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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의 꽃밭에는 그들이 산다-320화 (320/323)

##  320화: 외전. 루페르트 가문의 둘째

“으아아악! 이 괴물 같은 자식!”

“칭찬 고맙다.”

“욕이다! 내가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모처럼 낑깡 농장까지 만들어가면서 얻은 자리라고!”

“모처럼 만든 농장이라면 농장 일에 전념하는 게 어때.”

“끄아아악!”

경박한 소리를 지르며 팔짝팔짝 피하는 쪽은 구시온이었고.

“돌아가라. 농장으로.”

안쓰러운 낑깡 농장 농장주의 뒷덜미를 잡아 기어코 바닥에 던지는 쪽은 보통 악마들의 반 토막도 안 되는 작은 악마였다.

권위를 상징하듯 높은 곳에 자리한 왕좌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벨리아가 살짝 고개 돌려 속삭였다.

“내 생각보다 더 강한걸.”

그러자 아가레스가 바짝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답했다.

“나한테는 어림도 없어.”

“당연히 토끼만은 못하지. 애초에 너는 신격이잖아. 신격하고 이제 막 태어난 응애 악마가 같은 급이면 그게 더 문제 아닐까?”

부인이 자신의 대단함을 짚어주자 단순한 악마의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속이 훤히 보이는 반응이 사랑스러워 이벨리아가 작게 웃었다.

“그래서 저 악마는 어느 정도야? 훨씬 강한 토끼라면 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마르바스의 아래. 바르바토스와는 비슷한 정도.”

“그러면 나중에는 마르바스보다 강해질 수도 있어?”

“그럴 거야. 악마들도 경험에 따른 성장은 무시 못 하니까.”

그렇단 말이지…….

이벨리아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 비비 호위로 적격이네.”

“……사내놈인데.”

“어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스읍.”

“…….”

국서의 의견이 왕에 의해 묵살당하는 사이. 순위 결정전은 오래지 않아 결착이 났다.

이변은 없었다.

승자는 아직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조금 전에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응애 악마.

알현실 구석에 처박혀 신음하는 구시온을 일별한 응애 악마는 아주 자연스럽게, 마치 제 자리를 찾아가듯, 타박타박 걸어 비비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벨리아의 눈썹이 살짝 위로 향했다.

나보다 비비안에게 먼저 예를 갖춘다?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왕의 호위가 아니라 비비안의 호위가 되었으니, 왕의 명보다 비비안의 명을 우선으로 두겠다는 것.

손으로 가린 이벨리아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그렇지. 내 딸의 호위라면 응당 그래야지.

낑깡 농장 농장주를 묵사발 내고 기어코 원하는 자리를 거머쥔 악마가 진한 보랏빛 눈을 휘며 웃었다.

“제가 이겼어요, 전하.”

“…….”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승전보를 알렸으나, 비비 전하께서는 답 없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신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처럼 밝던 악마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왜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비비 전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 잔인했나?

맛있는 낑깡 농장 농장주를 핍박한 것이 마음에 안 드셨던 걸까?

“저…….”

뭐라고 변명이라도 주워 내뱉으려던 찰나.

“삐비.”

머리 위에서 삐약삐약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악마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예?”

“삐비.”

……아. 존함을 부르라는 뜻이신가.

“비비 전하.”

그제야 비비안이 방긋 웃었다. 그러면서 짧은 손가락으로 악마를 가리킨다.

“너는?”

“불릴 이름이 아직 없습니다.”

“…….”

“비비 전하께서 내려주세요.”

그러자 이벨리아의 소매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하던 비비안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악치?”

“…….”

“…….”

응애 악마가 침묵했다.

전하, 아무리 그래도 악치는 좀…….

아가레스도 시선을 돌렸다.

딸아, 아무리 그래도 악치는 너무…….

“비비. 그런 재앙의 작명법은 어디서 배웠어?”

“엄마.”

“응? 나? 얘가 엄마를 매도하네?”

“엄마.”

곰치, 상치, 돌치, 내가 다 들었는데. 비비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토라진 표정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악마가 손끝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악치…… 저는 좋습…….”

“좋긴 뭐가 좋아.”

이벨리아는 평생 악치 따위의 이름으로 살아갈 위기에 처한 응애 악마를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차라리 내가 지어줄게. 으음, 뭐가 좋을까…….”

재앙의 작명법 원조께서 고심하시자 아가레스를 비롯한 수하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작은 악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느리게 훑던 이벨리아는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입을 열었다.

“헬리오스. 어때?”

“웬일로 좋군.”

“……못된 토끼. 비비는?”

“헬리! 응! 헬리!”

“마음에 드는 모양이네. 그럼 당사자가 될 너는?”

“헬리오스…… 영광입니다.”

그렇게 수호목 아래에서 새로이 탄생한 악마의 이름은 헬리오스로 결정.

부인께서는 아실는지 모르겠다.

공교롭게도 그건, 이제는 시간을 덧입어 사라진 어느 신화 속 태양신의 이름과 같다는 것을.

딸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아가레스는 속으로 빌었다.

‘비비. 너는 태양이 되지 말거라.’

