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화: 외전. 비비와 황자의 첫 만남
율리시스 루페르트.
명성 높은 루페르트 공작가 둘째의 탄생은 비비안 공녀의 탄생 때와 마찬가지로 온 제국 매파들의 발바닥에 불이 나게 했다.
당장 혼담이 오갈 수야 없겠지만, 공자의 취향이나 교우 관계 등을 주시하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파고들 틈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담장 밖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꿈에도 모른 채 달게 낮잠을 자던 율리시스는 계속해서 볼을 간질이는 무언가에 작게 옹알이하며 눈을 떴다.
무거운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빨갛고 탐스러운 공이 있다. 이건 입에 넣기 좋다.
“아앙-.”
율리시스가 엔리르의 꼬리를 끌어 오물거렸다.
보드라운 털이 침으로 젖는 축축한 감각을 느끼며 엔리르가 아기에게 속삭였다.
“아가야. 너 누나 있지? 나도 누나 있어.”
애착 형성을 위해 냅다 공감대를 읊은 엔리르가 말랑한 앞발로 아가의 볼을 눌렀다. 챱. 소리와 함께 앞발이 통통한 볼에 달라붙는다.
“누나가 있는 동생한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아웅?”
“바로 누나를 노리는 것들은 모두 잡아서 족쳐야 한다는 거야.”
확신에 가득 찬 엔리르가 마치 세상의 진리를 읊듯 또박또박 가르쳤다.
“내가 네 아빠를 족치지 못해서 누나를 빼앗겼거든. 너는 절대 그러면 안 돼.”
“꺄웅!”
“옳지, 대답 우렁차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이 삼촌이 세계에 딱 하나 남은 용이거든. 아주 대단하다는 소리지.”
앞발로 아기의 손을 살짝 눌렀다가 놓으며 엔리르가 말을 이었다.
“천 리 밖도 꿰뚫어 보는 용의 직감으로 보건대, 지금 비비 곁에 달라붙어 있는 헬렐레인지 칠렐레인지 걔가 영 수상하단 말이야.”
“우웅.”
“그러니까 너는 눈 똑바로 뜨고 비비를 지켜야 해. 알겠어?”
“…….”
“졸아? 삼촌이 금쪽같은 조언을 해주는데 졸아?”
“…….”
“귀여워 죽겠네. 아니, 이게 아니지. 너 지금 이렇게 졸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무럭무럭 자라서 비비 곁에 붙을 날벌레들을 후후 불어 치워야 한다니까?”
가물가물 눈을 감는 율리우스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와중. 문가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용용이, 뭐 해?”
“비비!”
“동생하고 둘이서만 놀아? 나 빼고?”
“그럴 리가.”
아기 침대에서 훌쩍 뛰어내림과 동시. 작은 용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엔 어느새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신기한 광경에 율리시스의 금빛 눈이 번쩍 뜨였다.
“율이 자려고 하길래 재워주고 있었지.”
“그럼 동생 코 자게 두고 나랑 놀아.”
“그럴까? 뭐 하고 놀까?”
엔리르가 허리 숙여 비비안을 번쩍 들어 안았다. 삽시간에 몸이 높이 올라가는 것이 재밌는지 까르르 울리는 웃음이 사랑스럽다.
“태워줘! 커다란 용용이!”
“좋아. 커다란 용용이로 변신해서 태워주지!”
고고한 용을 놀이기구처럼 이용하겠다는 요구에도 엔리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인이자 가족인 이벨리아의 흔적을 담은 아이. 설령 심장을 빼달라고 해도 거절의 말은 할 수 없을 터다.
한 손으로도 비비안을 안정적으로 받치고 방 밖으로 나온 엔리르는 문가에 선 헬리오스를 내려다보며 비뚜름하게 웃었다.
“야. 너는 이런 거 못 하지?”
“뭐?”
“비비를 한 손으로 드는 거. 태우고 날아주는 것도.”
“…….”
“내가 인마, 이 세계 유일한 용이라고. 부럽지?”
“…….”
다 큰 용의 유치한 도발. 헬리오스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용이 높이 날아오르며 그림자를 지게 만들었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응애 악마가 발끝으로 땅을 톡톡 차며 중얼거렸다.
“……부럽다.”
나도 어서 비비 전하를 번쩍 안아서 옮겨드릴 만큼 커지면 좋겠는데.
***
바다처럼 잔잔하다가도 불쑥 사고가 터지는 일상 속, 계절이 여러 번 바뀌어 비비안이 막 여섯 살이 되었을 무렵.
이벨리아가 몇 년 전부터 공들여 쓰고 있는 자서전은 벌써 세 권을 가득 채운 상태였다.
달이 뜬 시간임에도 집중해서 깃펜을 움직이고 있는 부인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아가레스가 따뜻한 차를 책상에 내려두었다.
“지금은 어디를 쓰고 있지?”
“데뷔탕트 파트너 구하는 시점이야.”
