정령사의 딸이다!”

한 걸음 물러서 쇠로 만든 빨대를 검처럼 든 히페리온도 아르릉 외쳤다.

“덤벼! 나는 소드마스터와 무서운 엄마의 아들이다!”

챙! 챙! 챙!

스푼과 빨대가 부딪치는 가볍고 하찮은 소리가 비장한 손끝을 타고 흘렀다.

그때 다급히 놀이방으로 들어온 세 어른.

“…….”

눈앞의 풍경이 어이가 없어 이벨리아가 잠시 침묵하는 와중, 흘끗 부인의 눈치를 본 아가레스가 작게 말했다.

“……왼쪽을 노려라. 비비. 왼쪽이 비었어.”

그러자 ‘이놈 봐라?’라는 눈빛으로 악마를 일별한 루드비히도 가세했다.

“레이디에게 검을 겨누면 쓰나. 그래도 우선 다리를 노려보거라. 비비가 다치지 않게 살짝 걸어서 넘어뜨리는 거다.”

자식들이 스푼과 빨대를 들고 싸우고 있는데 아빠들은 마치 아바타를 조종하듯 무예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진짜 이것들이 정말…….

짜악, 이벨리아가 두 친구의 등짝을 내리쳤다.

“가서 말려, 이 철부지들아!”

***

두 아이의 작은 전쟁은 어른들에 의해 강제로 휴전.

이벨리아는 ‘전하’ 지위를 주장했다가 억울하게 날벼락을 맞은 히페리온을 살살 달래주었다.

“우리 비비가 사나운 데가 있지. 내가 대신 사과할게.”

“히끅…….”

마찬가지로 루드비히는 ‘전하’ 지위를 주장했다가 억울하게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한 비비안을 부드럽게 얼러주었다.

“히온이 친구가 없어 친구 대하는 법을 잘 모른단다.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

“눼에…….”

“아빠가 콱 혼내줄까, 비비.”

“스읍. 토끼는 이리 와.”

“예, 부인.”

크게 마음 상한 두 아이의 표정이 어른들의 지극정성 위로로 조금씩 풀어지던 저녁 즈음. 이벨리아와 아가레스는 비비안을 안고 일어섰다.

“우린 이만 가 봐야겠다. 순위결정전을 주관하기로 해서.”

“모처럼 와줬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 미안하다, 이브.”

“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랬어. 너랑 나도 처음 만났을 때 대판 싸웠잖아?”

엉덩이를 차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솔방울을 던지고, 고추냉이가 들어간 빵을 속여 먹이고.

과거를 회상한 두 친구가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확실히 그렇지. 오롯이 하나의 세상에 살던 어린아이가 난데없이 또 다른 세상을 마주했는데 우여곡절이 없으면 외려 이상하지.

이벨리아가 뚱한 비비안의 볼을 쓸어내리며 묘하게 웃었다.

“또 누가 알아? 몇 년 후면 서로 죽고 못 사는 벗이 될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비비안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큰일이네. 비비를 이대로 데리고 돌아가면 헬리랑 율이 난리를 칠 텐데.”

“……그 또한 미리 사과하지. 다음엔 비밀기지에서 보자. 네 말대로 황궁에는 좋지 않은 기운이 흐르는 모양이니.”

“봐. 내가 옛날부터 말했잖아. 너희 집터는 한번 갈아엎어야 한다니까?”

루드비히와 다정한 시선을 나눈 이벨리아가 발을 돌려 마차를 타기 위해 걸어갔다.

아가레스의 에스코트를 받아 위로 오르려던 찰나.

탁. 탁. 탁. 작은 발소리가 들리더니, 아래에서 당기는 작은 힘이 느껴진다.

“응? 히온?”

“…….”

아이는 답하지 않고 다만 이벨리아에게 뭔가를 척 쥐여주었다.

잠시 비비안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무 말 없이 발을 돌려 뛰어간다.

고개를 갸웃한 이벨리아가 손을 폈다.

아이가 주고 간 작은 마음은 연고였다. 조금 전 자기가 이미 발라서 반쯤은 비어 있는 연고.

이벨리아의 유려한 입매에 따스한 미소가 스쳤다. 역시 엄마는 아무래도 너희가 좋은 친구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비비.”

“…….”

“비비. 이것 좀 봐. 히온이 주고 갔어.”

호기심이 일었는지 비비안이 품에 묻고 있던 고개를 슬쩍 들었다.

“……뭐야?”

“연고. 우리 비비 혹시 다친 곳이 있으면 바르라고 줬나 봐.”

“……내가 더 많이 때렸어.”

“그러니까 더 값진 거 아닐까? 히온에게 필요할 텐데도 비비 쓰라고 준 거니까.”

“…….”

여전히 속이 풀리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다.

“비비가 받기 싫다면 버릴까?”

“…….”

이벨리아가 금방이라도 연고를 던질 것 같은 시늉을 했다. 그러자.

“아니!”

황급히 손을 뻗은 비비안이 작은 연고를 꽉 쥐었다.

“엄마가 발라줄까, 비비?”

작은 얼굴이 좌우로 움직인다.

“왜?”

“……그냥.”

보잘것없는 물건 하나. 어떤 의미를 담기에 비비안과 히페리온은 아직 어렸다.

그저 한 아이는 먼저 손을 내밀 만큼은 온화했을 뿐이고, 한 아이는 그 손을 내치지 않을 만큼은 물렀을 뿐이다.

한 걸음. 딱 한 걸음 서로 물러날 줄 아는 관계.

친구의 수많은 정의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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