엄마처럼 밝은 태양이 되어 스스로 환히 불태우지 말고.

그저 태양의 곁에서 따뜻함만을 누리면서 살아가거라.

……부디.

***

이벨리아의 둘째 출산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

태어난 지 햇수로 3년, 정확히 2년 4개월이 된 비비안의 짧은 인생에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우리 비비는 오늘부터 당분간 방에서 혼자 잘까?”

“……호, 혼자? 왜, 왜?”

언제 어느 때 진통이 시작될지 알 수 없는 게 출산이라지 않는가.

엄마가 갑작스러운 진통에 시달리는 것을 보면 어린 비비안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한 처사였다.

개인 방이 있음에도 매일 함께 자던 딸을 잘 어르고 달래서 보냈으나, 출산의 고통을 이해하기엔 어린 비비안에게는 제법 서러운 일이었다.

토닥여주던 엄마와 아빠가 없는 어두운 방.

입술을 삐죽이며 이불을 꼭 끌어안던 비비안은 언뜻 들리는 소리에 작은 주먹을 쥐고 바락 외쳤다.

“누구야!”

그러자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헬리오스가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비비 전하.”

“소리가 있어!”

“……?”

“지금 이거!”

“날벌레 소리입니다.”

가공할 동체 시력으로 헬리오스가 날벌레를 잡아냄과 동시.

“으아아!”

“또 무슨 일이십니까.”

“저기 움직여!”

“제 그림자입니다.”

“…….”

“…….”

헬리오스는 민망하다는 듯 검은 머리칼 끝을 만지작거리는 비비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작은 황녀님께서는 어둠이 무서우신 듯하다.

“눈 꼭 감고 주무십시오.”

“무서워. 깜깜해. 눈 감으면 더 깜깜해.”

“제가 밖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유령은 헬리 눈에 안 보이고 들어와.”

“그럼 저쪽 벽에 딱 붙어서 지켜보겠습니다.”

“내가 코 잠들 때까지?”

“비비 전하께서 코 자고 일어나실 때까지요.”

“약속?”

“호위에게는 명령으로 족하십니다.”

“친구니까 약속.”

“……네, 약속으로 하시지요.”

“이불 뿌려줘.”

“예.”

작은 전하께 이불을 덮어드리고자 침대 가까이 다가갔는데, 팔을 위로 쭉 뻗어도 난간이 있는 침대 위에 닿기는 쉽지 않다.

“……잠시만요.”

얼른 자라면 좋을 텐데.

헬리오스는 의자 하나를 질질 끌고 와서 그 위에 올라가 비비안의 작은 몸 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냉큼 주무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비비 전하의 눈은 말똥말똥 빛났다. 잠들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처럼.

“잠이 안 오십니까?”

“방금 적을 겁주느라 안 졸려.”

상상 속의 적이었잖아요. 헬리오스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책 읽다가 잘래.”

“비비 전하께서는 아직 글을 못 읽으시는데요.”

“네가 읽어주면 돼.”

“…….”

“응? 읽어줘. 귀 쫑긋할게.”

“…….”

“헬리도 못 읽어?”

“……제가 비비 전하보다 늦게 태어났습니다.”

“헬리 말 잘하는데.”

“글은 따로 배워야 합니다.”

“에이.”

“…….”

왜 나는 키도 작고 글도 못 읽는 거야.

구시온을 두들겨 팰 정도로 강한 무력은 작은 비비 전하 앞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

헬리오스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손을 꼬물꼬물 움직였다.

그러자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비비안이 난간을 짚고 헬리오스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럼 헬리.”

“네, 비비 전하.”

“나쁜 거 하자. 엄마가 이놈- 하는 거.”

“나쁜…… 거요?”

대체 무슨 나쁜 짓이길래 이렇게 비장하십니까. 헬리오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비비안이 커다란 비밀을 얘기하는 것처럼 헬리오스의 귀에 속삭였다.

“쪼꼬 가득 먹으면서 장난감 가지고 놀자.”

“……아주 못된 짓인데요. 왕께서 아시면 크게 혼이 날 겁니다.”

“어른은 해도 돼.”

“비비 전하는 어른이십니까?”

“엄마랑 아빠랑 같이 안 자면 어른이라고 했어.”

“누가…….”

“내가!”

당당히 대답한 비비안은 몰래 침대 밑에 숨겨둔 초콜릿을 꺼낸 다음, 누를 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손에 쥐었다.

“일기다!”

“일탈이 적절하겠군요.”

“응, 그거!”

둘이 합쳐서 태어난 지 30개월.

“이거 맛있네요.”

“아주 소중한 거야. 이것도 먹어 봐.”

두 아이는 초콜릿과 과자를 한가득 물고 아가들 기준에서는 커다란 일탈을 즐겼다.

***

다음 날 아침.

우리 아기씨 잘 주무셨으려나 걱정하며 비비안을 깨우러 온 테사는 방 안에 위엄 있게 선 작은 헬리오스를 보며 기함했다.

“어머, 세상에!”

“좋은 아침, 테사.”

“헬리오스 님!”

“왜 그렇게 놀라?”

“혹시 어제 주무시기 전에 초콜릿을 드셨나요?”