“흥미로운 부분이군.”
아가레스가 이벨리아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당시 부인께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그도 아직 모르고 있기에 궁금했다.
“안 돼. 아직 보지 마.”
“왜. 조금만 보여줘. 나와 처음 데이트했던 부분만이라도.”
“부끄러우니까 토끼는 나중에 봐!”
팔로 열심히 가리시는 탓에 악마가 건진 것은 귀퉁이 단 한 문장뿐이었다.
[나는 그저 작고 소중한 연애를 하길 원했다.]
아가레스가 픽 웃음 짓자 이벨리아의 목덜미에 따뜻한 숨결이 간질이듯 내려앉았다.
“부인.”
“내용 바꿔 달라고 하려고?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
“온통 내 이야기로 채워달라는 청은 추후 찬찬히 하는 것으로 하고…….”
말끝을 흐린 아가레스가 초대장 하나를 이벨리아 앞에 툭 내려두었다. 겉봉투를 본 이벨리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붉은 사자가 찍힌 것을 보아하니 황실?”
“맞아.”
“부정 탄 초대장이야. 뭐가 됐든 안 가.”
“받을 때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잠시만. 읽어줄게.”
“……?”
악마가 초대장을 펼쳐 그 안에 쓰인 유려한 글씨를 따라 입을 열었다.
“너희 정말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황궁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을 수가 있지? 나도 비비안과 율리우스가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다. 너희 둘이 잘 지내는 지도 궁금하고. 비비안 어릴 적에 육아는 어떻게 했는지도 묻고 싶은 것이 많다.”
“…….”
“친구라면서. 너무하다. 친구라면서.”
“…….”
“내 단 둘뿐인 친구가 나를 버렸다.”
초대장을 접어 툭 내팽개치며 악마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러고 있다. 그놈이.”
“……이걸 어떻게 안 가.”
“내게도 동정심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이 초대장으로 인해 깨달았어.”
“나한테 죄책감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도 깨달았네…….”
삽시간에 둘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가장 빛나는 시간과 가장 치열했던 순간을 돌이켜 보면 항상 그곳에 있는 루드비히는 둘 모두에게 소중한 전우이자 친구였다.
황제라는 지위상 예전처럼 시도 때도 없이 만나기는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다시 초대장을 들어 읽은 이벨리아가 커다랗게 찍힌 붉은 사자의 인장을 콩 때렸다. 마치 꿀밤을 때리는 것처럼.
“안 갈 수가 없게 만드네, 요망한 루이.”
그 승낙에 남편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맺혔다 사라진 건 아마 내 착각이겠지.
“어렸을 적부터 한결같이 요망한 놈이다. 비비랑 율은 데려갈 거야?”
“율은 아직 너무 어리니까 비비만 데리고 가자.”
“……황자가 우리 비비를 보고 한눈에 반하면 어떡하고?”
“에이, 설마. 황자는 이제 겨우 다섯 살인걸.”
“…….”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부인.
태어나자마자 비비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헬리오스 놈도 있는데.
“아무래도 예감이 안 좋은데…….”
“그렇다고 비비가 평생 황궁에 출입하지 않게 할 수는 없잖아.”
“날카로운 악마의 직감이 경고를 보내고 있는데…….”
아가레스가 답지 않게 꿍얼꿍얼 푸념을 늘어놓았지만, 부인께서는 안타깝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셨다.
***
제국 내 권력 다툼과는 거리가 멀지만, 헛기침 한 번에 판도를 뒤엎을 수 있는 가문.
루페르트 일가 에스코트를 위해 황궁 앞까지 달려 나온 황실 기사단은 흡사 황족을 모시듯 고개를 조아렸다.
이분들은 제국의 공작이기에 앞서 마계의 주인이기도 했고, 나아가 자신을 모시듯 모시라는 황제 폐하의 지엄한 어명이 있기도 했으니까.
오와 열을 맞춰 선 이들 중 나이 지긋한 기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앞으로 나섰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공작부인.”
“내가 경을 알던가?”
“아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공작부인께서 어릴 적 황궁을 방문하셨을 때 제가 이 마차를 몰았었지요.”
“……아! 내가 난간에 머리 꼈던 날?”
“허허, 예, 그렇습니다.”
“그게 아마 내가 딱 비비안 나이 때였을 텐데.”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비비안이 엄마의 옷자락을 톡톡 잡아당겼다.
“엄마. 머리 꼈어? 난간?”
“응, 아니? 안 꼈어, 엄마.”
“방금 꼈다고 했는데. 어디 꼈어? 나도 낄래!”
“어어…… 엄마 아니고 아빠가 꼈어. 아빠가. 엄마는 어릴 때도 아주 위엄 있고 얌전했거든. 어디 난간에 끼고 그런 거 절대 안 했지.”
어린 시절 세탁에 아가레스와 황실 기사단 모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국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딸에게 사기를 치시네요?
그러나 이벨리아가 위협적인 시선으로 한번 훑자 모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공작부인께서는 공녀님이실 적에 아주 위엄이 넘치셨지. 얌전하셨고.
황실 기사들이 어색하게 표정을 숨기며 정중히 마차를 가리켰다.
“자, 오르시지요. 오늘도 제가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우리도 마차 있는데!”
“황궁 내에서는 귀족 사가의 마차를 탈 수 없단다, 비비.”
여유롭게 나아가는 지붕 없는 마차 위.
비비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헤- 입을 벌렸다.
아이의 꾸밈없는 반응을 본 기사들의 눈에 호의가 가득 깃들었다.
“집이 아주 많아!”
“모두 용도가 다른 건물들이랍니다. 이따 황자 전하와 함께 둘러보시지요.”
“저거는 뭐야? 왕사탕?”
“허헛, 공작부인께서도 어릴 적에 꼭 같은 것을 물어보셨었는데.”
“……내가 그랬어?”
“예, 그때 제가 드시면 속 ‘아야’ 하신다고 말씀드렸었지요.”
위엄이나 얌전하고는 거리가 먼 노기사의 회상에 민망해진 이벨리아가 딸에게 말했다.
“비비. 그거 먹으면 속 아야한대.”
“사탕 아니야?”
“마법 통신구야. 멀리 있는 사람하고 얘기를 나눌 수 있지.”
“이샤트 이모랑도?”
“그럼. 우리 집에도 많으니까 이따 비비 잔뜩 보여줄게.”
“응!”
궁금증을 해결한 비비안은 어린아이답게 금방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엄마, 저건 뭐야?”
“저건 황궁에서만 볼 수 있는 사슴이야. 아주 귀엽다, 그렇지?”
“응! 엄마, 저건 뭐야?”
“저건 스프링클러야. 풀에 저절로 물을 주는 장치란다.”
“응! 엄마, 저건 뭐야?”
“저건…….”
저건 저거라고 칭하면 안 되는 거긴 한데.
“이 제국 황제야.”
“황제 뒤에는 폐하를 꼭 붙여야 해. 그럼 황제 폐하 뒤에 있는 건 누구야?”
“우리 비비 예의 바르네. 뒤에는 황제 폐하의 아들이지.”
“친구야?”
“비비보다는 한 살 어리지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러자 비비안의 표정이 갑자기 돌변했다.
호기심 어린 표정에서 상당히 업신여기는 표정으로.
“아가구나!”
여섯 살에게 다섯 살은 까마득한 아가였다.
이윽고 마차가 황제궁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모처럼 옥체를 이끌고 마중을 나와 있던 루드비히가 토라진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셨나, 정 없는 내 친우들이.”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비밀기지에서는 종종 봤잖아!”
흥. 작게 콧방귀를 뀐 루드비히가 시선을 내렸다. 저 아래, 친애하는 벗과 똑같은 눈동자로 초롱초롱 올려다보는 아이가 보인다.
일순 어릴 적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 루드비히의 입매가 부드러이 풀렸다.
“비비안 루페르트. 많이 컸구나.”
“안녕하세요, 폐하. 저를 아세요?”
“알다마다. 내 가장 소중한 벗의 아이인 것을.”
아주 어릴 적에 봤던 것이라, 아무래도 비비안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비비안이 저 멀리 선 아이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쟤는 폐하의 아들인가요?”
쟤. 황자를 칭하기에는 다소 건방진 호칭이었으나 루드비히는 개의치 않았다.
이 작은 아가씨가 마음만 먹는다면 루페르트 공녀가 아닌 마계의 황녀 지위를 내세울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단다. 똑똑하구나, 비비.”
“엄마가 가르쳐 줬는데, 안 가르쳐 줬어도 알았을 거예요. 폐하랑 머리 색이 똑같거든요.”
“나를 많이 닮았지. 인사는 조금 이따 나누고 우선 들어갈까?”
고개를 끄덕이고 황제 폐하의 뒤를 따르며, 비비안은 다시 한번 고개 돌려 자기 또래 사내아이를 흘끔 바라봤다.
달을 쪼개 발라둔 것 같은 은발이 태양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그 탓에 비비안의 눈이 자연히 찌푸려졌다.
‘예쁘다. 머리 한 번 만져보게 해달라고 하면 허락해 줄까?’
그러나 반사적으로 찡그려진 표정을 자신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생각했는지, 사내아이 역시 인상을 마주 찌푸렸다.
자신의 눈이 먼저 찌푸려졌다는 것을 모르는 비비안에게 사내아이의 언짢은 표정은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비안이 입을 벙긋했다.
- 뭐.
그러자 황제 폐하의 아들도 입을 벙긋한다.
- 뭐.
아이의 찬란한 은발. 그 아래 빛나는 붉은 눈을 빤히 바라보던 비비안이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뭐야, 예뻐해 주려고 했더니!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다섯 살이 어디 버릇없이 여섯 살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