“아니. 자기 전에 그런 걸 먹으면 이가 썩는다는 건 상식이야.”

“…….”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입가에 묻은 초콜릿이나 닦고 말씀하세요.”

“……!”

다급하게 입가를 닦는 작은 손. 테사가 포옥 한숨을 쉬며 물었다.

“설마 아기씨께서도 함께 드신 건 아니겠죠?”

“……아, 아니다?”

심상치 않은 대답에 테사가 비비안의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기씨.”

“우웅…… 테사? 좋은 아치임…….”

“어제 초콜릿을 드시고 주무셨나요?”

“…….”

테사가 어떻게 알았지.

하지만 겁낼 것 없다. 포장지는 모두 감쪽같이 숨겨두었으니까.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로 슬쩍 눈만 꺼내자, 테사의 뒤에서 헬리오스가 도리도리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치? 안 들켰지?

“안 먹었어. 쪼꼬.”

“정말 안 드셨어요?”

“응. 안 먹었어. 쪼꼬.”

“고개 좀 들어 보실까요?”

“자!”

당당하게 고개를 든 비비안의 입가에는 갈색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기씨!”

“응!”

눈을 세모꼴로 만든 비비안이 거울을 휙 들어 올렸다.

“……흐엑!”

***

비비안이 홀로 자기 시작하고 2주 뒤. 이벨리아의 산통이 시작되었다.

고집을 부려 기어코 분만실 앞으로 온 비비안은 안에서 들리는 엄마의 비명에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어, 엄마아아아…….”

본래 비비안이 울먹이면 달래는 것은 아빠의 몫이었으나, 문제는 지금 아가레스도 비비안과 다르지 않은 상태라는 것.

자제력을 잃고 일렁이는 아가레스의 기운에 창백해진 얼굴로, 헬리오스가 비비안을 달랬다.

“비비 전하. 왕께서는 괜찮으실 겁니다.”

“동생 미워. 엄마 힘들게 해…….”

“어제만 해도 동생이 태어나면 잘해줄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몰라, 헬리도 미워…….”

그러자 새 생명이 탄생하는 자리에 어김없이 와 있던 세드릭이 비비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헬리오스. 아이를 달래는 데는 소질이 없네.”

“좋은 생각이 있으십니까?”

“그럼.”

세드릭이 촉촉하게 젖은 비비안의 볼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비비. 비비도 저렇게 태어났단다.”

“……나, 나도?”

“응. 비비는 더 했지.”

“흐아아앙-!”

어라, 이게 아닌가?

세드릭이 어여쁜 조카 멘탈 부수기를 시전한 그때.

- 으아아아앙!

비비안이 태어났을 때보다 조금 더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가레스가 한달음에 분만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마찬가지로 몸을 뒤틀어 세드릭에게서 빠져나온 비비안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브!”

“엄마아!”

눈물까지 글썽이며 안으로 달려 들어온 부녀에게, 흰 천에 손을 닦던 테사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아기씨도 건강하시고요.”

아가레스는 곧장 침대 옆으로 가 이벨리아를 안았다가 입을 맞추었다가 어쩔 줄 모르며 난리를 피웠다.

부모님이 저런 분위기일 때는 감히 끼어들지 못한다. 비비안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생소한 아가 냄새에 코를 킁킁댔다.

그러자 테사가 무릎을 꿇고 비비안과 눈을 맞추었다.

“축하드립니다, 아기씨.”

“……동생?”

“예, 귀여운 남동생이 생기셨네요.”

테사가 옆에 서 있던 하녀에게서 아이를 받아 비비안에게 보여 주었다.

“…….”

비비안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 심정을 알 것 같아, 테사가 작게 속삭였다.

“참으로 어여쁘시지요?”

“……작아.”

엄마의 것처럼 반짝이는 금발. 단풍잎처럼 조그마한 손을 꼬옥 잡아보자 작게 뜨인 틈 사이로 보이는, 아빠를 똑 닮은 황금빛 눈.

……내 동생.

그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이벨리아가 딸에게 말했다.

“동생을 환영해주렴, 비비.”

“……환영?”

“이 세계에 오기까지, 길고 먼 여행을 했을지도 모르니까.”

맞아. 엄마가 그랬지. 뿌리를 내릴 세상을 만나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린다고.

비비안이 아가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안녕.”

답하는 것처럼 아기가 작게 옹알이를 했다.

“내 동생으로 와줘서 고마워.”

오는 데 힘들지는 않았어? 너무 멀지는 않았어?

“앞으로는 내가 잘 지켜줄게.”

검술을 더 열심히 배워야지.

이렇게 작은 아가라면 조금 더 큰 내가 멋지게 아껴줘야 하니까.

그러자 테사가 어린 아기씨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봤다.

“아마 도련님께서도 같은 마음이실 겁니다.”

“이렇게 작은데?”

“금방 훤칠하게 자라실 테니까요.”

“……그럴까?”

“그럼요.”

아기씨께서는 아직 모르시겠지만, 아르티나에는 특별한 피가 흐르고 있거든요.

여동생과 누나라면 껌뻑 죽는 유난스러운 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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